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미꽃 책읽기

 


  나는 인천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막상 사진찍기를 익힌 뒤에도 퍽 오랫동안 인천 골목동네를 굳이 사진으로 안 찍었다. 사진길을 걸은 지 열 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천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았다.


  인천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찍기 앞서, 나는 내가 태어나 자란 인천 골목동네를 ‘태어난 삶터이니 잘 안다’고 짐짓 여겼다. 그렇지만, 막상 사진기를 한쪽 어깨에 메고, 큰아이를 한쪽 팔로 안으며 골목동네 구비구비 사진을 찍고 보니, 나로서는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에 새로운 삶이 한가득이었다. 태어나 살며 으레 스치거나 부대꼈다 하지만, 언제나 스치거나 부대끼기만 했을 뿐, 찬찬히 들여다보며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했다고 깨달았다.


  이무렵 새삼스레 골목꽃을 보았다. 어릴 적부터 골목동네에는 꽃이 곳곳에 많다고 느끼기는 했으나, 이 꽃들이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피어나며 어떻게 환한가를 깨우치지는 못했다. 무슨 꽃이 피고 지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알려 하지 않았다. 시골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호박꽃과 오이꽃과 수세미꽃이 피고 지는 줄 알아챈 때는 골목 사진을 찍은 지 한 해가 다 될 즈음이었다. 참 모르는 사람은 호박꽃이랑 오이꽃이랑 수세미꽃을 알아보지 못한다. 여기에 참외꽃이나 수박꽃을 더하면 더 알쏭달쏭하다 할 테지. 게다가 꽃 말고 푸른 잎사귀를 바라보며 알아채라 한다면, 덩굴줄기를 바라보며 알아채라 한다면, 아마 거의 모든 도시내기는 두 손 두 발을 번쩍 들리라.


  이제 한 해를 꼬박 살아낸 고흥 시골집 텃밭 한 귀퉁이에서 수세미가 죽죽 덩굴을 뻗다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암꽃은 꽃가루받이를 하자마자 시들며 차근차근 열매를 키우고, 수꽃은 하염없이 노란 꽃송이를 벌린다. 암꽃은 시들기 무섭게 기나긴 나날에 걸쳐 수세미 열매를 커다랗게 키운다. 사람을 바라보든 꽃을 바라보든 어머니는 더없이 어머니답다. 어머니는 씨앗을 받아 열매를 키우면서 새로운 씨앗을 담을 뿐 아니라, 열매가 싱그럽고 구수하며 알차도록 온 기운을 쏟는다. 수세미 열매가 수세미 암꽃에서 비롯한 줄은 꼭지에 무늬만 남은 꽃차례 모양으로 알아볼 뿐이다.


  수세미 수꽃은 찬이슬이 듣든 찬바람이 불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쩌면, 수세미 수꽃은 찬이슬도 찬바람도 견딘다 해야 하리라. 수세미 수꽃은 햇살은 햇살대로 먹고 바람과 이슬은 바람과 이슬대로 먹으면서 꽃가루를 알뜰히 건사한다고 할 만하리라. 튼튼하게 살아내고 씩씩하게 살아가면서 ‘열매 될 씨앗 밑거름’을 옹골차게 보듬는 나날을 누리겠지.


  내 어머니, 곧 우리 아이들 할머니는 ‘노란 꽃’이 예뻐서 좋다고 말씀한다. 큰아이는 노란 꽃을 볼 때면 “할머니가 좋아하는 꽃이네.” 하고 말한다. 시골사람한테는 노란 꽃이 가없이 예쁘며 좋다고 여길 만하다고 비로소 느낀다. (4345.10.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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