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지만 파랗디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올여름 파랗던 하늘을 떠올린다. 아침에 마당에 보니 물이 얼었다. 물이 어는 이런 날 빨래는 한낮에 널어야 한다. 겨울날 골목빨래를 올해에는 사진으로 얼마나 담을 수 있으려나.

- 2010.8.22. 인천 동구 금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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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집 평화 발자국 3
이승현 글 그림 / 보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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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에는 돈 좋아하는 사람만 남으라 하자
 [만화책 즐겨읽기 7] 이승현, 《파란집》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던 때에도 신문을 읽지 않았습니다. 이때에도 우리 살림집에는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1995년에 고향 인천을 떠나 서울로 들어와 홀살이를 처음 할 때에는 신문사 지국에서 먹고잤습니다. 날마다 신문을 돌리며 날마다 열세 가지 아침신문(스포츠신문 두 가지랑 경제신문 하나까지)을 읽었습니다. 신문배달 일꾼으로 지내던 삶을 마감하고 책마을 일꾼으로 바뀐 1999년 여름부터는 내가 돌리던 신문을 받아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 신문을 영 보아 주기 힘들다고 느껴 끊을까 말까 망설이면서 차마 끊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신문배달 일꾼으로 여러 해를 살았거든요. 사람들이 신문을 끊으면 ‘신문사 본사’가 아닌 ‘신문사 지국’이 피를 봅니다. 신문사 본사는 ‘독자 구독료’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신문에 나는 광고 값’으로 움직이는 신문사입니다. 독자 구독료는 신문사 지국이 살아가는 돈입니다. 그나마 신문사 지국은 〈조선일보〉이든 〈한겨레〉이든 지국을 차릴 때에 신문사 본사에 몇 천만 원에서 몇 억 원에 이르는 돈을 냅니다. 독자 구독료 가운데 꽤 큰몫을 본사로 보냅니다. 신문사 지국으로서는 기자가 받는 달삯보다 훨씬 적은 돈을 독자 구독료에서 떼어 일삯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지국장쯤 되어야 그럭저럭 ‘살림을 꾸릴 달삯’이 될 뿐, 총무라 하여도 신문배달 달삯으로는 살림을 꾸리지 못합니다. 여느 일꾼들은 달삯이 몹시 적습니다. 지국에서 먹고자는 일꾼이 가장 잘 받고, 알바 대학생이 둘째로 받으며, 아줌마가 셋째로 받고, 중·고등학교 알바생이 넷째로 받으며, 초등학생이 막째로 받습니다. 똑같은 부수를 돌리더라도 받는 일삯이 꽤 크게 벌어집니다. 이렇게 계급을 두어야 지국장은 조금이나마 돈을 더 챙길 수 있고, 신문에 넣는 광고종이는 오로지 지국 몫인데, 이 몫은 으레 지국장이 다 챙깁니다. 이리하여, 신문 독자가 신문을 끊으면 지국은 벌이가 하나 줄 뿐 아니라 본사에 벌금을 물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신문배달을 그만두던 1999년까지 〈한겨레신문〉에서는 지국이 본사로 ‘독자 한 사람이 신문을 끊을 때마다 5만 원’씩 물도록 했습니다. 거꾸로, ‘지국에서 독자 한 사람을 늘리면 본사에서 5만 원’을 줍니다. 조·중·동이라 일컫는 신문사 지국은 이 ‘벌금이자 성과금’이 더 센 줄 압니다. 이런 형편을 아니까, 신문에 실리는 글이 영 못마땅해도 지국 일꾼들 살림살이가 걱정스러워 신문을 끊지 못했는데,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다가 서울을 떠나 시골집으로 살림을 옮기던 2005년에 이르러 겨우 신문을 끊습니다. 이때부터는 어떠한 신문도 보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은 1994년부터 끊습니다. 텔레비전 있는 집에 찾아갈 때라든지 밥집에서라든지 옆지기 어버이 댁에서만 방송을 봅니다. 있으니 같이 보는 셈인데, 신문을 읽던 지난날이든 더러더러 방송을 함께 봐야 하는 오늘날이든,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루는 이야기란 언제나 도시사람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도시사람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거의 모두 서울사람 이야기에 머뭅니다. 부산이나 대구 이야기라든지, 서울하고 가까운 인천 이야기라든지, 다른 도시 이야기는 참말 찾아보기 아주 어렵습니다. 신문과 방송은 95%가 서울사람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서울이라는 큰도시에서 제법 잘 사는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낍니다.

