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나올 <우리 말과 헌책방>에 들어가는 머리말.


여는 글 ― 기다리지 않습니다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제 삶 서른세 해입니다. 저는 벌써 적잖은 분들보다 길게 살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꾼 김현식 님보다도, 서양음악을 하는 슈베르트보다도. 평론하던 채광석 님이 서른아홉에 돌아가셨는데, 서른아홉까지 고작 여섯 해 남았습니다. 만화를 그리던 송채성 님 나이는 진작 넘어섰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중국사람 노신 문학을 우리 말로 옮기던 박병태 님은 군대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한참 앞서 이분 나이를 넘었어요. 역사로 치면 옛날사람이지만, 혁명가 김산 님이 세상을 떠나야 한 나이가 서른셋입니다. 소설을 쓰던 심훈 님은 서른다섯에 이슬이 되셨고, 김소월 시인은 서른둘에, 윤동주 시인은 스물여덟에, 신동엽 시인과 이육사 시인은 서른아홉에 짧은 삶을 마칩니다.

 크고 반짝이던 별과 크지도 않고 반짝이지도 않는 조약돌을 견주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합니다. 큰별이라고 해서, 반짝별이라고 해서, 그이들이 태어날 적부터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그이들 스스로 ‘기다리지 않고’ 자기 깜냥대로 할 수 있는 온힘과 온마음을 다했다고. 그렇게 가멸차고 다부지게 살면서 그 짧은 삶에도 굵직하게 발자국 하나를 남겼다고.

 이제는 헌책방 책시렁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책이 되고 있지만(새책방 책시렁에서는 더더구나 안 보이고요), 송건호 선생 책을 하나하나 갈무리해서 책꽂이에 꽂아 놓고 보니 74센티미터짜리 책시렁 한 칸에 꽉 들어찹니다. 송건호 선생은 전집이 나오기는 했으나 세상에 내놓지 않은 글이나, 당신이 기자로 일할 적에 내놓은 기사에다가 틈틈이 써 놓은 일기가 퍽 많은 줄 압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책 몇 가지, 또는 수십 권쯤이지만, 당신 한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우리가 볼 수 없는 자리에서 쪽잠조차 아껴 가면서 싸우셨다고 느낍니다.

 이번 《우리 말과 헌책방》에서 소개하는 인천 〈책사랑방〉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곰곰이 되짚었는데, 다가오는 대통령 뽑기에서는 ‘가장 마음에 들 만한 사람을 뽑거나, 가장 마음에 들 만한 사람이 없다면 표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제가 엮어내는 이 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은 제 온힘과 온마음을 다하기는 해도 3호에서 2호를 돌아보면 참 어설프고, 2호에서 1호를 돌아보면 꽤나 엉성합니다. 4호에서 3호를 보아도, 10호에서 9호를 보아도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대통령 뽑기에서는 ‘차선이 아닌 최선’을 뽑아야 한다고, ‘최선이 없으면 표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그대로입니다. 모자라기는 해도, 또 지지율이 낮다고 해도, 우리는 참말로 대통령이 되어야 할 만한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책을 읽을 때 어떠하십니까?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을 우리 주머니돈을 털어서 사야겠지요? 그럭저럭 마음에 들 만한 책이 아니라. 저도 그렇습니다. 잡지를 내면서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큰힘을 쏟고 가장 알뜰하다고 여기는 글만 추려서 하나로 묶어냅니다. 2호까지 정기구독 하는 분이 105분이 되었습니다. 밑지지 않고 잡지를 묶으려면 적어도 300분은 되어야 하지만, 105분 모두모두 고맙고 소중합니다.

 2007년 8월 27일
 최종규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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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신문> 다음주에 싣는 글.




 책으로 보는 눈 17 : 책을 왜 읽을까


 어제 찾아간 헌책방에서 《熱河日記》(平凡社)를 보았습니다. 1978년에 일본 평범사에서 옮긴 판으로 두 권으로 나누어 냈습니다. 일본 평범사는 이밖에도 《조선세시기》와 《하멜표류기》와 《해유록》과 《조선독립운동지혈사》를 일본말로 옮겼습니다. 《열하일기》는 평범사 ‘동양문고’ 325번으로 나온 책이고, 어른들 펼친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짜임새에 책상자가 따로 있습니다. 예쁘장하면서 가볍게 묶은 이 책 겉에는 “조선지식인의 중국기행”이라고 적었고, 책날개에는 ‘건륭 황제 일흔 돌을 기리는 조선사신 박지원이 북경과 열하를 다녀오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와 중국 선비와 사귄 이야기를 읽으면, 깊은 됨됨이와 사물을 자기 나름대로 읽어내는 눈썰미 들을 엿볼 수 있다’는 추천글을 적었습니다.

