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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보이지 않아 ㅣ 카르페디엠 34
수잔 크렐러 지음, 함미라 옮김 / 양철북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푸른책과 함께 살기 106
맞고 자란 사람이 때린다
― 코끼리는 보이지 않아
수잔 크렐러 글
함미라 옮김
양철북 펴냄, 2013.10.31.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꽃내음을 맡습니다. 꽃내음을 맡는 사람은 온몸에 꽃내음이 살살 감돌며 꽃빛이 환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늘숨을 마십니다. 하늘숨을 마시는 사람은 온몸에 하늘내음이 골고루 스미며 하늘빛이 곱습니다.
풀밥을 먹는 사람은 풀숨을 맞아들입니다. 풀마다 싱그럽게 푸른 빛깔과 무늬와 냄새를 골고루 받아들입니다. 풀밥은 풀내음이고 풀빛입니다. 풀밥은 풀노래이고 풀물입니다. 몸과 마음 모두 푸르게 빛나면서 푸른 이야기가 솟습니다.
바라보는 대로 눈빛이 달라집니다. 바라보는 자리마다 눈매가 바뀝니다. 맑은 빛을 바라볼 적에는 맑은 빛이 눈을 거쳐 마음속과 몸속으로 젖어듭니다. 밝은 빛을 바라볼 때에는 밝은 빛이 눈가를 스쳐 살갗과 뼈마디로 속속들이 파고듭니다.
싱그러운 물을 마시면 내 몸에는 싱그러운 피가 흐릅니다. 멧골물을 마시면 멧골에서 솟아 흐르는 기운이 내 몸에 흐릅니다. 시냇물을 마시면 시냇물 되어 흐르던 물줄기에 깃든 숨결이 내 숨결로 이어집니다.
.. 여자아이는 화들짝 놀라 다시 스웨터를 내렸다. 그렇게 손동작 한 번으로 배에 난 자줏빛이 감도는 갈색, 그리고 노랗게 변한 커다란 멍 자국을 가렸다 … “마샤 언니!” 나도 똑같이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 “왜?” 그러자 율리아가 큰 소리로 말했다. “막스는 내가 잘 돌봐 줄게!” … 한여름인데도 긴팔을 입은 율리아는 가느다란 두 팔로 길길이 뛰는 동생을 꽉 붙잡았다. 그러면서도 율리아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어른처럼 진지했다 … 내가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아주머니와 함께 문 앞에 서서 마치 자신이 바렌부르크를 통틀어 가장 다정하고 아이들을 잘 돌봐 주는 아빠인 것처럼 행동하는 브란트너 아저씨에게서 느낀 어마어마한 분노였다 .. (20, 34, 57, 111쪽)
쪽)
맹자 어머님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고 좋은 보금자리를 찾기 마련입니다. 공자 어머님도 맹자 어머님과 똑같았을 테지요. 한석봉 어머님이라고 다를 까닭 없어요. 어느 어머니라 하더라도 아이들이 슬기롭고 맑으며 착하게 살아가는 숨결 받아먹을 수 있는 곳에 보금자리를 이루려 마음을 기울이기 마련입니다.
갓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좋거나 나쁘거나 가리지 않아요. 옳거나 그르거나 바르거나 비틀리거나 따지지 않아요. 모두 받아들여요. 모두 바라보고 모두 가슴으로 안아요. 어머니로서는 아이들이 아무것이나 바라보지 않도록, 어머니로서는 아이들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좋은 것을 마주하도록 마음을 쓸밖에 없습니다.
아이들한테는 꽃을 보여줍니다. 칼이나 총 아닌 호미를 쥐어 줍니다. 아이들이 흙을 만지면서 놀도록 이끕니다. 앞으로 흙을 돌보며 살찌울 길을 걸어가며 착하게 새 삶 일구기를 바라니까요. 칼이나 총을 거머쥐어 돈이나 힘자랑 하기를 바라는 어버이가 있을까요. 이웃을 밟고 올라서면서 거들먹거리기를 바라는 어버이가 있을까요.
