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가 보던 책을 슬쩍

 


  누나가 보던 책을 슬쩍 보는 동생. 누나는 이것을 하다가 어느새 저것을 하고, 저것을 하다가도 새삼스레 그것을 한다. 이동안 동생은 누나가 하던 이것을 따라서 하고, 누나가 이어서 하던 저것을 좇아서 한다. 누나는 돌고 돌아 다시 이것이나 저것으로 돌아와서 노는데, 그동안 동생이 이것이나 저것을 붙잡고 놀면 “내가 놀던 거야.” 하면서 가로채려 한다.


  벼리야, 보라는 누나를 좋아해서 누나가 놀던 것을 저도 한번 놀아 보고 싶단다. 벼리는 이것도 놀 수 있고 저것도 놀 수 있잖아. 이 책도 읽을 수 있고 저 책도 읽을 수 있지. 보라가 이 책을 보고 싶다 하면 이 책을 주고, 저 책을 보고 싶다 하면 저 책을 주렴. 다 주면 돼. 그리고 벼리가 보고픈 책이 있으면 보드라운 목소리로 보라한테 달라고 해 봐. 그러면 보라도 너한테 모두 다 줄 테니까.


  예쁜 손으로 예쁘게 책을 읽자. 예쁜 마음으로 예쁜 하루를 빛내자. 예쁜 꿈으로 서로 예쁘게 사랑을 꽃피우자. 네 동생 보라는 누나 벼리가 노는 모습을 책으로 삼으며 하루를 빛내고 싶어 한단다.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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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은 괜찮아요 창비시선 287
차창룡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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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말하기
[시를 말하는 시 5] 차창룡, 《고시원은 괜찮아요》

 


- 책이름 : 고시원은 괜찮아요
- 글 : 차창룡
- 펴낸곳 : 창비 (2008.4.21.)
- 책값 : 6000원

 


  시골에서는 깊은 밤에 마당으로 나오기만 해도 별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해가 진 이른저녁에 별빛이 하나둘 돋고, 밤이 깊을수록 별빛이 짙어집니다. 시골 고샅을 밝히는 등불이 없는 들판이나 멧자락으로 들어서면 별무리가 한껏 빛납니다. 마당에서도 미리내를 볼 수 있지만, 들판에서 보는 미리내는 더 또렷해요.


  시골에서는 아침마다 환하게 트는 동을 바라보며 고운 기운을 받아들입니다. 도시에서도 아침마다 동트는 하늘 바라볼 수 있다지만, 으레 이 건물에 막히고 저 아파트에 가려요.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는 지하철이 많이 뚫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일터로 가더라도 햇볕 한 줌 못 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터가 아예 땅밑이기도 하고, 높고 큰 건물 안쪽에 깃드느라 저녁에 일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햇살 한 조각 못 먹는 사람마저 있어요.


  사람은 햇볕을 못 먹어도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땅밑 깊은 감옥에 갇혀도 스무 해나 서른 해나 쉰 해를 살아남을 수 있어요. 바람을 마실 수 있고 물을 먹을 수 있으면 어떻든 목숨을 이을 수 있어요.


  그런데 퍽 궁금해요. 목숨을 잇는대서 사람이라 할 만할까요. 목숨만 이으면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


.. 토방 대신 마당을 방으로 사용하면, 밤마다 하늘이 더욱 가까이 내려온다. 은하수의 강물이 몸속으로 들어와 뱃속에서 꾸르륵거리고, 별빛은 살갗에 박혀 소름으로 돋는다 ..  (마당방)


  참으로 ‘살아가는구나’ 하고 느낄 때에 살아가는 하루라고 느껴요. 참으로 삶을 누릴 때에 삶을 누리는구나 싶어요.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루에서는 삶도 꿈도 느끼지 못하리라 생각해요. 톱니바퀴 하나가 되어 늘 똑같이 움직이는 삶이라면 사랑도 믿음도 못 깨달으리라 생각해요.


  오늘날 중·고등학교 아이들 입에서 아주 거칠고 막되먹은 말씨가 툭툭 튀어나옵니다. 고작 열서넛이나 열대여섯밖에 안 된 푸른 아이들 입에서 어쩜 이렇게 슬프고 딱한 말씨가 튀어나올까요.


  곰곰이 살피면, 이제 서너 살이라 할 만한 아이들이 자동차 이름을 줄줄 욉니다. 텔레비전 우스갯소리를 따라서 하고, 온갖 대중노래 춤사위를 흉내냅니다. 어떤 아이는 너덧 살에 영어로 노래를 부릅니다.


  아하, 그렇지요.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그대로 아이들이 받아먹어요. 어른들이 푸름이한테 들려주는 그대로 아이들이 말해요.


