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보라 콩밭 앞에서

 


  콩밭이라기보다 논둑 한쪽 빈자리요, 콩을 줄줄이 심은 자리 앞인데, 큰아이가 우뚝 서더니 땅바닥에 엎드려 콩잎을 뜯는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작은아이가 누나가 하듯 콩잎을 뜯으려 한다. 그렇지만 팔이 짧은 작은아이는 콩잎에 손이 안 닿는다. 조그마한 땅뙈기에서 둘은 알콩달콩 어울려 논다. (4345.10.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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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밭 어린이

 


  시골 논둑에서는 억새가 잘 자란다. 물이 많은 데에서는 갈대도 잘 자란다. 억새가 우거진 논둑 한켠에 큰아이가 선다. 억새는 큰아이보다 훨씬 크다. 보드라운 잎사귀가 한들한들 나부낀다. 서로서로 참 고운 그림이로구나. (4345.10.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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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들판 책읽기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면내 우체국에 다녀온다. 두 아이 모두 재채기를 하기에 천천히 달린다. 천천히 달리다가도 곧잘 선다. 곧잘 서서 누런 벼가 무르익는 들판을 바라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논둑길에서 자전거를 멈춘 다음 두 아이를 내린다. 두 아이더러 걷거나 달려서 가자고 말한다. 아이들은 가을 들판 논둑길을 마음 놓고 달린다. 작은아이 콧물이 많이 흘러 얼마 못 달리고 다시 태우고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살짝이나마 가을 들판을 함께 거닐며 달리는 동안 온몸에 가을내음이 스민다.


  벼내음을 맡고 풀노래를 듣는다. 볕내음을 쬐고 하늘노래를 듣는다. 봄이나 여름처럼 들새와 멧새가 숱하게 날아다니지는 않으나, 가을은 가을대로 환하고 따스한 빛살이 곳곳에 찬찬히 스민다. 파랗게 빛나는 하늘에 구름이 몇 조각 없어도 덥지 않은 날이다. 하늘에 살몃살몃 퍼지는 구름조각은 들판 빛깔을 머금으며 조금 노랗다. (4345.10.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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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교사예찬비’가 있습니다. 1985년 2월 24일에,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에 있던 흥양초등학교(1963년 열고, 1998년 닫음) 교사 김정숙(1960∼1984) 님을 기리며 세운 빗돌입니다. 시골학교 교사 김정숙 님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시골마을에서 살며 시골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시골학교 교사로 일하며, 마을 가난한 아이들을 알뜰히 보살피며 뒷배했다고 해요. 안타까이 스러진 넋을 기려 동료 교사와 후배가 빗돌을 세웠고, 이녁 아버지 김영식 님은 딸아이가 흙으로 돌아간 뒤 딸아이 넋을 이어 시골학교 아이들한테 장학금으로 도와주는 일을 농사를 지으며 꾸준하게 잇습니다. 무명교사예찬비가 있는 전남 고흥인데, 이곳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뒤 시골로 삶자리 옮기며 농사꾼이 되었다가 서른네 살부터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조경선(42) 님이 있습니다. 조경선 님은 《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살림터,2012)라는 교육일기를 내놓았습니다. 내남없이 도시로, 서울로, 온통 시골을 떠나는 흐름하고는 다르게, 도시에서, 또 서울에서 시골로 찾아든 조경선 님은 시골학교에서 문학으로 삶을 가르치는 일을 맡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서울사람으로서 서울을 떠나 강원도 양양에 있는 산촌유학센터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송민혜(38) 님이 있습니다. 송민혜 님은 충청북도 충주 무너미마을에 있는 이오덕학교에서 교사로 지낸 뒤 강원도 양양으로 옮겼습니다. 한 번은 숲속, 한 번은 바닷가, 이렇게 깊은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아가며 서로를 아끼며 빛낼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헤아립니다.

 

 

 

 

 

 

 


  숲사람 이야기 3 - 학교는 삶을 나누는 곳
  시골교사가 품은 꿈

 


  학교가 맡은 몫


  아이들이 학교에 갑니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아이들이 학교에 갑니다. 시골에서는 노란버스가 마을 곳곳을 돌며 아이들을 태우곤 합니다.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를 타려고 아침 일찍 부산하게 길을 나서는 시골마을 아이들이 있습니다. 시골마을 시골버스에는 사람이 퍽 적습니다. 한갓진 버스에는 으레 할머니 할아버지 손님만 있으나, 학교옷 입은 푸름이가 드문드문 보이곤 합니다. 시골버스는 숲이나 바다나 논밭을 가로지르며 달립니다. 시골버스 타고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은 시골마을 삶자락을 가만히 살펴보면서 마음으로 곱게 담을 수 있을까요.


