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60) 존재 160 : 무언가에 속해 있는 존재

 

우리의 본성과 우리가 해 온 여행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에 속해 있는 존재임을 깊이 알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本性)과”는 “우리 마음과”나 “우리 참마음과”나 “우리 속마음과”나 “우리 밑마음과”로 다듬을 수 있고, “해 온 여행(旅行) 덕분(德分)에”는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나 “우리가 걸어온 길을 헤아리며”나 “우리가 디딘 발자국을 톺아보며”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속(屬)해 있는”은 “깃든”이나 “하나된”으로 손볼 수 있고, “알게 되어 있습니다”는 “알 수 있습니다”로 손볼 수 있어요.


  한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돌아보는 글월이기에 낱말과 말투를 한결 찬찬히 돌아봅니다.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넓게 헤아립니다. 더 찬찬히 살피고 더 상냥히 가다듬습니다.


  내 밑바탕이 되는 모습은 밑모습이라 할 만할까요. 내 밑바탕이 되는 넋이라면 밑넋이라 하면 될까요. 내 밑바탕이 되는 마음이라면 밑마음이라 하고, 내 밑바탕이 되는 생각이라면 밑생각이라 하면 되나요.


  국어사전에 담긴 낱말을 헤아리고, 국어사전에 안 담겼으나 내 가슴속에 깃들어 숨쉬는 낱말을 헤아립니다. 나는 어디로든 씩씩하게 걸어갑니다. 내가 걷는 이 씩씩한 길은 나들이가 되기도 하지만, 마실이 되기도 하며, 들놀이나 숲놀이가 되기도 합니다. 나는 길을 걸어가며 발자국을 남깁니다. 내 발자국은 발자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느 한 곳에 깃든 내 몸일 수 있어요. 어느 한 곳에 들어가는 내 몸일 수 있어요.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거나 깃들지 않으며 홀가분한 내 몸일 수 있어요.


  알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깨닫습니다. 알고픈 꿈을 시나브로 깨닫습니다. 말이 빛나면서 넋이 빛납니다. 넋이 빛나면서 말이 빛납니다.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스스로 가장 고운 생각을 일구며, 스스로 가장 예쁜 말주머니를 엮습니다.

 

 무언가에 속해 있는 존재임을
→ 무언가에 깃들어 살아가는 줄
→ 무언가 되어 살아가는 줄
 …

 

  우리는 저마다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일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어떠한 사람이 되어 마음을 빛낼까 생각합니다. 내가 이웃이나 동무한테 들려주는 말은 얼마나 곱게 빛나는 말일까 생각합니다. 내가 손을 놀려 쓰는 글에 담기는 이야기는 얼마나 아리땁고 환하며 맑을까 생각합니다. (4345.7.3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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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밑마음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 되어 살아가는 줄 깊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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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ane Michals (Paperback)
Renaud Camus / Thames & Hudson / 1990년 8월
평점 :
품절


 

 

 


 좋거나 나쁜 사진은 없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61] 듀안 마이클(Duane Michals), 《Duane Michals》(Photo Poche,1983)

 


  사진은 언제나 사진일 뿐, 좋다고 할 사진이나 나쁘다고 할 사진은 따로 없습니다. 삶은 늘 삶일 뿐, 좋다고 할 삶이나 나쁘다고 할 삶은 따로 없습니다. 사랑은 노상 사랑일 뿐, 좋다고 할 사랑이나 나쁘다고 할 사랑은 따로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죽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너르며 고운 넋이 되어 아름다운 새누리에서 새 삶을 잇고, 누군가는 스스로 불구덩이 같은 무덤을 파서 고된 죽음을 되풀이합니다.


  아침을 맞이해 해가 뜹니다. 저녁을 맞이해 해가 집니다. 뜨는 해와 지는 해는 그동안 얼마나 기나긴 햇수를 이었을까요. 비가 내리고 구름이 흐르며 바람이 붑니다. 비와 구름과 바람은 얼마나 기나긴 햇수를 이었을까요.