 지금 우리 남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두 번역(완역)’ 《열하일기》는 2004년에 보리 출판사에서 상ㆍ중ㆍ하 세 권으로 낸 판 하나. 이 책은 북녘에서 우리 말로 옮긴 판을 남녘에서 계약해 다시 냈습니다. 권마다 600쪽이 훌쩍 넘고(모두 1942쪽) 하나에 25000원씩. 다 하면 75000원.

 중국 연변으로 나들이 갔을 때 〈신화서점〉에서 북녘판 《열하일기》를 구경한 적 있습니다. 북녘판은 일본판보다 조금 크고(어른들 펼친 손바닥 만합니다) 종이는 한결 가벼우며 얇고 두 권으로 된 값싼 책이었어요. 그러니까, 일본과 북녘과 중국에서 펴낸 《열하일기》는 사람들한테 읽히려고 묶은 책이고, 남녘에서 펴낸 《열하일기》는 책꽂이에 보기 좋게 꽂아 놓고자 묶은 책인 셈입니다. 팔뚝힘이 좋다면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을 테고요.

 잡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지난 8월호를 여느 달에 나온 판과 견주면 꼭 반 만한 크기로 엮었습니다. 여름 나들이 가실 때 주머니에 쏘옥 넣어서 들고 다니며 읽으라는 뜻에서 그리 엮었다고 합니다. 글씨가 작아졌지만, 책을 읽기에 눈이 따갑지 않습니다. 다만,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돋보기를 쓰고 읽어야겠지요.

 가만히 보면, 《좋은 생각》이나 《작은책》이나 《샘터》 같은 잡지는 작고 가볍고 수수하게 엮어냅니다. 《여성동아》나 《레이디경향》이나 《여성조선》 같은 잡지는 크고 두껍고 무겁고 번들번들하게 엮어냅니다. 《작은책》을 찾는 사람들은 우리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거나 부대끼며 살까요. 《레이디경향》을 찾는 사람들은 자기 몸치레와 집치레와 옷치레를 어떻게 하며 살까요. 《좋은 생각》을 읽는 사람과 《여성조선》을 읽는 사람들 마음치레와 생각치레는 어떠할까요. 오늘날 가장 잘나가는 책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성공/처세ㆍ비즈니스능력계발ㆍ인간관계ㆍ화술/협상ㆍ세일즈/매너” 들을 키우는 줄거리를 다룹니다. 《25ㆍ35 꼼꼼 여성 재테크》나 《샤방샤방 그녀의 매혹통장 만들기》 같은 책을 읽는 분들은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믿고 표를 줄까요. 대통령 후보가 누구이며 무슨 정책을 내놓는지를 어떤 눈길로 뜯어보고 있을까요. (4340.8.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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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켁.. 대한서림 찍은 사진이 없네요.. ㅠ.ㅠ 대한서림 옆 동인서관 깃든 건물 옆 전당포 찍은 사진만 있구... 이따가 대한서림 나가서 건물 사진 좀 찍어 놓아야겠군요. 에궁....)


 책으로 보는 눈 10 : 동네 책방이 된 대한서림

 도서관 자료를 갈무리하다가, 제가 고등학교 때 챙겨 놓았던 ‘도서상품권 홍보책자’ 하나를 보았습니다. 1991년에 인천에서도 도서상품권을 쓸 수 있게 되었다면서, 인천에서 가장 컸‘던’ 새책방 〈대한서림〉에서 내놓은 책자입니다. 책자 사이에는 “대한서림 창립 36주년 기념 특별회원을 모집합니다”라는 말을 큼직하게 적어 놓은 안내글도 있습니다. 이 안내글이 1991년 것이니, 책방 〈대한서림〉은 어느덧 52해라는 세월을 인천에서 책을 나누어 왔다는 소리가 됩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어서 동네 나들이를 하노라면 학교 앞을 으레 지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초중고등학교 앞을, 또는 대학교 앞을 지나가면서, 학교 앞 문방구와 가게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간판이며 유리문이며 진열장이며 예전 것 그대로 간직하며 꾸려 가는 곳이 많은 가운데, 지난날 흔히 찾아볼 수 있던 동네 책방이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꿋꿋하게 책살림 꾸리는 곳이 제법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인천에도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새끼가게가 어김없이 들어온 탓에 중간 크기 책방과 작은 책방은 씨가 마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대한서림〉에 가서 《김교신 전집》 가운데 4권 하나를 산 다음, 나머지 책을 주문해 놓았습니다. 고른 책을 들고 돌아나오며, 〈대한서림〉 건너편에 있는 〈동인서관〉 안쪽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주안 나들이를 할 때 스치고 지나가는 〈시민서림〉과 〈동아서림〉을 헤아려 봅니다. 모두들 인천에서는 내로라 할 만큼 컸‘던’ 곳이었는데, 어느덧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와 견주어 ‘작은 책방’, 말 그대로 동네 책방이 되었구나 싶습니다.

