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마실 설거지

 


  이웃집에 마실을 간다. 집들이를 하는 이웃은 손님들한테 이것저것 차리느라 부산하다. 즐거우며 고맙게 밥을 얻어먹고는 밥상을 슬쩍 돌아보니, 빈 그릇 제법 보인다. 밥상에서 빈 그릇 좀 날라 부엌 개수대에 놓는다. 그러고는 조용히 물꼭지를 틀어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거리는 이 말고도 많으나, 사이사이 조금씩 빈 그릇 설거지를 하면, 그동안 이 그릇들 물기가 말라 치우기도 수월하고, 새로 그릇을 써야 할 때에 쓰기도 좋다.


  그런데 이런 설거지이든 저런 밥차림이든, 이웃집이든 동무집이든, 2013년을 며칠 앞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집일 저런 집살림을 ‘사내’들이 먼저 나서서 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지 못한다. 집안 아이들도, 집안 어른들도, 사내들은 으레 엉덩이가 무거워 방바닥에 눌러붙고, 가시내들은 ‘사내보다 엉덩이가 더 큰’데도 엉덩이가 가벼운지(?) 쉬지 않고 일어나서 무엇을 나르고 무엇을 차리고 무엇을 하고 …… 끝이 없다. 4345.12.2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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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사람 얼굴

 


  요 며칠 여러 가지 일이 잇달아 나한테 찾아온다. 왜 찾아올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찬찬히 뿌리를 찾고 짚다가 문득 한 가지 깨닫는다. 내 삶 어느 한 자락이라도 뜻없는 대목이 없는데, ‘군 면제 대상’이던 내가 ‘4급 현역’이 되어 군대에 붙들려 들어가서 보낸 스물여섯 달은 여러모로 내 뒷날 삶을 톺아보도록 북돋우는 길이 되기도 했구나 싶다. 이제껏 못 느낀 한 가지 일이 있는데, 나는 강원도 양구 깊디깊은 멧골에서 지낼 적에, 이곳까지 끌려온 ‘내 또래 군인’들 얼굴을 오늘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아챈다. 도시에서 태어나 살다 온 또래들 얼굴빛과 시골에서 태어나 살다 온 또래들 얼굴빛이 다르다. 도시에서 살았어도 시골스러운 넋인 또래들이랑 시골에서 살았어도 도시스러운 넋인 또래들 얼굴빛이 다르다. 내가 다시 만나고프다고 생각하는 ‘군대 적 동무들’을 돌아보면, 모두 ‘두멧시골에서 태어나 흙을 만지며 살다가 군대로 끌려온 아이들’이다. 두멧시골에서 흙을 만지던 내 또래들이 그무렵 열아홉 스물 스물한 살인데,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하고 느긋하며 사랑스러운 얼굴빛이었다. 어쩜 그럴 수 있었을까. 어쩜 여태껏 이를 못 알아채고 살았을까.


  내 낯빛에 그늘이 드리우거나 찡그린 고랑이 생길 적을 떠올린다. 이때에는 어김없이 나 스스로 ‘흙을 안 만진 나날’이 좀 길기 일쑤이다. 내 낯빛에 웃음꽃이 피거나 맑은 기운 퍼질 적을 떠올린다. 이때에는 어김없이 나 스스로 ‘늘 흙을 가까이하며 만진 나날’이기 일쑤이다.


  마을 들길을 걷는다든지, 집 언저리를 돌며 풀을 훑어 밥상을 차린다든지, 자전거 몰며 아이들과 이웃마을 돌아다닌다든지, 이럴 적에 내 얼굴빛은 내가 느끼기로도 환하고 사랑스럽다.