  한결같은 넋은 아름답습니다. 한결같이 흐르는 목숨은 아름답습니다. 한결같지 않은 넋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한결같이 흐르지 못하는 목숨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숲에서 태어나 숲을 먹고 숲을 마시며 숲을 누리던 사람은, 숲사람으로서 한결같은 넋과 목숨을 건사하며 아름다웠습니다. 숲에서 태어났으나 숲을 밀어 없앤 사람은, 숲이 밀려 없어진 자리에서 태어난 사람은, 숲을 잊거나 잃거나 모르거나 등진 채 살아갑니다. 숲이 사라지거나 숲하고 동떨어진 데에서 살아간다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숲에서 나는 목숨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숲을 밀어 없앤다 하더라도 어딘가에는 숲을 남겨 풀과 나무를 얻어야 합니다. 풀과 나무가 있어야 밥을 먹고, 풀과 나무가 있어야 짐승을 길러 고기를 먹습니다. 풀과 나무가 있어야 바다가 튼튼하게 살찌면서 바다에서 고기를 얻습니다.

 

 


  숲도 바다도 하늘도 흙도 모두 한결같습니다. 해가 한결같듯 숲이 한결같고, 바람이 한결같듯 바다가 한결같으며, 비와 구름이 한결같듯 하늘과 흙이 한결같습니다.


  사람은 숨을 쉽니다. 사람은 물로 이루어져 물을 마십니다. 사람은 목숨을 먹습니다. 사람은 숱한 목숨한테 둘러싸인 채 제 목숨을 맑게 빛냅니다.


  따사롭게 내리쬐다가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한여름 햇살을 느끼면서 《Duane Michals》(Photo Poche,1983)를 펼칩니다. 조그마한 사진책 《Duane Michals》는 듀안 마이클(Duane Michals) 님 사진으로 이루어집니다. 조그마한 사진책을 대청마루에 펼쳐 읽자니, 다섯 살 큰아이가 조르르 달라붙으며 같이 보자고 합니다. 아버지랑 같이 본 다음 제가 따로 더 보겠다고 합니다.


  다섯 살 아이는 《Duane Michals》를 읽습니다. ‘어, 머리가 없네?’ ‘어, 나무가 있네?’ ‘어, 아기가 있네?’ ‘어, 옷을 벗었네?’ ‘어, 길이네.’ ‘어, 물이 흐르네.’ 하고 종알종알 입을 놀립니다. 다섯 살 아이는 사진마다 한 마디씩 토를 달면서 읽습니다(2012년에 다섯 살인 큰아이가 앞으로 열 살이 되거나 스무 살이 될 적에는 이 사진책을 어떻게 새롭게 읽을까 궁금합니다).


  다섯 살 아이가 바라보는 사진은 ‘다섯 살 아이가 살아온 결대로’ 느끼며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다섯 살 아이는 ‘듀안 마이클’ 사진을 읽지 않습니다. 다섯 살 아이는 ‘지구별 사진밭 큰 기둥’으로 기린다 하는 어느 사진쟁이 작품을 읽지 않습니다. 다섯 살 아이는 그저 사진을 읽습니다. 다섯 살 아이는 그예 사진책을 천천히 읽으며 놉니다.

 

 

 

 


  누군가는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가서 사진학을 배우거나 사진역사를 배우거나 사진기술을 배우면서 ‘듀안 마이클’이라 하는 사진작가 한 사람과 사진작품을 이론으로 익히고 실천으로 따라할 수 있습니다. 듀안 마이클 님이 사진에 담은 넋과 뜻을 새기면서 곰곰이 살피거나 머리에 지식을 담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사진전시회에 걸린 듀안 마이클 님 작품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녁 이름을 모르는 채 ‘오호, 이러한 사진도 있네.’ 하고 생각하며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훌륭한 사진은 없고, 훌륭하지 않은 사진은 없습니다. 멋있는 사진은 없고 멋있지 않은 사진은 없습니다. 뛰어난 사진과 뛰어나지 않은 사진도 없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결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는 무늬를 사진으로 옮깁니다. 누구나 스스로 마음을 기울이는 사랑을 사진으로 적바림합니다.


  내 사진은 내 이야기입니다. 내 이야기를 다루는 내 사진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습니다. 오직 내 이야기일 뿐이요,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며 빚은 내 꿈과 빛이 담긴 사진 하나일 뿐입니다.

 

 


  나는 더 좋은 사람이 아니지만, 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오직 나입니다. 내 목숨은 더 거룩하지 않지만, 덜 거룩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며 내 눈으로 바라본 모든 삶자락 가운데 한 가지를 사진으로 담기에 더 빛나지 않으나, 덜 빛나지 않습니다. 딱 한 자락을 담는 사진이라 하지만, 딱 한 자락을 담는 사진에 내 온 삶과 이야기와 사랑이 스밉니다. 두 시간짜리 영화를 찍든, 스무 해짜리 영화를 찍든, 아니면 두 장짜리 사진으로 엮든, 이 모든 자리에는 내가 누리는 꿈과 믿음과 생각이 가만히 깃듭니다.


