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

《토박이 국어사전》을 내기로 하고 2001년 1월 1일부터 일했다가 8월 31일에 그만두었다. 보리출판사 곁회사인 토박이출판사 대표를 맡은 분하고 세 판에 걸친 다툼이 있었다. 세 판째 다툼에서 사장님이 나더러 그러더라. “종규야, 내가 너만한 딸하고 아들이 있는데, 어떻게 아들 같은 직원한테 세 판이나 다툼에서 져야 하느냐. 이제는 네가 져야 한다.” 

그래서 “아, 그렇군요. 그런데 토박이출판사를 보리출판사에서 독립하여 세울 적에 대표님은 관리 업무만 보기로 서로 다짐했잖아요. 그런데 사장님은 여섯 달이 지난 뒤부터 관리 업무만이 아니라 자꾸 편집 업무로 치고들어오셨어요. 처음에는 편집회의를 할 적에 사장님은 회의 자리에 안 들어오기로 하고, 듣지도 알지도 않겠다고 하셨다가, 자꾸 채근하셔서 편집회의에는 들어오되 발언권은 없기로 했는데, 어느새 편집 방향에 자꾸 발목을 잡으면서 모든 일이 맨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하셨어요. 이미 가닥이 잡힌 길대로 잘 가던 편집회의에 편집방향이고 편집진행이었어요. 사장님이 편집회의에 치고들어오면서 편집 일손이 얼마나 늦춰졌는지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월급을 주는 분은 사장님이니, 저는 그야말로 직원으로서 그만두면 됩니다. 다만 알아두셔요. 토박이출판사는 윤구병 선생님이 바로 저를 편집장하고 자료조사부장으로 맡기고, 뜻풀이하고 보기글하고 모든 것을 도맡아서 하도록 하면서 엮기로 한 사전이었습니다. 이런 길에서 윤구병 선생님하고 이성인 선생님은 제가 엇나가거나 틀린 대목이 있으면 바로잡으면서 감수하는 어른 몫을 맡기로 했지요. 이러한 일을 할 적에 그동안 보리에서 낸 숱한 도감처럼 돈 때문에 휘둘리거나 일이 늦어지지 않도록, 또 술자리 좋아하는 윤구병 선생님이 다달이 편집회의에 꼬박꼬박 나오도록 붙잡는 몫을 바로 사장님이 하시기로 했어요. 맞지요? 따지고 보면, 사장님이 이 사전 작업에서 계약위반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스스로 나이가 많은 어른이라 여기시면서 저더러 나가라고 하신다면 그 뜻을 따를게요. 그러면 저는 여기에서 일한 자료라든지 앞으로 일할 길을 제대로 갈무리하고 나가겠습니다. 부디 《토박이 국어사전》이 처음 뜻한 대로 참다운 첫 어린이 사전으로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장님은 이 말 뒤에 아무 말씀을 안 하셨다. 참으셨는지 대꾸할 말씀이 없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인수인계를 마치고 8월 31일까지 출근을 한 뒤 더는 일터에 나가지 않을 뿐더러, 이제 책마을은 다 지긋지긋하다고 여기던 어느 날, 토박이출판사에 남은 벗님이 사전집필 방향을 놓고서 나한테 물어온다. 토박이출판사에서 궂은일을 함께한 벗님하고 주고받은 말을 남겨 놓는다.


[벗님]

★★인데, 넌 사전에 의성어·의태어는 어떻게 넣을 생각이었어? 그냥 모둠으로 묶는 것 말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묶어서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그리고 왜 의성어 의태어를 사전에서 보여줘야 하는지?

