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결에 물든 미국말

 (102) 커브(curve) 1


이제 투쟁은 직선이 아니라 커브에 와 있다

《님 웨일즈/편집실 옮김-아리랑 2》(학민사,1986)


 커브에 와 있다

→ 모퉁이에 있다

→ 갈림길에 있다

→ 모퉁이에 섰다

→ 갈림길에 섰다

 …



  ‘직선(直線)’은 “곧은 줄”을 가리킵니다. ‘커브(curve)’는 “굽은 길”을 가리킬 테지요. 그러니까 여태까지는 싸움이 곧게 한길로 나아갔으나 이제는 한풀 꺾이거나 어느 한쪽으로 돌아가는 자리, 갈림길에 왔다는 소리입니다.


 이 길 끝에서 커브를 돌면 보인다

→ 이 길 끝에서 돌면 보인다

→ 이 길 끝에서 모퉁이를 돌면 보인다

 차가 커브를 도는 바람에

→ 차가 갑자기 도는 바람에

→ 차가 한쪽으로 도는 바람에


  보기글을 쓴 분은 한자말과 영어를 쓸 뿐, 한국말을 쓰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한자말로 ‘직진·좌회전·우회전’이나 ‘커브·유턴’ 같은 말을 씁니다. 한국말로 ‘곧게·왼쪽·오른쪽’이나 ‘꺾어서·돌아서’ 같은 말은 좀처럼 안 써요.


  “왼쪽으로 꺾으셔요”나 “오른쪽으로 돌으셔요”라 말하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가를 알기 어려울까요. ‘왼꺾기·오른꺾기’나 ‘왼돌기·오른돌기’ 같은 낱말을 새로 지어서 쓰기는 힘들까요. 4338.10.19.물/4347.10.15.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제 싸움은 곧은길이 아니라 굽은길에 섰다


‘투쟁(鬪爭)’은 ‘싸움’으로 손보고, ‘직선(直線)’은 ‘곧은길’로 손보며, “와 있다”는 “왔다”나 “있다”나 “섰다”로 손봅니다.



커브(curve)

1. 길이나 선 따위의 굽은 부분

   - 이 길 끝에서 커브를 돌면 보인다 / 차가 커브를 도는 바람에

2. 야구에서, 투수가 던진 공이 타자 가까이에 와서 변화하면서 갑자기 꺾이는 것


..


 얼결에 물든 미국말

 (690) 커브 2


기차가 둥그렇게 커브를 돌았어요. 엄마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어요

《파울마르/프란츠 비트캄프/유혜자 옮김-기차 할머니》(중앙출판사,2000) 36쪽


 둥그렇게 커브를 돌았어요

→ 둥그렇게 돌았어요

→ 둥그렇게 굽이를 돌았어요

→ 둥그렇게 굽이길을 돌았어요

 …



  한국말에 ‘굽이·굽이길’이 있습니다. 이 글월에서는 ‘굽이’나 ‘굽이길’로 다듬으면 됩니다. 한편, 이런저런 말 모두 안 쓰고 “기차가 둥그렇게 돌았어요”처럼 적어도 돼요. “기차가 둥그렇게 모퉁이를 돌았어요”처럼 적어도 됩니다. 자동차를 모는 분들은 으레 “저쪽에서 커브를 틀어” 하고 말하는데, 이때에도 “저쪽에 틀어”라든지 “저쪽에서 (왼쪽으로/오른쪽으로) 틀어” 하고 말하면 됩니다. 4347.10.15.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기차가 둥그렇게 돌았어요. 엄마가 더는 보이지 않았어요


“엄마의 모습이”는 “엄마 모습이”나 “엄마가”로 다듬습니다. “더 이상(以上)”은 “더”나 “더는”으로 손봅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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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 일기 76] 여기, 시골에서 놀아요

― 놀이터가 삶터가 될 때에



  자동차가 드물었을 적에,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아이들은 마음껏 뛰면서 놀았습니다. 자동차가 없었을 적에, 도시라는 곳은 따로 없이 서울도 똑같은 시골이었고, 이때에는 어디에서나 모든 아이들이 신나게 뛰면서 놀았습니다.


