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우리시대의 인물이야기 8
김남일 지음, 김병하 그림 / 사계절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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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읽기 삶읽기 147

 


남북녘 하나되는 길은
―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김남일 글
 사계절 펴냄, 2002.10.29.

 


  소설을 쓰는 김남일 님이 쓴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사계절,2002)을 읽습니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쓴 위인전입니다. 어린이한테 읽히는 위인전이라면 지난날에는 이순신이라든지 강감찬, 또는 세종대왕이나 이율곡 같은 사람들 이야기였지만, 우리 사회가 차츰 발돋움하면서 문익화 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동화를 쓰던 권정생 님은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 이야기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게 살가이 써낸 적 있어요. 언제나 마음속에서 싱그러이 살아서 이야기꽃 베푸는 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고 할까요.


  김남일 님이 쓴 문익환 님 이야기는 ‘통일 할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남녘과 북녘으로 갈린 이 나라 이야기입니다. 남녘에서도 푸대접과 따돌림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진 이야기입니다. 참말, 학교나 회사나 군대에서 따돌림이 그치지 않아요. 돈있는 이가 돈없는 이를 괴롭혀요. 힘있거나 이름있는 이가 힘없거나 이름없는 이를 들볶아요.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님은 언제나 힘도 돈도 이름도 없는 이 자리에 서서 다 함께 어깨동무할 수 있는 나라를 바랐어요. 힘으로도 돈으로도 이름으로도 서로를 누르지 않기를 바랐어요.


.. 익환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어머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 문재린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집 안팎의 온갖 일이 고스란히 어머니 몫이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른들을 모시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 종일 혼자서 고된 밭일도 했습니다. 밤이면 식구들이 입을 옷을 짓기 위해서 다시 베틀에 앉아야 했습니다. 그러느라 지금도 어머니의 무릎에는 삼을 쪼갤 때 베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  (32쪽)


  남녘이 북녘을 손가락질한다면 서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북녘이 남녘을 해코지하면 서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녘은 남녘대로 북녘을 손가락질하거나 해코지합니다. 북녘은 북녘대로 남녘을 손가락질하거나 해코지해요. 이래서야 둘이 하나될 수 있을까요?


  동무 사이를 생각해요. 동무와 동무가 서로를 손가락질한다면 어깨동무를 못해요. 서로 아끼지 않는데 어찌 어깨동무하겠어요. 서로 아끼고 사랑할 때에 어깨동무를 해요. 서로 돕고 보살펴야 어깨동무를 합니다.


  이웃 사이를 헤아려요. 이웃과 이웃이 서로를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푸대접한다면 어찌 되나요. 이웃이라면서 이를 갈거나 눈을 부라리면 어찌 되나요. 이래서야 이웃사촌 될 수 있겠습니까.


  남북녘 하나되는 길은 아주 쉬워요.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해야지요. 서로서로 돌보고 보듬어야지요. 정치 우두머리가 만난대서 통일을 이루지 못해요. 정치 우두머리는 없어도 돼요. 재벌 우두머리 또한 없어도 돼요. 남북녘 이루는 여느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만나면 돼요. 이렇게 하면 남녘과 북녘은 사랑스레 한 나라 한 겨레가 될 수 있어요.


.. 문익환 얼굴은 그만 홍당무처럼 빨개지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잘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무조건 남의 생각이 틀리다고 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다음에야 발전이 있다. 다 안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늘 옳다고 생각하면 도대체 공부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 “얼음이 녹아야 봄이 오는 게 아닙니다. 봄이 와야 얼음이 녹는 것입니다. 통일도 바로 이런 자연의 이치와 다를 게 없습니다.” ..  (79, 185쪽)


  남북녘이 하나되지 못하는 까닭은 아주 쉬워요. 서로서로 아끼지 않기 때문이에요. 서로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런 잘못 저런 허물 따사로이 감싸야지요. 아이들을 떠올려 봐요. 아이들이 무엇 하나 잘못했대서 아이들을 두들겨패겠습니까. 아이들이 접시를 깨뜨렸대서 윽박지르겠습니까. 잘못은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앞으로 잘 하도록 북돋으면 돼요. 깨진 접시는 치우고 새 접시 마련하면 돼요. 싸운다 하더라도 싸운 뒤에 사이좋게 앙금을 풀어야지요.


  언제까지 남녘은 북녘을 손가락질하면서 해코지해야 하나요. 언제까지 북녘은 남녘을 손가락질하면서 해코지해야 하나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정치 우두머리와 끄나풀과 몇몇 기자와 지식인 들이 자꾸 쑤석이면서 서로 손가락질하거나 해코지하도록 부추기는지 몰라요. 여느 사람들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려는 마음인데, 정치 우두머리와 끄나풀과 몇몇 기자와 지식인 들만 남북이 하나되기를 안 바라면서 일을 틀어 버리려 하는지 몰라요.


  참말, 서로 하나되려 한다면 서로를 높여야 합니다. 잘 한다고 북돋우고, 사랑스럽다며 웃음으로 맞이해야지요. 저쪽더러 고개를 숙이고 이쪽으로 오라 하면 누가 오겠어요. 예부터 익은 벼가 고개를 숙여요.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남녘이나 북녘이나 서로 ‘익은 벼’라 한다면, 먼저 맞은편으로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려 해야 옳아요.


.. “내 말은, 내용이 아니라 성서가 옛날 말 그대로 적혀 있다는 말입니다. 너무 어려워요. 우리한테도 어려운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떻겠어요?” 사실이었습니다. 성서는 기독교가 처음 우리 나라에 들어올 때 선교사들이 번역한 것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나 쓰던 말들이 버젓이 씌어 있었지요. 그런 말들은 대개 한자말이 많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문익환은, 말과 글에는 반드시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 묻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말과 글을 바르게 쓰지 않고 일본어와 영어만 즐겨 쓴다면 나중에는 민족 정신도 흐릿해질 게 분명하다고 믿었습니다 ..  (105, 108쪽)


  문익환 님이 걸어온 발걸음은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삶빛이었으리라 생각해요. 높은 자리도 낮은 자리도 아닌 아름다운 자리를 찾으려 하셨지 싶어요. 거룩하거나 훌륭한 자리가 아닌 사랑스러운 자리를 찾으려 했다고 느껴요.


  그래서, 문익환 님은 ‘통일 할아버지’ 이기에 앞서 ‘예쁜 할배’요 ‘사랑 할배’로구나 싶어요. 예쁘게 노래하고 사랑스레 춤추면서 우리 삶을 아름답게 빛내고픈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분이라고 느껴요.