 만화책 《파란집》을 읽습니다. 만화대사 한 줄조차 없으나 만화책 《파란집》을 읽습니다. 만화책 《파란집》은 보는 만화가 아니라 읽는 만화입니다. 그림을 가만히 보고 넘기는 만화책이 아니라, 그림에 서린 이야기를 읽는 만화책입니다.


.. 희망을 안고 파란집에 끝까지 남았던 영혼들께 바칩니다 ..  (그린이 말)


 만화책 맨 앞쪽에 그린이 말이 깃듭니다. 만화책 《파란집》은 서울 용산에서 잿더미가 되고 만 가난하고 가녀린 사람들 삶을 담았다고 합니다. 아마, 서울 용산에서 철거민이라는 이름이 붙어 쫓겨나거나 죽어야 했던 사람들 삶만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가만히 헤아리면 서울 용산뿐 아니라 온나라 곳곳에서 쓸쓸하고 슬프게 쫓겨난 모든 가난한 사람들 삶터와 삶자락을 담았다고 해야 한결 알맞을 테지요.


.. 아내가 열이 나 아팠습니다. 그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라고 지나쳤는데, 오늘 제가 열이 펄펄 끓습니다. 제 몸이 아프니까 그제야 아내의 아픔이 이해가 됩니다. 왜 그때 좀더 관심을 갖고 잘 보살펴 주지 못했을까 후회가 되었습니다 ..  (그린이 말)


 만화책 맨 뒤쪽에 그린이 말이 다시 깃듭니다. 그린이는 늦쟁이라 할 만합니다. 제때 깨닫거나 알아채거나 보듬는 삶이 아니라 느즈막히 깨닫거나 알아채거나 보듬는 삶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도 느즈막히 헤아린다면 고맙지요. 느즈막히는커녕 죽는 날까지 못 헤아리는 바보스러운 사람이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데요. 대학교까지 나온들, 대학원까지 다닌들,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온들, 옳고 바르며 착하고 참된 삶을 살피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요.

 《파란집》이란 서울 용산에만 있지 않으며, 서울 용산에만 있을 턱이 없습니다. 게다가, 서울 용산 이야기는 그럭저럭 서울 한복판에서 살던 사람들 이야기라 신문에도 나고 방송에도 납니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한 줄로조차 안 다루는 온나라 곳곳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삶이 매우 많습니다. 이 많은 아픈 삶을 그려 주는 이는 드물고, 이 숱한 가난한 울음과 웃음을 고이 담아 주려는 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습니다.

