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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와 글쓰기


 내가 대단히 좋아하는 만화책 가운데 《도자기》가 있다. 이 만화를 그린 이는 ‘호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데, 지난 2009년 봄에 몸이 무척 아팠는가 보다(아마 예전부터 몸이 나빴겠지). 호연 님이 몸이며 살림이며 너무 어려운 나머지 당신 블로그에서 어찌어찌 도움을 바라는 글을 남겼는데, 이 이야기를 두 군데 신문에서 기사로 내보냈는가 보다. 《미녀는 못 말려》 만화책을 보던 옆지기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그런 일이 있었나?’ 생각하며 인터넷에서 뒤적뒤적해 보니 〈한겨레〉 기사가 뜬다. 〈세계일보〉에도 같은 기사가 이틀 앞서 나왔다는 댓글은 읽었으나 〈세계일보〉 기사까지는 찾지 못했다. 줄거리는 〈한겨레〉하고 크게 다르지 않을 테지. 그런데, 이 기사를 놓고 여러 누리사랑방(블로그)이나 누리모임(카페)에서 뒷말이 많다. 나로서는 오늘 처음 알았지만, 호연 님 만화를 사랑하고 아끼는 분들이 남긴 뒷말인데, 호연 님은 당신 몸이 아파서 도움을 바라는 글을 올렸던 이야기를 자꾸 퍼뜨리지 말아 달라고 했단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덥석 기사로 띄운 셈이다. 이런 이야기를 띄운 〈세계일보〉도 그렇지만, 이렇게 기사가 된 이야기를 새삼 다시 기사로 띄운 〈한겨레〉는 무얼까? 이렇게나마 호연이라는 만화쟁이를 돕고자 했기 때문일까? 더없이 슬프고 안타깝다. 그리고, 이런 〈한겨레〉 기자들이라 한다면, 〈한겨레〉가 그토록 손가락질하는 〈조선일보〉 매무새하고 무엇이 다를까 궁금하다. 나는 〈한겨레〉 ㄱ기자가 참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한겨레〉 ㄱ기자가 나를 취재하겠다며 연락을 해 온다면 “호연이라는 만화쟁이를 아십니까?” 하고 넌지시 여쭌 다음에, “호연이라는 만화쟁이한테 미안하다고 지면을 빌어 공개사과를 한 적 있습니까?” 하고 조용히 여쭈고, “호연이라는 만화쟁이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부디 저를 취재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마무리말을 한 다음 내가 먼저 전화를 뚝 끊으려 한다. (4343.1.15.쇠.ㅎㄲㅅㄱ)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347436.html#opinion1

http://cafe.naver.com/swallowedbir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3159
 


 

2009년 4월에 있던 일을 이제서야 

알아서, 뒤늦게 가슴을 치면서 

뒷통수 치는 글을 끄적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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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란, 삶이란, 책읽기란, 글쓰기란
 ― 나는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 1 -

 전철을 타고 가면서 책을 읽습니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따로 하지 않았으나, 고등학교를 다니며 늘 새벽과 밤으로 사십 분에서 한 시간쯤 보내야 하는 버스길에 올라야 하다 보니, 이 시간에 책이라도 읽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창밖으로 펼쳐진 모습을 보고, 버스에 탄 다른 사람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 모습이나 사람 구경은 시들해졌고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버스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보았고, 흔들리고 덜컹거리는 가운데에도 아랑곳 않고 책에 빠진 모습에 저 스스로 부끄럽다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버스를 타며 무얼 했나 싶어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이때부터 버스에서나 전철에서나, 또 어쩌다 자가용을 얻어타게 되나 책을 펼쳤습니다. 버스에서 책을 펼치니 버스 기사 매무새가 가끔 달라지곤 했습니다. 새벽밤에는 으레 불을 꺼 놓고 다니셨는데, 고등학생 아이 하나가 책을 꺼내어 읽으니, 제가 서거나 앉은 자리 쪽에는 불을 켜 주곤 했으며, 책을 읽는 데에 덜 흔들리게 하려고 덜 거칠게 몰거나 퍽 부드러이 몰곤 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불켜짐과 돌돌돌 굴러가는 바퀴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입으로 고맙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했으나 언제나 마음속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무거운 가방은 한쪽 구석에 내려놓습니다. 등허리를 펴고 한손을 번갈아 등뼈를 주무릅니다. 몸이 조금 풀렸다 싶을 때 책을 꺼내어 펼칩니다. 선 채로 한참 읽는데 속에서 불끈불끈 무엇인가 솟아오릅니다. 1500년대를 살다 간 서양사람 하나가 적어 놓은 이야기 《노예 근성에 대하여》(무림사,1980)를 읽는데, 자그마치 오백 해를 지난 묵은 이야기임에도 2000년대 오늘날과 맞대어 헤아려도 거의 달라지거나 어긋난 대목이 없습니다. 이 느낌은 무엇이고 이 말은 무엇인가 하면서 갈비뼈가 뻑적지근해집니다. 가슴이 시립니다. 책 한 귀퉁이에 아무 말이라도 끄적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합니다. 책을 덮고 뒤쪽 빈자리에 또박또박 글을 적어내립니다.


