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하고 스물네 시간을 살면

 


  아이들하고 스물네 시간을 살면, 이 아이들이 얼마나 작으며 여린가를 느낍니다. 그런데, 이 작으며 여린 아이들이 못 하는 일이 없습니다. 자그마한 손 몸 다리로 무엇이든 스스로 하고픈 것을 다 하고야 맙니다. 씩씩하고 사랑스러우며 튼튼해요. 아침에 잠에서 깨며 품에 안아 달라 엉겨붙고, 이내 배고프다 칭얼거립니다.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면서도 놀아 달라고 조릅니다. 그런데 조르다가도 어느덧 혼자서 재미나게 놀이를 만들어요. 굳이 어느 어른이 함께 놀아 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스스로 꿈나라를 생각하며 놉니다.


  작은아이를 안고 달래며 밥을 차립니다. 밥을 차리기 앞서 그제 삶아 놓은 고구마를 조금씩 떼어서 먹였습니다. 두 아이 모두 몸이 후끈거리기에 세이겐 탄 물을 알맞게 데워서 함께 먹입니다. 작은아이는 밥을 다 차려 큰아이더러 먹으라고 할 무렵 까무룩 잠이 드는데, 잠이 든 아이를 자리에 눕히려고 하다 보니 똥내음이 솔솔 나요. 뭔가 하고 슬쩍 바지를 들추니 똥을 푸지게 누었습니다. 작은아이를 안아서 달래고 재웠는데, 아이는 아버지 품에서 똥을 누었을까요. 아이를 안기 앞서 똥을 누고는 아버지 앞에서 밑 씻어 달라고 ‘끙끙’거렸을까요.


  잠든 아이를 데리고 씻는방으로 가서는 바지를 벗깁니다. 그야말로 푸짐한 똥이 퍽석 떨어집니다. 이래 가지고는 잠든 아이를 살살 달래며 찬찬히 씻기기는 어렵습니다. 엉덩이부터 발끝까지 비누를 바르며 씻겨야 하거든요.


  밑을 다 닦자 작은아이는 잠에서 깹니다. 잠에서 깬 아이를 품에 안으며 밥을 먹여 봅니다. 작은아이는 아침부터 이래저래 고구마랑 여러 가지를 먹었기에 배가 안 고픈지, 차린 밥은 더 먹지 않습니다. 누나가 노는 곁에서 얼쩡거리다가는 이내 눈이 감기고, 아버지 무릎에서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잠자리로 아이를 옮깁니다. 기저귀를 댑니다. 아이는 잠에서 깨지 않습니다. 이제 큰아이 밥을 더 먹이고, 단감 꼭지를 따서 접시에 담습니다. 똥바지를 빨래해서 마당에 넙니다. 이른아침에 빨아서 넌 기저귀는 다 말랐기에 하나하나 걷습니다. 이제는 옷가지를 갤 때이고, 큰아이도 살살 달래서 낮잠을 재워야지요. 낮잠을 재우고 나서는 또 아이들이 개운하게 잠에서 깰 테고, 저녁놀이를 즐기다가는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밥을 차려야겠지요.


  하루는 짧고 하루는 깁니다. 하루하루 아이들 놀이와 몸짓과 웃음으로 보내고, 이 날 저 날 쌓여, 아이들과 누리는 삶이 알차게 여뭅니다.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빨래순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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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로 도장찍기 과학은 내친구 7
요시다 기미마로 지음, 김세희 옮김 / 한림출판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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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겁게 살고, 웃으면서 놀고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13] 요시다 기미마로, 《야채로 도장찍기》(한림출판사,1997)

 


  좋은 생각이 마음밭에 있으면, 누구나 좋은 생각을 누려요. 좋은 생각이 마음밭에 없으면, 누구라도 좋은 생각을 누리지 못해요. 다른 사람이 나한테 좋은 생각을 베풀지 않습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대서 좋은 생각을 얻지 못합니다. 내 마음밭에 좋은 생각이 있어야 ‘책을 읽으며 마주할 좋은 생각’을 느끼거나 알아챕니다. 내 마음밭에 좋은 생각이 샘솟을 때에 ‘영화를 보며 만날 좋은 생각’을 깨닫거나 받아들입니다.


