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려들기


 만화책 《유리 가면》을 읽는다. 그동안 숱한 사람들한테서 숱하게 이야기를 들었으나 딱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하던 작품이다. 아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다기보다 ‘연재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권수가 장난 아니도록 많다’는 말 때문에 섣불리 엄두를 못 냈다고 해야 옳다. 마침 올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 책잔치에 나들이를 갔다가 ‘헌책방골목 나들이를 하던 날’ 책방에 온 권이 들어와 얌전히 꽂힌 모습을 보고는 안 살 수 없어 ‘헌책 값으로도 그야말로 센 값을 치르고’ 장만했다.

 처음에는 아이 엄마가 읽고, 아이 엄마가 애장판으로 7권쯤 읽을 무렵 아이 아빠가 따라 읽는다. 한가위를 맞이해 음성 어버이 댁에 찾아뵈는 길에 《유리 가면》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는가 궁금하고 자꾸 떠오른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빨려든다. 1976년부터 그리는 작품이 사람을 이토록 빨아들일 수 있구나 하고 새삼 느낀다. 1976년부터 그리는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만화이든 글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 문화나 예술이라는 이름을 달고 온누리에 나오는 작품이라 할 때에는 《유리 가면》과 같이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겠다고 느낀다. 아니, 다시금 고쳐 생각한다면, 《유리 가면》은 《유리 가면》대로 아름다우며 멋스러운 깊이를 품어야 하고, 우리들이 내놓는 작품은 우리들이 내놓는 작품다운 아름다움과 멋을 품어야 할 테지.

 내가 쓰는 글과 내가 찍는 사진이란, 다른 누구보다 나 스스로 빨려들 글이어야 하고 나부터 빨아들일 사진이어야 한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한 권 두 권 새로운 책을 만나는 가운데 ‘온누리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이 있고, 내 둘레에는 이와 같이 멋스러운 삶이 있어 고맙다’고 노상 깨닫는다. 한 가지라도 아름다운 작품을 만날 수 있으니 고마운 나날이요, 하나라도 멋스러운 삶을 마주하며 눈물젓거나 웃음지을 수 있으니 즐거운 하루이다. (4343.9.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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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
수지 모건스턴.알리야 모건스턴 지음, 최윤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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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도 바보 엄마도 바보, 그런데 삶이 온통 바보
 [책읽기 삶읽기 2] 수지 모르겐스턴+알리야 모르겐스턴,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웅진지식하우스,1997)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를 읽다. 1997년에 처음 나온 책이 2010년에 새 옷을 입고 다시 나왔다. 나는 1997년 판으로 읽었다. 이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이는 프랑스 어린이책을 우리 말로 무척 많이 옮긴 분. 이분이 옮긴 어린이책에서도 번역이 썩 정갈하다거나 알맞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에서도 번역은 그리 내키지 않는다. 딸 말투와 어머니 말투를 잘 살렸다고 느끼지 못한다. 더욱이 어머니와 딸이 그때그때 쉴새없이 바뀌는 마음자리를 나타낸다거나 줄줄줄 늘어뜨리는 마음앓이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말투로 담아내지 못한다. 더 따스하면서 한결 부드러이 적바림하는 번역을 만나는 일이란 한낱 꿈일까.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를 처음 집을 때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이 책이름은 반편이일밖에 없다고 느낀다.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되지만, 엄마 또한 딸이었다. 책이름은 엄마가 바라보는 딸 모습이지, 딸이 바라보는 엄마 모습이 아니다. 새로 나온 이 책 겉에 붙은 띠종이에는 “울어 봤어? 엄마 때문에…”라는 말이 적혀 있고 “세상 모든 소녀들이 어른이 되기 위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울어 봤니? 딸 때문에.’라든지 ‘온누리 모든 어머니가 어버이가 되자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말은 붙지 않는다. 굳이 안 붙여도 될는지 모른다만, 딸을 낳은 어머니라는 이 땅 사람들은 처음 딸로 태어나 자라는 동안 오롯한 한 사람으로 크도록 옳고 바르며 참다이 삶을 배운 적이 거의 없음을 살펴야 한다. 어머니 된 사람이 딸 마음을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당신 딸이 당신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까닭은 딸한테도 당신한테도 아쉬움이 있을 텐데, 이보다 어머니 된 당신이 어린 나날부터 당신 어버이한테서 제대로 삶을 배우며 느긋하며 넉넉하고 따사롭게 살 수 있도록 너그러운 삶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슬프고 아픈 굴레를 당신 스스로 당신 딸아이한테 고스란히 물려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말은 “식구들과 얼굴 맞대고 얘기를 나눌 시간도 없다(22쪽).”, “딸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26쪽).”, “날 이해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31쪽).”, “나는 엄마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서러워서 운다(57쪽).” 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어머니이고 딸이고 이와 같이 막혀 있는 집안 삶을 풀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참 바쁘다. 무엇 때문인지 알 겨를이 없으나, 모두들 그지없이 바쁘다.