어느 어버이라 하더라도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어버이가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지 않고 돈을 물려준다면 말썽이 생깁니다. 사랑에 앞서 돈부터 물려주면 뒤틀립니다. 사랑 없이 돈만 만지는 아이가 어떻게 될까요. 사랑 없이 힘자랑 겉멋에 끄달리는 아이가 어찌 되나요.
착하게 어깨동무하는 길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지 못한 아이는 이웃을 아끼는 눈길이나 손길이나 마음길이 없습니다. 착하게 품앗이와 두레를 하는 삶을 누리지 않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과 꿈을 가르치지도 보여주지도 베풀지도 못합니다.
어버이는 돈이나 아파트나 자가용 따위는 물려주지 않아도 돼요. 이런 것들은 아이들 스스로 얼마든지 마련하거나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어버이와 아이는 서로 아끼고 기대며 보살필 줄 아는 고운 사랑과 착한 꿈과 맑은 빛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는 현장에 우연히 있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그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때린다고요.” “마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나 본데,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우리한테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알고 하는 소리니?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닌다면 어떨 것 같니?” “할머니, 배에 멍이 들었다고요!” … 아무도 자동차 대리점 주인이 자기 아이들을 얼마나 때리는지, 또 그 집 아이들이 자기들 몸에 난 상처를 머리카락으로, 긴팔 셔츠로 감추느라 하루 종일 바쁘다는 사실에 관해선 그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 (23, 41∼42, 75쪽)
맞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면 ‘맞고 자라는 아이’를 키웁니다. 거친 말 듣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면 ‘거친 말 듣고 자라는 아이’를 키웁니다. 입시지옥에서 살아남는 길 걸어간 아이가 어른이 되면 똑같이 ‘입시지옥에서 살아남는 길 찾는 아이’를 키웁니다. 그야말로 배운 대로 물려줍니다.
어른들은 좀처럼 사슬을 못 끊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는 좀처럼 쳇바퀴에서 못 벗어납니다. 어른이라는 자리에 서면 좀처럼 생각이나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사슬을 끊는 사람은 으레 아이들입니다. 쳇바퀴를 부수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되찾는 사람은 어김없이 아이들입니다. 생각이나 마음을 활짝 열어 모든 숨결과 손을 맞잡는 사람은 늘 아이들입니다.
길이 들면 삶이 사라집니다. 삶은 길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다 다른 삶인데, 삶은 길이 들 수 없어요. 날마다 똑같은 때에 일어나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길을 가서 똑같은 일터에서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똑같이 걷는 길은 없습니다. 시계로 보아서는 똑같다 하더라도, 날과 달과 해와 철이 모두 달라요. 여름과 겨울에 골목빛이 달라요. 봄과 가을에 하늘빛이 달라요.
옷차림만 다르지 않습니다. 흐르는 바람이 달라요. 뜨고 지는 햇살이 달라요. 내리는 비와 눈이 달라요. 우리는 늘 언제나 다른 삶을 누립니다. 열아홉 살은 한 번뿐입니다. 열일곱 살도 한 번뿐입니다. 스물여섯 살도, 서른다섯 살도, 마흔네 살도, 쉰세 살도 언제나 한 번만 나한테 찾아온 뒤 지나갑니다.
똑같이 차린 밥이라 하지만, 밥 한 그릇 마주하는 내 삶은 날마다 다릅니다. 그러니, 나는 언제라도 길들 수 없습니다. 누구나 언제라도 길들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고 새로운 넋이며 새로운 사랑으로 새삼스레 거듭날 뿐입니다.