.. 문익환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철거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땀을 줄줄 흘리면서 산꼭대기까지 찾아갔습니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작업장에서 일하다가 수은 중독에 걸린 어린 노동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치 자기 손자가 그런 사고를 당하기라도 한 듯 펑펑 눈물을 흘렸습니다. 소값이 폭락하여 성난 농민들이 소를 몰고 시위를 하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소리 높여 싸웠습니다.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있으면 가족들을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  (164쪽)


  소설을 쓰는 김남일 님은 문익환 님 삶을 찬찬히 보여줍니다. 어릴 적 태어난 마을, 어릴 적 이녁을 돌본 어버이, 어릴 적부터 함께 얼크러지며 자란 동생,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며 만나거나 사귄 동무와 이웃, 기나긴 삶을 단출하게 갈무리해서 이 책 하나로 보여주는구나 싶어요.


  그런데, 좀 힘알이가 없습니다. 어딘가 고갱이가 안 드러나는구나 싶어요. 아름다운 삶을 아름답게 적바림하려고 애썼구나 싶지만, 문익환 님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살아오며 어떤 꿈을 펼치려 했는지, 차근차근 낱낱이 알뜰살뜰 풀어내지는 못했다고 느껴요. 한 사람 발자국을 좇으며 이런 일 저런 일 있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크고 작은 일들이 서로 어떻게 얽히고 이어져 한 갈래 아름다운 빛이 되었는가까지 밝히지는 못했다고 느껴요.


  1970년에 몸을 불사른 전태일 님 이야기를 듣고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며 삶길을 크게 바꾼 문익환 님 삶을, 노래하는 빛이 서린 성경을 읽고 밤하늘 별로 살아간 벗 윤동주를 그리는 마음으로 시를 쓰던 문익환 님 삶을, 발바닥을 아낄 줄 알 때에 이웃을 아낄 줄 아는구나 하고 감옥에서 깨달은 문익환 님 삶을, 너무 많은 이야기조각 엮으려 하다가, 외려 두루뭉술하게 얼거리가 흐트러졌다고도 느껴요.


  ‘간추려서 살을 조금 붙인 해적이’는 위인전이 되지 못합니다. 위인전도 동화책 한 권과 똑같이 오롯이 엮고 짠 문학책이 되어야 합니다. 4346.12.1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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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2-10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익환 목사님의 <목 메는 강산 가슴에 곱게 수놓으며>를
절실하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숲노래 2013-12-10 23:52   좋아요 0 | URL
네, 문익환 목사님 위인전이나 전기인데,
김남일 님쯤 된다면
제대로 깊고 넓게 다룰 만한데,
책을 읽는 내내 왜 이렇게 아쉬울까 하는 생각
지울 길 없었어요.

틀림없이 뜻있는 책이기는 하지만...
 
마티아스와 다람쥐 - 온누리 동화 28
한스 페터슨 지음, 김정회 옮김, 일론 비클란트 그림 / 온누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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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40

 


아이들아, 우리 즐겁게 놀자
― 마티아스와 다람쥐
 한스 페터슨 글
 일론 비클란트 그림
 김정희 옮김
 온누리 펴냄, 2007.2.7.

 


  아이들은 무엇을 갖고 놀까요. 우리 집 아이들을 바라보면 손바닥에 아무것 없어도 저희끼리 놀이를 지어냅니다. 내 어릴 적 돌아보면 손바닥에 햇볕 한 줌 드리우면 햇볕을 갖고 놀이를 지어요. 바람이 불면 바람을 갖고 놀이를 즐깁니다. 풀잎 하나로 놀이가 태어나고, 꽃송이 하나로 놀이가 샘솟아요. 장난감이 있을 적에는 장난감을 갖고 놀지만, 장난감 없이도 온갖 놀이를 새롭게 지어서 하루를 길고 재미나게 누립니다.


  아이들이 만화책 한 권을 천 번 이천 번 되읽습니다. 아마 만 번 다시 읽는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나 어릴 적에도 같은 만화책 하나로 새록새록 이야기를 누립니다.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그림을 느끼고, 다시 넘길 적마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빛을 만나요.


  어느 날은 밥을 먹다가 밥알을 낱낱이 센 적 있어요. 젓가락으로 밥알을 하나씩 집으면서 숫자를 세요. 밥알을 하나씩 집으며 숫자를 세다가 노란 씨눈이 있는 쌀알과 씨눈이 없는 쌀알을 헤아립니다. 씨눈이 있는 쌀알을 씨눈맛을 가만히 생각하며 천천히 씹고, 씨눈이 없는 쌀알은 온통 하얀 쌀알갱이는 어떤 맛인가 하고 찬찬히 생각하며 씹습니다.


.. 마티아스는 잔디가 나 있는 건너편 구석으로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 풀밭은 코딱지만 해서 거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티아스는 그 풀밭에다 ‘마티아스의 정원’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원이라고 해 봤자 돌틈 사이로 막 솟아나기 시작한 풀 세 포기가 전부였습니다 … 마티아스는 엄마에게 주려고 꽃을 꺾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관리인 아저씨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아저씨가 마티아스의 정원에 난 풀을 잡초라며 마구 뽑아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  (14, 15쪽)


  고무줄을 넘거나 줄넘기를 넘어도 놀이예요. 잔돌로 공기놀이를 해도 놀이이지만, 주머니에 조약돌 몇 넣고 조물딱거려도 놀이입니다. 조약돌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손바닥으로 퇘 뱉고, 내 침을 내 옷으로 슥슥 문지른 뒤 침내음 맡아도 놀이예요. 볕 좋은 구석에 앉아 햇볕을 받으며 돌을 가만히 들여다보아도 놀이가 돼요. 내 손에 있는 이 작은 돌이지만, 이 작은 돌을 지구별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 작은 돌인 지구별 어디쯤 내가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누군가 내가 발을 디딘 이 지구별을 이 작은 돌멩이처럼 손바닥에 올려놓고 놀이를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미끄럼을 위에서 주룩 미끄러져 타고 내려와도 놀이이지만, 거꾸로 밟고 올라가도 놀이예요. 어른들은 미끄럼틀 무너지랴 걱정하지만, 아이들은 뒤에서 달려 미끄럼틀 미끄러운 발판을 쿵쾅거리면서 거꾸로 달려 올라가는 놀이를 합니다. 거의 다 올라갔다가 미처 마지막 한 발 못 올려 주루룩 미끄러지기도 하고, 손잡이를 하나씩 잡고 엉금엉금 올라가며 놀기도 해요.


  그네에 앉아 설렁설렁 놀기도 하지만, 그네를 굴러 휙 날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네 발판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빙글빙글 돌아요. 등을 대고 드러누워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그네줄을 잡고 줄타기를 하듯 올라가기도 해요.