 만화책 《파란집》을 보고 읽고 곰삭이고 되뇌고 돌아봅니다. 자그마한 내 살림집에서 올망졸망 오순도순 알뜰살뜰 지내던 사람들은 ‘더 커다란 돈’을 노리는 사람들 손아귀에서 생채기를 잔뜩 받은 채 쫓겨납니다. 재개발은 서울 강남 같은 데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데, 아주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값싼 땅을 아파트로 바꾸어 비싸게 팔아야 큰돈이 되지, 비싼 땅 아파트를 허물어 다시 지어서는 큰돈이 되지 않습니다. 재개발업자라든지 정부 건설 부서에서는 ‘땅값하고 집값이 싼 가난한 동네’를 이 잡듯이 뒤집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살림살이로 아기자기하며 아름다이 살아가는 동네일수록 재개발 값어치가 클 뿐 아니라 ‘이렇게 아기자기하며 아름다이 살아가는 동네란 늘 개발 반대 목소리가 불거지는 곳’이니 얼른 밀어내려고 합니다. 권력자한테는 돈이 큰 값어치일 뿐 아니라, 민주와 평화와 통일을 소담스레 나누는 공동체 또한 얄궂은 걸림돌이니까요. 돈은 돈대로 벌면서, 사랑스러운 작은 동네를 허물어야 검은 꿍꿍이를 언제까지나 이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갈 데가 없어 버티던 작은 사람들은 이슬이 됩니다. 또는 잿더미가 됩니다. 일자리가 없어 도시로 몰려들던 사람들은, 더 큰 도시로 찾아오던 사람들은 작은도시로든 시골로든 돌아가지 못합니다. 도시로 찾아와 일자리를 찾던 어버이가 낳아 키우던 아이들은 시골을 모릅니다. 시골로 갈 마음을 품기 어렵습니다. 치고박고 다투어야 하는 도시에서 내 작은 살림 꾸릴 뿐 아니라 ‘셋집에서 집임자로 거듭나기’를 꿈꿀밖에 없습니다. 똑같이 집삯을 내더라도 도시에서 일자리를 붙잡으며 도시에서 버티려 할 뿐, 시골 논밭을 일구며 스스로 벌고 스스로 쓰며 스스로 살아가는 땀맛과 손맛을 찾으려 하지 못합니다.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크루트라고 하나, ‘일자리를 알음알이 해 준다’는 여러 가지 매체가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마다 대학생 일자리를 걱정해 줍니다. 그런데 이런 일자리이든 저런 일자리이든 하나같이 도시에서 펜대를 붙잡거나 기계 손잡이를 붙잡는 일자리입니다. 쟁기와 낫과 삽과 호미를 드는 일자리란 없습니다. 시골에서조차 농업고등학교란 사라졌는데,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농사꾼 가르치는 학교는 없고, 농사꾼 가르치는 교과서 또한 없습니다. 게다가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 안 쓰면서 거름을 만들고 땅심과 밥심을 살리는 교과서란 아예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신문 귀퉁이라든지 방송 끄트머리에라도 실리지 않습니다.

 만화책 《파란집》은 도시에서 아프게 살 수밖에 없는 아픈 사람들 생채기를 살뜰히 그렸습니다. 그래요, 도시에서는 ‘파란빛’ 집이겠지요.

 그렇다면 ‘푸른빛’ 집이란 없으려나요. 하늘과 바다는 파란 빛깔입니다. 땅(흙)은 누런 빛깔입니다. 하늘(파랑) 기운과 물(파랑) 기운을 받으며 땅(누렁) 기운을 얻어 자라나는 새 목숨 풀·꽃·나무·열매는 푸른 빛깔입니다. 재개발 보상금이나 이삿돈은 그야말로 코딱지돈이라 할만큼 적은데, 이 적다 하는 돈은 도시에서는 적을지라도 시골에서는 적지 않습니다.

 꿈을 꿉니다. 저는 ‘파란집’ 꿈보다는 ‘푸른집’ 꿈을 꿉니다. 큰숲에 깃들던 작은 집에서 살던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 살림집은 바로 푸른집이었습니다. 재개발 보상금으로는 도시에서 새 살림집을 마련하기 힘들지만, 시골에서는 새 살림집을 넉넉히 마련하여 조용하고 오붓하며 신나게 살아갈 수 있답니다. 도시 한켠 가난한 골목동네를 싹 쓸어내어 재개발을 할라치면, 그래요 다 떠나 주지요. 다 옮겨 주지요. 한 동네 사람들 통째로 시골로 옮겨 가지요. 도시에서는 돈있고 힘있고 이름있는 사람들끼리 잘 살아 보라지요. 버스기사랑 전철기사도 가게 장사꾼도 청소부도 전기회사 일꾼도 헌책방 사장님도 택배기사도 모두모두 시골로 옮겨 주지요. 국회의원 대통령 재벌총수 의사 판사 검사 같은 분들만 도시에 덩그러니 남아 스스로 잘 살아 보라고 하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시골에서 스스로 땅을 일구며 스스로 작은 집에서 서로서로 벗삼으며 마을잔치 즐기며 살아갈 테니까, 가멸찬 분들은 도시에서 300평짜리 아파트를 지어 떵떵거리며 살아가라지요. 도시에서는 파랗디파랗 아파트를 높디높게 올려세우며 살라 하고, 시골에서는 푸르디푸른 살림집을 살붙이들 어우러질 만큼 조그맣게 마련하여 살아가면 되지요. (4343.10.27.물.ㅎㄲㅅㄱ)


