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놀이 책읽기

 


  해가 움직이는 결에 따라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는 널찍하게 생기기도 하고, 좁다랗게 생기기도 한다. 아이가 들어가 몸을 쏙 숨길 만하게 생기기도 한다. 아이 키보다 훨씬 높으나 어른 키로는 이럭저럭 알맞춤한 빨랫줄에 드리우는 갓난쟁이 기저귀는 조금 큰 아이한테는 그림자놀이를 즐기기에 좋은 놀이터를 마련해 준다.


  그림자놀이는 놀이책에 실리지 않는다. 그림자놀이를 놀이로 여길 어른은 아마 없으리라. 그러나, 그림자를 바라보는 아이들은 으레 제 그림자를 따라다니고, 다른 그림자를 콩콩 밟으면서 논다. 말없는 벗이요, 언제나 같은 빛깔로 기다려 주고, 모습을 달리하는 예쁜 동무이다. 날마다 보아도 새삼스럽고, 언제 보아도 다른 빛깔과 모습과 무늬와 결로 찾아드는 좋은 손님이다. (4345.6.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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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네버랜드 과학 그림책 9
히라야마 가즈코 글 그림, 기타무라 시로 감수, 이선아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맛있는 민들레 먹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77]] 히라야마 가즈코, 《민들레》(시공주니어,2003)

 


  민들레는 한국에서도 자라고 일본과 중국에서도 자랍니다. 한국땅에서 자라는 오래된 민들레 말고 ‘서양민들레’라 일컫는 민들레도 있으니, 미국이나 유럽이나 인도나 브라질이나 필리핀처럼, 한국에서 퍽 멀다 싶은 나라에서도 민들레는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며 자라기도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에서는 퍽 먼 옛날부터 민들레를 나물로 먹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어떠했을까요. 한국에서도 함께 자라는 서양민들레는 서양에서 나물로 삼은 풀 가운데 하나였을까요, 아니면 그냥 여느 들풀이었을까요.


.. 민들레를 본 적이 있나요? 어디서 보았나요? ..  (2∼3쪽)

 


  한국땅 옛사람은 민들레뿐 아니라 온갖 풀을 나물로 삼아 먹었습니다. 날로 먹고 무쳐서 먹으며 끓여서 먹습니다. 말려서 먹고 삭혀서 먹으며 달여서 먹어요. 오늘날은 풀물을 짜는 기계가 있는데, 옛날에는 절구로 빻거나 멧돌로 갈면서 풀물을 얻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면 풀죽만 끓여서 먹었을까 궁금해요.


  그런데 한국땅 곳곳이 도시로 바뀌고, 도시는 더 큰 도시가 되며, 시골 읍내 또한 차츰 도시로 바뀝니다. 도시가 늘고, 도시 학교가 늘며, 도시사람이 느는 동안, 민들레를 나물 아닌 꽃으로 여겨 버릇합니다. 요즈음 아이들 가운데 민들레를 바라보며 ‘맛있겠다’ 하고 생각할 아이는 몇이나 있을까요. 요즈음 어른들 가운데 민들레를 바라보며 ‘맛있겠네’ 하고 생각하며 곧장 캐거나 잘라서 챙길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 날씨가 따뜻해지면, 민들레는 새잎을 틔우며 일어나요 ..  (7쪽)

 

 


  어디에서나 흔하게 자라는 민들레입니다. 뿌리가 쉬 뽑히지 않을 뿐 아니라, 뿌리가 잘려도 다시 새 뿌리를 내리고 새 줄기를 올리는 민들레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즐겨먹는 상추처럼, 뜯어도 뜯어도 다시 돋습니다. 캐고 캐도 다시 자랍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자라고 다시 자라요. 한 마디로, 언제나 들판에 차려진 좋은 먹을거리로 삼을 만합니다. 언제라도 들판으로 나들이하며 바구니를 채울 좋은 먹을거리가 될 만합니다.