  그네줄 잡고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평균대 밟듯 밟으며 건너편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어느 집 어머님이 보셨다면 아마 깜짝 놀랄는지 몰라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서 놀이터 모래밭에 쿵 하고 떨어지거나 말거나, 참말 이렇게 터무니없다면 터무니없는 놀이를 하면서 자랐습니다.


.. 마티아스는 새가 자기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동물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동물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마티아스는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습니다 … 이제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까지 떠올랐기 때문에 오후가 되면 잠깐이지만 풀포기도 햇볕을 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마티아스도 햇볕을 쪼이며 정원을 살폈습니다 … 하루는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왔습니다. 마치 마술을 보는 듯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날아왔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  (17, 25, 26쪽)


  한참 놀다가 까마중을 따먹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에는 까마중이 언제 열리는 지 잘 몰랐어요. 그리고, 어느 풀이 까마중풀인 줄 몰랐고, 까마중꽃은 아예 생각조차 않습니다. 누군가 “야, 여기 까마중 있다!”고 하면 비로소 거기에 그게 까마중이네 하고 생각하며 질세라 이길세라 까만 알 훑어 입에 털어넣기에 바쁩니다.


  바알간 꿀꽃을 톡톡 따서 먹을 적에도 그래요. 나 한 송이 너 한 송이 먹을 때도 더러 있지만, 으레 서로서로 달라붙어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아옹다옹 합니다.


  봄에 단풍꽃 지고 단풍씨 맺을 적에는 단풍나무 밑에 바글바글 모여요. 저마다 키가 닿는 데까지 껑충껑충 뛰어 단풍나무 가지를 붙잡습니다. 단풍씨앗 모으려고 용을 써요. 단풍씨앗은 하늘로 휘 던지면 빙글빙글 돌며 천천히 내려옵니다. 10분 쉬는 말미 끝나는 종 치는 줄 모르는 채 단풍씨앗 던지며 놀아요. 나중에는 단풍씨앗 모양을 흉내낸 종이 장난감을 만들어 던지기도 합니다. 높은 데에서 단풍씨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교실 4층 창문에서 살며시 내려놓기도 해요.


  내가 어릴 적 놀던 모습이든, 우리 집 아이들 요즈막에 시골집에서 노는 모습이든, 참말 스스로 놀이를 짓습니다. 동무들이 서로 새로운 놀이를 지어 함께 즐기기도 하고, 혼자서 해바라기하면서, 또는 혼자서 집을 보면서, 또는 심부름을 하느라 가게나 이웃집 다녀오는 길에 갖가지 생각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놀이나라에 흠뻑 젖어듭니다.


.. 마티아스는 동전을 바라보았습니다. 마티아스는 여느 때 같으면 그 동전을 집으로 가져가 저금통에 넣었을 것입니다. 자전거를 사려고 저금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시장을 헤매며, 어쩌면 한 주일 내내 헤매야 한다면 마티아스는 곧 굶어죽을 것이고, 그러면 자전거 따위는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돈으로 먹을 것을, 그러니까 작은 빵이라도 사 먹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 마티아스는 아주 천천히 찻길을 건넜습니ㅏㄷ. 마티아스는 한참 동안 전차의 선로 사이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경찰처럼 차에 치이지 않고 길 한복판에서 서 있을 때는 손바닥에 땀이 났습니다. 평소 같으면 마티아스는 전후좌우를 여러 번 살폈을 것입니다. 마티아스는 자동차나 오토바이 그리고 다른 끔찍한 것에 치이지 않으려고 쏜살같이 차도를 건넜습니다 ..  (63, 108∼109쪽)


  한스 페터슨 님이 쓰고 일론 비클란트 님이 그림을 붙인 《마티아스와 다람쥐》(온누리,2007)를 읽습니다. 스웨덴 도시 한복판에서 동무나 형제 없이 조용하면서 쓸쓸히 지내는 아이 ‘마티아스’는 날마다 심심합니다. 그러나, 심심한 하루를 그저 심심하게만 보내지 않습니다. 스스로 놀이를 지어요. 풀 세 포기 난 연립주택 손바닥만 한 마당을 ‘뜰’이라고 이름을 붙이며 풀놀이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놀이를 생각합니다. 이러던 어느 날 마음 착한 이웃 형을 만나 다람쥐하고 사이좋게 하루를 누리기도 합니다.


.. “그래, 잠깐 동안이야. 어쨌든 슐로스파르크 공원에 가서 짐짐이가 풀과 공원에 있는 모든 것에 익숙해지도록 연습시켜 주자. 이제부터 너는 네 자신보다는 짐짐이를 더 생각해야 해.” … “내가 50까지 두 번 셀 동안이면 짐짐이는 몇 킬로미터나 가 버릴걸.” 마티아스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멀리 달아난다면 짐짐이는 틀림없이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거야.” 마르틴이 말했습니다 ..  (91, 153쪽)


  집 둘레에 함께 놀 동무가 없거나 집에 같이 어울릴 형제가 없이 지내야 한다면, 게다가 도시 한복판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 무시무시한 물결에 시달려야 한다면, 무얼 하며 놀 만할까요. 오늘날 이 나라 도시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하며 놀 만한가요.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지어낼 수 있을까요. 느긋하게 해바라기를 하다가 손가락 꼼지락거리며 놀 겨를이 있을까요. 하루 10분이나 1분조차 빈둥거릴 틈이 있나요. 빈둥거리면서 달력에 그림을 그릴 새가, 빈둥거리다가 바둑알 만지작거릴 새가, 참말 얼마나 있으려나요.


  놀이방에 가야 놀이가 되지 않아요. 놀이공원에 가야 놀이가 즐겁지 않아요. 놀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있어야 하지 않고, 놀이도감을 펼쳐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스스로 놀아야지요. 스스로 놀 때에 놀이요, 스스로 노는 아이가 아이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른은 스스로 일하는 사람이에요.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을 하는 어른이 아닙니다. 스스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하루를 밝히면서, 스스로 가장 신나게 웃고 노래할 수 있는 일을 할 때에 참다운 어른이 되어요.


.. 소녀는 천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곳에는 장 속에 갇힌 원숭이 두 마리가 불쌍한 모습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원숭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천을 다시 내려뜨리고 다른 커다란 장의 뚜껑을 젖혔습니다. 그 안에는 작은 곰이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원숭이와 곰을 보니 마티아스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갇혀 있는 게 끔찍해 보였습니다. 마티아스는 결코 짐짐이를 이곳에 남겨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  (144쪽)


  함께 놀아요. 어른과 아이가 손을 맞잡고 놀아요. 어른과 어른 모두 어깨동무를 하면서 놀아요. 서로한테 굴레를 씌우지 말고, 스스로 짐을 짊어지지 말고, 이런 규칙이나 저런 조건은 걸지 말고, 스스럼없이 놀아요.