  도시 아이들은 이른아침이나 새벽부터 꽉꽉 들어차는 버스나 전철을 타고 학교를 다닙니다. 저녁이나 밤에도 이와 같습니다. 창밖을 바라볼 겨를이 없고, 창밖을 바라본들 시골처럼 푸른 숲이나 파란 하늘이란 없습니다. 오직 잿빛 건물과 까만 아스팔트뿐입니다. 사람만큼은 오지게 많아,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사람에 치입니다.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인 아이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목숨 건사하는 사람이요, 나와 너 모두 고운 넋인 줄 즐겁게 느낄 수 있을까요.


  학교를 오가는 길은 사뭇 다르지만, 시골이나 도시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야기는 똑같습니다. 모두 똑같은 교과서를 쓰고, 모두 똑같은 시험문제를 풀며, 모두 똑같은 대학교를 바라봅니다. 그저 한 가지만 다릅니다. 도시 아이들은 도시 초·중·고등학교를 나와 도시에서 살아가고, 시골 아이들은 시골 초·중·고등학교를 나와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도시 아이들은 더 커다란 도시로 나아가곤 하는데, 시골 아이들은 ‘아무튼 도시로 나가’고 보며, 한 번 도시로 나갔으면 더 큰 도시로 새로 나아가서 살아가든 처음 나아간 도시에서 뿌리를 박든. 도시내기가 돼요.


  곰곰이 살피면, 오늘날 학교가 맡은 몫이라면, 도시 아이는 언제까지나 도시내기가 되도록 하고, 시골 아이는 차츰 도시내기가 되도록 하는구나 싶어요.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도록 이끌어요. 또는 공장 일꾼이 되도록 등을 밉니다.

 

  시골학교 장학금


  요즈음은 어느 시골에서나, 그러니까 ‘군 단위’ 어느 곳에서나 ‘지역발전 장학금 모으기 사업’을 합니다. 고흥군에서도 해남군에서도 봉화군에서도 양양군에서도 음성군에서도 한결같이 ‘지역발전 장학금 모으기 사업’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섭니다. 고흥군에서는 2012년에 벌써 100억 원에 이르는 장학기금을 모았다며, 앞으로는 200억 원에 이르는 장학기금을 모으겠다고 밝힙니다.


  장학금이란 더 힘내어 배우라는 뜻으로 주는 돈입니다.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있으니, 장학금 받으며 학교를 다니면 여러모로 보탬이 되리라 느껴요. 그런데, 시골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장학금을 왜 주고, 장학기금을 어디에 쓰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장학금은 으레 ‘학력’ 장학금이지 ‘복지’ 장학금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더욱이, ‘지역발전’과 ‘나라발전’을 이루라며 장학금을 줄 뿐, 시골 군 단위에서 시골에 튼튼히 뿌리내리는 아름다운 농사꾼이 되라며 장학금을 주는 일은 없어요. 모든 장학금은 시골 아이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도록 부추깁니다.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시골마을 작은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된 김정숙 님은 이녁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된 뒤, 이 학교 후배이자 제자를 따사로이 품었습니다. 이녁이 흙으로 돌아가고 나서 무명교사예찬비가 섰는데, 이 빗돌 이름대로 ‘이름없는’ 교사한테서 배운 ‘이름없는’ 아이들은 ‘이름없는’ 작은 마을에서 저마다 씩씩하고 꿋꿋하게 살아갈 사랑을 물려받았으리라 느낍니다. 비록 지역발전이나 나라발전 같은 거룩한 뜻을 펴지 못한달지라도, 흙을 사랑하고 숲을 아끼며 바다를 돌보는 착한 어른으로 자랐으리라 느껴요.


  도시에서 시골로 삶자리 옮긴 고등학교 교사 조경선 님은 시골마을 아이들이 비록 도시만 바라보고 도시로 갈 생각만 키운다 하더라도, 이 아이들 가슴에 문학을 바탕으로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는 넋을 북돋우며,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는 어른으로 살아가든, 아이들이 선 땅과 아이들이 바라볼 하늘을 떠올리도록 이야기꽃 피우리라 느껴요.