[최종규]

시늉·느낌·소리·빛깔을 나타내는 말은 모두 부록으로 넣어야지. 이런 말은 올림말로 올리기도 힘들지만, 양이 너무 많고 갈래가 많이 퍼지기 때문에 부록으로 넣으려 했고, 이 대목에서는 윤샘, 이샘, 김샘 모두 동의했어. 어떻게 넣느냐는 아직 합의를 보지 못했는데, ① 다른 도움말이나 풀이말 없이 죽 늘어놓는다 ② 모둠그림을 넣는다 ③ 그림과 보기글을 넣는다 ④ 아예 다른 책으로 만든다, 이렇게 네 가지 방법이 있으리라 봐. 의태어와 의성어는 우리말이 가진 특징이자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단계에서 자기 느낌과 생각을 넓히고 여러 가지로 담아내면서, 틀에 박힌 말씀씀이에 얽매이지 않도록 보여주자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모둠으로 묶어서 보여주자는 이야기를 한 거지. 모든학년 사전에서는 그다지 문제될 일이 없으나 낮은학년 단계에서는 말만 몰아넣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안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둠그림을 넣어서 보여주면서 하자는 이야기를 했고, 또다른 방법으로는 ㄱㄴㄷ 차례에 따라 사전을 배열할 때 ‘ㄱ’ 항목 첫머리에서는 ‘ㄱ으로 시작하는 의성어와 의태어’를, ‘ㄴ’ 항목 첫머리에서는 ‘ㄴ으로 시작하는 의성어와 의태어’를 넣는 방법도 있고.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잘 다루면 사전을 보는 재미와 자료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록으로 처리하자고 이야기를 했고.

[벗님]

올림말 뽑는 일을 하는데, 의성어·의태어가 있으니까 다른 분들은 이런 걸 왜 사전에 넣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면서. 다들 그렇다고 얘기하니 시다바리인 나야 할 말이 없었고. 워낙 잘난 사람들 모시고 일하려니 나같이 무식한 넘은 할 말이 없다. 그동안 해왔던 일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너 때문이야 이넘아. 내가 스트레스 받는거. 니가 사전 하나 만들어라.

[최종규]

왜 할 말이 없냐. 삼 년이 넘는 기획회의를 하면서 넣기로 한 것이고, 그 중요성은 이미 검증이 되었는데, 그걸 두고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 말고, 그 문제를 곰곰히 따져 보아야 한다고 말을 해야지. 그 사람들이 아무리 경력자라고 하더라도, 삼 년 기획회의라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들 초짜라고. 진짜 경력자는 자네이니, 다른 출판사와 사전 경력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말에 휘둘리지 말고, 할 말은 다 하시게.

[벗님]

그럴 수 없는 상황이네. 그 방면에서는 자기들이 나보다 더 많이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고 자기들의 생각이 맞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니까. 더 중요한 것은 나이와 쪽수에서 밀린다는 거지. 3대 1 아닌가. 흐흐. 그리고 내가 할 말은 그저 윤샘이랑 이샘과 의논 하세요, 라고 할 수 밖에.

[최종규]

음. 그러다 우울증 걸리시겠군. 얘기를 들어 보니 김샘이 새로 뽑은 사람들은 좀 큰 실수가 아닌가 싶구나. 토박이 기획실에는 목소리가 크거나 자신감에 찬 사람들이 아니라 실무로 일을 할 사람과, 길고 더딘 회의와 이야기를 거쳐서 합의를 보아서 문제를 풀어갈 사람들이어야 할 텐데. 그것이 안 된다면 일을 마무리할 수가 없을 텐데.

[벗님]

니가 아직 눈치 못 챘구나. 이미 우울증 걸렸다. 좀 심하게. 우리 신랑이 나더러 회사 그만 두란다. 나도 요즘은 일하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의미를 못 찾겠다.

[최종규]

네가 나오면, 사전 진행을 이샘 혼자서 하거나 거의 그만두는 수준이 되어야 할 텐데. 2003.12.24.


