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말(인터넷말) 36] 에코토피아 나눔밥상

 ‘나눔밥상’처럼 좋은 일을 한다며 좋은 이름을 좋은 넋으로 살가이 붙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에코토피아’입니다. 아마, 예전 지식인들이라면 ‘초록세상’이나 ‘녹색지대’ 같은 한자말로 이름을 지었겠지요. 오늘날 지식인들은 한자말보다는 영어로 이름을 짓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이 나라 지식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우리 말로 이름을 안 짓습니다. 아니, 못 짓는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 말로 이름 하나 곱게 지으려고 생각하지 못한다고 할까요. 한국사람이랑 한국말로 쉬우며 예쁘게 알뜰살뜰 이야기꽃 피우는 일은 꿈조차 꾸지 않는다고 할까요. 그예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내기만 할 뿐입니다. (4344.2.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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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35] 홈으로 가기, 이메일서비스

 오늘날처럼 영어를 참 쉽게 아무 데나 쓰는 이 나라에서 “홈으로 go”라 안 하고 “홈으로 가기”라 적은 대목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홈’이란 ‘home’, 곧 ‘홈페이지’를 가리킵니다. 우리 말로는 ‘누리집’이요, 한 글자로 줄이고 싶다면 ‘집’입니다. “민중의소리 집으로 가기”라 적어야 올바릅니다. 영어로는 그저 ‘집’을 뜻할 뿐인 낱말 ‘home’인데, 이 영어를 ‘집’을 뜻하는 자리에서도 쓰고 ‘누리집’을 뜻하는 자리에서도 씁니다. 그렇지만 우리 말 ‘집’은 집을 뜻하는 자리에도 잘 안 쓸 뿐더러, 누리집을 일컫는 자리에서는 아예 안 씁니다. 이래서야 이 땅에 옳고 바른 넋과 뜻과 일이 자리를 잡을 수 있나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인터넷으로 주고받는 편지는 ‘누리편지’요, 같은 뜻으로 ‘인터넷편지’라고도 하는데, 이런 말도 못 쓰고 ‘이메일서비스’라 한다면 퍽 아쉽습니다. 더 살피면, “여기를 눌러 주세요”라 하고, “여기를 클릭 하세요”라 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도 고맙습니다. 이나마 적어 주니 반갑다 할 만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 자리에서 쓴 ‘이메일서비스’란 “편지로 띄워 주는 소식읽기”입니다. 곧, ‘소식편지’를 보내 주겠다는 소리입니다. (4344.2.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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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mediate Family (Hardcover)
Sally Mann / Aperture / 1992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이 알라딘 목록에도 뜨는 줄 이제서야 알았기에, 지난해에 쓴 글을 이제서야 걸친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에 실린 글.)


 그림그리기와 글쓰기와 사진찍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 샐리 만(Sally Mann), 《Immediate Family》(Aperture,1992)


 사진책 《윤미네 집》이 1990년에 처음 나왔을 적에 사람들은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제법 눈길을 끌고 입소문을 타기는 했으나 이 사진책을 기꺼이 장만하면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 삶’을 사진으로 담는 뜻을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2010년에 사진책 《윤미네 집》은 새 옷을 입으며 다시 태어났고, 이제는 퍽 많은 사람들이 널리 눈여겨보며 이 사진책을 장만해 줍니다. 스무 해 만에 다시 나오며 꽤 사랑받는다고 하여 이 사진책에 깃든 뜻이 갑자기 생겨나거나 샘솟지는 않습니다만, 이제라도 사진찍기에 담는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반가운 노릇입니다. 그런데, 《윤미네 집》을 장만한 분들은 이 사진책에서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아쉬운지를 찬찬히 느끼고 있을는지요. 누구나 찍을 수 있어 아름답고, 언제라도 찍을 수 있어 훌륭하며, 어떠한 장비로라도 찍을 수 있어 어여쁜데다가, 작가 아닌 사람이 찍어도 거룩한 줄을 느끼고 있을는지요. 식구들하고 좀더 오래 지낼 수 있으면 더 애틋한 사진을 엮을 수 있고, 집살림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하며 복닥였으면 더욱 살가운 사진을 이룰 수 있으며, 함께 즐길 놀잇거리나 일거리가 있었으면 한결 눈물겨울 사진을 선보일 수 있는데다가, 두고두고 오순도순 이야깃거리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한껏 웃음지을 사진을 펼칠 수 있는 줄을 깨닫고 있을는지요.