 “집이고 학교고 다 정해진 리듬에 의해서 돌아간다. 모든 게 의무적이다(41쪽).” 같은 딸아이 외침을 읽을 무렵에는 이 책을 굳이 끝까지 들출 까닭이 없다고 깨닫는다. 어쩌면 풀이법은 바로 이 대목에 나와 있으니까. 그래도 구태여 끝까지 책을 읽고는 이 책을 집어던진다. 어머니이든 딸이든 서로가 서로를 헤아리거나 살피거나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으면서 기껏 하는 말이란 “그래도 난 이 세상 딸들을 다 준다 해도 어떤 딸과도 내 딸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173쪽).”하고 “우리는 계속 말다툼을 해댈 것이며, 서로를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부딪칠 것이다(177쪽).” 같은 이야기이다. 책 한 권을 통틀어 서로가 서로를 마음읽기 한 적이 없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말을 맨 마지막에 ‘가르침(교훈)’처럼 집어넣는다. 사람들이 말하는 흔하디흔한 연속극하고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토록 흔하디흔하다는 연속극을 보는 사람이란 대단히 많다. 줄거리가 뻔하며 마무리 또한 뻔한 줄 안다지만 연속극을 보는 사람은 몹시 많으며, 뻔한 연속극을 보며 으레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을 터뜨린다.

 오늘날 도시사람들로서는 텔레비전 연속극이 ‘뻔하다’ 외고 또 외더라도 연속극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오늘날 도시 물질문명으로 가득해 버린 이 나라에서는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 같은 책이 널리 받아들여지며 읽힐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모두들 ‘참으로 바쁘게 살며 살붙이나 이웃이나 동무끼리 오붓하고 넉넉하게 이야기꽃 피우는 삶’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살붙이끼리 마음읽기를 하는 이야기꽃 한마당을 마련하지 못하는데 어떡하겠는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하거나 놀랍다 하는 영화나 책보다 살붙이나 이웃이나 동무끼리 주고받는 이야기꽃 한마당처럼 아름답거나 놀라울 수 없다. 제아무리 많은 돈과 높은 이름과 대단한 힘이라 할지라도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사랑과 믿음보다 반가울 수 없다. 그렇지만 도시에서 살거나 도시 둘레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은 돈을 더 많이 더욱 빨리 벌어야 한다. 자가용을 더 빨리 몰아야 하고 기차이든 버스이든 건널목 신호쯤이야 쉽게 어기며 훨씬 빨리 달려야 하고 산에도 굴을 내고 냇물에는 다리를 놓으며 마구마구 달려야 한다. 들꽃을 사랑하거나 들새를 아끼거나 들숲을 건사한다는 마음을 품을 틈이 없는 도시 터전이다.

 고3 딸아이가 시험성적이나 대학교에 목매달지 않고 딸아이 꿈을 소롯이 간직할 수 있다거나 어머니를 비롯해 아버지가 함께 회사일+성공+명성에 발목잡히지 않으며 ‘돈을 왜 벌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을 때에 바야흐로 말문이 열리며 마음문을 스스로 연다. 그예 슬픈 얼굴이 담긴 책을 슬픈 줄 모르며 읽는 사람들이 슬프다. (4343.9.21.불.ㅎㄲㅅㄱ)


―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 (수지 모르겐스턴+알리야 모르겐스턴 글,최윤정 옮김,웅진지식하우스 펴냄,1997.3.10./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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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표 다섯 장


 시골버스를 탈 때에 내는 표를 미리 스무 장 끊어 놓았다. 그런데 막상 스무 장을 끊은 뒤로 보름 동안 이 시골버스를 탈 일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읍내로 나갈 때에는 음성읍으로 가고, 면내로 갈 때에는 생극면으로 가는데, 생극면으로 갈 때에는 맞돈으로 1200원을 내고 음성읍으로 갈 때에는 표로 1050원짜리를 낸다.

 오늘 보름 만에 읍내로 다녀오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며 표를 끊고 헤아리니 아까 나오는 버스를 탈 때에 그만 표를 석 장을 넣었더라. 낱낱으로 세어 두 장을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손님이 간수하는 표’를 살피니 다섯 장이다.

 교통카드로 찍는다면 이런 일은 없겠지. 그런데 우리가 갖고 있는 교통카드로는 이곳 시골에서는 안 찍힌다. 아마 교통카드를 새로 받아야 비로소 시골버스에서도 찍히리라. 아니면 시골버스에서 찍히는 교통카드를 새로 만들든지.

 아이는 돌아오는 버스에서 곯아떨어졌고, 시골길을 걸어 들어오는 동안 잠에서 깨지 않는다. 이제 아이한테 기저귀를 채우고 엄마에 이어 아빠가 씻으면 오늘 하루는 즐겁게 마무리를 짓는다. 어느덧 모레면 한가위를 맞이하는구나. 올 한가위에는 지난주에 새로 나온 내 책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책을 들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인사를 하겠네. 아버지가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다치지 않으면 좋겠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 아님을 헤아려 주시리라 믿는다. (4343.9.2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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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투의 유혹 - 일본어가 우리말을 잡아먹었다고?
오경순 지음 / 이학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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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앞뒤로 살을 조금 붙인다. 예전 글대로만 놓아 두면,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분이 있겠다고 새삼 느낀다. 마음을 쏟아 댓글을 달아 주며 이야기를 걸어 오는 분들이 고맙다. (2010.10.31.) 


 스스로 번역투에 사로잡힌 슬픈 책
 [책읽기 삶읽기 1] 오경순, 《번역투의 유혹》(이학사,2010)



 일본 문학을 우리 말로 꾸준히 옮기는 오경순 님이 내놓은 책 《번역투의 유혹》을 읽다. 드디어 이런 말을 하는 번역쟁이 한 사람 태어났구나 생각하며 몹시 기쁘게 받아들어 읽다. 그러나 이 책은 여느 사람들이 읽도록 마음을 쏟아 쓴 글이 아니라 오경순 님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글을 조금 손질해서 묶었다. 처음 책을 쥐었다가 덮을 때까지 오직 한 군데에서만 밑줄을 그을 만한 대목을 보았다. 바로 머리말에 적은 “십여 년간 늘 번역을 가까이 하며 온몸으로 깨달은 사실 하나-역시 질 좋은 번역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보다는 한국어 실력으로 판가름 난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5∼6쪽).”는 대목.

