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우리말 생각 ㉡ 한글날


 해마다 시월 구일은 한글날입니다. 한글날은 퍽 오랫동안 ‘하루 쉬는 날’이었으나 이제는 안 쉬는 날로 바뀌었습니다. 안 쉬는 날로 바뀐 탓에 사람들이 한글날을 잊는지, 쉬는 날이었어도 사람들은 으레 잊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우리들 누구나 한글날을 아끼며 사랑하는 넋이었다면, 한글날이 따로 쉬는 날이 아니라 할지라도 한글날을 맞이하여 한글을 높이 기리거나 우러르겠지요. 우리들 누구나 한글날을 아끼며 사랑하는 넋이라 한다면, 대통령이나 정치권력자 몇몇 사람이 한글날을 갑작스레 ‘안 쉬는 날로 바꾸자!’ 하고 외칠 수 없는 노릇이요, 이렇게 외치다가는 대통령 자리나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한글날은 ‘한글을 기리는 날’입니다. 한글날은 우리말을 기리는 날이 아니에요. 흔히들 한글날을 맞이해서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자고 이야기하지만, 한글날이 태어난 까닭은 우리한테 우리글이 없던 설움과 아쉬움을 훌훌 털어 기쁨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한글’은 ‘한힌샘’이라는 이름을 따로 쓰면서 살았던 주시경 님이 새로 빚은 낱말입니다. 머나먼 옛날, 이 나라가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던 때에는 ‘訓民正音’이라는 이름을 썼어요. 때로는 ‘諺文’이라 했고요. 말사랑벗들이 잘 헤아리셔야 하는데, ‘훈민정음’이나 ‘언문’이 아닌 ‘訓民正音’하고 ‘諺文’이었어요.

 왜 이렇게 썼을까요? 왜 이러한 이름이 붙었을까요?

 지난날 임금님이나 신하나 사대부나 지식인들은 누구나 漢文을 썼습니다. 입으로 읊는 말은 여느 사람들 누구나 쓰는 ‘한겨레 말’을 썼을 테지만, 글로 적바림할 때에는 ‘漢文’을 썼어요. 이 또한 곰곰이 생각하셔야 하는데 ‘한문’이 아닌 ‘漢文’을 썼어요. 왜냐하면 지난날 임금님부터 지식인까지 하나같이 중국을 높이 우러르거나 섬겼거든요. 오늘날 이 나라 대통령부터 지식인까지 한결같이 미국을 높이 우러르거나 섬기는 모양새하고 닮습니다. 이리하여 요즈음 대통령이든 지식인이든, 어른들은 ‘영어’가 아닌 ‘English’를 써요. ‘한문’조차 아닌 ‘漢文’을 쓰던 때에는 ‘훈민정음’이 아닌 ‘訓民正音’을 지었고, 이러한 글로 중국말을 손쉽게 적바림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이 ‘訓民正音’은 어려운 ‘漢文’을 모르는 여느 가난한 농사꾼들한테 뭐 하나 알리려 할 때에 무척 도움이 돼요. 왜 그러느냐면, 나랏님이 뭐 하나 명령을 하거나 지시를 한달 때에는 ‘漢文’으로 종이에 글을 쓰잖아요. 여느 가난한 농사꾼들은 이 ‘漢文’을 못 읽어요.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에 들었을 텐데, 여느 가난한 농사꾼들은 글을 배우지 못했어요. 여느 가난한 농사꾼한테 글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여느 가난한 농사꾼들이 글을 배워서 나라를 뒤집을까 걱정하기도 했을 테고, 여느 가난한 농사꾼들은 권력자한테 그예 짓눌리기를 바라기도 했으리라 생각해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여느 가난한 농사꾼들이 깨닫는다면, 이른바 ‘민란’이라는 이름으로 농사꾼들이 힘을 똘똘 뭉쳐서 잘못된 사회와 제도를 바로잡거나 고치려고 일어섭니다. 그러니까 예부터 여느 가난한 농사꾼을 못 가르치도록 하려 했고, 다만 나랏님 명령과 지시사항은 잘 알아듣도록 하려는 뜻에서 ‘訓民正音’을 만들었어요.