  아무런 생각이 마음밭에 없으면, 책이나 영화나 다른 어디에서 들려오는 좋은 생각은 ‘좋은 생각’이 아닌 지식이나 정보입니다. 지식이나 정보는 머리에 쌓는 조각들로 자리잡을 뿐, 삶을 북돋우는 꿈이나 사랑으로 거듭나지 않아요. 스스로 좋은 생각을 씨앗 한 알로 심어 차근차근 돌보고 아낄 적에, 이 씨앗이 차츰 자라나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요. 작은 씨앗 하나가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고 새로운 씨앗을 맺지요.


  그런데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속 들여다보기를 못 하거나 안 합니다.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밭 씨앗을 돌보면 되는데, 막상 내 마음부터 슬기로이 느끼려고 하지 않아요. 내 마음부터 곱게 보살피면서 내 삶을 알차게 여미는 길을 걷지 못해요.


  즐겁게 살아갈 때에 즐겁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에 즐겁지 않아요. 즐겁게 살아가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에 즐겁습니다. 더 크거나 비싼 자가용을 몰며 나들이를 다녀야 즐겁지 않아요. 즐겁게 살아가며 사랑을 속삭이고 노래하며 나눌 적에 즐겁습니다. 그런데,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느껴야 할 텐데, 이를 제대로 느끼는 사람이 매우 적어요. ‘즐거운 삶’이 무엇인가를 느껴야 하겠으나, 이를 알뜰살뜰 깨닫는 사람이 몹시 드물어요.


.. 어, 어! 야채 도막이 떨어졌네. 그런데도 엄마는 모르고 있어요. 마루에 야채 도막 무늬가 찍혀 있네. 그래! 야채 도막으로 도장찍기 해 보자 ..  (4∼5쪽)

 

 


  즐거움이란 즐거움입니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것이 즐거움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즐거움입니다. 나무 한 그루에 스미는 아침햇살이 즐거움입니다. 아침햇살이 감도는 가을바람이 즐거움입니다. 가을바람에 묻어나는 들내음이 즐거움입니다. 들내음에 곱게 서린 풀벌레 가느다란 늦가을 노랫소리가 즐거움입니다. 늦가을에 아직 노랫소리 들려주는 풀벌레가 깃든 풀섶이 즐거움입니다. 늦가을에 노랗거나 하얗게 꽃송이 올리며 빈들 언저리에서 가을 들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웃음꽃 들려주는 마을살이가 즐거움입니다.


  아이들 재채기가 즐거움입니다. 아이들 뛰노는 발걸음이 즐거움입니다. 구름이 즐거움입니다. 구름을 가로지르는 멧비둘기와 까마귀가 즐거움입니다.


  자동차 시끄러운 도시 한복판일지라도 큰길에서 벗어난 골목을 걸어 보셔요. 자동차 오가는 소리에서 홀가분한 골목을 천천히 거닐어 보셔요. 지붕 낮은 골목집 늘어선 동네에서는 하늘이 한결 넓게 보이고, 구름도 바람도 한껏 드넓게 누릴 수 있어요. 골목동네를 천천히 걷다 보면, 집과 집 틈새에 피어난 꽃을 만날 수 있어요. 골목고양이가 풀섶이나 지붕에서 낮잠 자는 모습도 보겠지요. 확 트인 하늘을 바라보면서 가을날 하늘빛은 도시에서도 이렇게 파랗구나 하고 느낄 만해요. 한 달에 한 차례쯤 말미를 얻어 도시를 멀리 벗어나, 시골에서 눈부시도록 파랗게 물든 하늘을 느껴 봐요. 하늘빛처럼 파란 바다를 느껴 보고, 파란 바다와 하늘을 지나가는 바람에 실리는 가을내음을 맡아 봐요.


  모두 즐거움이에요. 모두 사랑이고 모두 꿈이며 모두 삶이에요. 즐거움은 나 스스로 빚어요. 사랑은 내 손으로 이루어요. 꿈은 내 따순 마음으로 온누리에 펼쳐져요.


