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샤쓰 길벗어린이 작가앨범 3
방정환 지음, 김세현 그림 / 길벗어린이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17

 


대학교에 가느냐, 동무하고 이웃이 되느냐
― 만년샤쓰
 방정환 글,김세현 그림
 길벗어린이,1999.4.25./10500원

 


  어느 아이도 ‘대학교에 가려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어느 아이도 ‘어린이집에 가려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럼, 아이들은 왜 태어날까요. 아주 쉽고 아주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모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려고 태어납’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대학교에 보내려고 낳지’는 않습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낳지’는 않습니다. 그럼, 아이들을 왜 낳을까요. 더없이 수월하고 참으로 어여삐 느낄 수 있습니다만, 모든 어버이는 ‘아이를 사랑하려고 낳’습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가거나 중·고등학교를 가거나 ‘대학교에 붙는 시험공부를 잘 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든, 아무 학교를 안 다니든, 동무를 살가이 사귀면 됩니다. 아이들은 동무를 살가이 사귀며 즐거이 놀려고 학교를 다닙니다. 아이들은 시험공부 때문이 아닌, 스스로 살가운 동무가 되면서 다른 동무랑 살가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마음밭을 살찌우려고 학교에 갑니다.


  어버이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까닭은 시험공부를 잘 시켜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버이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이 생각하고 푸르게 꿈꿀 수 있기를 바라며 학교에 보낼 일입니다. 아이들이 살아가며 품을 너른 뜻이란 사랑하고 꿈이거든요.


.. 모자가 다 해졌어도 새 것을 사 쓰지 않고, 양복 바지가 해져서 궁둥이에 조각조각을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보면 집안이 구차한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단 한 번이라도 근심하는 빛이 있거나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눈치도 없었다 ..  (10쪽)


  1970년 11월 13일에 몸에 불을 붙여 죽으며 ‘힘없고 가난한 공장 일꾼’한테 고운 빛줄기 서리기를 바란 전태일이라고 하는 분은 ‘대학생 동무가 한 사람 있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참말 대학생인 동무가 있으면 반가왔으리라 여겼을 수 있는데, 내가 느끼기로는 굳이 ‘대학생 동무’는 아니었으리라 느껴요. 마음이 맞는 동무이면서, 삶길을 밝힐 수 있는 동무이고, 슬기를 일깨우며 서로 어깨동무할 동무를 사귈 수 있기를 빌었으리라 느껴요. 공장 일꾼 권리는 노동법이나 노동헌장으로 찾을 수 있지 않거든요. 노동법이나 노동헌장이 없더라도 공장 일꾼 권리나 농사꾼 권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거든요.


  법이 있기에 이 지구별이나 대한민국이 아름답게 흐르지 않습니다. 법을 수없이 새로 만든대서 이 지구별이나 대한민국이 아름답게 거듭나지 않습니다. 사람들 마음밭에 아름다운 사랑씨앗 드리울 때에 이 지구별이나 대한민국이 아름답게 흘러요. 사람들 생각밭에 아름다운 꿈씨앗 뿌리내릴 때에 이 지구별이나 대한민국이 아름답게 거듭나요.

  나는 우리 집 두 아이를 바라보며 늘 생각에 잠깁니다. 이 아이들은 왜 나한테 왔을까요. 이 아이들은 왜 나하고 함께 살아갈까요. 이 아이들은 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 주기를 바랄’까요. 이 아이들은 내가 ‘저희를 아끼고 사랑하며 보듬어 주기를 바랄’까요.


  이 아이들은 내가 값진 밥을 차리기를 바라지 않으리라 느껴요. 이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랑 맛난 밥을 즐거이 먹기를 바라리라 느껴요. 이 아이들은 내가 값나가는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주기를 바라지 않으리라 느껴요. 이 아이들은 내가 사랑을 나누고 꿈을 빚으며 하루하루 즐거이 누리기를 바라리라 느껴요.


  그러고 보면, 우리 아이들이건 이웃 아이들이건 ‘어버이가 솜씨있게 밥을 차리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즐거이 밥을 차려’서 ‘서로 활짝 웃으며 재미나게 먹’기를 바라요.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며 놀기를 바라지, 이런 놀이공원이나 저런 놀이시설에 가기를 바라지 않아요. 아이들은 두 손을 꼬옥 잡고 하늘을 휘휘 날리면 좋아라 합니다. 아이들은 무등을 태우고 휘적휘적 걸으면 기뻐라 합니다. 아이들은 땅을 박차고 함께 달리거나 나뭇가지를 들고 함께 뛰면 신나라 합니다.