  어른들을 보셔요. 거친 말을 얼마나 흔히 하나요. ㅆㅅㄲ라든지 ㄱㅅㄲ라든지, 또는 ㅆㅎ이라든지 ㅆㅂ이라든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아요. 서로가 서로를 아끼지 않으면서 말해요.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말해요. 거친 말을 일삼는 사람은 ‘듣는 이’ 아닌 ‘말하는 이’ 스스로를 깎아내려요. 막된 말을 뱉는 사람은 ‘듣는 쪽’ 아닌 ‘말하는 쪽’ 스스로를 갉아먹어요.


  아이들은 스스로 깎아내리거나 갉아먹는 줄 모르면서 거친 말을 일삼아요. 어른들 흉내를 내면서 벌써 어른인 척해요. 몸뚱이는 크지만 마음그릇은 아주 좁다란 채, 주먹질을 하고 욕질을 하며 발길질을 하고 말아요. 커다란 몸뚱이처럼 마음그릇을 키울 줄 모를 뿐 아니라, 아이들 둘레 어른들치고 ‘큰 어른 몸뚱이에 걸맞는 큰 마음그릇으로 사랑을 나누는’ 분이 몹시 적구나 싶어요.


..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 한때는 야망을 품고 이곳에 왔고 / 한때는 갈 데가 없어 이곳에 왔으나 ..  (고시원에서)


  차창룡 님이 쓴 시집 《고시원은 괜찮아요》(창비,2008)를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시인 차창룡 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시를 쓰고 시집을 내놓았을까요. 이 시집은 시인 차창룡 님 스스로 이녁을 어떻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글줄이 될까요.


  차창룡 님이 써서 내놓는 싯말 하나는, 잡지에 실리거나 책에 실리는 글이 아닙니다. 차창룡 님이 써서 내놓는 싯말은 바로 ‘차창룡 님 삶을 스스로 노래하고 누리는 말’입니다. 남들 들으라고 쓰는 시란 없어요. 스스로 되읽으면서 삶을 되새기는 시일 뿐이에요.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스스로를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밝히는 싯말이고 시노래예요.


  어느 잡지나 기관지나 신문에서 시 한 줄 써 달라고 얘기했기에 써서 보내는 시란 없어요. 누군가 나한테 시를 써 달라 하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없으면 한 줄이든 두 줄이든 못 써요.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있으면, 누가 써 달라 하지 않아도 백 줄이나 천 줄이나 기쁘게 써요.


.. 돈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 하느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나뵙기 위한 것일 뿐 // 고층아파트도 있는데 왜? ..  (내가 옥탑방을 선택한 이유)


  차창룡 님이 옥탑방도 아파트도 도시도 서울도 아닌 데에서 살아가면 어떤 시를 썼을까 헤아려 봅니다. 스스로 고시원에서 살아가려 하니까 《고시원은 괜찮아요》 같은 시를 쓸 테지요. 스스로 절집에서 살아가려 한다면 “절집은 괜찮아요” 하고 이름을 붙이면서 새로운 노랫가락을 빚겠지요. 숲에서 살아가려 한다면 “숲은 괜찮아요” 하는 이름과 함께 숲내음 숲바람 숲짐승 이야기가 얼크러진 새삼스러운 노랫자락을 펼칠 테고요.


  삶터가 삶을 빚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려 하는 마음이 삶터를 부릅니다. 스스로 어떤 사랑을 바라는가에 따라 보금자리를 꾸밉니다. 스스로 어떤 꿈을 이루려는가에 따라 마을을 돌봅니다. 스스로 어떤 믿음을 펼치는가에 따라 나라를 세워요.


  이를테면, 아인슈타인 같은 이는 군대를 끔찍하게 미워했어요. 아니, 미워했다기보다 ‘지구별에 없어야 할 첫째 것으로 군대를 꼽았’어요. 좋고 싫고 아끼고 미워하고가 아니라, 군대란 지구별을 무너뜨리려고 어떤 검은 우두머리가 만들어 사람들을 바보처럼 꼬드기는 것이라고 여겼어요. 자, 이러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아인슈타인은 스스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편지를 쓰며 어떤 글로 이웃들과 사귀었을까요. 그리고, 시인 차창룡 님은 시집 《고시원은 괜찮아요》를 내놓으며 이녁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거나 북돋았을까요.