 슬프다. 그렇지만 어쩌랴. 밑줄을 그은 이 한 줄조차 “십여 년 간”으로 띌 대목을 붙였고, “가까이하며”로 붙일 대목을 띄어 놓았는데. 자잘한 띄어쓰기조차 곰곰이 살피지 못하는 이야기로 어찌 ‘일본 번역투가 우리 말투에 얼마나 끔찍하게 스며들었는가’를 밝힐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오경순 님이나 출판사 일꾼으로서는 “십여 년간”이라 적바림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간’이라는 낱말이 1989년부터 뚱딴지처럼 ‘명사’에서 ‘접사’로 바뀐 까닭이나 흐름을 읽지 못한다면 이와 같이 적을밖에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제는 잘 살피지 않지만, 한글학회 국어사전에서는 ‘간’을 이름씨로 다룬다. 1989년까지 사람들이 쓰던 맞춤법은 바로 한글학회에서 마련한 맞춤법이다. ‘間’이라는 낱말은 ‘동안’을 한자로 옮겨서 쓰는 낱말일 뿐이다.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을 들여다보면 두 가지 ‘間’이 실리면서 “서울과 부산 간”이나 “부모와 자식 간”이나 “운동을 하든지 간에”는 띄어서 적도록 하고, “이틀간”과 “한 달간”은 붙여서 적도록 한다. 이때에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이 적바림한 풀이말을 읽으면, “‘동안’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라 되어 있다. 그러면 ‘동안’은 어떠한 낱말인가. 국립국어원은 ‘동안’을 ‘명사’로만 다루지, ‘접사’로 다루지 않는다. 이리하여 “3시간 동안”과 “사흘 동안”처럼 적도록 한다. 두 낱말은 뜻이 같은데 쓰임새는 다르고야 만다. 우리 말을 한결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흘 동안”이라 적는다면 띄어야 하고, 한자말을 조금 더 쓰고 싶다며 “사흘간”이라 적는다면 붙여야 한다면, 이런 맞춤법이 무슨 맞춤법이 될 수 있는가. 국어학자와 정부 국어기관 스스로 모순이 사로잡힌 모양새이다.

 생각해 보면, 정부에서는 이제 지난 1989년부터 스무 해에 걸쳐 모순에 사로잡혀 왔으나 ‘관례’처럼 쓰는 ‘間’ 같은 숱한 말마디를 바로잡을 마음이 없는지 모른다. 정부에서는 ‘間’을 접사로 나누어 다루면서 ‘그간’과 함께 ‘그동안’까지 한 낱말로 삼았다. 그러나 ‘-동안’을 따로 접사로 다루지는 않는다. 이런 모순은 ‘한국 말’은 띄도록 하고 ‘한국어’는 붙이도록 하는 데에서도 드러나고, ‘불란서어’는 붙이되 ‘프랑스 어’는 띄도록 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게다가 ‘불란서인’은 붙여야 하고 ‘프랑스 인’은 띄어야 한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 또한 띄어야 한다. 우리는 같은 말을 하면서도 얼토당토않다 싶도록 모순되는 말을 골치가 아프게 배워서 손이 아프도록 써야 한다. 이리하여, 오늘날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는 맞춤법이 다르다. 또 대학교하고도 맞춤법이 서로 다르며, 여느 회사와 언론기관 또한 맞춤법을 다르게 맞출 뿐 아니라, 출판사끼리도 맞춤법이 다른데, 어린이책을 만드는 출판사와 어른책을 만드는 출판사 사이에서도 다른 맞춤법을 쓰는 한편, 어린이책을 만드는 출판사 사이에서도, 또 어른책을 만드는 출판사 사이에서도 맞춤법이 갖가지이다. 바로 1989년부터 이렇게 어지럽고 어수선하게 뒤죽박죽이 되는 맞춤법을 쓰고 있다.

 《번역투의 유혹》을 들여다본다. 73쪽을 보면 김광해 교수 논문을 바탕으로 ‘우리 말 가운데 한자말이 50%가 넘는다’고 적바림하다가는, 223쪽에서는 아무런 바탕을 대지 않으며 “약 70%가 한자어이며 일본식 한자어는 15∼25%나 된다고 한다”고 적바림한다. 어떻게 50%에서 70%로 껑충 뛸 수 있지? 더구나, 우리 말 가운데 한자말이 50%입네 70%입네 하고 읊는 분들이 내놓는 통계와 자료는 무엇에 기대고 있지? 박사학위 논문쯤 된다면 이 나라 국어사전에 ‘안 실어야 하는데 억지로 실은 얄딱구리할 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나 담긴 국사학 한문’이 얼마나 되는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런 통계나 자료가 얼마나 알맞거나 올바른가를 깊이 따진 다음 숫자를 들이대야 하지 않는가.

 155쪽 번역 보기를 살피면, “불쥐의 가죽옷”으로 옮긴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불쥐의 가죽옷”이란 무엇인가. 이런 말이 말이 되는가. “불쥐 가죽으로 만든 옷”이라고 적어야 올바르다. “불쥐 가죽으로 만든 옷” 이야기는 만화책 《이누야샤》에도 나온다. 일본에서는 오랜 옛이야기로 퍼져 있다. 그런데 이런 옛이야기를 알거나 모르거나를 떠나, 토씨 ‘-의’를 잘못 썼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 《번역투의 유혹》이라는 책을 내며 오경순 님 스스로 번역투에 빠져 있으면 어떡하나.