 - 2 -

 글다운 글을 읽어 보지 못한 가슴은, 글다운 글 앞에서 가슴이 뭉클뭉클 움직이지 못합니다. 가슴이 움직여 본 적이 없으니, 그 뛰는 가슴으로 제 삶을 바로잡거나 일으켜세워 새로 태어나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 스스로 글을 쓰게 되어도 무엇이 글인 줄 모릅니다. 글이란 어떻게 쓰며, 누구한테 읽히는가, 글을 읽는 사람한테 어떤 씨앗이 뿌려져 그이 삶이 거듭나는가를 조금도 모릅니다. 알아보려고도 못합니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마음그릇에서 사랑이 샘솟기를 바라기 어렵습니다. 참사랑을 모르고 겉사랑만 아는 이들이 읊는 거짓사랑이 참사랑이라도 되는 줄 생각하는 사람한테도 우리들 참사랑을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참사랑인 줄 모를 뿐더러, 저희들한테 쓰레기를 준다고 여기면서 싫어하는데요.

 굳어진 삶을 말랑말랑 동글동글 손질하기란 어렵습니다. 어쩌면 손질할 수 없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일, 이루지 못할 듯한 일을 즐겨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달프고 외롭습니다. 다만, 몸은 고되고 외로워도, 마음은 가없이 가뿐하고 싱그럽다고 느낍니다. 저는 자유 민주 평화 평등 통일을 제 삶자락에 고이 담아낸다고 느끼니까요. 그리고, 이웃을 억지로 끌어당길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오로지 제 삶에 따라 서로 어깨동무할 뿐입니다. 저는 씨뿌리고 가꾸는 사람이지, 밥상을 차려 숟가락에 밥을 퍼서 떠먹이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비록 철부지 길을 걷는 사람들한테도 읽힐 글을 쓴다고 하여도, 떠먹이는 글이 아니라, 농사지어 갈무리하여 나눠 주는 글일 뿐입니다.

 저는 제 글에 오로지 셋을 담습니다. 사랑, 믿음, 나눔. 그리고 세 가지 길을 걷습니다. 땀방울, 다리품, 마음쓰기.

 읽어 주는 이가 많으면 좋습니까? 기쁩니까? 읽어 주는 이가 없거나 적으면 나쁩니까? 슬픕니까? 대꾸가 없으면 서운합니까? 대꾸가 많으면 흐뭇합니까? 글쓰기란 기다림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내 모든 삶을 실어서, 오늘 이 자리부터, 내가 글 한 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갈 뒷날까지, 나 스스로한테 보람있으면서, 내 마음 읽어 줄 사람을 꿈꾸고 바라는 기다림을 담는 일입니다.

 손목이 저리고 팔꿈치가 쑤셔도 볼펜 든 손을 놓지 못합니다.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이야기를 옮겨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옮겨적기를 끝마칠 때까지 저리고 쑤시고 아파도 참습니다. 글이 저절로 터져나올 때까지는 저 스스로 기다립니다. 먼저 책상 앞에 앉지 않습니다. 오래오래 길에 섭니다. 길을 거닐고 뛰고 자전거를 몹니다. 그런 시간을 길디길게, 아니, 이제 속으로 멈추라는 소리가 터져나올 때까지 견디고 버티며 땀을 쏟습니다. 그리고, 마음속 목소리를 들으면 모든 일을 그치고 볼펜을 듭니다. 밥도 잠도 사랑놀이도 그칩니다. 오직 한 가지, 마음속 터져나오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고 펼쳐 보이는 데에 바짝바짝 귀를 곤두세웁니다.

 제 손을 떠나면 제 글이 아니라고 하는데, 제 손으로 끄적여지는 모든 글은, 처음 쓰여질 때부터 제 글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살아가도록 이끌고 도운 온갖 사람들 넋이 담겨 있어서, 모든 넋이 다 함께 이룬 글입니다. 이리하여, 책은 ‘내 것’이며 ‘모두 것’입니다. 오늘과 어제와 앞날 언제나 찬찬히 이어가는 팔딱거리는 핏덩이입니다.


 - 3 -

 아침 일찍 깨어난 아기를 안고 방과 마루를 이리저리 오가면서 어르다가, 때가 되어 옆지기한테 맡기어 젖을 물리는데, 아기는 다시 잠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엎어지고 기고 물건 잡아당기고. 아빠 책과 사진기를 붙잡아 입에 넣어 빨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잠깐 혼자 놀라고 놓아 둡니다. 틈틈이 옆을 보고 뒤를 보며 아기가 기어가는 곳을 살핍니다.