 지난날에는 이 나라에서 95퍼센트쯤 되는 사람들이 ‘글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이러니까 ‘글을 아는 사람’인 양반이나 사대부나 지식인이 ‘漢文으로 내려온 명령과 지식’를 하나하나 풀어서 알려주거나 읽어야 했지요. 나라를 다스리는 쪽에서 보자면 얼마나 힘들고 번거로웠을는지 알 만한 노릇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바로 이 한글이 있기 때문에 마음껏 생각하고 신나게 꿈을 꾸는 한편, 책이든 글이든 무어든 넉넉하게 즐길 수 있어요. 그렇지만, 지난날 조선 나라에서는 ‘이렇게 한 나라 모든 사람이 글을 쉽게 쓰거나 읽으며 생각을 꽃피우기를 바라지 않았’어요. 나랏님이 시키는 일을 잘 따르기를 바랐고, 나랏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릴 생각에 머물렀습니다.

 말과 글이 동떨어지기도 했고, 나랏님과 나랏사람(그러니까 ‘백성’)이 멀리 갈리기도 했던 지난날입니다. 그렇지만, 지난날에야 그러하기는 했으나, 이 한글이라는 글은 더없이 손쉽게 익혀 그지없이 알차게 쓸 만한 글이었어요. 1900년대에 이르러 이 글이 얼마나 값있고 뜻있는가를 깨달은 몇몇 지식인들은 ‘당신들은 漢文만으로도 넉넉히 당신 넋을 밝히며 당신 일자리를 얻고 당신 꿈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만, 이 ‘기득권을 스스럼없이 내려놓고는 우리글 갈고닦기를 처음으로 했’어요. 이러는 가운데 새로 붙은 이름이 ‘한글’이에요. 이리하여 1900년대 첫머리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한글운동을 하던 숱한 어른들은 독립운동에 똑같이 몸을 담기 마련이었습니다. 한글을 살리거나 나누거나 알리는 일이란, 이 나라 가난한 여느 농사꾼을 일깨우면서 ‘일본 제국주의자’한테 짓눌린 삶을 떨쳐 일어나도록 이끄는 일이었어요.

 오늘날에도 ‘English’가 아닌 바르고 알맞으며 고운 ‘우리말’을 제대로 살피고 익히며 가다듬는 가운데 쓰는 일이란, 참다이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살찌우며 내 고향마을을 돌보는 일이라 할 수 있어요. 말사랑이란 삶사랑이고 글사랑이란 사람사랑이에요. 한글을 사랑하는 일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고, 우리말을 아끼는 일이란 나 스스로를 아끼는 일이랍니다.

 그런데 1900년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우리글을 갈고닦은 ‘깨우친 어르신’들은 ‘한글’이라는 새 이름까지 사랑스레 붙였지만, 이 보람을 홀로 차지하지 않아요. 맨 처음 이 글을 빚은 세종큰임금님이 ‘여느 가난한 농사꾼이 글을 익혀 꿈을 꽃피우기를 바라는 넋’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슬기를 빛내어 글을 빚어 주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온 나라 사람들이 말꽃과 글빛을 이룰 수 있는 바탕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글날은 이렇게 태어났답니다.
 

(최종규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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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아이
정필화 지음 / 특수교육 / 1997년 12월
평점 :
품절


마음을 여는 이야기로 빚는 사랑
― 쇼지 사부로, 《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



- 책이름 : 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
- 글 : 쇼지 사부로
- 옮긴이 : 정필화
- 펴낸곳 : 특수교육 (1990.7.24.)


 아이는 새하고도 이야기를 나누고, 쥐하고도 이야기를 나누며, 나무하고도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느 어른은 새는커녕 쥐하고든 나무하고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나, 더 헤아리면 새나 쥐나 나무에 앞서 제 아이하고 옳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기까지 합니다.

