사진과 역사적 기억
진동선 지음 / 눈빛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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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역사가 아닙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35] 진동선 엮음, 《사진과 역사적 기억》(눈빛,2003)

 


 진동선 님이 엮은 《사진과 역사적 기억》(눈빛,2003)이라는 사진책 앞글에 적힌 “역사학자들은 사진이 현대사 자체라고 말을 한다. 현대사가 곧 사진의 역사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카메라의 냉정한 기록성 때문인지, 아니면 목격자로서, 해석자로서, 전달자로서 시대 앞에 섰던 사진가의 시선인지, 아니면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진’이라는 시간의 코드 때문인지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23쪽).” 같은 말은 마땅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진동선 님은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하고 끝에 붙였으니 “현대사가 곧 사진의 역사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라 했던 말을 뒤엎는다고 여길 수 있지만, 처음부터 이러한 말마디로 사진을 다루는 일조차 못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역사가 아니니까요. 사진은 역사가 될 수 없으니까요. 역사는 사진이 될 수 없고, 사진으로 역사를 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진에 기대어 역사를 살필 수 없어요.

 

 사진은 “바라보는 눈길”입니다. 사진은 “사람들마다 다 달리 살아가며 바라보는 눈길”입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1965년 부산에서 왼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살짝 찡그린 아저씨를 사진으로 담았대서 이 얼굴 사진이 1965년을 말하는 사진이나 역사가 되지 않습니다. 왼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살짝 찡그린 아저씨는 왜 이러한 모습 이러한 얼굴이었을까요. 배앓이라도 할까요, 졸음이 쏟아졌을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술 한 잔 걸치다가 이런 얼굴이 되었을까요.

 

 사진은 사람들마다 바라보는 눈길이기에, 이 눈길이 모든 사람 눈길을 보여준다 할 수 없을 뿐더러 ‘시대를 말한다’거나 ‘사회를 말한다’거나 ‘나라를 말한다’거나 ‘정치를 말한다’거나 ‘문화를 말한다’거나 ‘역사를 말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경모 님이 담은 사진에는 대나무창 들고 나란히 선 아가씨들이 나오지만, 어느 마을 어느 곳에서는 아가씨들한테 대나무창 들게 해서 군대 훈련 시켰다지만, 바로 이 마을 곁 어디에서는 아가씨들이 빨래를 하고 길쌈을 하며 밥을 지었겠지요. 사랑하는 님하고 만나 애틋하게 웃음을 나누며, 예쁜 아기한테 젖을 물렸을 테고,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었겠지요.

 

 그러나 물 긷고 물동이 이는 사진은 《사진과 역사적 기억》에 나오지 않습니다. 조셉 브라이텐바흐 님이 담은 사진에 나오는 1950∼70년대 한국땅 여자들 사진책 《Women of Asia》(the John day com,1968)에서는 빨래바구니를 이는 아주머니라든지 잠든 아이를 품에 안으며 풀빵 굽는 아주머니라든지 저잣거리에서 활짝 웃으며 푸성귀를 파는 아주머니라든지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진과 역사적 기억》이라는 사진책에는 밭에서 김매는 아줌마라든지 논에서 모내는 아저씨라든지 멧골짝에서 나무하는 아이라든지 갯벌에서 조개 캐는 할머니라든지 나타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사진은 무엇을 말할까요. 사진이 보여주는 모습은 무엇이 역사라 할 만한가요. “사진과 역사적 기억”이라는 이름은 누가 왜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붙이는 이름이 될까요.

 

 1970년대 서울 망원동에서 흙길을 누비는 아이들이 《사진과 역사적 기억》에 나타납니다. 오늘날 서울 망원동에는 논이 없습니다.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높다란 건물과 끝없는 빌라뿐입니다. 서울 망원동 옛날 판자집 사진은 역사가 될까요, 기억이 될까요, 삶이 될까요, 발자국이 될까요.

 

 조그마한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식구들 둘러앉아 책을 읽는 사진 하나 보이는 《사진과 역사적 기억》입니다. 오직 한 장, 이렇게 수수한 삶자리 살며시 보여주는 사진이 실렸기에, “역사적 기억”이라 하는 어마어마하게 무겁디무거운 이름이 서로 어울리지 않구나 하고 보여주지만, 한국전쟁통에도 사람들은 밥을 지어서 먹었으며, 아이를 낳아 기저귀를 빨았으며, 똥을 누고 별을 올려다보며 논물을 맞추었습니다. 그래, 서울 망원동 사진 가운데에는 바지랑대 받쳐 기저귀를 빨아 넌 사진이 하나 깃들어요. 그지없이 사랑스러우면서 아늑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진입니다. 그러면, 이 사진은, 하얀 기저귀 빨래가 바지랑대 빨래줄에서 나부끼는 이 사진은, 어떤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보여준다고 이름표를 붙여야 할까요.