.. “엄마 보세요! 무늬가 생겼어요.” “어머! 예뻐라 야채 도막 더 줄게.” ..  (7쪽)

 

 


  요시다 기미마로 님이 빚은 그림책 《야채로 도장찍기》(한림출판사,1997)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어머니는 두 아이를 부엌에 두고 밥을 차립니다. 두 아이는 어머니 곁에서 즐겁게 ‘밥하기’ 구경을 합니다. 이윽고 아버지도 ‘밥하기’를 한몫 거듭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만 하는 시늉과 같은 부엌일’을 하지 않아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이들 예쁘게 먹여살리’는 밥을 해요. 아이들 예쁘게 먹여살리는 밥이란 어버이도 함께 예쁘게 먹여살리는 밥이 돼요.


  그림책 《야채로 도장찍기》는 푸성귀 하나로 누리는 즐거움을 보여줘요. 양파 꽁다리로, 무조각 하나로, 당근 한 토막으로, 귤이나 배 껍질로, 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신나게 놀이를 누리는 삶을 보여줘요.


  따지고 보면 ‘푸성귀로 도장찍기’는 아주 손쉽습니다. 과학이라 할 만하지 않고, 초등교육이라 할 만하지 않습니다. 이런 교육이나 저런 학습하고는 달라요. 즐거이 누리는 놀이예요. 하루를 예쁘게 보내면서 서로 웃고 떠들도록 이끄는 놀이입니다. 지능발달이나 정서발달하고는 동떨어진 놀이예요. 지능을 북돋우거나 정서를 다스리려고 하는 놀이란 없거든요. 모든 놀이는 즐거웁자며 해요. 모든 놀이는 하루를 빛내려고 해요. 모든 놀이는 아이와 어른이 ‘사람으로 태어난 기쁨’을 한껏 누리려고 해요.


.. 엄마의 카레라이스가 다 될 동안 아빠는 샐러드와 디저트를 만들어요. “어떤 샐러드가 될까?” “어떤 도막을 내 주실까?” “어떤 무늬가 될까?” ..  (18∼19쪽)


  그나저나, ‘야채(野菜)’는 일본사람 쓰는 한자말입니다. ‘채소(菜蔬)’는 중국사람 쓰는 한자말이에요. 한국사람한테는 ‘푸성귀’라는 낱말이 있어요. 이와 함께 ‘남새’와 ‘나물’이 있어요.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기며 ‘야채’라는 일본말을 잘못 썼구나 싶은데,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 한국말을 곱게 느낄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1.17.흙.ㅎㄲㅅㄱ)

 


― 야채로 도장찍기 (요시다 기미마로 글·그림,엄기원 옮김,한림출판사 펴냄,1997.5.10./9000원)

 

(최종규 . 2012 - 그림책 읽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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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17 22:08   좋아요 0 | URL
"아이들 재채기가 즐거움입니다."
- 저도 이런 즐거움을 잘 압니다.ㅋㅋ 귀여워서 즐거워지죠.

‘푸성귀’라는 낱말을 배워 갑니다. 알면서도 잘 사용하게 되지 않아요.
내일 아침상엔 푸성귀를 올려야겠어요. ^^

파란놀 2012-11-18 04:15   좋아요 0 | URL
pek0501 님...
저기, '알면서 잘 쓰지 않는' 말은 없어요.
잘 쓰지 않는 까닭은 '모르기 때문'이에요.

^^;;;

누군가를 깎아내리려 하는 말이 아니라,
참말 그래요.

옳고 바르며 슬기롭고 제대로 아는 말은
그 사람이 늘 쓰는 말이에요.

다만,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자주 쓰는 낱말조차
어떤 뜻이고 느낌인가를
영 제대로 모르지만 말예요.

제가 '한국말 살려쓰기' 글을 쓰기는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조차
한국말이 무엇인지도 모를 뿐더러,
말뜻이나 말느낌을
'사회 편견'이나 '관습 편견'으로 엉뚱하게 생각할 뿐,
스스로 말뜻과 말느낌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요.