  자동차가 아주 많다 못해 넘치는 요즈음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아이들이 뛰놀기 어렵습니다. 시골은 도시와 대면 자동차가 없다 여길 만하지만, 경운기와 트랙터와 콤바인이 쉴새없이 지나다니고, 오토바이가 꽤 많습니다.


  얌전히 앉아서 놀 수 없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온몸을 개구지게 놀려야 튼튼하게 자랍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가야 할 아이들이 아니라, 온몸 구석구석 튼튼하게 자라면서 씩씩하고 아름다운 넋을 가꿀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집에서고 마당에서고 길에서고 언제나 뛰거나 달립니다. 그야말로 쉬지 않고 뛰거나 달립니다. 기운이 늘 넘치고, 기운이 다하도록 놀았으면 새로운 기운을 뽑아내어 놉니다.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어른들은 길에서 자동차를 치워 주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자동차를 끌고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을 섣불리 자동차에 태우지 말고, 두 다리로 걷거나 달리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어른들도 두 다리로 걷거나 달리기를 바랍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노는 고샅이나 골목에서 일거리를 찾고 하루를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까지 가야 하는 곳은 어른한테도 안 알맞은 일터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다녀야 여행이나 나들이가 아닙니다. 아이와 손을 잡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에서 즐거운 숨결과 노래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보금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숲을 찾지 말고, 우리 보금자리와 둘레가 아름다운 숲이 되도록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극장이나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하지 않습니다.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어야 합니다. 고속도로나 발전소를 새로 닦아야 하지 않습니다. 나무를 보듬어 숲을 돌보아야 합니다. 궁궐을 짓지 않고 전쟁무기를 만들지 않던 지난날에는 사람들 누구나 나무로 집을 짓고 땔감으로 삼았어도 나무가 모자랄 일이 없었고, 숲이 망가질 일이 없었습니다. 큰 건물을 세우고 고속도로와 발전소와 온갖 문화시설을 만드는 오늘날에는 기름만 뽑아서 쓰지만 나무가 아주 빠르게 사라지고 숲이 허물어집니다.


  우리가 두 다리로 딛고 선 어느 곳이나 시골이 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아이도 어른도 바로 오늘 이곳에서 놀고 일하며 쉴 수 있기를 꿈꿉니다. 놀이터가 삶터로 되고, 삶터가 일터인 나라를 모든 사람이 누리기를 꿈꿉니다. 4347.10.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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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그늘
손승현 지음 / 사월의눈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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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3일에 쓴 이 느낌글은, 사월의눈 출판사에서 '알라딘 유통'을 안 할 적에 썼다. 엊그제부터, 사월의눈 출판사에서 이 사진책을 알라딘에서 유통한다고 알린다. 그래서 부랴부랴 새로운 글로 띄운다. 이제 조금 더 널리 알려지면서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빈다~ (2014.10.15.)


..

 

사진잡지 <포토닷> 2014년 3월호가 나왔다. 어제 낮에 우리 집에 왔다. 정기구독자한테는 어제 왔으니, 이제 책방에도 배본이 되었을까. <포토닷> 이번 호에 실은 사진비평을 올린다. 사진책 <밝은 그늘>은 인터넷책방에도 여느 새책방에도 없기에 손승현 님 다른 책에 이 글을 붙인다. 이 사진책을 장만하고 싶은 분은 https://www.facebook.com/aprilsnowpress '사월의눈' 출판사 누리집으로 들어가서 여쭈면 된다.(2014.2.13.)

 

..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44

 


어느 자리에서 찍는 사진입니까
― 밝은 그늘
 손승현 사진
 사월의눈 펴냄, 2013.10.31.

 


  여러 사람이 어느 곳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들이나 골짜기나 바다나 숲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여러 사람은 나들이를 간 곳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는 입이 쩍 벌어집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눈에만 담을 수 없겠다고 여겨, 서로서로 사진기를 가방에서 꺼냅니다. 저마다 찰칵찰칵 찍습니다. 이때에,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낀 여러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요? 이들이 찍은 사진 가운데 ‘똑같은 사진’이 나올 수 있을까요?


  모델을 앞에 두고 사진작가 여럿이 둘러싸고는 사진을 찍습니다. 이때에 ‘똑같은 사진’이 나올 수 있을까요? 대통령이나 운동선수가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 모인 신문기자가 대통령이나 운동선수를 둘러싸고는 사진을 찍습니다. 이때에 ‘똑같은 사진’이 나올 수 있을까요?


