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 한자말 173 : 외피(外皮)

 


이 모든 것은 다 공포의 표피에 불과하며,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그 외피(外皮)이고, 그 진짜는 도저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루이제 린저/윤시원 옮김-낮은 목소리》(덕성문화사,1992) 33쪽

 

  “공포(恐怖)의 표피(表皮)에 불과(不過)하며”라는 글월을 곱씹습니다. 낱말을 하나하나 따지면, ‘공포’는 한국말 ‘두려움’을 가리키고, ‘표피’는 한국말 ‘겉껍질’을 가리키며, ‘불과하며’는 ‘지나지 않다’ 그러니까 ‘-일 뿐’을 가리킵니다. 말뜻 그대로 한국말로 옮기자면 “두려움의 겉껍질일 뿐이며”인 셈이고, 한국 말투로 가다듬어 “겉으로 드러나는 두려움일 뿐이며”나 “껍데기일 뿐인 두려움이며”으로 새로 쓸 수 있어요. ‘도저(到底)히’는 ‘도무지’로 다듬고, ‘파악(把握)하기’는 ‘알기’나 ‘헤아리기’나 ‘종잡기’로 다듬어 줍니다.


  한자말 ‘외피(外皮)’는 “(1) = 겉껍질 (2) = 겉가죽”을 뜻한다 해요. 곧, ‘외피’는 한국사람이 쓸 말이 아닌 바깥말입니다. 한국말 ‘겉껍질’과 ‘겉가죽’을 밀어내며 함부로 쓰이는 바깥말이에요.

 

 외피(外皮)이고
→ 겉껍질이고
→ 겉가죽이고
→ 껍데기이고
→ 겉모습이고
 …

 

  껍데기 같은 바깥말에 휘둘리지 않기를 빕니다. 알찬 속살 같은 한국말을 슬기롭게 쓰기를 빕니다. 겉치레 아닌 속치레를 하고, 겉발림 아닌 속가꿈으로 말과 넋과 삶을 아름다이 빛낼 수 있기를 빕니다. (4345.10.1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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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는 다 겉으로 드러나는 두려움일 뿐이며,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그 껍데기이고, 그 참모습은 도무지 알기 어렵습니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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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나온 소식을 보고는 1권을 주문해 본다. 흔한 설정일 수 있고, 이 비슷한 만화를 여럿 보았는데, 어떠한 삶을 어떻게 풀어내느냐를 눈여겨보아야겠지. 부디 사랑스러운 만화이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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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더와 책가방 1
히가시야 메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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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알파 8 - 신장판
아시나노 히토시 글.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그리운 삶을 찾는 길
 [만화책 즐겨읽기 011] 아시나노 히토시, 《카페 알파 (8)》

 


  무엇인가 그리려면 삶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삶을 누리는 사람일 때에 비로소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리고 싶으면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생각을 짓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을 읽지 못합니다.


  삶하고 동떨어지고 돈벌이에 얽매이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을 잊으면서 그림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 ‘이렇게 좁고 사람도 없는데도, 길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진한 공기. 내 발소리만이 들린다. 해가 지니 갑자기 추워진다. 감은 무겁고, 여관은 보이지도 않고. 어떡하지. 아침까지 걸을까.’ (15∼17쪽)
- ‘하루 종일 걷는 길도 스쿠터라면 한 시간 정도겠지.’ (23쪽)


  그림은 종이에만 그리지 않습니다. 그림은 마음에 그려서 그림이 됩니다. 마음에 먼저 그릴 수 있은 뒤에 종이에 옮기는 그림입니다. 마음으로 즐겁게 그림을 그릴 때에 종이에도 즐겁게 그림을 그려요. 마음으로 환하게 생각을 지어서 기쁜 웃음으로 꽃피울 때에 종이에도 환하게 지은 생각을 기쁜 웃음꽃으로 하나하나 옮깁니다.


  어릴 적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 미술 수업을 떠올려 봅니다. 마음대로 그리고픈 그림을 그리라 할 적에는 그저 마음대로 그리고픈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점수를 매긴다느니 성적에 들어간다느니 말하며 그림을 그리라 하면 ‘어떻게 해야 점수를 더 얻을까’ 하는 생각에 매인 채 그림을 꾸밉니다.


  체육 수업에서도 즐겁게 놀 적에는 빈틈이나 거침이 없이 즐겁게 놉니다. 즐겁게 놀다가 점수를 매겨서 성적표에 넣는다고 하면 으레 몸이 굳어요. 몸이 굳으며 마음이 굳고, 마음이 굳으며 생각 또한 굳어요.


  학교를 다니며 어린 나날과 푸른 나날을 보내며 늘 ‘성적’과 ‘점수’와 ‘숫자’에 목이 매였습니다. 교사는 왜 성적표를 만들까요. 학교는 왜 시험을 치르며 점수를 따질까요. 교사와 학교는 왜 우리들을 ‘사람’과 ‘이름’으로 바라보지 않고 ‘숫자’와 ‘번호’로 따질까요.


