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알파 8 - 신장판
아시나노 히토시 글.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그리운 삶을 찾는 길
 [만화책 즐겨읽기 011] 아시나노 히토시, 《카페 알파 (8)》

 


  무엇인가 그리려면 삶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삶을 누리는 사람일 때에 비로소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리고 싶으면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생각을 짓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을 읽지 못합니다.


  삶하고 동떨어지고 돈벌이에 얽매이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을 잊으면서 그림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 ‘이렇게 좁고 사람도 없는데도, 길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진한 공기. 내 발소리만이 들린다. 해가 지니 갑자기 추워진다. 감은 무겁고, 여관은 보이지도 않고. 어떡하지. 아침까지 걸을까.’ (15∼17쪽)
- ‘하루 종일 걷는 길도 스쿠터라면 한 시간 정도겠지.’ (23쪽)


  그림은 종이에만 그리지 않습니다. 그림은 마음에 그려서 그림이 됩니다. 마음에 먼저 그릴 수 있은 뒤에 종이에 옮기는 그림입니다. 마음으로 즐겁게 그림을 그릴 때에 종이에도 즐겁게 그림을 그려요. 마음으로 환하게 생각을 지어서 기쁜 웃음으로 꽃피울 때에 종이에도 환하게 지은 생각을 기쁜 웃음꽃으로 하나하나 옮깁니다.


  어릴 적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 미술 수업을 떠올려 봅니다. 마음대로 그리고픈 그림을 그리라 할 적에는 그저 마음대로 그리고픈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점수를 매긴다느니 성적에 들어간다느니 말하며 그림을 그리라 하면 ‘어떻게 해야 점수를 더 얻을까’ 하는 생각에 매인 채 그림을 꾸밉니다.


  체육 수업에서도 즐겁게 놀 적에는 빈틈이나 거침이 없이 즐겁게 놉니다. 즐겁게 놀다가 점수를 매겨서 성적표에 넣는다고 하면 으레 몸이 굳어요. 몸이 굳으며 마음이 굳고, 마음이 굳으며 생각 또한 굳어요.


  학교를 다니며 어린 나날과 푸른 나날을 보내며 늘 ‘성적’과 ‘점수’와 ‘숫자’에 목이 매였습니다. 교사는 왜 성적표를 만들까요. 학교는 왜 시험을 치르며 점수를 따질까요. 교사와 학교는 왜 우리들을 ‘사람’과 ‘이름’으로 바라보지 않고 ‘숫자’와 ‘번호’로 따질까요.


  골마루에서 뛰놀다가 어느 교사한테 걸릴 때에, 교사는 으레 ‘몇 학년 몇 반 몇 번’인가를 묻습니다. 이름을 묻지 않아요. 출석부나 무슨무슨 수첩 같은 데에는 우리들 이름이 적히지 않습니다. 언제나 몇 학년 몇 반 몇 번이라는 숫자만 적히고, 숫자 옆에는 또 다른 숫자가 끝없이 적혀요.


  교실 뒤쪽 벽에도 우리 이름은 안 적힙니다. 우리한테 주어진 숫자가 적히고, 숫자 옆에 ‘폐품 실적’이라든지 ‘바른생활 실적’ 같은 성적을 붙여요. 중·고등학교 때에는 중간시험이든 기말시험이든 모의시험이든, 시험만 보았다 하면, 성적 차례에 따라 골마루에 큼지막하게 ‘이름’을 적어 주지만, 이름을 적는 까닭이란 ‘시험 성적 숫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도권학교 열두 해를 다니면서 생각을 지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제도권학교에서든 대안학교에서든, 또 아무런 학교를 안 다니면서이든, 스스로 생각을 지을 수 있다고 여겨야 비로소 생각을 짓는구나 싶어요. 다만, 제도권학교 열두 해는 우리들한테 ‘생각하기’를 지워요. 시키는 대로 하도록 내몰아요. ‘마음으로 그림그리기’를 못하게 막아요. ‘성적이 잘 나오는 그림을 그리는 틀’로 몰아세워요.