 

 이름표를 붙일 때에는 사진은 사진이라는 구실을 잃습니다. 딱지를 붙이면 사진은 사진이라는 빛을 놓칩니다. 번들거리는 삶을 우쭐대는 사람들을 보여주거나 되살리는 일은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 찾아다니며 적바림하는 일은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적바림(기록)하는 몫이 사진에 있다지만, 적바림을 한대서 사진이 되지 않아요. 적바림을 한다면 그저 적바림, 곧 기록입니다. 기록을 사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와 똑같은 말이 되는데, 예술은 예술이지 사진이 아닙니다. 예술을 한다면서 사진기를 손에 든대서 사진찍기이지 않아요. 예술하기일 뿐입니다. 사진기를 들어 기록을 한다면 기록하기이지 사진찍기가 아니에요. 사진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교육이지 사진이 아니에요.

 

 기록을 하는 사람은 기록을 하려고 사진기를 빌립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예술을 하려고 사진기를 빌려요.

 

 기록을 하는 사진이기에 다큐사진이지 않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진이라서 패션사진이 아니에요. 모두들 잘못 짚습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지, 사진을 놓고 기록이라느니 예술이라느니, 또 문화라느니 역사라느니 하면서 엉뚱하게 옷을 입히면 사진빛과 사진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사진과 역사적 기억》이라는 사진책은 참 아름답습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사진책입니다. 이 작은 사진책 하나로 우리들 살아온 지난날 어느 한 자락을 예쁘게 돌아볼 수 있어 참말 아름답습니다.

 

 그러니까, 애먼 군말은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거추장스러운 이름표는 떼어야 합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누리고, 사진은 사진으로 즐겨야 합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바라보면서 사진은 사진결 그대로 찍을 때에 빛납니다. (4345.1.4.물.ㅎㄲㅅㄱ)


― 사진과 역사적 기억 (진동선 엮음,눈빛 펴냄,2003.7.9./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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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魂) - 김수남 사진굿
김수남 사진, 고운기.양진.백지순 글과 사진 정리 / 현암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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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삶을 걸쳐 사랑하기에 사진으로 찍는다
 [찾아 읽는 사진책 75] 김수남, 《魂, 김수남 사진굿》(현암사,2007)

 


 고등학생이던 때 《한국의 굿》(열화당)이라는 사진책 스무 가지를 처음 보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책이 있는 줄 이야기하지 않았고, 읽으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나 이제나 이 나라에서는 굿을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더러, 벌써 사라지고 없는 푸닥거리로 여길 뿐입니다.

 

 그무렵 인천에서는 황해도 굿을 해마다 벌이는 자리가 있었다고 떠오릅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든 동네에서든 굿구경을 간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한국 문화를 가르치든 한국 사회를 들려주든, 우리 겨레 굿이 무엇이고 어떻게 펼쳐지며 왜 하는가를 밝히거나 알려주는 일이란 없었습니다.

 

 1992∼1993년, 나한테는 고등학교 2∼3학년이던 때에 인천에 있는 일곱 군데 도서관을 요일에 맞추어 찾아가며 열람실을 뒤집니다. 《한국의 굿》이라는 책이 있나 헤아립니다. 스무 권을 다 갖춘 도서관은 아예 없고, 그나마 한두 권조차 없는 데마저 있습니다. 도서관에서는 이 책을 찾아서 읽지 못하는데, 부평에 있던 헌책방에서 《한국의 굿》을 대여섯 권쯤 만납니다. 나중에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에서도 여러 권 만납니다. 동인천에 있는 새책방 대한서림과 동인서관에서 이 책을 한 권이라도 보았던가 가물가물합니다. 부평에 있던 새책방 한겨레문고에는 이 책이 있었는지 갸웃갸웃 잘 모르겠습니다. 고등학생은 생각합니다. ‘도서관에 없고 새책방에서 찾을 수 없는 책은 헌책방에서 살펴야 하는구나.’

 

 대학생이 되어 인천을 떠나 서울로 갑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장 많이 들어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 가운데 굿을 알거나 보거나 생각하거나 들은 동무는 없습니다. 선배도 후배도 똑같습니다. 나는 내 고등학생 때 하나둘 그러모은 《한국의 굿》을 가방에 짊어지고 대학교로 가서 동무와 선후배한테 이 책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대학생쯤 된다면 한국 문화 한 가지쯤 옳게 알아야 하지 않느냐’ 하는 말을 붙이며 책을 빌려줍니다.