'푸성귀'라는 낱말을 들으신 적이 있을 테지만,
정작 어디에서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스스로 찾아서 깨닫지 않았을 때에는
이 낱말은 '내가 모르는 말이다'고 해야 맞답니다.

사전에서 말풀이를 살핀다고 해서 쓸 수는 없어요.
삶으로 녹여야 쓸 수 있어요.

이를테면 '야채장수'나 '채소장수'가 아닌 '푸성귀장수'인데,
이런 자리에서도 즐겁게 쓸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해요.
'나물밥'이지 '푸성귀밥'은 아니에요.
밥상에 '날푸성귀'를 올리지 '날나물'을 올리지 않아요.
'남새밭'이나 '푸성귀밭'이지 '나물밭'은 아니에요.

하나하나 가만히 헤아려 보면 말이 살아나고
내 생각도 살아날 수 있어요...

jeandemian 2012-11-17 23:45   좋아요 0 | URL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대서 좋은 생각을 얻지 못합니다. 내 마음밭에 좋은 생각이 있어야 ‘책을 읽으며 마주할 좋은 생각’을 느끼거나 알아챕니다."
뭔가 공감이 되는 듯 합니다..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서 마음밭 씨앗을 돌보라고 하셨는데..어떻게 하면 돌볼 수 있나요?..러셀은 '행복의 정복'이란 책에서 행복의 비결이 관심을 자기 내면에 말고 밖에 있는 사물들에 두라 하였답니다..그렇다면 러셀의 말과 상충이 될 거 같습니다만..

파란놀 2012-11-18 04:11   좋아요 0 | URL
러셀이든 라셀이든 무슨 대수이겠어요.
러셀이 아닌 나치가 한 말이든 ㅂㄱㅎ나 ㅇㅁㅂ이 한 말이라도
아무것도 대수롭지 않아요.

내가 마음으로 아로새길 말은 '나 스스로 내 입에서 터져나오는'
내 삶에서 비롯하는 말일 뿐이에요.

잘 생각해 보시면 돼요.
아이들하고 잘 노는 길은 무엇일까요?
밥을 맛나게 짓는 길은 무엇일까요?

숲에 깃들면 무엇이 보이나요?

누군가는 숲에서 '먹는 풀'을 잔뜩 보고,
누군가는 숲에서 '도감에서 보고 외운 이름'을 잔뜩 떠올려요.
서로 무엇이 다를까요?

'아직 스스로 눈높이가 덜 된' 사람은
훌륭하다고 일컫는 책을 읽어도 무엇이 훌륭한지 몰라요.
'아직 스스로 마음그릇이 덜 된' 사람은
어설프거나 허접하다는 책을 읽어도 무엇이 어설프거나 허접한지 몰라요.

책을 읽는다고 스스로 발돋움하지 않아요.
좋다는 책을 추천받아 읽는대서 스스로 나아지지 않아요.

책에 앞서 '삶을 지어'야 비로소 내 '눈이 열리'면서
어떤 책을 손에 쥐더라도
책마다 다 다르게 서린 '아름다운 이야기'를 깨달아요.

여느 어른들은
그림책을 읽으며
이 그림책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아채지 못해요.

아이들이 백 번 천 번 즐겁게 읽는 그림책은
'두툼한 인문책 백 권 천 권'보다 훨씬 깊고 너른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는데,
이 까닭을 깨닫거나 헤아리는
'어버이'나 '어른'은 몹시 적어요.
왜 그럴까요?

아무쪼록, 스스로 늘 즐거우며 예쁜 마음이 되기를 빌어요.
그러면 모든 책이 나한테 와요.

jeandemian 2012-11-18 13:06   좋아요 0 | URL
글 감사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현실의 자신의 삶이 생략된 채 책에서 위안과 즐거움을 얻는 사람도 많겠지요. 저는 좀 더 용기를 내고자 합니다. 삶 속에 영향을 주지 않는 책읽기는 지양해야 겠지요?
아이들과 잘 노는 것, 밥을 만나게 짓는 방법을 생각해보니, 먼저 잘 노는 것, 맛나게 짓는 욕구가 있어야 하고 그만큼 관심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 뒤엔 관찰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따라올테고, 무엇보다도 '즐겁게'해야 스스로를 위해 좋겠죠?
책에 앞서 삶을 짓다..
사람의 마음은 뒤죽박죽으로 혼재되어 있는데..늘 즐거우며 예쁜 마음이 되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야 할까요?
화두와 다시 생각해볼 거리를 가져갑니다..

