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쟁이 어린이

 


  이렇게든 저렇게든 할머니 곁에 붙어서 개구지게 놀고 싶은 어린이는, 할머니가 먹으라고 갖다 준 치즈 한 장을 입술에 찰싹 붙인다. 네 마음껏 놀아라. 네가 무슨 개구쟁이 짓을 하든 안 예쁘겠니. (4345.10.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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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0-05 17:53   좋아요 0 | URL
정말 많이 컸네... 아유 예뻐라

파란놀 2012-10-05 18:17   좋아요 0 | URL
그럼요~ ㅋㅋㅋㅋ
 


 도토리 줍는 책읽기

 


  9월 2일에 음성 할아버지 생일에 맞추어 나들이를 했고, 9월 28일에 한가위를 앞두고 다시 나들이를 한다. 9월 2일 멧자락을 살피니 도토리가 한창 여물려고 하지만, 푸른 빛이 감돌아 덜 익었다. 한가위 즈음 찾아오면 다 익겠거니 여겼는데, 한가위 즈음 도토리는 거의 모두 떨어졌다. 잘 익었을 뿐 아니라 거의 남김없이 바닥에 떨어져서 흙이랑 하나가 되었다.


  흙하고 한몸으로 섞인 도토리는 천천히 뿌리를 내리며 어린 참나무로 자랄 테지. 나는 아직 도토리나 잎사귀나 줄기나 나뭇가지를 살피면서, 네가 굴참나무인지 갈참나무인지 졸참나무인지 떡갈나무인지 상수리나무인지 가름하지 못한다. 그저 도토리요 그예 참나무라고만 여긴다. 이름을 옳게 살피지 못한다.


  참 마땅한 노릇이리라. 왜냐하면, 내가 도토리를 갈무리해서 도토리를 빻고, 도토리를 갈아 도토리묵을 쑤지 않으니까. 내가 몸소 도토리묵을 쑤면서 먹을거리를 마련한다면, 도토리마다 다 다른 맛과 내음을 느낄 테지. 도토리마다 다른 맛과 내음, 여기에 빛깔과 무늬와 모양을 느낀다면, 나는 눈을 감고도 참나무 이름을 찬찬히 헤아릴 수 있으리라.


  나무도감이나 열매도감 같은 책을 백 번 천 번 읽거나 외운대서 도토리를 알 수는 없다. 잎 그림을 백 번 천 번 그려도 도토리를 알 수는 없다.


  도토리를 주워서 먹어야 안다. 잎사귀를 어루만지며 그늘을 누리고, 숲에서 나물을 캐야 비로소 안다. 숲사람일 때에 숲을 이루는 나무를 알지, 숲사람이 아니고서 어떻게 도토리를 알거나 참나무를 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직 숲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시골사람 되어 시골자락을 누리면, 나무와 풀과 꽃마다 어떤 이름인가를 알지 못하더라도 가슴을 활짝 열어 온갖 빛깔과 맛과 내음을 듬뿍 받아들일 수 있다. 모두모두 반가우며 푸른 빛깔이요 맛이요 내음이로구나 하고 느끼ㅕ 활짝 웃을 수 있다. (4345.10.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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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에서 샘솟는 글쓰기

 


  나는 어디를 가나 사진기를 목걸이처럼 겁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빈책 한두 권과 볼펜 한두 자루를 주머니에 꽂습니다. 으레 가방 하나 어깨에 걸칩니다. 내 가방에는 볼펜 열 자루쯤, 빈책 대여섯 권쯤 늘 담깁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조각을 빈책에 적으려고 해요. 아이들이 날마다 터뜨리는 말꽃을 빈책에 적바림하려고 해요.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사진을 찍으니 사진을 찍고, 글을 쓰니 글을 쓴다 할 텐데, 나는 애써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려 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기에 사진을 찍고 글을 써요. 가슴에서 샘솟으니까 사진을 찍고 글을 써요.


  따로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며 사진을 찍지 않아도, 내 가슴에 먼저 사진이 찍힙니다. 애써 볼펜을 붙잡으며 글을 쓰지 않아도, 내 마음에 먼저 글이 아로새겨져요.


  굳이 빈책에 생각조각을 적바림하지 않더라도 내 생각을 잃는 일은 없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터져나온 생각줄기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으니, 내가 바라는 때에 기쁘게 꺼내어 펼치면 돼요. 내 가슴속에서 샘솟는 생각빛은 늘 내 가슴속을 환하게 비추니, 내가 이 빛살을 온누리에 골고루 나누고 싶을 적에 즐거이 꺼내어 비추면 돼요.