 

 책을 빌려준다기보다 읽으라고 밀어붙이는 셈이었구나 싶은데, 옳게 다 읽고 돌려준 사람은 드뭅니다. 사진만 스윽 넘기고는 뒤에 붙은 글은 읽지 않기 일쑤입니다.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 이가 많습니다. 나 혼자 멀디먼 전철길에 책을 되읽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철을 타고 자가용을 타며 비행기를 타는 오늘날 한국사람한테는 《한국의 굿》은 영문을 알 수 없고 뜻을 짚을 수 없는 머나먼 ‘미개 나라’ 이야기입니다. ‘문명 나라’ 사람으로서는 가끔 방송을 타는 다큐멘터리 흉내를 낸 모습을 들여다보면 되지, 굳이 책으로까지 읽으며 머리에 담을 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진쟁이 김수남 님이 흙으로 돌아간 다음 나온 사진책 《魂, 김수남 사진굿》(현암사,2007)을 읽습니다. 여러모로 마음을 많이 써서 엮은 책이로구나 싶지만, 글이나 사진이 좀처럼 환하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편집이 퍽 어수선합니다. 글도 사진도 한눈에 확 사로잡도록 엮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이래 가지고 한국 문화와 사회에는 거의 눈길을 안 두는 오늘날 사람들을 이 책에 어떻게 끌어들일까 싶어 걱정스럽습니다. 김수남 님이 찍은 사진을 보면 무당이 놀라운 춤사위를 벌이는 그림도 많으나, 애틋하게 눈물겨운 그림도 많습니다. 어여삐 빛나는 그림도 많으며, 눈부신 무지개 그림도 많아요. 김수남 님 사진책은 으레 겉그림이나 대표작으로 흑백사진만 내세우곤 하는데, 《魂, 김수남 사진굿》에도 실린 어여삐 빛나는 무지개빛 사진을 겉에 곱게 깔면서 보드랍고 따사로이 이야기를 펼치는 엮음새로 책을 냈으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김수남 님 사진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은 좀 덜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호감을 가진다는 것은 사진을 찍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13쪽).”고 말하는 김수남 님입니다. 김수남 님 스스로 좋아해서 사진을 찍고, 김수남 님한테 사진을 찍힌 이들 또한 스스로 좋아서 사진으로 찍힙니다.

 

 뭐 대단하다 싶은 이야기를 담은 사진이 아니에요. 한국 문화와 사회 가운데 한 가지를 붙잡아 담은 사진이에요. 한국 문화와 사회 가운데 김수남 님이 좋아하며 사랑할 만한 이야기 하나를 바라본 사진이에요.

 

 김수남 님은 한국 굿에서 외국 굿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1980년대에 굿 사진을 찍고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어찌할 수 없는 모습이었을 텐데요, 김수남 님이 사진으로 담는 한국 문화를 ‘굿’ 다음으로 ‘밥’이나 ‘밭’이나 ‘길’이나 ‘옷’으로 삼았다면, 아마 이때에는 밥굶기 딱 좋았으리라 봅니다. 요즈음도 한국 굿뿐 아니라 한국 밥과 한국 밭과 한국 길과 한국 옷을 사진으로 담으려 하는 누군가 있다면, 그야말로 밥굶기를 다짐하면서 사진길을 걷겠지요. 그래서 오늘날 사진쟁이 가운데 어느 누구도 여느 사람들 밥먹기와 밭일과 길(골목길·고샅길·논둑길·멧길·바닷길·들길)과 옷차림을 찬찬히 담아내지 않아요. 모두들 그럴듯한 그림이나 돈벌이 되는 사진으로만 흘러요.

 

 “피사체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다행히 내 카메라는 의식들을 안 하는 편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미리 가는 것이다. 한 지역에 뭔가가 있다고 하면 미리 간다(46쪽).”고 말하는 김수남 님입니다. 함께 어우러질 만큼 좋아하는 사람하고 부대끼며 사진을 찍는 사람은 ‘행사가 펼쳐진 때’에만 뚝딱 사진을 찍고 떠나지 않습니다. 일찌감치 찾아와서 노닥거립니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퍼질러 앉아서 노래하며 놉니다.

 

 혼인잔치 사진을 찍는 사람은 20분쯤 앞서부터 신부대기실을 찍고 신랑신부 행진과 주례 같은 모습을 찍겠지요. 그러나 짧은 행사를 마치고 밥을 먹을 즈음 장비를 챙겨 돌아갑니다. 혼인잔치 ‘행사’를 찍는 사진관 일꾼이 아닌, 혼인잔치 ‘잔칫날 좋은 일’을 기리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혼인잔치를 앞두고도 찾아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잔칫날에는 일찍부터 자리를 잡을 테며, 잔치가 다 끝나고 나서도 오래도록 머물며 서로 기뻐해 주겠지요.

 

 사진만 따로 있는 일은 없습니다. 삶과 함께 사진입니다. 사진만 동떨어져 작품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삶과 함께 얼크러지면서 사진이야기 일굽니다.

 

 “외국 작가는 돈 주고 데려오면서 왜 한국 작가들에게는 그저 개인의 희생만을 요구하는지 모르겠다(52∼53쪽).”고 말하는 김수남 님입니다. 전국에 있는 문화재단이라든지 문화체육관광부라든지 공공기관이라든지 대학교라든지 기업이라든지, 바로 오늘 우리 삶을 아끼며 사랑하는 손길로 우리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 글·그림·만화·사진·춤·노래·연극·영화 들로 담아낼 수 있으며 즐겁습니다.