  그래, 내가 반기고 좋아하는 이웃은 시골사람이다. 나 스스로 살아가고픈 내 모습은 ‘시골사람’이다. 시골에서 스스로 사랑하는 삶을 일구는 사람이 되기. 바로 내가 꿈꾸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는 이런 뜻이었네, 하고 오늘 아침 즐겁게 깨우친다. 4345.12.2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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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온 듯 다녀 가소서
안재인 글.사진 / 호미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예쁘고 착하며 사랑스럽게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48] 안재인,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호미,2007)

 


- 책이름 :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
- 글·사진 : 안재인
- 펴낸곳 : 호미 (2007.4.18.)
- 책값 : 1만 원

 


  비가 주욱 내리고 난 뒤 하늘을 보면 참 파랗습니다. 눈이 송송 내리고 난 다음 하늘을 보면 더없이 파랗습니다. 비는 하늘을 곱게 씻어 주면서 온 들판을 촉촉하게 적시는 일꾼일까요. 눈은 하늘을 맑게 닦아 주면서 온 멧골을 포근하게 감싸는 동무일까요.


  눈발 그친 겨울날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봅니다. 밤새 내리던 눈은 찬찬히 녹아 웅덩이가 생깁니다. 밤새 눈밭에서 웅크렸을 멧새는 온 마을 두루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릅니다. 눈이 녹으며 나뭇가지가 홀가분한 나무는 한결 싯푸르게 빛납니다. 한겨울에도 푸른 잎사귀 건사하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는 시골집 마당 한켠에서 예쁜 빛을 나누어 줍니다.


  작은아이는 신나게 놀다가 꾸벅꾸벅 잠듭니다. 무릎잠을 재우다가 이부자리에 살며시 눕힙니다. 큰아이도 적잖이 졸린 눈치이지만 작은아이 곁에 누울 생각이 없습니다. 졸립거나 힘들다 하더라도 더 뛰고 더 놀고 더 뒹굴면서 온 하루를 누리고 싶습니다.


.. 하늘 한 뼘 보이지 않을 만큼 머리 위를 빽빽이 둘러싼 동백꽃을 품은 나무 그늘 아래, 이따금 짖어대는 동박새의 음성 공양 받으며 차 공양까지 받으니 세상을 다 얻은 듯하였습니다 … 누구에게라도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이 아름다운 자연의 넉넉함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  (17, 31쪽)


  이제 햇살이 온 마을을 두루 감돕니다. 처마에서 눈 녹은 물 떨어지는 소리는 그칩니다. 길바닥을 흐르던 눈 녹은 물도 차츰 말라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또는 땅속으로 스며, 우리 식구 마시는 샘물이 되겠지요.


  여름날 비를 맞는 푸른 들풀은 한결 해사하게 빛납니다. 겨울날 눈을 맞는 시든 풀잎은 더욱 노오랗게 빛납니다. 사람들은 으레 꽃을 말하지만, 꽃은 살짝 들렀다 가는 길손이요, 풀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금자리를 지키는 땅임자입니다. 사람들이 먹는 밥이 되어 주는 벼 또한, 볍씨로 영글기 앞서 여러 달 동안 푸르게 빛나는 풀잎입니다. 배추도 무도 감자도 당근도 모두 오래오래 푸르게 빛나는 풀잎이 있기에 열매를 맺어요.


  딸기열매는 딸기꽃이 지면서 영그는데, 딸기꽃이 피기까지 딸기잎은 봄볕을 듬뿍 받아들입니다. 감열매는 감꽃이 지면서 영그는데, 감꽃이 피기까지, 또 감꽃이 지고 감열매가 무르익기까지, 감잎은 봄볕과 여름볕과 가을볕까지 두루두루 한가득 받아들입니다.


