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에는 영자신문사 “The Argus”가 있다. 다섯 학기를 다니고 그만둔 외대이지만, 이 외대에 들어가며 맨 먼저 문을 두드린 데는 “디 아거스”였고, 영자신문사 새내기 기자로 뽑혔다. 그러나 나는 영자신문사 편집일꾼이 너무 이 나라를 어둡게만 바라보는 터라, 이 어두운 데에 갇히고 싶지 않아 석 달 뒤에 제발로 나갔다. 서울대 들어가기보다 외대 영자신문사 들어가기 더 어렵다는 말이 떠돌았기에 둘레에서 나를 참 미친놈으로 보았다. 아무튼, 1994년에서 스물 몇 해를 지난 2019년 3월에 “디 아거스”에서 누리글월로 몇 가지 이야기를 물었다. 이 이야기는 그곳 일꾼이 영어로 옮기겠지. 주고받은 누리글월을 옮겨놓는다.


1. 우선,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거스에서 일하신 적이 있다는 말씀에 아거스 부원들도 이러한 반가운 기회가 온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습니다. :) 다음은 질문지인데요. 특히나 외대와 이문동에서 있으시고 애정을 가지던 분으로써 그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이문동은 좁은 골목길, 낙후된 지역이라서 재개발에 긍정적인 의견들이 많은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특히나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으신 이문동의 가치)

→ 좁은 골목길이 “낙후된 지역”이라고 여기는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요? 길이 좁으면 자동차가 드나들기 어려우니 사람살이에 한결 어울립니다. 마을이란 자동차가 씽씽 내달리는 자리가 아닌, 사람들이 오순도순 어우러지면서 이야기꽃이 피어나고 서로 돌보는 터전일 테니까요. 막삽질로 마을을 밀어붙이거나 허물려는 이들이 입에 늘 달고 다니는 말인 “낙후된 지역”이라고 느낍니다. “낙후되지 않은 지역”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이 대목을 헤아려야지 싶습니다. 오래된 집이 있고 골목길이 좁은 곳이 “낙후된 지역”이라면, 이러한 자리를 곱게 건사하는 일본이나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는 뒤떨어진 나라일까요? 아닐 테지요. 마을은 마을사람 스스로 가꾸는 터전입니다. 우리는 한쪽에서는 오랜 골목을 관광지로 삼는 눈이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오랜 골목을 막삽질로 무너뜨려서 아파트를 죽죽 올리려는 눈이곤 합니다. 서울 이문동 둘레에 아파트가 들어선 둘레는 사람이 걸어다니기 매우 나쁩니다. 이문동에 아직 아파트가 없던 무렵에는 마을에서 아이들이 골목에서 거리낌없이 뛰놀았고, 어른들은 골목 곳곳에 돗자리를 펴거나 평상을 놓아 수다판이나 조촐한 잔치판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아파트가 곳곳에 들어서면서 이런 어울림마당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막삽질을 일삼아서 돈벌이를 꾀하려는 이들이 뱉는 말에 훌러덩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에서 사람들이 전주를 왜 많이 찾아갈까요? 서울 인사동은 왜 이렇게 사람으로 붐빌까요? 자동차를 몰아내고 좁은 골목길을 그대로 건사하면서 마을사람 스스로 가꾸는 살림을 지킬 적에, 서울 이문동은 둘도 없이 멋스러울 뿐 아니라 아름답고 즐거운 터전으로 거듭날 만합니다. 오랜 집과 골목길이야말로 마을을 새롭게 살리는 바탕입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아름답게 지내는 마을이 바로 오랜 집하고 골목길입니다.