 

 볍씨 한 알에 싹을 틔워 싱그러이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운 다음 이삭이 패는 흐름을 곱게 사진으로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진으로 담는 사람을 뒷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수수한 여느 일을 사진으로 담는 눈물과 웃음이 얼마나 보람차면서 사랑스러운가를 느끼는 뒷배를 해야 합니다. 바느질과 뜨개질을 비롯해 재봉틀질을 하는 모든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어야 해요. 밥하기와 설거지를 사진으로 빚을 수 있어야 해요. 손빨래이든 기계빨래이든 사진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해요.

 

 “사진 하면 아트로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지만, 사실은 기록성이 사진의 본질 아니겠습니까. 나는 사진이 예술뿐 아니라 역사라든가 사회 가운데에 무언가를 남겨야 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를 실현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104쪽).”고 말하는 김수남 님입니다. 사진기로 예술을 하는 사람은 ‘사진기로 적바림(기록)’하면서 예술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니 무어니 하기 앞서 예술작품으로 선보이는 사진작품은 ‘적바림하는 사진’이어야 해요. 적바림하지 않고서는 예술도 문화도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적바림하지 않을 때에는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적바림하는 대목’만 뽑아내어 예술작품으로 빚는다 하면, 그야말로 예술일 뿐 사진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연필이나 붓을 놀려 그림을 그리면 그림이라 하지 글이라 하지 않아요. 글자를 그리더라도 그림이 되지 이야기 담긴 글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기로 무언가를 찍었대서 모두 사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연필로 만화를 그리며 풍선에 말을 적었어도 그저 만화이지 글이라 하지 않아요. 오늘날 숱한 만듦사진은 예술 테두리에 넣어야지, 만듦사진을 사진으로 다룰 수 없어요.

 

 “20년 전의 사진을 들고 간 나에게 그리 오래 자신을 찍은 사진을 소중히 생각해 줘서 고맙고 또 고맙다고 눈물을 흘린다(201쪽).”고 말하는 이야기를 곱씹습니다. “먼 훗날 자신들의 문화를 얘기해야 할 때 나의 사진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말을 현지 지식인들로부터 들을 때마다 나는 슬픔을 느낀다. 우리들의 옛 모습을 서양사람들이 찍은 것이 많아서만이 아니다. 자신들의 문화를 사랑하고 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가슴, 남의 것이 훌륭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그 가슴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277쪽).”고 말하는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안타깝다 할 수 있고 슬프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김수남 님은 사진으로 담았는걸요. 나라밖 누군가는 김수남 님이 애써 사진으로 찍어 주어 고마운걸요. 우리도 이 나라로 찾아온 누군가 찍어 준 사진이 있어 고마워요.

 

 어떤 외국사람은 한국 삶자락 담은 사진을 비싼값에 팔 테지만, 퍽 많은 외국사람은 돈 한 푼 안 받고 당신이 찍은 사진을 모두 선물합니다.

 

 외국사람이 바라보는 한국 모습이라 해서 ‘한국 모습이 아니’지 않아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바라보는 한국 모습이라 해서 ‘한국 모습을 옳고 바르며 참답고 착하게 담았’다고 할 수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사진을 찍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사랑하는 사람이 글을 쓰며, 사랑하는 사람이 그림을 그려요.

 

 굿을 사랑할 수 있던 사람이 굿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흙일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흙일꾼 한삶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패션모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패션사진을 빚겠지요.

 

 다만, 요사이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한동안 붙잡는 ‘사진 찍힐 대상’으로만 바라보면서 지나가고 마는 사람이 퍽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한 번 사랑하고 끝날’ 이음고리가 아닌데, 온삶을 걸쳐 고이 만남끈을 잇지 않곤 해요. 새로운 소재나 새로운 주제는 없어도 돼요. 사진길을 걷는 사람한테는 오직 온마음 바쳐 사랑할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으면 넉넉하면서 따뜻해요. (4345.1.3.불.ㅎㄲㅅㄱ)


― 魂, 김수남 사진굿 (김수남 글·사진,고운기·양진·백지순 풀이글·정리,현암사 펴냄,2007.2.5./3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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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를 만들자 과학 그림동화 18
울리 쉬텔처 글 사진, 곽성화 옮김 / 비룡소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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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사랑스러운 집을 함께 짓자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9 : 울리 쉬텔처, 《이글루를 만들자》(비룡소,2003)

 


 아이들과 즐기는 사진책 《이글루를 만들자》(비룡소,2003)를 읽다가 문득 궁금합니다. 어, 이 사진책에 나오는 어른들은 쇠톱으로 얼음을 잘라 얼음집을 만드네. 온통 얼음나라요 눈나라인 곳에서 쇠톱을 언제부터 썼지? 쇠톱이 없던 나날 이곳 사람들은 얼음집을 어떻게 지었지?

 

 예전에는 톱이 아닌 막칼이 있었을까. 기다랗고 잘 드는 칼이 있었을까. 아니면 돌을 잘 갈아서 눈을 자르거나 썰었을까. 굳이 옛날 사람들 이글루 짓기를 보여주어야 하지는 않다지만, 이 궁금함을 풀 만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구나.