.. 노란 유채꽃에서 기름을 짜내고, 분홍빛 자운영은 나물로, 농사짓기 위한 거름으로도 이용한다는 것을 알 리 없는 그들은, 꽃밭이 아름답다고 휘젓고 다니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뭐라고 한마디 하면 시골 인심 언제부터 이랬냐며 핀잔을 주기도 하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입니다 ..  (40쪽)

 

 


  빛은 온누리를 밝힙니다. 볕은 온누리를 덥힙니다. 내 마음속에서 샘솟는 빛살은 나와 내 살붙이 삶을 나란히 밝힙니다. 내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볕살은 나와 내 이웃과 동무 삶을 함께 덥힙니다. 고운 빛을 눈망울에 담아 바라봅니다. 그윽한 볕을 손길에 담아 어깨동무를 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했지만, 가는 눈빛이 맑을 때에 나한테 돌아오는 눈빛이 맑습니다. 가는 손길이 따스할 적에 내 손을 맞잡는 이웃 손길이 따스합니다.


  고운 말은 겉치레가 아닙니다. 고운 말은 무럭무럭 자라는 아름다운 넋입니다. 맑은 눈빛은 겉꾸밈이 아닙니다. 맑은 눈빛은 싱그러이 빛나는 어여쁜 사랑입니다. 따순 손길은 겉시늉이 아닙니다. 따순 손길은 너그러이 품에 안는 반가운 마음입니다.


  나와 내 아이와 옆지기 모두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밥을 차립니다. 아이들 입맛에만 맞추거나 옆지기 입맛만 살피거나 내 입맛만 따져서 밥을 차리지 않습니다. 다 함께 한솥밥 먹는 즐거운 삶을 헤아리면서 밥을 짓습니다.


  들을 지나 우리 집 마당으로 스며드는 겨울바람을 온 식구 다 함께 쐽니다. 구름 사이로 나오더니 온 마을과 숲과 바다를 스쳐 우리 집 마당으로 찾아드는 겨울햇살을 온 식구 다 함께 쬡니다. 나만 혼자 쐬는 바람이 아닙니다. 나만 홀로 쬐는 햇살이 아닙니다. 아니, 바람은 나한테만 찾아들지 않습니다. 햇살은 나한테만 스며들지 않습니다. 누구한테나 활짝 열린 넋으로 찾아드는 바람이고 햇살이에요. 곧, 내가 밥을 지어서 함께 먹는다 할 적에도, 나 혼자만 맛나게 먹을 밥이지 않아요. 나를 비롯한 온 식구 즐겁게 웃으며 먹을 밥이에요. 서로서로 기쁘게 숟가락 들고 젓가락 놀리면서 나누는 밥이에요.


.. 언제부터인지 코도 귀도 막아 버리고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본 탓입니다 … 다행히 좋은 벗이 있어 그 같은 이치를 깨달았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향기로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꽃은 봄에만 피는 줄 알았는데, 여름엔 여름대로, 가을엔 가을대로 꽃이 피어납니다 …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 꺼내기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  (53, 54, 102쪽)


  사진을 찍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예쁜 마음이 몽글몽글 솟을 적에 사진기를 즐겁게 쥐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하루 내내 함께 어우러지는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나는 이 아이들 모습을 사진 한 장으로도 안 담을 수 있습니다. 늘 바라보더라도 나 스스로 마음속에서 사랑이 피어나지 않으면 사진을 못 찍어요.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고향벗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여러 해만에 한 번 얼굴을 보더라도, 서로서로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이 피어나면, 좀 후줄근한 차림새라 하더라도 ‘야, 네 얼굴 참 곱다.’ 하고 말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나, 굳이 사진을 안 찍기도 합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즐거우니 굳이 사진을 안 찍어도 됩니다. 빙그레 웃음짓고 마주보며 즐거우니 따로 사진을 안 찍어도 됩니다. 꼭 종이에 뽑도록 사진을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다. 종이에 뽑은 사진을 벽에 잔뜩 붙여야 어여쁜 사진잔치가 되지 않습니다. 따로 사진첩을 꾸미거나 사진책으로 엮어야 사진빛이 환하지 않습니다.


  가슴으로 품는 고운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가슴으로 마주하는 예쁜 이야기를 사진으로 읽습니다. 가슴으로 품을 만하지 못하면 사진으로 못 찍습니다. 가슴으로 마주할 만하지 못하면 사진으로 못 읽습니다.