 어른은 어른끼리도 살가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나하고 돈크기가 다르다거나 선 자리가 다르다거나 사는 집이 다를 때에 선뜻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지 못합니다. 아니, 집 바깥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에 앞서 집 안쪽에서 오순도순 지낼 살붙이하고 얼마나 깊고 넓게 이야기를 나눌까 궁금합니다.

 아이와 둘이서 읍내 장마당 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아이는 버스에 타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인사를 합니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내릴 때에 조금만 걸으려고 문 가까운 자리에 앉습니다. 우리는 문 뒤쪽 자리에 아이가 발을 올릴 수 있는 바퀴가 튀어나온 데에 앉습니다. 아이 목소리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꾸준히 인사를 하고, 어르신들이 인사 소리를 못 들어도 씩씩하게 거듭 인사를 합니다.

 아이하고 길을 거닐 때, 아이는 낯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즐겨 인사를 합니다. 낯빛 없이 걷던 할머니나 할아버지들 모두 아이 인사를 받지는 않으나, 꽤 많은 분들은 굳은 얼굴을 펴면서 인사를 받곤 합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모든 사람한테 인사를 하자면 길을 못 간다 할 만하지만, 생각해 보면 길을 거닐 때에 마주하는 모든 사람하고 인사를 나누는 일이란 하나도 힘들거나 어려운 노릇이 아니에요. 제 어린 날, 동네에서 심부름 하나 하려고 달음박질을 하며 가게에 다녀올 때는 언제나 인사하느라 제대로 못 달리곤 했으나, 그래도 어른들 앞에서 뜀박질을 멈추고 “안녕하셔요!” 한 다음에 어른들이 지나가면 다시 달음박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사는 잘 한다지만 이야기는 잘 못하는 내 삶이 아닌가 돌아봅니다. 누구보다 내 어버이하고 형한테 안부 전화조차 자주나 가끔이나마 걸지 못합니다. 생각조차 않는다고 해야 하나요. 옆지기 어머님은 곧잘 안부 전화를 걸어 주시지만, 정작 저부터 옆지기 어머님이나 아버님한테 틈틈이 전화로 잘 지내시느냐 여쭙지 못합니다.

 동무들한테도 새해인사 같은 전화를 잘 안 걸며 지냅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도 옆지기한테 흔한 인사말 같은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합니다.

 아이하고도, 옆지기하고도, 살붙이하고도, 동무하고도, 마음과 마음을 나누면서 오붓하게 살아야 즐겁습니다. 우리 아이가 누구보다 똑똑하거나 예쁜 아이이든 몸이나 마음 한켠에 아픔이 있든 한결같이 사랑하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고운 마음붙이입니다.


.. 일생 동안 신체상의 결함에 슬픈 일들이 끊이지 않을 이 아이가 걸어가야 할 운명을 생각하니 무척 마음이 아팠다. 이 아이의 행복했던 날은 언제였던가? 어머니 품에 안기고, 할머니 품에 안기던 시절이 이 아이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날이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성장해서 밖에 나가서 놀 수 있는 나이가 되니 바깥에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걸을 수 없었던 때가 오히려 행복했던 것 같다. 성장하니까 이러한 곤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성장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가끔 떠올랐다. 모든 부모의 마음은 자기 아이가 하루빨리 성장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데, 커 갈수록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내 아이에게는 언제까지나 현 상태로 그대로 있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또 울고 돌아왔구나. 남자가 그렇게 약해서 어떻게 한담. 남자는 강해야 한다.”고 절규하듯 말하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  (35쪽)


 《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라는 책을 생각합니다. 소아마비를 앓는 두 아이를 키우며 두 아이를 비롯한 모든 ‘아픈 아이’가 걱정없이 사랑스레 배우며 씩씩하게 자라날 보금자리이자 배움터이자 만남터를 꿈꾸면서 온힘과 모든 돈을 들여 학원 하나 마련한 쇼지 사부로 님 한삶을 담은 책입니다. 쇼지 사부로 님은, 또 쇼지 사부로 님네 아주머님은, 또 아이들은, 늘 누구하고도 마음과 마음으로 사귀거나 만나고 싶어 합니다. 대단하거나 훌륭한 이야기가 아닌 수수하거나 너른 이야기로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4343.12.2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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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받은 사진기. 필름사진기인데, 이 눈으로 들여다보면 꽤 괜찮다. 값싼 필름 하나 사서 넣어 찍어 보고프다. 