  그런데, 민들레만 이처럼 씩씩하게 다시 돋지 않아요. 수많은 풀들이 씩씩하게 다시 돋아요. 나무도 이와 같습니다. 커다란 줄기가 잘리더라도 새싹이 돋고 새 줄기가 납니다. 커다란 가지가 잘린다 하더라도 새싹이 새삼스레 돋고 새 가지가 차츰 뻗어요.


  풀은 늘 자랍니다. 나무는 늘 자랍니다. 사람도 늘 자랍니다. 아이도 어른도 늘 자랍니다. 몸이 자라고 마음이 자랍니다. 사람 몸뚱이는 어느 만큼 늙으면 흙으로 돌아가는데, 몸뚱이는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넋은 고이 이어집니다. 풀과 나무도 이와 같겠지요. 열매를 남기고 씨앗을 맺으면서 옛 몸뚱이인 잎사귀와 줄기는 흙으로 돌려보낸 다음, 이듬해 다시 따사로운 봄이 찾아들면 새 몸뚱이인 잎사귀와 줄기가 돋으면서 새 꽃이 피어요.


.. 잎이 뜯기거나 짓밟혀도 뿌리는 살아 있어요. 자꾸자꾸 새로운 잎을 만들어 내지요. 뿌리를 잘라 땅에 심으면 머지않아 잎이 돋아 한 포기 민들레로 자라난답니다 ..  (11쪽)

 

 


  맛있는 민들레를 먹습니다. 맛있는 민들레는 내 몸에서 좋은 기운으로 숨쉽니다. 민들레는 내가 되고, 나는 민들레가 됩니다. 민들레는 내 몸에 섞이고, 내 몸은 민들레와 하나가 됩니다. 내가 먹는 밥이 내 몸을 이루며, 내가 먹는 밥으로 얻은 기운으로 내 넋을 살찌웁니다. 곧, 민들레 풀줄기와 풀잎과 꽃봉오리는 내 고운 넋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나는 민들레를 먹으며 곱게 숨쉬고, 나는 민들레를 바라보며 내 목숨을 이어 주어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가지도 냉이도 오이도 고맙습니다. 감자도 고구마도 쌀도 보리도 고맙습니다. 옥수수도 무화과도 감도 딸기도 고맙습니다. 모두 고맙게 스며듭니다. 모두 고맙게 빛납니다. 지구별은 푸른 빛깔 뽐내는 풀들이 어깨동무하면서 환합니다. 들판도 환하고, 들판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마을을 이루는 사람들도 환합니다. 햇빛이 환하고 꽃빛이 환하며 사람들 눈빛이 환합니다.


  저마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하루를 누립니다. 풀은 풀대로 좋은 삶을 누립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좋은 삶을 누립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좋은 삶을 누립니다. ‘맨드레미’라고도 하고 ‘말똥굴레’라고도 한다는 민들레인데, 고장마다 마을마다 사람마다 다 달리 이름을 붙이며 좋은 삶벗으로 삼았으리라 생각합니다.


.. 꽃받침은 열매를 단단히 감싸 지켜 줘요. 열매가 익으면 꽃줄기는 다시 일어서서 높이 뻗어 올라요 ..  (18∼19쪽)

 


  일본에서 1972년에 처음 나왔다는 그림책 《민들레》(시공주니어)는 한국에서 2003년에 옮겨집니다. 서른한 해만입니다. 일본사람 히라야마 가즈코 님은 일본 아이들이 ‘일본 민들레’를 ‘일본 들판’이나 ‘일본 마을’에서 예쁘게 아낄 수 있기를 꿈꾸며 이 그림책을 빚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래된 그림이라 할 테지만, 사랑스러움이 깃듭니다. 묵은 그림책이라 하겠으나, 따스함이 감돕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새 그림결로 새삼스레 그리기 쉬운 민들레라 할 테지만, 제아무리 예쁘장하게 그린다 하더라도 사랑스러움과 따스함을 담지 못한다면, 즐거이 누릴 만한 그림책으로 태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림책이라 한다면 무엇보다 사랑스러움과 따스함을 담아야 해요. 아이와 어른이 나란히 즐기는 그림책이 되자면, 바로 좋은 꿈과 이야기를 실어야 해요.