(덧말 : 2001년부터 기획을 해서 편집을 거치고 그림을 받아 2005년에 마무리하기로 했던 “토박이 국어사전”인데, 몇 해가 늦춰진 2008년에 《보리 국어사전》이란 이름으로 바뀌어서 나왔다. 이름이야 바꿀 수 있을 테지만, 알맹이가 처음 뜻하고 통째로 바뀌었다. “토박이 사전”은 교과서 말씨에 매이지 않고서 어린이하고 어버이가 곁에 두면서 말을 익히는 첫걸음 이야기꾸러미가 되도록 엮기로 했으나, 막상 “보리 사전”이란 이름으로 나온 사전은 교과서 말을 모두 실으면서 다른 사전 뜻풀이를 짜깁기로 한 얼거리로구나 싶더라. 더욱이 다른 사전에 뻔히 드러나는 겹말풀이·돌림풀이까지 그대로 짜깁기를 한 뜻풀이라서 오히려 알맹이는 다른 사전보다 떨어진다고 느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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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1

우리 집에서 옆집 즈음 되는 곳에서 사는 어느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았나 보다. 어젯밤까지 듣지 못한 피아노 소리가 이 저녁에 처음으로 들리는구나. 아마 어느 집 딸아이가 졸랐거나 딸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집안에서 들여놓지 않았을까. 좋겠구나. 그리고 나도 좋다. 카세트테이프를 틀지 않아도 창문으로 노랫소리가 흘려드니 더없이 좋다. 그나저나 이 마을에 썩 넓은 집도 없고, 하나같이 조그맣고 오래된 집만 있는데, 피아노를 들여놓는 집이 있네. 게다가 이 저녁에 서툰 노랫소리가 쟈르량쟈르량 울리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매미가 모두 사라졌다. 매미는 모두 땅으로 돌아갔을까. 2001.9.20. ㅅㄴㄹ


피아노 2

곁님이 피아노를 들이자고 한다. 큰아이한테 노래를 어떻게 가르치겠느냐고 한참 이야기했고, 피아노를 집에 들이면 좋겠다고 한다. 마침 나한테 마지막으로 남은 적금이 하나 있어서, 또 형한테서 도움돈을 얼마쯤 받으면서, 이 돈으로 피아노를 들이기로 한다. 새것 아닌 헌것이라지만 150만 원 값을 치른다. 피아노가 집에 들어오니 큰아이는 신나게 똥땅거리면서 논다. 가락을 알아서 똥땅거리지 않는다. 어머니도 옆에 앉으라 하면서 어머니가 피아노를 통통 치는 결을 흉내내면서 논다. 피아노란 이런 놀잇감이로구나. 피아노란 이렇게 집안을 새삼스레 밝히는 멋진 노래마당이로구나. 책만 가득하던 우리 집에 피아노가 들어오니 확 달라 보인다. 피아노를 들여야겠다는 곁님 생각이 참으로 멋졌네. 2010.10.12.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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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극

‘옥탑방 고양이’라고 하는 연속극이 흐른다. 물끄러미 보다가 이제 그만 보려고 다른 칸로 간다. 마무리가 어떻게 되리라는 모습이 보이고, 여기에 나오는 어리석으면서 남을 속이려는 사내가 사람을 얼마나 속터지게 하려 하는가도 뻔히 보인다. 참 짜증스럽게 하는 연속극이네 싶지만, 연속극은 바로 사람들한테 이런 맛을 부추기면서 사랑을 받겠지. 이른바 착한 주인공하고 나쁜 주인공을 맞물려서 사람들 속을 있는대로 박박 긁으면서 즐겁게 끝맺음을 짓는. 이른바 뒤집기에 재미를 베푼다고 하는 얼거리라지만, 이런 줄거리는 하나도 재미없다. 사람을 아주 ‘응어리덩이’로 내몰면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로 갈라서도록 다툼질을 부추기니, 이런 재미가 뭐가 좋을까. 더구나 이 연속극뿐 아니라 온갖 연속극은 ‘학교를 다니지 못한 채 몸으로 일하는 가시내’를 너무 얕잡아볼 뿐 아니라, 돈에 홀랑 속아넘어가거나 시달리도록 그리기 일쑤이다. 꼭 그래야 하나. 꼭 이래야 재미있나. 무엇보다도 이 연속극을 그리는 이들은 ‘옥탑방’에서 안 살아 본 티가 팍팍 난다. 옥탑방에서 살지도 않고, 살 생각이 없는 채 이름은 그럴듯하게 ‘옥탑방 고양이’라니. 참말로 옥탑방 사람들 눈과 귀를 속이면서 장사를 잘하는, 길들이는 방송이란 이런 얼거리로구나 싶다. 2003.6.24.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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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챌