파란놀 2012-11-18 13:12   좋아요 0 | URL
jeandemian 님 스스로 '아이들과 놀기'랑 '밥 맛나게 짓기'를 생각해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고 스스로 찾아나서겠지요. 그러면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고, 생각을 기울이면서 사랑이 어디에서 싹트는가를 느낄 수 있어요. 이 사랑을 누린다면 바로 '즐거움'이 돼요.

삶에 영향을 안 주는 책읽기란, '지식쌓기'예요. 책읽기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삶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나 스스로 삶을 짓겠다는 마음을 북돋우는 책읽기가 될 때에 비로소 '책읽기'라는 말을 쓸 수 있어요.

사진기 단추를 누른대서 모두 '사진'이 되지 않아요. 내가 즐기고픈 이야기를 담아야 비로소 '사진'이에요.

"사랑해" 하는 말이 사랑이 아닌 줄 아시지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니고는 모두 '사랑'이 될 수 없어요.

우리 마음은 뒤죽박죽 섞이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렇게 뒤죽박죽일 테지요. 스스로 바라는 대로 내 마음이 이루어져요.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생각하면서 가만히 마음을 다스려 보셔요.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국민학교’와 ‘어린이집’
[말사랑·글꽃·삶빛 37] 학교에서 배우는 말

 


  얼추 이삼백 해쯤 앞서, 페스탈로치라는 분은 ‘어버이와 집 없이 떠도는 가난하고 외로운 아이’들을 그대로 두거나 모르는 척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제법 있는 사람들만 ‘교육을 받아’ 걱정없이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페스탈로치라는 분은 당신 모든 돈과 힘과 슬기를 그러모아서 ‘어버이와 집 없이 떠도는 가난하고 외로운 아이가 다닐 수 있는 배움집’을 마련했습니다. 이른바 ‘고아원’이라 할 수 있고 ‘초등학교’라 할 만한데, 페스탈로치라는 분이 연 ‘학교’는 ‘서로 삶을 나누고 배우는 조그마한 집’이었어요. 그래서 이곳은 ‘배움집’이라는 이름이 어울립니다.


  오늘날 지구별 곳곳에서 초등교육이 이루어집니다. 평등한 높낮이로 초등학교를 열어 누구나 기초교육을 받도록 꾀합니다. 다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장애 있는 아이가 느긋하게 다닐 학교는 드물어요. 장애 있는 아이가 장애 없는 아이하고 나란히 배울 수 있는 학교는 매우 드물기까지 해요. 초등교육 밑틀을 마련해서 퍼뜨린 페스탈로치 넋을 헤아린다면, 아직 한국 사회는 ‘페스탈로치 넋 발끝’에도 가 닿지 못한다고 할 만합니다. 학교 시설은 커지고 체육관이나 수영장까지 짓지만, 또 급식실이 있고 과학실과 전산실에다가 영어교실까지 있지만, 막상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모든 아이들을 사랑으로 맞아들이는 품은 열지 못해요.


