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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 ㅣ 창비청소년문고 6
이운진 지음 / 창비 / 2012년 7월
평점 :
푸른책과 함께 살기 107
아름다운 빛은 어디에 있는가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
이운진 글
창비 펴냄, 2012.7.13.
해가 뜨니 해가 집니다. 달이 뜨니 달이 집니다. 여름이 지나가며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가며 겨울이 찾아옵니다. 겨울 문턱에서 가을밤 빛깔을 누립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가을빛은 올해로 끝이고 겨울빛 흐드러지겠군요. 같은 전라남도라도 지리산 둘레에는 몹시 춥고 눈발 날릴 테지요. 우리 어버이 살아가는 충청북도 음성에는 얼음이 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는 물이 얼까 근심하며 새해 새봄까지 물을 졸졸 틀어야겠지요. 우리 고흥집에서는 지난해 겨울도 그러께 겨울도 물을 틀지 않고 보냈습니다. 올겨울도 물을 안 틀고 보낼 수 있으리라 여겨요. 그만큼 따숩고, 그만큼 눈 구경이 어렵습니다.
겨울이 포근하기에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겨울빛이 있습니다. 늦가을에도 새로 싹이 틀 뿐 아니라, 꽃이 피며 씨앗을 맺습니다. 봄에 피는 꽃이 가을에도 피고, 때로는 겨울까지 씩씩하게 나곤 합니다. 한겨울에 나는 유채풀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잎을 톡톡 끊어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면 알싸하면서 상큼합니다. 시원하면서 싱그러워요. 겨울이 채 물러나지 않은 일월이나 이월 무렵에 유채풀이 돋곤 해요. 이때에도 논둑이나 밭둑을 잘 살피며 유채풀을 뜯습니다. 포근한 남녘땅에서 누리는 겨울맛이자 겨울빛이요 겨울숨입니다.
..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공부인데도 참고서도 없고 스승도 없는 과목이라면 어떻게 배워야 할까? 누가 가르치고 누구에게 질문하고 어떤 방법으로 익혀야 할까 … 좋은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은 내게 이야기를 해 .. (34, 45쪽)
아기는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어른은 자라서 주름살이 늡니다. 아이가 자라듯 어른도 자라고, 어른이 자라듯 아이도 무럭무럭 자랍니다. 몸이 자라는 동안 마음이 함께 자랍니다. 마음이 자라면서 몸이 새롭게 자랍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 몸이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몸이 무거워지더라도 몸 또한 차근차근 자라요. 왜냐하면 모든 목숨은 살아서 움직이는 동안 피가 돌거든요. 피가 돌면서 따스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요. 따스한 기운이 있어 살아갈 수 있고, 이 기운을 바탕으로 따스한 생각을 길어올립니다.
다섯 살 어린이가 호미질을 합니다. 쉰 살 아지매가 호미질을 합니다. 여덟 살 아이가 낫을 손에 쥡니다. 여든 살 할배가 석석 낫을 갈아 벼를 베고 풀을 벱니다. 어릴 적부터 손에 익은 대로 차츰차츰 손놀림 야무집니다. 어린 날부터 둘레에서 지켜본 대로 차근차근 몸놀림 다부집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자란 아이는 하늘바람을 마십니다. 바다를 마주하며 자란 아이는 바다노래를 부릅니다. 들에서 뛰놀며 자란 아이는 들빛으로 환합니다. 멧골에서 숲과 함께 자란 아이는 숲내음 이야기를 꽃피웁니다.
아름다운 빛은 어디에 있는가요. 아름다운 빛을 찾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요. 아름다운 빛은 어디에서 비롯해 어디로 드리우는가요. 아름다운 빛을 쬐는 사람들 마음밭에서는 무엇이 자라는가요. 햇볕은 국경선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빛 또한 국경선을 가리지 않습니다. 별빛은 계급이나 학력을 묻지 않고, 아름다운 빛 또한 계급이나 학력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 ‘자존심’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 자존심이라면, 스스로의 가치를 만드는 방법이 중요한 것 같아 … 나무와 식물을 잘 알고 싶으면 사람을 사귀듯이 자주 만나야 하나 봐. 만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나무를 안아 보라고 하는 식물학자도 있더구나 .. (80, 96쪽)
이운진 님이 푸름이한테 들려줄 이야기로 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창비,2012)를 읽습니다. 오늘날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아야 하는 가녀린 푸름이한테 푸른 사랑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읽습니다. 대학입시를 이기더라도 몹시 고단한 톱니바퀴가 기다릴 뿐인 도시 아이들한테 푸른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넋을 헤아립니다.