.. 지하철은 참 신기하다. / 상계동에서 상도동까지, 지도로 보면 아득한데, 노원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타면, 지하를 헤매고 헤매어 건대입구역에서 지상으로 나와 잠시 한숨 돌리고, 다시 지하로 잠입, 나는 어느덧 상도동에 서 있다. 이처럼 신기한 두더지작전을 맨 처음 시도한 사람은 상상력이 참 풍부한 사람이다. 어떻게 우리이 발밑에 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  (지하철은 참 신기하다)


  시란, 삶입니다. 시쓰기란, 삶쓰기입니다. 시읽기란, 삶읽기입니다. 글도 삶이요, 글쓰기도 삶쓰기입니다. 사진찍기란 삶찍기요, 사진읽기 또한 삶읽기입니다. 그림그리기일 때에도 삶그리기입니다. 그림보기 또한 삶보기예요. 노래부르기란 삶부르기입니다. 노래듣기란 삶듣기예요.


  모두 삶입니다. 삶 아닌 것 하나 없습니다. 스스로 바라는 꿈이 시와 글과 사진과 그림과 노래에 실립니다. 스스로 되려는 몸짓이 시와 글과 사진과 그림과 노래에 어려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에 따라 ‘내가 쓰는 시’가 달라져요. 어떻게 살고 싶나에 따라 ‘내가 읽는 시’가 달라져요.


  할 말을 쓰는 시입니다만, 할 말이란 살아가고픈 모습입니다. 살아가고픈 모습을 말로 빚으면서 시가 태어납니다. 내가 살고 싶은 모습이 시 한 줄로 드러나고, 내가 사랑하는 모습이 시 두 줄로 나타나며, 내가 살아가는 오늘 모습이 곧바로 시로 그려져요.


  꿈을 쓰면서 시예요. 사랑을 쓰면서 시예요. 삶을 쓰면서 시가 될 테지요. 꿈이 있는 사람은 글로도 시를 쓰고 마음으로도 시를 써요. 사랑이 있는 사람은 글 아닌 노래로도 시를 써요. 삶이 있는 사람은 굳이 글을 안 쓰더라도 눈빛 하나로 아리땁게 무지개빛 시를 쓰고 미리내빛 시를 써요.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시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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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35] 삶을 망가뜨리는 ‘영어 일기’

 


  하루를 돌아보면서 일기를 씁니다. 내가 한 일을 떠올리고, 내가 한 말을 되새기며, 내가 들은 말이랑 내가 본 모습을 아로새깁니다. 일기는 저녁이나 밤에 쓸 수 있으나 아침부터 쓸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숱한 일을 겪는다면, 겪은 뒤 곧바로 일기장을 꺼내어 적을 수 있어요. 아침에 한 차례 쓰고 낮에 두 차례 쓰며 저녁에 세 차례 쓸 수 있어요. 일기는 몇 시 몇 분이 될 때에 짜잔 하고 쓰지 않아요. 스스로 내키는 때에 씁니다.


  일기는 날마다 쓸 수 있지만, 여러 날 띄엄띄엄 걸러서 쓸 수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쓰는 일기가 아니요, 누가 쓰지 말라 해서 안 쓰는 일기가 아닙니다. 남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일기가 아니라, 스스로 되읽고 되새기며 되돌아보려는 뜻으로 쓰는 일기입니다.


  사람들이 쓰는 글 가운데 스스로 가장 빛나는 글이라면 바로 일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쓴 일기를 읽을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라 할 테지만, 일기를 쓸 적에는 내 삶을 스스로 북돋우려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일기를 쓰면서 내 꿈과 사랑과 믿음을 살찌우려고 마음을 쏟습니다.


  일기를 쓰며 상장을 받거나 상금을 타려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일기를 쓰며 글자랑을 한다거나 글솜씨를 뽐내려는 사람 또한 없어요. 일기를 쓰는 까닭은 스스로 아름답게 거듭나고 싶기 때문이에요. 일기쓰기를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일기쓰기를 버릇으로 들이도록 이끄는 까닭이란, 일기 한 줄이 내 삶 한 자락을 밝히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분들은 아이들이 영어를 더 잘 쓸 수 있도록 이끌려고 일기쓰기를 시키기도 합니다. 참말 그래요. 아이나 어른이나 일기를 영어로 쓰면서 영어 솜씨를 한껏 북돋울 만합니다. 그러면, 거꾸로 생각해 봐요. 따로 ‘영어 일기쓰기’를 하기 앞서까지는 ‘한국말 일기쓰기’를 했을 테지요. 일기쓰기를 하면 무엇을 북돋울 수 있다고 하나요?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생각을 살찌울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곧, 한국말로 일기쓰기를 하는 이들은 날마다 생각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삶을 새롭게 읽어요. ‘한국말 일기쓰기’를 하면서 ‘한국말 솜씨를 북돋운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으나, 한국말로 일기쓰기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한국말 솜씨를 북돋운’ 셈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로 일기를 쓰던 사람이 영어로 일기를 쓴다면, 영어 솜씨를 북돋우겠지요. 그렇지만, 영어 솜씨를 북돋우면서 ‘삶을 돌아보고 생각을 살찌우는’ 길하고는 동떨어져요. 영어 낱말을 더 많이 써 보고, 영어 말투에 익숙해지려고 애쓸 뿐, 영어로 ‘어떤 삶’을 돌아보고 ‘어떤 생각’을 살찌우려 하는가와 같은 대목은 소홀히 하고 말아요.


