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10.21.


《포치가 온 바다》

 이와사키 치히로 글·그림/엄혜숙 옮김, 미디어창비, 2020.6.30.



2003년에 처음 우리말로 나온 《치치가 온 바다》가 《포치가 온 바다》로 이름을 바꾸어 새로 나왔다. ‘포치’? ‘치치’가 아니고 ‘포치’? 문득 궁금해서 일본 아마존을 뒤지니 “ぽちのきたうみ”란 이름이다. 그런데 ‘포치’는 뭘까? 우리말로 하자면 ‘바둑이’쯤이다. 어린 개, 그러니까 강아쥐를 귀여워하면서 부르는 이름이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렴”이지. 다시 나온 책이 반가우면서 서운하다. “바둑이가 온 바다”로 하면 훨씬 나았을 텐데. “바둑아, 바둑아, 우리 뭘 하면서 놀까?” 아이는 바다에서 햇볕을 누리고 모래밭을 밟고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면서 튼튼하게 자란다. “바둑아, 바둑아, 너도 해님이 좋니?” 아이는 커다란 놀이터에 안 가도 좋다. 아이는 모래밭이면 넉넉하고, 바닷가나 냇가이면 즐겁다. 골짜기도 숲도 아이한테는 재미나고 놀라운 놀이밭이 된다. “바둑아, 바둑아, 우리 낮잠 좀 자고서 또 놀자!” 가만 보면 ‘바둑’이란 낱말은 어느 놀이만 가리키지 않는다. ‘점(點)’을 우리말로 ‘바둑’이라 했는지 모른다. 가을비가 아주 오랜만에 내린다. 빗소리가 싱그럽고 우렁차다. 이 비는 들을 적시고 지붕을 쓰다듬고 마당을 쓸어 준다. 이 비가 지나간 하늘은 얼마나 새파랗게 빛날까.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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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10.20.


《오에 겐자부로의 말》

 오에 겐자부로·후루이 요시키치 이야기/송태욱 옮김, 마음산책, 2019.1.25.



숱한 일꾼이 자꾸 죽는다. 쓸쓸하다. 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고단한 나머지 숨이 끊어져야 할까. 우리 둘레에서 죽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어린이·푸름이는 ‘배움 불구덩이(입시지옥)’ 탓에 끝없이 고꾸라진다. 요새는 ‘예방주사’를 맞는 사람이 잇달아 숨진다. 나라에서는 딱히 뭔 말이 없고 어떤 몸짓도 없다. ‘미친소앓이(광우병)’보다 무시무시한 노릇인데, 무릎을 꿇는 벼슬아치도 일꾼도 안 보일 뿐더러, 아이들이 ‘불구덩이’ 아닌 ‘삶길·살림길·사랑길’을 가도록 마음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앞빛이 도무지 안 보이는 판에 문득 《오에 겐자부로의 말》을 읽어 본다. 이웃나라 글님은 그 나라에 앞빛이 있다고 여길까? 글 한 줄로 앞빛을 밝힐 숨통을 틔우는 마음을 나눌 만한가? 곰곰이 보면 두 나라는 꽤 비슷하다. 어이없는 이들이 벼슬이며 힘을 거머쥔 채 바보짓을 일삼고, 우리는 거짓말이 물결치는 나라를 갈아엎도록 뜻을 모으지 못하기도 한다. 두 해 남짓 다니다가 그만둔 배움터에서 ‘운동권’을 볼 적마다 갑갑했다. “왜 책 안 읽어?” “바빠서.” “바쁘니까 틈내어 새로 배워야 하지 않아?” “…….” “술은 밤새 마시면서 왜 책을 안 읽어?” “…….” 그때 그들은 어느새 이 나라 벼슬자리를 거머쥐고 우쭐댄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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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10.19.


《향모를 땋으며》

 로빈 월 키머러 글/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2020.1.17.