 멀리 들여다볼 구석조차 없이 머리말부터 들여다보면, 6쪽에 “번역문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는 데 방해받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그 요인을 제거하고” 같은 글월이 있다. 이 자리에 쓴 토씨 ‘-의’는 얼마나 알맞을까. “번역글을 올바로 헤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걸림돌이 무엇인지를 살펴 이를 솎아내고”쯤으로 고쳐서 적어야 알맞을 텐데.

 68쪽을 보면 ‘가급적’과 ‘되도록’을 나란히 쓰고 있다. 보기글을 옮기자면, “일본어투 ‘-적’이 붙은 말은 가급적 줄여 써야 하며 일한 번역에서도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되도록 이해하기 쉬운”으로 나온다. ‘-적’을 줄여야 한다면서 냉큼 ‘가급적’을 쓰는 모습은 무엇인가. 게다가, 이 글월을 읽으면 ‘되도록’이라는 우리 말을 알맞게 쓰기도 한다. 스스로 앞뒤가 어긋난 채 글을 쓰는 오경순 님이라니. 그지없이 슬프고 가슴시리다. 이런 말잘못은 148쪽에도 나온다. “적절히 담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직역하면”이라는 글월인데, ‘직역(直譯)’이란 “그대로 옮김”을 뜻한다. “그대로 직역”이란 엉터리 겹말이다.

 191쪽을 보면 “원문의 ‘정신spirit’과 ‘의미sense’를 살리려고 노력했으며, ‘자연스럽고 편안한 표현easy form of expression’으로”라 적는다. 난데없이 붙이는 영어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 꾸밈말일까 궁금하다. ‘정신’과 ‘의미’라 적으면 그만이지 않을까. 조금 더 생각한다면, ‘넋’과 ‘뜻’이라 할 수 있고, ‘마음’과 ‘뜻’이라 해도 좋다.

 책 하나로 모든 이야기를 다 쏟아낼 수는 없다. 책 하나로 우리네 말삶과 글삶을 어지럽히는 실타래를 슬기롭게 풀어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스스로 번역투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살갑고 아름다운 번역밭을 일구고자 한다면, 글쓴이 오경순 님은 조금 더 많이 땀을 흘려야 하지 않으랴 싶다. 말다운 말을 한 번 더 살피고, 글다운 글을 다시금 곱씹으면서, 숱한 번역쟁이와 글쟁이가 빠져 있는 글감옥이나 글수렁을 깨달아 주며 살포시 건져내도록 도와야지 싶다.

 지식이 많다고 말을 더 잘하지 않는다. 재주가 좋다고 글을 더 잘 쓰지 않는다. 참답고 착하며 고운 마음을 갖추어야 말을 알뜰살뜰 풀어낸다.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사랑하며 믿는 매무새일 때에 비로소 말을 알차게 일군다. 지식인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털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라도 번역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4343.9.20.달.처음 씀/4343.10.31.해.고쳐씀.ㅎㄲㅅㄱ)



― 번역투의 유혹 (오경순 글,이학사 펴냄,2010.7.31./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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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10-09-23 19:5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관해 이미 쓴 글이 있으니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단, '십여 년간'에서 '간'은 의존명사(표준국어대사전 10번)가 아니라 접미사(표준국어대사전 16번)입니다. 따라서 붙여 쓰는 게 맞습니다. 맞는 말을 틀리다고 하면 곤란하죠. 참고로 '가슴시리다'는 국립국어원에서 한 단어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뭐, 자잘한 띄어쓰기 문제이지만요. 말머리에 '받아들어 읽다'는 오타라고 치고 넘어가겠습니다.

파란놀 2010-09-24 03:38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그런데 '간(間)'을 국립국어원에서 뚱딴지처럼 '접사'로 삼고 있었군요. 1989년에 정부가 맞춤법을 갑자기 바꾸기 앞서까지 '간(間)'은 틀림없이 이름씨(명사)였습니다. 정부에서 맞춤법을 님 말씀과 같이 바꾸었어도 한글학회에서는 '간'을 '접사' 아닌 '이름씨'로 여깁니다. 이를 놓고 학회와 연구원 사이에서 아직 실마리를 마련하지 않은 줄 압니다. (그러고 보면, 아직 실마리가 마련되지 않았기에 출판사마다 '간'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조금씩 다르겠군요. 1989년까지 쓰던 맞춤법이 옳다고 여기는 출판사는 이름씨로 여기며 띌 테고, 1989년부터 바뀐 맞춤법대로 배운 편집자라면 으레 붙이겠네요.)

'가슴시리다' 같은 낱말뿐 아니라 '신나다' 같은 낱말 또한 국어연구원에서는 한 낱말로 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낱말을 국어사전에 안 실렸다는 까닭으로 한 낱말로 삼지 않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어사전에 안 실린 '책쉼터'라든지 '책잔치'라든지 '책읽기'라든지 얼마든지 붙여서 씁니다.

'나들목'이라는 낱말은 제가 처음 공식 자리에서 쓴 뒤로 교통방송에서 받아들여 주어서 이제는 한 낱말이 되어 국어사전에도 실렸습니다. 우리 여느 삶에서 두루 쓰는 말 가운데 국어사전 올림말로 삼아야 하거나, 또는 올림말이 되지 않더라도 넉넉히 즐겨쓰는 낱말은 하나하나 우리 스스로 붙여서 쓰면서 쓰임새를 넓혀야 한다고 느낍니다.