  자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과학을 살피는 길만 보여줄 때에는 즐겁다 여길 만한 그림책이 아닙니다. 자연은 자연과학이 아닌 자연이거든요. 아이들한테는 과학지식이 아닌 삶이 아름답거든요.


  아이들은 굳이 민들레 한살이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한국민들레와 서양민들레를 나누어 살필 수 있대서 민들레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참말 민들레를 알고 싶다면, 민들레잎을 뜯어서 먹으면 돼요. 민들레 뿌리랑 꽃대랑 열매를 나란히 풀물로 짜서 마시거나 풀죽을 쑤어서 먹거나 풀지짐을 마련해 즐기면 돼요. 녹두지짐과 감자지짐처럼 민들레지짐을 먹지요. 녹두떡이나 감자떡처럼 민들레떡을 먹지요.


  그림책은 삶을 그립니다. 그림책은 사랑을 그립니다. 그림책은 사람들이 예쁘게 일구는 삶을 그립니다. 그림책은 사람들이 즐거이 나누는 사랑을 그립니다. 오늘날 한국땅 여느 어른들이 여느 민들레를 좋은 삶벗으로 삼아 그림책 하나 어여삐 빚는다면, 이 또한 ‘좋은 삶벗으로 어깨동무할’ 이야기꾸러미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5.6.23.흙.ㅎㄲㅅㄱ)

 


― 민들레 (히라야마 가즈코 글·그림,이선아 옮김,시공주니어 펴냄,2003.6.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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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앓고 난 뒤

 


  앓은 지 엿새가 지난다. 둘째도 첫째도 나도 몸이 아직 제자리를 찾지 않는다. 다만, 처음 앓던 날보다는 조금 수월하기는 하다. 처음 앓던 날과 이튿날과 다음날 또 그 이듬날까지 무엇 하나 할 수 없도록 온몸이 아파 말조차 나오지 않으며 괴로웠다면, 엿새째 되는 오늘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어지러우며 몸이 휑뎅그렁하지만, 한두 시간이나마 잠이 들기는 했다. 지난 닷새 동안 한잠조차 잘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지난 닷새 동안 한잠도 안 자려 했는지 모른다. 스스로 왜 아파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면서, 잠자리에서까지 나 스스로와 싸우는 나날이었으리라 느낀다. 내가 심은 슬픈 미움싹이나 바보싹이랑 싸우는 나날이요, 내가 뿌린 궂은 생각싹을 맑고 밝게 다스리려고 용쓰는 나날이었다고 느낀다.


  내가 모르게 생기거나 일어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꿈속에서 나 스스로 자꾸 이렇게 바꾸고 저렇게 움직이려 애쓴다. 내 꿈을 나 스스로 빚으려고 용쓴다. 내 꿈이 아무렇게나 흐르지 않도록 다스리려 힘쓴다.


  얼마쯤 걸릴까. 얼마쯤 걸려야 아픈 몸을 추스르면서 아픈 생각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을 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말문을 예쁘게 틀 수 있으리라. 스스로 생각을 빚을 수 있을 때에 바야흐로 책 한 줄 읽더라도 깊고 너른 꿈누리를 펼칠 수 있으리라. 아이들은 앓고 나면 무럭무럭 자란다는데, 첫째 아이도 여러 날 앓으면서 부쩍 자라곤 했는데, 두 아이 모두 한결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나려고 앓을 테지. 나 또한 두 아이 어버이라 하지만 아직 철이 덜 든 어른이기에, 훨씬 예쁘며 한껏 푸른 빛을 뿜고자 여러 날 앓으며 새롭게 자라야 하는가 보다. (4345.6.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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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기계 옆 손빨래

 