  골마루에서 뛰놀다가 어느 교사한테 걸릴 때에, 교사는 으레 ‘몇 학년 몇 반 몇 번’인가를 묻습니다. 이름을 묻지 않아요. 출석부나 무슨무슨 수첩 같은 데에는 우리들 이름이 적히지 않습니다. 언제나 몇 학년 몇 반 몇 번이라는 숫자만 적히고, 숫자 옆에는 또 다른 숫자가 끝없이 적혀요.


  교실 뒤쪽 벽에도 우리 이름은 안 적힙니다. 우리한테 주어진 숫자가 적히고, 숫자 옆에 ‘폐품 실적’이라든지 ‘바른생활 실적’ 같은 성적을 붙여요. 중·고등학교 때에는 중간시험이든 기말시험이든 모의시험이든, 시험만 보았다 하면, 성적 차례에 따라 골마루에 큼지막하게 ‘이름’을 적어 주지만, 이름을 적는 까닭이란 ‘시험 성적 숫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도권학교 열두 해를 다니면서 생각을 지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제도권학교에서든 대안학교에서든, 또 아무런 학교를 안 다니면서이든, 스스로 생각을 지을 수 있다고 여겨야 비로소 생각을 짓는구나 싶어요. 다만, 제도권학교 열두 해는 우리들한테 ‘생각하기’를 지워요. 시키는 대로 하도록 내몰아요. ‘마음으로 그림그리기’를 못하게 막아요. ‘성적이 잘 나오는 그림을 그리는 틀’로 몰아세워요.

 

 

 

 


- “늦네. 오늘은 안 올지도 몰라.” “네네? 그럴 수가!” “뭐, 흔히 있는 일이니까. 차라도 마셔요.” (36쪽)
- “난 왠지 로봇은 여자뿐이라고만 알고 있어서. 그, 깜짝 놀랐어요.” “아아. 괜찮아. 그런 데는 익숙하니까. 나도 로봇을 몇 명 알고 있지만, 아직 남자를 만난 적은 없어.” (50∼51쪽)


  국민학교 여섯 해를 다니던 때이든,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던 때이든, 창가 자리에 앉을 때면 으레 수업을 받다가도, 쉬는 때에도, 낮밥을 먹는 때에도, 저녁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으로 시달리는 때에도, 바깥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하늘빛을 바라보고 구름빛을 쳐다보았어요. 저 하늘을 나는 새들이 있나 헤아리고, 더운 여름날 활짝 연 창밖에서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귀를 기울였어요.


  중·고등학교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때에는 으레 온 학교를 쩌렁쩌렁 울리는 ‘몽둥이찜질 소리’를 들었어요. 어느 교사가 어느 아이를 두들겨패는 소리가 온 학교를 울렸어요. 자율학습 때에 딴짓을 한다거나 보충수업 때에 꾸벅꾸벅 존다거나 하면 으레 몽둥이찜질을 퍼붓던 교사예요. 누군가 어디엔가 숨어 담배를 태우다 걸리면 또 하루 내내 몽둥이찜질 소리가 온 학교에 울려퍼져요.


  교사들은 일부러 온 학교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몽둥이찜질을 했어요. ‘너도 이렇게 얻어맞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이었다고 느꼈어요. 요즈음에는 몽둥이찜질을 섣불리 하지는 않을 테지만, 몽둥이찜질을 안 하는 만큼 아이들을 숫자 올가미에 더 바싹 옥죄는구나 싶어요. 이런 시험공부와 저런 입시공부로 내몰아요. 학교에서 풀려나도 학원한테 붙잡혀요. 학원한테 풀려나서 집으로 가더라도 느긋하게 두 다리를 펴고 쉬지 못해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우리들한테 들려주는 ‘어른들 목소리’는 오직 한 가지, ‘(서울에서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도록 시험) 공부를 해라’에서 맴돌거든요.


  투벅투벅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하품 늘어지게 새벽길을 걸어 학교로 가면서, 곁을 스치는 내 또래를 바라보곤 하는데, 누구나 허여멀건 낯빛이에요. 이름은 ‘푸름이(청소년)’라 하지만 조금도 푸른 빛이 보이지 않아요. 어른들은 우리한테 푸름이(청소년)라는 이름을 붙여 주지만, 푸른 내음 푸른 소리를 하나도 누리지 못하게 두 손 두 발을 꽁꽁 묶어요.


  왜 머리길이를 교칙에 따라 맞추어야 할까요. 왜 치마길이를 교칙에 따라 맞추어야 하나요. 왜 신발을 교칙에 따라 맞추어야 할까요. 왜 가슴에 이름표를 박음질해야 하나요. 왜 목덜미에 학교 배지를 달아야 하나요.


  어머니나 아버지는 단체사진을 들여다보며 ‘내 아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용하게 알아내지만,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에 똑같은 차림으로 선 채 깨알만 한 얼굴로 나오는 단체사진을 찍는 일은 무슨 뜻일는지 알쏭달쏭해요. 소풍도 수학여행도 우리한테 어떤 뜻이나 보람일까요.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열 해나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지나, 어떤 일을 되새기거나 떠올리며 ‘웃을’ 수 있을까요.