'즐겨쓰다' 같은 낱말도 국어사전에는 안 실려 있는데, 님께서 쓰는 인터넷창을 보시면 '즐겨찾기'라는 항목이 있겠지요? 사람들이 이처럼 쓸모와 찾을모를 마련하여 쓰는 낱말이 우리 말과 글을 북돋웁니다.

덧붙여, 저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문제는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말을 다루는 삶'과 '글을 살피는 넋'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런 테두리에서 이번 오경순 님 책은 더없이 슬프고 딱합니다. 그동안 오경순 님 번역책을 꽤 많이 읽어 온 사람으로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몹시 가슴아팠습니다.

faai 2010-09-24 17:12   좋아요 0 | URL
저자야 저는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다른 부분은 맞는 말씀이고 제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 출판사 중에 국립국어원이 아니라 한글학회를 따르는 곳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 식견이 짧은 탓일지도 모르나, 솔직히 그런 출판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다수 출판사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거기에 가독성 문제 등으로 출판사 고유 원칙을 덧붙이죠. 말씀하신 대로 '신나다' 같은 단어는 붙여 쓰는 곳도 많습니다. 논란이 있는 단어죠. '좀더' '싶어하다' 등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책쉼터' 같은 단어야 명사+명사로 볼 수 있기에 논외로 합니다).

그러니 접사 '간'이 '뚱딴지'라는 주장은 과하다 싶습니다. 저 또한 말은 언중과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근 20여 년 동안 훨씬 많은 사람이 '간'을 구분해서 썼다면, 그것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렇게 바뀌게 된 배경 또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썼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유독 한글학회만 '간'을 의존명사로 고집해야 할 까닭이 있는지요.

만약 한글학회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치죠. 그래도 논란이 되는 단어를 어느 한 쪽 주장만을 근거로 틀렸다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자잘한 띄어쓰기'라든가 '뚱딴지'라고 표현할 사안은 아니죠.

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맞춤법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다고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파란놀 2010-09-24 18:07   좋아요 0 | URL
'간'이 뚱딴지같이 바뀐 맞춤법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쓴 댓글에서는 그와 같이 느끼도록 되어 있군요(다시 읽어 보니). 왜 뚱딴지라는 낱말을 썼느냐 하면, 정부에서 1989년에 맞춤법을 바꿀 때에 1930년대부터 지켜 오던 한글학회 맞춤법을 한글학회 일꾼이나 다른 학자하고는 깊이 생각과 문제와 현실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갑작스레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한글학회 국어사전에서 '간'은 '의존명사'가 아닌 '명사'입니다. 요즈음 퍽 많은 책에서는 '간'을 붙이지만, 띄는 곳 또한 제법 많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숫자나 푼수는 줄어들겠지요. 책 만든 경력이 오랜 곳에서는 '국립국어원 맞춤법'을 많이 '존중'하지만 '안 따르기'도 합니다.

작은따옴표를 붙여서 말씀드리는 까닭을 잘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써 온 '관례'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큰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989년에 바꾼 맞춤법은 그동안 예순 해 가까이 써 오던 '맞춤법을 관례와 버릇과 문화를 어기고 쓰라고 강요한' 노태우 독재정권 맞춤법이거든요. 게다가 1989년에 정부가 단독으로 바꾸어 억지로 쓰도록 한 맞춤법이 2010년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자주 바뀌었는지 곰곰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요즈음에도 해마다 몇 가지씩 갑작스레(그러니까 뚱딴지처럼) 바뀌는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꽤 많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기가 되는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말과 보기글도 해마다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종이로 찍은 국어사전은 돈이 많이 들어 못 바꾸지만, 인터넷 국어사전은 틈틈이 바꿉니다. 왜 정부 관계자 스스로 '20년 동안 바꾸어 쓰는 맞춤법을 20년 앞서인 1989년에 바꾼 그대로 이어가지 않고 자꾸자꾸 바꾸고' 있을까요?

'간'을 붙여서 쓰기로 한 1989년부터 2010년까지 사람들 말버릇이 아닌 글버릇에서는 붙여서 쓰고 있다지만, 이러한 붙여쓰기는 2011년에 갑자기 띄어서 쓰도록 바뀔 수 있어요. 이런 맞춤법이 바로 오늘날 우리 나라 맞춤법이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쩔 수 없이 우리 나라 현실에서는 '뚱딴지'라는 낱말을 쓸밖에 없습니다.

다른 많은 분들은 우리 말글 이야기를 놓고 댓글을 달 때에 참 '생각없고' '살피지 않는 엉터리 마음'으로 아무렇게나 헛말을 늘어놓습니다. faai 님께서는 곰곰이 살피고 마음을 기울여서 이야기를 해 주셔서, 저로서도 댓글 하나를 달면서 더 살피고 헤아리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모로 고맙습니다. 이렇게 댓글을 달아 주셨기 때문에, '간'이라는 낱말 하나를 둘러싸고 정부와 학회와 학자와 편집자들이 애먹어야 하는 안타까움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슬픔'을 한결 깊이 돌아볼 수 있네요.

요사이 너무 바빠서 다른 국어사전을 제대로 들여다보며 말씀드리지 못하는데, 다음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쯤 틈을 내어 1940년대 국어사전부터 하나하나 살피며 '간'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찾아서 갈무리를 해야겠네요.

faai 2010-09-25 00:25   좋아요 0 | URL
시간 들여 이렇게 거듭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된장 님 말씀은 대부분 수긍합니다. 당장 실무에서는 국립국어원을 따를밖에 없지만, 실제 쓰임새와 동떨어진 표현들을 비롯해 답답한 부분이 많거든요. 어쩌다 보니 책 내용과는 계속 대화가 멀어졌습니다. 된장 님 덕분에 한글학회라든가 노태우 정권 같은 몰랐던 사실도 배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앞으로 종종 들르겠습니다.

