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7) -의 : 부모의 뒤늦은 게임공부

 

게임의 맛을 볼 대로 본 아이들과 부모의 뒤늦은 게임공부가 쉽게 만날 수 있다고 보는가
《편해문-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소나무,2012) 67쪽

 

  “게임의 맛”은 “게임 맛”이나 “게임을 하는 맛”으로 다듬습니다. ‘부모(父母)’는 ‘어버이’로 손볼 수 있어요. “게임공부(-工夫)”에서 ‘게임(game)’도 손질하면 한결 나을 테지만, 이 보기글을 쓴 분은 ‘놀이’와 ‘게임’이 다르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게임’은 그대로 두면서 ‘공부’만 손질해서 “게임 배우기”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뒤늦은 게임공부가
→ 뒤늦게 게임공부 하는 부모가
→ 뒤늦게 게임을 배우는 어버이가
 …

 

  이 글월을 살피면 토씨 ‘-의’가 두 군데 나옵니다. 앞쪽은 ‘-의’를 털면 쉽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뒤쪽은 글흐름이 살짝 어긋났어요. “(무엇무엇 하는) 아이들”하고 “부모의 (무엇무엇 하는 것)”으로 엮은 글인데, 뒤쪽을 앞쪽과 다른 짜임새로 적으면서 어긋나요. 뒤쪽도 앞쪽처럼 “(무엇무엇 하는) 부모”처럼 적으면 토씨 ‘-의’는 가볍게 떨어집니다. (4345.10.1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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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맛을 볼 대로 본 아이들과 뒤늦게 게임을 배우는 어버이가 쉽게 만날 수 있다고 보는가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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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릎에 누이는 마음

 


  큰아이를 재우려고 두 시간 즈음 품에 안고 노래를 부른 적 있습니다만, 몇 차례 떠올리지 못합니다. 큰아이를 처음으로 만나 함께 살아가던 그무렵, 나로서는 아이들을 재울 때에 얼마나 따사롭고 느긋하게 품에 안아야 하는지, 또 자장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나긋나긋 찬찬히 불러야 할는지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작은아이가 우리한테 새삼스레 찾아와 네 식구 살림이 되고부터, 이 아이들을 품에 안는 겨를과 이 아이들하고 나누는 노래결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아이들은 까무룩 잠들 수 있으나, 오래도록 잠이 못 들 수 있습니다. 개구지게 놀고 난 아이는 내 무릎에 누이기 무섭게 잠이 들기도 하지만, 개구지게 놀고서도 칭얼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잠이 못 들기도 합니다. 참 잘 놀았기에 새근새근 잠들고, 너무 많이 논 나머지 몸이 힘들기도 합니다.


  잘 놀고서 까무룩 잠든 아이는 이듬날 개운하게 일어납니다. 잘 놀았으나 몸이 힘들도록 뛰논 아이는 이듬날 좀 느즈막하게 일어납니다. 아무튼, 새 아침을 맞이해 새롭게 놀고픈 아이들을 마주하며 새삼스레 하루를 엽니다. 오늘도 이 아이들은 얼마나 개구지게 온 집안과 마당을 휘저을까 헤아립니다. 큰아이는 낮잠을 자꾸 건너뛰려 하지만, 작은아이는 아직 낮잠을 잘 자는데, 작은아이를 재우며 자장노래를 부를 적에 큰아이도 함께 낮잠을 누리면 얼마나 반가우랴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작은아이를 낮과 밤에 재우며 퍽 오래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자장노래를 부르다가 목이 아프고 졸음이 쏟아져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곯아떨어지는 날도 있는데, 오늘은 작은아이가 아버지 무릎과 품을 갈마들면서 여러 시간 밤잠을 못 이룹니다. 낮잠을 재울 적에는 삼십 분쯤 노래를 부르며 새근새근 잠들도록 했는데, 밤잠을 재울 적에는 한 시간 남짓 노래를 부르며 재웠는데에도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달라붙습니다.


  아이들을 무릎에 누이거나 품에 안으면 따스하고 보드랍습니다. 아이들 몸에서 이런 따순 숨결이 흐르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이들 몸이 이토록 보드랍구나 하고 느낍니다. 내 무릎은 얼마나 보드라울까요. 내 가슴은 얼마나 따스할까요.