 

 

 

 


- “늦네. 오늘은 안 올지도 몰라.” “네네? 그럴 수가!” “뭐, 흔히 있는 일이니까. 차라도 마셔요.” (36쪽)
- “난 왠지 로봇은 여자뿐이라고만 알고 있어서. 그, 깜짝 놀랐어요.” “아아. 괜찮아. 그런 데는 익숙하니까. 나도 로봇을 몇 명 알고 있지만, 아직 남자를 만난 적은 없어.” (50∼51쪽)


  국민학교 여섯 해를 다니던 때이든,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던 때이든, 창가 자리에 앉을 때면 으레 수업을 받다가도, 쉬는 때에도, 낮밥을 먹는 때에도, 저녁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으로 시달리는 때에도, 바깥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하늘빛을 바라보고 구름빛을 쳐다보았어요. 저 하늘을 나는 새들이 있나 헤아리고, 더운 여름날 활짝 연 창밖에서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귀를 기울였어요.


  중·고등학교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때에는 으레 온 학교를 쩌렁쩌렁 울리는 ‘몽둥이찜질 소리’를 들었어요. 어느 교사가 어느 아이를 두들겨패는 소리가 온 학교를 울렸어요. 자율학습 때에 딴짓을 한다거나 보충수업 때에 꾸벅꾸벅 존다거나 하면 으레 몽둥이찜질을 퍼붓던 교사예요. 누군가 어디엔가 숨어 담배를 태우다 걸리면 또 하루 내내 몽둥이찜질 소리가 온 학교에 울려퍼져요.


  교사들은 일부러 온 학교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몽둥이찜질을 했어요. ‘너도 이렇게 얻어맞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이었다고 느꼈어요. 요즈음에는 몽둥이찜질을 섣불리 하지는 않을 테지만, 몽둥이찜질을 안 하는 만큼 아이들을 숫자 올가미에 더 바싹 옥죄는구나 싶어요. 이런 시험공부와 저런 입시공부로 내몰아요. 학교에서 풀려나도 학원한테 붙잡혀요. 학원한테 풀려나서 집으로 가더라도 느긋하게 두 다리를 펴고 쉬지 못해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우리들한테 들려주는 ‘어른들 목소리’는 오직 한 가지, ‘(서울에서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도록 시험) 공부를 해라’에서 맴돌거든요.


  투벅투벅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하품 늘어지게 새벽길을 걸어 학교로 가면서, 곁을 스치는 내 또래를 바라보곤 하는데, 누구나 허여멀건 낯빛이에요. 이름은 ‘푸름이(청소년)’라 하지만 조금도 푸른 빛이 보이지 않아요. 어른들은 우리한테 푸름이(청소년)라는 이름을 붙여 주지만, 푸른 내음 푸른 소리를 하나도 누리지 못하게 두 손 두 발을 꽁꽁 묶어요.


  왜 머리길이를 교칙에 따라 맞추어야 할까요. 왜 치마길이를 교칙에 따라 맞추어야 하나요. 왜 신발을 교칙에 따라 맞추어야 할까요. 왜 가슴에 이름표를 박음질해야 하나요. 왜 목덜미에 학교 배지를 달아야 하나요.


  어머니나 아버지는 단체사진을 들여다보며 ‘내 아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용하게 알아내지만,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에 똑같은 차림으로 선 채 깨알만 한 얼굴로 나오는 단체사진을 찍는 일은 무슨 뜻일는지 알쏭달쏭해요. 소풍도 수학여행도 우리한테 어떤 뜻이나 보람일까요.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열 해나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지나, 어떤 일을 되새기거나 떠올리며 ‘웃을’ 수 있을까요.


