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는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35] 삶을 망가뜨리는 ‘영어 일기’
하루를 돌아보면서 일기를 씁니다. 내가 한 일을 떠올리고, 내가 한 말을 되새기며, 내가 들은 말이랑 내가 본 모습을 아로새깁니다. 일기는 저녁이나 밤에 쓸 수 있으나 아침부터 쓸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숱한 일을 겪는다면, 겪은 뒤 곧바로 일기장을 꺼내어 적을 수 있어요. 아침에 한 차례 쓰고 낮에 두 차례 쓰며 저녁에 세 차례 쓸 수 있어요. 일기는 몇 시 몇 분이 될 때에 짜잔 하고 쓰지 않아요. 스스로 내키는 때에 씁니다.
일기는 날마다 쓸 수 있지만, 여러 날 띄엄띄엄 걸러서 쓸 수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쓰는 일기가 아니요, 누가 쓰지 말라 해서 안 쓰는 일기가 아닙니다. 남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일기가 아니라, 스스로 되읽고 되새기며 되돌아보려는 뜻으로 쓰는 일기입니다.
사람들이 쓰는 글 가운데 스스로 가장 빛나는 글이라면 바로 일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쓴 일기를 읽을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라 할 테지만, 일기를 쓸 적에는 내 삶을 스스로 북돋우려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일기를 쓰면서 내 꿈과 사랑과 믿음을 살찌우려고 마음을 쏟습니다.
일기를 쓰며 상장을 받거나 상금을 타려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일기를 쓰며 글자랑을 한다거나 글솜씨를 뽐내려는 사람 또한 없어요. 일기를 쓰는 까닭은 스스로 아름답게 거듭나고 싶기 때문이에요. 일기쓰기를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일기쓰기를 버릇으로 들이도록 이끄는 까닭이란, 일기 한 줄이 내 삶 한 자락을 밝히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분들은 아이들이 영어를 더 잘 쓸 수 있도록 이끌려고 일기쓰기를 시키기도 합니다. 참말 그래요. 아이나 어른이나 일기를 영어로 쓰면서 영어 솜씨를 한껏 북돋울 만합니다. 그러면, 거꾸로 생각해 봐요. 따로 ‘영어 일기쓰기’를 하기 앞서까지는 ‘한국말 일기쓰기’를 했을 테지요. 일기쓰기를 하면 무엇을 북돋울 수 있다고 하나요?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생각을 살찌울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곧, 한국말로 일기쓰기를 하는 이들은 날마다 생각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삶을 새롭게 읽어요. ‘한국말 일기쓰기’를 하면서 ‘한국말 솜씨를 북돋운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으나, 한국말로 일기쓰기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한국말 솜씨를 북돋운’ 셈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로 일기를 쓰던 사람이 영어로 일기를 쓴다면, 영어 솜씨를 북돋우겠지요. 그렇지만, 영어 솜씨를 북돋우면서 ‘삶을 돌아보고 생각을 살찌우는’ 길하고는 동떨어져요. 영어 낱말을 더 많이 써 보고, 영어 말투에 익숙해지려고 애쓸 뿐, 영어로 ‘어떤 삶’을 돌아보고 ‘어떤 생각’을 살찌우려 하는가와 같은 대목은 소홀히 하고 말아요.
어쩔 수 없겠지요. ‘영어를 더 잘 쓰려는 생각’이 되어 영어로 일기를 쓰는 이들은, ‘영어로 일기를 얼마나 잘 썼는가 검사를 받’아요. 나중에는 검사를 안 받아도 된다 하지만, 이제부터 ‘영어로 일기를 쓰기’는 삶을 가꾸는 글하고는 등지고, 삶을 빛내는 글하고도 고개를 돌리며, 삶을 밝히는 글하고도 멀리 떨어지고 말아요.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는 분들은 으레 이 대목을 가볍게 지나칩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영어만 잘 쓰면 된다’는 생각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영어 제국주의로 치닫기 때문이라 할 테지만, 제아무리 한국 사회가 영어 미친바람이 분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국말로 일기를 쓰든 영어로 일기를 쓰든’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생각을 살찌우도록 이끌어야지 싶어요. 삶을 돌아보지 못하면서 영어 솜씨만 북돋우면 스스로 무슨 도움이 될까요. 생각을 살찌우지 못하면서 영어 재주만 갈고닦는다면 스스로 어떤 보람을 누릴까요.
영어 솜씨를 기르고 싶다면 ‘영어로 일기를 쓰기’보다는 ‘영어로 글을 쓰기’를 시켜야지 싶어요. 영어로 시를 쓰도록 이끌고, 영어로 짧은 산문을 써 보도록 시켜야지 싶습니다. 일기쓰기를 영어로 시켜서는 안 될 노릇이라고 느껴요. 일기쓰기는 누구나 ‘어릴 적부터 어버이한테서 배운 내 삶말’로 가장 맑고 밝게 써야지 싶어요. 영어를 잘 쓰고 싶으면 영어를 잘 쓸 수 있는 ‘다른 글’을 쓸 노릇이에요. 한국에서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사귀면서 살아갈 사람이라면 마땅히 한국말을 가장 슬기롭고 아름답게 쓰는 밑길이 되면서, 한겨레 넋을 스스로 가장 북돋우고 살찌우는 ‘한국말로 일기를 쓰기’를 해야겠지요. 한국에서 살아가며 한국사람을 아끼고 어깨동무할 사람한테 영어로 일기를 쓰도록 시키는 일이란, 스스로 고운 넋과 얼을 모두 내버리거나 내팽개치면서 내 아름다운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는 눈썰미를 짓밟는 짓이 되리라 느껴요.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우리말 사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