  듀안 마이클 님은 이녁이 생각한 길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듀안 마이클 님은 이녁이 살아가며 사랑하는 꿈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무언가 내세우는 사진이 아니고, 어떠한 주의나 주장을 외치는 사진이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빛을 사진기라는 기계를 빌어 가만히 나타냅니다. 가슴속에서 태어나는 그림자를 사진기라는 기계를 얻어 살며시 드러냅니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는 사진이 되든, 두 손 가운데 손가락 하나를 살짝 벌려 실눈을 뜬 사진이 되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척하지만 눈으로는 빤히 바라보는 사진이 되든, 달라질 이야기란 없습니다. 듀안 마이클 님 사진책 《Duane Michals》 한복판을 펼치면, 꽃다발을 든 할머니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습니다. 나도 빙그레 웃고, 우리 집 아이도 빙그레 웃습니다. 사진책 《Duane Michals》 겉장과 맨 마지막을 바라보면 앤디 워홀이라는 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인데, 나도 때때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리 집 아이도 때때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내가 좋은 삶을 누린다 여기면 내 사진은 늘 좋은 사진이 되고, 내가 좋은 삶을 못 누린다 여기면 내 사진은 늘 좋은 사진이 못 됩니다. (4345.7.3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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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86 : 한여름에 책을 읽다

 


  이른새벽 해맑게 트는 동을 바라봅니다. 하늘이 파랗게 맑고 구름이 하얗게 싱그러운 시골에서는 새벽과 저녁에 눈부신 빛무지개를 잔뜩 누립니다. 새벽에도 저녁에도 하늘 끝은 짙붉게 물듭니다. 어떤 핏물보다 짙고 어떤 열매보다 붉은 노을빛은 내 마음이 착하고 예쁘게 이루어지도록 이끄는 상냥한 손길과 같다고 느낍니다. 새벽노을을 바라보며 《산처럼 생각하라》(소동,2012)라는 책 하나를 읽습니다. ‘지구와 공존하는 방법’을 말한다는 이 책 30쪽에서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생태를 보존하는 일이 기본적으로 비폭력 행위라는 것을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하는 얘기를 들려주고, 74쪽에서 “멸종의 위기는 변화하고 진화하라는 요청 같기도 하다.” 하는 얘기를 들려줍니다.


  책을 가만히 덮습니다. 한여름 풀벌레소리를 듣습니다. 참말 한여름이 무르익을 때에는 무논 개구리 노랫소리가 고요해집니다. 논가를 거닐면 곳곳에서 개구리를 만나지만, 이른여름까지는 개구리 노랫소리 가득하더니, 한여름에 접어들며 개구리 노랫소리가 똑 끊겨요. 아마 사람도 알아들을 만큼 커다란 노랫소리는 잦아들고, 개구리끼리 나누는 작은 목청으로 이야기꽃 피우지 않으랴 싶어요.


  여러 해 앞서, 천성산에서 지율 스님은 도룡뇽 한 마리를 들며 숲을 지키자는 뜻을 널리 펼쳤어요. 참 많은 사람들과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고작 도룡뇽 한 마리’라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만, 고작 도룡뇽 한 마리 살지 못하는 숲이라면 사람도 이곳에서 살지 못해요. 참말, 도룡뇽이고 개구리이고 살지 못하는 ‘숲 없는 도시’는 ‘우리 사람’이 살기에 얼마나 좋은 터전이 될까요. 도룡뇽도 개구리도 없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어깨동무하거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나요.


