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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투의 유혹 - 일본어가 우리말을 잡아먹었다고?
오경순 지음 / 이학사 / 2010년 7월
평점 :
글 앞뒤로 살을 조금 붙인다. 예전 글대로만 놓아 두면,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분이 있겠다고 새삼 느낀다. 마음을 쏟아 댓글을 달아 주며 이야기를 걸어 오는 분들이 고맙다. (2010.10.31.)
스스로 번역투에 사로잡힌 슬픈 책
[책읽기 삶읽기 1] 오경순, 《번역투의 유혹》(이학사,2010)
일본 문학을 우리 말로 꾸준히 옮기는 오경순 님이 내놓은 책 《번역투의 유혹》을 읽다. 드디어 이런 말을 하는 번역쟁이 한 사람 태어났구나 생각하며 몹시 기쁘게 받아들어 읽다. 그러나 이 책은 여느 사람들이 읽도록 마음을 쏟아 쓴 글이 아니라 오경순 님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글을 조금 손질해서 묶었다. 처음 책을 쥐었다가 덮을 때까지 오직 한 군데에서만 밑줄을 그을 만한 대목을 보았다. 바로 머리말에 적은 “십여 년간 늘 번역을 가까이 하며 온몸으로 깨달은 사실 하나-역시 질 좋은 번역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보다는 한국어 실력으로 판가름 난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5∼6쪽).”는 대목.
슬프다. 그렇지만 어쩌랴. 밑줄을 그은 이 한 줄조차 “십여 년 간”으로 띌 대목을 붙였고, “가까이하며”로 붙일 대목을 띄어 놓았는데. 자잘한 띄어쓰기조차 곰곰이 살피지 못하는 이야기로 어찌 ‘일본 번역투가 우리 말투에 얼마나 끔찍하게 스며들었는가’를 밝힐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오경순 님이나 출판사 일꾼으로서는 “십여 년간”이라 적바림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간’이라는 낱말이 1989년부터 뚱딴지처럼 ‘명사’에서 ‘접사’로 바뀐 까닭이나 흐름을 읽지 못한다면 이와 같이 적을밖에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제는 잘 살피지 않지만, 한글학회 국어사전에서는 ‘간’을 이름씨로 다룬다. 1989년까지 사람들이 쓰던 맞춤법은 바로 한글학회에서 마련한 맞춤법이다. ‘間’이라는 낱말은 ‘동안’을 한자로 옮겨서 쓰는 낱말일 뿐이다.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을 들여다보면 두 가지 ‘間’이 실리면서 “서울과 부산 간”이나 “부모와 자식 간”이나 “운동을 하든지 간에”는 띄어서 적도록 하고, “이틀간”과 “한 달간”은 붙여서 적도록 한다. 이때에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이 적바림한 풀이말을 읽으면, “‘동안’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라 되어 있다. 그러면 ‘동안’은 어떠한 낱말인가. 국립국어원은 ‘동안’을 ‘명사’로만 다루지, ‘접사’로 다루지 않는다. 이리하여 “3시간 동안”과 “사흘 동안”처럼 적도록 한다. 두 낱말은 뜻이 같은데 쓰임새는 다르고야 만다. 우리 말을 한결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흘 동안”이라 적는다면 띄어야 하고, 한자말을 조금 더 쓰고 싶다며 “사흘간”이라 적는다면 붙여야 한다면, 이런 맞춤법이 무슨 맞춤법이 될 수 있는가. 국어학자와 정부 국어기관 스스로 모순이 사로잡힌 모양새이다.
생각해 보면, 정부에서는 이제 지난 1989년부터 스무 해에 걸쳐 모순에 사로잡혀 왔으나 ‘관례’처럼 쓰는 ‘間’ 같은 숱한 말마디를 바로잡을 마음이 없는지 모른다. 정부에서는 ‘間’을 접사로 나누어 다루면서 ‘그간’과 함께 ‘그동안’까지 한 낱말로 삼았다. 그러나 ‘-동안’을 따로 접사로 다루지는 않는다. 이런 모순은 ‘한국 말’은 띄도록 하고 ‘한국어’는 붙이도록 하는 데에서도 드러나고, ‘불란서어’는 붙이되 ‘프랑스 어’는 띄도록 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게다가 ‘불란서인’은 붙여야 하고 ‘프랑스 인’은 띄어야 한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 또한 띄어야 한다. 우리는 같은 말을 하면서도 얼토당토않다 싶도록 모순되는 말을 골치가 아프게 배워서 손이 아프도록 써야 한다. 이리하여, 오늘날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는 맞춤법이 다르다. 또 대학교하고도 맞춤법이 서로 다르며, 여느 회사와 언론기관 또한 맞춤법을 다르게 맞출 뿐 아니라, 출판사끼리도 맞춤법이 다른데, 어린이책을 만드는 출판사와 어른책을 만드는 출판사 사이에서도 다른 맞춤법을 쓰는 한편, 어린이책을 만드는 출판사 사이에서도, 또 어른책을 만드는 출판사 사이에서도 맞춤법이 갖가지이다. 바로 1989년부터 이렇게 어지럽고 어수선하게 뒤죽박죽이 되는 맞춤법을 쓰고 있다.