 스물다섯 즈음 된 젊은 넋이 당신 어버이 품을 떠나 홀로 나라 안팎을 떠돌던 발자국을 담아낸 이야기책 《먼지의 여행》(신혜 글,샨티 펴냄,2010)을 읽으면, “사진찍기를 원하는 아이들에게 카메라가 없어서,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색연필로 초상화를 그려 주기로 했다. 카메라로 찰칵 찍고 말 순간을 천천히 그림으로 그리며, 나는 아이들과 친해지는 과정에 집중하게 되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아이들이 나를 오래 쳐다보고, 나도 아이들을 오래 바라봤다(133∼134쪽).”는 대목이 있습니다. 젊은 넋은 ‘좋은’ 사진, 또는 ‘즐거운’ 사진, 또는 ‘애틋한’ 사진, 또는 ‘훌륭한’ 사진, 또는 ‘눈물겹거나 웃음지을’ 사진이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몸으로 부대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를 더 부대끼거나 삭여내지는 못합니다. 아직 많이 팔팔하고 풋풋하니까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이 부대끼며 받아들이리라 믿는데, 그림을 그릴 때에만 오래오래 서로를 쳐다보며 얘기를 하고 마음을 모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를 할 때에도 언제나 오래오래 서로를 쳐다보며 얘기를 한 다음에 할 수 있고, 이렇게 해야 참다운 사진을 낳습니다.

 저는 제 사진감인 ‘헌책방’과 ‘골목길’과 ‘자전거’와 ‘우리 집 딸아이’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늘 오래오래 지켜보며 가슴으로 삭여 놓습니다.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며 샘솟는달지, 스스로 우러나오며 터질 때까지는 사진기를 쥐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라도 사진기는 제 목걸이가 되어 줍니다. 싸구려 사진기이면서 꽤나 무거운 녀석을 쓰고 있습니다만, 자전거를 타고 골목마실을 하든 아이를 품에 안고 동네마실을 하든 제 목에는 어김없이 사진기가 대롱대롱 걸려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살필 때에도 사진기를 목걸이처럼 걸고 있습니다. 빨래하고 밥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때를 빼놓고는 늘 사진기를 몸에 걸거나 곁에 놓고 있습니다. 날마다 열 시간쯤은 사진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지 싶습니다. 다만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횟수는 많지 않습니다. 내 눈길로 바라본 내 삶을 내 마음으로 곰삭여서 무르익히지 않고서는 사진기 단추를 누를 수 없습니다. 미처 무르익히지 않았는데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그럴싸한’ 사진은 되지만, 저 스스로 제 사진을 놓고 ‘웃거나 울’ 사진은 못 됩니다.

 서울 용산 헌책방 〈뿌리서점〉을 열여덟 해 다니며 사진은 열두 해에 걸쳐 사천 장 즈음 찍었습니다만, 드나드는 횟수가 늘고 머물며 책을 살피는 나날이 늘수록 이곳에서 다시금 찍는 사진이 한결 사랑스럽고 푸근합니다.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닌 제 고향터전이자 살림집 깃든 골목길을 수천 수만 번 밟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를 때에 비로소 제 웃음보와 울음보를 터뜨리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셜리 만(Sally Mann)이라는 분이 이룬 사진책 《Immediate Family》를 보았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아이를 낳고 기르며 부대낀 온갖 따스함과 눈물과 애틋함을 서려 놓은 사진책을 보았습니다. 《윤미네 집》은 바깥일로 바쁜 아버지가 바쁜 틈을 얼마나 바지런히 쪼개며 식구들과 복닥이는 데에 바쳤는가를 잘 엿볼 수 있어 사랑스러운 사진책이라면, 《Immediate Family》는 홀가분하고 거리낌없는 넋으로 삶을 꾸리는 어머니가 밤낮으로 아이들하고 뒤섞이면서 아이들 자라나는 하루하루를 얼마나 재미나게 껴안았는가를 즐거이 읽을 수 있어 따사로운 사진책입니다.