 

 


.. 다비장의 불도 거의 꺼져 가고 밤새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도 지쳐 갈 무렵 누군가 “야, 눈썹달이다” 했습니다. 순간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평소 달 한 번 쳐다본 적이 없는 듯 달 구경을 했습니다 … 바람이 불어도, 눈이 내려도, 천둥 번개 치고 비가 와도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닌데 늘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입니다 ..  (101, 108쪽)


  ‘사진작가’가 되어야 사진이 빛나지 않습니다. 나는 ‘사진작가’ 되려고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내가 쓰는 글이 놀라운 ‘사진비평’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삶을 누리는 하루에 기대어 스스로 아름다운 꿈을 사랑스레 담고 싶어 ‘사진이야기’를 씁니다. 가슴으로 읽는 사진이 좋아서, 가슴으로 느끼는 이야기를 글에 담기에 ‘사진이야기’입니다. 어떤 이론을 빌어 이래 따지거나 저래 칭찬해야 비평이나 평론이 되지 않아요.


  즐겁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에 비로소 즐거운 사진입니다. 아름답구나 하는 마음이 샘솟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남들이 부추기거나 손뼉친대서 즐겁거나 아름답지 않아요. 나 스스로 가슴 깊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아름다움이에요.


  퍽 많은 이들이 장미꽃이 아름답다고 말하기에 장미꽃이 아름다울 수 없어요. 내가 들판에서 장미나무 한 그루 마주하면서 장미꽃 들여다보고 꽃잎 풀잎 살그마니 쓰다듬어 꽃내음 풀내음 맡을 적에 ‘이야 참 좋네’ 하고 느끼면 비로소 아름다움이 자랍니다. 살구꽃도 능금꽃도 포도꽃도 찔레꽃도 딸기꽃도 매화꽃도 감꽃도 석류꽃도 모두, 내가 스스로 마주하며 느끼는 이야기에 따라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자라나요.


  ‘여기 보셔요. 이 들꽃 예쁘지요?’ 하고 누군가 알려주기에 아하 그러네, 하고 들꽃을 알아볼 수도 있겠지요. 때로는 살가운 길동무가 내 둘레 아름다움을 찬찬히 짚어 줄 수 있어요. 이때에는 고맙다 여기며 ‘그럼 이 들꽃 사진으로 담아 볼까?’ 하고 사진 한 장 찍으면 즐거워요. 그러고 나서 다음에는 ‘내가 알아볼 들꽃은 어디에 곱게 피었을까?’ 하고 생각하며 찬찬히 살피면 되지요. 내 삶터 내 삶결을 즐거이 가다듬으면서 내 ‘삶눈’을 예쁘게 떠야지요.


.. 나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하루에 여덟 군데의 절과 절터를 다닌 적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 볼 것을 미리 정해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말해 주는 것도 없이, 계절마다 어떤 꽃이 피는지, 밤 풍경은 어떠한지, 모든 것을 내 스스로 보고 느껴야만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 대학에 들어가고 나니 하고 싶던 일들 중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술 마시고 노는 것 빼고는 별다르게 한 일 또한 없습니다. 술만 먹으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처럼 믿었고, 으레 그런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익숙해져 갔습니다 ..  (146, 147∼148, 153쪽)

 


  사진을 찍는 길이나 사진을 읽는 길은 ‘예쁘고 착하며 사랑스럽게’라고 느낍니다. 나는 사진을 처음 찍던 날부터 두 아이와 시골에서 살아가며 바지런히 사진을 찍는 오늘까지, 늘 이 대목 ‘예쁘고 착하며 사랑스럽게’를 생각합니다. 글을 쓸 적에도 이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밥을 지어 차리고, 빨래를 해서 널며, 네 식구 서로 손 맞잡고 들마실 다닐 적에도 노상 이 세 가지를 생각해요.


