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주는 이 없어도 사진을 찍는다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22] 이인자, 《받아주는 이 없어도》(경기대학교출판국,1988)



 “과연 장애인들의 침묵의 언어를 대변할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하는 의구심(65쪽)” 때문에 오래도록 망설였지만 조그마한 책으로 묶어 살며시 태어났던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경기대학교출판국,1988)가 있습니다. 아주 조용히 나왔다가 더없이 조용히 스러진 사진책인 만큼, 이 사진책을 알아본 사람을 찾아보기란 어려울 뿐더러, 이 사진책을 놓고 사진이야기를 펼치는 사람 또한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인자 님은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사진학과 교수 또한 아닙니다. 사진평론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신문사 사진기자도 아니에요. 그저 장애인 권리와 삶을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나라 비장애인이라 하는 사람들하고는 아주 멀리 떨어진 채 살아야 하는 장애인은 어떤 웃음과 눈물로 하루하룰 일구는가를 보여주어 함께하고픈 마음을 담은 사람일 뿐입니다.

 똑같이 ‘장애인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도 이름난 사진쟁이가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한결 돋보이거나 널리 알려지리라 생각합니다. 다큐사진을 찍는 누군가 장애인 권리와 삶을 사진감으로 삼는다 하면 사진책으로 묶겠다 하는 출판사가 여럿 나올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장애인 권리와 삶을 사진으로 담으면 사진평론을 하는 사람도 눈여겨볼 테며, 신문사나 방송사에서도 이러한 사진책을 널리 알리겠지요. 이인자 님이 1988년에 《받아주는 이 없어도》를 내놓을 때에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 강사 노릇하고 경기대학교 응용미술과 조교수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교수라 할 수 없던 강사였던 이인자 님이 거의 비매품과 같은 사진책을 대학교 출판국에서 내놓았으니, 이러한 사진책을 경기대학교 바깥에서 알아주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 되면서, 경기대학교 안쪽에서조차 알아주기는 힘든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는 이인자 님 사진과 장애인이 쓴 글을 나란히 엮습니다. 사진책에 실린 글 〈나누고 싶어요〉를 읽습니다. 첫머리에 “나의 사랑 나누고 / 싶어도 / 받아 주는 이 없네 // 나의 다정한 속삭임 나누고 / 싶어도 / 아무도 듣는 이 없네(명혜중학교 정윤수).” 하는 노래가 나옵니다. 비장애인은 장애인하고 사랑을 나누지 않습니다. 비장애인은 장애인하고 사랑을 나눌 마음이 없습니다. 비장애인은 비장애인끼리 어울리고, 장애인은 장애인끼리 어울리고 맙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끼리 어울리며, 돈있거나 이름있는 사람은 돈있거나 이름있는 사람끼리 어울립니다. 저마다 고운 목숨 선물로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저마다 선 자리가 너무 다를 뿐 아니라, 울타리가 참 높습니다. 모두들 착하고 예쁘게 살아가면 즐거울 텐데, 서로를 살가운 벗이나 살붙이로 느끼지 못합니다.