아이들하고 서울이나 큰고장에 마실을 할 적이면 “아, 나무도 없고 뭐가 이래?”라든지 “아, 별도 없고 뭐가 이래?” 같은 말을 터뜨린다. 이렇게 말을 터뜨리는 아이들한테 “아버지가 잘못했구나. 나무도 별도 없는 데에 너희들을 데리고 왔네.” 하고 속삭인다. 나무가 없다면 그곳엔 풀도 없다. 풀이 없으면 그곳엔 나무도 없다. 나무랑 풀이 없다면 그곳엔 벌이나 나비나 풀벌레나 새도 없다. 벌이나 나비나 풀벌레나 새가 없다면 그곳에는 풀꽃나무가 없다.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 우리는 왜 배움터를 다니거나 아이들을 배움터에 보낼까? 나라지기나 벼슬아치는 어떤 일을 펼까? 왜 숲을 밀고서 찻길을 닦을까? 왜 들을 없애고서 잿빛집을 올릴까? 《향모를 땋으며》는 어떤 책일까? ‘향모’란 뭘까? ‘Sweetgrass’를 ‘향모’로 옮겼지 싶은데, ‘달콤 + 풀’이라면 ‘달콤풀’이나 ‘달달풀’일 테고, 살짝 바꾸어 ‘향긋풀’도 되겠지. 우리 곁에서 자라는 들풀을 보면 풀이름이 매우 쉽다. 고장마다 풀이름이 다르다.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살림을 짓는 동안 삶말로 풀이름을 붙였고, 나무이름을 달았다. 풀꽃나무를 들려주는 책이 ‘풀꽃나무하고 어깨동무하는 말’로 나오면 좋겠는데, 외려 어려울까? 흙지기가 읽기에 꽤 벅차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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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10.18.


《공부가 되는 글쓰기》

 윌리엄 진서 글/서대경 옮김, 유유, 2017.2.24.



우리가 살아가며 배우지 않는 일이 있을까? 아마 없으리라. 우리는 모든 일을 배운다. 옳건 그르건 좋건 나쁘건 반갑건 서운하건 밉건 신나건 사랑하건 슬프건, 그야말로 모두 배운다. 다만, 배우지 못할 때가 있으니, 겉멋을 부리거나 겉치레를 할 적에는 배움길하고 동떨어진다. 글을 쓰고 싶은 이웃님한테 늘 속삭인다. “글을 쓰고 싶으시면 그저 글을 쓰셔요. 어떤 글쓰기 길잡이책도 읽지 마셔요. 쓰고픈 대로 쓰셔요. 서울사람이라면 서울말로, 서울사람이 아니면 사투리로 즐겁게 쓰셔요. 남한테 보여주거나 어디 문학상이나 공모전에 내려고 쓰지 마셔요. 느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이야기를 쓰면 돼요. 글쓰기에는 틀도 길도 없어요. 그저 오늘을 쓰면 될 뿐이에요.” ‘Writing to Learn’란 이름으로 나온, 우리말로는 《공부가 되는 글쓰기》로 나온, ‘쓰기는 배움의 도구다’란 곁이름이 붙은 책을 죽 읽어 본다. 그냥 “배우는 글쓰기”라 하면 될 텐데. 구태여 일본스러운 한자말 ‘공부’는 이제 떨쳐내면 좋을 텐데. “쓰면서 배운다”처럼 곁이름을 달아도 될 텐데. ‘-의’를 덧다는 일본스러운 말씨는 씻어도 좋을 텐데. 마음이 가는 결을 사랑하면 누구나 글님이다. 사랑을 스스로 꽃피우는 손길이라면 누구나 그림님이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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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0.10.17.


《호두까기 인형》

 E.T.A.호프만 글·에바 요안나 루빈 그림/문성원 옮김, 시공주니어, 2006.12.20.



새 사전을 쓰는 길은 오늘도 끝이 없을 듯하면서 참으로 가없이 흐른다. 드디어 ㅂ으로 넘어선 사전쓰기이다. ‘늦다·뒤늦다·때늦다’를 살피고, ‘일다’하고 ‘곁죽음’을 새로 생각한다. 300∼500 낱말로도 너끈히 생각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몇 마디 없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쉬운 바탕말 몇 가지를 끝없이 엮으면서 그야말로 끝없이 온갖 자리하고 삶을 나타내는 길을 연다’고 해야지 싶다. 쉬운 바탕말로 삶을 풀어내는 실마리를 안다면 자잘한 말씨를 다른 데에서 끌어들이지 않아도 된다. 자잘한 바깥말이란 으레 자리지키기를 하려는 겉치레이기 일쑤이다. 《호두까기 인형》을 읽고 나서 큰아이한테 건네었다. “꽤 재미있네요.” 하더니 한 벌을 더 읽는다. 나는 어릴 적에 이 동화책을 못 읽었다. 가까이에 책이 없었을까? 글쎄, 모르겠다. 책이 있었는데 옮김말이 엉성했거나 간추린 판이었을까? 글쎄, 하나도 안 떠오른다. ‘호두까기 인형’한테 살뜰히 마음을 쓸 줄 아는 착하면서 고운 아이 몸짓이 의젓하면서 대단하다. 동화나 동시를 쓰는 어른이라면 줄거리나 이야기를 이렇게 엮을 줄 알아야지 싶다. 오늘도 해가 밝고 날이 좋은 하루였다. “아버지, 달이 산 끝에 걸렸어요! 사라지려 해요!” 큰아이가 부른다. 밤이 깊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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