.. “창남아! 오늘은 웬 일로 늦었느냐?” “예.” 하고 창남이는 그 괴상한 퉁퉁한 구두를 신은 발을 번쩍 들고, “오다가 길에서 구두가 다 떨어져 너덜거리기에 새끼를 얻어서 고쳐 신었더니, 또 너덜거리고 또 너덜거리고 해서, 여섯 번이나 제 손으로 고쳐 신고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  (16쪽)


  우리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어떤 동무를 사귈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 둘레에는 어떤 아이들이 어떤 어버이하고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사랑을 꽃피울 수 있을까요. 나중에 이 아이들끼리 어떤 사랑을 쌓고 어떤 믿음을 이루며 어떤 꿈을 북돋울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경제성장율 몇 퍼센트를 이룰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무슨무슨 업적을 이루거나 이런저런 건물을 세워야 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온갖 자격증을 따야 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공무원이 되거나 회사원이 되거나 훈장을 타야 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어릴 적 신나게 뛰논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야, 아이들을 신나게 뛰놀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시험공부에 길들여진 채 학교와 학원에 갇혀 지낸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아이들이 똑같이 시험공부 노예가 되도록 내몰 뿐입니다. 어릴 적 신나게 놀았으면서 막상 어른이 되면 아이들을 시험공부 노예로 길들이는 어른이 있고, 어릴 적 시험공부 노예로 길들여졌으나 아이들을 신나게 놀리려고 힘쓰는 어른이 있습니다만, 사랑받지 못한 채 크는 아이들은 사랑이 얼마나 곱고 맑은가를 살갗으로 느끼지 못해요. 사랑받으면서 사랑을 키우고, 사랑을 누리면서 사랑을 살찌워요. 사랑받으면서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누리면서 사랑을 꽃피워요.


  해를 바라보며 크는 아이들은 해를 가슴에 안아요. 나무를 바라보며 크는 아이들은 나무를 가슴에 품어요. 꽃을 바라보며 크는 아이들은 꽃을 가슴에 심어요. 그러니까, 성적표를 바라보며 크는 아이들은 성적표를 가슴에 두겠지요. 은행계좌를 바라보며 크는 아이들은 은행계좌를 가슴에 놓겠지요.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는 어른인가 생각할 수 있기를 빌어요. 아이들과 무엇을 나누고 싶은 어른인가 돌아볼 수 있기를 빌어요. 무엇보다 어른인 나 스스로 어떤 삶 어떤 꿈 어떤 사랑일 때에 환하게 빛나는 하루인가를 깨달을 수 있기를 빌어요.


.. “저의 어머니는 제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눈이 멀으셔서 보지를 못 하고 사신답니다.” 체조 선생님의 얼굴에는 굵다란 눈물이 흘렀다. 와글와글 하던 그 많은 학생들도 자는 것같이 고요하고, 훌쩍훌쩍 우는 소리만 여기저기서 조용히 들렸다 ..  (34쪽)


  방정환 님 글에 김세현 님이 그림을 붙인 《만년샤쓰》(길벗어린이,1999)라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만년샤쓰》에 나오는 ‘창남이’는 장님인 어머니하고 둘이서 몹시 가난하게 살아가는 아이라고 합니다. 옷은 한 벌뿐이요, 구두도 한 켤레뿐인데, 이마저 몹시 헐벗습니다. 동무나 교사는 창남이네 가난한 모습을 뻔히 바라보지만, 가엾게 여기지도 않고 도울 생각조차 못 합니다. 마지막에 창남이네 찢어지도록 가난한 살림살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저 눈물이나 뚝뚝 흘리지, 어느 누구도 ‘창남아, 내 옷을 입으렴. 나는 집에 옷 많다.’ 하고 말하지 않아요. 동무도 교사도 모두 창남이한테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아요.


  울음을 운대서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울음을 운대서 가난한 아이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손을 내밀어야 삶이 조금씩 달라져요. 어깨동무를 해야 삶을 차츰 바꿀 수 있어요. 멀거니 팔짱 낀 채 구경해서야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겨울 추운 날씨에 양말조차 없이 다 해진 구두를 신은 창남이를 보고도, 속에 입을 옷 한 벌 없어 얇은 외벌 옷 하나로 겨우 추위를 견디는 창남이를 보고도, 교사도 동무도 창남이한테 따순 손길이나 웃음이나 마음을 나누어 주지 않아요. 그저 킥킥거리다가 ‘저 아이는 좀 씩씩하구나.’ 하고 여길 뿐입니다.