2. 최종규 님의 헌책방 관련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저희도 ‘신고서점’ 취재를 했는데 그곳도 이문 3구역 재개발 지역이라서 굉장히 고민이 많으시다고 하더라구요. 혹시 외대를 다니시던 당시에는 이문동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 저는 1994년에 외대 네덜란드말 학과에 들어갔고, 군대를 다녀오고서 1998년 12월에 그만두었습니다. 이른바 자퇴를 했지요.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외대 둘레, 이문동·휘경동·석관동·회기동을 아우르는 신문배달 일을 했습니다. 1999년 여름에 출판사 일꾼으로 들어갔고, 이듬해에 삶터를 종로구 평동이라는, 이제는 아파트로 다 밀려버린 아주 오래된 마을로 옮겨서 살았어요. 그무렵을 떠올리면, 외대는 무척 포근하면서 살갑고 아기자기할 뿐 아니라, 서로 돕고 돌보는 흐름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무렵에는 재단이사나 총장마다 온통 비리투성이라서 “썩어빠진 재단이사하고 총장”을 학교에서 몰아내는 싸움으로 해마다 아우성이었습니다. 애써 몇 사람을 쫓아냈더니 새로 자리에 들어선 이도 똑같은 썩은짓을 일삼아 다시 쫓아내야 하던, 참으로 벅찬 나날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학교 문제에 그무렵 교수나 강사는 거의 마음을 안 썼습니다. 그분들은 그분들 일자리를 지키는 데에만 마음을 쏟을 뿐이었지요. 그무렵 외대생은 민주운동에도 무척 힘을 쏟았어요. 본관 건물에는 임수경 벽그림을 큼지막하게 그려넣어 다른 대학교에서는 외대를 몹시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외대생은 “임수경이 다닌 학교”라는 이름이 대단한 자랑이었고, 민주운동으로 신촌이나 서울역이나 청량리 같은 곳에서 대학생 시위를 할 적에 2000이 넘는 학생이 걸어서 오가곤 했습니다. 다른 어느 대학교보다 민주운동에 똘똘 뭉쳐서 잔뜩 함께했던 곳이 외대였습니다. 학생 숫자는 다른 대학교보다 적은데에도 민주운동 시위에 이토록 많이 온 데는 없었어요. 게다가 외대는 여러 외국말 학과가 있다 보니, 다른 대학교는 남학생이 많다면, 외대 시위 학생은 3/5쯤이 여학생이었어요. 외대생은 이웃 경희대생하고 대면, 수수한 차림에 똑똑하고 얌전한데다가 착하고 참하다는 말을 으레 들었습니다. 저는 신문배달을 하며 여러 마을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대학교 둘레 가게에서뿐 아니라, 다른 대학교라든지 다른 지역(이를테면 고대나 신촌이나 서울대 쪽 사람들)에서도 ‘외대생이라고 밝히면 믿을 만하다’고돌 한목소리로 말해 주었습니다. 공부할 적에는 공부를, 놀 적에는 놀이를, 모의월드컵을 할 적에는 축구를, 학교잔치를 할 적에는 잔치를, 시위나 집회를 할 적에는 시위나 집회를, 참말로 어떤 일이든 다들 한동아리로 움직이던 외대였다고 돌아봅니다. 비록 저는 외대라는 배움터를 그만두었습니다만, 이토록 자그맣고 학생 숫자가 적은 대학교가 품은 따스하면서 넉넉하고 사랑스러운 기운은 참으로 좋았다고 느낍니다. 저는 출판사 일꾼으로 지내야 했던 터라 일터하고 가까운 종로구 평동으로 옮겼습니다만, 한동안 외대 둘레 반지하칸에서 살았어요. 그리고 〈신고서점〉 이야기를 적어 본다면, 처음에는 참 작은 헌책집이었어요. 이러다가 숱한 외대생이 손님으로 드나들어 주면서 오늘처럼 2층까지 이룬 멋진 헌책집이 되었습니다. 〈신고서점〉은 여느 헌책뿐 아니라, 외대 곁에 있는 헌책집답게 다른 고장 어느 헌책집에도 없는 “여러 나라 말 책”이 무척 많습니다. 이 대목도 무척 돋보이지요. 외대다운 책살림을 잘 드러내는 알찬 헌책집이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문동에서 신문배달 일을 하면서 살 적에, 또 외대를 다닐 적에, 거의 이틀마다, 때로는 아침저녁으로 〈신고서점〉을 들락거리면서 책을 읽고 샀습니다. 아주 고마운 책터예요. 어느 모로 보면 대학도서관보다 이곳에 책 가짓수가 더 많을 수 있습니다.


3. 예전에 외대를 다니시던 한 교수님을 우연히 인터뷰하다 보니, 요즘 학생들이 투쟁하지 않고 매번 가만히 있는 게 되어 버렸다고, 예전에는 그래도 나았다고 그러시더라구요. 혹시 외대가 그만큼 많이 달라졌나요?