  이 아이들은 얼마나 예쁘고 착하며 사랑스러운가 하고 생각해요. 이 아이들 바라보는 어버이인 나는 또 얼마나 예쁘고 착하며 사랑스러운 하루를 신나게 누리느냐고 생각해요.


  사진기로 들여다보이는 ‘피사체 또는 취재원 또는 모델 또는 온갖 모습’만 예쁘거나 착하거나 사랑스럽지 않아요. 사진기로 들여다보는 ‘나(사진 찍는 사람)’도 예쁘거나 착하거나 사랑스럽습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과 사진을 찍는 사람은 서로서로 예쁘며 착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사진 하나 태어나는 밑바탕은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넋이라고 느껴요. 서로가 서로를 아끼기에 시나브로 사진이 태어나고, 사진이 퍼지며, 사진이 빛으로 거듭나면서 숱한 이야기를 낳는구나 싶어요.


  어떤 예술이 될 까닭 없는 사진이에요. 왜냐하면 ‘사진으로 담기는 모습’은 굳이 예술이 될 까닭 없거든요. 구름은 스스로 예술이 아니에요. 구름은 구름이에요. 대나무는 스스로 예술이 아니에요. 대나무는 대나무예요. 구름이나 대나무를 찍어 ‘놀라운 예술사진이 태어났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텐데, 어떤 솜씨를 부려서 찍기에 예술사진이 된다면, 사진이란 그야말로 덧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성철 스님을 사진으로 찍으니 놀라운 사진이 될까요? 어떤 유명인사를 사진으로 담으니 훌륭한 사진이 될까요? 이제 갓 절집에 들어간 스님을 찍어도 놀라운 사진이 돼요. 사진을 찍은 사람과 사진으로 찍힌 사람이 서로 ‘예쁘고 착하며 사랑스러운’ 만남으로 아끼며 즐기는 삶이 있으면, 놀라운 사진이 됩니다. 내 아이를 찍고 내 이웃을 찍으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진이 돼요. 사진을 찍은 사람과 사진으로 찍힌 사람이 저마다 ‘예쁘고 착하며 사랑스러운’ 삶을 북돋우면서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면, 훌륭한 사진이 됩니다.


  이웃이 되어야 찍는 사진입니다. 구경꾼이 되면 못 찍는 사진입니다. 벗이 되고 한식구가 되어야 찍히는 사진입니다. 남남으로 동떨어진 채 말 한 마디 섞지 않고서 어떤 사진이 될까요.

 


.. 언론 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나라 구석구석의 좋은 곳을 소개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제 이곳만은 망그러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뽐내듯이 그곳을 몹시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볼 때, 그 이중적 생각과 행동이 영 못마땅합니다 ..  (220쪽)


  안재인 님이 글과 사진으로 빚은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호미,2007)를 읽습니다. 안재인 님은 어떤 작품을 빚으려고 어느 멧골 어느 절집을 드나들지 않았습니다. 안재인 님 마음을 북돋우는 어떤 기운을 느껴 꾸준히 어느 멧골 어느 절집을 드나듭니다. 꼭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한다든지, 꼭 이곳을 어찌저찌 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진기를 쥐지 못합니다. 다만, 때때로 ‘그럴듯한 모습’을 ‘멋지게’ 찍으려고도 해 보지만, 그럴듯한 모습을 찍으려고 하면, 말 그대로 ‘그럴듯한 모습’으로 그쳐요. 멋지게 찍으려고 하는 사진은 참말 ‘멋지게’ 찍혀요. 멋진 사진은 멋집니다.


  그러나, 멋진 사진이기에 아름다운 사진이 되지 않아요. 멋진 사진은 그저 멋질 뿐, 사랑스러운 사진이 되지 않아요.