 

 아마 남녘땅에서는 눈을 잘 썰어 눈벽돌을 만든 다음 차근차근 그러모아 눈집을 짓는 일을 꿈꿀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깊디깊은 멧골이라면 눈이 꽤 펑펑 쏟아지기도 하지만, 눈벽돌을 할 만큼 오래도록 단단히 눈이 쌓이지는 않을 테니까요.

 

 추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보금자리를 헤아리도록 돕는 사진책입니다. 우리처럼 흙을 쉬 얻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시멘트 얻기도 만만하지 않을 추운 나라에서 살림집을 어떻게 꾸리는가를 알려주는 사진책이에요. 눈집 짓기는 그림으로 곱게 그려서 보여줄 만하지만, 이렇게 사진으로 또렷하게 보여주는 일도 좋습니다. 그림일 때에는 결이 고울 테지만, 사진일 때에는 ‘참 춥’고, ‘참 눈 덮은 나라’이며, ‘참 만만하지 않으나 이렇게 눈집을 지을밖에 없’네 하고 느낄 수 있어요.

 

 그나저나, 아이들 읽는 사진책인 《이글루를 만들자》는 책이름이 “이글루를 만들자”로군요. 이 나라 아이들 누구도 눈집을 지을 만하지 않습니다. 눈사람이라도 굴릴 만할까요? ‘과학 그림동화’로 내놓은 책이라 한다면, “만들자”라는 말마디보다 “눈짓 짓기”나 “이글루 짓기”처럼 수수하게 붙이는 말마디가 한결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은 오직 ‘지식’만 보여주니까요.

 

 문득 또 한 가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사진으로 알뜰히 보여주는 어린이책 《이글루를 만들자》인데, 이 사진책 내놓은 출판사에서 “흙집 짓기”라든지 “풀집 짓기” 같은 어린이 사진책을 함께 내놓았을까요. 앞으로 이러한 사진책을 내놓을 생각을 할까요. 그예 지식으로 바라보는 사진책이 아니라, 아이들이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라는 틀을 넘어, 나중에 어른이 되면서 스스로 제 보금자리를 짓는 꿈을 꾸는 길잡이가 되게끔, ‘어린이가 읽으며 배우는 나무집 짓기’라든지 ‘어린이가 어른이랑 함께 하는 흙집 짓기’ 같은 사진책을 예쁘게 보여준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더 돋보이는 사진이 아니어도 됩니다. 더 볼 만한 사진이 아니어도 됩니다. 땀흘리는 사람들 이야기를 실으면 됩니다. 이 나라 아이들이 제 밥·옷·집을 옳게 들여다보면서 슬기로이 깨닫도록 이끌면 됩니다. 아이들이 저희 두 손과 두 발을 써서 삶을 짓는 아름다운 꿈을 꾸도록 도우면 됩니다. (4345.1.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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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에 찰칵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유키 마사코 글, 서인주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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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앞서 마음에 담는 사진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10 : 이와사키 치히로·유키 마사코, 《마음속에 찰칵》(학산문화사,2002)

 


 이와사키 치히로 님이 ‘글에 맞춰 그린’ 그림이 아닌, 당신 스스로 좋아서 그린 그림을 살피면서, ‘그림에 맞춰 글을 넣은’ 그림책 《마음속에 찰칵》(학산문화사,2002)을 읽습니다. 안타깝다면, 2002년에 나온 책이지만 일찌감치 판이 끊어졌기에 헌책방에서 다리품을 팔아야 어렵사리 만날 수 있어요. 나도 이 그림책은 한 해 넘게 다리품을 판 끝에 드디어 한 권 만났습니다.

 

 《마음속에 찰칵》은 그림책입니다.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이녁 그림을 봄이랑 여름이랑 가을이랑 겨울에 맞추어 곱게 나눈 다음, 철 따라 어떠한 빛깔을 사랑하면서 사진찍기 놀이를 즐길까’ 하는 이야기를 붙인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이니까, 이 그림책을 읽는 아이들로서는 사진책을 본다고 할 수 없다 할는지 몰라요. 그런데, 《마음속에 찰칵》은 사진찍기 놀이를 하는 그림책이에요. 살가이 담은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아하, 이렇게 사진을 찍는구나.’ 하고 느껴요. ‘오호, 이러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갈무리하는구나.’ 하고 깨달아요.

 

 이를테면, 꽃내음 물씬 누리는 봄날, “새로운 친구도 생기고 ……. 오늘을 기념하며 찰칵. 아주 좋아하는 꽃도, 찍는 김에 찰칵(5∼6쪽).” 하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림책 한쪽에는 네모낳거나 동그랗게 구멍이 뚫립니다. 구멍에 따라 ‘사진기로 들여다보듯’ 그림을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종이 한 장을 넘기면 구멍은 앞쪽 그림을 네모낳거나 동그란 구멍에 맞추어 바라봅니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사진이 되’고 ‘저기에서는 저렇게 사진이 되’는 줄 배웁니다.