→ 학생 탓도 안 할 수는 없습니다만, 학생 탓을 왜 해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외대생이 지난날하고 다르게 싸우지 않고 주저앉는다면 학교 흐름이 그렇게 바뀔 뿐 아니라, 나라 흐름도 그렇게 바뀌거든요. 대학생이 되어 즐겁게 배우고 기쁘게 꿈을 펼치는 터전인 외대일까요? 지난날 외대는 아무리 학교가 작고 강의실이나 건물이 작더라도 ‘미네르바 동산’처럼 작은 숲이 있었고, 이 숲에는 오리나 닭이나 토끼도 함께 살았습니다. 그무렵 외대생은 작은 숲에 사는 작은 짐승을 다들 제 식구처럼 아꼈어요. 그리고 예전에 외대는 건물이나 시설은 작고 좀 초라하더라도 잔디밭이 꽤 넓었고 나무그늘도 곳곳에 많았어요. 이웃 경희대는 건물이 크고 시설도 많다지만 외대처럼 아기자기하고 아늑한 쉼터가 없었어요. 그래서 경희대생이 외대로 놀러와서 잔디밭에서 논다든지 낮잠을 잔다든지 하기 일쑤였어요. 작은 터전에 있는 외대였다 보니 다 다른 학과라 해도, 이를테면 상경대나 서양어대나 동양어대라 해도 늘 마주치면서 지내지요. 이러면서 차츰차츰 서로 허물없는 사이로 지낼 뿐 아니라 울타리를 쌓지 않았어요. 같이 어울리면서 같이 배우는 흐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꾸자꾸 새 건물을 올리고, 운동장도 좁아지고 쉼터나 잔디밭이나 작은 숲까지 밀어내니, 차츰차츰 몸이나 마음을 쉬면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펼 자리도 사라지는 셈이에요. 이러면서 어느덧 서로 덜 어울리거나 안 어울리는 흐름이 되고, 이러면서 저절로 사회문제나 학교문제에 등을 돌리는 일까지 생기겠지요. 예전에는 학과방이나 동아리방에서 술잔치를 할 적에 낯선 이웃 학과 학생이어도 불러서 한두 잔을 나누어 마실 뿐 아니라, 같이 춤추고 노래하면서 ‘서로 무엇을 배우는지’를 이야기하는 흐름이 짙었습니다. 이러다가 ‘내 학과’ 아닌 ‘다른 학과’ 방에서 잠드는 사람도 많았어요.