― 파란집 (이승현 글·그림,보리 펴냄,2010.1.20./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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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0-2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사 지국은 〈조선일보〉이든 〈한겨레〉이든 지국을 차릴 때에 신문사 본사에 몇 천만 원에서 몇 억 원에 이르는 돈을 냅니다라고 하셨는데 조중동은 그렇다고 언젠가 PD수첩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한계레까지 그럴줄은 몰랐네요.

파란놀 2010-10-27 12:44   좋아요 0 | URL
제가 일하던 한겨레 서울 아무개 지국은, 어느 날 이런저런 회계정리를 하다가 문득 영수증을 보고 알았는데, 2천만 원을 내셨더군요. 그때에는 신문사 지국을 여는 데에도 경쟁이 많아 꽤 목돈을 내야 했습니다만, 한겨레신문 지국을 차리려는 이들은 신문이 잘 되기를 바라며 기부금처럼 낸다고 생각했다고 들었어요... 어찌 되었든 다 '장사'이니까 이런 돈을 받을밖에 없어요...
 
낮은 山이 낫다
남난희 지음 / 학고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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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하고 어리숙하며 미련한 사람이 낫다
 [책읽기 삶읽기 10] 남난희, 《낮은 산이 낫다》



 밤에는 늘 몇 차례 잠을 깬다. 아이가 자면서 오줌을 누느라 젖은 기저귀를 갈아 주려고 잠을 깨고, 아이가 오줌을 누지 않았더라도 새벽에는 으레 깬다. 새벽 두 시부터 시간마다 한 번씩 깬다.

 몸이 괜찮다면 새벽 두 시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글쓰기를 한다. 몸이 조금 무거우면 세 시에 일어나고, 아무래도 찌뿌둥하다면 네 시에 일어난다. 몸이 제법 무거우면 다섯 시에 일어나고, 몸이 퍽 고단하면 여섯 시에 일어난다. 고뿔이 들었다든지 어디가 아프다면 일곱 시에 일어난다.

 오늘은 다섯 시에 일어난다. 어젯밤 아이하고 좀더 신나게 놀면서 일찍 잠들었다면 세 시나 네 시쯤에는 일어났겠지. 쌀쌀해진 바람을 맞으며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살짝 마을을 돈 다음 들어와 책도 읽으며 열 시 즈음 잠들었기에, 네 시나 세 시에 잠을 깨기는 했지만 아이가 오줌을 눈 줄 알면서도 일어나지 못한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도 이 같은 새벽에 일어나 조용히 글쓰기를 했다. 그런데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희뿌윰히 밝아 오는 빛살을 느끼며 일어난다든지, 하늘에 걸린 달이 드리우는 빛무늬를 받으며 일어난 적이 없다. 고요히 잠든 골목동네에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이나 우유를 돌리는 사람들 소리, 웃집 젊은이가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비적비적 섬돌을 밟으며 중얼중얼 올라가는 소리, 깊은 새벽에도 시끄럽게 골목을 내달리는 자동차 소리 때문에 깨곤 한다. 몸이 먼저 날씨와 때를 느끼어 받아들이기 앞서, 갖은 소리와 불빛이 내 몸을 건드린다.