 《받아주는 이 없어도》라는 작은 사진책이 나왔기 때문에 이 사진책에 실리며 조금은 더 읽힐 수 있는 장애인 글 〈어머니〉를 읽습니다. 첫머리에 “어머니! / 당신이 나를 낳으실 때 / 발에 신길 내 작은 신발 / 살 돈을 그 어디엔가 / 마련해 두셨겠지요. / 그러나 내 발은 신발 냄새 / 맡을 수 없어 개미 발 하나 / 다치게 하지 않았읍니다. / 그 공로로 내 발은 개미한테 / 감사패를 받을지 모릅니다(지체부자유자 나항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진을 찍은 이인자 님은 장애인들하고 함께 어울리거나 지내면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길을 마주칩니다. 생각해 보면, 장애인 권리를 외치는 일이란 남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애인 삶을 사랑해 달라는 목소리란 남다른 움직임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지구별을 생각하고, 서로 어깨동무하는 삶터를 살피면 됩니다. 좋은 동무로 지내고, 맑은 벗으로 사귀면 됩니다. 좋은 동무로 지내니까 틈틈이 찾아가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맑은 벗으로 사귀니까 꾸준히 편지를 부치면서 서로 어떻게 지내는가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라면상자를 선물하거나 쌀푸대를 건넨대서 장애인을 돕는 일이 아니에요. 지하철 나들목에 승강기를 마련한대서 장애인 권리가 지켜지지 않아요. 처음부터 지하철 아닌 ‘땅 위 전철’을 놓아야 하고, 처음부터 ‘장애인뿐 아니라 아기 밴 어머니나 늙은 할아버지’ 누구나 걱정없이 느긋하게 타고다닐 전철길이 있어야 합니다. 건널목에서 높은 소리로 울리도록 하는 장치가 없어도, 자가용을 모는 이들은 건널목에서 빠르기를 줄여 차분히 기다리며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통법규를 떠나, 자가용을 모는 이들은 골목길에서 빠르기를 줄여 어린이나 어른이나 느긋하게 골목삶을 일구도록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번 다음 사회시설에 척 하니 내놓는 일이 착한 일이 아닙니다. 돈을 척 하니 내놓지 않아도 돼요. 신동엽 시인이 ‘막걸리병 자전거 꽁무니에 꽂고 시인을 찾아가는 어느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시로 쓰면서 꿈을 꾸었듯이, 막걸리병 하나 들고 쭐래쭐래 걸어서 찾아가 만날 벗님으로 지낼 수 있으면 됩니다. 함께 살아가는 벗이요, 지구별 고운 목숨이며, 착하며 여린 이웃입니다.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는 틀림없이 사진책입니다. 사진 갈래로 나눈다면 다큐사진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다큐사진에 넣지 않아도 되는 사진이요, 애서 사진비평이나 사진평론을 받지 않아도 즐거우면서 아름다운 사진책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책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받아주지 않는 슬픈 한국땅 모습을 살며시 보여주는 구실을 하지만, 비장애인을 꾸짖는다거나 나무란다거나 타이르지 않으니까요. 이인자 님한테 사랑스러우면서 살가운 장애인 벗님 이야기를 사진으로 가만히 담아 보여줄 뿐이니까요.

 어쩌면, 다큐사진은 목소리를 외치는 사진일 수 있고, 달리 보면 다큐사진은 목소리를 외치지 않는 사진일 수 있습니다. 어떠한 목소리를 외치면서 온누리 얄궂거나 슬프거나 어두운 구석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다큐사진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목소리를 외치지 않으면서 그예 따스하며 넉넉히 살아가는 사람들 꿈과 보람을 조용히 보여주는 사진일 수 있어요.

 아픈 사람을 보여주어야 다큐사진이 아닙니다. 슬픈 사람을 사귀어야 다큐사진이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을 찾아다녀야 다큐사진이 아니에요. 힘겨운 사람을 널리 알려야 다큐사진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보여줄 때에 다큐사진입니다. 믿음을 나눌 때에 다큐사진이에요. 따스한 손길과 넉넉한 가슴으로 어깨동무할 때에 다큐사진입니다. 굳센 손으로 흙을 만지면서 함께 땀흘려 일하는 벗일 때에 다큐사진입니다.

 사진책 《받아주는 이 없어도》는 말 그대로 받아주는 이 없어도 서로서로 예쁘게 어울리면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진을 찍은 이인자 님은 알아주는 이 없어도 즐거이 사진을 찍고 기쁘게 동무를 사귑니다.


― 받아주는 이 없어도 (이인자 사진·장애인 글,경기대학교출판국 펴냄,1988.10.15.)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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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텃밭 당근풀 어린이


 텃밭에서 씩씩하게 자라나는 당근풀을 바라본다. 당근씨를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모르면서 용케 심었고, 이 당근씨는 고맙게 하나하나 싹을 틔워 제법 잎이 돋는다. 더 기운을 내 주기를 바라면서 냇물에서 물을 길어 조금씩 붓는다. 그동안 비가 퍼붓느라 흙이 많이 깎였기에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두들기며 북을 돋운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가 저도 북을 돋우겠다고 나선다. 냇가에서 자라는 꽃을 한 송이 꺾어 놀다가, 한손으로는 꽃을 쥔 채 북을 돋우더니, 이내 꽃송이는 고랑에 살며시 내려놓고 두 손으로 북을 돋우며 논다. (4344.5.2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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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문장편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철호 지음 / 유토피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말솜씨가 밥을 먹여 준다지만
 [책읽기 삶읽기 59] 김철호,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문장편》(유토피아,2010)



 사람들은 나날이 학교를 더 오래 다닙니다. 가방끈 길어지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나날이 새로운 책이 쏟아집니다. 이 나라 도서관은 퍽 어설프거나 모자라다 하지만, 이곳저곳에 새 도서관이 들어서며, 사람들이 손에 쥐어들 책이 꾸준히 늡니다. 신문은 무척 많이 나오고, 방송은 온갖 이야기가 하루 내내 끊이지 않으며, 셈틀을 켜고 인터넷을 열면 갖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말이며 글이며 어마어마하다 싶도록 넘칩니다. 잘난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못난 사람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름난 사람만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이름 안 난 사람도 쓸 수 있는 글입니다.