  초승달이 아주 이울며 사라집니다. 깊은 밤은 아주 깜깜합니다. 아주 깜깜한 밤이 되니 별빛은 한결 밝습니다. 바야흐로 두 아이 깊이 잠들고, 아버지도 아이들 곁에서 드러눕고 싶습니다. (4345.10.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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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소녀 푸야 - 일곱 살 소녀와 마흔아홉 살 코끼리의 아름다운 우정
푸야 마르스케 지음, 이미옥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사진으로 찍히는 숨결을 사랑하는 마음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16 : 푸야 마르스케, 《코끼리 소녀 푸야》(조화로운삶,2006)

 


  코끼리하고 살가이 지내는 독일 가시내 푸야 이야기는 《코끼리 소녀 푸야》(조화로운삶,2006)라는 사진책에 살포시 담깁니다. 빛깔 고운 사진이 그득 담긴 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습니다. 어릴 적부터 코끼리를 동무로 삼고 이웃으로 여기며 지낸 푸야는 코끼리뿐 아니라 뭇 목숨과 나무와 풀도 제 동무로 삼거나 이웃으로 여기리라 느낍니다. 이름을 붙여 ‘코끼리 소녀’라 한다지만, 푸야는 한낱 ‘코끼리 소녀’가 아닌 ‘여느 소녀’나 ‘여느 가시내’요, 푸야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은 누구라도 다른 목숨붙이를 아끼거나 사랑하리라 느껴요. 왜냐하면 아이들이니까요.


  푸야는 “나는 보통 때는 독일에서 지내다가 겨울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인도로 가서 지낸다. 이렇게 왔다갔다 하며 살면 불편할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인도까지 여행을 가던 도중에 태어났다(7쪽).” 하고 말합니다. 푸야한테 대수로운 일은 ‘살아가며 무엇을 보고 느끼며 사랑하는가’입니다. 비행기로 먼길을 자주 오가야 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독일과 인도를 오가느라 ‘정규 학교’를 제대로 다니기 힘든 대목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 삶도 어른 삶도 ‘학교 졸업장’이 열어 주지 않아요. 아이 꿈도 어른 꿈도 교과서 지식이나 문명 사회가 일구어 주지 않아요. 오직 아이 스스로 빚는 생각이 아이 꿈이 됩니다. 오직 어른 스스로 일구는 마음이 어른 꿈이 돼요.


  사진을 하는 마음은 그예 ‘사진넋’이어야 한다고 느껴요.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녀도 사진넋을 익힐 수 있을 테고,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와도 사진넋을 일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느 학교 어느 스승한테서 사진을 배운다 하더라도, 내 가슴속에서 샘솟는 꿈이 있어야 사진넋이 자라요. 대학교 몇 학기를 다니거나 나라밖 배움길 몇 해를 보내야 사진넋이 자라지 않아요. 손꼽히는 대학교나 이름난 스승이 있대서 사진넋이 자라지 않아요. 내 가슴속에 사랑이 있을 때에 사진넋이 자라요. 내 가슴속에 사랑씨앗을 곱게 뿌릴 때에 사진넋이 자라요.

 


  푸야는 코끼리를 사랑하려고 인도에 가지 않습니다. 푸야는 삶을 사랑하려고 인도에 갑니다. 푸야는 코끼리를 만나면서 삶을 헤아립니다. 코끼리를 둘러싼 숲을 살피며 삶을 읽습니다. 코끼리를 보살피거나 괴롭히는 사람들을 만나며 삶을 느낍니다. 코끼리를 아끼는 인도 어른이 푸야한테 “들어 봐, 푸야! 사원은 대부분 도시 한가운데 있어. 그래서 이 코끼리들은 강에 들어가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목욕을 한 번도 안 해 본 코끼리도 있지. 하지만 자연에서 사는 코끼리들은 어디든 잘 다녀. 가파른 곳이 나오면 코끼리들은 코로 뭉툭한 가지를 꺾어서 지팡이처럼 사용하기도 한단다(1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슬기로운 생각을 듣고, 슬기로운 삶을 몸소 겪는 푸야는 스스로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푸야는 “수부 아저씨는 코끼리에게 화장하는 일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코끼리에 대해 아직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래서 수부 아저씨에게 자주 묻는다(27쪽).” 하고 생각을 키웁니다. 머잖아 “사랑으로 대할수록 코끼리들은 훨씬 온순해진다. 이곳에 있는 동안 나는 그 점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41쪽).” 하고 깨닫습니다.