- “혀가 바람에 밀리는 느낌이 들지 않아? 익숙해지면 혀로 속도를 알 수 있어.” (69쪽)
- ‘큰길을 벗어나 계곡길로 들어선다. 바위며 쓰러진 나무투성이인 산길은 옛날 한 도시의 메인스트리트였다. 이제 차도 못 다니는 아스팔트 위를 이끼가 덮고 있다.’ (80쪽)


  그리운 삶이 있어야 ‘내가 어른 되어 아이를 낳은 뒤’ 내 아이들한테 옛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줄 수 있다고 느껴요. 그리운 삶이 없다면 ‘내가 어른 되어 아이를 낳은 뒤’이든 ‘어른 되어 아이들 가르치는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든, 아이들 앞에서 맑은 눈빛과 맑은 목소리로 즐거운 사랑을 들려줄 수 없다고 느껴요.


  그리운 삶이란 즐겁게 누리는 삶이에요. 즐겁게 누리는 삶이란 바로 오늘 이야기예요. 앞으로 돈을 많이 벌어야 즐겁게 누리는 삶이 되지 않아요. 큰 집에 까만 자가용을 몰아야 즐겁게 누리는 삶이 되지 않아요.


  가을논을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이삭을 쪼는 새들을 바라보셔요. 눈부시게 환한 구름빛과 노을빛을 올려다보셔요.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빛나는 별을 느껴 보셔요.


  전깃불은 꺼요. 자동차는 멈추어요. 텔레비전은 쓰레기통에 던져요. 책은 내려놓아요. 손전화는 가방에 넣어요. 그러고는 눈을 들어요. 귀를 열어요. 가슴을 활짝 펴요. 바람을 마셔요. 두 발에 꿴 신은 벗어요. 양말도 벗어요. 맨발로 맨흙을 밟아요. 이러다가는 풀썩 드러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아요.


  나는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 생각해요. 나는 무엇을 즐기려는 목숨일까 헤아려요. 나는 어떤 꿈을 꾸면서 어떤 사랑을 누리는 숨결인가 곱씹어요.


  스스로 그림을 그려요. 내 손으로 그림을 그려요. 널리 이름난 그림쟁이 그림도 가끔 들여다보면서 빙긋 웃어요. 내 종이 한 장에 내 삶을 기쁘게 그려요. 내가 그린 그림을 내 보금자리 환한 마루 한쪽 벽에 붙여요.


- ‘오랜만에 먼 곳의 친구에게서 경치가 전송되어 왔다. 보내온 풍경은 그 녀석의 취향대로 콘트라스트가 강한 색상이라서, 나는 좋아한다.’ (124쪽)
- ‘어느 쪽으로 가도 산속 같은 길. 그래도 이따금 진한 바다내음이 풍긴다.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1년이나 떠나 있었을까.’ (143쪽)


  아시나노 히토시 님 만화책 《카페 알파》(학산문화사,2001) 여덟째 권을 읽습니다. ‘카페 알파’를 지키던 ‘로봇 아가씨’가 혼자서 길을 떠나며 느낀 삶을 만화책 한 권을 통틀어 보여줍니다.


  로봇 아가씨는 늘 타던 스쿠터를 내려놓고 길을 걷습니다.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만큼 걷습니다. 가게가 있으면 가게에서 먹을거리를 사다 먹습니다. 가게가 없으면 길에서 이웃을 만나 먹을거리를 얻어서 함께 먹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쉽니다. 구름을 바라보며 노래합니다. 로봇 아가씨는 ‘로봇’이요 ‘아가씨’이지만, 이런 대목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지구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반가운 이웃이거든요. 이 지구별을 따사롭게 보듬는 살가운 동무이거든요.


  지구별 사람들 누구나 ‘그리운 삶’을 바로 오늘 내 살림자리에서 예쁘게 누릴 수 있기를 빌어요. 햇볕은 언제나 보드라운 목소리로 따순 노래를 속삭입니다. (4345.10.16.불.ㅎㄲㅅㄱ)

 


― 카페 알파 8 (아시나노 히토시 글·그림,서현아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1.3.25.)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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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0-1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구별 사람들 누구나 ‘그리운 삶’을 바로 오늘 내 살림자리에서 예쁘게 누릴 수 있기를 빌어요"
- 저도 빌겠습니다.^^

파란놀 2012-10-16 12:51   좋아요 0 | URL
오늘도 이듬날도 언제나 즐거우시기를 빌어요~~~ ^^
 

 

 수세미꽃 책읽기

 


  나는 인천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막상 사진찍기를 익힌 뒤에도 퍽 오랫동안 인천 골목동네를 굳이 사진으로 안 찍었다. 사진길을 걸은 지 열 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천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았다.


  인천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찍기 앞서, 나는 내가 태어나 자란 인천 골목동네를 ‘태어난 삶터이니 잘 안다’고 짐짓 여겼다. 그렇지만, 막상 사진기를 한쪽 어깨에 메고, 큰아이를 한쪽 팔로 안으며 골목동네 구비구비 사진을 찍고 보니, 나로서는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에 새로운 삶이 한가득이었다. 태어나 살며 으레 스치거나 부대꼈다 하지만, 언제나 스치거나 부대끼기만 했을 뿐, 찬찬히 들여다보며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했다고 깨달았다.


