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추억의 마니 ㅣ 대원 애니메이션 아트북 20
조앤 G. 로빈슨 지음, 선우 옮김,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 대원키즈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마니가 있던 자리 (추억의 마니)
思い出のマ-ニ-, When Marnie Was There, 2014
‘안나’라는 아이와 ‘마니’라는 아이가 나오는 만화영화를 본다. 두 아이는 여느 이름이 아니다. 영어로 붙인 이름이라고 할까. 가만히 보면, 안나도 마니도 눈알이 파랗다. 안나는 까만 기운이 도는 파랑이라면, 안나는 맑게 파랗다. 안나는 머리카락이 밤빛이나 흙빛이라면, 마니는 머리카락이 샛노랗다.
둘은 어떤 사이일까. 둘은 어떤 삶을 지냈을까. 둘한테는 언제나 가시밭길인 삶일까. 둘은 기쁨도 즐거움도 없이 늘 괴롭거나 고단한 하루를 누려야 했을까.
안나는 마니가 누리는 삶을 부럽게 여기고, 마니는 안나가 누리는 삶을 부럽게 여기기도 하지만, 이내 둘은 누가 누구를 부럽게 여길 까닭이 없이 스스로 삶을 새롭게 일구면 되는 줄 알아차린다. 서로서로 아끼고 기대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된다면, 어디에서나 언제나 스스로 가슴속으로 사랑을 지필 수 있는 줄 깨닫는다.
여느 자리에서는 웃음도 보이지 않고 눈물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지만, 오직 둘이 있는 동안에는 함께 웃고 함께 운다.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춘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 둘 사이에만 맺는 따사로운 믿음과 꿈과 이야기가 흐른다.
마니가 있던 자리는 바로 안나가 있던 자리이다. 마니가 생각하는 꿈은 바로 안나가 생각하는 꿈이다. 마니가 바라는 사랑은 바로 안나가 바라는 사랑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날 수 있다. 두 사람은 활짝 열어젖힌 마음으로 기쁘게 만날 수 있다. 마음을 닫으면 못 만나지만, 마음을 열기에 만난다.
안나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났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났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가 웃음을 짓지 않았으면 마니를 만낫을까. 아마 못 만났겠지.
안나는 할머니 숨결을 이어받은 새로운 사랑이다. 그리고, 마니도, 아마 먼 옛날에 마니를 낳은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 그러니까 마니한테 할머니가 되는 분한테서 사랑스러운 숨결을 이어받은 바람과 같은 넋이리라.
바람이 한삶을 거쳐 이 다음 삶에서 새롭게 피어난다. 꽃이 한살이를 거쳐 이 다음 한살이에서 새롭게 자란다. 사람이 한사랑을 거쳐 이 다음 사랑에서 새롭게 무르익으면서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나는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무엇을 물려받았을까. 우리 집 아이들은 내 어버이(아이들한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한테서 무엇을 물려받을까.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이 앞으로 낳을 새로운 아이들한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 숨결이 될까. 푸르게 우거지는 숲과, 파랗게 빛나는 못물과 하늘, 여기에 두 아이 맑은 눈망울이 파랗게 눈부신 모습을 가만히 헤아린다.
그나저나, 일본에서는 이 만화영화에 〈思い出のマ-ニ-〉라는 이름을 붙였고, 영어로는 〈When Marnie Was There〉라는 이름을 붙인다. 한국에서는 〈추억의 마니〉로 적는데, 〈마니가 있던 자리〉로 옮겨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니를 생각할 때”나 “마니를 생각하며”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안나는 마니를 생각할 때에 마니를 만난다. 안나 스스로 마니를 생각하지 않으면 마니를 만나지 못한다. 한편, 영어로 옮긴 이름을 마음에 그리니 “마니가 그곳에 있던 때”라는 이름도 떠오른다. 한자말 ‘추억(追憶)’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을 뜻한다. 그나저나 ‘추억의 마니’라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추억 어린 마니’나 ‘추억에 남은 마니’처럼 고쳐써야 맞다. 말뜻을 살펴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다. 한국말로 제대로 옮겨야지. 일본말 ‘の’는 ‘-의’로 적는대서 번역이 되지 않는다. 4348.4.30.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영화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