4. 또한 당시 학생들은 주민들과 지금처럼 벽을 쌓고 지냈었나요? 이곳 학생들은 재개발에 대해서 평소 가성비 있는 음식점들이 사라지고 요즘 도서관 공사가 한창 이루어지는 즈음이라 자신의 공간이 침해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촌 같은 대학가처럼 번화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과 학업과 병행하여 알바로 생활비를 버는 학생들이 많아서 그런지 집값이 오른다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친구들도 많은 듯해요. 재개발이 도시재생으로써, 학생들 또한 참여하고 이에 대해 올바른 의식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해당 기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대해 보다 잘 알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 잘 생각해야 합니다. 재개발은 누구 때문에 누가 할까요? 평등이나 민주를 넓히려는 뜻으로 재개발을 할까요? 오늘날 한국에서 숱한 재개발을 나라 곳곳에서 끊임없이 했습니다만, 평등이나 민주를 넓힌 재개발은 어느 한 판도 없었다고 느낍니다. 모든 재개발은 골목집을 밀어내어 아파트하고 쇼핑센터를 올리는 길을 걸었어요. 골목집에서 하숙이나 자취를 하는 대학생이 ‘아파트 하숙이나 자취’를 할 수 있을까요?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골목집 사람들이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거의 없는 일입니다. 잘 보셔요. 골목집에는 ‘관리비’가 없습니다. 아파트는 ‘관리비’가 꽤 비싸지요. 이 관리비를 대면서 하숙이나 자취를 할 수 있는 대학생은 무척 드뭅니다. “가성비 있는 식당”은 예부터 외대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경희대생은 외대로 밥을 먹으러 많이 왔어요. 경희대 구내식당은 가짓수도 적고 비싸고 맛없다고 해서 경희대생이 외대 구내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오는 일도 잦았어요. 가겟세(임대료)가 적고, 푸성귀가게에서 값싸게 좋은 푸성귀를 파는 저잣길이 있는 외대이니, 아주 마땅히 “가성비 있는 식당”일 뿐 아니라, 경희대 둘레나 신촌이나 다른 곳보다 값이 쌀 뿐 아니라 맛있는 곳이 많기 마련입니다. 외대 곁에 있는 가게는 크기는 작아 손님을 많이 받기는 어려우나 알맞춤한 크기로 꾸리기에 가게 사장님 부부로도 가게를 지키거나 이을 수 있어요. 많이 팔아서 많이 벌지는 않아도 알맞게 벌어서 적금을 붓는다든지, 때로는 손님한테 덤을 줄 수 있던 얼거리예요. 그런데 재개발이란 목소리가 나온다면, 대학생 스스로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마구 밀어내어 텃사람을 쫓아내는 막삽질이 아닌, 마을을 가꾸거나 살릴 수 있는 길을 대학생이 슬기롭게 생각을 짜내어 ‘이문동 가꾸기’를 벌일 수 있습니다. 외대에는 건축학과는 없습니다만, 상경대학이 있지요. 외대생 스스로 외대 둘레를 막삽질이 아닌 “오랜마을빛(오래된 마을을 가꾸는 빛)”을 살리는 길(사업)을 꾸며서 서울시나 나라에 이런 일을 행정으로 신청해 볼 수 있습니다. 또는 동대문구나 이문동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오랜마을빛 사업”을 꾀해 볼 수 있습니다. 때려부수거나 허무는 재개발이 아닌, 오랜가게하고 오랜집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내부·외부 손질”을 해서 “오래된 멋이 새롭게 흐르는 대학마을”이란 이름을 살리는 일을 할 만해요. 사업기획을 하고, 사업계획서를 쓰고, 사업계획서를 멋지게 꾸미고, 이 사업계획서를 들고 서울시장도 찾아가고, 구청장도 찾아가고, 지역구 국회의원도 찾아가고, 구의원도 찾아가고, 진보정당 의원을 불러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이야기도 귀를 기울여서 듣고, 마을 분들을 대학교 강당으로 모셔서 같이 ‘난상토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강사나 교수는 학생들이 정치인이나 행정기관하고 잘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 몫을 맡으면 됩니다. 그리고 뜻있고 참한 건축가를 학생들한테 이어줄 수 있고요, 이런 일을 벌이는 밑돈을 나라나 지자체에 ‘사업기금 신청’을 앞장서서 해볼 수 있습니다.


5. 학생들과 주민들이 사실 각자 살기 바빠서 서로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세태인데, 서로 담을 허물어야 할까요? 학생들은 주민들이 학교라는 자신들의 공간을 침범하고, 같이 공유하려 드는 모습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고 주민들 또한 학생들의 사정에 대해 이해하기보다는 역시나 자신의 사정에 집중하곤 하는 것을 인터뷰를 통해 느꼈습니다. 