 새벽 두어 시든 서너 시든 조용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얌전히 깔아 놓는다. 시골집은 많이 추우니까 이불을 바닥에 잘 깔아 놓아 따스함이 날아가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 발소리를 죽이며 큰방으로 나오고, 쉬를 누러 바깥으로 나온다. 달빛과 별빛이 앞마당으로 쏟아진다. 깊은 새벽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우는 보름달이 몹시 밝다. 어제도 밝고 그제도 밝더니 오늘 또한 참 밝다. 둘레에 다른 빛이 없기 때문일까. 날이 꽁꽁 얼면 달빛이 더 밝다고 했더니, 오늘은 어제보다 달이 살짝 이울었으나 빛무늬는 훨씬 널따랗게 퍼진다. 올망졸망 별빛 또한 참으로 반짝반짝 밝다. 이렇게 밤빛이 곱고 좋은데, 굳이 한국전력에 전화해서 등불 하나 세워 달라 할 까닭이 없다. 멧기슭 집이라 밤손님이 들까 걱정스럽다는 어르신 말씀이 있으나, 가난한 멧기슭 집까지 뭔가를 얻으러 찾아들 밤손님이라면 얼마나 배를 곪는다는 소리일까. 아니, 예까지 뭔가를 훔치고 돌아갈 생각으로 찾아올 밤손님이라면 얼마나 다리가 아플까. 버스도 전철도 택시도 없는 이런 멧기슭에.

 멧기슭에서 젊은 나날 꿈을 길어 올리다가 그예 멧사람으로 살아가는 남난희 님이 쓴 《낮은 산이 낫다》(학고재,2006)를 읽었다. 이 책에 앞서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1990)을 읽었다. 《하얀 능선에 서면》은 꽤 팔리거나 읽혔는지 헌책방마실을 할 때에 어렵잖이 한 권씩 보곤 한다. 산을 타는 이야기는 그닥 좋아하지 않아 여러 해 동안 《하얀 능선에 서면》을 들추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이 책이 왜 이렇게 자주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럼 한번 구경이라도 할까 싶어 처음으로 들추어 보는데, 뜻밖에 이야기가 아주 좋았다. 늘 손에 쉽게 닿는 자리에 있으나 돌아보지 않던 책인데, 생각해 보면 내 곁에서 내 손길이 뻗기를 오래도록 기다리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낮은 산이 낫다》라는 책을 읽으면 “서구의 알피니즘이 들어오면서 산은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더 빨리, 더 힘든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오르게 되었다 … 아이와 함께 산을 오르면 아이의 동심이 부러워진다. 아이는 온몸으로 산과 만난다. 나무를 껴안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도 한다(11쪽).”는 대목이 나온다. 남난희 님은 ‘겨울 백두대간 걷기’를 여자로서는 꽃등으로 해냈다고 한다. 여자로서는 꽃등으로 하든 남녘에서 꽃등으로 하든 그다지 대단한 일이 되지 않는다. 첫째이건 둘째이건 막째이건 무슨 대수랴. 백두대간을 타든 동네 뒷산을 타든 다를 바 없다. 어떤 길을 얼마나 걷든 똑같이 산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남난희 님 《하얀 능선에 서면》을 읽으면서 ‘이분은 참 멧사람이구나’ 하고 느꼈다. 그래, 헌책방에서 《하얀 능선에 서면》을 한참 서서 읽다가 책값을 셈하자니, 헌책방 할배가 넌지시 한 말씀 했다. “이거, 참 재미있는 책이지? 이 사람 참 재미있는 양반이더구만. 좋은 책이지.” 그 뒤로 이 책을 몇 권 더 장만해서 둘레에 선물해 보는데 이 책을 받은 벗님 가운데 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아무래도 ‘그냥 산 타는 이야기’쯤으로 여길는지 모르고, 다른 읽을거리가 많아 바빠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남난희 님은 《낮은 산이 낫다》에서 당신 삶이 찬찬히 무르익은 한결 고즈넉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나라 고무신은 참 좋다. 우선 ‘가격이 싸고 어디서나 쉽게 신고 벗을 수 있고 발이 편하고 비교적 질기며 보기도 좋다. 간편하게 세탁하여 빨리 신을 수도 있고, 신다가 버려도 그리 아깝지 않고 재활용도 가능하다’ 등 장점이 무수히 많다(27쪽).”는 대목을 읽으며 피식 웃는다. 아주 맞는 소리이니까. 산을 탈 때에도 고무신이 퍽 좋다. 산을 고무신을 신고 한참 타다가 나중에는 신을 벗어 가방에 넣고 맨발로 타면 더욱 좋다. 모르기는 모르지만 남난희 님도 고무신을 신고 산을 타다가 맨발로 바꾼 적이 잦지 않을까. 나는 2004년에 고무신을 처음 신었는데 이때에 한 켤레 값이 3000원이었다. 2009년까지 이 값이었는데 2010년에 접어드니 장마당에서 고무신을 구경하기 어렵다. 고무신은 플라스틱신과 견주어 딱딱해서 시골에서도 잘 안 신으니까 공장에서 더 안 만든다고 했다. 2004년에 3000원 하던 값은 1000원인가 1500원 오른 값이라고 했다. 남난희 님이 고무신을 처음 신던 무렵에는 한 켤레에 1000원이나 1500원쯤 하지 않았으랴 싶다. 그때에도 웬만한 운동신은 2만 원을 웃돌았을 테니까 고무신 한 켤레를 신어 한두 해 보내면 신값을 얼마나 아끼는 셈일까. 고무신을 신으며 늘 느끼지만, 고무신 생김새가 참 곱다. 고무신은 신는 동안 차츰 닳는데, 닳아 가는 생김새 또한 꽤 곱다. 여느 운동신은 신을수록 모양이 뒤틀리고 망가지면서 볼품이 없다.