‘프리챌 커뮤니티’가 이제서야 돈을 안 받겠다는 쪽으로 돌아섰다고 하네. 그렇지만 모임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쓰려면 예전처럼 돈을 내야 해야 한다고. 누리그물에서 모임을 열어서 쓸 수 있도록 하는 판에 돈을 받는 일이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여기저기에 광고를 붙이면서 광고삯을 받지 않니? 너희는 회원 가입자 숫자로 광고삯을 받잖아? 그리고 프리챌 너희가 유료화를 하겠다면 사람들한테 제대로 묻고, 길을 찾고서 해야지, 갑작스레 일을 터뜨리면서 ‘돈을 안 내겠으면 얼른 나가사오!’ 했잖아. 돈 안 내는 모임은 모조리 막아 놓아서, 정작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린 사람도 제 글하고 사진을 못 건지게 했잖아. 참 우스운 모습이다. 회원이 엄청나게 떨어져 나가고 광고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니 이제서야 ‘무료 모임’으로 돌리려는가 본데, 너희가 그 짓을 해대서 모임마다 피눈물 흘리면서 게시물하고 자료 옮기기를 벌써 다 했지. 그런데 이미 떨어져 나온 사람이 다시 돌아가겠니? 너희는 곧 이 판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어. 조흥은행이 파업을 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 이분들한테서는 앞날이 하나도 안 보이더군. 파업이 나쁠 일이 없어. 밥그릇을 지키기만 하려는 이들한테는 어떤 빛도 꿈도 읽을 수 없다뿐이야. 그래서 나는 내 오래된 조흥은행 계좌를 끊고 다른 은행으로 갈아탔어. 돈을 보고 돈을 벌려는 길은 나쁘지 않아. 돈만 바라보면서 돈만 긁어모으려고 하면, 돈벌레 곁에는 아무도 깃들 수 없어. 그뿐이야. 2003.6.18.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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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지 마라는 말씀

스승날이었던 어제를 기려, 오늘 5월 16일 여러 곳에서 충북 충주시 무너미마을로 찾아온다. 지난해에 돌아가신 이오덕 어른 무덤을 찾아가 뵙고, 어른 뜻을 기린다고 하면서. 여든쯤 되는 분들이 오셨고, 함께 무덤 앞에 서서 절도 올리고 말씀도 나누었다. 낮밥 때가 되어서 이오덕 어른 아드님이 사는 작은 집과 붙은 모임칸으로 내려온다. 널찍한 모임칸으로 들어와 비빔밥을 먹은 뒤 비디오를 본다. 이오덕 어른이 예전에 찍은 방송 녹화 풀그림이다. 《허수아비도 깍꿀로 덕새를 넘고》라는 책이 나온 뒤 어느 방송사에서 찍은 풀그림인데, 어른이 하신 말씀을 꽤 길게 보여준다. 아마 1시간을 통틀어서 어른 온삶을 비추었지 싶다. 방송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니, 가운데쯤에 이르러 “책을 읽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무척 힘주어 하시네. 온갖 더럽고 지저분한 말로 가득찬 책을 읽어서 사람들이 쓰는 말까지 물들고 만다며, 또 책에 갇혀서 이 삶을 볼 줄 모르고, 몸으로 움직일 줄도 모른다고, “책을 읽지 말아야 한다”고 다시 다시 또다시 자꾸자꾸 되뇌이시네. 우아, 이렇게 힘주어 “책을 읽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구나. 어른 글만 읽을 적하고 방송 풀그림으로 볼 적은 사뭇 다르네. 이때 퍼뜩 무슨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마침 이날 충주로 오는 버스길에서 읽은 책에서 본 글발이다. 어쩔 수 없이 책에서 읽은 얘기를 곁들이는데 《자발적 가난》이라는 책에 다음 두 글발이 또렷하게 가슴에 떠오른다.