- “혀가 바람에 밀리는 느낌이 들지 않아? 익숙해지면 혀로 속도를 알 수 있어.” (69쪽)
- ‘큰길을 벗어나 계곡길로 들어선다. 바위며 쓰러진 나무투성이인 산길은 옛날 한 도시의 메인스트리트였다. 이제 차도 못 다니는 아스팔트 위를 이끼가 덮고 있다.’ (80쪽)


  그리운 삶이 있어야 ‘내가 어른 되어 아이를 낳은 뒤’ 내 아이들한테 옛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줄 수 있다고 느껴요. 그리운 삶이 없다면 ‘내가 어른 되어 아이를 낳은 뒤’이든 ‘어른 되어 아이들 가르치는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든, 아이들 앞에서 맑은 눈빛과 맑은 목소리로 즐거운 사랑을 들려줄 수 없다고 느껴요.


  그리운 삶이란 즐겁게 누리는 삶이에요. 즐겁게 누리는 삶이란 바로 오늘 이야기예요. 앞으로 돈을 많이 벌어야 즐겁게 누리는 삶이 되지 않아요. 큰 집에 까만 자가용을 몰아야 즐겁게 누리는 삶이 되지 않아요.


  가을논을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이삭을 쪼는 새들을 바라보셔요. 눈부시게 환한 구름빛과 노을빛을 올려다보셔요.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빛나는 별을 느껴 보셔요.


  전깃불은 꺼요. 자동차는 멈추어요. 텔레비전은 쓰레기통에 던져요. 책은 내려놓아요. 손전화는 가방에 넣어요. 그러고는 눈을 들어요. 귀를 열어요. 가슴을 활짝 펴요. 바람을 마셔요. 두 발에 꿴 신은 벗어요. 양말도 벗어요. 맨발로 맨흙을 밟아요. 이러다가는 풀썩 드러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아요.


  나는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 생각해요. 나는 무엇을 즐기려는 목숨일까 헤아려요. 나는 어떤 꿈을 꾸면서 어떤 사랑을 누리는 숨결인가 곱씹어요.


  스스로 그림을 그려요. 내 손으로 그림을 그려요. 널리 이름난 그림쟁이 그림도 가끔 들여다보면서 빙긋 웃어요. 내 종이 한 장에 내 삶을 기쁘게 그려요. 내가 그린 그림을 내 보금자리 환한 마루 한쪽 벽에 붙여요.


- ‘오랜만에 먼 곳의 친구에게서 경치가 전송되어 왔다. 보내온 풍경은 그 녀석의 취향대로 콘트라스트가 강한 색상이라서, 나는 좋아한다.’ (124쪽)
- ‘어느 쪽으로 가도 산속 같은 길. 그래도 이따금 진한 바다내음이 풍긴다.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1년이나 떠나 있었을까.’ (143쪽)


  아시나노 히토시 님 만화책 《카페 알파》(학산문화사,2001) 여덟째 권을 읽습니다. ‘카페 알파’를 지키던 ‘로봇 아가씨’가 혼자서 길을 떠나며 느낀 삶을 만화책 한 권을 통틀어 보여줍니다.


  로봇 아가씨는 늘 타던 스쿠터를 내려놓고 길을 걷습니다.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만큼 걷습니다. 가게가 있으면 가게에서 먹을거리를 사다 먹습니다. 가게가 없으면 길에서 이웃을 만나 먹을거리를 얻어서 함께 먹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쉽니다. 구름을 바라보며 노래합니다. 로봇 아가씨는 ‘로봇’이요 ‘아가씨’이지만, 이런 대목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 지구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반가운 이웃이거든요. 이 지구별을 따사롭게 보듬는 살가운 동무이거든요.


  지구별 사람들 누구나 ‘그리운 삶’을 바로 오늘 내 살림자리에서 예쁘게 누릴 수 있기를 빌어요. 햇볕은 언제나 보드라운 목소리로 따순 노래를 속삭입니다. (4345.10.16.불.ㅎㄲㅅㄱ)

 


― 카페 알파 8 (아시나노 히토시 글·그림,서현아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1.3.25.)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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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0-1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구별 사람들 누구나 ‘그리운 삶’을 바로 오늘 내 살림자리에서 예쁘게 누릴 수 있기를 빌어요"
- 저도 빌겠습니다.^^

파란놀 2012-10-16 12:51   좋아요 0 | URL
오늘도 이듬날도 언제나 즐거우시기를 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