  어쩔 수 없겠지요. ‘영어를 더 잘 쓰려는 생각’이 되어 영어로 일기를 쓰는 이들은, ‘영어로 일기를 얼마나 잘 썼는가 검사를 받’아요. 나중에는 검사를 안 받아도 된다 하지만, 이제부터 ‘영어로 일기를 쓰기’는 삶을 가꾸는 글하고는 등지고, 삶을 빛내는 글하고도 고개를 돌리며, 삶을 밝히는 글하고도 멀리 떨어지고 말아요.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는 분들은 으레 이 대목을 가볍게 지나칩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영어만 잘 쓰면 된다’는 생각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영어 제국주의로 치닫기 때문이라 할 테지만, 제아무리 한국 사회가 영어 미친바람이 분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국말로 일기를 쓰든 영어로 일기를 쓰든’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생각을 살찌우도록 이끌어야지 싶어요. 삶을 돌아보지 못하면서 영어 솜씨만 북돋우면 스스로 무슨 도움이 될까요. 생각을 살찌우지 못하면서 영어 재주만 갈고닦는다면 스스로 어떤 보람을 누릴까요.


  영어 솜씨를 기르고 싶다면 ‘영어로 일기를 쓰기’보다는 ‘영어로 글을 쓰기’를 시켜야지 싶어요. 영어로 시를 쓰도록 이끌고, 영어로 짧은 산문을 써 보도록 시켜야지 싶습니다. 일기쓰기를 영어로 시켜서는 안 될 노릇이라고 느껴요. 일기쓰기는 누구나 ‘어릴 적부터 어버이한테서 배운 내 삶말’로 가장 맑고 밝게 써야지 싶어요. 영어를 잘 쓰고 싶으면 영어를 잘 쓸 수 있는 ‘다른 글’을 쓸 노릇이에요. 한국에서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사귀면서 살아갈 사람이라면 마땅히 한국말을 가장 슬기롭고 아름답게 쓰는 밑길이 되면서, 한겨레 넋을 스스로 가장 북돋우고 살찌우는 ‘한국말로 일기를 쓰기’를 해야겠지요. 한국에서 살아가며 한국사람을 아끼고 어깨동무할 사람한테 영어로 일기를 쓰도록 시키는 일이란, 스스로 고운 넋과 얼을 모두 내버리거나 내팽개치면서 내 아름다운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는 눈썰미를 짓밟는 짓이 되리라 느껴요.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우리말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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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싫어하는 책읽기

 


  아버지는 말야, 맛나게 먹자고 차린 밥상 앞에서 책을 펼쳐 읽겠다고 하는 모습이 참으로 싫단다. 책을 읽으려면 아버지가 밥을 차리려고 부산을 떠는 동안 읽어야지, 밥을 차리려고 부산을 떨 적에는 자꾸 불가에 달라붙으며 이것 달라느니 저것 주라느니 하더니, 막상 밥상을 차린 뒤에는 책을 들고 와서 밥상 앞에 앉고는 밥상은 쳐다보지 않으면, 누가 좋아하겠니.


  밥은 즐겁게 먹고, 책은 즐겁게 읽으며, 놀이는 다 함께 즐겁게 하자. 밥상 앞에서는 책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을 적에는 배고프다 말하지 말자.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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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 말라는데

 


  빨래줄이 한 번 톡 풀렸다. 아이들이 빨래줄 이은 자리를 자꾸 잡아당기고 이래저래 하느라 풀렸을는지 모르나, 매듭을 지은 내가 제대로 매듭을 안 지었으니 풀렸을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살짝 늘어진 매듭을 잡으려고 펄쩍펄쩍 뛰면서 노니까,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들 탓’ 하기란 참 쉽다. 이러면서 아이들한테 말할 테지. “하지 말라고 했잖니?” 그래,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하지 말라”고 말했지. 아이는 이 말을 들었지. 그리고 아이는 이 말을 이내 잊지. 아이는 스스로 놀고픈 놀잇감과 놀잇거리를 찾고 생각하고 살피고 즐기니까. 슬그머니 눈치를 보기도 하지만, 눈치를 아예 안 보기도 하고, 이러거나 말거나 신나게 뛰놀면 가장 즐겁다. 아무렴, 놀아야지. 놀고 또 놀아야지. 놀며 넘어뜨리고 넘어지고. 놀다가 뒹굴고 구르고. 부딪히고 부대끼고 하면서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겠지.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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