 

 이리하여, 가을날에는, “저 아이의 옷은 단풍색. 마음속에 찰칵. 저 아이를 찰칵. 다가가서 찰칵. 크게 크게 찰칵. 달님도 가까이 있네요(15∼16쪽).” 하는 이야기가 이어져요. 가을날 단풍빛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내 눈에 아름답다고 보이는 모습뿐 아니라, 아름답구나 싶은 이야기를 나란히 담아요.

 

 무언가를 기리면서 사진에 담을 때에는 어느 날 누군가하고 어울리던 ‘모습’뿐 아니라 누군가하고 어울리던 ‘이야기’를 담는답니다. ‘이야, 예전에는 이와 같은 모습이었지.’ 하고 떠올리도록 이끄는 사진이 아니에요. ‘이야,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지.’ 하고 떠올리도록 이끄는 사진이에요.

 

 사진은 이야기입니다. 사진을 꾸준히 찍어서 사진첩으로 엮으면, 이 사진첩은 이야기꾸러미입니다.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는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사진첩을 넘길 때에는 이야기꾸러미를 넘기는 셈이에요.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사진을 찍을 때에는 ‘아이가 예뻐 보이는 모습’을 담지 않아요. ‘아이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아요. 그래서 이 아이가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누리고 부대꼈어.’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밭이 되는 사진입니다.

 

 옛날 옛적 모습, 이른바 추억을 담는 사진은 아닙니다. 사진은 추억을 만들려고 찍지 않아요. 사진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고루 사랑할 내 삶을 아끼고 싶어 빚는 이야기샘입니다. 이야기가 샘솟는 샘인 사진이에요. 지난 한때에 머물도록 하지 않습니다. 옛날을 자랑하거나 우쭐거리려고 찍는 사진이 아니에요. 오늘 하루 즐겁게 누렸다는 보람을 기쁜 웃음과 눈물로 곱게 빚는 사진이에요.

 

 사진은 빛으로 일구는 그림이자 글이요 이야기입니다. 사진은 빛무늬와 빛결을 예쁘게 사랑하면서 가꾸는 꿈이자 넋이요 무지개예요. 사진기 있어 종이에 남기는 사진을 얻겠지요. 사진기 없으면 가슴으로 오래오래 아로새기는 이야기씨앗을 마음밭에 심어요.

 

 나는 우리 집식구들 사진을 찍으면서 종이로도 이야기를 아로새기지만, 이에 앞서 내 눈을 거쳐 내 가슴에 우리 집식구들 삶을 곱게 새깁니다. 먼저 내 가슴에 새기는 집식구들 삶이 아니라면 사진기를 들지 못해요. 언제까지나 내 마음밭에 고이 스미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사진으로 옮기지 못해요.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에 새 옷을 입히며 ‘사진 이야기 그림책’을 일군 유키 마사코 님이 더없이 고맙습니다. 좋은 그림에 좋은 이야기를 붙일 줄 아는 분이라면, 좋은 삶을 좋은 사진으로 옮기면서 활짝 웃을 줄 알겠지요. 마음속에 찰착 하고 담을 수 있어서 종이로 아로새길 모습과 이야기를 사진기로 찰칵 하고 담습니다. (4344.12.29.쇠.ㅎㄲㅅㄱ)


― 마음속에 찰칵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유키 마사코 글,서인주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12.15./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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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
사토 토미오 지음, 임향자 옮김 / 포토스페이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사진을 꼭 잘 찍어야 하지 않아요
 [찾아 읽는 사진책 73] 사토 토미오, 《카메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포토스페이스,2010)

 


 나는 사진을 따로 배운 적 없습니다. 나는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찬찬히 배운 적 없습니다. 다섯 학기를 다니고는 그만둔 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 부전공 수업을 들으며 한 학기 동안 보도사진 강의를 들은 적 있습니다만, 이때에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이때에 배운 한 가지는 ‘사진으로 신문읽기’입니다.

 

 내 손으로 사진기를 처음 쥔 때는 국민학교 삼학년 무렵이었나 싶고, 그 뒤로 다시 쥔 때는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여행 때였지 싶으며, 그 다음으로는 1998년 봄입니다. 군대에서는 몰래 사서 들여온 1회용사진기로 ‘바보스러운 군대살이 기리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때로는 이 1회용사진기로 ‘중대 기념 사진’을 찍었어요. 이를테면 진급 행사 사진이라든지, 훈련을 나가기 앞서 찍는 기념 사진을 1회용사진기로 담았습니다.