  이무렵 새삼스레 골목꽃을 보았다. 어릴 적부터 골목동네에는 꽃이 곳곳에 많다고 느끼기는 했으나, 이 꽃들이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피어나며 어떻게 환한가를 깨우치지는 못했다. 무슨 꽃이 피고 지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알려 하지 않았다.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호박꽃과 오이꽃과 수세미꽃이 피고 지는 줄 알아챈 때는 골목 사진을 찍은 지 한 해가 다 될 즈음이었다. 참 모르는 사람은 호박꽃이랑 오이꽃이랑 수세미꽃을 알아보지 못한다. 여기에 참외꽃이나 수박꽃을 더하면 더 알쏭달쏭하다 할 테지. 게다가 꽃 말고 푸른 잎사귀를 바라보며 알아채라 한다면, 덩굴줄기를 바라보며 알아채라 한다면, 아마 거의 모든 도시내기는 두 손 두 발을 번쩍 들리라.


  이제 한 해를 꼬박 살아낸 고흥 시골집 텃밭 한 귀퉁이에서 수세미가 죽죽 덩굴을 뻗다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암꽃은 꽃가루받이를 하자마자 시들며 차근차근 열매를 키우고, 수꽃은 하염없이 노란 꽃송이를 벌린다. 암꽃은 시들기 무섭게 기나긴 나날에 걸쳐 수세미 열매를 커다랗게 키운다. 사람을 바라보든 꽃을 바라보든 어머니는 더없이 어머니답다. 어머니는 씨앗을 받아 열매를 키우면서 새로운 씨앗을 담을 뿐 아니라, 열매가 싱그럽고 구수하며 알차도록 온 기운을 쏟는다. 수세미 열매가 수세미 암꽃에서 비롯한 줄은 꼭지에 무늬만 남은 꽃차례 모양으로 알아볼 뿐이다.


  수세미 수꽃은 찬이슬이 듣든 찬바람이 불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쩌면, 수세미 수꽃은 찬이슬도 찬바람도 견딘다 해야 하리라. 수세미 수꽃은 햇살은 햇살대로 먹고 바람과 이슬은 바람과 이슬대로 먹으면서 꽃가루를 알뜰히 건사한다고 할 만하리라. 튼튼하게 살아내고 씩씩하게 살아가면서 ‘열매 될 씨앗 밑거름’을 옹골차게 보듬는 나날을 누리겠지.


  내 어머니, 곧 우리 아이들 할머니는 ‘노란 꽃’이 예뻐서 좋다고 말씀한다. 큰아이는 노란 꽃을 볼 때면 “할머니가 좋아하는 꽃이네.” 하고 말한다. 시골사람한테는 노란 꽃이 가없이 예쁘며 좋다고 여길 만하다고 비로소 느낀다. (4345.10.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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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삐라로 묻어라 - 한국전쟁기 미국의 심리전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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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과 경쟁은 왜 생기는가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4] 이임하, 《적을 삐라로 묻어라》

 


- 책이름 : 적을 삐라로 묻어라
- 글 : 이임하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10.19.)
- 책값 : 25000원

 


  두멧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깊은 밤에 까만 하늘을 점점이 빛내는 별무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크고작게 보이는 별은 저마다 다른 빛을 뽐냅니다. 지구에서 퍽 밝게 보이는 별이 있고, 지구에서 하나도 안 보이는 별이 있어요. 지구에서 보이는 별이라 해서 ‘있는’ 별이고, 지구에서 안 보이는 별이라 해서 ‘없는’ 별은 아니에요.


  먼먼 옛날에는 저 별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합니다. 밤하늘 반짝이는 작은 점을 언제부터 누가 ‘별’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바라보았을까 궁금합니다. 밤하늘 반짝이는 별들마냥, 지구도 저 별에 깃들어 바라볼 때에는 똑같은 ‘별’인 줄 느끼는 사람은 예나 이제나 얼마나 되랴 궁금합니다.


  과학자뿐 아니라 여느 사람도 때때로 궁금하게 여길 텐데, 저 숱한 별들 가운데에는 지구처럼 온갖 목숨이 얼크러진 곳이 있겠지요. 어쩌면 지구별처럼 끔찍한 전쟁과 경쟁이 춤추는 곳이 있을는지 모르고, 지구별과 달리 온통 사랑과 믿음으로 이루어진 곳이 있을는지 몰라요. 지구별처럼 기계물질문명이 판치며 숲을 망가뜨리고 사람 스스로 사람을 깔보는 곳이 있을는지 모르며, 지구별과 달리 다 다른 목숨이 다 다른 목숨을 서로 아끼고 돌보는 곳이 있을는지 몰라요.


