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할 : ‘일본 한자말’이라는 ‘역할’이지만, 이 일본 한자말을 거르거나 다듬거나 손질하면서 알맞게 우리말을 쓰는 어른이 퍽 적어요.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어른들은 ‘안 써야 좋은 말’이라고 이야기할 뿐 아니라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에서도 이런 말은 털자고 외치면서, 막상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쓸까요. 어쩌면, 옳고 바르며 알맞게 쓸 우리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역할(役割) :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 할 맡은 바 직책이나 임무]
※ 역할 분담을 하자
→ 일을 나누어 맡자
→ 일감을 나누자
→ 할 일을 나누자


2. 존재 : 아저씨가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붙던 학교를 다니던 1982∼1987년에 학교나 마을에서 ‘존재’라는 낱말을 들은 일은 거의 없다고 떠오릅니다. 어쩌면 이런 말을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초등학교에서도 이 낱말을 쓸 뿐 아니라, 어린이책이나 청소년책에도 이 낱말이 꽤 자주 나타납니다. 말사랑벗님, ‘존재’ 없이는 말을 못하는지, ‘존재’라는 한자말 때문에 정작 내가 나타내고픈 느낌이나 생각을 못 나타내는지 가만히 헤아려 보셔요.

[존재(存在) : 현실에 실제로 있음]
※ 신의 존재를 부인하다
→ 신이 있지 않다고 믿다
→ 신이 없다고 생각하다
→ 하느님은 없다고 여긴다
→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3. 시작 : “요이, 땅!”은 일본말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고들 하지만, “준비, 시작!” 또한 일본 말투인 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일본사람이 한자를 일본 말소리로 담은 ‘요이’와 ‘땅(총소리를 빗대어 쓰는 말)’을 ‘준비’와 ‘시작’으로 바꾼다 해서 우리말이 되지 않아요. “이제, 간다!”라든지 “자, 가자!”처럼 말해야 올바릅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이라는 우리말이 있어도 ‘시작’이라는 일본 말투에 젖어들고 만 우리들입니다. 껍데기는 한자말이지만, 우리들이 즐겨쓰는 ‘시작’이라는 한자말은, 거의 일본사람이 일본글에 쓰던 투 그대로 따릅니다.

[시작(始作) :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 수업은 9시에 시작한다
→ 수업은 9시에 한다
→ 수업은 9시부터이다
→ 수업은 9시이다
→ 수업은 9시에 처음 한다


4. 생활 : ‘살아감’을 뜻하는 낱말이 ‘생활’이라지만, ‘살아감’을 뜻하는 우리말은 ‘삶’입니다. 집살림과 나라살림과 마을살림이 있고, ‘내 삶’이 있으며, 이러한 삶은 ‘말삶’이나 ‘책삶’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우리말 ‘살다-살아가다-살아숨쉬다’를 알맞춤하게 쓰는 말솜씨를 어릴 때부터 제대로 익히지 못합니다. ‘살아나다-살아내다’-살아남다‘를 곳에 따라 옳게 쓰도록 참다이 배우지 못합니다. 삶을 꾸리는 곳이기에 삶터요, 삶자리요, 삶마당입니다.

[생활(生活) : 사람이나 동물이 일정한 환경에서 활동하며 살아감 ]
※ 생활이 곤란하다
→ 살기가 힘겹다
→ 살아가기 벅차다
→ 살림이 힘들다
→ 살림살이가 버겁다
→ 삶이 고단하다
→ 삶이 힘에 부치다


5. 이별 : 만나니까 헤어집니다. ‘남만’과 ‘헤어짐’은 서로 맞선 낱말입니다. ‘이별’한다고 말해 버릇하면 ‘상봉’이나 ‘조우’나 ‘접촉’ 같은 또다른 한자말이 자꾸 들쑥날쑥 튀어나옵니다. 한자말을 즐겨쓰니 또다른 한자말을 즐겨쓰고, 우리말을 사랑하면 또다른 우리말을 사랑합니다.

[이별(離別) : 서로 갈리어 떨어짐]
※ 친구와 이별했다
→ 친구와 헤어졌다
→ 동무와 안 보기로 했다
→ 벗을 떠나 보냈다


6. 표현 : 우리는 우리 생각을 ‘나타냅’니다. 내 뜻을 ‘드러내’고, 내 마음을 ‘보여줍’니다. 내 사랑을 가만히 담아 ‘말하’기도 합니다. 내 느낌을 말할 때에는 이야기로 ‘들려주’기도 합니다. 언뜻선뜻 ‘비치’기도 하는 넋이요, 살며시 ‘내보이’는 얼이곤 합니다.