  곰곰이 살피면, 예나 이제나 한국 사회 모습은 이와 꼭 닮습니다. 가난한 이웃이 있을 때에는 즐거이 밥술을 나눌 노릇이에요. 내 밥그릇에서 한 술을 덜고, 내 곁 동무도 밥그릇에서 한 술씩 덜어 저마다 즐거이 밥을 누릴 노릇입니다. 그러나 ‘밥술 나눔’을 하는 이웃보다는 고개를 홱홱 돌린 채 모르쇠로 지내는 이웃이 자꾸 늘어나고 말아요.


  도시가 커질수록 사랑이 메마릅니다. 학교가 커질수록 꿈이 옅습니다. 도시가 커질수록 돈은 늘어난다지만 삶을 너그럽게 거듭나지 않습니다. 학교가 커지거나 높아진다지만 막상 사랑이 포근하거나 꿈이 알차지 못합니다.

  창남이가 다니는 학교 동무들은 서로를 어떻게 여기는가요. 창남이가 다니는 학교 교사는 아이들을 얼마나 속깊이 바라보면서 얼싸안는가요. 지난날 오늘날 앞날 학교와 마을과 나라는 어떤 사랑을 품으며 이야기나무가 될 수 있을까요. 대학생이 되려는 뜻은 무엇인가요. 대학생이 되거나 어른이 된 우리들은 어떤 빛을 가슴에 품으려고 하는가요. 4345.11.3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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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을 먹는 책읽기

 


  나는 풀만 먹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풀맛을 즐겁게 누리고픈 사람입니다. 사회에서는 채식이나 육식이니 잡식이니 하고 금을 그으려 하지만, 고기를 많이 먹는다는 사람치고, 밥을 아예 안 먹는 사람은 없어요. 밥이란 쌀이요 쌀이란 벼며 벼란 곡식인데, 곡식이란 풀입니다. 곧, 푸성귀를 많이 먹든 고기를 많이 먹든, 누구나 풀을 먹어요. 풀 한 포기는 목숨 이을 밥바탕이 됩니다.


  나는 밥이 되는 벼풀 말고 다른 풀을 즐겁게 누리고 싶습니다. 무도 좋고 배추도 좋습니다. 감자도 좋고 쑥도 좋습니다. 고구마도 좋고 마늘도 좋습니다. 들판에서 스스로 자라는 온갖 풀 모두 좋습니다. 괭이밥풀도 망초풀도 좋습니다. 주홍서나물풀도 좋고 유채풀도 좋습니다. 내 몸으로 깃들며 고운 목숨이 될 모든 풀이 반갑습니다.


  옆지기 동생이 시집잔치를 하기에 전남 고흥에서 경기 일산까지 먼길을 달려옵니다. 시집잔치를 며칠 앞두고, 옆지기 동생이 새로 마련한 작은 집으로 찾아가서 튀김닭을 함께 뜯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옆지기 동생네 단골집이라 하는 데에서 시킨 튀김닭인데, 밥상에 튀김닭을 펼칠 적에 깍뚝무와 튀김닭이 놓일 뿐, 흔하디흔한 양배추버무림조차 없습니다. 고기랑 무조각만 있을 뿐, 달리 아무런 풀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흥을 벗어나 순천 기차역에서 도시락을 사다 먹을 적에도 ‘도시락 반찬’은 온통 고기 반찬이었지, 싱싱한 풀 한 줌 없어요. 따로 고기집에 들러 세겹살을 구워 먹을 때가 아니라면 싱싱한 풀을 반찬으로 내주는 밥집이 없어요. 어느 밥집에서건 김치를 빼면 ‘풀 반찬’은 구경할 수 없습니다.


  문득 깨닫습니다. 도시에는 풀이 홀가분하게 자랄 터가 없습니다. 도시사람은 풀이 길가나 아파트 잔디밭에서 ‘함부로’ 자랄라치면 약을 치거나 북북 뜯거나 뽑습니다. 가게 많고 자동차 많으며 밥집 많은 도시이지만, 막상 나무가 없고 풀이 없으며 꽃이 없는 도시예요. 예쁘장한 꽃을 다발로 사고파는 꽃가게는 있습니다만, 풀이 씨앗을 틔워 자라난 다음 새 씨앗을 맺으려고 피우는 소담스러운 꽃은 없는 도시예요. 길가에 나무를 심기는 하되, 사람들이 오붓하게 나무열매 즐길 수 없는 도시예요.