.. 극동사령부는 전쟁이 발발한 지 24시간도 안 되어 주한 미국 군사 고문단이 사용할 삐라를 준비했다. 최초의 심리전 작전은 6월 28일 공군 C-46 수송기로 ‘미국이 국제연합에 전쟁 개입과 원조를 요구했으므로 그동안 참고 저항하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면서 시작됐다 … 미국에서 온 의복과 선물을 받고 웃음이 떠나지 않는 한국의 고아 강구라는 아이를 언급하면서 이는 미국의 오랜 관습이라고 말한다. ‘인정 많은 미국인’이라는 이미지를 쌓으려 〈자유세계〉는 미군이 아이들을 돌보는 사진이나 원조하는 사진도 종종 실었다 … 1950년 11월까지 뿌려진 삐라는 1억 2000만 장이었다. 1951년 12월까지의 누적된 삐라 살포량이 9억 6000만 장이므로, 1951년 뿌려진 삐라는 1950년도의 7배가 넘는 8억 4000만 장가량이 되는 셈이다 ..  (22, 104, 251쪽)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는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보금자리가 있는 곳에 천천히 마을이 이루어집니다. 이웃이 없더라도 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살림집을 차츰 넓혀야 해요. 때로는 새 살림집을 지어야 해요. 다 큰 아이들은 스스로 짝을 맺기도 하고, 짝을 맺으며 새 아이를 낳기도 하겠지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어떻게 배우며 크는가에 따라 달라질 테지만, 사랑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은 사랑을 누리고 사랑을 펼쳐요. 사랑으로 자란 아이한테는 미움이나 다툼이 깃들지 않을 뿐더러, 미움도 다툼도 몰라요. 사랑보다 경쟁과 전쟁, 시험공부와 지식외우기 따위로 길들인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 나이와 몸집이 된 뒤에 경쟁과 전쟁을 드러내요. 어릴 적부터 시험공부와 지식외우기로 길든 어른이 이녁 아이한테도 똑같이 시험공부와 지식외우기를 물려줄밖에 없어요. 이것 말고는 모르거든요.


  전쟁이 터지는 싹은 바로 나한테 있습니다. 내가 어릴 적부터 무엇을 보고 느끼고 겪고 자랐는가에 따라 삶터를 이루는 얼거리가 달라집니다. 내 마음속에 싸움이나 미움이 또아리를 틀면, 이 싸움이나 미움이 차츰 커지면서 바깥으로 번져요. 어떤 우두머리 몇몇이 일으키는 싸움이나 미움이 아니에요. 우두머리 몇몇이 일으키는 싸움이나 미움이라 하더라도, 내 마음속에 사랑과 믿음만 자란다면, 어떠한 싸움이나 미움에도 휩쓸리지 않아요.


  맹자 어머니는 아이를 생각하며 삶자리를 자꾸 옮겼어요. 맹자 어머니는 이녁 아이도 이녁 아이라 하지만, 맹자 어머니 당신부터 ‘옳고 바르며 착하고 고운 삶’을 스스로 누리고 싶어요. 맹자 어머니 스스로 옳고 바르며 착하고 고운 삶을 누릴 때에 당신 아이한테도 옳고 바르며 착하고 고운 삶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스스로 누리지 못하는 삶이라면 아이한테 이야기하지 못하고 물려주지 못하며 알려주지 못해요. 스스로 누리고 즐기는 삶결이 고스란히 아이한테 이어져요. 스스로 좋아하며 사랑하는 숨결이 하나하나 아이한테 대물림되어요. 돌이켜보면, 맹자 어머니는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아이를 잘 가르치는 일’보다 ‘스스로 잘 살아가는 일’을 깨달았다고 할 만해요. ‘아이를 잘 가르치는 길’을 찾았다기보다 ‘스스로 삶을 잘 가꾸는 길’을 찾았다고 할 만해요.


.. 육군본부 심리전과에도 만화가 김용환을 비롯해 문학가 윤석중·신태환·민병태·정상충·심정섭 등이 소속되어 선전 활동에 참여했다. 육군본부에서는 〈사병만화〉를 발행했다. 일본 교토 미술전문학교에 다니던 김종래도 정보 계통의 심리전 관련 부서에서 일했는데 그가 하는 일은 지리산 빨치산을 회유하는 삐라를 만드는 일이었다 …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의 명의로 뿌려진 이 안전보장 증명서는 위협과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나아가 투항은 정의와 대의를 위한 길이기에 귀순할 때 중국군을 잡아오거나 목을 잘라오면 특별히 후대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  (64, 110쪽)


  자동차 오가는 소리를 늘 듣는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동차를 아주 마땅하게 받아들입니다. 매캐한 바람이 가득한 도시에서 공장이나 아파트나 학교나 공공기관 시설을 늘 마주하는 아이들은 이 같은 건물을 아주 마땅하게 받아들입니다.