  놀면서 이웃을 생각하고, 놀면서 지구를 헤아리며, 놀면서 사랑을 보살펴요. 놀면서 꿈을 꾸고, 놀면서 노래를 부르다가는, 놀면서 삶을 지어요. 4346.1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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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의 325번째 말썽 - 개구쟁이 에밀 이야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비에른 베리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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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39

 


놀고 뛰니 좋아라
― 에밀의 325번째 말썽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
 비에른 베리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펴냄, 2003.1.25.

 


  아침에 꽁치를 굽습니다. 얼마만에 집에서 물고기를 굽나 헤아려 봅니다. 여러 달 된 듯합니다. 먼저 스텐팬을 여린 불로 한참 달굽니다. 국 끓이는 냄비에 함께 불을 넣습니다. 국냄비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을 무렵 비로소 꽁치를 물로 헹구고 행주로 물기를 훔친 뒤에 반 토막으로 잘라서 얹습니다. 스탠팬 뚜껑을 덮습니다.


  여섯 살 아이가 “물고기는 어디에서 살아?” 하고 묻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살지.” “물고기에도 뼈가 있어?” “산 목숨은 모두 뼈가 있어.” “물고기도 눈 있어?” “물고기도 눈이 있지.” 함께 밥상맡에 앉은 세 살 아이가 누나 말을 하나하나 따라합니다. “물고기는 어디에서 살아?”부터 “물고기도 눈이 있어?”까지 똑같이 묻습니다. 나는 작은아이한테 똑같은 말로 이야기를 건넵니다.


  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해 내어 이것저것 놀이를 즐기곤 합니다. 나무막대기 하나가 놀잇감 되고, 호미가 좋은 장난감 됩니다. 이 아이들은 나무막대기와 호미로 노는 삶을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어른들 일하는 모습을 보고서 따라할까요. 오랜 옛날부터 몸에 배어 이어온 놀이일까요.


  아이들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노라면, 나도 어릴 적에 저렇게 놀았지 하고 떠오릅니다.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하는 아주 어린 나날 이렇게 놀았을까 하고 돌이키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어머니 아버지 어릴 적 놀던 모습이 우리 아이들 어린 나날 노는 모습이 될 테지요. 이 아이들 어릴 적 노는 모습은 앞으로 한 해 두 해 흘러 새 아이들 태어날 적에 고스란히 이어갈 테고요.

 


.. 엄마는 에밀이 말썽꾸러기라느니 사고뭉치라느니 하는 얘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거든요. 물론 엄마도 말썽꾸러기 에밀 때문에 골치가 지끈거리긴 했지만, 리나 누나까지 이러쿵저러쿵 흉을 볼 건 없잖아요 ..  (8쪽)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글을 쓰고 비에른 베리 님이 그림을 넣은 《에밀의 325번째 말썽》(논장,2003)이라는 책을 읽으며 빙그레 웃습니다. 이 이야기책에 나오는 장난꾸러기 또는 말썽꾸러기 에밀은, 바로 에밀네 어머니 모습이요 아버지 모습입니다. 에밀네 어머니와 아버지도 어릴 적에 에밀 못지않게, 또는 에밀보다 더 짓궂게, 또는 에밀보다 살짝 덜 짓궂게 놀았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니, 에밀네 누나가 에밀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할 적에 썩 듣고 싶지 않을 만해요. 에밀네 누나도 에밀만 한 아이였을 적에 똑같이 말썽꾸러기에 장난꾸러기였을 테고요.


.. 에밀과 이다는 땔나무를 넣어 두는 궤짝 위에 앉아 눈을 반짝이며 구경하고 있었어요. 아빠가 파리를 쫓아다니는 모습은 무지무지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답니다 ..  (13쪽)

 

 


  즐겁게 뛰놀던 이야기는 오래도록 몸에 남습니다. 신나게 뛰놀던 하루는 두고두고 마음에 깃듭니다. 즐겁게 뛰놀지 못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놀 줄 몰라요. 신나게 뛰놀지 않은 아이는 어른이 된 뒤에 다른 어른들과 어깨동무하는 기쁨을 좀처럼 누리지 못해요.


  모르는 일을 모르지요. 혼자서 놀든 형제랑 놀든 동무랑 놀든, 즐겁게 놀던 어린 삶이 있을 때에 즐겁게 일하는 어른으로 씩씩하게 살아요. 신나게 놀던 어린 나날있을 적에 신나게 일하며 어깨동무하는 어른으로 야무지게 삽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아이들은 어른들 말을 차곡차곡 물려받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넋을 하나둘 이어받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삶을 고이 내려받습니다. 어른들이 맑고 착하게 말할 적에 아이들도 맑고 착하게 말해요. 어른들이 참답고 아름답게 일할 적에 아이들도 참답고 아름답게 놀아요. 어른들이 슬기롭고 올바르게 삶을 일굴 적에 아이들도 슬기로운 눈빛 밝히며 올바른 마음 다스려요.


.. 에밀은 조각칼 다루는 솜씨가 무척 뛰어났어요. 에밀은 나무 깎기가 특기였답니다. 말썽을 부려서 목공실에 갇힐 때마다 나무 인형을 깎았으니까요. 목공실 선반 위에는 지금까지 에밀이 깎은 나무 인형 324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답니다 ..  (24쪽)


  에밀은 앞으로 조각꾼이 될까요? 어쩌면 그럴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자면 누구나 조각꾼이에요. 누구나 목수요 누구나 대장장이입니다. 스스로 집을 짓고 스스로 흙을 일구어요. 스스로 씨앗을 갈무리하고 스스로 열매를 땁니다.


  에밀은 개구진 장난꾸러기입니다만 재미나게 놀 줄 알아요. 에밀은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입니다만 아름답게 꿈꿀 줄 알아요.


  아이한테 무엇을 바라나요. 아이가 고작 대여섯 살밖에 안 되었는데, 영어노래 줄줄 외기를 바라나요. 아이가 기껏 초등학교 다니는데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을 몽땅 100점 받기를 바라나요. 아이가 한껏 푸르게 빛나는 열대여섯 열예닐곱 고운 나이인데 시멘트교실에 새벽부터 밤까지 갇힌 채 입시지옥에서 허덕이기를 바라나요.