파란놀 2010-09-25 03:54   좋아요 0 | URL
엊저녁 곰곰이 생각해 보니, 1989년에 갑작스레 바뀌며 틈틈이 다시 고치는 정부 맞춤법에서, 지난날까지 띄어서 쓰던 '그동안-이동안-저동안'이 붙여서 쓰는 한 낱말이 되었습니다.

'간'이란 '동안'을 한자로 적은 낱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안'이 우리 말이요 '間'은 한자말입니다. 이때에 우리 말 '동안'은 토박이말이고, 한자말 '間'은 외국말이 됩니다. 우리 말과 한자말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찬찬히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어요. 제가 왜 '間'이라는 한자말을 외국말이라 가리키는지를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1989년까지 '간'이 '명사'였던 까닭은 우리 말 '동안'을 한자로 옮겨서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89년부터 '그동안'을 붙여서 쓰면서 '그간'이라는 낱말에서 '-間'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정부에서는 '-동안'이라는 접사를 새로 만들지 않았으며, '동안'을 명사 아닌 접사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間' 하나만 명사에서 접사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간'을 붙여서 쓰니 '몇 년간'이라는 글월에서도 붙여쓰기를 하며 접사로 다루어야 정부가 바꾼 맞춤법이 앞뒤가 맞게 되어 버렸구나 싶어요.

잘 아시겠지만, 초등학교 교과서 맞춤법에서는 '그 동안-이 동안-저 동안'처럼 띄어서 씁니다. 이는 1989년에 정부가 바꾼 맞춤법이 아닌 1930년대부터 한글학회에서 마련한 맞춤법 틀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이책에서는 '동안'하고 똑같은 뜻인 한자말 '間'은 명사인 셈입니다. 어린이책에서도 '그간'은 붙일 수 없어요. '그 간'이라고 띄어서 적어야 올바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을 띄거든요. '몇 해 동안'이나 '몇 년 동안'이지 '몇 해동안'이나 '몇 년동안'이 아니니까요.

정부 맞춤법을 1989년에 바꾸며 '몇 년간'처럼 적도록 했다면, 아주 마땅하게도 '몇 년동안'처럼 써야 앞뒤가 맞으며 올바릅니다. '동안'을 명사 아닌 접사로 바꾸어야 해요. 그러나 정부에서는 '동안'을 섣불리 함부로 접사로 바꾸지 못합니다. 아니, 바꿀 수 없을 테지요. 그런데 '동안'은 명사로 그대로 둘 뿐 아니라 건드리지 못하면서 '그동안-이동안-저동안'을 "사람들이 쓰기 좋도록 붙인다"는 편의성을 내세우는데, 편의성을 내세우면서 '-동안'이라는 접사 문제는 슬쩍 넘어갑니다.

이렇기 때문에 초등학교 교과서 맞춤법이 1989년부터 '뚱딴지처럼' 새삼스레 불거지고 맙니다. 정부 스스로 교과서(초등과 중등 교과서 맞춤법이 또 다릅니다)와 어른책 맞춤법이 다르고 마는 모순이 되어요.

고작 '間'이라는 낱말 하나라 할 테지만, 이런 속살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살피지 못한다면, 이번에 오경순 님이 내놓은 책은 한낱 겉훑기에 겉치레에다가 참말과 참글을 건드리지 못한 슬픈 책이 될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생각을 깊이 한다면, 제가 이렇게 구태여 길게 글을 늘여뜨리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보았습니다. 그러나 짧게 쓰면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으니 faai 님조차 제 글이 무슨 마음으로 쓴 글인가를 읽을 수 없지 않았겠느냐 싶기도 합니다.

다음주에 1940년대 국어사전부터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생각을 다시 갈무리한다면 '間'이라는 외국말인 한자말 하나를 둘러싸고 우리 삶을 담아내는 말과 글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가를 한결 또렷하게 돌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새삼 고맙습니다.
 
엠마
바바라 쿠니 그림, 웬디 케셀만 글, 강연숙 옮김 / 느림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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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 할머니 멋진 할머니 예쁜 할머니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1] 웬디 케셀만(글)+바바라 쿠니(그림), 《엠마》


 할머니는 할머니 그대로 곱습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그대로 멋있습니다. 할머니가 대학교수이거나 글을 쓴다고 해서 한결 곱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즐기거나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더욱 멋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한 해 두 해 더 살아가는 동안 내 삶을 내가 어떻게 사랑하며 껴안아야 할는지를 차근차근 깨닫고 배웁니다. 처음부터 모두 깨달을 수 없는 내 삶이며, 한꺼번에 통째로 배울 수 없는 내 나날입니다.

 어쩌면 나 스스로 내 삶을 꾸밈없이 받아들이는 가운데 할머니들 삶은 할머니들 삶대로 받아들일 수 있구나 싶습니다. 나 스스로 나라는 사람 삶이 대단하지 않음을 알아채면서 내가 쓰는 글과 내가 찍는 사진을 나부터 스스럼없이 좋아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할머니들이 저마다 다 달리 꾸리는 삶이 얼마나 고운가를 헤아릴 수 있구나 싶어요.

 도시 아파트를 마다 하고 시골집에서 지내며 허리가 구부정한 채 농사일을 잇는 할매와 할배를 떠올립니다. 이분들은 땅을 밟으며 땅을 만지는 일을 합니다. 굳이 이름날 일이 없고, 따로 이름날 일을 살피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을 밟으며 땅을 만지는 일은 당신 삶을 어여삐 가꾸어 줍니다. 도시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양로원에 나가 보거나 하는 일은 당신 삶을 어여삐 가꾸어 주지 않습니다.