 두 사진책을 보면서 새삼스레 느끼지만, 생활사진이든 작품사진이든 모두 삶에서 비롯합니다. 꾸밈없이 바라보는 수수한 사진이든 이래저래 만들고 꾸미며 이루는 작품사진이든, 삶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삶을 뒤틀거나 만지작거리며 사진 하나 이루어 냅니다. 삶결 따라 내놓는 사진이지, 삶무늬 없이 내놓을 수 없는 사진입니다. 삶자국 묻어나는 사진이요, 삶자락 없이 일굴 수 없는 사진입니다.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굿판이든, 모조리 나 스스로 살아가는 모양새요 넋입니다. 사랑하는 삶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4343.3.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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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1-02-1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애써 올렸더니 이 책은 품절이네... ㅠ.ㅜ
그러나 1994년 재판본은 있으려나?
아직 이 책이 남았다면,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두 사람이라도
한국에서 사서 보아 주기를 꿈꾸며.... 엉엉..
 
The Life of Yousuf Karsh (Paperback) - Portrait in Light and Shadow
Maria Tippett / House of Anansi Pr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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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말하고 싶은 책은 목록에는 뜨지 않으나, 먼저 유섭 카쉬 님 이야기를 적바림한 분이 있어, 뒤에 붙여서 적어 봅니다) 



 즐거운 삶이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8] 유섭 카쉬(Yousuf Karsh), 《American legends》(Little Brown & com,1992)


 1908년에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나 1924년에 캐나다로 건너가고, 1932년부터 사진길을 걷다가 2002년에 숨을 거둔 유섭 카쉬(Yousuf Karsh)라는 사진쟁이를 가리켜 ‘사람사진을 훌륭히 찍은 분’으로 일컫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섭 카쉬라는 분은 온누리에 손꼽히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기보다 ‘빛으로 담았다’고도 할 테며,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더욱이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을 한껏 북돋우면서 ‘사진을 얕보’거나 ‘사진을 아무것 아닌 손재주’쯤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생각을 바꾸었다 할 텐데, 이런저런 이름을 붙이는 일은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 저런 꾸밈말은 부질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유섭 카쉬 님 사진을 바라보면서 가슴속으로 아무것을 느끼지 못하면서 이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덧없습니다. 남들이 하는 우러르는 말을 따를 노릇이 아니라, 유섭 카쉬 님이 훌륭히 사진을 찍을 뿐 아니라, 사진이 참말로 빛으로 그리는 문화요 예술이라고 느낀다면 내 삶에서 내가 사진기를 쥘 때에 나부터 늘 스스로 ‘빛으로 나누는 삶’을 보여줄 노릇입니다.

 제대로 헤아리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제대로 살아갑니다. 제대로 헤아리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입으로는 북돋우거나 섬기는 말을 읊을 수 있으나, 막상 나 스스로는 달라지거나 거듭나거나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많고, 유섭 카쉬 님이 내놓은 사진책 가운데 하나인 《American legends》(Little Brown & com,1992)에 담긴 사람들처럼 ‘이름나거나 손꼽히거나 훌륭하다 하는 사람을 담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섭 카쉬 님이 찍은 사진이라든지 유섭 카쉬 님이 찍은 ‘이름나거나 훌륭하다는 사람들 모습을 담은 사진’은 여느 사진쟁이나 퍽 이름난 다른 사진쟁이 사진하고 무척 다릅니다.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사진으로 담으려고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손길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요? 사진으로 적바림해서 둘레 사람들한테 보여주거나 나누려는 마음이 다르다고 해야 할는지요?

