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11.18.


《오늘》

 줄리 모스태드 글·그림/엄혜숙 옮김, 크레용하우스, 2017.6.28.



마음으로 되뇌는 “오늘 나는 집으로 간다”라는 말씨가 있다. 이 넉 마디를 혀에 얹으며 ‘오늘’이랑 ‘나’랑 ‘집’이랑 ‘가다’라는 말에 얽힌 삶자취를 돌아보는데, 오늘이란 때는 오늘인 줄 느낄 때마다 어제로 나아가고, 모레라는 때는 모레라고 느낄 적마다 오늘로 다가온다. ‘날’을 본다면 어제도 오늘도 모레도 한 줄기로 흐르는 똑같은 빛이지 싶다. 아침에 짐을 꾸려 아이들을 토닥토닥하고는 길을 나선다. 옆마을로 달린다. 함씽씽이를 잡아타고 읍내로 가고, 순천을 거쳐 서울에 닿는다. 비가 쏟아진다. 비를 흠뻑 맞으며 〈뿌리서점〉에 찾아간다. 어느덧 아들이 책집을 이어서 꾸린다. 1974년부터 책집을 꾸리던 아저씨는 등이 굽고 혀가 굳어 걷기도 말하기도 어려운 몸이 되셨다. 마흔 해 남짓 하루조차 안 쉬고 책을 만진 어른이 몇 해 사이에 부쩍 야위었다.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숲으로 가는 책’이란 노래꽃을 써서 드린다. 책집을 나선 뒤 《오늘》이란 그림책을 떠올린다. 우리한테 오늘은 아름다운 날이겠지. 우리는 오늘을 아름다이 가꾸려고 여태 씩씩하게 걸어왔겠지. 모든 아이들이 앞으로 누릴 새 오늘이 빛나기를 바라며 ‘오늘 어른인 모든 사람’이 사랑으로 땀을 흘리겠지. 오늘숲인 책집에 빛 한 줄기를…….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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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11.17.


《읽는 직업》

 이은혜 글, 마음산책, 2020.9.25.



노랑나비를 만난다. 이 늦가을에 웬 노랑나비인가 하고 갸우뚱하다가 가만히 뒤꼍을 헤아리니 봄까지꽃·잣나물이 곳곳에 돋았다. 이 봄나물꽃이 돋았으니 작은 들꽃이 품은 꽃가루를 머금을 조그마한 나비가 나란히 깨어나서 팔랑춤을 선보일 만하구나 싶다. 조용히 왼팔을 뻗는다. 노랑나비는 내 팔 둘레를 살살 휘감는다. 잣나물을 넷 훑어서 네 사람이 하나씩 혀에 얹고서 씹는다. 늦가을에 누리는 늦가을풀 숨결을 받아들인다. 《읽는 직업》을 돌아본다. 책을 펴내는 곳에서 일하는 눈으로 엮은 이야기라고도 하겠지만, 글님이자 엮는님(편집자)이 조금 더 조그맣게 책을 펴내는 곳에서 일해 보았다면, 또는 혼자서 책을 펴내어 알리고 팔며 글님(작가)을 만나는 일꾼으로 지내 보았다면, 사뭇 다르구나 싶은 줄거리로 이 책을 내놓았겠지 싶다. 목소리란 누구나 내야 한다. 어느 곳에서도 목소리를 내놓아야 한다고 여긴다. 새삼스레 《책만들기 어떻게 시작할까》란 책을 맞대어 본다. 책이란 무엇이고 글이란 무엇일까? 팔리는 책하고 읽히는 글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글님이나 엮는님은 어느 고장 어느 마을에서 누구하고 살면서 책·글을 바라볼까? 글님도 엮는님도 아이 손을 잡고 숲에 맨발로 깃드는 눈빛으로 바람을 읽는다면 좋겠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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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11.16.


《인권, 여성의 눈으로 보다》

 인권연대 밑틀, 임옥희·로리주희·윤김지영·오창익 글, 철수와영희, 2020.10.24.



스스로 살림을 꾸리는 길이란 무엇인가. 손수 하도록 몸을 다스리는 길이란 어디에 있을까. 누가 잘못했다면 잘못을 따지기도 해야겠으나, 날이 갈수록 둘레에서 보거나 듣는 이야기란, 따짐질투성이로구나 싶다. 어쩐지 ‘어깨동무하는 사랑스러운 살림길’을 말하는 페미니즘은 너무 없다시피 하다. 《인권, 여성의 눈으로 보다》를 읽으며 내내 생각했다. “왜 아줌마 목소리로 살림빛을 들려주는 책은 없을까?” 하고. “왜 아저씨 손빨래로 살림꽃을 노래하는 책은 없을까?” 하고. 숱한 ‘페미니즘 인문책’이 다 똑같다고 느낀다. 모두 어디에선가 강의를 하고 교육을 한 다음에 책을 묶는데, 막상 땀내음도 도마질도 김치도 기저귀도 비질도 아기돌보기도 없다. 살림하는 냄새가 하나도 없는 ‘페미니즘 인문책’만 허벌나다. 이제 제발 머리에 앎(지식·정보)만 채우는 책은 그만 내거나 읽어도 되지 않을까? 아기랑 가시내가 쓰는 천기저귀를 어떻게 다스리고, 빨래가루를 어떻게 건사하고, 아이들이 배움수렁(입시지옥) 아닌 숲놀이로 피어나는 길을 삶자락에서 몸소 부대끼며 즐긴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읽고 쓸 노릇 아닐까? 푸른배움터(중·고등학교)만 마친, 또는 배움터를 아예 안 다닌, 수수한 ‘살림어른’ 목소리여야 나라가 바뀌리라. ㅅㄴㄹ

.