  어른으로서 아이한테 무엇을 물려주고 싶은가요.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어떤 사랑과 꿈을 보여주고 싶은가요. 우리는 어른과 아이로서 이 땅에서 어떤 삶 가꾸고 돌볼 때에 즐거운 하루가 될까요. 4346.11.2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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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1-2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은 어른들 말을 차곡차곡 물려받습니다. "
- 이 말이 사실 제일 겁나지요.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겠지요.^^

뛰노는 아이들이 성격도 좋고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 적다고 합니다.
놀지 못하게 하고 공부만 시키려는 학부모들이 이런 사실을 명심했으면 좋겠어요...

숲노래 2013-11-26 04:21   좋아요 0 | URL
누구나 이런 대목 잘 헤아리면
이 나라에는 오로지 평화와 사랑만 있을 텐데,
막상... 이런 대목을 헤아리지 못하도록 스스로 옭아매는 분들이
너무 많은 듯싶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 창비청소년문고 6
이운진 지음 / 창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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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7

 


아름다운 빛은 어디에 있는가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
 이운진 글
 창비 펴냄, 2012.7.13.

 


  해가 뜨니 해가 집니다. 달이 뜨니 달이 집니다. 여름이 지나가며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가며 겨울이 찾아옵니다. 겨울 문턱에서 가을밤 빛깔을 누립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가을빛은 올해로 끝이고 겨울빛 흐드러지겠군요. 같은 전라남도라도 지리산 둘레에는 몹시 춥고 눈발 날릴 테지요. 우리 어버이 살아가는 충청북도 음성에는 얼음이 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는 물이 얼까 근심하며 새해 새봄까지 물을 졸졸 틀어야겠지요. 우리 고흥집에서는 지난해 겨울도 그러께 겨울도 물을 틀지 않고 보냈습니다. 올겨울도 물을 안 틀고 보낼 수 있으리라 여겨요. 그만큼 따숩고, 그만큼 눈 구경이 어렵습니다.


  겨울이 포근하기에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겨울빛이 있습니다. 늦가을에도 새로 싹이 틀 뿐 아니라, 꽃이 피며 씨앗을 맺습니다. 봄에 피는 꽃이 가을에도 피고, 때로는 겨울까지 씩씩하게 나곤 합니다. 한겨울에 나는 유채풀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잎을 톡톡 끊어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면 알싸하면서 상큼합니다. 시원하면서 싱그러워요. 겨울이 채 물러나지 않은 일월이나 이월 무렵에 유채풀이 돋곤 해요. 이때에도 논둑이나 밭둑을 잘 살피며 유채풀을 뜯습니다. 포근한 남녘땅에서 누리는 겨울맛이자 겨울빛이요 겨울숨입니다.


..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공부인데도 참고서도 없고 스승도 없는 과목이라면 어떻게 배워야 할까? 누가 가르치고 누구에게 질문하고 어떤 방법으로 익혀야 할까 … 좋은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은 내게 이야기를 해 ..  (34, 45쪽)


  아기는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어른은 자라서 주름살이 늡니다. 아이가 자라듯 어른도 자라고, 어른이 자라듯 아이도 무럭무럭 자랍니다. 몸이 자라는 동안 마음이 함께 자랍니다. 마음이 자라면서 몸이 새롭게 자랍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 몸이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몸이 무거워지더라도 몸 또한 차근차근 자라요. 왜냐하면 모든 목숨은 살아서 움직이는 동안 피가 돌거든요. 피가 돌면서 따스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요. 따스한 기운이 있어 살아갈 수 있고, 이 기운을 바탕으로 따스한 생각을 길어올립니다.


  다섯 살 어린이가 호미질을 합니다. 쉰 살 아지매가 호미질을 합니다. 여덟 살 아이가 낫을 손에 쥡니다. 여든 살 할배가 석석 낫을 갈아 벼를 베고 풀을 벱니다. 어릴 적부터 손에 익은 대로 차츰차츰 손놀림 야무집니다. 어린 날부터 둘레에서 지켜본 대로 차근차근 몸놀림 다부집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자란 아이는 하늘바람을 마십니다. 바다를 마주하며 자란 아이는 바다노래를 부릅니다. 들에서 뛰놀며 자란 아이는 들빛으로 환합니다. 멧골에서 숲과 함께 자란 아이는 숲내음 이야기를 꽃피웁니다.


  아름다운 빛은 어디에 있는가요. 아름다운 빛을 찾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요. 아름다운 빛은 어디에서 비롯해 어디로 드리우는가요. 아름다운 빛을 쬐는 사람들 마음밭에서는 무엇이 자라는가요. 햇볕은 국경선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빛 또한 국경선을 가리지 않습니다. 별빛은 계급이나 학력을 묻지 않고, 아름다운 빛 또한 계급이나 학력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 ‘자존심’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 자존심이라면, 스스로의 가치를 만드는 방법이 중요한 것 같아 … 나무와 식물을 잘 알고 싶으면 사람을 사귀듯이 자주 만나야 하나 봐. 만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나무를 안아 보라고 하는 식물학자도 있더구나 ..  (80, 96쪽)


  이운진 님이 푸름이한테 들려줄 이야기로 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창비,2012)를 읽습니다. 오늘날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아야 하는 가녀린 푸름이한테 푸른 사랑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읽습니다. 대학입시를 이기더라도 몹시 고단한 톱니바퀴가 기다릴 뿐인 도시 아이들한테 푸른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넋을 헤아립니다.


  그런데, 이운진 님은 “여자애들은 원래 예쁜 문구나 화장품이 있는 가게를 무척 좋아하잖아. 그곳에서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하고. 그땐 아주 행복하고 즐겁잖아. 학교에서 어떤 힘든 일이 있었어도 그 순간엔 모두 잊힐 정도로 말이야(21쪽).” 같은 이야기를 곳곳에 씁니다. 곰곰이 살피면, 이 말은 틀리지 않다 할 테지만, 가시내만 예쁜 장난감이나 노리개나 문방구를 좋아하지 않아요. 머스마도 예쁜 장난감이나 노리개나 문방구를 좋아합니다. 때로는 예쁜 것에 눈이 사로잡히지 않아요. 겉이 아닌 속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숨결 찾으려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운진 님으로서는 ‘푸름이라면 으레 이렇겠지!’ 하고 못을 박는 듯한 이야기는 할 까닭이 없어요. 이운진 님이 보낸 푸른 나날 돌아보면서 이운진 님은 지난날에 어떻게 살았다 하는 이야기만 들려주면 됩니다. 마치 모든 푸름이들 삶을 다 안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눈길과 목소리가 된다면, 푸름이와 어깨동무하기는 어려워요.