  빨래기계를 들였기에 씻는방이 좁다. 그래도 빨래기계 옆에 쪼그리고 앉아 손빨래를 한다. 복복 비비고 슥슥 헹군다. 빨래기계를 들이고는 이 기계를 하루에 한 차례 써 보자 생각했으나, 둘째가 많이 어리기 때문에 아직 이 기계를 하루에 한 차례 쓰기는 어렵겠다고 느낀다. 아니, 아예 안 쓴다. 큰 이불을 빨래할 때에만 어쩌다 한 차례 쓴다. 돌을 갓 지나 오줌가리기를 할 무렵이기 때문에, 하루에 끝없이, 또 수없이 오줌바지 빨래가 나오는데, 이를 하루에 한 차례 그러모아 빨래하면, 다 마를 때까지 아이가 입을 바지가 없다. 오줌바지가 나올 적에 두어 벌이든 서너 벌이든 대여섯 벌이든 틈틈이 빨래해서 마당에 널어 말려야 한다. 하루에 너덧 차례 손빨래를 해야 한다. 더구나 돌쟁이 똥바지와 똥기저귀를 빨래기계에 넣고 돌리지 못한다. 바로바로 손빨래를 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돌쟁이가 똥바지나 똥기저귀를 내놓을 무렵, 이때까지 모인 오줌바지와 오줌기저귀를 함께 빨래한다. 아이들이 마당이나 들판에서 개구지게 노느라 땀에 젖거나 흙이 묻은 옷가지를 그때그때 빨래한다. 옳게 잘 쓰면서 품을 줄일 만한 빨래기계라 한다면, 전기를 먹는 덩치 큰 오늘날 빨래기계가 아니라, 발로 꾹꾹 발판을 밟으면서 조물딱조물딱 비벼 주고 헹구어 주는 조그마한 ‘수동 빨래기계’가 있으면 딱 걸맞으리라 느낀다. 낯 씻는 대야보다 조금 크고 높이가 낮은 빨래통 크기이면서, 옆에서 발판을 밟으면 신나게 조물딱조물딱 비비고 헹구어 빨래를 일찍 끝마치도록 하는 ‘수동 빨래기계’라 한다면, 옷가지 여러 벌이라 하더라도 몇 분이면 빨래를 끝마칠 수 있다. 이런 빨래기계라 하면 하루에 대여섯 차례 빨래를 해도 그리 힘들지 않겠지. 집일을 온통 여자한테만 맡기는 요즈음 누리에서도 남자들이 이 같은 연장을 써서 집일을 조금 나누어 맡을 수 있겠지. (4345.6.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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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신부 1
말리 지음 / 길찾기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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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싶은 모습을 바라본다
 [만화책 즐겨읽기 157] 말리, 《도깨비 신부 (1)》

 


  누구나 스스로 보고 싶은 모습을 바라봅니다. 스스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은 안 바라봅니다. 누구나 스스로 겪고 싶은 모습을 바라봅니다. 스스로 겪고 싶지 않은 모습은 안 바라봅니다. 누구나 스스로 알거나 느끼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스스로 모르거나 못 느낀 모습은 바라보지 못합니다.


  배운 사람은 배운 대로 바라봅니다. 배운 대로 바라보기에 배운 틀에 맞추어 생각합니다. 아는 만큼 바라보고, 아는 만큼 느낀다, 하는 얘기가 있는데, 이 얘기란 사람들 누구나 아는 대로 바라볼 때에는 아는 틀에 갇힌다는 소리입니다. 아는 만큼 바라보지 않고, 스스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어떤 느낌을 좇을 수 있다면, 이때에는 어떠한 틀에도 갇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어느 한 가지를 놓고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아이들한테 글쓰기를 가르쳤던 이오덕 님은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하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은 곧 ‘어떤 아는 틀(지식)로 어느 한 가지(사물)를 바라보지 않을 때에는 누구나 시를 쓴다(생각을 키운다)’는 뜻이에요. 오늘날 사람들이 좀처럼 시를 못 쓸 뿐 아니라, 애써 시를 쓰더라도 생각힘이 드러나지 못하는 까닭은, 자꾸 지식으로 재고 따지거나 손재주를 부리기 때문이에요.