 ‘문장작법’에서 ‘작문’을 거쳐 ‘글짓기’를 지나 ‘글쓰기’로 오면서, 여느 사람들 여느 말씨로 여느 사람하고 나누는 이야기를 글로 담아 나눌 수 있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계급과 지식과 학력과 정보를 뽐내려고 잔뜩 힘을 주거나 멋을 부리는 말씨로 엮는 책이 새삼스레 쏟아집니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 같은 책은 지난날에는 꿈을 꿀 수 없던 책입니다. 지난날 같으면 이와 같은 책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글 바로쓰기》(이오덕 씀)가 처음으로 ‘여느 우리 말로 사랑하는 여느 우리 삶’ 이야기문을 연 뒤로 수많은 여느 우리 말 이야기책이 나왔고,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는 이러한 흐름 한켠에 야무지게 자리합니다.


.. 마지막으로, 글맛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워야 한다. 문장이 뜻도 분명하고 표현에도 군더더기가 없는 데다 ‘맛있는 글’이니 ‘향기 나는 문장’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한마디로 ‘문학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말은 나의 일부이다. 내가 쓰는 글도 나의 일부이다. 나의 말, 나의 글은 나의 정신이자 나의 인격이다 ..  (14쪽)


 ‘낱말편’에 이어 ‘문장편’이 나온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는 책이름 그대로 ‘우리 말을 잘 쓰면 내 삶에 도움이 된다’는 줄거리를 담습니다. 참말 그렇겠지요. 오늘날 이 나라 사람들은 온통 영어사랑에 푹 빠지는데, 영어를 제아무리 잘 하는 한국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국사람하고 한국말로 내 생각을 나눌 수 없다’면 그토록 대단하다는 영어 솜씨라 하더라도 부질없습니다.

 영어를 잘 한다는 몇몇 사람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 모두 영어를 하면서 살아갈 수 없어요. 영어를 잘 해야 나라힘을 북돋울 수 있대서 시골 흙일꾼한테 영어를 쓰며 벼를 거두거나 배추를 기르라 할 수 없어요.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이들이 왜 영어를 써야겠습니까.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사람이 영어를 써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영어로 경기를 해야 할까요. 영어신문이나 영어방송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연속극을 영어로 듣는다든지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영어로 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건 수업을 하건 한국말로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가’를 또렷하게 주고받으면서 생각을 살찌워야 아름답습니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라는 책은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막대접할 뿐 아니라 짓밟기까지 하는 어설프며 슬픈 모습을 뉘우치거나 돌아보자는 목소리를 들려주어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옳게 배우자고 외치며, 한국사람인 만큼 한국말을 알맞게 쓰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좀 궁금합니다. 왜 글쓴이 김철호 님은 ‘나의’와 같은 일본 말투를 쓰지요? 이제 이러한 일본 말투는 한국 말투로 스며들었다 할 만큼 두루 쓰니까 그냥 써도 될는지요? 글쓴이 스스로 토씨 ‘-의’를 다루는 대목에서 “눈과 머리로만 글을 쓰기 때문”이라고 밝히면서, 또 다른 자리에서는 “말의 중요도를 높여주는” 구실이라든지 “한국어 쓰임을 넓힌”다고까지 덧붙입니다.


.. ‘한국의 문학’에서는 뒤의 ‘문학’보다 앞의 ‘한국’에 초점이 놓여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의’의 효과이다. 즉, ‘의’는 자신이 붙게 되는 말의 중요도를 높여주는 구실을 한다 … 이렇게 ‘의’의 쓰임이 넓어졌다는 것은 한국어에서 동사의 비중이 작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명사의 비중이 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 위 예들(분홍색이 티셔츠, 34평의 아파트, 세 가지의 의문, 양쪽의 콧구멍)에서 ‘의’는 의미 전달에 공헌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읽는이들이 의미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이런 표현들이 빈발하는 까닭은, 눈과 머리로만 글을 쓰기 때문이다 ..  (62∼63, 65, 68쪽)


 말은 하는 사람 나름입니다. 글 또한 쓰는 사람 나름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 나름대로 사랑스레 잘 하면 되는 말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 나름대로 올바로 잘 쓰면 되는 글입니다.