  삶이 글이 됩니다. 삶을 누리며 글을 씁니다. 삶을 사랑하는 하루로 글을 읽습니다. 삶을 꿈꾸며 내 이웃들 어여쁜 글을 빙그레 웃으며 마주합니다. (4345.10.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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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창비시선 250
노향림 지음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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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삶쓰기
[시를 말하는 시 4] 노향림,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 책이름 :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 글 : 노향림
- 펴낸곳 : 창비 (2005.7.20.)
- 책값 : 6000원

 


  새벽 일찍 별을 보고 학교에 가는 대입 수험생 푸름이는 새벽별 학교길을 늘 겪으면서 이러한 삶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누군가는 새벽길을 걸어가며 참말 새벽별을 올려다봅니다. 도시에서는 밤별이고 새벽별이고 구경하기 어렵지만, 저 하늘 어딘가에 별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길을 걸어요. 누군가는 새벽길이건 밤길이건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더라도 하늘을 빛내는 별을 느끼지 않거나 살피지 않아요.


  별을 보고 싶은 사람은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별을 봅니다. 햇볕을 누리고 싶은 사람은 도시에서 일하든 시골에서 일하든 햇볕을 누립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삶을 이루고, 삶을 이루는 대로 사랑을 빚어요.


  하루에 몇 분 해를 쬐더라도 해바라기예요. 하루에 몇 초 별을 본다 하더라도 별바라기예요. 꼭 몇 시간 해바라기나 별바라기를 누려야 즐겁지 않아요. 다문 몇 분이나 몇 초라 하더라도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마음그릇이어야 참으로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마음그릇이 아니라면, 하루 내내 느긋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하더라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리라 느껴요.


.. 충남 당진의 깊은 산골로 / 선산이 옮겨 간 뒤 수북한 잡초 속에 / 몇기의 무덤이 앉아 있다 / 그 발치 아래 자투리땅은 감자밭이다. // 그곳에서 캐낸 감자 한 상자가 / 내가 사는 고층 아파트까지 올라왔다. / 붉은 황토가 묻은 감자알들은 / 임부의 배처럼 튼실했다. / 속에다가 무슨 희망을 잉태하고 있는지 / 모두가 크고 둥글었다 ..  (감자를 삶으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지난날을 떠올립니다. 언제나 새벽별을 바라보며 집을 나섰고, 밤별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왔어요. 어느 날 학교에서 생각합니다. 한창 자율학습을 하던 저녁 아홉 시인가 열 시쯤이었을 텐데, 새벽 다섯 시 반에 집을 나서서 밤 열두 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삶이라면, 집에서 보내는 겨를은 고작 다섯 시간밖에 안 될 텐데, 이마저 거의 잠을 잘 뿐,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하고 얼굴 마주치기조차 어렵구나 싶더군요. 이런 삶이 얼마나 내 삶이라 할 만할까 궁금했어요. 이렇게까지 해야 대학교에 갈 수 있나 궁금했어요. 이렇게 중학생 때부터 집식구 누구하고도 말을 못 섞고 얼굴조차 못 보며 여섯 해 푸른 나날을 보내야 대학교에 간다면, 대학교란 무슨 뜻이나 값이 될까 궁금했어요. 푸른 여섯 해를 오로지 대학입시 시험공부에만 바쳐야 한다면, 이토록 푸르고 싱그러운 나날 내 꿈과 사랑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어요.


  그런데, 중학생 때에도 고등학생 때에도, 둘레 동무들은 이러한 대목을 놓고 생각을 기울이지 않아요. 마음을 틀 만한 동무일까 여기며 이런 이야기를 살며시 풀어놓고 보면, 다들 한결같이 하는 말이, ‘야, 대학교에는 가야지.’였어요. 그래서, ‘대학교에 꼭 가야 하니?’ 하고 물으면 ‘대학교에 안 가면 어떻게 하려고?’ 하고 되물어요. ‘대학교에 안 간다고 내가 사람이 아니니?’ 하고 말하면 ‘그건 아닌데.’ 하면서도, ‘내가 대학교에 가지 않으면 너하고 나는 동무가 아니냐?’ 하고 말할 적에는 동무들이 딱히 대꾸하지 않아요.


  모두들 대학바라기가 되도록 길들여지는 나날이라 할까요. 삶바라기가 아닌 대학바라기가 되고, 사랑바라기가 아닌 입시바라기가 되며, 꿈바라기가 아닌 숫자바라기가 되고 말아요.