  ‘초등 기초 교육’이라는 이름을 퍼뜨린 페스탈로치는 초등교육 다음으로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중등교육으로 넘어가는 징검돌로 초등교육을 다루지 않았어요. 어버이가 없어 사랑을 못 받는 아이들이 어버이 사랑을 초등교육을 받으며 누려야 한다고 여겼어요. 지식이나 학식이나 시험공부를 초등교육에서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고, ‘한 사람이 꿈을 꾸며 사랑을 나누는 넋’을 배움집에서 익혀야 한다고 여겼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1995년까지 ‘국민학교(國民學校)’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1996년부터 ‘초등학교(初等學校)’라는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이기 때문에 이름을 바꾸었는데, 교육부나 정부에서 스스로 이름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뜻있는 분들이 오래도록 꾸준히 ‘국민(國民)’이라는 이름이 어떤 뜻이요 어떻게 생긴 낱말인가를 따지면서 시민운동을 한 끝에, 교육부와 정부에서 이 목소리를 받아들여서 고쳤어요. 그러면, ‘국민’이 무슨 낱말이기에 이 낱말이 들어간 학교이름을 바꾸려 했을까요. 국어사전을 들춥니다. ‘국민’ 말풀이를 살피면,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 또는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 나옵니다. ‘국민학교’ 말풀이도 살펴봅니다. “‘초등학교’의 전 용어”라 나옵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보아서는 ‘국민’이나 ‘국민학교’라는 낱말이 왜 말썽이 되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국어사전은 백과사전이 아니니까 더 깊은 이야기를 다룰 수 없을는지 모르나, 막상 다뤄야 할 알맹이는 안 다루는구나 싶어요. 왜냐하면, ‘국민’이란, 일제강점기에 일본 천황이라는 사람이 ‘황국신민(皇國臣民)’을 간추려서 ‘국민’이라고 썼거든요. 국어사전에도 ‘황국신민’이라는 낱말이 실리기에 뜻풀이를 살피면, “일제 강점기에,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 된 백성이라 하여 일본이 자국민을 이르던 말”이라고 나옵니다. 곧, ‘국민’이라는 한자말은 일본 한자말이면서 ‘천황을 섬기는 제국주의 일본 사람’을 일컫는 낱말이에요.


  우리들 누구나 일제강점기를 살지 않아요. 우리들 누구나 한국사람이지 일본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학교이름에 ‘국민학교’처럼 붙는 ‘국민’이란 몹시 끔찍하면서 어리석고 어처구니없어요. 교육부와 정부는 이런 이름을 해방 뒤 1995년까지 그대로 내버렸다가 사람들 커다란 목소리에 마지못해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어요.


  그러면, 이제 더 넓게 생각해 봐요. 대통령으로 뽑힌 분들은 ‘국민과의 대화’를 해요. 언제나 ‘국민 여러분’이라고 말해요. ‘국민투표’라는 말은 아직 그대로 남았어요. 학교에서 ‘국민’이라는 이름을 털어야 한다면, 다른 자리에서도 똑같이 털어야 할 텐데, 다른 자리에서는 하나도 안 털어요. 게다가 이런 말뿌리를 깨닫거나 살피거나 알아차리는 어른이 거의 없어요.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말과 넋과 삶을 배우겠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아이들은 오늘날 어른들처럼 ‘국민’이 무엇이요, 이런 낱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슬기로운가를 느끼지 못해요.

  ‘국(國)’이라는 한자가 붙은 다른 낱말 또한 일제강점기에서 비롯했습니다. 꽤 많은 ‘國 무엇’은 한겨레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겨레를 짓밟거나 깔본 제국주의 넋을 드러냅니다. 이런 말은 안 써야 하고, 저런 말을 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말 하나에 담기는 넋을 살필 노릇이요, 글 한 줄에 서리는 얼을 보아야 합니다.