.. 내가 그보다 훨씬 더 좋아한 건 아빠가 나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엔 벽만 바라보는 행동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 … 나는 이 말이, 그러니까 ‘잠을 잤다’라는 말이 진짜로 무슨 말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말은 아침마다 막스가 아빠에게 질질 끌려 욕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빠가 막스의 옷을 벗긴다는 걸 뜻했다. 아빠가 미리 받아 놓은 진짜 뜨거운 욕조 물에 막스를 확 밀어 넣는다는 것이었다 … “엄마는 아빠가 우리를 때리지 못하게 하려고 대신에 자신한테 주의를 돌려 차라리 엄마를 때리게 하려고 해. 그러면 나는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이든 해. 그러면 아빠가 다시 나에게 관심을 돌려.” .. (30, 118, 134쪽)
수잔 크렐러 님이 쓴 청소년문학 《코끼리는 보이지 않아》(양철북,2013)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은 ‘가정폭력’을 다룹니다. 가정폭력이 ‘마을에서 조용히 이루어지는 모습’을 다룹니다. 사람들이 서로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을 다루고, 스스로 아름다움도 사랑스러움도 즐거움도 일구지 못하는 모습을 다룹니다. 어른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 모습을 다룹니다. 아이들 또한 ‘아무것도 안 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길들’면서 어른들과 똑같이 아무것도 안 하는 모습을 다룹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샤’라는 열세 살 아이가 이 모두를 바꿉니다. 아버지한테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아버지하고도 멀리 떨어진 채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지내는 동안 할머니한테서도 할아버지한테서도 사랑을 못 받으며 홀로 외롭던 마샤라는 열세 살 아이가 이 모든 굴레와 수렁과 사슬을 바꿉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샤라는 아이는 이 아이를 ‘길들이는 어른’이 없습니다. 아무도 마샤라는 아이를 눈여겨보지 않고, 마샤라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마샤라는 아이는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놀고 혼자서 외로우며 혼자서 쓸쓸하다가는 혼자서 지냅니다. 온통 혼자로 있으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 아무것도 모르던 마샤인데, 이 마샤 앞에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무서움에 벌벌 떠는 아홉 살 일곱 살 어린 두 아이’가 나타납니다.
..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해 주지 못했다 … 내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율리아와 막스, 그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여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 “자, 우리 이제부터 도망가기 놀이 할 거야.” … 나는 아빠가 즐거워할 때라고는 다큐멘터러 영화를 만드는 동료들과 전화할 때뿐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선 아무런 즐거움도 남겨 둔 게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 (51, 70, 79, 139쪽)
맞는 아이 아홉 살짜리 ‘율리아’는 맞는 동생 일곱 살짜리 ‘막스’를 지키고 싶습니다만, 어떻게 지켜야 할는지 모르고, 지킨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모릅니다. ‘마샤’라는 아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른들이 하는 바보스러운 짓을 그치게 해야 하는 줄 압니다. 마샤 아버지가 보여주는 터무니없는 짓도 못마땅하고, 율리아와 막스네 아버지가 보여주는 끔찍한 짓은 더더욱 못마땅합니다.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맞고 자라는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랑을 못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그냥저냥 학교만 다니면 될까요. 그냥저냥 시험공부 잘 해서 이름난 대학교에 들어가면 될까요. 그냥저냥 성적 잘 받아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돈을 많이 벌면 될까요. 그냥저냥 학교를 다니다가 회사원이 되다가 이렁저렁 나쁘지 않은 짝꿍을 만나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될까요. 자, 그러면 그냥저냥 살다가 그냥저냥 낳은 아이는 어떻게 하지요? 그냥저냥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보내나요? 그냥저냥 학교에 넣어 ‘어버이인 내가 그냥저냥 학교에 다녔듯이’ 우리 아이도 그냥저냥 학교에 보내 그냥저냥 대학교에 집어넣고 그냥저냥 회사원이 되게 해서는 그냥저냥 혼인하고 그냥저냥 아이 낳도록 하면 될까요?