 도시에는 아파트와 골목집이 있습니다. 아파트와 골목집 사이에는 빌라와 다세대주택이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할매와 할배는 꽃을 기르거나 키우기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파트가 당신들만 살아가는 터전일 때에는 신나게 꽃을 기르거나 키우겠지요. 아파트가 당신 딸이나 아들 집일 때에는 눈치를 살피거나 보겠지요. 골목집에서 살아가는 할매는, 또 빌라에서 살아가는 할배는, 당신 집이며 골목이며 온통 꽃밭과 텃밭으로 바꾸어 냅니다. 관청 공무원부터 개발업자와 사진작가에다가 당신 딸아들마저 당신들 꽃밭과 텃밭을 어여삐 바라보며 아리땁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들은 당신들 살림터를 꽃밭터로 일굽니다.

 도시에서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을 때마다 늘 고맙다고 느낍니다. 할매와 할배가 골목동네를 말끔하며 정갈한데다가 맑고 밝도록 사랑해 주고 있기에 늘 좋은 사진을 얻어요. 아니, 좋은 사진이라기보다는 할매 웃음과 할배 눈물이 그득 담은 삶자락 사진을 얻어요. 굳이 할매와 할배 얼굴과 손등을 사진으로 담지 않더라도 할매와 할배가 어떻게 지내는가를 꽃그릇 하나와 빨래 한 점에서 읽습니다.


.. 가족이 찾아오면 할머니는 행복했어요. 푸딩과 초콜릿 크림 파이를 굽고 집안 곳곳에 꽃도 꽂아 놓았지요. 할머니의 가족은 선물을 많이 가져왔지만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어요. 할머니는 혼자 지낼 때가 많았지요 … 엠마 할머니의 하나뿐인 친구는 주황색 고양이, 호박씨였어요. 할머니와 호박씨는 밖에 앉아서 함께 햇볕을 쬐었어요. 딱따구리가 나이 든 사과나무를 쪼는 소리도 들었고요 ..  (3, 5쪽)


 제 나이 스물여섯에 할매 삶을 오롯이 읽을 수 있었으리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내 나이 열여섯일 적에 할배 삶을 소롯이 들여다볼 수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철이 없던 때에는 철이 없는 대로 바라보고, 철이 좀 들었다 싶은 때에는 철이 좀 들었다 싶은 대로 할매와 할배 삶을 사랑하자고 다짐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내가 할매 삶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아낄 수 있자면 내 삶을 나부터 있는 그대로 보면서 아낄 수 있어야 하거든요.

 어제 저녁 무렵, 올해로 여든일곱 해를 살아가는 그림 할머님을 만납니다. 인천 화평동 한켠에 자리한 ‘평안 수채화의 집’에서 그림을 가르치며 하루하루 지내는 할머님은 어제 하루도 그림그리기를 조용히 즐기면서 마음속으로 꾸준하게 비손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고맙고, 이 좋은 사람들을 당신과 함께 그림그리기를 나누며 마음을 주고받도록 이끌어 주어 고마우며, 이 고요하고 정갈한 그림그리기에 당신 삶을 바칠 수 있어 고맙다고 비손을 올린다고 합니다.

 그림 할머님은 당신 그림을 내다 팔아서 ‘앞 못 보는’ 사람들 살림살이를 살짝 거드는 일을 한결같이 잇습니다. 그림을 가르치며 받는 돈으로 당신 살림살이를 요조모조 꾸립니다. 여든여섯일 때에도 그랬고 여든일곱일 때에도 그러한데, 여든여덟을 맞이하고 여든아홉이나 아흔을 맞이하여도 할머님 그림그리기는 이어지리라 봅니다. 어쩌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날까지 붓 한 자루를 당신 바른손에 살며시 쥐실 테지요.

 그림 할머님은 늘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또 그림 할머님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갖가지 이야기를 가만가만 듣습니다. 당신은 당신대로 살아온 나날을 조곤조곤 들려주고, 당신과 마주한 사람은 저절로 이야기샘이 솟아 내 이야기를 한 올 두 올 풀어냅니다.


.. 엠마 할머니는 소박한 것들을 좋아했어요. 눈이 현관 문턱까지 쌓이는 것을 바라보기 좋아했고요. 앉아서, 고향인 산 너머 작은 마을을 생각하기 좋아했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가족 모두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불쌍한 할머니, 이젠 정말 늙으셨어.” ..  (7쪽)


 그림 할머님하고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가만히 떠올리며, 오늘 있던 일을 편지로 적어 충주 산골집에서 아이랑 지내는 집식구한테 띄웁니다. 언제나 세 식구가 함께 움직였는데 어제오늘만큼은 아빠 혼자 서울에 볼일 보러 나오고 인천으로 골목마실 하러 움직입니다. 혼자 움직이니 한결 가뜬하다 할 만하지만, 이래저래 사람 만나고 술 한잔 마신다거나 자전거를 타기에 좋을는지 몰라도, 골목마실을 하며 마주하는 좋은 이웃 좋은 삶을 혼자만 눈과 가슴과 사진으로 담는 일은 적이 아쉽습니다. 한식구라면 좋은 일도 궂은 일도 함께할 노릇이잖아요. 이 얘기 저 얘기 스스럼없이 나누고, 이 놀이 저 놀이 나란히 즐길 노릇이에요.

