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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꽂이 냄새

 


  도매상에서 서른 해 넘게 책을 건사하던 책꽂이를 스물쯤 얻는다. 도매상 벽을 가득 채웠을 책꽂이는 뒤판까지 단단히 붙은 채 나왔다. 책을 빽빽이 더 많이 꽂도록 책 크기에 맞추어 칸을 촘촘이 나눈 책꽂이는 자그마치 아홉열 칸씩 있고, 열한 칸짜리까지 있다. 서른 해 넘는 나날 얼마나 많은 책이 이 책꽂이를 거쳐 사람들 손으로 이어졌을까. 도매상이 문을 닫을 즈음에는 책꽂이에 책이 꽂히기만 한 채 오래도록 먼지를 먹었을 테지. 오래된 책꽂이에 꽂힌 책은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지도 못한 채 말없이 나이를 먹어야 했을 테지.


  문을 닫은 도매상 벽에서 떼어낸 책꽂이는 헌 종이 가득 쌓인 창고 뒤쪽 빈터에 차곡차곡 놓인다. 커다란 책꽂이를 손으로 쓰다듬는다. 오래된 책꽂이라지만 나무 냄새가 난다. 햇살을 보지 못하며 먼지만 먹던 나무 냄새일까. 책꽂이를 나무로 짜듯, 똑같이 나무로 빚은 책을 건사하던 결과 무늬가 고스란히 깃든 냄새일까.


  그러고 보면, 나무는 갓 잎을 틔운 아기나무일 때에도 나무 내음을 뿜고, 어른 키만큼 자란 어린나무일 때에도 나무 내음을 뿜으며, 집채보다 높직하게 자란 어른나무일 때에도 나무 내음을 뿜는다.


  책으로 바뀌는 나무도 종이에 나무 내음을 남긴다. 책꽂이로 달라진 나무도 칸마다 나무 내음을 남긴다. 작은 종이 한 장이든 두툼한 책 한 권이든 나무 내음이 짙고 얕게 남는다. 몇 시간 나무를 만진 손에도 나무 내음 살며시 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나무 내음 살몃 깃든 손으로 아이를 안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4345.3.2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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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동백꽃

 


  우리 마을뿐 아니라 이웃마을 울타리를 살며시 넘겨다보면, 어느 집이나 동백꽃이 거의 다 떨어졌다. 우리 집 동백나무만큼 봉우리를 터뜨릴 줄 모른다. 우리 집 후박나무도 좀처럼 봉우리를 벌리지 않는다. 날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늘 그 모습 그대로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그러나, 동백꽃이든 후박꽃이든 그야말로 아주 따사로운 날씨가 이어지며 더는 찬바람에 꽃잎 떨구지 않아도 될 때까지 곱게 참으며 기다리지 않을까.


  봉우리를 앙 다문 동백나무를 들여다본다. 해가 잘 드는 자리에 새 동백꽃 한 송이가 잎을 활짝 벌린다. 손을 뻗어 살며시 만진다. 줄기에 달린 잎도 보드랍지만, 이 꽃잎은 어쩜 이리 보드라울 수 있을까. 온누리 어떤 종이라 하더라도 꽃잎처럼 보드랍고 튼튼하며 향긋하게 만들 수 없겠지. 꽃잎은 며칠 지나 꽃대에서 떨어지면 이내 시들고 만다지만, 활짝 벌렸을 때이든 가랑꽃이 되든 늘 싱그러이 빛나는 목숨이기 때문에 이토록 보드라우며 튼튼한데다가 향긋할 수 있겠지.


  새 아침을 맞이해 아이들이 잠에서 깬다. 둘째는 내 무릎에 누워 더 잔다. 첫째는 방문 한쪽을 열고 앉아 책을 읽는다. 먹이를 찾으며 날아다니는 새들 소리를 듣는다. 햇살은 차츰 밝아진다. 날은 더 따스해진다. 오늘 하루 좋은 이야기 그득 우리 곁에 찾아오리라 믿는다. (4345.3.2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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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79 : 이야기를 읽는 책

 


  나는 ‘오이겐 헤리겔’이라는 독일사람을 모릅니다. 이녁이 어떤 삶을 꾸렸고, 어떤 넋을 펼쳤으며, 어떤 사랑을 나누려 했는가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이가 쓴 책 《마음을 쏘다, 활》(걷는책,2012)을 읽습니다. 조그마한 책 하나를 읽으며 어느 한 사람이 걸어간 삶과 누리던 넋과 나누던 사랑을 조용히 헤아립니다.