  도시에 있는 어버이 품을 떠나 산촌유학센터에서 살아가며 시골학교를 다니는, 이른바 산촌유학을 하는 도시 아이들하고 살아가는 도시내기 교사 송민혜 님은, 그곳 아이들하고 똑같은 살림이라 할 수 있을 테지요. 그러나, 아이들이 산촌유학을 끝내고 일자리며 삶자리를 도시에서만 찾고 ‘시골에서 지낸 어릴 적 경험’만 쌓기보다는 ‘시골에서 살며 느낀 즐겁거나 좋은 꿈’을 품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는구나 싶어요. 시골살이란 자연체험이 아니니까요.

 

 

 

 

 

  일반학교·대안학교


  아이 둘과 살아가며 늘 헤아립니다. 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할까 차근차근 헤아립니다. 다섯 살 된 큰아이는 보육원이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안 다닙니다. 두 살 작은아이도 아무 시설에 넣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식구 함께 부대낍니다. 손수 밥을 차려 먹이고, 손수 빨래해서 입히며, 손수 집살림 건사하며 지냅니다.


  새근새근 자는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깁니다. 이불을 걷어차면 여밉니다. 밤에 쉬가 마려우면 쉬를 누입니다. 기저귀에 쉬를 눈 작은아이 옷가지는 날마다 빨래해서 말린 다음 예쁘게 갭니다. 아이들과 마을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곤 하며, 자전거수레에 이 아이들 태우고 면소재지나 바닷가나 이웃마을을 찬찬히 다니곤 합니다. 숲을 거닐거나 들을 걷습니다. 나무하고 얘기하고 풀벌레 노랫소리 듣습니다. 해와 구름과 달과 별을 올려다봅니다.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 때에 즐거울까 생각합니다. 어버이인 내가 이 아이들 나이였을 적, 나부터 무엇을 배우며 하루를 누릴 때에 즐거웠던가 생각합니다. 나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내 삶을 내 손으로 당차게 일굴 만한가 생각합니다. 물려줄 돈이나 지식이나 집이나 땅이 아닌, 함께 살아가며 함께 누리고 함께 빚을 삶을 생각합니다.


  여느 제도권학교에서는 제도권 틀에 맞추어 열두 해 교육과정이 있습니다. 열두 해 교육과정은 오직 대학교 잘 들어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저 대입시험 문제를 잘 풀도록 길들입니다. 시골학교에는 기숙사가 많은데, 기숙사에 들어가는 아이들은 밤늦도록 수험공부를 합니다. 봄이 되어 들마다 봄일에 바쁘건, 여름이 되어 들마다 여름일에 바쁘건, 또 가을이 되어 들마다 가을일에 바쁘건, 이제 시골학교조차 ‘들일 방학’이 없어요. 예전에는 시골학교에서는 봄철과 가을철 열흘 즈음 말미를 마련해, 집식구 들일을 거들도록 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학원에 보내든 과외를 시키든 ‘대학교에 붙도록 돕는 시험공부’를 한 시간이라도 더 시키려고 시골이나 도시나 똑같이 구슬땀을 흘립니다.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학교에 들어가 새로운 길을 찾고 싶다 하면서 일반학교 아이들하고 똑같이 시험공부를 붙잡습니다. 나라에서 인가를 받으며 지원을 받는 대안학교는 비록 학교가 숲속에 있다 하더라도 숲배움을 하지 못하고, 일반학교처럼 교과서를 쓰며 시험공부를 하도록 틀이 짜입니다.


  여러모로 살펴보면, 한국에서는 일반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똑같아요. 학교가 깃든 터는 다르나, 가르치는 이야기는 같아요. 가르치는 이야기가 사뭇 달라도, 일반학교를 마치건 대안학교를 마치건 시골사람 되도록 이끌지 않아요. 숲속에 깃든 대안학교이든 시골에 자리한 일반학교이든, 숲이나 메나 바다나 냇물과 얼크러지면서 흙·풀·하늘·바람·해·냇물 기운을 맞아들이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그러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열두 해, 여기에 대학교 네 해, 이른바 열여섯 해를 학교에서 보내는 아이들은 무엇을 느끼거나 겪거나 배우면서 어른이 될까요. 이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되고 스물다섯 살이 될 적에, 이녁 삶을 얼마나 스스로 일구면서 홀로서기를 할 만할까요.