- ‘그 사람이 아빠란 건 알았지만, 내가 보고 있던 건 아빠가 아닌데. 엄마의 유골을 따라와 문전에서 서성대는 저것들.’ (7쪽)
- “그래, 끝자락에 서니 네 인생이 그리 안 되어 보이나?” “아니, 후회 없소.” (148∼149쪽)

 

 


  동백꽃을 바라보면서 ‘동백꽃은 몇 월에 피고 빛깔은 어떠하며 열매나 줄기를 어떠한 한약재로 쓴다’ 같은 지식을 섬긴들, 동백꽃이 얼마나 곱거나 나한테 좋은가를 느낄 수 없습니다. 아니, 동백꽃을 알 수 없습니다. 동백꽃을 바라볼 때에는 그저 동백꽃이네 하고 느끼면 돼요. 아니, 동백꽃이라 하는 이름조차 모르면서 느끼면 돼요. 곱다 하면 왜 고운가를 생각하고 내 눈에 도드라지게 뜨인다면 왜 내 눈에 이렇게 돋보일까 하고 생각하면 돼요.


  가을날 들판은 누런 물결이 출렁입니다. 어느 시인이 가을 들판을 ‘황금 물결’이라 노래했대서 가을 들판 누런 빛깔을 굳이 ‘황금 물결’이라 여기며 바라볼 까닭은 없어요. 나는 나대로 내가 좋아하는 생각을 살찌우면서 바라보면 돼요. 그리고, 이 가을 들판을 ‘황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운동경기에서 말하는 ‘금메달’을 굳이 ‘금’ 목걸이라 하지 말고 ‘가을벼’ 목걸이나 ‘봄보리’ 목걸이라 가리킬 수 있어요.


- “이제부터 너랑 난 자매라더구나. 가족 만들기 참 쉽지 뭐야. 근데 네 이름이 선비라구?” “그래. 넌 민아지?” “뭐, 지금은 신민아이지만 이전엔 김민아였어. 네 아빠 핏줄은 아니지만, 내 이름엔 어째 신씨가 더 어울리는 거 같지 않니?” (21쪽)

 

 


  보고 싶은 모습을 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 무엇을 보고 싶은가 하는 생각을 늘 살찌우거나 북돋우거나 키울 때에 즐겁습니다. 나 스스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하고 꿈꾸면서 사랑을 빚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내가 돌보는 삶결에 따라 내 눈결이 거듭납니다. 내가 보살피는 사랑에 따라 내 눈빛이 새롭습니다. 내가 얼싸안는 꿈에 따라 내 눈무늬가 달라져요.


  나는 환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는 곱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는 즐겁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 환한 눈결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고운 눈빛으로 동무와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내 즐거운 눈무늬로 온누리를 따사로이 보듬을 수 있습니다.


  보고 싶은 모습을 보기 때문에, 나는 늘 사랑을 바라보면서 지구별 곳곳에 사랑이 무럭무럭 싹트도록 할 수 있어요. 보고 싶은 모습을 보는 터라, 나는 늘 꿈을 바라보면서 지구별 어디에서나 예쁜 꿈이 자라도록 도울 수 있어요.


  그러니까, 누군가는 자꾸 전쟁 싹이 트도록 내몰아요. 누군가는 자꾸 대학입시지옥이 끊이지 않도록 몰아세워요. 누군가는 자꾸 돈벌이 싸움이 피튀기도록 닦아세워요.


