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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0년 6월, 아주 뜻깊은 사진책이 하나 나왔지만, 그즈음 이 책을 차마 장만하지 못했다. 사진은 좋은데, 사진마다 엉뚱하게 붙인 뚱딴지 같은 말 때문이었다.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라는 백승종 님이 붙인 ‘사진말’은 몽땅 ‘추리소설’이었다. 이를테면, “동네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저이들 중에도 전쟁의 광란에 야수같이 미쳐 날뛴 사람들이 있었을 거라니,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247쪽).”, “과일 궤짝에 사과나 배를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어렵게 먼길을 걸어 여기까지 나왔는데, 별로 팔리지를 않아 걱정이다(117쪽).”, “백 장 가량이나 되는 다양한 사진 기록을 통해 우리는 사회주의 조국 건설로 가는 북한의 힘겹고 참담한 역사를 한 번 뒤쫓아가 보려고 한다(머리말).” 같은 말들. 처음부터 끝까지 북녘을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리는 말을 넣는다. 동독 도편수 에리히 레셀이라는 사람이 북녘사람 여느 삶을 사진으로 담을 적에는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리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을 텐데, 이 사진을 어떻게 손에 넣어 남녘에서 사진책으로 내놓는 사회학과 교수이자 역사학자라는 분은 온통 깎아내림말과 비아냥뿐이다. 북녘 학자나 지식인이 남녘땅 여느 사람들 사진을 앞에 놓고 온통 깎아내리기만 하거나 비아냥거리기만 하면 즐거울까? 북녘 정치를 비판하고 싶다면 비판할 노릇이다. 그러나, 비아냥거려야 하지 않으며, 추리소설을 쓸 까닭도 없다. 사진은 사진 그대로 읽어야 한다.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은 책이름 그대로 에리히 레셀이라는 사람이 1950년대 북녘에서 일하며 만난 ‘정치하고는 동떨어진 여느 시골사람과 도시사람’ 모습을 ‘애틋한 이야기(추억)’로 담은 사진을 엮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을 들추면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우리 이웃과 한겨레를 돌아볼 노릇이지, 싸잡아 헐뜯는 데에 이 사진을 쓰는 일은 누구한테 도움이 될까. 북녘과 남녘 정치가 이토록 엉망진창인 탓을 누구한테 돌리려 하는가. 비아냥과 손가락질과 편가르기를 하는 학자와 지식인이 분단과 반민주와 국가보안법과 불평등과 온갖 차별을 부채질하거나 끌어들이지 않았을까? 부디 이 예쁜 사진책을 고침판으로 다시 펴낼 수 있기를 빈다. 지식인이건 학자이건, 쓸데없는 붙임말은 모두 잘라내고, 그예 우리 이웃이자 한겨레인 북녘땅 여느 사람들 삶을 수수하고 투박하게 만날 수 있도록 새로운 책으로 곱게 엮어서 선보이기를 빈다. 사진들이 너무 아깝다. 4346.12.29.해.ㅎㄲㅅㄱ


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백승종 / 효형출판 / 2000년 6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3년 12월 29일에 저장
품절
아버지, 난 누구예요- n세대가 쓰는 이 땅의 작은 역사
백승종 엮음 / 궁리 / 2000년 8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13년 12월 29일에 저장
절판

그 나라의 역사와 말- 일제 시기 한 평민 지식인의 세계관
백승종 지음 / 궁리 / 2002년 8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3년 12월 29일에 저장
절판

정감록 미스터리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8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13년 12월 29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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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94] 학교 다니기

 


  신나게 놀고, 사랑을 예쁘게 나누며,
  어깨동무하는 꿈 서로 만나는,
  배움터.

 


  내 어릴 적 학교는 하루라도 빠지면 몽둥이로 찜질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한 주에 두 차례, 때로는 두어 차례 아침모임을 운동장에서 하는데, 앞옆뒤로 나란히를 시키며 줄서기를 해야 했고, 한 시간 남짓 덥든 춥든 꼼짝않고 서지 않으면 뺨을 맞거나 정강이 걷어차이는 곳이었습니다. 군인이 되어 무엇이든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도록 길들이는 곳이 학교였습니다. 학교 밖으로 나가서 삶을 배울 수도, 사랑을 나눌 수도, 꿈을 꿀 수도 없게 꽁꽁 가두었습니다. 학교를 빠지면 안 되듯이 회사도 빠지면 안 되겠지요. 시키는 대로만 배워야 하듯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놀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며, 어깨동무하거나 꿈꾸지 못한다면, 학교가 아니고 마을이 아니며 보금자리가 아닌 한편, 나라도 정부도 아닐 테지요. 4346.12.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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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집의 리사벳 동화는 내 친구 3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일론 비클란드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논장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43

 


놀면서 아름답게 자라는 아이들
― 재미있는 집의 리사벳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
 일론 비클란드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논장 펴냄, 2003.10.15.