 삶을 담아내지 않았다면 글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이런저런 글자가 낱말을 이루고 낱말이 글월을 이룬다 한들, 껍데기만 글일 뿐, 참글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겉글과 거짓글도 글이라고 우기면 글이라 이름붙일 수 있으나, 이와 같은 글은 글을 쓰는 우리 뜻을 넉넉히 나누지 못합니다. 혼자만 좋자고 쓰는 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혼자만 좋자고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부터 좋으면서 이웃이 함께 좋자고 쓰는 글입니다. 나 스스로 좋으면서 내 동무가 함께 좋자고 쓰는 글입니다.

 삶을 담아내지 않은 글이란 쓰이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삶이든 더러움에 찌든 삶이든, 글에는 그이 삶이 고스란히 배어들기 마련입니다. 겉멋과 겉치레로 살아가는 사람은 겉보기로는 놀랍거나 대단하게 느껴지는 글을 씁니다. 그리고 이러한 글은 머잖아 속알맹이가 들통이 납니다. 속멋과 속치레로 살아가는 사람은 겉보기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는 놀랍고 대단한 글을 쓰기 일쑤입니다. 우리들이 속멋과 속치레를 가꾸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글을 곧바로 알아채면서 품에 꼬옥 껴안습니다. 우리들이 속멋과 속치레를 안 하거나 등돌리거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글을 놓고 ‘이게 글이냐?’ 하면서 비웃거나 따돌리거나 내팽개칩니다.

 살아가는 대로 쓰는 글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쓰는 글입니다. 어울리는 대로 쓰는 글입니다. 품은 꿈대로 쓰는 글입니다. 나누려는 사랑대로 쓰는 글입니다. 함께하려는 믿음대로 쓰는 글입니다. 글 온 구석에서 빈틈이나 모자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면, 이이는 그만큼 제 삶을 알차고 빈틈없이 돌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글 어느 자리에서나 허술하거나 아쉬움이 느껴진다면, 이이는 그만큼 제 삶에 구멍을 내고 어수룩하게 보내면서 세상 흐름을 제대로 꿰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으로 쓰여지는 글이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쓰여지는 글입니다. 참다이 쓰여지는 글만 있습니다. 꾸밈없이 쓰여지는 글입니다. 슬기로움이 담기고 어리석음이 담기는 글입니다. 넉넉함이 담기고 모자람이 담기는 글입니다. 거룩함이 담기고 못남이 담기는 글입니다. 반가움이 담기고 짜증이 담기는 글입니다. 이리하여, 돈을 바라는 사람한테는 돈 냄새 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이름값 높이고픈 이한테는 이름티 내려는 글이 쓰여집니다. 힘으로 남을 억누르는 사람한테는 힘자랑 하는 글이 쓰여집니다.

 가난한 사람한테는 가난이 뚝뚝 묻어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말만 예쁘게 빚으려는 사람한테는 말만 예쁜 글이 쓰여집니다. 말이 무엇인지 종잡지 못하는 얼치기한테는 제 말 네 말 가누지 못하는 얼치기 글이 쓰여집니다. 미국을 섬기는 사람한테는 미국 섬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한테는 하느님 섬김이 알뜰히 묻어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과자를 즐겨먹는 사람한테는 과자맛 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똥오줌 거름으로 지은 누런쌀을 날마다 먹는 사람한테는 흙내 나는 글이 쓰여집니다.


 - 4 -

 쓰고 싶은 글대로 꾸리는 삶입니다. 말하고 싶은 이야기대로 가꾸는 삶입니다. 쓰고 싶은 글처럼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디는 삶입니다. 말하고 싶은 이야기처럼 한 사람 두 사람 만나는 삶입니다.

 글에는 거짓이 스며들 수 없기에, 글쓰기는 두려운 일이 되곤 합니다. 글에는 참만 깃들 수 있기에, 글쓰기는 함부로 하기 어려운 일이 되곤 합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듯, 바라는 대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내 밥그릇을 생각한다면 내 삶이며 내 아이 삶이며 내 둘레 사람들 삶이며 내 밥그릇 챙기기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하면서 바라보게 되고, 이러한 가운데 쓰는 글은 밥그릇 붙잡기에서 맴돌고 그칩니다. 모둠 밥그릇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밥자리와 밥나눔을 생각한다면, 내 글쓰기 테두리는 사뭇 달라지고 글에 담기는 넋과 얼 또한 크게 달라집니다.

 저한테는 책이 있고 사진기가 있으며 볼펜하고 수첩이 있습니다. 여기에 고운 옆지기와 술 한 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귀여운 아이까지. 이렇게 어우러진 우리가 깃들 방 한 칸 있어, 두 다리 뻗어 함께 자고 밥먹고 놀고 일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즐겁습니다. 이밖에 달리 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요. 자전거에 수레를 붙여 아이와 함께 마실 다니기? 이쯤? 그쯤? 아이가 볼볼 기어서 아빠 옆으로 옵니다. (4342.3.2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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