  숲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숲내음과 숲바람을 아주 마땅하게 받아들입니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갯내음과 바닷바람을 아주 마땅하게 받아들입니다. 들판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신나게 뒹굴거나 구르는 들살이를 아주 마땅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린이집에서 영어노래를 부르고 영어만화를 보며 영어그림책을 배우는 아이들은 무엇을 몸으로 받아들일까요. 초등학교부터 시험공부에 얽매인 채 지식과 교과서를 머리에 한가득 집어넣는 아이들은 무엇을 마음으로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은 누구나 ‘내 어버이 대학교 졸업장’을 따지지 않습니다. 아기가 젖을 물며 ‘내 어머니가 무슨 대학교를 나왔을까?’ 하고 묻지 않습니다. 다섯 살이든 일곱 살이든 열 살이든, 아이들이 밥을 먹으면서 밥상 차린 어버이한테 ‘아버지는 어떤 대학교 어떤 학과를 다녔어요?’ 하고 묻지 않아요.
  무등을 타는 아이들이 어버이한테 어떤 책을 읽었느냐고 물을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 손을 잡고 들길을 걷는 아이들이 어버이한테 돈을 얼마나 버느냐고 물을 까닭이 없습니다. 깊은 밤 새근새근 잠드는 아이들이 자장노래 부르는 어버이한테 몸매 치수를 물을 까닭이 없습니다.


  어른들은 스스로 무엇을 알고 느끼며 살아야 즐거울까요.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알고 느끼며 살아가기에 즐겁게 뛰놀까요.


.. 해방 뒤 미 공보원은 〈월간 아메리카〉에 미국이 기존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와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를 극복한 체제라고 알리는 글들을 실었다. 이 글들은 미국을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며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복지를 책임지는 국가로 소개했다. 미국은 기업도, 노동자도, 연방정부도 경제제도를 독자적으로 농단하지 못하며 경제 발전을 위해 새로운 권력관계를 형성한 나라였다(고 스스로 밝힌 셈이다) … 1951년 심리전 비용은 3억 달러가량이 들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며, 삐라 살포량만을 비교하면 1억 8000만 달러가량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살포 방식에 따른 비용, 라디오 확성기 방송 이용 따위를 감안할 때 1951년 소요된 심리전 비용은 적어도 2억 달러를 넘어 3억 달러에 가까울 것이다. 심리전에 들인 단순 추정 비용도 2년 동안 유엔이 한국에서 사용했다는 원조와 재건 비용보다 많다 ..  (207, 252쪽)


  가을을 맞이해 온 시골마다 나락을 베어 털고 말리기에 부산합니다. 가을을 맞이한 시골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집에 들러붙을 겨를이 없습니다. 하루 내내 들판에서 들일을 하고 들밥을 먹습니다.


  가을 들판을 바라봅니다. 어느 들판에나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보일 뿐, 젊은 가시내나 사내는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느 들판에나 어린이와 푸름이는 그림자조차 안 보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보육원으로 가고, 푸름이는 중학교나 고등학교로 갑니다. 시골마을조차 ‘시골아이’ 아닌 ‘학교아이’입니다. 아이들은 바쁜 가을일을 거들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쁜 가을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치르는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이나 학력평가나 수능시험이나 모의시험이 대수롭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을 갈무리하는 가을일은 아이들한테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들판에서 일한다지만,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는 들판에 없거든요.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는 회사에 있거나 공장에 있습니다. 아이들 어머니와 아버지는 들판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 살아갑니다.


  뿌리를 캐면, 아이들 할머니와 할아버지부터 이녁 아이들을 들판에서 내쫓고 학교로 보냈습니다. 아이들이 들판을 떠나 학교를 다녀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비로소 ‘고된 들일’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돈을 많이 벌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어요. 아니, 이렇게 배웠습니다. 아이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학교 보내기’가 ‘아이키우기’라고 배웠어요. 나라가 이렇게 가르치고, 정부가 이렇게 가르쳐요. 사회가 이처럼 가르치고, 신문과 방송이 이렇게 가르쳐요.


  아이들은 반드시 제도권학교에 다녀야 하는 줄 여겨요. 아이들이 제도권학교에 들어가서 무엇을 배우는 줄 하나도 모르면서, 그저 아이들을 제도권학교에 넣어요. 아이들이 제도권학교에서 교과서 지식만 외우면서 시험공부만 하는 줄 헤아리지 못해요. 아이들이 학교 졸업장은 여럿 거머쥐지만, 정작 삶을 일구는 슬기는 조금도 살피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누리지 못하는 줄 깨닫지 못해요.