  집에서 토끼를 돌보는 아이도 이 같은 대목을 느끼리라 생각해요. 꽃그릇에 콩 한 알 심어 돌보는 아이도 이 같은 대목을 느끼리라 생각해요. 들판에서 들새를 바라보는 아이도, 텃밭에서 푸성귀를 심어 돌보는 아이도, 냇가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는 아이도, 다 함께 이 같은 대목을 느끼리라 생각해요.

 


  사랑으로 마주할 때에 따순 눈길로 내 손을 맞잡는 동무입니다. 사랑으로 마주할 때에 ‘내 사진기 앞’에서 따숩게 웃으며 사진 한 장으로 담기는 동무입니다.


  사랑이 없는 몸가짐인 어버이가 이녁 아이가 해맑게 노래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는 매무새인 어른이 마을 아이들 뛰노는 눈부신 모습을 사진으로 찍지 못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내 반가운 동무를 사랑스럽게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내 고마운 어버이를 사랑스럽게 사진으로 담습니다.


  집식구나 살붙이를 찍는 사진에서만 이와 같지 않아요. 다큐사진에서도 이와 같아요. 패션사진에서든 상업사진에서든 이와 같아요. 어떤 사진이든 사진쟁이 가슴속에서 샘솟는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찍는 이와 찍히는 이’, 또는 ‘보여주는 이와 보는 이’ 모두 즐거울 사진을 새롭게 빚어요.


  푸야는 “독일에서는 비가 오면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하늘의 선물처럼 여겨진다. 나는 환호하면서 빗속으로 뛰어나가 온몸이 흠뻑 젖도록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비는 금세 더욱 심하게 퍼부었다. 나는 입을 한껏 벌리고 굵은 빗방울을 삼켰다. 자연에서 샤워를 즐기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131쪽)?” 하고 말합니다. 푸야는 독일에서 지낼 적에 도시에서 지내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푸야가 독일에서도 시골마을 삶을 누린다면, 독일에서 비를 맞이할 적에도 옷을 모두 벗고 맨몸으로 빗방울을 마시면서 뛰놀리라 느껴요. 푸야는 들판을 맨발로 달리고 싶고, 푸야는 숲속을 홀가분하게 뛰고 싶으리라 느껴요. 그리고, 푸야뿐 아니라 어느 어린이라 하더라도 빗속에서 신나게 놀고 싶을 테지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라 하든 시골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라 하든, 어린이라면 으레 빗놀이를 즐기면서 비와 내가 하나되는 기쁨을 누리고 싶으리라 느껴요.


  그렇잖아요. 사진이란 ‘나와 네가 하나되는 때’를 느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빛놀이 아닌가요. 사진이란 ‘나와 숲(자연)이 하나되는 곳’을 즐거이 누리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빛그림 아닌가요. 사진이란 ‘나와 온 숨결(생명)이 하나되는 마음’을 살뜰히 나누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빛삶 아닌가요.

 


  어린이 푸야 마르스케는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어린이 푸야 마르스케는 이녁 어머니와 아버지가 찍는 사진에 담길 뿐입니다. 어린이 푸야 마르스케는 사진에 찍히기만 하지만 ‘사진을 새롭게 빚’습니다. 사진에 담길 빛이 무엇이요, 사진에 담길 때에 아름다운 사랑이 무엇이며, 사진에 담기며 즐겁게 웃는 삶이 무엇인가를 낱낱이 보여주면서, 사진을 새롭게 빚습니다.


  사진은 사진쟁이가 찍어서 이룬다지만, 사진으로 찍히는 숨결이 있어야 태어날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숨결은 사람일 수 있고, 숲일 수 있으며, 벌레나 풀이나 짐승일 수 있어요. 돌이나 나무나 바다일 수 있어요.


  사진으로 찍히는 숨결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진을 함께 이룹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숨결을 아끼는 몸짓이 사진을 함께 빚습니다. 누가 사진기를 들든 좋습니다. 어떤 사진기를 쓰든 좋습니다. 어느 곳에서 사진을 찍든 좋습니다. 어느 때에 사진을 찍든 좋습니다.