- 2010.12.21.  

  

 아이 발과 아빠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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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2-27 18:00   좋아요 0 | URL
ㅎㅎ 이젠 필림 카메라는 사라지는 추세죠.필림도 사라지고 필림 인화하는 곳도 사라지는 추세죠.이제 돼지털이 대세...
저도 니코매타란 60년대 나온 카메라가 있는데 망치마냥 튼튼하자만 이른바 모든것을 수동(거리,노출 모두)하는 기기라 이젠 웬만해서 어디 가지고 다니기가 힘드네요^^;;;

파란놀 2010-12-27 21:06   좋아요 0 | URL
90년대에 나온 '자동카메라'도 얼마든지 좋은 사진이 나와요.
이 값싼 자동카메라로 아이하고 즐겁게 사진을 찍어 볼까 싶어요.
뭐랄까... 로모사진기하고 자동카메라하고
화각이 비슷해 보이더군요 ^^
 


 김치와 글쓰기


 아침밥을 차리면서 김치를 옮겨 담는다. 옆지기 어머님이 마련해 주신 김치가 담긴 큰 통에서 밥자리에서 쓰는 작은 통으로 옮긴다. 바깥에 내놓는 김치는 꽁꽁 얼어붙는다. 가위로 폭 찍어서 옮긴다. 열무김치는 한손으로 하나씩 집어 먹기 좋도록 자른다. 이 김치나 저 김치나 꽁꽁 얼어붙었기에 김치를 쥐는 한손 또한 얼어붙는다. 세 가지 김치를 통 하나에 1/3씩 나누어 담는다. 김치를 옮겨 담는 내내 얼은 손가락은 꽤 오래도록 녹지 않는다. 얼어붙는 겨우내 먹는 김치는 얼어붙는 채 겨울을 함께 나는 셈일까. 김치를 쥐기만 해도 손이 얼어붙는다면 겨울 동안 김치를 담글 수 없겠지. 미리미리 김치를 비롯한 다른 먹을거리를 알뜰히 마련해 놓아야 할 테지.

 소복소복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쓴다. 눈을 쓰는 동안 손가락은 다시 얼어붙는다. 군대에서는 겨울이면 하루 몇 시간씩 눈을 쓸었는데, 그때에도 손가락은 꽁꽁 얼어붙었다. 그무렵 그 겨울을 어떻게 보냈으려나. 앞으로 또 눈이 오면 또 눈을 쓸면서 또 손가락이 얼어붙겠지. 나는 바보처럼 손가락 얼어붙으면서 살아간다. (4343.12.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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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걸어온 길을 조용히 돌아본다
 [헌책방에서 만난 책 3] 강수지, 《어두운 마음에 불을 켠 이름 하나》



 헌책방에서 책 하나를 만납니다. 책 안쪽에는 알파벳으로 큼직하게 적바림한 글월이 하나 있습니다. 뭔 글월을 이렇게 책 한쪽 가득히 적었나 싶어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Sujee Kang 91.10.”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수지 강”일 테고, 이 책을 쓴 분 이름 “강수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책 뒤쪽을 살핍니다. 간기 날짜를 들여다봅니다. 1991년 10월 5일입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1991년 10월 어느 날 강수지 님이 책 하나 내놓으면서 출판기념잔치 비슷하게 사인해 주는 마당을 마련하지 않았나 싶고, 이 자리에서 노래꾼 강수지 님을 좋아하는 어느 분이 1991년 10월에 3500원 하던 이 책을 기쁘게 장만해서 사인까지 받았으리라 봅니다. 제가 헌책방에서 만난 책은 1991년 11월 5일에 2쇄를 찍었습니다.