 “얼마 전 그 병원에서 출산한 산모는 의사의 퇴근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수술을 했다고 한다 … 나는 이 이후로 병원에 가지 않았다 … 산중에서 맞는 봄은 또 얼마나 찬란한지. 새소리에 단잠을 깨고, 일출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만나는 갓 돋아난 잎들, 갓 피어난 얼레지와 제비꽃은 또 얼마나 예쁜지 … 정말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이렇게 충만하고, 이렇게 따뜻하고, 이렇게 깨끗한 곳에서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95∼100쪽).” 하는 글월을 읽는다. 농사짓는 착한 사람이 옹기종기 모인 시골마을도 좋고, 이웃집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멧기슭도 좋으며, 바다랑 이웃하는 마을도 좋다. 꼭 알맞게 모여 마을을 이룬 시골일 때에 살기 좋다. 살기 좋은 마을이라면 아이를 낳기에도 좋으며, 아이를 낳아 키우기에도 좋다. 아이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풀벌레소리에 귀를 쫑긋한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를 느낄 수 있고, 구름이 흐르는 모양을 느긋하게 올려다볼 수 있다. 도시에서 서른 해쯤 살아오는 동안 도시사람 가운데 구름 구경을 느긋하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은 다섯 번이 채 안 된다. 도시에서는 구름도 하늘도 바람도 무지개도 별도 달도 해도 느긋하게 올려다보며 마주하는 사람이 몹시 드물다. 아니지. 도시에서는 자연을 가까이할 수 없다. 도시에서 살며 자연을 가까이하려 든다면 돈벌이에 뒤처질밖에 없고 끝없는 다툼과 겨루기에서 밀릴밖에 없다. 도시에서는 자연일랑 까맣게 잊어야 한다. 도시에서는 자연은 어린이한테 읽히는 ‘자연그림책’이나 ‘생태도감’ 같은 책으로만 읽히면 된다. 날마다 몸에 넣는 밥이 바로 자연임을 느낄 수 없고, 언제나 나를 살도록 하는 님이 자연임을 깨달을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 동네라는 골목동네 사람들이 자그마한 꽃그릇에 자그마한 꽃이나 푸성귀를 기르는 도시농업을 진작부터 해 왔지만, 한국에서 환경운동이니 무어니 하는 사람들은 한국땅 골목동네 ‘도시 생태 농업’을 느끼지 못하면서 으레 쿠바로 가느니 생태도시 아바나라느니 떠들기만 한다.