  뜻밖이라 해야 할는지 모르겠으나,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으면,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똑같은 아이 하나를 둘러싸고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진을 찍을 적에도 노상 다른 사진이 태어나고, 이웃이나 친척이나 동무가 찾아와서 사진을 찍을 적에도 늘 다른 사진이 태어납니다.


  아름답구나 하고 느끼면서 찍는 사진은 늘 다른 사진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스럽네 하고 느끼면서 찍는 사진은 언제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드러납니다.

 

 


.. 몽골의 경제성장률이 17%, 작년이 12%, 올해도 15%인데 90% 이상이 모두 광산개발과 관련된 지표다. 몽골에 갈 때마다 울란바타르 풍경이 급속도로 바뀐다. 그 안에서 유목민의 삶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고, 파란 하늘이 보이는 곳마다 빌딩이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도시에 사람들이 몰린다. 몽골의 인구가 300만 정도다. 그런데 울란바타르 주민의 비율이 22% 정도였다가 지금은 40%가 넘어간다 … 유목마을에는 젊은이들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들 중 중학생 되는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 보면 “돈 많이 벌고 싶어요.”라고 한다. “도시 가서 택시 운전기사 아니면 광산 갈 거예요.”라고. 답이 딱 두 개다 ..  (70∼71쪽)


  이와 달리, 아주 똑같구나 싶은 사진이 태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찍은 사진이 아닌데, 참 똑같구나 싶은 사진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때에는 ‘표절’이나 ‘도용’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두 사람이나 여러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지 않았는데, 왜 참으로 똑같다 싶은 사진이 태어날까요? 이때에는 아름다움이나 사랑스러움을 마음속에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을 찍으려는 사진이나 사랑스러움을 나타내려는 사진이 아니라, 어떤 욕심이나 꿍꿍이를 품었기 때문에 ‘표절’이나 ‘도용’이라 할 만한 사진이 태어납니다.


  그림을 그린 고호 님은 밀레라는 분이 그린 그림을 수없이 따라서 그렸어요. 그런데, 고호 님이 그린 ‘밀레 그림’은 표절이나 도용이 아닙니다. 밀레라는 분이 그린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움을 기쁘게 맞아들여 사랑스럽게 붓질을 했기에, 고호 님이 그린 ‘밀레 그림’은 새로운 그림이 됩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해돋이나 해넘이를 찍는다 하더라도, 어느 사진은 ‘누군가 찍은 사진을 흉내낸 듯하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요. 어느 사진은 ‘이야, 아주 새로운 이야기가 흐르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은 기법이나 표현법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어느 자리에서 찍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제주섬 오름에서 사진을 찍은 김영갑 님을 떠올려 보셔요. 김영갑 님은 으레 똑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자리는 똑같지만 이야기는 언제나 달랐어요. 김영갑 님은 이녁이 찍은 사진을 선보이면서 ‘똑같은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밝혔어요. 같은 자리에 서도 언제나 다른 사진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고 밝혔습니다.

 

 


  아름다움을 바라보거나 느끼면서, 내 이웃한테 아름다움을 나누어 주고 싶어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사랑스러움을 깨닫거나 누리면서, 내 이웃한테 사랑스러움을 베풀고 싶어 사진을 찍는 사람은 늘 따사롭습니다.


  꼭 어느 곳에 가야 멋진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반드시 어느 나라로 찾아가야 훌륭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꼭 인도에 가야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네팔이나 부탄에 가야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나라를 애써 찾아가야 하지 않아요. 외딴 두멧시골까지 가야 다큐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몸매 잘 빠진 모델을 찾아야 패션사진이 빛나지 않아요. 사진을 찍으려면,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어서 나누려면, 스스로 마음을 살찌워야 합니다. 사진을 찍어서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활짝 웃고 싶으면, 스스로 마음을 사랑과 꿈과 빛으로 채워야 합니다.