  안재인 님은 꾸준히 마실을 하면서 ‘마실’이 마실 아닌 ‘삶’이라고 시나브로 느낍니다. 처음에는 마실을 다니며 찍던 사진이지만, 차츰차츰 ‘마실 사진’ 꺼풀을 벗고 ‘삶 사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들풀 한 포기하고 벗이 되어 사진을 찍으면 ‘내가 찍은 들풀 사진’은 벗님을 살가이 느끼는 기운이 드러나는 사진입니다. 들풀 한 포기를 멋스러이 보여주려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으면 늘 ‘남한테 멋스러이 보여주는 모습(풍경)’으로 그치기만 합니다.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 하고 노래하는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면, “사랑스레 찾아오소서” 하고 노래하는 어깨동무사랑을 나란히 느낄 수 있겠지요. 그저 다녀가려면 아니온 듯 다녀가야지요. 이웃이 되고 싶으면 사랑스레 찾아와야지요. 이른바 여행을 하고 싶으면 쓰레기를 남기지 말고 “아니온 듯 다녀갈” 일이요, 내가 아이들과 뿌리내리며 살아가고픈 마을에서는 “사랑스레 하루를 일구며” 살아갈 일입니다. 4345.12.2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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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이웃 님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나서 적어 봅니다. ㄷㅇㅇ 님 글을 '반대'하는 글이 아니라, '신문도 방송도 안 보면서, 늘 내 삶에서 이야기 찾는 내 모습'을 돌아보는 이야기입니다~ 웃으면서 읽어 주시기를 빌어요 ^^

 

..

 

방송소식 안 듣는 책읽기

 


  문득 돌아보니, 나는 1994년부터 ‘텔레비전(방송) 보기’를 싹 끊었다. 수험생이던 고등학생 때에는 텔레비전 켤 겨를이 없어 텔레비전을 못 보았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해가 1991년이고, 중학교 1학년이던 해가 1988년이니, 이런 얼거리를 따지면, 내가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이야기(뉴스)를 안 들여다본 지는 스물여섯 해가 되는구나 싶다. 2013년이 되면 서른아홉 살 되는 내 나이를 따지자면, 나는 꼭 열세 살 되던 해까지만 텔레비전에 기대어 삶을 읽었다고 할 만하지 싶다.


  지난 스물여섯 해 동안 텔레비전을 곁에 안 두며 살아왔으나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영 모르는 채 살았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다만, 연속극을 모르고 한국영화를 모르며, 이런저런 배우나 익살꾼이나 가수를 모르는데다가, 정치꾼 이름을 모른다. 운동선수 이름을 잘 모르고, 사건·사고를 잘 모르며, 널리 알려지는 책이나 사람 이름을 모른다. 그러면, 내 삶은 어둡거나 까맣거나 텅 비었을까. 아니다. 내가 방송에 기대지 않는 만큼, 내 삶은 내 넋을 북돋우며 이루어진다. 나 스스로 내 눈빛을 밝히면서 사람들을 마주한다. 나 스스로 내 이야기를 찾고, 내 손으로 내 길을 일군다.


  방송에는 언제나 정치꾼 이야기와 사건·사고 이야기를 첫머리로 올린다. 주식시세표를 보여주고 경제성장율을 말한다. 그런데, 나로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는 조금도 ‘새이야기(뉴스)’가 될 만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왜 정치꾼 이야기를 듣거나 알아야 하지? 왜 사건·사고를 알아야 하지? 왜 주식시세나 운동경기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연예인 뒷이야기를 왜 캐고 다녀야 하지?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라며 살아가는 마을에서 내 이웃 생각을 귀기울여 듣고, 서로 얼굴 마주하면서 이야기꽃 피우는 삶이 즐겁다. 이웃마을에 어떤 일이 터졌다 할 적에, 내가 스스로 이웃마을로 찾아가서 어떤 일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느끼면 된다. 방송사에서 취재를 나온 이야기를 텔레비전을 켜서 들어야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인천 콜트’ 이야기가 방송이나 신문에 얼마나 낱낱이 제대로 나올까? 방송이나 신문에서 ‘인천 콜트’ 이야기를 어느 만큼 자주 슬기롭게 다루었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내가 ‘인천 콜트 사람들’한테 스스로 찾아가서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들을 때보다 깊거나 넓은 이야기를 방송이나 신문에서 들을 수 없다고 느낀다.