 

 

 

 

 

  시골 읍·면 고등학교


  시골 읍내 고등학교나 면내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이녁 어버이 일을 거들며 바다를 누비거나 흙을 만지는 아이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주 오랫동안 머물며 수험공부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또는 학교 기숙사에서 먹고자며 수험공부로 하루를 보냅니다. 막상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어도 들풀 이름이나 나무 이름 하나 모르곤 합니다. 들풀을 따서 나물로 무치거나 나무를 보살피는 손길을 익히지 않곤 합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한테는 숲이 없고 바다가 없으며 들이 없습니다. 도시 아이들한테는 놀이시설이나 문화시설이 가까이 있습니다. 버스가 많고, 전철이 있기도 합니다. 시내에는 옷가게·밥집·찻집도 많아요. 다만, 도시에 많은 온갖 놀이·문화시설은 모두 돈을 들여야 즐길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도 돈이 없다면 공공도서관 빼고는 딱히 즐길 만한 시설이 없어요. 더욱이, 돈이 있거나 없거나 마음을 놓고 드러누워 쉴 풀숲이 없어요. 시원하며 조용한 나무그늘이 없어요. 해바라기를 하거나 별바라기를 할 호젓한 들판이 없어요. 책을 읽으며 별자리를 익히고 구름 모양을 외울 수 있을 테지만, 도감이나 자연그림책을 읽으며 풀이름이나 꽃이름을 욀 수 있을 터이나, 나물 뜯기나 밭 일구기는 겪어 보기 어려워요.


  나는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아가며 언제라도 바다로 마실을 가거나 숲이나 들로 나들이를 갑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이웃마을을 찾아갑니다. 자전거를 달려 옆마을을 돌아봅니다. 이동안 둘레를 살펴보면, 다른 시골 아이들은 스스로 이녁 마을 곳곳을 누비지 않습니다. 아이들끼리 동아리를 꾸려 멧길을 오르거나 바닷가를 노닐지 않습니다. 여행이나 관광이 아닌 삶으로 누리는 숲을 느끼지 못해요.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아이들은 가게에서 음료수와 과자를 사서 먹습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아이들은 가게에서 무언가 사다 먹은 다음 빈 봉지를 아무 곳에나 버립니다. 따로 청소부가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청소부란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어버이일 수 있고, 푸름이들이 어른이 되어 스스로 얻을 일자리일 수 있지만,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푸름이들은 스스로 어디에 어떻게 서며 살아가는가를 못 깨달아요.


  도시에서는 유비쿼터스 고등학교가 생깁니다. 시골에서는 전자고등학교나 종합고등학교가 생깁니다. 공업고등학교와 상업고등학교와 농업고등학교는 하나둘 자취를 감춥니다. 이름이 바뀌고 허울이 달라지는데, 어느 고등학교이든 아이들은 ‘도시에서 돈을 버는 일자리’ 솜씨를 익히는 길을 걷습니다. 대학교에 나아가는 길도 ‘도시에서 돈을 버는 일자리’ 솜씨를 익히는 길이 될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밭일이나 들일이나 멧일이나 바닷일은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에서조차 가르칠 수 없다 할 만해요. 고기잡이배를 몰거나 그물을 던지거나 거두는 솜씨를 어느 대학교수가 가르칠까요. 호미질을 하거나 낫질을 하는 솜씨를 어느 과목교사가 가르치나요. 구름과 별을 바라보며 날씨를 읽는 눈썰미를 가르치는 대학교수는 없어요. 들풀과 멧나물을 꺾거나 따거나 캐서 밥거리를 얻는 길을 가르치는 과목교사는 없어요.

 

 

 

 

 