 아이랑 함께 다니면 아이를 보느라 고단하다고들 말합니다. 그래요, 참 고단합니다. 마음을 쓰거나 몸을 쓸 일이 많으니 고단할밖에요. 그러나 아이랑 살아가며 마음과 몸을 쓸 곳이 많으니 마땅히 고단합니다. 고단함을 꺼릴 까닭이 없어요. 그예 받아들이며 즐길 고단함입니다. 마음이든 몸이든 고단할 하루하루인데, 이렇게 고단할 하루하루인 까닭에 하루하루에 뜻이 있습니다. 언제나 다른 새 하루로 찾아오고, 늘 새삼스러운 하루를 즐깁니다.

 아빠가 보는 곳을 아이가 보고, 엄마가 보는 자리를 아이가 봅니다. 이 땅 아이들이 씩씩하고 슬기로우며 튼튼한데다가 곱게 자라자면, 아이 아빠와 엄마 된 사람들이 노상 아이랑 함께 복닥이며 모든 일놀이를 나란히 즐겨야지 싶어요. 텔레비전을 보든 밥을 하든 걸레질을 하든 셈틀 앞에 앉든, 어버이 된 이는 ‘나만 누려야지’ 하는 생각이 아니라, ‘내 살붙이랑 같이 즐겨야지’ 하는 마음밭이어야지 싶어요.

 모든 삶을 아이하고 나누어야지 싶습니다. 어떤 이야기라도 아이랑 주고받아야지 싶습니다. 사랑을 담고 믿음을 보태야지 싶습니다. 아름답다 일컫는 삶이든 거룩하다 우러르는 삶이든 빛난다 여기는 삶이든, 바로 우리들 하루하루 수수하게 보내는 나날에 좋은 뜻과 고운 값이 있다고 느껴요.


.. 창가에 앉아서 기억나는 대로 고향 마을을 그렸어요. 엠마 할머니는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을 내려놓고 자기가 그린 그림을 걸었어요. 그리고 날마다 자기 그림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지요 ..  (13쪽)


 그림책 《엠마》를 들여다보면서 이런 느낌 저런 생각이 한결 짙으며 한껏 푸르게 자리잡습니다. 그림책 《엠마》에 나오는 그림 할매 엠마는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당신 삶을 한껏 빛내며 마무리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엠마 할매는 그림 할매 아닌 수수한 할매일 때에도 그지없이 어여뻤어요. 여느 할매인 엠마 할매는 고양이 호박씨하고 오랜 능금나무랑 벗삼으면서 날마다 웃음으로 보냈어요.

 다만, 엠마 할머니네 딸아들과 손자들은 이러한 웃음을 읽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너무 바빠요.

 참 바쁜 사람들인데요, 무엇 때문에 이리도 바빠야 하나요.

 돈을 버느라 바쁜가요. 어른들은 돈을 버느라 바쁘고, 아이들은 학교나 학원을 다니느라 바쁜가요. 그렇다면 궁금해요. 어른들은 왜 돈을 벌어야 하지요. 돈은 얼마나 벌어야 하지요. 번 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쓰지요.

 아이들은 학교나 학원을 왜 다니지요. 학교나 학원을 다녀서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내 어머니 삶을 고스란히 바라보면서 받아들일 줄 모른다면, 제아무리 돈을 많이 벌거나 크고 잘빠진 자가용을 몬다 한들 무슨 뜻이 있나 궁금해요. 내 할머니 삶을 꾸밈없이 마주하면서 맞아들일 줄 모른다면, 제아무리 학교 성적이 빼어나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멋진 학문을 이루었다 한들 무슨 값이 있나 궁금해요.


.. 할머니는 고향인 산 너머 마을을 그리고 또 그리고 자꾸자꾸 그렸어요 ..  (25쪽)


 엠마 할매는 그림 할매가 되었기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 세 식구가 틈틈이 찾아뵈며 인사드리는 인천 화평동 그림 할매는 여든일곱 나이에까지 붓을 붙잡고 있어서 멋있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그예 어여쁜 할매입니다. 모두모두 매우 고운 사람입니다.

 엠마 할매는 고운 할매이기에 당신 고향마을을 떠올리며 자꾸자꾸 그립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던 때에는 당신 살림집을 당신 손으로 예쁘게 꾸몄고, 그림을 그리는 때에는 당신한테 기쁘고 벅찬 지난날을 되새기며 그림 한 점 그립니다. 인천 화평동 그림 할매는 멋진 할매이기에 당신이 사랑하는 꽃을 그리고 또 그리며 자꾸 그립니다. 그토록 살림이 팍팍했어도 스물두 식구를 먹여살린 화평동 그림 할매는 그 작고 가녀린 몸뚱이로 온누리를 다부지게 붙안았습니다.

 저는 고작 세 식구 먹여살리는 살림을 꾸립니다. 스물두 식구를 먹여살리던 할머니와 견주면 참 손쉬워 보인다 할 만한 살림일는지 모르지만, 스물두 식구는 스물두 식구이고 세 식구는 세 식구예요. 저한테는 스물두 식구 살림이든 세 식구 살림이든 매한가지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고마우며 반갑습니다. 저마다 좋으며 즐겁습니다.

 그림책 《엠마》를 덮으며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어도 어여쁜 할매였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한결같이 어여쁜 할매인 엠마와 같은 분들은 우리 둘레 어디에서나 당신 삶을 아리땁게 일구며 살아가신다고. (4343.9.18.흙.ㅎㄲㅅㄱ)


― 엠마 (웬디 케셀만 글,바바라 쿠니 그림,강연숙 옮김,느림보 펴냄,2004.2.17./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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