 1991년이면 스물둘 나이였을 강수지 님은, 이 조그마한 책 하나에 무슨 이야기와 어떤 삶을 적바림했으려나요. 1991년에 이 책을 장만하던 사람들은 강수지 님 이야기와 삶을 어떻게 얼마나 받아들였으려나요.


.. 우리들의 표정은 딱딱하다. 검은 빵의 딱딱한 껍질같이 굳어 있다. 우리에게는 자유롭게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표정은 없는 것일까. 꼭 이제 막 싸움을 하고 나온 듯한 표정으로 일터에 나가고 동료를 만나고 애인을 만나는 우리들. 우리의 표정은 어디로 갔을까. 마음을 편하게 드러낼 수 있는 따뜻한 표정들은 어디로 갔을까 … 화려한 나도 좋다. 박수를 받는 나도 좋다. 유명해진 나도 좋다. 그러나 조용히 한 남자의 착한 아내가 되어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화해하며 예쁘게 늙어가고 싶다. 한 남자를 아주 편안하게 나에게 어깨를 빌려준 사람으로 여기며 조용히 조용히 사람들 틈에 섞여 예쁘게 살고 싶다 ..  (76, 82쪽)


 어느덧 해는 흐르고 달은 기울어 스무 해가 지납니다. 2011년이 코앞인 2010년 12월 26일 막바지입니다. 1991년에 스물둘이던 강수지 님은 어느새 마흔둘 나이요, 1991년에 고등학교 1학년이던 저는 바야흐로 딸 하나를 둔 서른여섯 나이입니다. 스물둘 나이에 “한 남자를 아주 편안하게 나에게 어깨를 빌려준 사람으로 여기며 조용히 조용히 사람들 틈에 섞여 예쁘게 살고 싶”다 바란 강수지 님 오늘 삶은 어떤 빛깔 어떤 내음 어떤 살결이려나요. ‘조용히’를 두 번 잇달아 적을 만큼 조용하면서 예쁘게 살고프다던 강수지 님 오늘 삶은 어느 만큼 예쁜 빛깔 예쁜 옷 예쁜 목소리일까요.

 밤 두 시 넘도록 잠들지 못하면서 칭얼대던 아이가 아침 아홉 시 사십 분 즈음 깨어납니다. 기저귀를 안 차겠다 해서 풀었더니 웃옷이며 아랫도리며 온통 오줌으로 젖었습니다. 아이는 누워서 “젖었어.” 하고 말합니다. “그래, 젖었어. 누워 봐. 새옷 가지고 올게.” 하고 말하는 아빠는 바지랑 웃도리를 벗겨 새옷으로 갈아입힙니다. 어차피 오늘 다 빨고 아이를 씻길 생각이었지만, 오줌 젖은 옷이 되는군요.

 아이보고 “늦게까지 안 잤으니까 조금 더 누워 있어.” 하고 말하며 어머니 곁에 눕도록 이불을 덮습니다. 아이는 어머니 품에서 조잘조잘 웃으며 떠듭니다. 간밤에 칭얼대던 모습은 잊었으려나요. 벌써 훌렁 지나간 아스라한 옛일인가요.

 아무렴, 옛일이어야지요. 오늘은 오늘대로 오늘 하루 새롭고 기쁘게 살아야지요. 다시 얼어붙은 시골집 물꼭지가 다시금 녹아 주기를 기다리고, 날이 또 한 번 포근히 풀리기를 바라야지요. 겨울다운 추위를 새삼 느끼고,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아이한테 “이제 벼리는 세 살에서 네 살이 되었어요.” 하고 새말을 가르쳐야지요. 아빠 나이도 한 살을 붙이고, 한 살 더 붙인 나이만큼 어떠한 나잇살이 붙는가 헤아려야지요.