 

 곰곰이 돌이킵니다. 내가 가진 ‘바보스러운 군대살이 기리는 사진’은 몇 없으나, 이 몇 안 되는 사진으로 그무렵 군대살이가 그야말로 얼마나 바보스러웠는가를 또렷이 되새길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중대장이든 대대장이든 연대장이든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면 안 됩니다. 연대에는 ‘사진병’이 한 사람 있으나, 공식 행사만 찍도록 허락할 뿐, 다른 때에는 사진기를 들고 다녀도 안 돼요. 더군다나 제가 구르던 군대는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원당리 비무장지대였어요. 땅그림으로 치면 남녘땅 아닌 북녘땅이라 할 만한 데에서 군대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군대살이를 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데에서 군대살이를 한 줄 아무도 모를 테야. 그야말로 사진 하나라도 남겨야 해.’ 하고 말하기 일쑤였어요. 다들 휴가 나가서 돌아오는 길에, 또는 외박이나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1회용사진기 하나 어떻게든 몰래 숨겨 들여오려고 했습니다.

 

 비무장지대 철책에서 여느 때 경계근무를 서면 영하 삼사십 도는 우스웠어요. 한겨울 혹한기훈련이라면서 뛸 때에는 외려 영하 이삼십 도밖에 안 되었어요. 왜냐하면, 훈련은 새벽부터 저녁까지만 뛰니까, 이때에는 이삼십 도이고, 경계근무는 한밤에 서니 삼사십 도를 밑돌았어요. 갓 스물을 넘은 사람들이, 때로는 겨우 열여덟 열아홉밖에 안 된 사람들이, 드센 바람과 추위와 땡볕에 시달린 나머지 벌써 주름이 지고 시커맸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굳이 사진으로 담으려고들 했어요. ‘전역해서 사회로 돌아가면 아무도 우리 말을 안 믿지 않겠니?’ 하면서, 나중에는 하사관과 소대장과 중대장까지 ‘발벗고 나서서(?)’ 1회용사진기를 몰래 들여와 훈련이나 이런저런 자리에서 ‘기리는 사진(기념이라는 말은 어쩐지 안 어울립니다. 참말 기리는 사진이라고 해야 어울립니다)’을 신나게, 그렇지만 대대장한테 안 걸리도록 몰래, 마음껏 찍곤 했습니다.

 

 사토 토미오 님이 쓴 《카메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포토스페이스,2010)를 읽고 나서, 어쩐지 군대에서 사진 찍히고 찍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때에도 사진을 찍은 셈이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는 기쁨, 피사체와 마주쳤을 때의 기쁨,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었을 때의 기쁨, 자신의 사진을 누군가로부터 칭찬받았을 때의 기쁨, 이 모든 것들이 뇌를 활성화시키는 ‘마음의 비타민’이 된다(23쪽).”는 말 때문은 아닙니다. 어쩌면,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참말로, 모진 군대에서 ‘기리는 사진’ 하나는 새까맣게 죽은 얼굴이던 열여덟 살부터 스물여섯 살 사이 군인들한테 ‘죽음터 같은 곳에서 버티는 힘’이 되었구나 싶어요.

 

 제 군대 적 사진을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백이면 백 한결같이 말합니다. “참 불쌍해 보인다.” 사진에 담긴 사람들은 참 어리고 젊습니다. 그러나 이 어리고 젊은 사람들 얼굴이, 모습이, 삶이, 그림자가 참 불쌍해 보인답니다.

 

 지구별 어느 곳에서는 고작 서너 살밖에 안 된 어린이가 모진 전쟁통에 시들거나 들볶이며 애늙은이 얼굴이 되기도 하겠지요. 한국땅에서는 군대로 끌려가는 사내들 얼굴이 참으로 들볶이고 시달리며 ‘젊은늙은이’ 얼굴이 되고 맙니다. 아무래도, 그때에 사진이라도 하나 있으니 억지스레 웃으면서 참거나 견디었겠지요.

 

 사토 토미오 님은 말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도 셔터만 누르기만 하면 누구나 사진은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은 소통의 도구이고, 피사체에 대한 공감이며 애정이다. 당신이 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것은 당신이 늘 바라보던 일상적인 시선에 의해서 드러난 풍경이다.어쩌면 꼬마는 항상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커다란 어른들에게 위압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진을 찍을 때뿐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아이들과 같은 시선으로 눈높이를 낮춰서 마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42∼43쪽).” 하고. 나는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1998년 봄부터 대학교는 그만두고 신문배달 일꾼으로 일하며 작게 살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집에서는 어떻게 들어간 대학교를 왜 이리 일찍 그만두려 하느냐 말렸고, 한 해만 더 다니기로 하면서 전공 수업은 안 듣고 신문방송학과 부전공 수업만 챙겨 들었습니다. 이러며 함께 들은 보도사진 강의에서 ‘사진으로 신문읽기’를 처음 배우는 동안 ‘서울 10대 중앙일간지’ 사진기자와 편집기자가 어떠한 눈길과 어떠한 몸짓과 어떠한 생각과 어떠한 삶으로 ‘똑같은 사건·사고 똑같은 사람 똑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다 다른 목소리와 느낌과 모습으로 자르거나 엮거나 만지작거리는가를 깨닫습니다.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는 배우지 못했으나, 이보다 큰 무언가를 배웠어요. 내가 들려주는 말은 ‘내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들려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착하게 말할 수 있으나, 나는 더없이 모질거나 못되게 말할 수 있어요. 나는 꾸밈없이 바라보며 느낄 수 있지만, 나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눈길이나 눈썰미로 겉훑기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따사롭거나 사랑스레 바라볼 수 있는 한편, 아주 차갑거나 매몰차게 등돌릴 수 있어요.