  교사들이 동무들을 이렇게 내몰았을까 헤아려 보는데, 아마 여느 교사들 또한 스스로 성적바라기나 성과바라기로 구르지 않았으랴 싶어요. 이를테면, 담임을 맡은 이들은 학생 몇을 대학교에 보냈느냐 하는 성적이나 성과나 실적을 바라보았겠지요. 과목 교사는 이녁이 맡은 과목을 배우는 아이들이 시험성적이 얼마나 오르느냐 하는 숫자를 바라보았겠지요.


.. 입주민 환영 플래카드 아래 / 발꿈치 들고 흔들거리던 수국, 부처꽃, 붓꽃들 / 이사꾼들에 짓밟혀 뭉개어졌다. / 빈 터 뒤 휴게소가 저 스스로 뒤집어져 / 폐허이다. / 저 스스로 해체된 슬픔이다 ..  (도원일기)


  햇볕 한 줌 쬘 수 없던 고등학교 수험생으로 지내는 동안 늘 한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또 대학생 가운데에도 서울에서 제법 이름난 대학교 학생이 되고, 이렇게 둘레 사람 모두 바라 마지 않는 ‘대학생 신분’을 거머쥐는 내가 된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이 신분을 누리거나 펼치거나 쓰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대학교를 마친 뒤에는 ‘졸업장’을 이력서 같은 데에 안 쓸 수 있겠느냐 하고, 또는 대학교를 그만두어 아예 졸업장이 없도록 하며 살아가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했어요.


  다 같이 휩쓸리는 물결이 도무지 내키지 않았어요. 모두들 스스로 생각을 멈추고 대학입시 시험공부만 외우는 모습이 도무지 반갑지 않았어요.


  열다섯 푸름이는 열다섯 푸름이한테 걸맞는 삶과 꿈과 사랑을 배우면서 빛내야 한다고 느꼈어요. 열일곱 푸름이는 열일곱 푸름이한테 알맞는 삶과 꿈과 사랑을 익히면서 빛내야 한다고 느꼈어요. 나는 나이를 하나하나 손으로 꼽으면서 이러한 나이에 들어맞을 만한 삶과 꿈과 사랑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어요. 오직 ‘나’이고 싶지 ‘고2’나 ‘고3’이고 싶지 않았어요. 내 이름으로 내 삶을 누리고 싶지, ‘36번 학생’이나 ‘45번 학생’ 같은 숫자라든지 ‘몇 등 학생’이나 ‘몇 점 학생’이라는 숫자로 나를 부르는 일은 기쁘지 않아요.


.. 바다에 사람을 놓아주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 죽은 사람들은 왜 바다로 가는 것일까. / 육체에서 영혼에서 벗어나면 사람은 비로소 자유로운 / 물결이 되는 것일까. 바다 깊이 심해어가 되는 것일까 ..  (바닷가에서 보낸 한철)


  시험이란 시험일 뿐입니다. 대학교란 대학교일 뿐입니다. 시험을 치러 성적이 이러하다면 성적이 이러하다뿐, 성적이 사람을 말하지 않아요. 백일장이나 신춘문예 같은 자리가 있어, 누군가 백일장이나 신춘문예에 뽑힌다 한다면, 그저 뽑히는 일일 뿐, 어떤 글잔치 자리에서 글 한 꼭지 뽑힌다 해서 그 글이 훌륭하거나 놀랍지 않을 뿐더러, 그 글을 쓴 사람이 훌륭하지도 놀랍지도 않아요.


  아주 마땅한 소리인데, 글은 그 글을 쓴 사람 삶이에요. 그 글을 쓴 사람 삶은 좋다 나쁘다 가르지 못해요. 멋지다 안 멋지다 금긋지 못해요.


  더 아름답다 할 삶은 없어요. 더 어여쁘다 할 사람은 없어요. 더 아리땁다 할 사랑은 없어요.

  삶이면 다 삶이요, 사람이면 다 사람이고, 사랑이면 다 사랑이에요.


  시험성적이 잘 나온다 해서 착한 아이가 아니에요. 대학교에 붙었다 해서 좋은 아이가 아니에요. 스스로 삶을 착하게 일굴 때에 착한 아이예요. 스스로 사랑을 좋게 보살필 때에 좋은 아이예요.


  좋고 나쁨이란 없지만, ‘좋은 나날’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슬기를 갈고닦는 이들은 참말 ‘좋음’을 깨달으면서 누리고 빛내요. 기쁘고 안 즐겁고 하는 금이란 없지만, ‘참다운 기쁨’이란 무엇인가 헤아리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이들은 참말 ‘기쁨’을 알아채면서 환히 밝히면서 누려요.