  교과서·책


  두 살 작은아이가 바지에 응가를 눕니다. 으레 아침과 낮과 저녁, 이렇게 세 차례는 똥바지를 치웁니다. 작은아이는 응가를 누고는 속이 아주 시원한지 해맑게 웃습니다. 해맑게 웃는 아이를 안고 밑을 씻기면서 몸도 씻깁니다. 똥에 흠뻑 젖은 바지를 복복 비벼서 빨래합니다.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하는 솜씨는 스스로 익혔습니다. 아니, 내 어린 날 내 어머니가 나와 형 옷가지를 빨래하던 손길을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익혔다고 해야 옳아요. 어제, 나는 내 어머니 손길이 듬뿍 담긴 옷을 입으며 사랑을 배웠습니다. 오늘, 나는 내 손길이 담뿍 배인 옷을 입히며 사랑을 가르칩니다. 그나저나, 빨래하는 솜씨를 다루는 교과서나 책은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손빨래이든 기계빨래이든 가르치지 않습니다. 더 헤아리면, 학교에서는 밥하기나 국 끓이기나 반찬 만들기를 가르치지 않아요. 더더 헤아리면, 학교에서는 사내와 가시내가 서로 사랑하며 아기를 빚는 길을 가르치지 않아요. 더더더 헤아리면, 사랑으로 빚은 아기를 사랑으로 낳아 사랑으로 돌보는 길을 가르치지 않아요. 더더더더 헤아리면, 사랑으로 낳아 돌보는 아기가 사랑스럽게 자라서 아이 스스로 사랑스럽게 홀로서기하도록 이끄는 삶을 하나도 가르치지 않아요. 오직 하나, 학교에 보내라고만 가르치는 학교예요.


  마을 할머니가 쑥을 뜯고 미나리를 뜯으며 시금치를 뜯습니다. 손수 씨를 뿌리는 푸성귀도 뜯고, 굳이 씨를 안 뿌려도 절로 잘 자라는 풀을 뜯습니다. 할머니들은 누구한테서 ‘풀뜯기’를 배웠을까요. 누가 할머니한테 풀뜯기를 가르쳤을까요.


  마을 할아버지가 낫으로 풀을 벱니다. 마을 할아버지가 감나무 뽕나무 석류나무 매화나무 능금나무 유자나무 탱자나무 동백나무 백일홍 비자나무 들을 돌봅니다. 할아버지는 누구한테서 나무 돌보는 손길을 배웠을까요. 누가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 흙일을 가르쳤을까요.


  마을 할머니랑 할아버지한테 흙일을 가르친 분은 무엇을 바탕으로 흙일을 가르쳤을까요. 흙일을 가르치는 교과서나 책이 있었을까요. 당신들이 아이를 낳아 돌볼 적에, 아이를 낳아 돌보는 손길을 가르치던 교사나 가정부나 교수님이 있었을까요.


  먼먼 옛날 옛적부터 사람들이 살아오던 발걸음을 곰곰이 톺아봅니다.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스스로 책이 되었습니다. 종이가 없고 붓이 없었어도, 사람들은 스스로 책을 썼습니다. 사람들 누구나 온몸으로 책을 쓰고 온마음으로 책을 읽었어요. 손과 발에 아로새긴 책을 맑은 눈빛으로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한테 물려줍니다. 눈과 귀와 코와 입으로 몸책을 읽고 마음책을 읽으며 삶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하며 놀이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물질을 하며 물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숲을 누비며 숲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들에서 풀뜯기를 거들며 풀책을 읽고, 풀피리를 부르며 노래책을 읽습니다. 소를 몰고 새를 만나며 개구리랑 노닥거리는 동안 짐승책과 목숨책을 읽습니다. 언제나 하늘책, 구름책, 해책, 달책, 무지개책, 미리내책처럼, 싱그러이 빛나는 빛책을 읽습니다. 고려나 조선 같은 지난 어느 날, 어느 지식인과 학자는 한문으로 책을 썼다고 합니다. 예전 지식인과 학자가 한문으로 쓴 책을 오늘날 사람들이 한국말로 옮기고 한글로 새로 적바림해서 다시 읽곤 합니다. 옛것을 읽히며 새것을 한결 넓게 아로새긴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문책을 한글책으로 고쳐서 읽기는 하지만, 먼먼 옛날부터 수수하고 꾸밈없는 여느 내 어버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지던 삶책과 사랑책과 꿈책만큼은 제대로 읽지 못해요. 살아서 펄떡거리는 이야기책을 깨닫지 못해요.

 

  시골교사가 품는 꿈


  두 아이와 살아가는 나와 옆지기는 우리 집 아이들을 아직 학교에 넣을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 나라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사랑스레 품으며 사랑을 가르쳐 사랑을 빛내는 푸름이로 살아가도록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학교에 우리 아이들을 넣어 사랑을 모르거나 사랑을 등지는 삶을 꾸리는 일은 달갑지 않습니다.


  나는 대학교를 그만두어 고졸이고, 옆지기는 고등학교를 그만두어 중졸입니다. 아버지요 어머니인 우리 두 사람한테는 요즈음 흔히 일컫는 가방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은 나와 옆지기한테서 사랑을 얼마든지 받아먹거나 물려받을 수 있어요. 우리 두 사람이 사랑으로 살아가면 아이들은 시나브로 사랑을 깨닫고 느끼며 배워요. 어버이 두 사람이 꿈을 생각하고 꿈을 이루려 활짝 웃으면, 아이들은 차근차근 꿈을 키우고 꿈날개를 펄럭일 수 있어요.