  도시로 마실을 왔다면 풀 먹을 생각은 할 수 없겠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도시로 나들이를 왔으면 도시 흐름에 발맞추어 고기만 먹을 노릇이구나 하고 다시금 느낍니다. 시골로 돌아가 흐뭇하게 풀 먹을 나날을 그립니다. 시골집에서 호젓하게 풀 먹으며 풀방귀 뀔 나날을 헤아립니다. 4345.11.3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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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근똥

 


  집에서 당근을 갈아서 얻는 물을 마시면 몸이 쏴아 시원하구나 느끼면서 똥을 눌 적에 당근빛이 감도는 불그스름한 똥을 눕니다. 나도 옆지기도 두 아이도 당근빛 똥을 눕니다. 당근이 내 몸으로 스며들어 내가 당근이 되고, 똥도 당근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이 똥이 흙으로 돌아가면 흙빛에 당근빛이 섞여 새로운 빛깔로 거듭나겠지요.


  당근똥을 누는 사람은 당근내음이 납니다. 당근 속살 같은 마음이 되고, 당근 무늬 같은 얼굴이 되며, 당근풀 푸른 잎사귀 같은 마음이 돼요. 당근은 무엇을 먹고 자랐을까요. 나는 당근이 먹고 자란 어떤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맨땅에서 햇볕을 쬐고 빗물을 마시며 바람을 들이켠 당근이 내 몸속에서 예쁘게 빛납니다. 4345.11.3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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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도 1번 걷기여행 - 주머닌 가볍고 꿈은 무거운 철부지 두 남자의 에세이포토
신미식.이민 글 사진 / 뜰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20

 


내 마음 돌아보는 사진마실
― 대한민국 국도1번 걷기여행
  신미식·이민 글·사진
  뜰 펴냄,2010.8.18./15000원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바다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바다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바닷물을 늘 만지면서 살아갑니다. 바다가 아이들 보금자리입니다. 숲속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숲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나무와 풀을 늘 만지면서 살아갑니다. 숲이 아이들 보금자리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거의 모두 도시에서 태어나 자랍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시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도시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도시 물질문명을 늘 만지면서 살아갑니다. 오늘날 아이들로서는 도시가 아이들 보금자리입니다. 도시가 아이들 삶자리요, 배움자리이고, 사랑자리이거나 꿈자리가 되겠지요.


  바닷가 아이들은 바다를 숨쉬면서 바다를 가슴 깊이 받아들여 바다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숲속 아이들은 숲을 숨쉬면서 숲을 가슴 깊이 맞아들여 숲 이야기를 노래로 부릅니다. 도시 아이들은 도시를 숨쉬면서 도시를 가슴 깊이 아로새기며 도시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겠지요.

  도시 아이들은 어떤 도시를 어떤 빛깔과 무늬와 냄새로 아로새길까요. 도시 아이들은 어떤 도시 어떤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을까요. 도시가 들려주는 소리에 익숙한 아이들이 시골로 가서 들과 메와 내와 숲을 바라본다면 무엇을 바라보거나 느끼거나 살피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요.


  신미식·이민 두 분이 쓰고 찍은 《대한민국 국도1번 걷기여행》(뜰,2010)을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신미식·이민 두 분은 어느 마을 어느 보금자리에서 태어나 어떤 꿈과 사랑을 꽃피우면서 살아왔을까요. 두 분은 이 나라 국도1번을 거닐면서 어떤 꿈과 사랑을 즐기거나 누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었을까요. “40년을 넘게 살면서(사실은 50에 가깝다)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던 밥이 있기나 했던가? 기억에 없다. 모든 밥상은 늘 당연한 것이었다. 오늘은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33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이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으니, 이제부터 ‘밥 한 그릇 즐겁게 먹으면서, 사진 한 장 즐겁게 찍는’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살아가는 즐거움’을 언제나 돌아보고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는 즐거움’이 어디에 밑뿌리를 두는가를 슬기롭게 깨달을 수 있으려나요.