.. 애기똥풀꽃! 하고 속삭여주자 / 하늘은 어느덧 배경음악처럼 / 은은히 깔리고 미풍에 흔들리는 / 또다른 푸른 커튼이 되어주었지요 ..  (맑은 날)


  삶은 스스로 짓습니다. 내 삶은 내가 짓지, 다른 사람이 지어 주지 않습니다. 밥을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먹고 밥그릇을 스스로 치우듯, 내가 오늘 하루 누리는 삶은 언제나 스스로 짓고 스스로 누리며 스스로 마감해요.


  글은 스스로 짓습니다. 내 글은 내가 짓지, 다른 사람이 지어 주지 않아요. 내가 짓는 삶에 따라 글을 지어요. 내가 짓는 생각에 따라 내 글을 내가 지어요. 누리는 하루에 따라 글이 달라져요. 나누는 사랑에 따라 글은 언제나 달라져요.


  삶짓기를 누가 누구한테서 배우지 못하듯, 글짓기를 누가 누구한테서 배우지 못해요. 소설짓기이든 수필짓기이든 시짓기이든, 어느 누구도 아무한테도 가르치지 못해요.


  가르친대서 배우지 못하는 글이요 꿈이며 사랑이에요. 배우려 한대서 가르쳐 줄 수 없는 글이고 꿈이면서 사랑이에요.


  스스로 살아가는 하루가 온통 글이에요. 똥을 누고 빨래를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하루가 온통 글이에요. 아이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며, 아이를 업고 들마실을 하고, 아이를 새근새근 재우는 하루가 온통 글이에요.


.. 베란다 화초에 물을 준다. / 물을 흠뻑 받아먹고 / 굶주렸던 화분들이 지상의 풀밭마냥 / 싱그럽다 ..  (살아 있는 날의 슬픔)


  이론이란 허울이라고 느껴요. 글을 잘 쓰는 이론이란 참말 허울이라고 느껴요. 글을 다루는 이론, 이른바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이란 모두 허울이라고 느껴요. 왜냐하면, 스스로 짓는 삶에 따라 스스로 짓는 글이기에, 이러한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읽은 글이 어떠한가 돌아보면서 찬찬히 적바림하는 글’ 또한 ‘비평과 평론도 삶을 녹아내어 쓰는 글’이 될밖에 없어요. 독후감이든 비평글이든 서평이든 모두 ‘삶글’일밖에요.


  삶글이란 느낌글이요 생각글이며 사랑글이에요. 삶글을 이론에 맞추어 쓰지 못해요. 이론에 맞추어 쓰는 글이란 삶글이 아니고, 느낌글도 생각글도 사랑글도 아니에요.


  이론에 맞추어 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주의주장에 맞추어 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문예사조에 발맞추어 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러한 싯말은 무슨무슨 이야기를 나타낸다고 하는 비유나 은유 같은 틀에 따라 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러한 싯말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는 상징이나 반어 같은 굴레에 따라 시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리는 삶을 쓰는 글이에요. 빚는 삶을 쓰는 글이에요. 즐기는 삶을 쓰는 글이에요. 바라보는 삶을 쓰는 글이에요. 어깨동무하는 삶을 쓰는 글이고, 사랑하고 싶으며 참말 사랑하는 삶을 쓰는 글이에요.


.. 바람 한점 없이 놀 꺼진 서녘 하늘 / 이팝꽃 핀 사이 불쑥 얼굴 내민 고봉밥별 / 그 흰 쌀밥 푸려고 깨금발을 내딛었다가 그만 / 돌부리에 넘어지고 말았네 ..  (개밥바라기별)


  노향림 님 시집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창비,2005)를 읽습니다. 시를 쓰는 노향림 님은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이야기를 싯말에 알알이 담는가를 헤아립니다. 작은 시집 한 권에 노향림 님 삶이 얼마나 깃들었을까 헤아립니다. 이 글월 저 글월에 노향림 님이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누리는 삶이 얼마나 스며들었을까 헤아립니다.


  시를 쓰는 사람 스스로 이녁 삶을 사랑스레 담았다고 느끼면, 이녁이 쓴 시는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 스스로 이녁 삶을 고달프게 담았다고 느끼면, 이녁이 쓴 시는 고달프리라 생각합니다.


  생각이 삶을 이끕니다. 삶에서 생각이 태어납니다. 생각이 사랑을 일깨웁니다. 사랑이 생각을 길어올립니다. 생각이 꿈을 꽃피웁니다. 꿈결에 따라 생각결이 날갯짓을 합니다.