..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감각의 풍요로움을 잃어버렸다고 나는 생각해. 자연의 시간을 좇아서 밝음과 어둠의 순환을 따라가며 살아야 하는데, 대낮처럼 밝혀 놓은 도시의 불빛과 한밤중에도 눈길을 붙잡는 텔레비전의 온갖 채널은 오직 시각적인 감각에만 우리를 집중시키잖아 … 내가 서울에 와서 보고 놀란 것 중의 하나가 고층 빌딩이나 지하철, 늘 북적대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무라면 이상하게 들리니? 고향의 나무들은 아무렇게나 구부러지고 휘어도 나무의 역할을 다하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도시의 가로수들은 곧고 우뚝하지만 어딘가 슬퍼 보였어 .. (108∼109, 117쪽)


  텔레비전은 틀림없이 아이와 어른 삶을 망가뜨립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텔레비전을 없애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방송사에서 일하며 온갖 자질구레하거나 얄궂은 이야기를 흘려보냅니다. 어른들은 방송 풀그림을 다시 신문글이나 잡지글로 다루고, 인터넷에서도 이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푸름이한테 텔레비전이 왜 나쁜가를 이야기하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텔레비전을 만들어 돈을 버는 엄청난 어른들 쳇바퀴와 톱니바퀴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어른들부터 집안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고 누리는 삶을 찾을 노릇이요, 이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에서도 텔레비전 없이 이운진 님이 즐기고 누리는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면 됩니다.


  나무 이야기에서 덧붙인다면, 도시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나무는 곧게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시골 흙지기들이 나무를 휘어 놓습니다. 열매 따기 수월하도록 나무를 휘어 놓고, 가지만 뻗지 않고 열매만 주렁주렁 매달도록 나뭇가지를 붙들어 놓아요.


  도시에서 자동차 배기가스에 시달리는 나무도 가엾고, 시골에서 더 많은 열매를 내놓으려고 들볶이는 나무도 불쌍합니다. 나무를 괴롭히는 도시사람도 딱하며, 나무를 닦달하는 시골사람도 안쓰럽습니다.


.. 그런 간절한 마음에서 영화를 찍은 감독이 있어서 시를 읽기 전에 잠깐 소개할게. 황윤 감독의 〈어느 날 그 길에서〉라는 영화야. 로드킬 당하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찍은 독립영화지. 감독은 길 위에서 죽어 가는 수많은 동물들의 실상을 조사해 사람들에게 로드킬의 비윤리적 죽음과 심각성을 말하고 싶었대 ..  (227쪽)


  황윤 감독님은 독립영화를 찍다가 사랑스러운 짝을 만나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고는 새 영화를 찍으려고 부산합니다. 아이를 낳기 앞서 〈어느 날 그 길에서〉를 찍었어요. 이 영화는 이운진 님 소개글처럼 ‘길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는 짐승’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길죽음’만 말하지 않아요. 길에서 사람도 얼마나 자동차 때문에 고달픈지 함께 보여줍니다. 이 나라는 들짐승뿐 아니라 여느 사람도 자동차에 치여 엄청나게 죽거나 다쳐요. 게다가 새 고속도로를 놓는다며 시골마을 짓밟고 푸른 숲과 들과 멧골을 무너뜨립니다.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돈바라기로 치닫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며 스스로 삶을 어지럽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길죽음’ 하나로 그치는 영화는 아니에요.


  푸름이들 살아갈 나날은 어느 한 가지 빛만 생각할 수 없어요. 즐거운 일자리 찾는 길이 하나 있을 테고, 아름다운 사랑을 찾는 길이 하나 있을 테며, 착하며 참다운 넋 북돋우는 길이 하나 있어요. 고운 꿈 품에 안는 길이 하나 있어요. 맑은 눈빛 밝히는 길이 하나 있어요.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고, 벗님과 두레를 하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수많은 길에 서면서 수많은 빛을 만납니다. 수많은 빛을 마주하면서 마음속에서 무지개빛으로 눈부신 새 이야기 빚습니다.


  이운진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푸름이한테 숱한 삶빛 가운데 하나 되리라 생각해요. 아이들을 아끼는 손길 가운데 하나요, 아이들을 믿고 보살피는 손빛 가운데 하나이리라 믿습니다. 4346.11.2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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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보이지 않아 카르페디엠 34
수잔 크렐러 지음, 함미라 옮김 / 양철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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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6

 


맞고 자란 사람이 때린다
― 코끼리는 보이지 않아
 수잔 크렐러 글
 함미라 옮김
 양철북 펴냄, 2013.10.31.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꽃내음을 맡습니다. 꽃내음을 맡는 사람은 온몸에 꽃내음이 살살 감돌며 꽃빛이 환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늘숨을 마십니다. 하늘숨을 마시는 사람은 온몸에 하늘내음이 골고루 스미며 하늘빛이 곱습니다.


  풀밥을 먹는 사람은 풀숨을 맞아들입니다. 풀마다 싱그럽게 푸른 빛깔과 무늬와 냄새를 골고루 받아들입니다. 풀밥은 풀내음이고 풀빛입니다. 풀밥은 풀노래이고 풀물입니다. 몸과 마음 모두 푸르게 빛나면서 푸른 이야기가 솟습니다.


  바라보는 대로 눈빛이 달라집니다. 바라보는 자리마다 눈매가 바뀝니다. 맑은 빛을 바라볼 적에는 맑은 빛이 눈을 거쳐 마음속과 몸속으로 젖어듭니다. 밝은 빛을 바라볼 때에는 밝은 빛이 눈가를 스쳐 살갗과 뼈마디로 속속들이 파고듭니다.


  싱그러운 물을 마시면 내 몸에는 싱그러운 피가 흐릅니다. 멧골물을 마시면 멧골에서 솟아 흐르는 기운이 내 몸에 흐릅니다. 시냇물을 마시면 시냇물 되어 흐르던 물줄기에 깃든 숨결이 내 숨결로 이어집니다.


.. 여자아이는 화들짝 놀라 다시 스웨터를 내렸다. 그렇게 손동작 한 번으로 배에 난 자줏빛이 감도는 갈색, 그리고 노랗게 변한 커다란 멍 자국을 가렸다 … “마샤 언니!” 나도 똑같이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 “왜?” 그러자 율리아가 큰 소리로 말했다. “막스는 내가 잘 돌봐 줄게!” … 한여름인데도 긴팔을 입은 율리아는 가느다란 두 팔로 길길이 뛰는 동생을 꽉 붙잡았다. 그러면서도 율리아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어른처럼 진지했다 … 내가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아주머니와 함께 문 앞에 서서 마치 자신이 바렌부르크를 통틀어 가장 다정하고 아이들을 잘 돌봐 주는 아빠인 것처럼 행동하는 브란트너 아저씨에게서 느낀 어마어마한 분노였다 ..  (20, 34, 57, 111쪽)
쪽)


  맹자 어머님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고 좋은 보금자리를 찾기 마련입니다. 공자 어머님도 맹자 어머님과 똑같았을 테지요. 한석봉 어머님이라고 다를 까닭 없어요. 어느 어머니라 하더라도 아이들이 슬기롭고 맑으며 착하게 살아가는 숨결 받아먹을 수 있는 곳에 보금자리를 이루려 마음을 기울이기 마련입니다.


