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통 털기

부평역 계단. 동냥하느랴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아저씨를 본다. 종이잔 하나 내어놓고 손을 벌린다. 저러면, 저렇게 작은 종이잔이라면, 저곳에 천 원짜리 한 닢 넣기도 어렵겠네. 앞짐을 열고 쇠돈 담은 필름통을 꺼낸다. 뚜껑을 연다 동냥하는 아저씨가 내민 종이잔에 쇠돈을 그대로 쏟아붓는다. 촤르르르. 꽤 묵직하게 여러 통 모았으니 소리도 크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본다. 뭔가 돈이 쏟아지는 소리가 나니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조그마한 종이잔을 내밀고 시멘트 바닥에 엎드린 동냥꾼 아저씨를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종이잔에 10원 한 닢이나마 보태는 사람이 드물다. 나도 필름통에 가득 담긴 쇠돈을 모두 쏟아부은 다음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간다. 모쪼록 따순 밥 한 그릇이라도 자시길. 술은 조금만. 오른손이 왼손보다 갑절은 큰 동냥꾼 아저씨야. 무겁던 앞짐이 무척 가볍다. 2008..9.9.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려면

우리 스스로 책을 읽으려면, ‘똑같은 아파트’를 버리고 ‘다 다른 골목집’을 찾아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 스스로 책을 가까이하려면, ‘똑같은 자가용’을 버리고 ‘다 다른 자전거와 두 다리’를 찾아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 스스로 책을 사랑하자면, ‘똑같은 바깥밥’을 버리고 ‘다 다른 집밥’을 찾아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 스스로 책마다 담긴 고운 빛줄기를 가슴으로 껴안으려면 ‘똑같은 돈’을 버리고 ‘다 다른 눈물과 웃음’을 찾아야 한다고 느낀다. 2008.12.18.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주자, 주자, 주자

모든 땀과 슬기를 모두어 글 하나 써내어 나누듯, 나한테 있는 모두를 주자. 늘 주자. 날마다 주자. 자전거는 중학교 들어가는 처남한테 주자. 자전거 손질하는 연장도 주자. 나한테 연장이 더 있어야 하면, 새로 사지 뭐. 내가 새로 사서 처남한테 줄 수도 있지만, 손때가 묻은 자전거와 연장을 주자. 새것은 아직 나한테도 익숙하지 않아서 어찌어찌 쓰는지 잘 모르니, 애써 준다 한들 제대로 못 쓰일 수 있지만, 내 손을 탄 자전거와 연장은 어디를 어떻게 손질하면 되는 줄 아니까, 언제든지 매만지면서 잘 쓸 수 있지 않겠는가. 자전거 닦는 걸레도 한 장 마련해서 함께 주자. 2009.2.19.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버지가 쓴 글

우리 아버지가 조선일보에 글을 하나 쓰셨다. 국민학교 평교사를 지내다가 교장으로 일하는 아버지는 이해찬을 가장 싫어하는데, 다른 까닭도 있겠으나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느끼기에는 아버지가 교장으로 일하기 앞서 교장정년제를 펴고 교원정년을 굳혀 버려서 무엇보다도 가장 싫어한다는 느낌이다. 왜냐? 이녁 아들하고 마주앉아서 술잔을 들 적마다 바로 이 얘기만 몇 시간씩 끊임없이 하니까. 아버지, 교장으로 계시지 말고 평교사로 일하셔도 되지 않나요? 아버지, 교원정년을 두는 일이 그렇게 나쁜가요? 아버지, 연금 좀 적게 받아도 되지 않나요? 아버지, 몇 해쯤 일찍 교단을 떠나 아버지 마음으로 새롭게 꿈 하나를 키워서 살아도 되지 않나요? 2003.5.29.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쿨렁쿨렁

사전을 살피면 ‘쿨렁쿨렁’을 두 가지로만 풀이해 놓는다. 그러나 내가 어릴 적부터 듣고 보고 겪은 ‘쿨렁쿨렁’은 좀 다르다. 큰비가 퍼붓고 나서 마을이 온통 물에 잠겨서 무시무시하게 흐르는 물살이라든지, 큰비가 쏟아질 적에 냇물이 가득 넘치면서 흙물로 시뻘겋게 흐르는 물살에서 바로 이 ‘쿨렁쿨렁’을 느꼈다. 어릴 적에는 헤엄을 잘 못 쳤고 물이 무서웠다. 그래서 나한테는 오래도록 ‘쿨렁쿨렁 = 무섭고 출렁거리는 너울’이란 느낌이었다. 이러다가 헤엄질이라든지 물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새롭게 익힌 뒤에는 물살이 무섭지 않을 뿐더러 ‘쿨렁쿨렁’도 무서운 느낌인 낱말이 아니더라. 요새는 ‘쿨렁쿨렁 = 거침없이 잔뜩 일어나는 새로운 생각’으로 느낀다. 쓸거리가 쿨렁쿨렁 쏟아진다든지, 사전을 쓰고 엮으면서 새로운 낱말이 쿨렁쿨렁 밀려든다든지, 이런 느낌이다. 2019.3.27.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