  김남주 님 묵은 시집 《진혼가》(청사,1984)를 들추다가 〈고구마똥〉이라는 시를 읽습니다. “그래도 누가 있어 허구많은 사람들 / 서울에도 내가 있어 순한 마음이 있어 / 건성으로나마 물어 온다면 / 어떻게들 사느냐고 물어 온다면 / 나는 무어라고 할까 / 부끄러워 뭐라고 할까 // 밤별이 곱더라고 수다를 떨까 / 달빛이 밝더라고 수줍어할까” 하는 대목에 새삼스레 밑줄을 긋습니다. 읽고 또 읽고 새겨서 읽습니다. 정부 추곡수매를 다루는 〈秋穀〉을 읽다가 “다짜고짜 쿡쿡 찔러 / 대창으로 쇠창으로 / 여기저기 찔러 놓고 / 나락 색깔 곱지 않다 / 쭉정이가 섞여 있다 / 가마니가 너무 헐다 / 새끼줄이 퉁퉁하다” 하는 대목에 쓰겁게 밑줄을 긋습니다. 가을걷이 마친 흙일꾼 나락을 재고 따져 사들인다는 정부 공무원은 한여름 들판에 나와 논둑 풀을 뜯거나 피사리를 해 본 적 있을까요. 정부가 등급을 낮추어 나락을 사들인 뒤 몇 곱 값을 붙여 백화점과 대형마트에 쌀을 내놓으면 오직 돈으로 다시 사들여 전기밥솥에 안치는 도시사람은 뭉게구름과 제비 날갯짓과 바람소리를 먹으며 무럭무럭 크다가 이삭이 패는 볏포기를 손으로 쓰다듬은 적 있을까요.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가득 메우며 달립니다. 고속철도가 논밭 사이로 달리고, 숲 한복판에 구멍을 뚫어 달립니다. 도시마다 전기가 모자라다며 아우성이고, 도시에 모자란 전기를 시골마을 한복판에 발전소 세워 채우려고 법석입니다. (4345.7.3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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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하늘 하얀구름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마을을 빙 돈다. 대청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하늘도 예쁘지만, 마당에 서서 올려다보는 하늘도 예쁘고, 자전거를 타고 이웃마을 두루 돌며 올려다보는 하늘도 예쁘다. 자전거를 몰기에 두 팔을 쪽 뻗을 수는 없고, 한 팔을 들어 휘휘 젓는다. 구름을 잡고 싶어 손가락을 조물딱조물딱거린다. 참 파랗구나, 참 하얗구나.


  나는 ‘파란하늘’과 ‘하얀구름’처럼 적고 싶다. 그러나 국어사전에는 두 낱말이 안 실린다. 하늘이라 하면 마땅히 파랗다 여기고, 구름이라 하면 으레 하얗다 여기니까 ‘파란하늘’과 ‘하얀구름’이라는 낱말이 국어사전에 안 실릴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먼먼 옛날에는 자동차나 공장이나 발전소나 온갖 지저분한 것이 없던 만큼, 하늘이 파란 빛깔 아닌 적 없고 구름이 하얀 빛깔 아닌 적 없었으리라. 오늘날이 되었기에 따로 ‘파란하늘’과 ‘하얀구름’처럼 따져야 한다고 느낀다.


  좋은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좋은 하늘이기에 ‘파란하늘’처럼 써 보고 싶다. 좋은 들판이기에 ‘푸른들’처럼 써 보고 싶다. 좋은 바다이기에 ‘파란바다’처럼 써 보고 싶고, 좋은 구름이기에 ‘하얀구름’ 또는 ‘흰구름’처럼 써 보고 싶다. 겨울에는 ‘하얀메’가 될 테고, 여름에는 ‘푸른메’가 될 테지.


  요즈음 사람들은 ‘손빨래’와 ‘손글씨’라는 낱말을 남달리(?) 지어서 쓴다. 나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즐거운 하루를 내 나름대로 즐겁게 내 말빛으로 영글고 싶다. (4345.7.3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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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 놀이

 


  아이는 한글을 언제 배우면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국민학교에 들던 여덟 살에 배웠으니 우리 아이도 그무렵에 배울 만하겠지 하고만 느꼈다. 그러다가 굳이 여덟 살이라는 틀, 또는 초등학교(이든 국민학교)라는 울타리에 매여 생각할 까닭이 없다고 배운다. 일찌감치 글을 가르치거나 책을 읽히려는 뜻이 아니라, 네 식구 요모조모 알콩달콩 살아가며 글놀이를 할 만하리라 느낀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글쓰기인 만큼, 아이는 연필을 쥐고 빈책을 펼쳐 글놀이를 즐길 수 있다.


  깍두기공책에 한글을 또박또박 쓰던 아이가 어느새 깍두기 한 칸에 한글을 깨알같이 집어넣는다. 언제 이렇게 썼니? 곁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책을 읽느라 한눈을 판 사이 깨알글 놀이를 했다. 이렇게 해 놓고는 아버지를 부르며 여기 보라고 하고는 빙그레 웃는다. (4345.7.3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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