  누군가한테 묻듯, 또는 스스로 길을 찾으려 하는 듯, 혼자말로 “왜 스승은 필수적이긴 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의 준비 작업을 경험 있는 제자에게 맡기지 않는가 … 무엇 때문에 그는 매 수업 시간마다 항상 똑같이 엄격하게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반복하며, 또 제자들에게 똑같이 따라하게 하는가(88쪽)?”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스승이라 하는 사람뿐 아니라 여느 어머니도 이와 같아요. 아기한테 젖을 물릴 때 언제나 똑같은 몸짓입니다. 아기 기저귀를 갈며 늘 똑같은 매무새입니다. 아이들 밥을 차리며 노상 똑같은 몸가짐입니다.


  스스로 씨앗을 갈무리해서 심어 돌보아 거두는 사람이든, 다른 사람이 심어 돌보아 거둔 곡식을 돈을 치러 장만한 다음 집에서 물로 헹구고 밥으로 짓는 사람이든, 한결같이 ‘똑같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날마다 되풀이해요. 아이들한테 옷을 입히려 하면, 더러워진 옷을 벗겨 새로 빨래하고 말리고 개고 건사합니다. 목을 넣고 팔을 넣으며 단추를 채웁니다. 어느 때라도 어느 한 가지 어긋나거나 바꾸지 않습니다. 가만가만 모든 일을 고스란히 되풀이합니다.


  어느 재주나 솜씨와 얽힌 자리에서만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되풀이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으레 수저를 들어 밥이든 반찬이든 하나하나 집고 알맞게 입에 넣어 찬찬히 씹어서 삼켜요. 주걱으로 입에 퍼넣는대서 밥먹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손을 움직이지 않고 밥상 앞에 멀뚱멀뚱 앉는대서 내 배가 그득 차거나 부르지 않아요. 여든 살이든 마흔 살이든 다섯 살이든, 스스로 수저를 들어 밥을 떠서 입에 넣어야 합니다. 날마다 끼니자리에서 이 일을 똑같이 되풀이합니다. 똑같이 똥을 눕니다. 똑같이 숨을 쉽니다. 똑같이 말을 합니다.


  집안일은 늘 같은 일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그런데, 집밖일이라 하는 회사일 또한 노상 같은 일 아닌가 싶어요. 언제나 같은 출근길입니다. 언제나 같은 길을 걷거나 같은 자동차나 버스를 탑니다. 언제나 같은 곳에 가서 같은 책상에 앉거나 같은 일터에 서요. 기계를 놀리든 책상맡 셈틀을 붙잡든 종이와 펜대를 붙잡든, 집밖일을 하는 사람들 누구나 날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해요.


  곧, 사람이 살아가며 빚거나 누리는 새로운 생각과 꿈이란, 어디에서나 싱그럽고 슬기롭게 태어나는구나 싶어요. 사진기를 들고 싸움터를 누비거나 집회 현장에 달려가야 ‘빛나거나 놀라운’ 보도사진이 태어나지는 않아요. 내 집에서 아이들 놀며 웃음짓는 모습을 마주하는 삶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 때에도 얼마든지 ‘빛나거나 놀라운’ 사진이에요.


  빛나거나 놀라운 삶이기에 빛나거나 놀랍게 나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어요. 빛나거나 놀랍게 나눌 책은 날마다 언제 어디서라도 똑같이 누립니다. (4345.3.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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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 너머

 


  무지개 너머에는 어떤 누리가 있을까요. 무지개 너머에는 싸움과 다툼과 미움도 없는 누리가 있을까요. 무지개 너머에는 슬픔도 아픔도 고단함도 괴로움도 없는 누리가 있을까요.


  나는 무지개 너머가 어떤 누리인지 모릅니다. 나는 무지개를 바라보는 이곳에서 살아가거든요. 나는 무지개 너머를 꿈꾸지 않습니다. 나는 무지개를 바라보는 이곳에서 꿈을 꾸거든요.