→ 대학교는 대학생만 있어서는 굴러가지 않습니다. 곁에 마을이 있어야 함께 굴러갑니다. 학생하고 주민은 원수가 아니에요. 서로 이웃입니다. 더구나 오랜 주민은 오랫동안 숱한 학생이 드나드는 길을 지켜보았어요. 배울 이야기가 많습니다. 지난날 외대에서 잔치나 행사를 벌이면 기꺼이 마을 분을 모셨습니다. 자취생이나 하숙생은 집임자 아주머니나 아저씨를 불렀지요. 가까운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서도 으레 대학교로 나들이를 와요. 저녁 다섯 시까지는 대학 운동장이 대학생 몫이라면, 해가 기울 즈음에는 마을 어르신이 가볍게 걷는다든지 달리기를 한다든지, 또 아기를 둔 아주머니는 아기를 이끌고 너른 운동장에서 같이 논다든지 했고, 대학생은 이런 이웃 분을 기꺼이 받아들였어요. 서로 이웃이니 외대 둘레에서는 이른바 도둑질이 없다시피 했고, 마을 분들 눈과 손이 대학생을 감싸거나 지키는 얼거리였습니다. 대학생이 “주민한테 자기 공간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참 어이없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봐요. 주민은 대학생 때문에 전철역이 매우 붐벼서 짜증날 수 있습니다. 주민은 대학생이 등하교하는 물결 때문에 그즈음에는 걸어다니기도 힘들어요. 자, 이때에 주민은 대학생 때문에 “주거 공간 침범”으로 짜증을 내야 할까요? 게다가 대학생은 늦도록 술을 마시다가 골목 곳곳에 게워내기도 해요. 얼근한 대학생이 게워낸 자리를 누가 치울까요? 이튿날 그 대학생이 찾아와서 치울까요? 이런 일은 아주 드물겠지요. 이때에 주민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공부하는 대학생 아닌 술만 퍼마시며 마을을 더럽히는 못난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면 될까요? 마을에 사는 사람은, 주민은, 골목을 이룬 집에서는 사람들 누구나 길에 쓰레기를 안 버립니다. 외대는 예전부터 무척 깨끗했는데요, 청소 일꾼이 있어서라기보다 마을사람이 틈틈이 쓸고 치우기에 깨끗했어요. 이런 흐름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마을사람을 이웃으로 바라보며 어깨동무한 지난날이라, 대학교에서 잔치나 행사를 하면서 밤늦게까지 시끄러운 소리나 불빛이 퍼져나가도 그러려니 하고 헤아려 주었습니다. 또 그런 잔치나 행사에는 어김없이 마을사람을 불렀고요. 이 잃어버린, 또는 끊어진 고리가 언제부터 왜 어떻게 잃어버리거나 끊어져야 했는가를 찬찬히 짚어야지 싶습니다. 오늘은 대학생인 여러분은 앞으로 ‘마을사람·주민’이 될 어른입니다. 앞으로도 대학생으로만 있지 않아요. 여러분이 다니는 대학교에서는 학생이라는 몸이지만, 여러분이 사는 집에서는 마을사람이요 주민이지요? 학교를 마친 뒤에는 여러분 모두 대학교 곁에서 마을사람이 됩니다. 이 흐름을 읽으면 좋겠습니다.


6. 추가적으로 현재 이문동에서 진행되는 재개발이라던지, 나누어 주실 수 있는 이문동/주민/학생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담이 있다면 나누어 주실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 ‘재개발’ 아닌 ‘마을가꾸기’로 돌아설 수 있도록 다 같이 어깨동무하면서 슬기를 모으기를 바랍니다. ‘도로명주소’가 생기기 앞서, 외대 우연(우리말 연구회) 동아리 모람은 외대생하고 마을사람 뜻을 물어 ‘외대 골목길 이름 붙여 주기’를 벌인 적 있습니다. 이때가 1998년이었다고 떠오릅니다. 자, 생각해 봐요. 학생하고 마을사람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스스로 붙인 골목길 이름이란 얼마나 자랑스러우면서 사랑스러울까요? 대학도서관을 대학생한테뿐 아니라 마을사람한테도 활짝 연다든지, 모의월드컵 판을 외대 학과끼리만 벌이는 축구가 아닌, 마을사람도 불러서 ‘이문1동·이문2동·이문3동·휘경동·회기동’도 함께하는 더 멋진 판을 꾸밀 수 있습니다. 마을사람도  모의유엔총회에도 마을사람이 함께하는 자리를 꾸밀 수 있고요. 아마 이런 보기는 아직 다른 대학교에서도 없지 싶은데, 아직 다른 대학교에서 없는 일을 외대가 처음으로 앞장서서 판을 벌일 수 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무역학과는 외대가 처음으로 열었습니다. 외대는 처음부터 ‘첫길을 여는’ 슬기로운 눈썰미를 키우는 배움터였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학과마다 문집을 엮는다든지, ‘서양어대·동양어대’에서 학과마다 전통잔치를 벌일 적에 외대 곁 가게에서 도움돈을 받았어요. 여느 때에는 손님이었고, 잔치자리가 있을 적에는 든든한 도움이 몫을 맡은 마을사람입니다. 외대에 영자신문이 있다는 대목도 대단하지 않나요? 외대에는 언론사가 여럿이거든요. 마을 분들은 때때로 외대학교나 아거스나 외대교지에 광고를 하면서 조그맣게 도움돈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멋스러운 이웃이라고 여깁니다. 이 멋스럽고 아름다운 이웃이 곁에 있어 더 즐겁고 아름다운 외대라는 배움길을 이룬다고 느낍니다. 부디 이 고운 넋을 잘 보듬으면서 가꾸는 배움이 여러분이 되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9.3.26.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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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아시아 경기 대회

