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샤쓰 길벗어린이 작가앨범 3
방정환 지음, 김세현 그림 / 길벗어린이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17

 


대학교에 가느냐, 동무하고 이웃이 되느냐
― 만년샤쓰
 방정환 글,김세현 그림
 길벗어린이,1999.4.25./10500원

 


  어느 아이도 ‘대학교에 가려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어느 아이도 ‘어린이집에 가려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럼, 아이들은 왜 태어날까요. 아주 쉽고 아주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모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려고 태어납’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대학교에 보내려고 낳지’는 않습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낳지’는 않습니다. 그럼, 아이들을 왜 낳을까요. 더없이 수월하고 참으로 어여삐 느낄 수 있습니다만, 모든 어버이는 ‘아이를 사랑하려고 낳’습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가거나 중·고등학교를 가거나 ‘대학교에 붙는 시험공부를 잘 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든, 아무 학교를 안 다니든, 동무를 살가이 사귀면 됩니다. 아이들은 동무를 살가이 사귀며 즐거이 놀려고 학교를 다닙니다. 아이들은 시험공부 때문이 아닌, 스스로 살가운 동무가 되면서 다른 동무랑 살가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마음밭을 살찌우려고 학교에 갑니다.


  어버이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까닭은 시험공부를 잘 시켜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버이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이 생각하고 푸르게 꿈꿀 수 있기를 바라며 학교에 보낼 일입니다. 아이들이 살아가며 품을 너른 뜻이란 사랑하고 꿈이거든요.


.. 모자가 다 해졌어도 새 것을 사 쓰지 않고, 양복 바지가 해져서 궁둥이에 조각조각을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보면 집안이 구차한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단 한 번이라도 근심하는 빛이 있거나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눈치도 없었다 ..  (10쪽)


  1970년 11월 13일에 몸에 불을 붙여 죽으며 ‘힘없고 가난한 공장 일꾼’한테 고운 빛줄기 서리기를 바란 전태일이라고 하는 분은 ‘대학생 동무가 한 사람 있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참말 대학생인 동무가 있으면 반가왔으리라 여겼을 수 있는데, 내가 느끼기로는 굳이 ‘대학생 동무’는 아니었으리라 느껴요. 마음이 맞는 동무이면서, 삶길을 밝힐 수 있는 동무이고, 슬기를 일깨우며 서로 어깨동무할 동무를 사귈 수 있기를 빌었으리라 느껴요. 공장 일꾼 권리는 노동법이나 노동헌장으로 찾을 수 있지 않거든요. 노동법이나 노동헌장이 없더라도 공장 일꾼 권리나 농사꾼 권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거든요.


  법이 있기에 이 지구별이나 대한민국이 아름답게 흐르지 않습니다. 법을 수없이 새로 만든대서 이 지구별이나 대한민국이 아름답게 거듭나지 않습니다. 사람들 마음밭에 아름다운 사랑씨앗 드리울 때에 이 지구별이나 대한민국이 아름답게 흘러요. 사람들 생각밭에 아름다운 꿈씨앗 뿌리내릴 때에 이 지구별이나 대한민국이 아름답게 거듭나요.

  나는 우리 집 두 아이를 바라보며 늘 생각에 잠깁니다. 이 아이들은 왜 나한테 왔을까요. 이 아이들은 왜 나하고 함께 살아갈까요. 이 아이들은 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 주기를 바랄’까요. 이 아이들은 내가 ‘저희를 아끼고 사랑하며 보듬어 주기를 바랄’까요.


  이 아이들은 내가 값진 밥을 차리기를 바라지 않으리라 느껴요. 이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랑 맛난 밥을 즐거이 먹기를 바라리라 느껴요. 이 아이들은 내가 값나가는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주기를 바라지 않으리라 느껴요. 이 아이들은 내가 사랑을 나누고 꿈을 빚으며 하루하루 즐거이 누리기를 바라리라 느껴요.


  그러고 보면, 우리 아이들이건 이웃 아이들이건 ‘어버이가 솜씨있게 밥을 차리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즐거이 밥을 차려’서 ‘서로 활짝 웃으며 재미나게 먹’기를 바라요.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며 놀기를 바라지, 이런 놀이공원이나 저런 놀이시설에 가기를 바라지 않아요. 아이들은 두 손을 꼬옥 잡고 하늘을 휘휘 날리면 좋아라 합니다. 아이들은 무등을 태우고 휘적휘적 걸으면 기뻐라 합니다. 아이들은 땅을 박차고 함께 달리거나 나뭇가지를 들고 함께 뛰면 신나라 합니다.