 그래, 이렇게 동네 책방이 되고 만 〈대한서림〉을 찾아가느니 넓고 시원하고 책 가짓수도 훨씬 많다는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로 가는 분들이 늘겠지요. 마일리지도 알뜰히 쌓이고 책 보는 재미도 있으시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큰’ 책방에 가서 구경하거나 골라드는 책은 ‘어떤’ 책일까요. 셈틀로 손가락만 또닥거리며 인터넷책방으로 주문하여 집에서 읽는 책은 ‘무슨 이야기를 담은’ 책일까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잡지를, 《산에서 살다》나 《야생초 편지》 같은 책을, 《서준식의 옥중서한》이나 《즐거운 불편》 같은 책을, 《스핑크스의 코》나 《수달 타카의 일생》 같은 책을, 《오카방고의 숲속학교》나 《우리 옆의 약자》 같은 책을 ‘큰’ 책방이나 ‘인터넷’책방에서 사들이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가 책으로 읽어서 얻는 ‘좋다는 이야기’와 ‘훌륭한 깜냥’과 ‘살뜰한 슬기’를 머리속에 가두어 두는 지식으로만 내버려두고 있지는 않나요.

 서울에서 지낼 때 자주 찾아가던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에서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를 사서 읽었습니다. 며칠 앞서 《슬픈 미나마타》를 주문해 놓았습니다. 대학로 인문사회과학책방 〈이음아트〉를 찾아가서 《소금꽃나무》를 사서 읽고 있으며, 《일중독 벗어나기》와 《누나의 오월》도 감칠맛나게 읽고 있습니다. (4340.7.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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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핫... 앞서 올린 묶음글 제목을 고치다 보니까, 애써 써 놓고 안 올려놓은 글이 있었네요.

^^;;; 바보팅이....






 책으로 보는 눈 5 : 책 한 권을 한 해 동안


 아침에 뒷간에서 똥을 누며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다빈치,2001)라는 책을 읽습니다. 지금도 꾸준히 사랑을 받는 책인지는 모르겠으나, 처음 나온 지 여섯 해가 지난 지금 읽어도 마음에 와닿는 줄거리가 많습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가운데 한 사람인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부족 토박이인 안토니오 할아버지한테 여러 가지 옛이야기와 세상이야기를 듣고는 자기가 느끼고 깨달은 생각을 붙여서 엮어낸 책입니다.

 어젯밤 잠들기 앞서는 《새만금은 갯벌이다》(한얼미디어,2006)라는 책을 잠깐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읽기보다는 작은제목을 보며 눈길이 가는 꼭지부터 먼저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구경꾼이 아닌 이웃으로서, 또 바로 자기 자신이 새만금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또 지금 이 나라에서는 어디에 발붙이고 있어도 새만금 사람들처럼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자기 삶터에서 쫓겨나고 있음을 깨달으며 펼쳐 내려가는 이야기책입니다.

 그젯밤 잠들기 앞서는 《우리 청춘의 조선》(사계절,1988)이라는 묵은 책(판이 끊어졌음)을 졸린 눈 비벼가며 읽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 조선에 군복무하러 들어온 일본 젊은이가 한국땅에서 따순 사람들 마음을 느끼고 노동자가 되어 밥벌이를 하는 동안 자연스레 노동운동에 몸담게 된 이야기를 숨김없이 보여줍니다. 읽으면서 때때로 눈물이 맺힙니다.

 조금 앞서 낮밥을 반 그릇 먹었습니다. 반 그릇으로도 얼추 배가 든든해지며 졸음이 쏟아집니다.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도서관 갈무리를 하고 글쓰고 걸레 빨고 하다 보니 고단합니다. 잠깐 드러누워 허리를 펴 주어야겠네요. 그래도 눈에 힘을 조금 더 주고 책 한 줄이라도 읽을 생각입니다. 음,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까. 《김광식의 민주기행, 김광식의 아시아기행》(삶이보이는창,2004)을 읽어 볼까. 《슈베르트》(신구문화사,1977)를 읽어 볼까. 《무식하면 용감하다》(행복한만화가게,2006)를 읽을까. 웬만한 책들은 몇 시간 바짝 숨을 모아서 읽어제끼기보다는, 적어도 한두 달, 으레 서너 달, 거의 대여섯 달에 걸쳐서 조금씩 맛보면서 읽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꺼번에 다 읽어 버리면 ‘읽기는 빨리 읽어도, 잊기도 금세 잊구나’ 싶거든요. ‘읽기는 더디게 읽어도, 오래오래 마음에 남아 제 앞길을 밝혀 주는’ 이야기를 좋아하다 보니, 겹치기가 되어도 열 쪽이나 스무 쪽, 때로는 대여섯 쪽만 읽은 뒤 책을 덮곤 합니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 하나 진도를 한 해에 걸쳐서 나가듯, 책 한 권 읽을 때에도 거의 한 해라는 시간을 헤아리며 읽어 버릇하고 있습니다. (4340.5.2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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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시민사회신문>에 실으려고 쓴 글입니다.