  방송은 시청율에 스스로 목을 맨다. 신문은 구독율에 스스로 목을 맨다. 그런데 말이다, 시청율이 높으면 무엇이 달라지지? 구독율이 높으면 무엇이 나아지지? 200백만 구독자가 있어야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50만 구독자가 있어야 세상을 고치지 않는다. 시골마을 500 구독자가 있더라도 세상을 바꾸거나 고친다. 아니, 아직 어떤 방송과 신문도, 이 나라 시골마을 흙일꾼이 ‘비료와 농약을 버리는’ ‘참농사’로 돌아가도록 이끌거나 북돋우지 못한다.


  보기를 들자면, 4대강사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들 무엇하는가. 자, 4대강사업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살아야 아름다울까.


  내가 찾아야 할 목소리는 내 삶을 밝히는 목소리라고 느낀다. 스스로 아름다울 때에 아름다움이다. 텔레비전 켤 틈이 있으면 내 아이들을 바라보아야지 싶다. 신문을 펼칠 겨를이 있으면 내 늙은 어버이들을 마주해야지 싶다. 서로 빙그레 웃으며 마주해야지 싶다. 들을 보고 멧골을 보며 바다를 보아야지 싶다. 바람내음을 느낄 줄 알고, 흙내음과 풀내음을 알아볼 수 있어야지 싶다. 4345.12.2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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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2-29 10:53   좋아요 0 | URL
우선 제가 마음 상할까봐 맘 써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저는 함께살기님처럼 살아갈 자신도 없고, 가치관도 다르지만,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소신과 가치관을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시는 모습이 항상 대단하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이 너무 무섭고 잔인하고 오감을 자극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건 책도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건 제 개인의 생각이랍니다. 그에 비해 소소한 일상 삶은 훨씬 다정하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네, 부대끼면서, 느끼면서, 맡으면서, 바라보며, 만지면서 사는 삶....
그것이 자신의 삶을 밝히는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라는데 공감합니다. ^^

파란놀 2012-12-29 11:04   좋아요 0 | URL
책은... 스스로 걸러내서 읽을 수 있어요. 책에도 잔인한 책 많지만, 저희는 그런 책은 아예 안 보거든요. 그래서, 뭐랄까, 이제 소설은 안 읽어요 ^^;;; 그래도, 읽어야 할 소설책은 '아직 안 읽더'라도 꾸준히 사 두어요.

언제나 좋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좋은 마음이 바로 '책'이고 '신문'이며 '글'이 된다고 느껴요~
 
 전출처 : 마녀고양이님의 "내가 한겨레 신문과 시사인을 계속 구독해야 하는 이유"

저는 방송뉴스를 안 본 지... 올해(2012)로 딱 20년 되었네요 @.@

 

한겨레나 시사인은 '뉴스 매체'로서는 남다른 대목이 틀림없이 있기는 한데,
이들 매체도 '한계와 단점'이 있어요.

 

보실 때에는 즐거이 보시되,
보시면서도 '이 한계와 단점'을 잘 헤아리시기를 빌어요.
그래야, 온누리를 넓고 깊으며 '따스하고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어요.

 

저는 한겨레신문마저 끊고는
이제 아무 신문도 읽지 않은 지 어느덧 올해(2012년)로 아홉 해가 되었군요... @.@

 

2003년 가을부터 시골에서 살며 일을 했는데,
그무렵부터 '아, 시골에서 살고 보니 한겨레신문조차 시골삶하고 동떨어졌네' 하고
느꼈어요.

 

아무쪼록, 며칠 남은 2012년 어여쁜 마음으로 누리시기를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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