 “장난감이 넘치는 도시 아이들이 얼마나 가지고 놀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직접 만든 물건을 선물하는 기쁨은 받는 기쁨보다 더 클 것이다 …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땅의 위대함을 보고 배운다면 참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125, 222쪽).” 하고 읊는 글월을 두고두고 곱씹는다. “이곳에서 살다 보니 농사짓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조금은 알 듯하다. 땡볕 아래서 밭매기를 하지 않고 편하게 잡초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아는데, 땀을 흠뻑 흘리며 풀을 뽑는 고생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농산물이 깨끗하고 충실해야만 제값을 받을 수 있으니 농약과 화학비료, 제초제를 안 칠 수 없어서 그렇게밖에 못하는 것이다(69쪽).” 같은 글월을 되씹는다. 시골사람은 농사를 지으며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써야 한다. 푸성귀나 곡식을 기르든, 고기소나 고기돼지나 고기닭을 기르든 매한가지이다. 도시사람은 먹을거리를 장만할 때에 커다란 마트에서 더 값싸게 파는 물건을 장만할밖에 없다. 시골사람은 오롯이 유기농사를 짓기 힘들고, 도시사람은 생활협동조합을 함께하며 생협 물건을 쓰기 어렵다. 모두 똑같은 걱정을 안고 똑같은 굴레에 빠져 허덕인다. 서로 만날 길이 없고 서로 사귈 틈이 없다. 함께 어깨동무할 짬이 없고 함께 손을 맞잡을 마음이 없다.

 이리하여 남난희 님은 “낮은 산이 낫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알아들으며 살아갈 도시사람이나 시골사람은 어디에 얼마나 있으려나. 가난한 사람이 낫고, 적게 배운 사람이 나으며, 못생기거나 키가 작거나(또는 멀대 같거나) 힘이 여린 사람이 나은데, 이 흐름을 알아채며 오순도순 어깨를 겯을 사람은 이 나라에 얼마나 되려나. 글솜씨가 어리숙한 사람이 낫고, 착한 사람이 나으며, 미련한 사람이 나은 줄, 이 땅에서는 얼마나 알아들으며 헤아릴 수 있으려나. (4343.10.27.물.ㅎㄲㅅㄱ)


― 낮은 산이 낫다 (남난희 글,학고재 펴냄,2004.6.28./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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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잠과 글쓰기


 새벽 네 시에는 일어나야 하루를 알뜰히 열어 알차게 보낸다고 느낀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면 더욱 알뜰살뜰 보낼 수 있을 텐데, 세 시나 두 시부터 일어나 하루를 열면 몸이 좀 찌뿌둥하다. 다섯 시에 일어나면 빠듯하게 몰아쳐야 하니까 적잖이 어수선하거나 벅차다. 새벽 다섯 시를 넘겨 자리에서 일어나면 나로서는 늦잠이다. 나한테는 새벽 네 시부터 하루를 열며 글쓰기를 하는 삶이 가장 알맞고 좋다.

 그런데 아이 하나를 키우는 삶으로서 이맘때가 가장 좋은데, 아이가 둘이라면 어떠하려나.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한테 동생이 생겨 둘째를 첫째와 마찬가지로 돌보고 보듬으며 복닥이며 지내는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면 내 하루는 언제 열어야 좋으려나. 그때에도 새벽 네 시에 느긋하게 홀로 글쓰기를 하며 마음닦이를 할 수 있는가. 아이 하나와 함께 살아가며 빨래감이 비로소 조금 주는구나 하고 느끼는데 다시금 기저귀 빨래 왕창 나오는 아이키우기를 해야 한다고 할 때, 내 글쓰기이며 사진찍기이며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아이 두셋씩 키우면서도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바깥일을 해내는 적잖은 분들을 보면 몹시 놀랍다. 이분들은 언제 책을 읽고 언제 글을 쓰며 언제 밥을 먹으려나. 밥을 입으로 먹을까 코로 먹을까 귀로 먹을까.