 생각해 보면, 사진쟁이 가운데 남하고 똑같이 사진을 찍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진기를 쥐어 같은 빛을 받으며 같은 모습을 찍어도 빈틈 하나 없이 똑같다 할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세발이를 세워 넣고 단추만 다른 사람이 누르면 똑같은 사진이 나오려나요?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를 놓고 전기불을 밝힌 곳에서 사진기 단추만 누르도록 하면 유섭 카쉬 님이 찍든 고든 파크스 님이 찍든 한결같다 싶은 사진이 나올까요? 어쩌면, 이렇게 억지로 만들어 똑같은 사진을 뽑을 수 있으니까 사진을 얕보거나 깎아내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계만 잘 다루면 똑같이 찍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포토샵을 잘 건드리면 사진기 없어도 사진을 얻는다고도 하니까, 사진은 문화도 예술도 아니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계만 잘 다루는 사람은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포토샵만 잘 건드리는 사람 또한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은 기계쟁이입니다. 포토샵을 잘 건드리는 사람은 포토샵쟁이예요.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사진쟁이란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유섭 카쉬 님이 ‘사람을 사진으로 담던 여느 사진쟁이’하고 다른 대목이라면, 당신이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서 ‘그저 사진이기에 사진으로 말하는 사람으로서 사진쟁이 길을 걷는다’고 당신 목소리를 담았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당신 사진책 《American legends》를 한 번 볼 때, 두 번 세 번 볼 때에, 열 번째 볼 때에, 또 자꾸자꾸 볼 때에 곰곰이 웃으면서 생각합니다. 참말 당신 사진으로 찍힌 사람들은 보드랍습니다. 부드럽지 않고 보드랍습니다. 웃어도 보드랍고 웃지 않아도 보드랍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이나 당신 사진기를 바라보아도 보드라우며, 당신이나 당신 사진기를 바라보지 않아도 보드라와요.

 어떤 사진은 틀이 좀 기울어집니다. 어느 사진은 팔 한 귀퉁이가 잘린다든지 신발이 잘립니다. 어느 사진은 비례가 살짝 어긋나거나 꽤 어긋납니다. 그러나, 이런 사진이든 저런 사진이든 사진이라는 틀에 깃든 사람을 맨 먼저 느끼며, 이 사진에 담긴 사진을 바라보면 즐겁기 때문에 이 사진은 이런 틀이거나 저런 틀이거나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초점이 덜 맞는다거나 아주 가늘게 떨린 느낌이 잡히더라도 괜찮을 뿐 아니라, ‘괜찮다기보다 이러한 느낌이 깃든 모습’이기에 이이 사진으로 한결 어울리는구나 싶어요.

 마땅한 노릇이지만, 사진을 잘 찍는 틀이란 없습니다. 사람을 잘 찍는 사진 또한 없습니다.

 아주 마땅한데요, 사랑을 잘 하는 길이란 없습니다. 사랑을 잘 하는 사람 또한 없어요.

 잘한다고 하면 잘한다고 하는 대로 즐겁고, 잘 못한다고 하면 잘 못한다고 하는 대로 즐거우며, 영 못하는구나 싶으면 영 못하는구나 싶은 대로 즐거운 삶입니다. 그렇지만, 사람 삶에는 점수를 매기지 못하고, 사진에도 점수를 붙이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빈틈 하나 없이 꽉 짜인 대로 살아가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겠지요. 누군가는 조금 풀어지거나 느슨한 대로 살아가는 곳에서 즐거움을 누리겠지요. 어느 때에는 이렇고 다른 때에는 또 요렇게 즐기면서 웃고 울 테지요.