《번역투의 유혹》을 들여다본다. 73쪽을 보면 김광해 교수 논문을 바탕으로 ‘우리 말 가운데 한자말이 50%가 넘는다’고 적바림하다가는, 223쪽에서는 아무런 바탕을 대지 않으며 “약 70%가 한자어이며 일본식 한자어는 15∼25%나 된다고 한다”고 적바림한다. 어떻게 50%에서 70%로 껑충 뛸 수 있지? 더구나, 우리 말 가운데 한자말이 50%입네 70%입네 하고 읊는 분들이 내놓는 통계와 자료는 무엇에 기대고 있지? 박사학위 논문쯤 된다면 이 나라 국어사전에 ‘안 실어야 하는데 억지로 실은 얄딱구리할 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나 담긴 국사학 한문’이 얼마나 되는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런 통계나 자료가 얼마나 알맞거나 올바른가를 깊이 따진 다음 숫자를 들이대야 하지 않는가.
155쪽 번역 보기를 살피면, “불쥐의 가죽옷”으로 옮긴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불쥐의 가죽옷”이란 무엇인가. 이런 말이 말이 되는가. “불쥐 가죽으로 만든 옷”이라고 적어야 올바르다. “불쥐 가죽으로 만든 옷” 이야기는 만화책 《이누야샤》에도 나온다. 일본에서는 오랜 옛이야기로 퍼져 있다. 그런데 이런 옛이야기를 알거나 모르거나를 떠나, 토씨 ‘-의’를 잘못 썼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 《번역투의 유혹》이라는 책을 내며 오경순 님 스스로 번역투에 빠져 있으면 어떡하나.
멀리 들여다볼 구석조차 없이 머리말부터 들여다보면, 6쪽에 “번역문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는 데 방해받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그 요인을 제거하고” 같은 글월이 있다. 이 자리에 쓴 토씨 ‘-의’는 얼마나 알맞을까. “번역글을 올바로 헤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걸림돌이 무엇인지를 살펴 이를 솎아내고”쯤으로 고쳐서 적어야 알맞을 텐데.
68쪽을 보면 ‘가급적’과 ‘되도록’을 나란히 쓰고 있다. 보기글을 옮기자면, “일본어투 ‘-적’이 붙은 말은 가급적 줄여 써야 하며 일한 번역에서도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되도록 이해하기 쉬운”으로 나온다. ‘-적’을 줄여야 한다면서 냉큼 ‘가급적’을 쓰는 모습은 무엇인가. 게다가, 이 글월을 읽으면 ‘되도록’이라는 우리 말을 알맞게 쓰기도 한다. 스스로 앞뒤가 어긋난 채 글을 쓰는 오경순 님이라니. 그지없이 슬프고 가슴시리다. 이런 말잘못은 148쪽에도 나온다. “적절히 담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직역하면”이라는 글월인데, ‘직역(直譯)’이란 “그대로 옮김”을 뜻한다. “그대로 직역”이란 엉터리 겹말이다.
191쪽을 보면 “원문의 ‘정신spirit’과 ‘의미sense’를 살리려고 노력했으며, ‘자연스럽고 편안한 표현easy form of expression’으로”라 적는다. 난데없이 붙이는 영어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 꾸밈말일까 궁금하다. ‘정신’과 ‘의미’라 적으면 그만이지 않을까. 조금 더 생각한다면, ‘넋’과 ‘뜻’이라 할 수 있고, ‘마음’과 ‘뜻’이라 해도 좋다.
책 하나로 모든 이야기를 다 쏟아낼 수는 없다. 책 하나로 우리네 말삶과 글삶을 어지럽히는 실타래를 슬기롭게 풀어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스스로 번역투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살갑고 아름다운 번역밭을 일구고자 한다면, 글쓴이 오경순 님은 조금 더 많이 땀을 흘려야 하지 않으랴 싶다. 말다운 말을 한 번 더 살피고, 글다운 글을 다시금 곱씹으면서, 숱한 번역쟁이와 글쟁이가 빠져 있는 글감옥이나 글수렁을 깨달아 주며 살포시 건져내도록 도와야지 싶다.
지식이 많다고 말을 더 잘하지 않는다. 재주가 좋다고 글을 더 잘 쓰지 않는다. 참답고 착하며 고운 마음을 갖추어야 말을 알뜰살뜰 풀어낸다.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사랑하며 믿는 매무새일 때에 비로소 말을 알차게 일군다. 지식인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털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라도 번역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4343.9.20.달.처음 씀/4343.10.31.해.고쳐씀.ㅎㄲㅅㄱ)
― 번역투의 유혹 (오경순 글,이학사 펴냄,2010.7.31./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