.. 귀환계획은 민간인을 포로로 다루고 억류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민간인을 포로와 같이 다룬 까닭은 근거 없는 의심에서 출발했다. 얼굴색만으로 적을 구분할 수 없었던 미군은 민간인을 근거 없이 의심했고, 이 의심은 한국전쟁 내내 일어났다. 피난민의 이동 금지나 피난민 심사와 수용소 운용은 모두 여기에서 출발했다 … 학교라는 공간에서 심리전은 다시 생산되고 심리전에서 말해진 가치들이 살아났다. 학교에서 심리전을 이용하는 방식은 아이들이 즐기는 노래나 놀이로 삐라를 살포하는 형태와 교과서로 하는 학습이었다 ..  (229, 267쪽)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면, 나라에서 운동경기를 꾀하든 전쟁을 꾀하든 ‘내 편 이겨라!’ 하고 외칩니다. 나라에서 운동경기를 괜히 꾀하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제도권교육을 괜히 의무교육으로 시키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제도권교육을 나라돈으로 베푸는 줄 잘못 알지만, 나라돈이란 바로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요, 나라님은 ‘내 돈’으로 이녁 일삯을 챙기고 이녁 큰집을 짓는 한편, ‘내 돈 가운데 부스러기 얼마쯤’으로 제도권학교 틀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교과서를 만든 사람도 바로 나요, 입시지옥을 만든 사람도 바로 나예요. 교과서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이며, 입시지옥을 털어낼 사람도 바로 나입니다. 한 마디로 간추린다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다고 하는 전쟁은 ‘우두머리가 우리들 모두를 길들여서 우리 스스로 치고받도록 부추기는 일’입니다. 싸우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다치는 사람도, 적을 만들고 적을 미워하는 사람도, 바로 나예요. 잃는 사람도, 빼앗기는 사람도, 슬픈 사람도, 괴로운 사람도, 바로 나예요.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기에 내 삶이 나아지지 않아요. 원자력발전소나 화력발전소가 들어서기에 내 삶이 좋아지지 않아요.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이 나라에서 치르기에 내 삶이 발돋움하지 않아요. 경제발전을 이룬대서 내 삶이 훌륭해지지 않아요.


  나무 한 그루와 함께 풀 한 포기를 가꿀 때에 내 삶이 나아져요. 풀벌레와 멧새 노랫소리를 들을 때에 내 삶이 좋아져요. 들길을 아이 손 맞잡고 거닐 때에 내 삶이 발돋움해요. 낮하늘이 얼마나 파란가 느끼고 밤하늘이 얼마나 까만가 깨달을 적에 비로소 내 삶이 훌륭하게 거듭나요.


  제도권학교를 세워서 의무처럼 다니게 하는 정부란 곧 제도권정부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제도권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게끔 가로막는 제도권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돌보면서 가꾸고 북돋우며 아끼는 길을 틀어막는 제도권입니다.


  전쟁무기와 군대는 나라는커녕 마을이나 보금자리를 지키지 않아요. 화학방정식과 화학약품과 가공식품은 아이 목숨도 어른 목숨도 건사하지 않아요. 졸업장과 계급장과 신분증은 사람들 가슴에 깃든 사랑을 쳐다보지 않아요.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뜻이라면 오직 하나 사랑 때문이에요. 사랑을 누리기에 즐겁고, 사랑을 느끼기에 즐거우며, 사랑을 나누기에 즐겁습니다. 오직 사랑 하나를 누리고 느끼며 나누려고 저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요. 오직 사랑 하나 빛내고 빚으며 돌보려고 저마다 새로운 숨결을 받아 태어나요.


  내 이웃을 적으로 삼아 죽이려 하는 전쟁이나 경쟁은 사랑이 아니에요. 내 이웃 숨결을 끊는 사람은 내 숨결 또한 끊는 꼴이에요. 내 옆에는 적 아닌 이웃이 있고, 내 가슴속에는 하느님이 깃들듯 내 이웃 가슴에도 하느님이 깃들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란, 나를 옳게 바라보면서 나를 사랑하는 길이요, 나를 옳게 바라보고 사랑하듯 내 이웃과 동무 모두 옳게 바라보며 사랑하는 길이에요.


.. 교과서, 나아가 국가는 나라, 겨레, 국가 같은 추상적인 관념으로 포장하여 아이(국민)들로 하여금 끝없는 충성과 희생을 요구했다. 나라와 민족, 세계 같은 추상적인 거대담론을 끊임없이 들먹임으로써 비록 어리지만 대단히 중요한 일에 참여한다는 허위의식을 어린이들에게 심어 주고 현실에 대한 성찰과 비판의 계기를 제거하고 있다 … 삐라는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없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라고 했고, 공산주의는 애국심이나 애국주의 사상이 없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했다 … 어려서부터 남을 짓밟고 성공하는 것이 유일한 가치이자 생존 방법이라고 배우고 그 결과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는 현실, 그런 상황에서 더 무엇을 기대하느냐는 반문은 나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왜 그럴까? 한국 사회는 무조건 1인자가 되어야 한다 … 남을 짓밟고 성공해 1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치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지지받는 까닭은 전쟁 경험과 학습받은 냉전 이데올로기 때문이기도 하다 … 냉전세대는 성인이 되어서도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진리로 알고 지내왔다 ..  (290, 313, 322, 437쪽)


  이임하 님이 쓴 인문책 《적을 삐라로 묻어라》(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한국전쟁 무렵 미국 군대가 한국땅 곳곳에 뿌린 삐라를 들추어 냅니다. 이임하 님은 삐라에서 ‘삶 발자국’을 하나하나 읽어내고 되새깁니다. 나라와 나라, 또는 정부와 정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 속살 가운데 아주 작은 구석인 ‘심리 전쟁’, 이 가운데에서도 ‘삐라 뿌리기’가 어떠한 모습인가를 차근차근 밝힙니다. 전쟁에 휩쓸리거나 휘둘리는 사람들 머리와 마음이 어떻게 길들여지는가를 들려주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부채질하는 권력자는 무엇을 꾀하거나 노리는가를 슬그머니 보여줍니다.