  아이들은 값비싼 놀잇감이 있어야 재미나게 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값진 놀잇감이 여럿 있거나 잔뜩 있어냐 신나게 놀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는 돌멩이 하나가 대단한 놀잇감입니다. 아이들로서는 모래밭이나 흙땅이 너른 놀이터입니다. 돌멩이를 만지작거리고 나뭇가지를 쥐면서 스스로 놀이를 빚습니다. 모래밭에서 뒹굴거나 흙땅에 돌멩이로 금을 죽죽 그리면서 저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빚습니다. 즐겁게 놀기 때문에 굳이 놀잇감이 없어도 됩니다. 즐겁게 노는 만큼 어떤 규칙이나 원칙이나 틀이나 제도나 정책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림을 이렇게 그리라는 법이 없고, 글을 저렇게 쓰라는 법이 없어요. 곧, 사진을 어찌저찌 찍어야 하는 법은 없어요. 스스로 가장 즐거울 때에 가장 즐겁게 찍는 사진이요, 스스로 가장 즐거이 누리는 삶일 적에 가장 즐겁게 읽는 사진이에요.

  어떤 장비가 있기에 어떤 사진을 찍지 않아요. 마음속으로 어떤 모습을 살가이 그리면서 어떤 삶을 일구느냐에 따라 ‘어떤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려요. 어떤 사진스승을 만나야 하지 않아요. 스스로 어떤 마음이 되어 어떤 눈길을 어떤 사랑이 되어 살아가느냐에 따라, 내 사진을 스스로 이루고픈 대로 이룰 수 있어요.


  두 사람은 “작고 깡마른 까까머리 경상도 아저씨가 휴일 아침, 유창한 경상도 말씨로 낯선 이에게 담배 한 개비를 청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장 전라도 같은 도시인 목포의 아침 풍경인 것을(26쪽).” 하고 느끼며 국도1번 나들이를 합니다. “예상치 않은 곳에서 발견한 옛것에 대한 흔적에 흠뻑 취한 우리의 걸음은 더디다. 잘 다듬어진 국도1번과 콘크리트 블록으로 담장을 세운 마을은 우리의 시선과 발길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우리가 찾고자 했던 고향, 시골, 시골스러운 것은 큰길에서 벗어난 곳에 있다(93쪽).” 하고 느끼며 국도1번을 걷다가는 국도1번에서 벗어나 걷습니다. 곧, 국도1번 나들이라 하더라도 국도1번만 걸어야 할 까닭이 없어요. 티벳을 걷는 나들이라 하더라도 네팔부터 티벳으로 걸어갈 수 있고, 티벳부터 몽골까지 걸을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푸름이(청소년)’를 찍는다고 생각해 보셔요. 딱 오늘 이 자리에서 푸름이인 아이만 찍어야 하지 않아요. 어제까지 어린이였다가 모레부터 푸름이가 될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어제까지 푸름이였고 오늘부터는 여느 어른이 된 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틀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즐기거나 누리면서 ‘바라보는 눈길’이 있습니다. 내 눈길에 따라 내 마음을 살포시 담는 글이요, 내 눈길에 따라 내 마음을 가만히 담는 사진입니다.


  “우리가 생각한 최초의 근대식 도로, 또는 근대사의 애환이 서린 향수 가득한 길, 낭만적인 고향 등 이런 것들은 대부분 국도1번과 조금씩은 벗어나 있다는 것. 그래서 무작정 국도1번을 따라 걸을 것이 아니라 국도1번의 언저리를 걸어야 당초 우리가 목적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94쪽).”과 같은 대목을 읽고, “이 마을 저 동네의 고삿과 담장을 기웃거리고 간혹 마을사람들 눈치 봐 가며 까치밥으로 남겨 둔 홍시도 슬쩍해 빨아먹고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에 눈도장도 찍고 논두렁 밭두렁에 발자국을 찍는다(235쪽).”와 같은 대목을 읽습니다. 마실길에 나선 사람은 이제껏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을까요. 오늘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앞으로는 어떤 마음으로 추스르며 살아가고 싶을까요.

  사진마실을 하든 그림마실을 하든 글마실을 하든, 마실길에 나선 이는 ‘다른 사람 삶’을 기웃기웃 구경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삶을 마주하면서 ‘내 삶이 여태껏 어떻게 흘렀는가’를 깨닫습니다. 나와 다른 곳에서 나와 다른 삶을 일구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내 삶을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느낍니다.