 말을 잘 한대서, 곧 말솜씨가 뛰어나다 한다면 아마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겠지요. 글을 잘 쓴대서, 그러니까 글재주가 훌륭하다 한다면 아마 책을 꽤나 팔 수 있겠지요.

 다만, 말을 좀 못 하거나 글을 퍽 못 쓰더라도 말에 담는 넋과 글에 싣는 얼이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울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솜씨로 부리는 말이 아니라, 착하게 나누는 말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재주를 피우는 글이 아니라 참다이 주고받는 글이어야 한다고 느껴요.


.. 그런데 우리가 글을 쓸 때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고유어는 고유어끼리,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더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뒤집어 말하면, 고유어와 한자어는 친화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  (229쪽)


 글쓴이는 “토박이말은 토박이말끼리 잘 어울리고 한자말은 한자말끼리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토박이말을 쓰려고 애쓰는 사람은 낱말뿐 아니라 글월도 토박이 낱말과 토박이 말투로 가다듬습니다. 한자말을 쓰려고 힘쓰는 사람은 낱말을 비롯해 글월까지 한자 낱말과 한자 말투로 추스릅니다. 영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낱말에다가 글월까지 영어로 펼치겠지요.

 쉬우면서 바르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쉬우면서 바르다 싶은 말글을 나눕니다. 지식과 학식을 뽐내려는 사람이라면 아주 마땅히 지식과 학식을 뽐내려는 글을 쓸밖에 없습니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를 읽으면, ‘쉽다고 할 만한 한국말’은 거의 안 보입니다. 이 책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에는 ‘일본 한자말이건 중국 한자말’이건, 또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이 나라 지식인한테 스며들었다 하는 ‘일본 말투’에다가 ‘서양 번역 말투’까지 골고루 드러납니다. 글쓴이는 이러한 글매무새를 다독이거나 손질하지 않으면서 “우리 말 솜씨가 밥 먹여 준다”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책을 덮으며 조용히 생각합니다. 참말, 말솜씨가 밥을 먹여 준다 할 만하며, 오늘날 수많은 글쓰기책이 나오고 말지식책이 나오는 만큼, 영어 지식 못지않게 한국말 지식을 쌓는 일도 ‘내 경력’과 ‘내 소개서’에 적바림할 좋은 보배덩이가 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식으로 얽어매려는 한국말 이야기보다는, 옳고 바르면서 착하고 참다이 꾸려 아름다운 삶으로 북돋우려는 한겨레 한글과 말꽃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무슨 보람이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말솜씨는 없어도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글재주는 없어도 믿음직하게 땀흘려 일하며 어깨동무할 줄 아는 사람이면 반갑겠습니다. (4344.5.29.해.ㅎㄲㅅㄱ)


―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문장편 (김철호 글,유토피아 펴냄,2010.10.15.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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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간 이십 분