 한길이란 없습니다. 한길을 걷는 사람이지만 한길이란 딱히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름난 어느 한 사람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더 훌륭하거나 도드라지거나 멋스러이 담는 틀이란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똑같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보이도록 해야 이 사람을 담는 사진이 아닙니다. 유섭 카쉬 님이 찍을 때에는 유섭 카쉬 님이 알거나 사귀면서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목소리가 깃드는 ‘사람사진’입니다. 유진 스미스 님이 찍을 때에는 유진 스미스 님이 알거나 사귀면서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담기는 ‘사람사진’입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이 찍을 때에는 레니 리펜슈탈 님이 알거나 사귀면서 사람들한테 들려주는 넋이 스미는 ‘사람사진’이에요. 한편, 누가 찍든 찍는 사람 매무새와 삶과 넋이 드러나기만 하지 않습니다. 누가 찍든 찍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사진’이지만, 누가 찍더라도 ‘사진에 담기는 사람 삶’은 이이 삶결과 삶무늬 그대로입니다. 사진으로는 늘 달리 보이겠으나, 사진에 담기는 사람은 늘 스스로 제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황순원 님이 〈소나기〉를 썼다 해서 ‘소나기’는 황순원 님 소설대로 소나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황순원 님이 〈소나기〉를 쓴 뒤로 소나기는 ‘황순원이 바라보며 느낀 소나기’가 하나 새로 태어났으며, ‘내가 황순원 님 마음이 되면서 느끼고픈 소나기’에다가 ‘소나기는 늘 그대로 소나기였기에, 소나기가 늘 소나기 그대로이던 마음’은 어떨까를 가만히 짚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찍는 사진은 사람을 가두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진 한 장에 가두어, ‘이 한 장으로 한 사람 모습을 송두리째 말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한 장으로 이 사람 사진은 다 보여주었어!’ 하고 외치려 한다면, 이런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쟁이가 아니라 겁쟁이라 하거나 푼수쟁이라 할 만합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으로 사람을 사귀면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사진으로 이야기 나누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찍으면서 ‘이 사진 한 장’으로 끝낼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두 번 찍으면 ‘한 사람한테 깃든 두 가지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백 번 찍으면 ‘한 사람한테 어린 백 가지 이야기’가 샘솟을 테지요. 사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진이 보여주는 모습이란, 사진으로 나누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사진을 하던 사람이나 사진밥을 먹던 사람이나 사진밭을 일군 사람은 사진이 무엇이라고 여겼는가요.

 이야기를 꽃피우는 사람들이 늘 새롭구나 하고 느끼도록 손길을 내미는 삶이 곧 사진입니다. 멋진 문화나 놀라운 예술이 아닌 즐거운 삶이 사진입니다.

 유섭 카쉬 님은 첫손가락 꼽을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유섭 카쉬 님을 ‘사람사진 아주 훌륭히 찍는 첫손’으로 꼽는 사람이란 사진을 볼 줄 모를 뿐 아니라, 유섭 카쉬 님을 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유섭 카쉬 님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 굳은 마음’을 녹이거나 풀면서 ‘사진이란 이렇게 즐겁습니다’ 하는 길을 조용히 넌지시 살며시 살가이 나누어 준 사람입니다. 사진이란 즐거운 삶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부터 즐겁고,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또한 즐거운 삶입니다. (4344.2.1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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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할 : ‘일본 한자말’이라는 ‘역할’이지만, 이 일본 한자말을 거르거나 다듬거나 손질하면서 알맞게 우리말을 쓰는 어른이 퍽 적어요.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어른들은 ‘안 써야 좋은 말’이라고 이야기할 뿐 아니라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에서도 이런 말은 털자고 외치면서, 막상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쓸까요. 어쩌면, 옳고 바르며 알맞게 쓸 우리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역할(役割) :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 할 맡은 바 직책이나 임무]
※ 역할 분담을 하자
→ 일을 나누어 맡자
→ 일감을 나누자
→ 할 일을 나누자


2. 존재 : 아저씨가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붙던 학교를 다니던 1982∼1987년에 학교나 마을에서 ‘존재’라는 낱말을 들은 일은 거의 없다고 떠오릅니다. 어쩌면 이런 말을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초등학교에서도 이 낱말을 쓸 뿐 아니라, 어린이책이나 청소년책에도 이 낱말이 꽤 자주 나타납니다. 말사랑벗님, ‘존재’ 없이는 말을 못하는지, ‘존재’라는 한자말 때문에 정작 내가 나타내고픈 느낌이나 생각을 못 나타내는지 가만히 헤아려 보셔요.