 

 이제 와 돌이키면,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란 어느 누구도 가르칠 수 없는지 모릅니다. 대학교에서든 고등학교에서든, 외국에서든 문화강좌에서든, 사진을 가르칠 수 없다 할 만한지 모릅니다. 가르치려 한다면, 또 배우려 한다면 ‘삶’을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사랑’을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사람’을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사진은 배우거나 가르치지 못합니다. 글과 그림과 춤과 노래와 연극과 영화 또한 배우거나 가르치지 못합니다. 배우거나 가르친다면, ‘사진을 읽는 삶’을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랑’을 배우거나 가르쳐요.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배우거나 가르칩니다. 어디에서 살아가고 어디에서 사랑하며 어디에 선 사람인가를 배우거나 가르쳐요. 그래서, 나는 군대에서 사진을 배운 셈입니다. 군대에서 1회용사진기로 ‘기리는 사진’을 찍히고 찍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사진을 배운 셈입니다. 군대를 용케 마치고 목숨을 건져 사회로 돌아온 뒤에는, 대학교에서 한 학기 보도사진 강의를 들으면서 ‘사진으로 삶읽기’를 배운 셈이에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피사체인 여성을 먼저 좋아하라는 것이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만, 카메라의 눈은 정직하다. 촬영자인 당신이 피사체에 대해서 관심도 애정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메마른 감정이 사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44쪽).” 같은 말을 찬찬히 되읽습니다. “느낀 그대로를 찍는다. 느낀 그대로 셔터를 누르면 그것이 최고의 표현이 된다. 일부의 고지식한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이 점을 오해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멋대로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얽매여 감각적인 촬영을 하지 못한다(77쪽).” 같은 말 또한 가만가만 곱새깁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내 삶과 발자국을 하나하나 되짚습니다. 나는 대학교에서든 중·고등학교나 국민학교에서든 사진찍기는커녕 글쓰기조차 배우지 못했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고, 가르칠 사람 또한 없었어요. 문예창작이라든가 사진수업을 받지 못하다 보니, 언제나 사진길을 스스로 찾고 글길 또한 스스로 파헤칩니다. 나는 내 삶에 따라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그래, 내가 얼마쯤 다닌 대학교라든지, 내가 겨우 목숨을 건지며 사회로 돌아온 군대라든지, 나와 함께 살림을 꾸리는 옆지기라든지, 옆지기와 사랑으로 빚은 두 아이라든지, 네 식구 살아가는 시골마을이라든지, 날마다 부대끼거나 스치거나 마주하는 이웃사람이라든지, 언제나 바라보는 밤하늘과 낮하늘과 들판과 멧자락이라든지, 이 모두가 나한테 ‘사진을 찍는 삶’과 ‘글을 쓰는 사랑’을 가르칩니다.

 

 그래요. 그렇군요. 사진을 꼭 잘 찍어야 하지 않아요. 삶을 잘 꾸려야지요. 사랑을 잘 해야지요. 나와 이 보금자리에서 예쁘게 살아가는 살붙이를 착하게 사랑해야지요. 우리 집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를 곱게 바라보아야지요. 논밭 푸성귀와 곡식을 아껴야지요. 까막까치와 멧새 들새를 상냥히 마주해야지요.

 

 차가운 겨울바람이 사진을 가르쳐 주는 스승입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빨래가 글을 가르쳐 주는 이슬떨이입니다. 아이들 목소리가 사진을 가르쳐 주는 길잡이입니다. 뜨개질하는 옆지기가 글을 가르쳐 주는 벗님입니다. 나는 사진을 잘 찍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사진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글을 좋아하고 싶습니다. (4344.12.27.불.ㅎㄲㅅㄱ)


― 카메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 (사토 토미오 글,임향자 옮김,포토스페이스 펴냄,2010.9.7./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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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12-2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책을 멋지게 소개해 주시네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피사체인 여성을 먼저 좋아하라는 것이다" - 이 말에 공감했던 경험이 있어요. 오래 전, 애 아빠가 둘째애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이 있는데, 아이가 참 귀엽고 사랑스럽게 찍힌 사진이었어요.
제가 그때 이렇게 평했답니다. - " 이 사진은 아이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결코 찍을 수 없는 사진이야." 라고ㅋㅋ

잘 읽고 갑니다. 첫 추천은 제가...

숲노래 2011-12-28 04:54   좋아요 0 | URL
글도 쓰는 사람 스스로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읽는 사람이 즐거울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린다고 느껴요.

저는 사랑을 담지 않은 `작품`은 좋아하지 않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