  얼추 서른 해쯤 앞서 흙사람이 된 ‘무명교사’를 마음으로 만납니다. 시골 읍내 고등학교 ‘문학교사’를 몸으로 만납니다. 또 다른 시골 산촌유학센터 ‘삶교사’를 이야기로 만납니다. 세 분 시골교사는 이녁이 맡은 아이들이 똑똑해지거나 돈을 잘 벌거나 이름을 드날리기를 바라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세 분 시골교사는 이녁이 사랑하며 아끼는 아이들한테 꿈과 슬기와 빛과 삶을 몸소 보여주고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하루하루 곱게 일구려 한다고 느낍니다. 푸른 숲을 함께 좋아하기를 바라고, 파란 하늘을 함께 맛보기를 바라며, 너른 들과 맑은 물로 다 같이 너른 가슴과 맑은 눈빛이 되기를 바라리라 생각합니다. (4345.9.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시민사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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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0-05 17:58   좋아요 0 | URL
예쁘게 아이들을 키우시니까,
당연히 두아이 모두 너른 가슴과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아이들이 된장님과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이해해주실까,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해주실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또는 이렇게 맑은 아이들을
제도권이 아닌 다른 선택을 세상에서 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합니다.

그냥.... 된장님이 하두 맑게 사시니, 걱정이 되는 걸겁니다.
아마도 그것까지 헤아리셔서 잘 하시리라 믿으면서도 말이지요. ^^

파란놀 2012-10-05 18:10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으레 궁금하게 여기는데,
아이들을 굳이 '제도권'이라는 데로 보내야 할 까닭이 없어요.

제도권 아닌 삶을 누리는 하루와
제도권 톱니바퀴가 되는 하루는
'다른 길'이 아니라 '삶인 길'과 '삶이 아닌 길'이에요.

곧, 아이들은 '삶인 길'에서 스스로 좋아할 길을 찾아가기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아이들 스스로 저마다 좋아할 '삶인 길'을 잘 찾도록
어버이부터 '삶인 길'에 즐겁게 서서 씩씩하게 걸어가면
모든 일이 사랑스레 이루어지리라 느껴요.

^^
 
경계의 린네 7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나한테 돌아오는 말
 [만화책 즐겨읽기 182] 다카하시 루미코, 《경계의 린네 (7)》

 


  누구나 밥을 먹은 대로 똥을 눕니다. 누구나 밥을 먹는 만큼, 누구나 목숨을 먹습니다. 내가 받는 밥상은 내가 받아들일 목숨입니다. 내가 차리는 밥상은 내가 다루는 목숨입니다.


  내가 푸른 목숨을 밥으로 삼아 먹으면, 나는 푸른 빛깔과 내음 짙은 똥을 눕니다. 내가 가공식품을 밥으로 삼아 먹으면, 나는 가공식품 빛깔과 내음 짙은 똥을 눕니다. 똥내음이 고약하다면 고약하구나 싶은 밥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똥내음이 구수하다면 구수하구나 싶은 밥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푸른 바람을 쐬면서 푸른 숨결을 마시는 사람은, 온몸을 돌고 돈 푸른 바람이 푸른 숨결 되어 밖으로 나옵니다. 숲은 사람한테 푸른 숨을 베풀고, 사람은 숲한테 푸른 숨을 돌려주어요. 서로서로 애틋한 사이요 삶이며 이웃입니다.


  내가 마시는 물 또한 목숨입니다. 내가 마시는 물 그대로 내가 누는 오줌이 되고, 내가 누는 오줌이 땅으로 스며들고 바다로 흘러들어 다시금 내가 마시는 물이 돼요. 빗물이 내 몸으로 스며듭니다. 오줌이 흙을 거치고 바다를 거쳐 빗물로 됩니다. 하늘을 흐르는 구름은 내 몸이 바뀌어 이루어진 모습이요, 내 몸은 하늘을 흐르는 구름이 스며들어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 ‘그동안 로쿠도는 한 번도, 나츠미와 데이트할 때처럼 즐거운 얼굴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건 영업용 미소야.” ‘그렇구나.’ “로쿠도, 혹시 지금 즐겁니?” ‘즐겁다.’ (41∼42쪽)
- “단념하고 성불했구나.” “좀 안 됐긴 하네. 가장 상처 안 줄 만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서 했지만.” (60쪽)