  갓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좋거나 나쁘거나 가리지 않아요. 옳거나 그르거나 바르거나 비틀리거나 따지지 않아요. 모두 받아들여요. 모두 바라보고 모두 가슴으로 안아요. 어머니로서는 아이들이 아무것이나 바라보지 않도록, 어머니로서는 아이들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좋은 것을 마주하도록 마음을 쓸밖에 없습니다.


  아이들한테는 꽃을 보여줍니다. 칼이나 총 아닌 호미를 쥐어 줍니다. 아이들이 흙을 만지면서 놀도록 이끕니다. 앞으로 흙을 돌보며 살찌울 길을 걸어가며 착하게 새 삶 일구기를 바라니까요. 칼이나 총을 거머쥐어 돈이나 힘자랑 하기를 바라는 어버이가 있을까요. 이웃을 밟고 올라서면서 거들먹거리기를 바라는 어버이가 있을까요.


  어느 어버이라 하더라도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어버이가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지 않고 돈을 물려준다면 말썽이 생깁니다. 사랑에 앞서 돈부터 물려주면 뒤틀립니다. 사랑 없이 돈만 만지는 아이가 어떻게 될까요. 사랑 없이 힘자랑 겉멋에 끄달리는 아이가 어찌 되나요.


  착하게 어깨동무하는 길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지 못한 아이는 이웃을 아끼는 눈길이나 손길이나 마음길이 없습니다. 착하게 품앗이와 두레를 하는 삶을 누리지 않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과 꿈을 가르치지도 보여주지도 베풀지도 못합니다.


  어버이는 돈이나 아파트나 자가용 따위는 물려주지 않아도 돼요. 이런 것들은 아이들 스스로 얼마든지 마련하거나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어버이와 아이는 서로 아끼고 기대며 보살필 줄 아는 고운 사랑과 착한 꿈과 맑은 빛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는 현장에 우연히 있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그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때린다고요.” “마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나 본데,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우리한테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알고 하는 소리니?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닌다면 어떨 것 같니?” “할머니, 배에 멍이 들었다고요!” … 아무도 자동차 대리점 주인이 자기 아이들을 얼마나 때리는지, 또 그 집 아이들이 자기들 몸에 난 상처를 머리카락으로, 긴팔 셔츠로 감추느라 하루 종일 바쁘다는 사실에 관해선 그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  (23, 41∼42, 75쪽)


  맞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면 ‘맞고 자라는 아이’를 키웁니다. 거친 말 듣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면 ‘거친 말 듣고 자라는 아이’를 키웁니다. 입시지옥에서 살아남는 길 걸어간 아이가 어른이 되면 똑같이 ‘입시지옥에서 살아남는 길 찾는 아이’를 키웁니다. 그야말로 배운 대로 물려줍니다.


  어른들은 좀처럼 사슬을 못 끊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는 좀처럼 쳇바퀴에서 못 벗어납니다. 어른이라는 자리에 서면 좀처럼 생각이나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사슬을 끊는 사람은 으레 아이들입니다. 쳇바퀴를 부수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되찾는 사람은 어김없이 아이들입니다. 생각이나 마음을 활짝 열어 모든 숨결과 손을 맞잡는 사람은 늘 아이들입니다.


  길이 들면 삶이 사라집니다. 삶은 길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다 다른 삶인데, 삶은 길이 들 수 없어요. 날마다 똑같은 때에 일어나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길을 가서 똑같은 일터에서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똑같이 걷는 길은 없습니다. 시계로 보아서는 똑같다 하더라도, 날과 달과 해와 철이 모두 달라요. 여름과 겨울에 골목빛이 달라요. 봄과 가을에 하늘빛이 달라요.


  옷차림만 다르지 않습니다. 흐르는 바람이 달라요. 뜨고 지는 햇살이 달라요. 내리는 비와 눈이 달라요. 우리는 늘 언제나 다른 삶을 누립니다. 열아홉 살은 한 번뿐입니다. 열일곱 살도 한 번뿐입니다. 스물여섯 살도, 서른다섯 살도, 마흔네 살도, 쉰세 살도 언제나 한 번만 나한테 찾아온 뒤 지나갑니다.


  똑같이 차린 밥이라 하지만, 밥 한 그릇 마주하는 내 삶은 날마다 다릅니다. 그러니, 나는 언제라도 길들 수 없습니다. 누구나 언제라도 길들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고 새로운 넋이며 새로운 사랑으로 새삼스레 거듭날 뿐입니다.


.. 내가 그보다 훨씬 더 좋아한 건 아빠가 나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엔 벽만 바라보는 행동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 … 나는 이 말이, 그러니까 ‘잠을 잤다’라는 말이 진짜로 무슨 말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말은 아침마다 막스가 아빠에게 질질 끌려 욕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빠가 막스의 옷을 벗긴다는 걸 뜻했다. 아빠가 미리 받아 놓은 진짜 뜨거운 욕조 물에 막스를 확 밀어 넣는다는 것이었다 … “엄마는 아빠가 우리를 때리지 못하게 하려고 대신에 자신한테 주의를 돌려 차라리 엄마를 때리게 하려고 해. 그러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이든 해. 그러면 아빠가 다시 나에게 관심을 돌려.” ..  (30, 118, 134쪽)


  수잔 크렐러 님이 쓴 청소년문학 《코끼리는 보이지 않아》(양철북,2013)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은 ‘가정폭력’을 다룹니다. 가정폭력이 ‘마을에서 조용히 이루어지는 모습’을 다룹니다. 사람들이 서로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을 다루고, 스스로 아름다움도 사랑스러움도 즐거움도 일구지 못하는 모습을 다룹니다. 어른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 모습을 다룹니다. 아이들 또한 ‘아무것도 안 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길들’면서 어른들과 똑같이 아무것도 안 하는 모습을 다룹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샤’라는 열세 살 아이가 이 모두를 바꿉니다. 아버지한테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아버지하고도 멀리 떨어진 채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지내는 동안 할머니한테서도 할아버지한테서도 사랑을 못 받으며 홀로 외롭던 마샤라는 열세 살 아이가 이 모든 굴레와 수렁과 사슬을 바꿉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샤라는 아이는 이 아이를 ‘길들이는 어른’이 없습니다. 아무도 마샤라는 아이를 눈여겨보지 않고, 마샤라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마샤라는 아이는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놀고 혼자서 외로우며 혼자서 쓸쓸하다가는 혼자서 지냅니다. 온통 혼자로 있으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 아무것도 모르던 마샤인데, 이 마샤 앞에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무서움에 벌벌 떠는 아홉 살 일곱 살 어린 두 아이’가 나타납니다.