.. 몽골의 밤하늘을 본 적이 있는가?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은하수를 보면 경이롭다 못해 한동안 멍해지곤 했다. 여기서 평화로움의 정적을 깨는 단 하나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다 … 내가 마을에 가서 “사진을 찍어 드립니다.”라고 했더니 나이드신 분들은 목욕을 하고 나왔다. 이를 닦고 와야 한다면서 가시는 분도 계시고. 응시 방식의 문제는 이렇게 사진 찍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점에 있는 것 같다. 사진을 평생 몇 번밖에 안 찍어 본 분들이다. 사진을 뽑아 드리니 가장 중요한 물건들을 놓아 두는 가족사진 옆에 놓더라. 액자에 넣어서 ..  (74, 76쪽)


  손승현 님이 몽골에서 만난 ‘지구별 이웃’과 얼크러진 삶을 들려주는 사진책 《밝은 그늘》(사월의눈,2013)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손승현 님은 몽골 시골자락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이 부풉니다. 그렇지만 몽골 시골자락을 벗어나 울란바타르라는 도시로 가면 가슴이 오그라듭니다. 드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미리내를 올려다보면서 손승현 님 스스로 미리내 마음이 되어, 미리내처럼 빛나는 이야기를 미리내와 같이 밝은 사진으로 갈무리합니다. 돈과 경제개발이 춤추는 도시 한복판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으로 갈무리합니다.

 

 

 

 


  몽골 시내 한켠에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작은 ‘지구별 이웃’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울 시내 한켠에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작은 ‘지구별 이웃’이 있어요. 부산 시내에도, 대구 시내에도, 인천 시내에도, 어디에나 작고 예쁜 지구별 이웃이 있습니다.


  작고 예쁜 지구별 이웃을 바라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작고 예쁜 지구별 이웃을 사귀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작고 예쁜 지구별 이웃이 주눅들도록 하는 사회 얼거리 때문에 마음이 아픈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이 마음앓이를 가슴으로 삭히면서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사진책 《밝은 그늘》에 나오는 아파트와 선글라스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몽골 사회는 몽골 바깥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까요. 몽골 정치인과 기자와 작가는 몽골을 어떤 빛으로 그리고 싶을까요. 한편, 오늘날 한국 사회는 한국 바깥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까요. 한국 정치인과 기자와 작가는 한국을 어떤 빛으로 그리고 싶을까요. 한국에서 사진가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빛과 그늘로 한국을 살며시 밝힐 만할까요.


.. 뉴욕에 있을 때 전세계에서 온 사진들을 보며 작가가 사는 지리적 환경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음을 느꼈다. 예술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관계를 맺고 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 … 몽골에 가서 본 것은 그들이 냉소적이고 비극적인 일들을 너무 많이 당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주 작은 희망을 이 사람들을 통해서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그런 것을 보는 따뜻한 마음의 스파이가 되려고 했다 ..  (84, 86쪽)

 


  겨울이 지나면서 봄이 찾아옵니다. 봄이 흐르면 여름이 찾아옵니다. 여름이 무르익다가 가을이 찾아옵니다. 가을이 저물면서 겨울이 찾아옵니다. 봄이 되어 들판에 푸른 빛이 살아나면 비로소 딸기풀에 하얗게 꽃망울 맺습니다. 딸기꽃이 지는 늦봄부터 딸기알이 빨갛게 익습니다. 예전에는 누구나 여름 문턱에 딸기맛을 보았는데, 이제는 누구나 철없이 딸기알을 사다가 먹습니다. 맨땅에서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머금으면서 풀벌레와 멧새와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고 자란 들딸기나 멧딸기를 먹으려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비닐집에 갇힌 채 기계소리를 듣고 난로 열기와 석유내음을 마신 철없는 딸기를 대형마트뿐 아니라 동네 구멍가게에서조차 손쉽게 사다가 먹는 오늘날 한국 사회입니다.