 겨울 새벽 하얗게 밝는 모습을 창밖으로 바라본다. 시골집에서는 새벽이 하얗게 밝아 오더라도 시끄럽지 않다. 도시 골목집에서조차 새벽이 다가올 무렵 얼마나 시끌벅적한지 모른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골목집에 깃든 사람들이 새벽과 아침을 조용하면서 느긋하게 맞이하고파 하는 줄 모르는 듯하다. 큰길에서면 모르되 왜 골목길에서조차 자동차를 그리 거칠고 시끄럽게 몰까. 오토바이를 타는 이들은 왜 골목길에서도 그리 떠들썩하게 굴면서 지나갈까.

 이제 나무마다 가랑잎을 내고 멧자락에 먹을거리가 떨어질 즈음이 되니, 작은 멧새들이 새벽녘부터 우리 살림집 둘레로 찾아든다. 밤에 잠을 자다 보면 우리 살림집 문에 콩콩 쿵쿵 뭔가 부딪는 소리가 난다. 다람쥐이거나 족제비이거나 오소리이거나 너구리일 테지. 어니스트 톰슨 시튼 님은 밀가루를 일부러 문간에 뿌려 놓고 짐승 발자국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단다. 시튼 님이 살던 예전처럼 큰곰이나 늑대나 여우가 이 나라 멧자락에 보금자리를 틀지는 못한다. 고작 몇 가지 멧짐승밖에 없다.

 지난주에 멧자락을 타며 버섯을 딸 때에 고라니 똥을 보았다. 이 나라에서는 멧돼지도 그리 많지 않고 노루나 사슴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다. 멧돼지 때문에 밭농사 망친다는 곳이 제법 있는데, 지난날을 헤아린다면 요즈음 멧돼지는 멧돼지라고조차 하기 힘들다. 멧돼지가 멧자락에서 먹이를 찾을 수 없도록 고속철도를 뚫고 고속도로를 내며 공장을 지으니까 어쩔 수 없잖은가.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분들은 이 나라 정부나 건설회사한테 땅을 팔면 안 된다. 농사짓던 땅이나 너그러운 멧자락이 기찻길이나 찻길이나 공장터나 아파트가 되지 못하도록 막아 주어야 한다. 이렇게 막아내지 못하니까 멧돼지가 밭을 파헤쳐 먹이를 얻으려 한다.

 새벽 네 시쯤 하루를 열며 글을 쓰고 있자면, 새소리는 새벽 다섯 시 오십 분이나 여섯 시 십 분 사이에 맨 처음으로 들린다. 여섯 시 반부터 새소리가 꽤 많이 들린다. 겨울을 코앞에 두니까 이즈음 들리는데, 이제 이곳 멧기슭 살림집에서 겨울을 난 다음 새봄을 맞이하고 새여름을 즐길 수 있다면, 그때에는 멧새가 봄이랑 여름에는 언제부터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새 하루를 여는지 남달리 알 수 있겠지. 멧새 모이통을 하나 마련해 볼까. (4343.10.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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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꺼내어 보지 말라고 1000번이 아닌 3000번쯤은 말했겠지. 그러나 우리 아이는 귀가 둘이라며 한귀로 흘리곤 한다. 또는 아예 귀에 안 들어오도록 뭔가를 틀어막는다. 사진을 늘 꺼내어서 본다. 이제는 집어넣을 줄도 알지만 안 집어넣고 늘어놓기 일쑤이다. 어제는 고맙게 '다시 집어넣어' 준다.

- 201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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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10-29 08:36   좋아요 0 | URL
이 사진, 참 좋으네요.
양손으로 사진을 꼭 붙들고 열심히 들여다보는 모습도, 다시 제자리에 끼워 넣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그런데 저 윗칸에 끼워야하는 것 아니니? 아가야 ^^) 자꾸 보게 되요.
아빠 닮아 사진에 관심이 많은가봐요. ^^

파란놀 2010-10-27 08:32   좋아요 0 | URL
아빠가 갓난쟁이 때부터 사진기를 늘 들이대며 찍고 사진을 뽑아서 보고 했기에, 아이도 절로 사진을 가까이한답니다. 책도 마찬가지이고요. 아빠가 텃밭을 좀더 사랑하여 호미를 자주 쥔다면, 아이는 틀림없이 농사꾼이 되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