[존재(存在) : 현실에 실제로 있음]
※ 신의 존재를 부인하다
→ 신이 있지 않다고 믿다
→ 신이 없다고 생각하다
→ 하느님은 없다고 여긴다
→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3. 시작 : “요이, 땅!”은 일본말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고들 하지만, “준비, 시작!” 또한 일본 말투인 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일본사람이 한자를 일본 말소리로 담은 ‘요이’와 ‘땅(총소리를 빗대어 쓰는 말)’을 ‘준비’와 ‘시작’으로 바꾼다 해서 우리말이 되지 않아요. “이제, 간다!”라든지 “자, 가자!”처럼 말해야 올바릅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이라는 우리말이 있어도 ‘시작’이라는 일본 말투에 젖어들고 만 우리들입니다. 껍데기는 한자말이지만, 우리들이 즐겨쓰는 ‘시작’이라는 한자말은, 거의 일본사람이 일본글에 쓰던 투 그대로 따릅니다.

[시작(始作) :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 수업은 9시에 시작한다
→ 수업은 9시에 한다
→ 수업은 9시부터이다
→ 수업은 9시이다
→ 수업은 9시에 처음 한다


4. 생활 : ‘살아감’을 뜻하는 낱말이 ‘생활’이라지만, ‘살아감’을 뜻하는 우리말은 ‘삶’입니다. 집살림과 나라살림과 마을살림이 있고, ‘내 삶’이 있으며, 이러한 삶은 ‘말삶’이나 ‘책삶’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우리말 ‘살다-살아가다-살아숨쉬다’를 알맞춤하게 쓰는 말솜씨를 어릴 때부터 제대로 익히지 못합니다. ‘살아나다-살아내다’-살아남다‘를 곳에 따라 옳게 쓰도록 참다이 배우지 못합니다. 삶을 꾸리는 곳이기에 삶터요, 삶자리요, 삶마당입니다.

[생활(生活) : 사람이나 동물이 일정한 환경에서 활동하며 살아감 ]
※ 생활이 곤란하다
→ 살기가 힘겹다
→ 살아가기 벅차다
→ 살림이 힘들다
→ 살림살이가 버겁다
→ 삶이 고단하다
→ 삶이 힘에 부치다


5. 이별 : 만나니까 헤어집니다. ‘남만’과 ‘헤어짐’은 서로 맞선 낱말입니다. ‘이별’한다고 말해 버릇하면 ‘상봉’이나 ‘조우’나 ‘접촉’ 같은 또다른 한자말이 자꾸 들쑥날쑥 튀어나옵니다. 한자말을 즐겨쓰니 또다른 한자말을 즐겨쓰고, 우리말을 사랑하면 또다른 우리말을 사랑합니다.

[이별(離別) : 서로 갈리어 떨어짐]
※ 친구와 이별했다
→ 친구와 헤어졌다
→ 동무와 안 보기로 했다
→ 벗을 떠나 보냈다


6. 표현 : 우리는 우리 생각을 ‘나타냅’니다. 내 뜻을 ‘드러내’고, 내 마음을 ‘보여줍’니다. 내 사랑을 가만히 담아 ‘말하’기도 합니다. 내 느낌을 말할 때에는 이야기로 ‘들려주’기도 합니다. 언뜻선뜻 ‘비치’기도 하는 넋이요, 살며시 ‘내보이’는 얼이곤 합니다.