- “허! 네가 정녕 ‘듣는 자’가 맞기나 한 것이냐? 네 눈엔 믿음은 없고 무슨 짓을 해서건 기어오르려는 저급한 탐욕만이 읽히거늘! 날 불러낸 것도 네 그 더러운 것을 위함이었더냐?” (69쪽)
- “니, 그거 아나? 다른 사람들은 용 같은 거 못 본다.” “정말?” “그래.” “니, 사람들한테는 그런 거 뵌다고 말하지 말그래이.” “왜?” “사람들은 겁이 많은 기다. 지들이랑 안 똑같으면 겁을 집어묵는 기다.” (97쪽)

 

 


  어떻게 살아갈 때에 즐거운 하루일까요. 누구와 이웃할 때에 좋은 삶일까요. 어떤 꿈을 품을 때에 빛나는 목숨일까요. 누구와 사랑할 때에 좋은 마을일까요.


  내 오늘을 바라보아 주셔요. 저마다 내 작은 보금자리를 바라보아 주셔요. 내 손바닥을 바라보고 내 발바닥을 바라보아 주셔요. 저마다 내 고운 몸뚱이를 쓰다듬어 주셔요.


  경제성장율을 높인다든지 수출액수를 키워야 하지 않아요. 시험점수를 높인다든지 자격증 숫자를 늘려야 하지 않아요. 내 꿈을 키워야지요. 내 사랑을 빛내야지요. 내 목숨을 누려야지요. 내 삶을 즐겨야지요.


- “느거 할머니는 마을에 몸이 묶여 갖고 평생을 한 번도 이 촌벽지 바닥에서 벗어나도 못했다. 어디 갈 차비라도 할 양이면 마을 장군이 그리 몬 살게 굴어서 들어앉히고, 들어앉히고 하는 기라. 생각해 보기라. 느거 엄마 아파서 죽을 때도 서울로 보러 가도 몬했으니 속으로 을매나 억장이 무너졌겠노. 근데 이번에 그라두만. ‘인자 다 끝났소.’” (157∼158쪽)
- ‘할머니 바보야? 이 따위로 대접받을 거였으면서 뭣 하러 그렇게 사람들 속사정 들어  고, 빌어 주고 그랬어. 나보곤 맨날 친구 많이 사귀라고 그래 놓고 이게 뭐야? 할머니, 할머니도 없잖아. 이렇게 아무도!’ (162쪽)

 


  말리 님 만화책 《도깨비 신부》(허브,2004) 첫째 권을 읽습니다.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 ‘듣는 사람’과 ‘못 듣는 사람’이 찬찬히 나옵니다. 누군가는 무엇을 보고, 누군가는 무엇을 못 봅니다. 무엇인가 보는 사람은 다른 무엇을 못 보지만, 무엇인가 못 보는 사람은 다른 무엇을 봅니다.


  이를테면 바닷가 미르님을 보는 사람이 있되, 바닷가 미르님을 못 보는 사람이 있어요. 도시에서 돈이 될 만한 무언가를 보는 사람이 있고, 도시에서 아무것도 못 보는 사람이 있어요. 시골집 나무한테서 좋은 이야기를 느끼면서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시골집 나무나 풀을 못 느끼거나 안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이는 주식시세표와 은행계좌를 바라볼 테고, 어떤 이는 푸른 들판을 바라볼 테지요. 어떤 이는 문제집과 참고서를 바라볼 테고, 어떤 이는 시집 한 권 바라볼 테지요.


  스스로 누리고 싶은 대로 바라보는 삶입니다. 스스로 사랑하고 싶은 대로 바라보는 하루입니다. 스스로 꾸는 꿈대로 바라보는 눈길입니다. (4345.6.23.흙.ㅎㄲㅅㄱ)

 


― 도깨비 신부 1 (말리 글·그림,허브 펴냄,2004.7.10./5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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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깨비 신부] 야간 병원약사가 그린 만화! 도깨비 신부
    from Medical Writer 쿠쿠쿠의 행복이야기 2012-08-28 17:11 
    어찌하다 "도깨비 신부"라는 만화를 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도깨비라는 소재가 신선하게 느껴졌고, 순정만화라고 되어 있는데 순정만화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