  오늘날 제도권사회는 진작 만들어진 뼈대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뼈대가 아니에요. 천민자본주의라 하든 신자유주의라 하든 자유무역협정이든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짠 하고 나타나지 않아요. 먼먼 옛날부터 천천히 이빨을 드러내며 스며들어요. 오랜 나날에 걸쳐 사람들을 홀리고 이끌며 가두어요.


  시골사람이 왜 도시로 빠져나갈까요. 시골사람을 왜 도시로 잡아들일까요. 시골에는 왜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길까요. 왜 젊은 사람은 흙을 안 만지면서 밥을 먹는 사회 얼거리를 만들까요. 왜 젊은이와 푸름이와 어린이 모두 흙일을 모르도록 교과서를 짜고 신문·방송을 엮으며 책을 만들까요. 왜 사람들 스스로 옷·밥·집을 못 빚고 못 누리도록 내몰까요. 왜 모든 일을 돈으로 하도록 만들고, 왜 돈이 없으면 굶어죽기라도 한다는 듯 가르칠까요. 왜 돈버는 일자리만 이야기하고, 삶을 짓는 꿈과 사랑은 조금도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꽁꽁 틀어막을까요.


.. 삐라의 내용을 들으면 미국적 신조는 결국 ‘미국인’에게만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자유세계’에서의 최고의 모델로 선전하는 미국식 모델은 미국을 뺀 다른 곳에서는 선언의 수준에 머물렀다 … 한국전쟁을 필두로 해서 냉전에 기반한 그 어떤 전쟁도 인류가 지향해야 할 진보적 가치를 생산해내지 않았다 ..  (421, 429쪽)


  한국전쟁으로 한국땅이 짓밟히고 앓던 무렵, 미국 군대는 삐라로 한국땅을 덮었다고 합니다. 끔찍하도록 뿌려댄 삐라는 똥종이로도 쓰이고 편지종이로도 쓰였답니다.


  입시전쟁과 취업전쟁과 생존전쟁이 벌어지는 오늘날 한국땅은 누가 어느 곳을 어떻게 짓밟는다고 할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오늘날 이 사회는 무엇으로 뒤덮였다고 할 만할까 생각해 봅니다. 여기저기 넘실거리는 돈은 어떻게 쓰이는가요. 곳곳에서 출렁거리는 졸업장과 자격증과 신분증은 무엇을 보여주는가요.


  《적을 삐라로 묻어라》를 쓴 이임하 님은 당신 아이가 ‘제도권학교’에 시달려 아파하는 모습을 아주 어렴풋이 느꼈다고 말합니다. 이 책을 내놓고 나서는 ‘어렴풋이’에서 ‘또렷이’로 달라졌을까 모르겠습니다. 이임하 님 아이가 제도권학교 아닌 대안학교를 다니고 싶다 스스로 말한다는데, 그러면 이임하 님이 살아가는 곳은 어떤 데인가 궁금합니다. 글쓴이 이임하 님은 ‘제도권’에서 살아가나요, ‘대안’에서 살아가나요. 이임하 님 아이가 찾아나서려는 ‘제도권’과 ‘대안’ 사이에는 어떤 삶이 있나요. 이임하 님은 스스로 어느 삶터에서 사랑을 일구며 누리고 나눌 수 있는가요. 사람은 ‘제도권’에서 살아야 사람일까요, ‘대안’에서 살아야 사람일까요, 아니면 ‘다른 어느 보금자리’를 느끼고 찾을 때에 사람일까요.


  온갖 무기가 춤추는 전쟁통에는 삐라에 묻힌 사람들이, 온갖 숫자와 성적이 판치는 사회에서는 돈에 묻힌 채 허우적거립니다. (4345.10.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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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0-1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업장과 계급장과 신분증은 사람들 가슴에 깃든 사랑을 쳐다보지 않아요."

요즘 대학생들은 졸업장에 자격증이 될 만한 이력까지 쌓느라 참 바쁘게 살고 진정한 친구를 갖기가 힘든 것 같더군요. 가까이 있는 친구들이 모두 경쟁자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불행한 학생들입니다.
다음의 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나무 한 그루와 함께 풀 한 포기를 가꿀 때에 내 삶이 나아져요. 풀벌레와 멧새 노랫소리를 들을 때에 내 삶이 좋아져요. 들길을 아이 손 맞잡고 거닐 때에 내 삶이 발돋움해요. 낮하늘이 얼마나 파란가 느끼고 밤하늘이 얼마나 까만가 깨달을 적에 비로소 내 삶이 훌륭하게 거듭나요."

파란놀 2012-10-16 12:52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이러한 책을 '지식'이나 '정보'로만 여기지 말고, 왜 이러한 책을 써서 내놓아서 나누는가 하는 '밑뜻'을 잘 새겨서,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일굴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랴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