2014년에 아시아 경기 대회를 인천에서 하기로 했단다. 이리하여 인천시가 거두어들이는 ‘돈 이익’이 십 몇 조라는 기사가 뜬다. 이 돈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며, 또 누구 주머니로 들어갈는지 모를 일. 인천에는 세계대회를 치를 만한 운동장이 몇 군데 없기 때문에, 앞으로 2014년까지 곳곳에 갖은 경기장을 지어야 한다. 경기장 하나를 지을 때마다 수천 억 원이 들 텐데, 수천 억을 들여 수조 원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돈 남는 장사’라고 생각할 테지. 더구나 이런 일감을 자꾸자꾸 뽑아내야 ‘사람들 일자리’도 늘어난다고 뻥튀기를 할 테고, ‘실업률이 떨어진다’고 내세우겠지. 여러 나라 운동선수가 머물 선수촌(아파트)을 짓는다며 인천 건설업계는 눈이 반짝반짝 빛날 테고, 선수촌 아파트가 지어지기 무섭게 부동산업자들 손발은 부지런히 움직일 터이다. 나라밖 사람들(기자와 선수)이 많이 몰려올 테니, 나라밖 사람이 보기에 껄끄러운 ‘가난한 사람 마을’은 죄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고 모조리 아파트로 다시 세우자고 득시글댈 모습이 뻔하다. 2014년까지는 앞으로 일곱 해. 늦어도 2012년까지는 ‘인천다운 인천’은 싹 걷어치우고 ‘젖과 꿀이 흐르는 시멘트 물결’로 뒤덮이리라 본다. 나는 1995년에 인천을 떠났는데, 2007년에 인천으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겪는 일이다. 그렇지만 인천이 아닌 다른 곳에 자리를 잡는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란 없지 않을까. 이 나라 어느 멧골짜기로 간다 한들, 어느 섬마을로 숨어든다 한들, 막삽질을 일삼으려는 공무원과 정치군 손길이며 발길이 안 뻗치는 곳이 없다시피 하잖은가. 쉴새없이 벌어지는 운동경기에 마음을 쏟고, 끊임없이 ‘돈되는 일’에 몸을 옮기는 우리들 손에 책이 들릴 짬이 얼마쯤 있을까. 곁사람이 어찌 지내는지 모르고, 이웃이 어찌 사는가 모르는 터에, 손에 책을 쥘 일은 아예 없으리라 본다만. 2007.4.17.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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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실린 내 기사

