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79 : 이야기를 읽는 책

 


  나는 ‘오이겐 헤리겔’이라는 독일사람을 모릅니다. 이녁이 어떤 삶을 꾸렸고, 어떤 넋을 펼쳤으며, 어떤 사랑을 나누려 했는가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이가 쓴 책 《마음을 쏘다, 활》(걷는책,2012)을 읽습니다. 조그마한 책 하나를 읽으며 어느 한 사람이 걸어간 삶과 누리던 넋과 나누던 사랑을 조용히 헤아립니다.


  누군가한테 묻듯, 또는 스스로 길을 찾으려 하는 듯, 혼자말로 “왜 스승은 필수적이긴 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의 준비 작업을 경험 있는 제자에게 맡기지 않는가 … 무엇 때문에 그는 매 수업 시간마다 항상 똑같이 엄격하게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반복하며, 또 제자들에게 똑같이 따라하게 하는가(88쪽)?” 하고 이야기하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스승이라 하는 사람뿐 아니라 여느 어머니도 이와 같아요. 아기한테 젖을 물릴 때 언제나 똑같은 몸짓입니다. 아기 기저귀를 갈며 늘 똑같은 매무새입니다. 아이들 밥을 차리며 노상 똑같은 몸가짐입니다.


  스스로 씨앗을 갈무리해서 심어 돌보아 거두는 사람이든, 다른 사람이 심어 돌보아 거둔 곡식을 돈을 치러 장만한 다음 집에서 물로 헹구고 밥으로 짓는 사람이든, 한결같이 ‘똑같은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날마다 되풀이해요. 아이들한테 옷을 입히려 하면, 더러워진 옷을 벗겨 새로 빨래하고 말리고 개고 건사합니다. 목을 넣고 팔을 넣으며 단추를 채웁니다. 어느 때라도 어느 한 가지 어긋나거나 바꾸지 않습니다. 가만가만 모든 일을 고스란히 되풀이합니다.


  어느 재주나 솜씨와 얽힌 자리에서만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되풀이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으레 수저를 들어 밥이든 반찬이든 하나하나 집고 알맞게 입에 넣어 찬찬히 씹어서 삼켜요. 주걱으로 입에 퍼넣는대서 밥먹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손을 움직이지 않고 밥상 앞에 멀뚱멀뚱 앉는대서 내 배가 그득 차거나 부르지 않아요. 여든 살이든 마흔 살이든 다섯 살이든, 스스로 수저를 들어 밥을 떠서 입에 넣어야 합니다. 날마다 끼니자리에서 이 일을 똑같이 되풀이합니다. 똑같이 똥을 눕니다. 똑같이 숨을 쉽니다. 똑같이 말을 합니다.


  집안일은 늘 같은 일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그런데, 집밖일이라 하는 회사일 또한 노상 같은 일 아닌가 싶어요. 언제나 같은 출근길입니다. 언제나 같은 길을 걷거나 같은 자동차나 버스를 탑니다. 언제나 같은 곳에 가서 같은 책상에 앉거나 같은 일터에 서요. 기계를 놀리든 책상맡 셈틀을 붙잡든 종이와 펜대를 붙잡든, 집밖일을 하는 사람들 누구나 날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해요.


  곧, 사람이 살아가며 빚거나 누리는 새로운 생각과 꿈이란, 어디에서나 싱그럽고 슬기롭게 태어나는구나 싶어요. 사진기를 들고 싸움터를 누비거나 집회 현장에 달려가야 ‘빛나거나 놀라운’ 보도사진이 태어나지는 않아요. 내 집에서 아이들 놀며 웃음짓는 모습을 마주하는 삶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 때에도 얼마든지 ‘빛나거나 놀라운’ 사진이에요.


  빛나거나 놀라운 삶이기에 빛나거나 놀랍게 나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어요. 빛나거나 놀랍게 나눌 책은 날마다 언제 어디서라도 똑같이 누립니다. (4345.3.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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