[표현(表現) :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언어나 몸짓 따위의 형상으로 드러내어 나타냄]
※ 감사의 표현으로
→ 고맙다는 뜻으로
→ 고마운 마음으로
→ 고마운 나머지
→ 고맙기에
→ 고맙다는 뜻을 담아


7. 우려 : 누구나 국어사전을 곁에 놓고 틈틈이 펼친다면 ‘우려’처럼 알맞지 않을 뿐더러 쓸모가 없는 한자말을 함부로 쓰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말을 너무 모를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말을 알아보려 하지 않아요. 어른들은 한결같이 우리말을 잘 모르는 바보라 할 만합니다. 어른들 때문에 말사랑벗까지 우리말에 마음을 쓰지 못하는 바보처럼 살아가고야 맙니다. 예쁘며 착한 말사랑벗들이 바보스러운 어른들을 잘 토닥여 주셔요. 고우며 씩씩한 말사랑벗님이 걱정스러운 어른들을 잘 일깨우며 이끌어 주셔요.

[우려(憂慮) : 근심하거나 걱정함]
※ 네 건강이 우려가 된다
→ 네 몸이 걱정스럽다
→ 네 몸이 근심스럽다
→ 네 몸이 걱정이다
→ 네 몸 때문에 걱정이다
→ 네 몸 생각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8. 정도 : “어느 정도 되는지 본다.” 같은 자리는 “어느 만큼 되는지 본다.”나 “얼마나 되는지 본다.”로 손질해야 알맞습니다. 이제는 아주 많은 곳에서 거의 누구나 ‘정도’ 같은 낱말을 쓰지만, 이 한자말이 우리 삶으로 스며든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지난날 한겨레가 쓰던 말이란 ‘만큼’과 ‘쯤’입니다. 이야기 흐름에 따라 ‘만큼’조차 안 쓰면서 서로서로 생각과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정도(程度) : 그만큼가량의 분량]
※ 그 정도 일이야 뭐
→ 그런 일이야 뭐
→ 그쯤 되는 일이야 뭐
→ 그쯤이야 뭐
→ 그 따위 일이야 뭐
→ 그런 쉬운 일이야 뭐
→ 그만 한 일이야 뭐


9. 찬란 : ‘우아(優雅)하다’가 우리말인 줄 잘못 알던 적이 있습니다. ‘우아미 가구’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아’란 ‘아름다움’을 한자로 옮긴 낱말이요, ‘미’란 ‘아름다울 美’라는 한자입니다. ‘우아미’란 ‘아름답디아름다움’이랄 수 있지만, 같은 말을 잇달아 적은 겹말이에요. “화려(華麗)하고 아름답게”를 뜻한다는 ‘찬란’ 또한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한자말입니다. “회려하고 아름답게”이니 ‘여느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말할는지 모르지만, ‘화려’란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이에요. 그러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찬찬히 헤아릴 줄 안다면 ‘우아’이든 ‘찬란’이든 어설피 잘못 쓰거나 얄궂게 마구 쓰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해요.

[찬란(燦爛) : 빛깔이나 모양 따위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움]
※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 아름다이 빛나는 해
→ 아리땁게 빛나는 해
→ 어여삐 빛나는 해
→ 밝고 환히 빛나는 해
→ 맑고 곱게 빛나는 해


10. 사용 : ‘사용법’이란 ‘쓰는법’입니다. ‘사용안내’란 ‘어떻게 써야 하나’를 밝히는 말이니 ‘길잡이’나 ‘알림글’이란 소리이기도 합니다. ‘사용시 주의사항’이란 ‘쓸 때 살필 대목’이에요. 말사랑벗이나 저나 돈을 ‘쓰’지 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사용을 제한하다”는 틀리게 쓰는 말입니다. “자동차를 타지 못하도록 막다”나 “자동차는 못 들어오도록 하다”라 고쳐써야 올발라요. “존댓말을 사용”할 우리들이 아니라 “높임말을 쓸” 우리들이며, “숙소로 사용”할 우리들이 아니요 “잠잘 곳으로 삼”거나 “잠자리로 쓸" 우리들입니다.

[사용(使用) : 일정한 목적이나 기능에 맞게 씀]
※ 우리말을 사용하다
→ 우리말을 쓰다
→ 우리말을 하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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