  멋스러운 길을 찾아보려는 마실길이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멋스럽게 바라보면서 내 보금자리를 어떠한 멋으로 보듬는가를 알아보려고 떠나는 마실길입니다. 마땅한 노릇이에요. 멋스러운 길이라 한다면 내가 늘 살아가는 마을길이어야 해요. 어쩌다 한 번, 또는 내 삶을 통틀어 꼭 한 번 찾아갈 만한 멋스러운 길이라면 ‘멋스러운’ 터가 되지 못해요. 내가 살아가고 싶을 뿐 아니라, 참말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데가 멋스러운 터입니다. 곧, 내가 살아가며 기쁘게 북돋우는 사진이 ‘내 사진’입니다. 내 온 사랑을 담는 사진일 때에 ‘내 사진’입니다. 내가 하루하루 찬찬히 이루면서 빛내는 꿈을 싣는 사진일 때에 ‘내 사진’이에요.


  국도1번은 왜 국도1번일까요. 국도1번이라는 숫자에는 어떤 뜻이 깃들까요. 국도2번이나 3번은, 4번이나 5번은, 11번이나 45번은, 111번이나 368번은, 1111번이나 2345번은 저마다 어떤 뜻이 깃들까요.


  국도1번이 아니더라도 지방도로 2745번 길을 찬찬히 거닐며 마을살이를 곱다시 돌아볼 수 있으면 됩니다. 이름이 붙지 않는 조그마한 골목길을 차근차근 거닐며 동네살이를 예쁘게 돌이켜볼 수 있으면 됩니다. 내 살림집에서 부엌과 마루를 오가며 누리는 하루를 곰곰이 되새길 수 있으면 됩니다.


  나는 어느 길에 서나요. 우리 아이는 어느 길에 서나요. 내 옆지기와 이웃과 동무는 저마다 어느 길에 서나요. 이 길에서 우리들은 어떤 꿈을 먹으며 하루를 누리는가요. 이 길에서 나는 어떤 사랑을 꽃피우면서 사진 하나에 웃음 한 조각 싣는가요.


  사람들은 누구나 날마다 ‘내 마음 돌아보는 사진마실’을 누립니다. 스스로 늘 느끼는 사람이 있고, 스스로 언제나 못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잣거리에 파 한 묶음 사러 다녀오는 길도 마실입니다. 아이 손을 잡고 어린이집을 오가는 길도 마실입니다. 바람을 쐬러 마당에 내려서서 하늘바라기를 하며 기지개를 켜는 길도 마실입니다. 밥을 차려 마루에 밥상을 내놓는 길도 마실입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잠자리에 드는 길도 마실입니다. 삶은 언제나 마실입니다. 웃음이 피어나고 눈물이 젖기도 하는 고운 마실입니다. 4345.11.2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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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배우는 책읽기

 


  가르치는 사람은 늘 배우는 사람입니다. 나는 국민학교 여섯 해와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는 동안, ‘나와 동무를 가르치는 자리’에 선 분들이 당신 스스로 얼마나 배우려 했는가를 살피면서 삶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당신 스스로 즐겁고 힘차게 배우는 분들을 볼 때면, 이분들한테서는 말투 하나 말씨 하나 살뜰히 돌아보면서 내 마음밥으로 삼습니다. 당신 스스로 배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언제나 판박이 같은 앎조각만 잔뜩 늘어놓는 분들을 볼 때면, 이분들한테서는 저러한 어른으로 지내는 삶이란 얼마나 따분하고 쓸쓸한가 하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먼저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누군가 읽을 글을 쓰려면, 먼저 스스로 즐거이 돌아볼 글(삶)을 읽어야 합니다. 곧, 글(삶)을 쓰려면 책(삶)을 얼마나 깊고 넓게 읽느냐에 따라 내 글매무새가 달라지는 줄 느껴야 합니다. 삶은 종이책에만 담기지 않습니다. 삶은 종이책에도, 나뭇가지에도, 풀잎에도, 나비 날갯짓에도, 아이들 웃음에도, 할머니 일노래에도, 파란하늘 흰구름에도, 달빛과 별빛에도, 목숨을 살리는 흙에도, 따사로운 볕에도 고이 담깁니다. 책(삶)을 읽으려는 사람은 내 둘레 모든 책(삶)에 서린 이야기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럴 때에, 글(삶)을 쓰면서 내 고운 이웃과 동무한테 아름다운 글(삶)을 들려줄 수 있어요.


  종이책조차 제대로 읽지 않으며 사람책이나 숲책을 읽지 않는다면 스스로 바보가 됩니다. 종이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종이책에 서린 삶을 헤아리지 못하면, 이야기샘을 길어올리지 못합니다. 4345.11.2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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