  내 모습이 내 아이 모습으로 스며듭니다. 아이들 모습이 어른들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사회에서는 으레 청소년 범죄라느니 청소년 문제라느니 떠드는데, 청소년이 저지르는 범죄나 일으키는 문제는 없어요. 모두 어른들이 저지르는 잘못이요 어른들이 일으키는 말썽입니다. 어른들 슬프거나 얄궂거나 못난 모습이 ‘아이들이라 하는 거울’에 비추어 나타나는 셈입니다.


  곧, 아이들 눈망울이 맑고 환하다면, 어른들 또한 눈망울이 맑고 환하다는 뜻이에요. 아이들과 함께 어른들 누구나 맑고 환한 눈망울로 살아가고 싶은 꿈이라는 뜻이에요. 비록 어른들이 흐리멍덩한 눈망울이 되고 말았다 하더라도, 어른들 가슴 한켠에는 맑고 환한 눈망울을 바라는 꿈이 있다는 뜻이에요.


  아침에 물을 마시고, 낮에 물을 마시며, 저녁에 물을 마십니다. 물을 마시기 앞서 물병을 들여다봅니다. 물병에 담긴 물을 바라봅니다. 너는 그예 물이면서 사랑일 테지. 너는 그예 물이면서 사랑이요 내 몸일 테지. 내 몸은 사랑이면서 숨결이고 푸른 빛살이라면, 내 몸을 거치고, 내 몸을 이루며,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들 또한 사랑이요 숨결이며 푸른 빛살이 될 테지.


  생각하는 대로 물방울이 결을 이룹니다. 생각하는 대로 물방울이 내 몸으로 스며듭니다. 씩씩하고 튼튼하게 하루를 맞이하면서 누리자 하고 생각할 때에는, 물방울 결이 곱고 정갈한 무늬를 이룹니다. 내 몸은 새로 받아들이는 물방울 결에 따라 한결 씩씩하고 튼튼한 몸을 이룹니다. 스스로 삶을 빚습니다.

 

 

 


- “생각해 보면 딱한 놈들이야.” “로쿠도.” “린네 님 멋지셔.” “예, 반성하고 있어요.” “저, 사과의 표시라기엔 모자랄지 몰라도, 1000엔 드릴 테니 용서해 주세요.” “옛! 정말이십니까, 도련님들!” “린네 님, 볼썽사나워요.” (116쪽)
- “아무리 제령 때문이라지만, 처음으로 로쿠도가 내 방에 들어오는 거니까.” ‘그보다, 남자애가 내 방에 오는 것도 처음이네.’ (125쪽)


  시골에 깃든다 하더라도 누군가한테는 들새나 멧새 노랫소리가 안 들린다고 합니다. 누군가한테는 풀벌레 노랫소리나 개구리 노랫소리 또한 안 들린다고 합니다. 누군가한테는 아이들 울음소리가 안 들리기도 합니다. 누군가한테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텔레비전 켜진 소리가 들리겠지요. 어떻게 살아가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귓결을 스치는 소리가 달라요. 어떻게 사랑하고 꿈꾸느냐에 따라, 귓속으로 파고드는 소리가 달라요.


  잠자리에 드러누워 아이들을 토닥이다가 손을 가만히 둡니다. 내 손바닥을 거쳐 내 숨소리가 아이들한테 옮습니다. 내 손바닥을 거쳐 아이들 숨소리가 나한테 옮습니다. 아이들 가슴이 콩콩 뛰는 소리를 듣습니다. 내 가슴이 콩콩 뛰는 소리를 듣습니다.


  손바닥을 거치는 소리만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손바닥을 거쳐 두 사람 마음이 흐릅니다. 내가 곱게 품는 마음일 때에는 고운 숨결이 손바닥을 거쳐 이어집니다. 내가 밉게 품는 마음일 때에는 미운 숨결이 손바닥을 거쳐 이어집니다.


  하늘이 푸르구나, 들판이 누렇구나, 생각하고 말할 적에, 하늘은 한결 푸르게 빛나고 들판은 더욱 누렇게 무르익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예쁘구나, 사랑스럽구나, 생각하고 말할 적에, 아이들은 한결 예쁘고 더욱 사랑스레 빛납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생각하고 마주할 적에도 고운 마음이요 따순 생각일 수 있어야지 싶어요.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 살붙이와 이웃을 사랑하겠지요. 내가 나를 아낄 때에 둘레 동무를 아끼겠지요.