이 책이 나쁘다고 쓴 글이 아닙니다.
이 책에서는 '윤김지영' 님 글은 좀... 뜬구름 같았지만,
다시 말해서 발바닥을 땅바닥에 안 두고서 썼네 싶었지만,
다른 글은 좋았습니다.
다만 조금 더 삶자락에서 스스로 겪고 바꾸어 낸 살림 이야기를
'여성-남성'이 어깨동무하는 길로 풀어내어
어린이-푸름이한테 들려줄 줄 안다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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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11.15.


《울타리 너머 아프리카》

 바르트 무야르트 글·안나 회그룬드 그림/최선경 옮김, 비룡소, 2007.4.20.



포근포근한 가을날로 접어든다. 늦가을이 이렇게 포근한데 참 많은 사람들이 두툼하게 차려입고 다닌다. 다만, 사람들 차림새가 두툼하되 길거리를 걷는 일은 드물지 싶다. 바람이 부는 바깥에 살짝 나갈라 치면 하나같이 두툼옷이 되는구나 싶다. 뒤집힌 푸른별은, 여름에 긴소매 긴바지에 찬바람을 풍풍 내뿜는 곳에 있고, 겨울에 반소매 반바지에 더운바람을 퐁퐁 내쁨는 데에 있다. 그냥 여름에 반소매 반바지에, 겨울에 긴소매 긴바지이기만 해도 넉넉하지 않을까? 여름엔 더워야 마땅하고 겨울엔 추워야 마땅하지 않나? 여름에 땀 좀 흘리면 어떤가. 땀을 흘려 몸속에 있던 찌꺼기를 내보내기에 튼튼몸이 될 텐데. 겨울에 좀 떨면 어떤가. 어느 만큼 떨다 보면 몸은 시나브로 찬바람을 견딜 만큼 다부지게 설 텐데. 미리놓기(예방주사)를 하면서 막상 땡볕도 찬바람도 등진다면 고삭부리가 되는 지름길이리라. 《울타리 너머 아프리카》에 나오는 이웃집 카메룬 아줌마는 흙이랑 물 두 가지로 집을 짓는다. 그래, 흙이랑 물을 섞으니 집이 되지. 우리는 여기에 나무랑 돌이랑 짚을 더 쓴다. 모두 숲에서 오는 살림이다. 그리고 숲으로 돌려주는 살림이다. 하루를 읽어 하루를 사랑하고, 날씨를 읽어 몸을 살핀다. 가을이 무르익는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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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11.14.


《핑!》

 아니 카스티요 글·그림/박소연 옮김, 달리, 2020.7.24.



천막놀이는 재미있지. 마당 한켠 후박나무 곁에 천막을 치고 들어가면 그곳은 오롯이 너희 놀이터요 쉼터가 되지. 나무 곁에 걸상을 놓아도, 나무 둘레에 자리를 깔아도, 언제나 너희 놀이터이면서 쉼터이지. 작은아이가 스스로 천막을 친다. 스스로 이불을 옮긴다. 걷을 적에도 스스로 모두 한다. 어버이는 이제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된다. 무럭무럭 크는구나. 《핑!》을 보며 생각한다. 놀지 못하는 요즈음 숱한 어린이한테는 ‘핑’ 같은 일이 있으면 좋겠구나 싶은데, 요즈음 어린이가 놀지 못하는 탓이라면, 요즈음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부터 어릴 적에 제대로 못 논 탓이 아닐까. 어릴 적에 신나게 놀며 하루를 알뜰히 보냈는데 어른이 되고서 아이들을 배움수렁에 몰아세우는 짓을 할 수 있을까? 곰곰이 보면 그렇다. 어릴 적에는 놀았으되 푸름이로 접어들며 놀 틈을 잃고, 열린배움터를 거쳐 돈을 버는 달삯쟁이가 되면서 놀 생각을 잊었지 싶다. 놀지 않으면서 배울 길이 있을까? 놀지 못하는데 배워서 어디에 쓸까? 놀이가 사라진 곳에는 오직 싸늘한 돈장사가 춤춘다. 꿈을 키우는 길이라는 놀이인데, 돈을 치러서 이런 장난감을 갖추거나 저런 탈거리에 몸을 실어야 한다면, 이는 몽땅 ‘놀이란 탈을 쓴 어른들 돈장사’일 뿐이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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