  해가 들려주는 소리는 깨진 종소리일 수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이렇게 느끼면 이러한 소리가 참으로 들려요. 해가 들려주는 소리를 포근한 할머니 밥짓는 소리로 듣는 사람이 있으면, 참말 이러한 소리가 들릴 테지요.


  가슴을 열어 시를 써요. 가슴을 빛내어 시를 써요. 가슴을 살살 어루만지며 시를 써요.


  엊저녁, 다섯 살 큰아이를 품에 안고 한가위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달달 참 밝구나 하고 노래하는데, 보름달 밑으로 살별 하나 반짝 하고 지나갔어요. 마침 큰아이는 다른 데를 쳐다보다가 살별을 못 보았어요. 그런데, 내가 본 빛살이 살별인지, 아니면 지구별 바깥에서 누군가 찾아오며 지나가는 빛꼬리인지는 알 길이 없어요. 그래도, 나는 반짝 하고 빛난 어여쁜 살별이라고 느꼈어요. 보름달 바라보며 큰아이가 착하고 예쁘며 씩씩하다 하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 지나갔으니, 우리 아이는 한가위 보름달과 함께 이 이야기들을 하나둘 가슴에 품으며 새근새근 잠들었는지 몰라요.


  바야흐로 동이 터요. 뿌옇게 낀 안개가 온 멧자락을 덮어요. 소나무에도 굴참나무에도 잣나무에도 안개가 허옇게 내려앉아요. 오늘 하루는 어떻게 즐길까 하고 생각하며 아침을 열어요. (4345.10.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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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위 빨래

 


  한가위를 맞이한 아침부터 부산스레 일손을 놀린다. 차례상을 어머니와 함께 살피고, 요모조모 바지런히 일손을 거든다. 큰아이는 일찌감치 일어나 “나도 하고 싶어.” 하면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하는 일손을 돕고 싶다 말한다. 큰아이더러 대추를 쌓아 보라고 시킨다. 다른 쌓을거리를 아이한테 맡겨 본다. 큰아이는 한 살 두 살 먹을 적마다 이런저런 일거리를 즐겁게 맡아 주리라 느낀다. 밖에 나와서뿐 아니라 집에서도 이런저런 집일을 으레 지켜보고 으레 한손 거들곤 하니까, 즐겁게 놀이 삼아서 아이 삶을 빛내리라 느낀다.


  차례를 다 마치자마자 작은아이가 응애 하고 운다. 어쩜 이렇게 다 마치자마자 울까. 차례를 올리는 동안 조용하기도 했지만, 차례를 함께 지켜보았어도 좋았으리라 싶은데, 앞으로 아이가 맞이할 한가위나 설은 많으니까, 올 한가위에는 새근새근 달게 자며 맞이했어도 좋으리라 느낀다.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난 작은아이는 똥도 누고 엄마젖도 물고 오줌도 누고 온갖 치레를 한다. 나는 차례상을 치우면서 밥상으로 바꾸는 일을 함께한다. 한쪽에서는 이것저것 치우고, 한쪽에서는 요모조모 차린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빈그릇 치우고 이래저래 움직이는데, 모든 일이 다 끝나고 저마다 한숨을 돌리며 커피를 마신다든지 짐을 꾸린다든지 할 적에, 두 아이는 고모 따라 어디론가 놀러 갔고, 나는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아침나절 작은아이가 내놓은 똥바지 똥기저귀가 떠오른다. 나어린 ‘아이들 고모’가 머리를 감으며 내놓은 손닦개도 여러 장 있다. 빨래그릇에 빨래감 꽤 쌓였다. 빨래기계를 돌릴까 싶다가, 나중에 할머니더러 돌리시라 하고, 작은아이 똥옷 빨래 몇 점을 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 똥옷을 빨다 보니 다른 옷가지도 한두 점 더 빨래할까 싶다. 다른 옷가지 한두 점을 더 빨래하다 보니 이 빨래 저 빨래를 더 해야지 싶고, 그예 모든 빨래를 다 해낸다. 수북하게 쌓여 엄두가 안 나던 빨래였으나, 한 점 두 점 하고 보니 훌쩍 사라진다.


  빨래대를 바깥에 내놓는다. 빨래를 하나하나 넌다. 나는 홀로 한가위 빨래를 즐긴다. 햇살아, 햇살아, 한가위 햇살아, 이 빨래들한테 네 고운 볕살을 살그마니 나누어 주렴. 따스한 가을볕 듬뿍 나누어 주면서 시골자락 찾아온 모든 이들한테 네 너른 사랑을 일깨워 주렴. (4345.10.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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