[표현(表現) :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언어나 몸짓 따위의 형상으로 드러내어 나타냄]
※ 감사의 표현으로
→ 고맙다는 뜻으로
→ 고마운 마음으로
→ 고마운 나머지
→ 고맙기에
→ 고맙다는 뜻을 담아


7. 우려 : 누구나 국어사전을 곁에 놓고 틈틈이 펼친다면 ‘우려’처럼 알맞지 않을 뿐더러 쓸모가 없는 한자말을 함부로 쓰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말을 너무 모를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말을 알아보려 하지 않아요. 어른들은 한결같이 우리말을 잘 모르는 바보라 할 만합니다. 어른들 때문에 말사랑벗까지 우리말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바보처럼 살아가고야 맙니다. 예쁘며 착한 말사랑벗들이 바보스러운 어른들을 잘 토닥여 주셔요. 고우며 씩씩한 말사랑벗님이 걱정스러운 어른들을 잘 일깨우며 이끌어 주셔요.

[우려(憂慮) : 근심하거나 걱정함]
※ 네 건강이 우려가 된다
→ 네 몸이 걱정스럽다
→ 네 몸이 근심스럽다
→ 네 몸이 걱정이다
→ 네 몸 때문에 걱정이다
→ 네 몸 생각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8. 정도 : “어느 정도 되는지 본다.” 같은 자리는 “어느 만큼 되는지 본다.”나 “얼마나 되는지 본다.”로 손질해야 알맞습니다. 이제는 아주 많은 곳에서 거의 누구나 ‘정도’ 같은 낱말을 쓰지만, 이 한자말이 우리 삶으로 스며든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지난날 한겨레가 쓰던 말이란 ‘만큼’과 ‘쯤’입니다. 이야기 흐름에 따라 ‘만큼’조차 안 쓰면서 서로서로 생각과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정도(程度) : 그만큼가량의 분량]
※ 그 정도 일이야 뭐
→ 그런 일이야 뭐
→ 그쯤 되는 일이야 뭐
→ 그쯤이야 뭐
→ 그 따위 일이야 뭐
→ 그런 쉬운 일이야 뭐
→ 그만 한 일이야 뭐


9. 찬란 : ‘우아(優雅)하다’가 우리말인 줄 잘못 알던 적이 있습니다. ‘우아미 가구’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아’란 ‘아름다움’을 한자로 옮긴 낱말이요, ‘미’란 ‘아름다울 美’라는 한자입니다. ‘우아미’란 ‘아름답디아름다움’이랄 수 있지만, 같은 말을 잇달아 적은 겹말이에요. “화려(華麗)하고 아름답게”를 뜻한다는 ‘찬란’ 또한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한자말입니다. “회려하고 아름답게”이니 ‘여느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말할는지 모르지만, ‘화려’란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이에요. 그러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찬찬히 헤아릴 줄 안다면 ‘우아’이든 ‘찬란’이든 어설피 잘못 쓰거나 얄궂게 마구 쓰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해요.

[찬란(燦爛) : 빛깔이나 모양 따위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움]
※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 아름다이 빛나는 해
→ 아리땁게 빛나는 해
→ 어여삐 빛나는 해
→ 밝고 환히 빛나는 해
→ 맑고 곱게 빛나는 해


10. 사용 : ‘사용법’이란 ‘쓰는법’입니다. ‘사용안내’란 ‘어떻게 써야 하나’를 밝히는 말이니 ‘길잡이’나 ‘알림글’이란 소리이기도 합니다. ‘사용시 주의사항’이란 ‘쓸 때 살필 대목’이에요. 말사랑벗이나 저나 돈을 ‘쓰’지 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사용을 제한하다”는 틀리게 쓰는 말입니다. “자동차를 타지 못하도록 막다”나 “자동차는 못 들어오도록 하다”라 고쳐써야 올발라요. “존댓말을 사용”할 우리들이 아니라 “높임말을 쓸” 우리들이며, “숙소로 사용”할 우리들이 아니요 “잠잘 곳으로 삼”거나 “잠자리로 쓸" 우리들입니다.

[사용(使用) : 일정한 목적이나 기능에 맞게 씀]
※ 우리말을 사용하다
→ 우리말을 쓰다
→ 우리말을 하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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