.. 나는 평소에 아이들을 때리거나 마구 밀치거나 던지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어떤 선물을 할지, 선물을 많이 주는지, 아니면 특별히 적게 주는지 궁금해졌다 … “저는…… 모르겠어요. 왜…… 그러니까…… 할아버지, 왜 이렇게 저한테 친절한 거예요?” “글쎄다. 그건 바렌부르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 아이들을 도와주려고 했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지. 엘제 리프카를 빼면 말이다.” .. (176, 228쪽)
오로지 맞기만 하며 자라면 오로지 때리기만 하는 어른이 됩니다. 꼭 한 번이라도 따스하게 사랑받은 적이 있다면 이 작은 사랑이 아주 조그마한 씨앗으로 마음밭에 깃들어 언젠가 곱게 피어날 수 있습니다.
전쟁무기만 만들고, 군대만 키우며, 경찰과 전경이 그득그득 넘치는 나라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 어떤 사회운동과 정치운동과 교육운동으로도 이런 전쟁나라·군대나라·경찰나라를 바꾸지 못합니다. 아무런 운동도 독재정권·식민지정권·사대주의정권·자본주의정권을 갈아치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쁜 놈 물러가라’ 하고 외친들 나쁜 놈은 물러가지 않아요. 나쁜 놈은 더욱 크게 전쟁무기를 키우고 더욱 촘촘히 법그물을 짜며 더욱 무시무시하게 쳇바퀴 제도권 울타리를 쌓습니다.
이 땅은 ‘운동’이 아닌 ‘삶’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주먹다짐은 아무것도 못 바꿉니다. 보드랍게 부는 바람과 따스하게 비추는 햇볕과 촉촉히 내리는 비와 싱그러이 흐르는 냇물이 지구별을 푸르게 가꾸듯이, 따순 사랑과 푸른 꿈과 맑은 이야기와 고운 마음으로만 이 지구별 ‘나쁜 놈’을 말끔히 씻거나 바꿀 수 있습니다.
풀바람을 마시고 흙내음을 노래할 때에 지구별이 달라집니다. 나무와 껴안고 숲에 작은 보금자리 마련할 때에 지구별이 거듭납니다. 사랑을 심어야 사랑이 자랍니다. 사랑을 안 심는데 사랑이 자랄 턱이 없습니다.
생각해야지요. 독재정권 무너뜨리고 나서 무엇을 하고 싶나요? 그 다음을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어떠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아름다운 삶이 될까요? 나라를 아름답게 다스리는 길이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할 때에 모든 사람이 즐겁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삶 누려, 사랑과 평화와 민주가 이 땅에 솔솔 피어날 수 있을까요?
독재정권 무너뜨린 자리에 다른 독재자가 들어서는 모습을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바보스러운 정치꾼이나 얼간이를 몰아낸 자리에 새삼스럽게 다른 바보스러운 정치꾼이나 얼간이가 들어서는 흐름을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폭력이 왜 사라지지 않을까요. 폭력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폭력이 왜 그치지 않을까요. 사랑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리아와 막스네 아버지는 사랑을 겪은 적도, 사랑을 느낀 적도, 사랑을 배운 적도 없으리라 느껴요. 마샤네 아버지 또한 사랑을 누린 적도, 사랑을 나눈 적도, 사랑을 이야기한 적도 없구나 싶어요. 《코끼리는 보이지 않아》에 나오는 마샤네 할아버지 한 사람만, 마지막에 이르러, 비로소 ‘아이(손녀)한테 물려줄 한 가지는 오직 사랑뿐이네’ 하고 깨닫습니다. 이리하여, 마샤와 마샤네 할아버지가 마을을 바꾸고 삶을 바꾸며 이야기를 바꾸는 사랑을 꽃피웁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디에서 누구와 언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정치폭력과 군대폭력과 학벌폭력과 경제폭력과 교육폭력과 문화폭력과 역사폭력과 외교폭력과 언론폭력과 서울폭력과 남자폭력과 어른폭력 따위가 수그러들지 않는 까닭을 생각합니다. 모두들 사랑을 모릅니다. 모두들 사랑을 한 번조차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사랑은 등돌린 채 힘자랑과 돈자랑과 이름자랑에 파묻힙니다. 4346.1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청소년책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