지난 수요일인 2007년 5월 23일, 내가 새로 낸 1인잡지 《우리말과 헌책방》를 이야기하는 글이 〈조선일보〉에 실렸다. 오늘 토요일, 〈국민일보〉에 글이 하나 더 실렸다. 인천에서 〈국민일보〉를 사기가 너무 어려워,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넘게 이곳저곳 다녀 보아도 파는 데가 없어서, 서울에 있는 〈오마이뉴스〉 기자인 ㄱ 아저씨(내가 서울에 가면 잠자리를 내어 주는 선배)한테 전화로 여쭈려 한다. ㄱ 아저씨는 내 전화를 받자 첫 마디로 대뜸, “아, 조선일보에 인터뷰를 했더라고요?” “네? 인터뷰요? 하도 귀찮게 전화를 해서 아무렇게나 얘기해 주었는데요?” “그게 뭐예요. 입으로 하는 말하고 행동하고 다르고.” “어, 그거 내가 인터뷰 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까 얼결에 전화로 말해 준 것뿐인데. 하긴 뭐, 그것도 인터뷰라면 인터뷰일 수밖에 없으니.” 저녁나절, 조금씩 차오르는 달을 올려다보며 생각한다. 〈조선일보〉 기자는 나를 취재하지 않았다. 나를 만나보지 않았고(그러니 내 얼굴도 모른다), 내가 책을 낸 출판사로 전화해서 내 연락처를 알아낸 뒤, 그이한테 도움이 되는 몇 가지만 꼬치꼬치 캐물으며 알아냈다고 할까. 그리고 그 정보로 글을 썼다. 이 자리이니까 말하지만, 전화로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전화기를 붙들고 싸웠다고 해야 옳다. 참말이지, 나는 그 기자 분하고 신나게 싸움질을 했다. 그런데 그 기자가 쓴 글을 보니, 내가 ‘성을 냈다’고 적어 놓았더만. 그런데 여태 나를 만나본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쓴 글보다, 그저 몇 가지만 나한테 전화로 물어본, 아니 물어봤다기보다 한판 싸움질을 했던 기자가 쓴 글이 훨씬 잘 썼네. 깜짝 놀란다. 그러고 보니 그 기자가 얼핏 하는 말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1998년에 한글학회 공로상 받으셨네요? 그때 사진을 보니 너무 젊어서 신문에 쓰기 어렵겠네요.”〈조선일보〉에 실린 내 사진은 내 것이 아닌, 자전거잡지 〈더 바이크〉 것이다. 그곳 사진을 얻어서 썼다. 그러니까, 나는 이 신문사에 ‘사진 제공’을 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기자는 ‘요즘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 실린 매체’를 그이 스스로 알아내서 사진을 얻었다! 엄청난 취재력이자 활동력 아닌가! 그건 그거고, 1998년에 찍힌 내 사진이라 해도 〈조선일보〉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이 아니다. 그때 1998년에도 〈조선일보〉는 나를 취재하려고 그렇게 애쓰셨지만 나는 요리조리 몸을 빼고 전화를 안 받으면서 취재거부를 했는데, 그때에도 〈조선일보〉 기자는 마치 나를 만나서 차분히 이야기를 듣고 사진도 찍은듯이 글을 척 실었다! 얼마나 대단한가! 1998년 〈조선일보〉에 실린 내 사진도 다른 매체에서 얻었을 테지. 아마 〈한겨레〉 기자가 찍은 사진을 얻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때에 나는 신문배달 일꾼으로 일했고, 내 사진을 찍은 사람은 〈한겨레〉 기자만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진자료를 아직도 건사한다니! 다른 신문사에는 그 신문사 자료가 얼마나 있을까? 아니, 다른 신문사 기자는 글을 실으며 사진 자료를 찾을 때 저희 ‘곳간(데이타베이스)’를 뒤져 보기는 하는가? 속으로 조금 소름이 돋았지만, 이런 모습이야말로 ‘기자얼’이라고 느낀다. 한켠으로는, ‘취재도 안 한 주제에 글만 훌륭하게(?) 썼으니, 소설가다운 솜씨가 많이 엿보여서, 기자보다는 소설가로 일하는 쪽이 낫다고 느낄 만한 〈조선일보〉 기자’이지만, 글을 잘 쓴다는 모습은, 그만큼 기자로서 바탕이 되었다는 소리이다. 높이 살 대목은 높이 사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진보와 혁명이 살아난다. 진보정당이든 진보매체이든, 수구꼴통이라고 하는 매체 사람들이 하는 만큼 애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거나 울릴 수 없다. 기자들 글솜씨 하나만 놓고 볼 때, ‘조선일보 기자 발가락만큼이라도 따라가려고’ 애쓰는 진보매체 일꾼이 얼마나 있는가? 현장 취재를 ‘조선일보 기자 신발 밑창이 떨어지는 만큼 따라가려고’ 다리품 파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내가 여태까지 겪어 보기로는 늘 ‘글쎄요’이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다. 이는 받아들이겠다. 다만 한 가지, 헌책집 이야기를 취재하고 글로 다루는 기자들 모습과 몸짓과 글을 보면, 이 나라 일간지와 주간지와 월간지를 통틀어 ‘조선일보 기자 1/10만큼이라도 되는 기자’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진보매체이든 진보가 아닌 매체이든 ‘조선일보 삿대질’은 신나게 해댄다. 저희는 그만큼 애쓰지 않으면서. 그래, 〈조선일보〉가 잘못하는 짓, 이 가운데 가장 크게 잘못하는 정치와 사회와 교육 글(다른 글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이 나라에 〈조선일보〉라는 신문이 있다는 대목이 큰 아픔이자 슬픔이라고 본다)은 마땅히 나무라고도 남을 만하다. 삿대질뿐 아니라 송곳으로 후벼파듯 갈기갈기 파헤쳐야 하기도 할 테고. 그러나 이런 삿대질로 그친다면? 삿대질로만 그치고, 우리 스스로 한결 나은 모습으로 거듭나려 하지 않는다면? 진보를 외치고 싶은 사람들은 느껴야 한다. 느낀 대로 움직여야 한다. 진보이든 무슨 운동이든 한삶을 바쳐서 두 눈을 감는 날까지 멈출 수 없는 일이다. 어느 한때라도 흐트러짐이란 있을 수 없다. 자, 보라. 〈조선일보〉 기자 가운데 정년퇴직을 하는 날까지 흐트러짐을 보이는 기자가 있는가?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사람’ 가운데 제 나이 예순이 되는 날까지 흐트러짐 없이 고이 제 길을 걷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아니, 있기나 한가? 술자리에서만 목소리 높이고, 정작 제 몸뚱이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조선일보를 나무랄 품’이 없다고 본다. 2007.5.26.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조선일보 기사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07&M=05&D=23&ID=200705230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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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을 말린다