 그제 뜻하지 않게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요즈음은 오른팔꿈치가 많이 저려서 자전거를 타지 못하고 전철과 버스로 움직입니다. 서울로 가는 전철은 몇 번씩 에어컨 고장으로 가다가 멈추며 점검을 합니다. 서울에 닿아 타는 시내버스는 눈물이 말라 눈이 따갑고 목이 컬컬하도록 에어컨을 신나게 틀어 줍니다. 길가에 수없이 함부로 세워진 자가용과 짐차에 막혀 버스는 가다서다를 되풀이하고, 건널목 신호에도 틈틈이 걸려서 멈추기를 자주. 이렇게 멈추어 있는 동안 버스 왼편으로 아슬아슬 바싹 붙는 오토바이가 씽씽 지나갑니다. 안전모자 안 쓴 오토바이꾼이 보이고, 피자를 나르는 고딩으로 보이는 아이가 보입니다. 피자 나르는 아이는 택트 오토바이로 묘기를 부리기까지. 퀵배달 오토바이도 차 사이로 오락가락. 버스 기사는 오토바이 생각만 하면 얼마나 골치가 아플까, 자전거 타는 사람도 저 오토바이와 마찬가지로 느끼지 않을까, 더욱이 자전거는 오토바이처럼 씽씽 지나가 버리지 못하니 뒤에 바싹 따라붙으며 괴롭히고픈 마음이 불쑥불쑥 들지 않을까…….

 홍익대 앞 만화가게에서 만화책 세 권 고릅니다. 마포도서관을 지나 헌책방 〈온고당〉에서 사진책 몇 가지와 이야기책 몇 가지를 고릅니다. 걸어온 길을 거슬러 전철역으로 갑니다. 젊음이 넘친다는 대학교 앞 길거리에는 아리땁게 꾸민 아가씨들과 멋들어지게 꾸민 남정네들이 가득합니다. 이들을 부르는 술집과 밥집 불빛은 대낮만큼까지는 아니지만 무척 환합니다. 출출해서 닭집 한 군데에 들어가 튀김닭을 먹습니다. 닭집은 자리가 없을 만큼 북적입니다. 맛은 있었지만 인천보다 2000원 비싼 값. 사진기와 책으로 묵직한 가방을 추스르고 조금 걷다가 전철을 탑니다. 가방에서 책 하나 꺼내어 읽습니다. 조금 앞서 헌책방에서 산 《녹색평론》 1992년 7∼8월호(5호). 잡지 《녹색평론》이 나온 지 어느덧 열다섯 해가 넘었군요. 고등학교 다닐 때 읽은 생각이 어렴풋하지만 다시 들춥니다. 다시 들추니 ‘지금 생각하면 어설프고 모자란 이야기’가 보이는 한편, ‘그때나 이제나 마음에 뭉클하게 다가오는 이야기’가 보입니다. 잡지는 갓 나올 때보다 몇 달, 또는 몇 해 묵힌 뒤 보면 더 맛깔나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먼 길, 《녹색평론》은 1/3쯤 읽다가 가방에 넣고, 다른 책을 하나 꺼냅니다. 《지는 꽃도 아름답다》(달팽이). 일흔 할머니가 꾸려온 삶 이야기가 마치 시 한 편처럼 조곤조곤 다가옵니다. 당신 세월을 흐트러짐 없이 살아오셨고 그 흐트러짐 없는 삶을 꾸밈이나 겉발림 없이 담아내면 ‘시라고 추켜세우는 평론가가 없어도’ 시가 되는군요. 그러나 하루 내내 땡볕을 먹고 맥주 석 잔을 마신 탓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책을 덮습니다. 몸이 힘들어도 뒷꼭지와 눈 둘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가며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몸이 힘들기에 책을 덮고 자리에 눕거나 찬물로 멱감고 쉴 수 있습니다. 눈으로 읽은 줄거리는 머리를 거쳐 마음에서 삭인 뒤 몸으로 받아들이거든요. 눈과 머리와 마음과 몸 모두를 써서. (4340.8.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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