.. 나는 미국 생활에 적응을 잘하는 편이었으나, 이 일을 계기로 심한 회의를 느꼈다. 어느 날,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 구내로 내려갔다. 역 구내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런데 역 한쪽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미국애들 서넛이 어느 동양인 아이를 놀리고 있었다.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욕설을 하면서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니네들은 왜 여기에서 사니? 니네 나라를 놔두고. 병신들?” … 그 광경을 보고 난 후 나는 우울증과 함께 식사를 거부하는 거식증에 걸렸다.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게 부끄러웠고 나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부모님들이 원망스러웠다. 우리는 미국에 와서도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 그러나 그런 위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  (134∼136쪽)


 글은 짧게 싣고 두 쪽에 한 번씩 흑백사진을 넣은 《어두운 마음에 불을 켠 이름 하나》를 넘깁니다. 노래꾼 강수지 님을 좋아하던 1991년 무렵 사람들한테 이 책은 얼마나 애틋하거나 사랑스럽거나 반가웠을까 떠올려 봅니다. 음반처럼, 또는 음반만큼 사랑받은 책이었겠지요. 가방에 늘 넣어 다니거나 책꽂이 잘 보이는 자리에 얌전히 꽂아 놓은 책이었겠지요.

 앞으로 스무 해가 더 지나면 강수지 님도 예순 고개에 접어듭니다. 예순 고개에 당신 스물두 살 적 사진과 글을 돌아본다면 어떠한 느낌일까 헤아려 봅니다. 대중노래를 부르며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은 만큼 젊은 나날 사진이 많은 강수지 님인데, 강수지 님은 예순이나 일흔이나 여든에 당신 젊은 나날 삶을 어떻게 아로새기려나 되짚어 봅니다.

 스물에도 예쁜 삶, 마흔에도 예쁜 삶, 예순에도 예쁜 삶, 여든에도 예쁜 삶을 고이 이어가겠지요. 예쁘게 예쁘게 바라며 꿈꾸는 삶이니까요.


.. 내가 집을 떠나올 때 식구들은 내가 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줄 몰랐었다. 친구 집에 잠시 다니러 간 줄 알았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고 나면 마음이 약해져서 떠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래층에서 무료하게 신문을 읽고 계셨다. “아버지, 저 갔다올게요.” “응.” 아버지는 계속 신문을 뒤적이시며 건성으로 대답하셨다. 내가 간단한 외출을 하는 줄 아셨던 모양이었다. 친구와 몰래 짐을 옮기며 나는 집의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길게 그리고 둔중하게 났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돌아올 때는 더 강한 딸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빠, 동생 친구들. 안녕, 안녕 ..  (154쪽)


 어버이 함께 살던 집을 떠나 혼자 살림을 꾸리던 지난날은 까마득하기도 하지만, 바로 엊그제 일 같기도 합니다.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서던 고갯마루에서 어버이와 함께 살던 아파트를 떠나 지하방 신문사지국으로 들어가 새벽을 일찍일찍 열면서 보내던 나날은 아득하기도 하지만, 그냥 어제그제 일 같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세 살 딸아이랑 복닥이는 나날 또한 스무 해쯤 지나 딸아이가 스물세 살 나이가 된 다음에 돌이킬 때에는 더없이 아련하면서 그지없이 똑똑히 되새기는 하루하루일까 궁금합니다. 첫딸이 스물셋일 때 아빠는 쉰여섯, 둘째가 스물셋이 될 때에는 아빠가 쉰아홉, 아, 나한테도 예순 고개가 찾아오겠지요. 아직은 꿈꾸기 어려운 나이요 밥그릇인데, 예순 고개란 또 어떠한 삶·맛·꿈으로 찾아오려나요. 어제도 오늘도 글피도 그예 곱게 살아가고픕니다. 이제 셈틀을 끄고 아침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4343.12.26.해.ㅎㄲㅅㄱ)


― 어두운 마음에 불을 켠 이름 하나 (강수지,들꽃세상 펴냄/19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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