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노래 (바다의 노래)
Song of the Sea, 2014
바닷가에 서면 오직 ‘바닷노래’만 흐른다. 바닷물은 끝없이 물결치면서 다른 모든 소리를 잠재운다. 드넓은 바다가 함께 일으키는 파란 노래를 들려준다. 들에 서면 오직 들노래만 흐른다. 들풀은 가없이 한들거리면서 다른 모든 소리를 녹인다. 푸르게 퍼지는 들녘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푸른 노래를 베푼다. 멧골에서는 멧노래를 듣는다. 시골에서는 시골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도시에서는 도시노래를 듣는다.
도시노래는 무엇일까? 도시에서 어우러지는 모든 소리가 터뜨리는 노래이다.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공장과 자동차와 온갖 기계가 들려주는 노래가 가장 클 테지. 이 모든 노래가 노래 같지 않다고 여겨서 귀를 막는 사람도 막을 테고.
노래는 어디에나 있다. 지구별 어디에나 노래가 있다. 더 나은 노래나 멋진 노래는 없다. 덜떨어지거나 나쁜 노래는 없다. 그저 ‘노래를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달라지는 노래일 뿐이다.
만화영화 〈바닷노래(Song of the Sea)〉는 아일랜드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한국에도 찾아왔다. 언제나 바다와 함께 삶을 짓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노래가 고이 흐르는 만화영화이다. 줄거리를 살짝 살피면, ‘셀키’라고 하는 ‘바다님’은 뭍사람과 함께 살면서 아이를 둘 낳고는 바다로 돌아간다. 셀키가 낳은 아이 가운데 큰아이는 여느 뭍사람하고 같으나, 작은아이는 여느 뭍사람하고 사뭇 다르다. 사람 피도 흐르지만 셀키 피도 흐르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바닷내음이 그리워서 뭍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 말을 안 한다. 이 아이는 노래를 부르면서 살고 싶지만, 도무지 노래를 터뜨리지 못한다.
셀키하고 마음을 섞은 등대지기는 셀키가 바다로 떠난 뒤 왜 ‘뭍에 남은 두 아이’는 바라보지 못하면서 술만 마실까. 셀키가 바다로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둘이 사랑으로 맺은 새로운 두 아이가 있는데, 왜 아이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까. 곰곰이 돌아보면, 이 사회에서 아이를 낳는 수많은 여느 어버이도 만화영화 등대지기하고 비슷한 모습이다. 아이들을 낳아서 학교와 학원에 보내기는 하지만, 막상 아이들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겨를이 없이 하루를 보내기 일쑤이다. 그나마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보더라도 중학교 문턱만 들어서면 얼굴 보기도 어렵고, 아이들이 대학교에 들어가면 이제부터 얼굴 아닌 목소리 듣기조차 어렵다.
삶은 어떻게 해서 삶이 되겠는가. 사랑은 어떻게 해서 사랑이 이루어지겠는가. 마냥 그리워해서는 삶도 사랑도 되지 않는다. 바로 오늘 여기에서 스스로 웃고 노래할 때에 삶도 되고 사랑도 된다. 셀키가 낳은 아이가 ‘어머니를 따라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남겠다’고 말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뭍이든 바다이든 똑같은 지구인데, ‘여기’는 참말 어디인가? 작은아이가 말하는 ‘여기’를 등대지기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을까? 오빠인 큰아이도 이제 동생이 말하는 ‘여기’를 따사롭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귀를 기울이면 바닷노래를 언제 어디에서나 듣는다. 귀를 기울이면 들노래와 멧노래와 숲노래뿐 아니라, 하늘노래와 바람노래와 꽃노래도 언제 어디에서나 듣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서로 부르는 사랑노래와 삶노래를 우리가 스스로 터뜨리면서 서로 따사롭게 어깨동무를 할 수 있다. 4348.4.19.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