비 그친 뒤 말끔해진 하늘. 그렇지만 먼지띠를 모두 걷어내지는 못한 비. 그럭저럭 맑은 햇빛과 좋은 햇볕을 받으면 이불이 한결 뽀송뽀송할 테니, 4층에 있는 살림집 하늘마당 돌담에 이불을 걸쳐 놓는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벽돌 셋을 얹어 놓고. 뽀송뽀송 마르는 이불 곁에 서서 똑같이 해바라기를 한다. 2013년까지 재개발로 엎어버린다는 이 마을인데, 지붕 낮은 골목집을 죽 둘러본다. 이 집들이 목숨이 다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밀어서 없애려고 한다면, 이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과 터전과 마음은 어찌 될까. 이 사람들 일터는? 많이 벌지는 못한다고 해도, 조그마한 집 하나 얻을 만큼은 벌 수 있는 일터가 있는 마을. 많이 누리지는 못한다고 해도, 떡 한 접시 나눌 수 있는 마을. 짐차가 들어오지는 못해도 조용하고 호젓하게 지낼 수 있는 골목길. 체육관이니 수영장이니는 없어도 배드민턴채 하나만 있으면 골목길 한켠에서 땀흘려 뛸 수 있는 골목길. 이 골목길 사람들은 삶터에서 임자로 마을을 가꾸는 오늘이지만, 이 골목마을에서 밀려나 아파트 수위나 청소부가 되어야 하는가. 2007.5.26.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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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5

인천 율목도서관에서 이야기꽃을 편다. 2010년에 인천을 떠나면서 인천사람한테 씨앗으로 남긴 《골목빛》이라는 사진책을 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이다. 새삼스럽구나. 2010년부터 예닐곱 해를 인천에서 이 책을 안 알아보았는데, 거의 열 해가 된 이즈음 알아보아 주는구나. 율목도서관에서 이야기꽃을 펴는 터라, 이 율목도서관하고 얽힌 어릴 적 일, 1985년이라는 해에 겪은 일을 넌지시 곁들인다. 율목도서관 책지기님들이 모두 놀란다. 어떻게 그런 일이 다 있느냐 하시지만, 그때에는 그랬다. 1980년대에는 어른들이 어린이를 아무렇지 않게 두들겨패면서 키웠고, 아이들한테 막말이나 거친말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그때에는 도서관에 어린이책을 거의 안 두었다. 이제는 어린이도서관이 따로 문을 열지만, 1980년대에 무슨 어린이책이 얼마나 있었는가. 율목도서관에서 책지기로 일하는 한 분이 “작가님이 동시를 쓰시잖아요. 이런 부탁을 해도 될까 모르겠습니다만, 아직 관장님하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저희 율목도서관에 애정도 있으시고 하니까요, 새로 개장한 우리 율목도서관에 동시 하나를 써 주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도서관 책지기님 말씀을 듣고서 밤에 동시를 하나 쓴다. ‘율목도서관을 기리는 동시’를 “고요”라는 이름으로 한달음에 썼다. 아름다운 고요, 고요로운 사랑, 이곳이 바로 골목마을 인천 율목동에 새롭게 피어나는 도서관하고 어울리는 낱말이지 싶다.


고요 (숲노래 씀)


신명나게 수다잔치 하다가

한 사람이 문득 말을 멈추니

모두 갑자기 입을 닫아

낯설면서 새삼스러운 고요


한 사람 두 사람 열 사람

푹 빠져든 이야기로 날아가며

어느덧 아무 몸짓도 소리도 없이

서로 다른 즐거움 흐르는 고요


고요한 수다판이 되니

개미가 책상 타고 기어가는 소리

나비가 팔랑거리며 내는 소리

아주아주 크게 들린다


고요한 책터가 되니

책이 되어 준 나무가 살던

저 먼 숲에서 찾아든 바람

눈으로 보고 살갗으로 느껴 2018.10.18.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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