  즐거이 노래하며 부엌칼 쥔다면 즐거운 노랫결이 밥과 반찬과 국에 스며듭니다. 따분하거나 지겹다는 마음이 되어 부엌칼 쥔다면 따분하거나 지겹다는 어두움이 밥과 반찬과 국에 스며들어요.


- “저승에 가서 다시 샘플 받아다 줄게.” “응.” … “제령 모래시계? 아아, 그거 말이지? 웬일로 평이 좋아서 이달부터 상품화됐단다.” “엥?” “자, 2만 엔.” … “고마워, 로쿠도. 정말 듬직하다니까.” “기뻐하는 거냐, 마미야 사쿠라.” “생돈 주고 샀다고는 죽어도 말 못하네요.” (152쪽)


  다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책 《경계의 린네》(학산문화사,2012) 일곱째 권을 읽습니다. 《경계의 린네》 일곱째 권에서는 ‘나한테 돌아오는 말’을 다룹니다. 이른바, ‘저주’가 되든 ‘사랑’이 되든 언제나 나한테 돌아와요. 무엇을 바라거나 생각하든, 내가 내놓는 말은 늘 나한테 내놓는 말이 돼요.


  어느 한 사람을 콕 집어 ‘너 참 미워!’ 하고 말한다면, 바로 ‘나란 놈 참 미워!’ 하고 말하는 셈입니다. ‘저 녀석 왜 저러지!’ 하고 생각한다면, 바로 ‘나란 놈 왜 그러지!’ 하고 생각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나를 북돋우거나 살찌우고자 남한테 듣기 좋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듣기 좋게 하는 말은 겉치레일 뿐이기에, 남도 나도 살찌우지 못해요. 겉발림으로 읊는 말은 남도 나도 사랑하지 못해요.


- “그래, 저주를 걸 경우,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어. 저주란 원래 이루어지더라도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지. 이모토는 그게 그림자 모양으로 나타난 거야.” (162쪽)
- ‘사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저주는 효력을 잃었습니다.’ “무서운 아이템이구나.” “통판 하는 물건도 1000개에 하나쯤은 진짜가 섞여 있곤 하거든요.” (188쪽)


  고운 말이든 미운 말이든 누구나 환하게 알아챕니다. 입으로 꺼내어 말해도 알아채고, 입밖으로 안 꺼내어도 알아채요. 말을 해야 안다고들 말하지만, 말을 안 해도 알 것은 다 알기 마련이에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 하는 마음은, 그네들끼리 못 알아챈다 하더라도 둘레에서 뻔히 알아채요. 말을 안 해도 알아채요. 누가 누구를 꺼린다 하는 모습은, 그네들끼리 못 느낀다 하더라도 둘레에서 똑똑히 알아채요. 말이 없어도 알아채요.


  말이란 무엇일까요. 말은 어떤 몫을 할까요. 우리들은 말 한 마디에 무엇을 담을까요.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은 어떤 빛이나 무늬나 결이 될까요.


  나한테 돌아오기 때문에 예쁘게 꾸미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한테 돌아오는 말인 줄 또렷이 헤아리면서, 나와 이웃을 고루 사랑하고 아끼는 길을 생각하자는 뜻입니다. 논밭에 풀약을 치면, 뻔히 이 풀약을 내가 먹겠지요. 자가용을 몰며 돌아다니면 자가용 배기가스가 뻔히 내 입을 거쳐 들어오겠지요. 핵발전소이든 화력발전소이든 자꾸자꾸 지으려 하면, 우리 삶터를 우리 스스로 망가뜨리는 꼴이 되겠지요.


  ‘발전’이란 없어요. 숫자놀음이에요. 숫자가 올라가는 일은 그저 ‘숫자놀음’이지 발전도 발돋움도 아니에요. 참말 발돋움을 꿈꾸고 싶다면, 날마다 새로 맞이하는 하루를 새로운 몸가짐으로 기쁘며 예쁘게 맞아들여 사랑으로 누리는 길을 헤아려 보셔요. (4345.10.3.물.ㅎㄲㅅㄱ)

 


― 경계의 린네 7 (다카하시 루미코 글·그림,서현아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0.6.25./45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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