  1996년에 학교이름이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정작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얼른 바로잡아야 한다고 외친 이들은 ‘초등’으로 바뀌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여덟 살 어린이부터 열세 살 어린이까지 다니는 첫 배움집 이름이기에 ‘어린이학교’나 ‘어린이배움터’처럼 ‘어린이’를 생각하는 이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중등 과정으로 넘어가는 초등 과정이 아니기에 ‘초등’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에는 가르침도 배움도 될 수 없다고, 곧 교육이 될 수 없다고 여겼어요. 그러면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걸맞다 싶은 이름은 아니겠지요. ‘대학교’로 나아가는 ‘밑학교(아래에 있는 학교)’가 아니거든요. 푸름이들이 다니며 푸른 넋과 사랑과 꿈을 키우는 마당이 중학교와 고등학교이니, ‘국민학교’를 ‘어린이학교’로 바로잡을 때에는, ‘중·고등학교’는 ‘푸름이학교’라든지 ‘푸른학교’로 바로잡아야 알맞아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대목까지 안 짚습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 하나를 털면 끝이라고 여길 뿐입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찌꺼기조차 제대로 털지 못하는데, 더군다나 학교이름은 바꾼다지만,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무엇을 보고 느끼며 배울 때에 아름답게 자라는가를 생각하지 않아요. 대학바라기에 앞선 초등 교육 과정으로 바라볼 뿐인 나머지, 초등학교에 영어교실을 열잖아요. 더 일찍 지식을 가르치면 지식을 더 일찍 머릿속에 담을 뿐인 줄 깨닫지 않아요.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배우며 익힐 몸가짐이나 꿈이나 사랑은 살피지 않아요.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 운동장이나 놀이터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요. 아이들을 학원 한 군데라도 더 보내려고 애쓸 뿐이에요. 아이들이 아이답게 고우며 맑은 눈망울이 싱그러이 빛나도록 어깨동무를 하지 않아요.


  이리하여, 초등학교에서는 교사나 학생이나 ‘말’을 말답게 못 가르치고 못 배웁니다. 말을 말답게 가르치고 배우자면, 학교는 입시싸움터여서는 안 돼요. 학교가 지식공장이나 시험공장처럼 흐른다면, 아이들은 아무런 삶도 사랑도 꿈도 배우지 못해요. 지식공장이나 시험공장처럼 학교를 굴리면, 아이들은 톱니바퀴가 되고 말아요. 공장 부속품처럼 되거나 노예처럼 되고 말아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예쁜 토박이말’을 배워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마을에서 ‘아름다운 삶’을 배워야 해요. 어른들 스스로 아름답게 일구는 삶을 언제 어디에서나 지켜보며 즐길 수 있어야 해요. 시험성적으로 금을 긋는 학교일 때에는 아이들 마음이 망가져요. 중학교 예비지식을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려 하면 아이들 꿈이 무너져요. 대학바라기를 내다보며 일찌감치 학원에 집어넣으면 아이들 사랑이 사라져요.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꿈을 키우는 말을 어른한테서 배울 때에 즐겁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사랑을 나누도록 돕는 말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을 때에 기쁩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삶을 일구도록 이끄는 말을 동무하고 살가이 나눌 때에 환하게 빛납니다.


  ‘학교(學校)’란 무엇일까요. 배우는 기관인가요? 가르치는 시설인가요? 배우는 집인가요? 놀고 배우며 살아가는 마당인가요? 지난 1996년에 비록 ‘어린이학교’나 ‘어린이배움터’라는 이름으로 바뀌지 못했지만, 학교에 ‘어린이’라는 이름을 넣을 때에 아름다우며 참뜻을 살릴 수 있다고 느낀 몇몇 분들이 ‘유치원’이나 ‘유아원’ 아닌 ‘어린이집’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제는 이 ‘어린이집’ 이름마저 ‘예비 초등 교육기관’처럼 바뀌었으나, 어린이가 다닐 배움집이기에 ‘어린이집’이에요. 어린이는 놀면서 자랍니다. 어린이는 놀고 또 놀며 다시 놀면서 몸과 마음이 큽니다. 어린이한테는 놀이터가 있어야 해요. 어린이는 마당을 누려야 해요. 어른도 놀이터가 있어야 해요. 어른도 마당을 누려야 해요. 어른은 마당 한켠에서 일하고, 어린이는 마당 한켠에서 놀아야 해요. ‘어린이마당’이 이 땅에서 슬기롭고 어여쁘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꿈꿉니다.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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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13] 풀이름

 