.. “창남아! 오늘은 웬 일로 늦었느냐?” “예.” 하고 창남이는 그 괴상한 퉁퉁한 구두를 신은 발을 번쩍 들고, “오다가 길에서 구두가 다 떨어져 너덜거리기에 새끼를 얻어서 고쳐 신었더니, 또 너덜거리고 또 너덜거리고 해서, 여섯 번이나 제 손으로 고쳐 신고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  (16쪽)


  우리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어떤 동무를 사귈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 둘레에는 어떤 아이들이 어떤 어버이하고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사랑을 꽃피울 수 있을까요. 나중에 이 아이들끼리 어떤 사랑을 쌓고 어떤 믿음을 이루며 어떤 꿈을 북돋울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경제성장율 몇 퍼센트를 이룰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무슨무슨 업적을 이루거나 이런저런 건물을 세워야 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온갖 자격증을 따야 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공무원이 되거나 회사원이 되거나 훈장을 타야 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어릴 적 신나게 뛰논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야, 아이들을 신나게 뛰놀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시험공부에 길들여진 채 학교와 학원에 갇혀 지낸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아이들이 똑같이 시험공부 노예가 되도록 내몰 뿐입니다. 어릴 적 신나게 놀았으면서 막상 어른이 되면 아이들을 시험공부 노예로 길들이는 어른이 있고, 어릴 적 시험공부 노예로 길들여졌으나 아이들을 신나게 놀리려고 힘쓰는 어른이 있습니다만, 사랑받지 못한 채 크는 아이들은 사랑이 얼마나 곱고 맑은가를 살갗으로 느끼지 못해요. 사랑받으면서 사랑을 키우고, 사랑을 누리면서 사랑을 살찌워요. 사랑받으면서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누리면서 사랑을 꽃피워요.


  해를 바라보며 크는 아이들은 해를 가슴에 안아요. 나무를 바라보며 크는 아이들은 나무를 가슴에 품어요. 꽃을 바라보며 크는 아이들은 꽃을 가슴에 심어요. 그러니까, 성적표를 바라보며 크는 아이들은 성적표를 가슴에 두겠지요. 은행계좌를 바라보며 크는 아이들은 은행계좌를 가슴에 놓겠지요.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는 어른인가 생각할 수 있기를 빌어요. 아이들과 무엇을 나누고 싶은 어른인가 돌아볼 수 있기를 빌어요. 무엇보다 어른인 나 스스로 어떤 삶 어떤 꿈 어떤 사랑일 때에 환하게 빛나는 하루인가를 깨달을 수 있기를 빌어요.


.. “저의 어머니는 제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눈이 멀으셔서 보지를 못 하고 사신답니다.” 체조 선생님의 얼굴에는 굵다란 눈물이 흘렀다. 와글와글 하던 그 많은 학생들도 자는 것같이 고요하고, 훌쩍훌쩍 우는 소리만 여기저기서 조용히 들렸다 ..  (34쪽)


  방정환 님 글에 김세현 님이 그림을 붙인 《만년샤쓰》(길벗어린이,1999)라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만년샤쓰》에 나오는 ‘창남이’는 장님인 어머니하고 둘이서 몹시 가난하게 살아가는 아이라고 합니다. 옷은 한 벌뿐이요, 구두도 한 켤레뿐인데, 이마저 몹시 헐벗습니다. 동무나 교사는 창남이네 가난한 모습을 뻔히 바라보지만, 가엾게 여기지도 않고 도울 생각조차 못 합니다. 마지막에 창남이네 찢어지도록 가난한 살림살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저 눈물이나 뚝뚝 흘리지, 어느 누구도 ‘창남아, 내 옷을 입으렴. 나는 집에 옷 많다.’ 하고 말하지 않아요. 동무도 교사도 모두 창남이한테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아요.


  울음을 운대서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울음을 운대서 가난한 아이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손을 내밀어야 삶이 조금씩 달라져요. 어깨동무를 해야 삶을 차츰 바꿀 수 있어요. 멀거니 팔짱 낀 채 구경해서야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겨울 추운 날씨에 양말조차 없이 다 해진 구두를 신은 창남이를 보고도, 속에 입을 옷 한 벌 없어 얇은 외벌 옷 하나로 겨우 추위를 견디는 창남이를 보고도, 교사도 동무도 창남이한테 따순 손길이나 웃음이나 마음을 나누어 주지 않아요. 그저 킥킥거리다가 ‘저 아이는 좀 씩씩하구나.’ 하고 여길 뿐입니다.


  곰곰이 살피면, 예나 이제나 한국 사회 모습은 이와 꼭 닮습니다. 가난한 이웃이 있을 때에는 즐거이 밥술을 나눌 노릇이에요. 내 밥그릇에서 한 술을 덜고, 내 곁 동무도 밥그릇에서 한 술씩 덜어 저마다 즐거이 밥을 누릴 노릇입니다. 그러나 ‘밥술 나눔’을 하는 이웃보다는 고개를 홱홱 돌린 채 모르쇠로 지내는 이웃이 자꾸 늘어나고 말아요.


  도시가 커질수록 사랑이 메마릅니다. 학교가 커질수록 꿈이 옅습니다. 도시가 커질수록 돈은 늘어난다지만 삶을 너그럽게 거듭나지 않습니다. 학교가 커지거나 높아진다지만 막상 사랑이 포근하거나 꿈이 알차지 못합니다.

  창남이가 다니는 학교 동무들은 서로를 어떻게 여기는가요. 창남이가 다니는 학교 교사는 아이들을 얼마나 속깊이 바라보면서 얼싸안는가요. 지난날 오늘날 앞날 학교와 마을과 나라는 어떤 사랑을 품으며 이야기나무가 될 수 있을까요. 대학생이 되려는 뜻은 무엇인가요. 대학생이 되거나 어른이 된 우리들은 어떤 빛을 가슴에 품으려고 하는가요. 4345.11.3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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