ㄱ. 우리가 흔히 인용하듯이 모든 악의 근원은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사랑’이다. (브루스 바튼)

ㄴ.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디모테오 1서 6장 10절)


아, 그렇구나. ‘책’이 말썽이라기보다는 ‘책을 보는 마음’이 말썽이 되겠구나. 그렇지. 그런데 이오덕 어른은 왜 “책을 멀리하라, 읽지 마라” 같은 말씀을 숱하게 되풀이하셨을까? 찬찬히 헤아려 본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 나날이 참된 마음을 잃기에, 또 참마음을 잃으면서 잃는 줄 모르기에, 또 책은 손에 쥐기는 하지만 정작 책을 책대로 즐기거나 나눌 줄을 모르기에, 책을 가려서 볼 줄 아는 눈이나 마음이 차츰차츰 흐릿해지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 엉뚱한 책을 읽으면 마음이 더럽혀지기 쉽다. 짓궂은 책에 푹 빠져 사람답게 사는 일과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고. 그러나 책이 엉뚱하거나 짓궂기 때문이라기보다, 책을 마주하는 우리 마음이 제대로 서지 않은 탓에 쉽게 휘둘리고, 글에만 빠져서 몸은 못 움직이는 얼개가 되지 싶다. 이오덕 어른은 우리가 스스로 제결을 잃지 않으면서 마음을 가꾸고 일을 하며 오늘 이 삶을 튼튼히 보듬으라는 뜻으로 “책을 읽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지 싶다. 그렇게 마음을 가꾸면 굳이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아름답고 올바른 책을 찬찬히 살피고 찾아내어 즐길 수 있고, 책에만 푹 빠진 채 이론만 되풀이하지 않도록 우리 몸을 가꿀 수 있을 테니까. 책 한 자락을 읽어 얻은 모든 것으로 제 삶길하고 우리 삶터를 아름답게 보듬는 마음하고 몸짓을 다질 수도 있을 테고. 이오덕 어른은 우리들 갇힌 울타리를 보고, 가장 손쉬운 일,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다고 본다. 다음으로는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쓸 말다운 말을 잃는다. 말썽 많고 아주 나쁜 말씨나 말밭에 너무 쉽게 길들고 물든다. 그러니 이런 뿌리가 되는 ‘얄궂은 말이 가득한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우리 스스로 말다운 말을 잃고 생각마저 비뚤어지지 말기를 바라셨지 싶다. 마지막으로, 이런 여러 가지는 말로 아무리 가르쳐 보아야 쉬 받아들여 배우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차라리 “책을 읽지 말라”고 하셨지 싶다. “책을 읽는 마음을 먼저 바르게 세우는 일이 참 크”지만, 그 큰자리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느껴서 살아갈 만한 뒷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고 느끼셨지 싶다. 그리고 책을 가까이하는 뒷사람이 “일하는 사람”하고 자꾸 동떨어지면서 엉뚱한 길로 빠지고 마니까, “책을 읽지 말라”고 하셨다고도 본다. 책은 언제든지 읽을 수 있으니,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면서 깨닫길 바라셨겠지. 책을 읽는 마음을 먼저 제대로 슬기롭게 사랑으로 즐겁게 세워야, 책 한 자락을 읽든 백만 자락을 읽든 하나하나 한결같이 잘 곰삭여서 제 살림꽃으로 삼아 온눌에 다시 펼칠 수 있다고 보신 이오덕 어른이리라. 그렇지만 책을 읽는 마음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길가에 자라는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마구 짓밟거나 꺾을 수 있다. 가난하고 힘든 이를 ‘말로는’ 돕자고 할 수 있으나 정작 제 주머니를 덜어서 나누거나 제 몸을 내맡겨 ‘자원봉사’를 하지는 않기 일쑤이잖은가. 그래서 무엇보다도 “일하는 사람”이 되어, “말보다는 삶”으로 일어서기를 바라셨고, 이렇게 사람답게 살아가는 몸짓하고 마음이 제대로 서야 ‘책을 읽을 자리’에 스스로 선다고 보셨지 싶다. 2004.5.16.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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