  마을 어르신한테 풀이름을 여쭈면 당신이 아는 풀이름은 이렁저렁 알려주지만, 당신이 모르는 풀이름은 이내 “몰러.” 하고 말씀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당신이 뜯어서 먹는 풀이름은 웬만해서는 다 압니다. 굳이 안 뜯어서 안 먹는 풀이름은 딱히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없이 예쁘구나 싶은 꽃이 돌울타리 따라 죽 피었기에 마을 어르신한테 여쭈어 보면 으레 “몰러. 난 안 심었는데, 바람에 씨가 날아왔서 뿌리내렸나 봐. 꽃이 이쁘니 그냥 뒀지.” 하고 말씀합니다. 전남 고흥 어르신들은 고구마도 그냥 ‘감자’나 ‘감저’라고 말해요. 감자도 감자이고 고구마도 감자인 셈인데, 민들레이건 부추이건 마을마다 이름이 달라요. 마을 깊숙한 두메와 멧골에서는 또 두메와 멧골마다 이름이 다르고요. 어째 이리 이름이 다를까 싶으면서도, 저마다 삶자락이 다르니 저마다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는 모습이 달라, 이름도 달리 붙이겠구나 싶어요. 이를테면, 우리 집 다섯 살 큰아이는 안경 맞추러 ‘안경집’에 가고 신발 사러 ‘신발집’에 가며 자동차는 기름 넣으러 ‘기름집’에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와 옆지기는 아이한테 아무 가게이름도 안 가르쳤으나, 아이는 스스로 느낀 대로 말해요. 곧, 풀이름이라 할 때에도 표준말 이름을 달달 외워서 맞출 까닭이 없어요. 저마다 달리 살아가는 내 마을살이에 맞추고 내 보금자리를 헤아리며 ‘내가 느낀 풀이름’ 하나 붙이고 ‘내가 바라보는 꽃이름’ 하나 붙이면 돼요. 학자가 붙인 ‘민들레’ 이름이 아니요, 임금님이 붙인 ‘쑥’ 이름이 아니에요.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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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사람들

 


  나를 취재하고 싶다는 전화를 가끔 받는다. 충청북도 멧골에서 살 적에도 “취재하시는 일은 좋은데, 여기까지 오셔야 하는데요.” 하고 말하면 으레 전화를 뚝 끊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더라. 전라남도 시골에서 사는 요즈음도 “취재하시려는 뜻은 고마운데, 예까지 오셔야 해요.” 하고 말하면 슬그머니 전화를 뚝 끊고는 입을 스윽 씻네.


  시골서 살아가는 하루는 조용하니 좋다. 서울서 충청북도조차 멀다고 여기는 서울사람들이, 서울서 전라남도까지 오겠나. 충청북도나 전라남도 아닌 부산이나 광주라면, 또는 대전이나 마산이라면, 또는 안동이나 구례쯤만 되어도 좀 달랐으리라 싶은데, 어찌 되든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다.


  서울사람들은 숲이 얼마나 좋은가를 모른다. 숲에서 안 태어나고 숲에서 안 자랐으며 숲에서 일 안 하기에 숲이 얼마나 좋은가를 모를까. 아마 그러하리라. 언제나 아파트 둘레에서 살고, 언제나 자동차한테 둘러싸여서 살며, 언제나 숱한 신문과 방송과 잡지와 책과 영화와 언론과 연예인과 스포츠와 주식과 뭣뭣에 휩쓸린 채 살아가는 서울사람으로서는, 숲을 숲 그대로 느끼기란 아주 어려우리라 본다.


  나를 취재하고 싶다는 분한테 늘 똑같이 말한다. “휴가라고 생각하며 놀러오셔요. 여러 날 출장 간다고 생각하며 나들이하셔요. 시골집은 작지만 방 하나 비니 여러 날 묵으셔도 돼요. 밥은 제가 차리니 밥값도 안 들어요. 숲이 예쁘고 들이 아름다우며 바다가 멋져요. 밤에는 미리내를 보고, 낮에는 나뭇잎 살랑이는 파랗고 맑은 바람 쐬며 냇물을 마셔요.” 그런데 아직 이런 말에 마음이 이끌리는 서울사람, 그러니까 서울에서 일하는 글쟁이(기자·작가·편집자)는 없는 듯하다. 하기는, 시골사람 스스로 시골을 떠나 서울로 가겠다는 마당인데, 서울사람이 제발로 시골로 찾아오기란 몹시 힘들 만하리라.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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