..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해 주지 못했다 … 내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율리아와 막스, 그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여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 “자, 우리 이제부터 도망가기 놀이 할 거야.” … 나는 아빠가 즐거워할 때라고는 다큐멘터러 영화를 만드는 동료들과 전화할 때뿐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선 아무런 즐거움도 남겨 둔 게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  (51, 70, 79, 139쪽)


  맞는 아이 아홉 살짜리 ‘율리아’는 맞는 동생 일곱 살짜리 ‘막스’를 지키고 싶습니다만, 어떻게 지켜야 할는지 모르고, 지킨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모릅니다. ‘마샤’라는 아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른들이 하는 바보스러운 짓을 그치게 해야 하는 줄 압니다. 마샤 아버지가 보여주는 터무니없는 짓도 못마땅하고, 율리아와 막스네 아버지가 보여주는 끔찍한 짓은 더더욱 못마땅합니다.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맞고 자라는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랑을 못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그냥저냥 학교만 다니면 될까요. 그냥저냥 시험공부 잘 해서 이름난 대학교에 들어가면 될까요. 그냥저냥 성적 잘 받아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많이 벌면 될까요. 그냥저냥 학교를 다니다가 회사원이 되다가 이렁저렁 나쁘지 않은 짝꿍을 만나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될까요. 자, 그러면 그냥저냥 살다가 그냥저냥 낳은 아이는 어떻게 하지요? 그냥저냥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보내나요? 그냥저냥 학교에 넣어 ‘어버이인 내가 그냥저냥 학교에 다녔듯이’ 우리 아이도 그냥저냥 학교에 보내 그냥저냥 대학교에 집어넣고 그냥저냥 회사원이 되게 해서는 그냥저냥 혼인하고 그냥저냥 아이 낳도록 하면 될까요?


.. 나는 평소에 아이들을 때리거나 마구 밀치거나 던지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어떤 선물을 할지, 선물을 많이 주는지, 아니면 특별히 적게 주는지 궁금해졌다 … “저는…… 모르겠어요. 왜…… 그러니까…… 할아버지, 왜 이렇게 저한테 친절한 거예요?” “글쎄다. 그건 바렌부르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 아이들을 도와주려고 했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지. 엘제 리프카를 빼면 말이다.” ..  (176, 228쪽)


  오로지 맞기만 하며 자라면 오로지 때리기만 하는 어른이 됩니다. 꼭 한 번이라도 따스하게 사랑받은 적이 있다면 이 작은 사랑이 아주 조그마한 씨앗으로 마음밭에 깃들어 언젠가 곱게 피어날 수 있습니다.


  전쟁무기만 만들고, 군대만 키우며, 경찰과 전경이 그득그득 넘치는 나라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 어떤 사회운동과 정치운동과 교육운동으로도 이런 전쟁나라·군대나라·경찰나라를 바꾸지 못합니다. 아무런 운동도 독재정권·식민지정권·사대주의정권·자본주의정권을 갈아치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쁜 놈 물러가라’ 하고 외친들 나쁜 놈은 물러가지 않아요. 나쁜 놈은 더욱 크게 전쟁무기를 키우고 더욱 촘촘히 법그물을 짜며 더욱 무시무시하게 쳇바퀴 제도권 울타리를 쌓습니다.


  이 땅은 ‘운동’이 아닌 ‘삶’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주먹다짐은 아무것도 못 바꿉니다. 보드랍게 부는 바람과 따스하게 비추는 햇볕과 촉촉히 내리는 비와 싱그러이 흐르는 냇물이 지구별을 푸르게 가꾸듯이, 따순 사랑과 푸른 꿈과 맑은 이야기와 고운 마음으로만 이 지구별 ‘나쁜 놈’을 말끔히 씻거나 바꿀 수 있습니다.


  풀바람을 마시고 흙내음을 노래할 때에 지구별이 달라집니다. 나무와 껴안고 숲에 작은 보금자리 마련할 때에 지구별이 거듭납니다. 사랑을 심어야 사랑이 자랍니다. 사랑을 안 심는데 사랑이 자랄 턱이 없습니다.


  생각해야지요. 독재정권 무너뜨리고 나서 무엇을 하고 싶나요? 그 다음을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어떠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아름다운 삶이 될까요? 나라를 아름답게 다스리는 길이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할 때에 모든 사람이 즐겁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삶 누려, 사랑과 평화와 민주가 이 땅에 솔솔 피어날 수 있을까요?


  독재정권 무너뜨린 자리에 다른 독재자가 들어서는 모습을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바보스러운 정치꾼이나 얼간이를 몰아낸 자리에 새삼스럽게 다른 바보스러운 정치꾼이나 얼간이가 들어서는 흐름을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폭력이 왜 사라지지 않을까요. 폭력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폭력이 왜 그치지 않을까요. 사랑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리아와 막스네 아버지는 사랑을 겪은 적도, 사랑을 느낀 적도, 사랑을 배운 적도 없으리라 느껴요. 마샤네 아버지 또한 사랑을 누린 적도, 사랑을 나눈 적도, 사랑을 이야기한 적도 없구나 싶어요. 《코끼리는 보이지 않아》에 나오는 마샤네 할아버지 한 사람만, 마지막에 이르러, 비로소 ‘아이(손녀)한테 물려줄 한 가지는 오직 사랑뿐이네’ 하고 깨닫습니다. 이리하여, 마샤와 마샤네 할아버지가 마을을 바꾸고 삶을 바꾸며 이야기를 바꾸는 사랑을 꽃피웁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디에서 누구와 언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정치폭력과 군대폭력과 학벌폭력과 경제폭력과 교육폭력과 문화폭력과 역사폭력과 외교폭력과 언론폭력과 서울폭력과 남자폭력과 어른폭력 따위가 수그러들지 않는 까닭을 생각합니다. 모두들 사랑을 모릅니다. 모두들 사랑을 한 번조차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사랑은 등돌린 채 힘자랑과 돈자랑과 이름자랑에 파묻힙니다. 4346.1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청소년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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