  내 숨결을 느껴 주셔요. 내 동무 숨결을 헤아려 주셔요. 내 살붙이와 이웃 숨결을 읽어 주셔요. 우리들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둘러싼 숨결을 껴안아 주셔요. 이 모든 숨결을 고이 담아 사진 한 장으로 일구어 주셔요. (4345.10.12.쇠.ㅎㄲㅅㄱ)

 


― 코끼리 소녀 푸야 (푸야 마르스케 글,제시카 마르스케·카르스텐 프릭케 사진,이미옥 옮김,조화로운삶 펴냄,2006.12.20./109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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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질듯 수수알 책읽기

 


  예전 사람들은 수수를 얼마나 심어서 먹었을까. 논자락이나 밭뙈기 끄트머리에 한 줄로 심은 수수가 나락과 함께 알이 터질듯 익는 모습을 보다가 생각해 본다. 다섯 살 큰아이는 수숫대를 바라보며 “옥수수야?” 하고 묻는다. 옥수숫대가 제 키보다 웃자라는 모습을 으레 보았고, 얼핏 본다면 옥수숫대를 닮았다 싶으니까 이렇게 묻는다. 거꾸로, 아이가 어린 나날부터 수숫대를 보고 수수빗자루를 만지며 살았으면 “야, 저기 수수네?” 하고 물었으리라 느낀다.


  수수가 들어간 밥그릇을 받아먹으며 자랐을 뿐, 내가 손으로 수수알을 심은 일은 없다. 수숫대 한들거리는 모습을 시골에서 살아가며 바라보지만, 이 수숫대를 낫으로 베어 수수알을 훑고 수숫대로 빗자루를 엮는 일은 해 보지 않았다.


  시골마을 할머니는 수수빗자루를 엮어 읍내 장마당에 한 자루씩 들고 나와서 팔곤 한다. 흙을 만지는 손으로 수수알을 심고, 수수알 베는 손으로 수수빗자루 엮으며, 수수빗자루 엮는 손으로 가을 열매를 갈무리해서 이듬해 봄에 다시 흙에 한 알 두 알 심는다. (4345.10.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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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에서 도시락 먹는 책읽기

 


  혼자서 먼길 나들이를 다니거나 식구들 다 함께 먼길 마실을 갈 적 첫날에는 집에서 장만한 도시락을 먹는다. 그러나 첫날 낮을 지나고 저녁이 될 때부터는 온통 바깥에서 사다 먹어야 한다. 배가 고프니 밥을 찾아서 먹는다 할 텐데, 집에서 밥을 차려서 먹을 때처럼 풀을 먹기란 몹시 힘들다. 바깥에서 사다 먹는 밥에는 풀다운 풀이 적기도 하지만, 온통 기름과 양념으로 범벅이 된다. 풀맛이 아닌 기름맛과 양념맛인데다가 매우 맵고 달고 짜기까지 하다. 날풀을 먹고 싶은 마음을 채울 길이 없다.


  집에서 밥을 차려 먹을 때에는 아이들과 복닥이느라 이래저래 바쁘고 빠듯하게 먹이고 먹지만, 집밥을 먹으며 속이 거북하거나 더부룩한 적은 없다. 집 바깥으로 나와서 밥을 얻어 먹든 사다 먹든, 속이 느긋하거나 넉넉한 적이 없다.


  나는 ‘풀만 먹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풀이 없는 밥차림은 어쩐지 반갑지 않다. 눈으로 밥차림을 바라볼 때부터 사랑스러운 숨결을 느끼지 못한다. 싱그러운 풀빛으로 빛나는 날풀을 젓가락으로 집거나 손가락으로 들어서 혓바닥에 올려놓으면, 풀포기가 그동안 깃들던 흙땅 내음과 흙기운을 씻은 냇물 내음을 느낀다. 이 풀포기 하나는 어느 시골에서 어느 햇살과 어느 바람을 받아들이며 무럭무럭 자라다가 나한테 찾아들어 한몸이 될까, 하고 생각하며 즐겁다.


  그렇지만, 집밥이든 바깥밥이든 나랑 한몸이 되는데, 바깥밥을 밉게 여기거나 싫다 여길 까닭이란 없다. 차려서 건네는 사람들 사랑을 느끼고, 마련해서 내미는 사람들 손길을 느끼면 되잖아. (4345.10.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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