그런데, 이운진 님은 “여자애들은 원래 예쁜 문구나 화장품이 있는 가게를 무척 좋아하잖아. 그곳에서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하고. 그땐 아주 행복하고 즐겁잖아. 학교에서 어떤 힘든 일이 있었어도 그 순간엔 모두 잊힐 정도로 말이야(21쪽).” 같은 이야기를 곳곳에 씁니다. 곰곰이 살피면, 이 말은 틀리지 않다 할 테지만, 가시내만 예쁜 장난감이나 노리개나 문방구를 좋아하지 않아요. 머스마도 예쁜 장난감이나 노리개나 문방구를 좋아합니다. 때로는 예쁜 것에 눈이 사로잡히지 않아요. 겉이 아닌 속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숨결 찾으려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운진 님으로서는 ‘푸름이라면 으레 이렇겠지!’ 하고 못을 박는 듯한 이야기는 할 까닭이 없어요. 이운진 님이 보낸 푸른 나날 돌아보면서 이운진 님은 지난날에 어떻게 살았다 하는 이야기만 들려주면 됩니다. 마치 모든 푸름이들 삶을 다 안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눈길과 목소리가 된다면, 푸름이와 어깨동무하기는 어려워요.
..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감각의 풍요로움을 잃어버렸다고 나는 생각해. 자연의 시간을 좇아서 밝음과 어둠의 순환을 따라가며 살아야 하는데, 대낮처럼 밝혀 놓은 도시의 불빛과 한밤중에도 눈길을 붙잡는 텔레비전의 온갖 채널은 오직 시각적인 감각에만 우리를 집중시키잖아 … 내가 서울에 와서 보고 놀란 것 중의 하나가 고층 빌딩이나 지하철, 늘 북적대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무라면 이상하게 들리니? 고향의 나무들은 아무렇게나 구부러지고 휘어도 나무의 역할을 다하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도시의 가로수들은 곧고 우뚝하지만 어딘가 슬퍼 보였어 .. (108∼109, 117쪽)
텔레비전은 틀림없이 아이와 어른 삶을 망가뜨립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텔레비전을 없애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방송사에서 일하며 온갖 자질구레하거나 얄궂은 이야기를 흘려보냅니다. 어른들은 방송 풀그림을 다시 신문글이나 잡지글로 다루고, 인터넷에서도 이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푸름이한테 텔레비전이 왜 나쁜가를 이야기하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텔레비전을 만들어 돈을 버는 엄청난 어른들 쳇바퀴와 톱니바퀴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어른들부터 집안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고 누리는 삶을 찾을 노릇이요, 이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에서도 텔레비전 없이 이운진 님이 즐기고 누리는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면 됩니다.
나무 이야기에서 덧붙인다면, 도시뿐 아니라 시골에서도 나무는 곧게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시골 흙지기들이 나무를 휘어 놓습니다. 열매 따기 수월하도록 나무를 휘어 놓고, 가지만 뻗지 않고 열매만 주렁주렁 매달도록 나뭇가지를 붙들어 놓아요.
도시에서 자동차 배기가스에 시달리는 나무도 가엾고, 시골에서 더 많은 열매를 내놓으려고 들볶이는 나무도 불쌍합니다. 나무를 괴롭히는 도시사람도 딱하며, 나무를 닦달하는 시골사람도 안쓰럽습니다.
.. 그런 간절한 마음에서 영화를 찍은 감독이 있어서 시를 읽기 전에 잠깐 소개할게. 황윤 감독의 〈어느 날 그 길에서〉라는 영화야. 로드킬 당하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찍은 독립영화지. 감독은 길 위에서 죽어 가는 수많은 동물들의 실상을 조사해 사람들에게 로드킬의 비윤리적 죽음과 심각성을 말하고 싶었대 .. (227쪽)
황윤 감독님은 독립영화를 찍다가 사랑스러운 짝을 만나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고는 새 영화를 찍으려고 부산합니다. 아이를 낳기 앞서 〈어느 날 그 길에서〉를 찍었어요. 이 영화는 이운진 님 소개글처럼 ‘길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는 짐승’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길죽음’만 말하지 않아요. 길에서 사람도 얼마나 자동차 때문에 고달픈지 함께 보여줍니다. 이 나라는 들짐승뿐 아니라 여느 사람도 자동차에 치여 엄청나게 죽거나 다쳐요. 게다가 새 고속도로를 놓는다며 시골마을 짓밟고 푸른 숲과 들과 멧골을 무너뜨립니다.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돈바라기로 치닫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며 스스로 삶을 어지럽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길죽음’ 하나로 그치는 영화는 아니에요.
푸름이들 살아갈 나날은 어느 한 가지 빛만 생각할 수 없어요. 즐거운 일자리 찾는 길이 하나 있을 테고, 아름다운 사랑을 찾는 길이 하나 있을 테며, 착하며 참다운 넋 북돋우는 길이 하나 있어요. 고운 꿈 품에 안는 길이 하나 있어요. 맑은 눈빛 밝히는 길이 하나 있어요.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고, 벗님과 두레를 하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수많은 길에 서면서 수많은 빛을 만납니다. 수많은 빛을 마주하면서 마음속에서 무지개빛으로 눈부신 새 이야기 빚습니다.
이운진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푸름이한테 숱한 삶빛 가운데 하나 되리라 생각해요. 아이들을 아끼는 손길 가운데 하나요, 아이들을 믿고 보살피는 손빛 가운데 하나이리라 믿습니다. 4346.11.2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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