  무지개 너머에서만 싸움과 다툼과 미움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무지개를 바라보는 이곳에서도 싸움과 다툼과 미움이 없어, 내가 바라보는 저 무지개 너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곳, 곧 ‘저쪽 사람들한테는 무지개 너머’가 될 이곳이 사랑과 꿈과 믿음과 따스함과 너그러움과 포근함이 감돌 수 있으면 아주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노래를 듣습니다. 무지개 너머 어떤 삶을 읊는 노래 하나를 듣습니다. 열여섯 살 한국 푸름이가 노래꾼이 되기를 바라며 어떤 무대에 서서 부르는 노래를 듣습니다. 노래 부르는 매무새로 본다면 빈틈이 없구나 싶지만, 내 마음에 무언가 뭉클하고 움직이는 느낌이 샘솟지 못합니다. 한국 푸름이가 부른 이 노래를 ‘처음 부른 나라 노래꾼’은 어떻게 불렀을까 궁금하기에 요모조모 찾아서 세 가지 노래를 듣습니다. 먼저, 무척 오래된 영화에 나오는 노래 두 가지를 듣습니다. 두 가지 노래 모두 아주 보드라우면서 따사로운 산들바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가운데 하나는, 유럽을 휩쓴 무시무시한 전쟁이 끝나고 살아서 돌아온 사람들을 웃음으로 얼싸안는 기쁨과 눈물이 고이 깃듭니다.


  아마 미국이구나 싶은 어떤 노래무대에 선 어린이가 부르는 무지개 너머 노래도 한 가락 듣습니다. 한국에서 요즈음 널리 퍼진 ‘노래꾼 뽑기’와 같은 자리로구나 싶은데, 서양 어린이가 부르는 노래에는 ‘마음 한 자락’이 살포시 깃듭니다. 노래하는 마음이 묻어나고, 노래를 함께 들을 사람들이 나눌 마음이 묻어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들려주고픈 사랑 어린 마음이 묻어납니다.

 

 ......


  좋은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꿈을 찬찬히 글로 적고 싶습니다. 사랑 스민 이야기를 펼치며 누리는 하루를 찬찬히 사진으로 찍고 싶습니다. 즐거이 얼크러진 하루 이야기를 보드라이 가락에 담아 내 살가운 사람들하고 기쁘게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무대에서 1등을 하려고 부르는 노래일 수 없어요. 글잔치에서 1등을 받으려고 쓰는 글일 수 없어요. 사진공모에서 1등을 얻으려고 찍는 사진일 수 없어요. 사랑하며 쓰는 글이고, 사랑을 꿈꾸며 부르는 노래이며, 사랑을 나누려고 찍는 사진이에요. (4345.3.2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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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3-26 13:10   좋아요 0 | URL
나는 무지개를 바라보는 이곳에서 꿈을 꾸거든요....

너무 예쁜 글귀예요. 어떤 누리가 있는지 모른다, 어떤 세상이란 말에 비해서
빛나는 어떤 것처럼 느껴지네요.... 저 너머만 바라보며 동동 구르는 제 모습을 슬쩍 봅니다. 된장님, 즐거운 한주되셔요. 건강하시구요.

숲노래 2012-03-27 06:00   좋아요 0 | URL
나중에 인터넷에서 'over the rain' 노래를 찾아서 들어 보셔요.
미국 아주 어린 아이가 부른 노래가 있는데
k팝스타 박지민 같은 푸름이가 부른 노래하고 견줄 수 없이
아주 잘 불렀어요.

k팝스타이든 다른 경연 무대이든,
한국에서 가수 되려는 이들은
노래에 어떤 마음을 실어야 하는가를
영 모르더군요...
 

 

 들꽃과

 

 

  논둑에 피어난 봄꽃 봄들꽃 봄첫꽃 봄첫들꽃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예쁜 꽃이네, 하면서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네 송이, 잇달아 꺾고는 손아귀에 쥔다. 작은 손아귀에 작은 꽃송이 안긴다. 이 꽃송이들은 한창 흐드러지려고 하는 때에 꺾인다. 꽃들한테 더없이 미안하구나 하고 생각하다가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면, 이 시골자락에서 이 봄꽃 들꽃 봄들꽃 봄첫꽃 봄첫들꽃을 꺾어 손에 살며시 쥐고는 달음박질을 할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아마 이 꽃들은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 없는 채 홀로 조용히 피었다가 조용히 지겠지. 시골마을에 아이들 목소리 가득 넘치던 때에는 들꽃 꺾는 손길이 참 많았을 텐데, 그토록 많은 아이들이 들꽃을 꺾어 들꽃목걸이를 만들거나 들꽃다발을 만들었어도 오늘까지 이 꽃들은 곱게 하얀 선물을 베푼다. (4345.3.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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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3-19 20:00   좋아요 0 | URL
소담하네요

숲노래 2012-03-20 06:13   좋아요 0 | URL
이제 날마다 이러구 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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