 밤 0시를 갓 넘긴 때부터 한 시간 이십 분 동안 갓난쟁이 둘째 똥기저귀가 다섯 차례 나온다. 똥기저귀는 그냥 담그면 안 되기에 밑빨래로 똥 기운을 빼내어 목초물 탄 물에 담그는데, 이렇게 세 차례를 하자니, 잠자리에 들기 앞서 담근 기저귀 빨래 두 장까지 해서 다섯 장이 된다. 더 쌓이면 안 되겠구나 싶어 석 장을 두벌빨래를 한다. 옆지기 핏기저귀도 두 장 빤다. 이제 숨을 좀 돌릴 만한가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고 싶지만, 갓난쟁이는 넉 장째 똥기저귀를 내놓는다. 똥기저귀이기에 곧바로 애벌빨래를 한다. 옆지기 핏기저귀가 한 장 새로 나오기에 이제 더 없겠지 생각하며 애벌빨래를 마친 뒤 두벌빨래를 한다. 핏기저귀 또한 애벌빨래하고 두벌빨래를 해야 손빨래로 핏기를 빼낸다. 핏기저귀가 나온 지 조금 지나면 손빨래로 핏기를 빼기 몹시 힘들다. 아니, 못 빼낸다. 이때에는 두 장이나 석 장까지 기다렸다가 삶아서 핏기를 뺀다. 깊은 밤에 빨래를 하면, 갓난쟁이와 옆지기를 함께 보살피려고 찾아오신 외할머니가 주무시다가 깰밖에 없다. 밤에는 되도록 빨래를 안 하고 싶으나, 물 소리와 헹굼 소리와 비빔 소리와 털기 소리를 내고야 만다. 손에 물이 마를 틈이 없네 하고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와 빨래대에 빨래를 너는데 다섯 장째 똥기저귀가 나온다. 이런이런. 아가야, 뭐니? 밤에 왜 이다지도 똥개놀이를 시키니? 그러나, 기저귀를 갈고 빨래를 해야 하는 사람보다, 속이 썩 안 좋아 한 시간 이십 분 사이에 똥기저귀를 다섯 장이나 내놓아야 하는 아기야말로 힘들 테지. 나야 손에 물기 마를 겨를이 없이 몰아친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몸이 버틴다. 속이 꾸르르해서 자꾸 똥기저귀를 내놓는 갓난쟁이는 속이 더부룩한데다가 똥꼬까지 아플 테지.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대로 있고, 힘든 사람은 힘든 사람대로 있다. 힘드는 사람한테 힘들겠군요 하고 걱정하려 한다면, 힘드는 사람이 보살피는 아픈 사람이 얼마나 아파서 괴로운가를 함께 근심해 주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 책을 읽는 사람은 앎조각을 쌓재서 책읽기를 할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쌓고 믿음을 다지재서 책읽기를 할 사람이다. 내 삶을 보고 힘들 사람 삶을 보며 아플 사람 삶을 보도록 이끄는 책읽기이다. (4344.5.2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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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5-30 22:22   좋아요 0 | URL
흠 이젠 된장님 같으신 분은 없지요.대부분 힘들다고 종이 기저귀를 이용하니까요.
된장님이 빠시는 방법을 보니 옛날 우리 할머님들이 하신 방법과 같으신가봐요^^

파란놀 2011-05-30 22:53   좋아요 0 | URL
예전부터 누구나 하던 빨래가 이제는 다 사라지고... 쓰레기만 나오는 빨래가 되고 말아요. 빨래하고 나오는 헹굼물뿐 아니라, 종이기저귀나 세탁기도 오래지 않아 쓰레기가 되니까요...
 

 



 두 손과 어린이


 둘째가 태어난 날부터 옆지기 어머니(아이한테는 할머니)가 시골집으로 찾아와서 함께 지낸다. 옆지기 어머니는 첫째하고 잘 놀아 주시기도 하고, 옆지기 미역국도 펄펄 끓여 주시기도 하며, 아버지가 집에서 치우지 못한 곳을 알뜰히 찾아내어 말끔히 치우시기도 한다. 무엇보다 둘째를 보살피는 몫을 많이 거들어 주신다. 두 사람이 함께 집일을 하니 아침부터 붙잡은 일손을 열한 시 반에 마무리짓는다. 한 사람이 홀로 집일을 하던 때에는 이른새벽부터 붙잡은 일손이 낮 한 시 즈음에 겨우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마무리된다고 하나, 청소나 빨래까지 끝마치지는 못하기 일쑤.

 옆지기 어머니가 집일과 집살림을 크게 거들어 주시기 때문에, 한 시름 덜면서, 밤에 둘째 기저귀를 갈고 빨며 잠이 모자라 조금 지쳐 쓰러질 때에 걱정을 안 하면서 살짝 등허리를 펼 수 있다. 등허리를 펴며 곰곰이 생각한다. 우리 집 첫째랑 둘째가 무럭무럭 자라서 저희 사랑하는 짝꿍을 만나 함께 살아가고 아이를 낳는다 할 때에,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몸이 몹시 나쁠 옆지기는 조금도 집일과 집살림을 거들지 못하리라 본다. 이때에 할아버지가 될 내가 첫째랑 둘째네에 찾아가서 일손을 거들어야 할 테지. 옆지기 어머니가 이 시골집에서 하는 일처럼 내가 첫째나 둘째네에서 이 일 저 일 쪼물딱쪼물딱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오래오래 튼튼하게 살아야 한다. 오래오래 내 몸을 잘 건사해야겠다.

 할머니가 그림책 하나를 쥐어 아이한테 읽힌다. 나는 할아버지가 될 때에 이렇게 또 그림책 읽기를 할 테지. 내 아이한테 읽힌 그림책을 내 아이가 낳을 아이한테도 읽힐 수 있기를 비손한다. (4344.5.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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