  딸기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으면, 어떤 딸기를 찍을까 궁금합니다. 딸기와 얽힌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까 궁금합니다. 딸기가 마신 바람이나, 딸기가 받은 햇살이나, 딸기가 머금은 빗물이나, 딸기가 들은 맹꽁이 노래나, 딸기가 지켜본 제비춤을 ‘딸기를 찍은 사진’에 살포시 담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능금밭에 섰대서 능금을 사진으로 잘 찍지 않습니다. 바닷가 모래밭에 섰기에 바닷가와 모래밭을 사진으로 잘 찍지 않습니다. 몽골에 간대서 누구나 《밝은 그늘》과 같은 사진책을 빚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어 서로 사귀는 이웃으로 지내면, 몽골에서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콜롬비아에서도 동티모르에서도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언제나 밝은 빛을 사진으로 찍어서 선보입니다. 마음을 열어 서로 사랑하는 동무로 지내면, 늘 웃음꽃과 이야기꽃이 흐드러진 무지개 그늘을 사진으로 찍어서 선물합니다. 마음이 움직여 삶이 되고, 마음을 사랑해 사진이 됩니다. 마음이 자라며 꿈이 되고, 마음을 보살펴 사진이 되어요. 4347.2.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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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편지 글쓰기



  우리 집 곁님한테 손편지가 온다. 나한테도 가끔 손편지가 온다. 나도 꾸준히 손편지를 쓴다. 손전화가 있고 누리편지가 있지만, 손편지를 쓸 때에는 느낌이 다르다. 다를밖에 없지. 편지를 쓰는 매무새가 다르니까.


  손으로 편지를 쓸 적에는 편지에 담을 줄거리도 생각하지만, 연필과 종이를 고르고, 봉투도 살핀다. 다만, 요즈음 나는 종이나 봉투는 이쁜 것을 안 찾고 집에 있는 대로 쓸 뿐이지만, 한 줄이라도 더 쓰고 싶은 마음이 들고, 뭔가 하나라도 넣고 싶은 마음이 든다.


  손편지에는 손길이 깃든다. 편지를 우체통에서 꺼내어 손에 쥐면, 편지를 보낸 니 손길이 파르르 옮는다. 편지를 받는 사람이 우체통에서 편지를 꺼낼 적에는, 편지를 띄운 사람도 ‘아하, 편지를 받았겠네’ 하고 느끼리라 본다. 마음으로 매듭을 지은 실이 이어졌을 테니까.


  요즈음은 손으로 편지를 쓰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손으로 쓰는 글에 ‘하고픈 말’을 담는 사람이 참으로 드물다. 이러다 보니, 이웃이나 동무한테 하고 싶은 말을 먼저 ‘마음으로 한 번 삭히거나 가다듬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편지란 무엇인가? 내 할 말만 외치면 되나? 메아리 아닌 산울림이 될 뜻으로 편지를 쓰나?


  ‘난 이렇게 생각하고 이대로 갈 터이니, 네가 뭐라 말하든 아랑곳하지 않겠어’ 하는 마음이라면 편지를 쓸 일이 없겠지. 아니, 손편지를 못 쓰리라. 요즈음 인터넷나라가 된 한국에서는 인터넷으로 댓글이나 덧글이나 안부글을 남기는 사람이 많은데, 막상 깊거나 넓게 생각하면서 이러한 글을 쓰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니, 웬만한 댓글이나 덧글이나 안부글은 ‘읽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 마음이 안 움직이는 댓글이나 덧글이나 안부글이 많다. 여느 때에 손으로 밥을 짓고, 손으로 편지를 쓰며, 손으로 풀포기를 쓰다듬는 사람이 가까스로 남긴 한 줄 댓글이라면 다르지만, 이러한 댓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요즈음 얼마나 있을까.


  꼭 손으로 써야 제맛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손으로 쓸 수 없는 글을 쓴다면, 입으로 들려줄 수 없는 말을 읊는 셈이라고 느낀다. 손으로 쓸 만한 글을 쓸 노릇이고, 입으로 들려줄 만한 말을 읊어야 서로 아름다우면서 즐거우리라 느낀다. 4347.10.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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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기놀이 4 - 걸음걸이 모두 뜀뛰기



  아이들은 날마다 선물을 베푼다. 나들이를 가는 걸음걸이 모두 뜀뛰기인 뒷모습도 언제나 선물이다. 그러면, 나는 아이들한테 차려서 먹이는 밥이 선물이 될까. 능금 한 알을 깎거나 무화과 한 알을 따서 내밀 적에도 선물이 될까. 자장자장 들려주는 노래와 놀면서 목청껏 부르는 노래가 선물이 될까. 아무렴, 모두 선물이 될 테지. 빙그레 짓는 웃음이 선물이 되고, 손을 맞잡고 천천히 들마실을 할 적에도 선물이 되겠지. 4347.10.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놀이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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