 


  오늘 아침에 마을회관에서 한 해를 갈무리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마을 할매는 회관 부엌에서 밥상을 차리시고, 마을 할배는 회관 마루에 앉아서 밥상을 기다리십니다. 이동안 우리 집 두 아이는 회관 마루와 부엌 사이를 쉴새없이 오갑니다. 이리 뛰고 저리 구르면서 까르르 웃습니다. 마을회관 할배들은 아이들이 어지럽게 뛰논다며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웃고, 그저 달리며, 그저 뒹굽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집 아이들만 이러하지 않습니다. 온누리 모든 아이들은 누가 무어라 하건 말건 까르르 웃으면서 뛰놀아요. 지구별 모든 아이들은 할매나 할배가 말리든 안 말리든 신나게 달리고 뒹굴면서 노래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뛰놀지 못한다면 아이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뛰놀도록 하지 못한다면, 아이들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닙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공부를 시킨다면서 조용히 하라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하도록 하더라도 공부하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 마음껏 뛰놀도록 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그래야 아이들은 아이답게 자랄 테니까요. 아이들은 아이답게 꿈꾸고 노래하면서 뒹굴어야 아이다우니까요.


.. 재미있는 집에서는 목요일마다 완두콩 수프를 먹어요. 그렇다고 리사벳이 목요일마다 완두콩을 콧구멍에 쑤셔넣는 건 아니에요. 사실은 딱 한 번 그래 봤을 뿐이에요 … 누군가를 골탕먹이려는 마음은 없었어요. 넣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을 뿐이에요 … 사실 엄마는 오늘 머리가 너무 아파서 조용히 누워 쉬고 싶었어요. 리사벳의 콧구멍을 후벼파고 싶지 않았다고요..  (5, 6, 10쪽)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뛰노는 아이들인데, 이 아이들이 놀 만한 곳에서 살아가는지 궁금하곤 합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하루 내내 신나게 뛰놀면서 자라는데,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과 함께 어떤 데에서 일하거나 살아가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놀기 어려운 곳을 집으로 삼지는 않는가요. 아이들이 놀 수 없는 데에서 일하지 않는가요. 아이들이 놀기 어려운 곳에서 살며 아이들을 묶어 놓지 않는가요.


  놀지 못한 채 자라는 아이는 어떤 어른이 될까요. 놀이와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아이는 어떤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어른으로 살아갈까요.


  아이한테는 이것을 가르치거나 저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아이 나름대로 이렇게 놀거나 저렇게 놀도록 해야지 싶어요. 아이와 살아가는 어른은 아이들이 이렇게도 놀고 저렇게도 놀도록 즐겁고 따사로우며 포근한 놀이마당을 마련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 장롱 옆에는 리나스 이다 아주머니의 기타가 세워져 있어요. 마디켄이 줄을 퉁기자, 마음을 적시는 듯한 고운 소리가 났어요. 어떻게 하면 아주머니처럼 기타를 잘 칠 수 있을까요 ..  (22쪽)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글을 쓰고 일론 비클란드 님이 그림을 그린 어린이책 《재미있는 집의 리사벳》(논장,2003)을 읽습니다. 리사벳은 언제나 즐겁게 놀고 싶은 아이입니다. 리사벳네 언니 마디켄도 늘 기쁘게 놀고 싶은 아이입니다. 둘은 한결같이 놀이에 살고 놀이로 하루를 누립니다.


  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자랄까요. 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지으면서 새로운 사랑을 이 땅에 드리울까요.


  어찌 보면 말썽꾸러기이고, 어느모로 보면 말괄량이입니다. 언니 마디켄은 여기에 싸움꾼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 마음은 착해요. 착하면서 참답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동무를 아끼고 싶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동무와 예쁘게 어울리고 싶으며, 날마다 새롭게 놀이를 찾고 싶어요.


.. 마디켄은 리사벳의 손을 꼭 쥐었어요. 동생이랑 사이좋게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엄마가 틀림없이 기뻐하겠죠 … 마디켄은 꼭 중요할 때는 엄마 말을 까맣게 잊어버려요. 늘 싸우고 난 뒤에야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하죠. 하지만 지금은 리사벳을 도와줘야 하니까 이야기가 달라요. 싸우면 안 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  (12, 35쪽)


  리사벳은 콩알을 콧구멍에 넣으며 놀아요. 우리 집 두 아이도 콧구멍에 무언가 넣기를 즐깁니다. 길다란 과자도 콧구멍에 넣고, 까마중 까만 열매도 콧구멍에 넣습니다. 그리고, 콧구멍에 넣은 것을 도로 빼서 입에 넣고 아주 맛나게 먹어요.


  재미있지요. 재미나지요. 오이 한 조각이나 무 한 조각도 그냥 먹지 않아요. 두 손으로 살며시 휘면서 무지개라 말하고, 둥그런 오이 조각을 야금야금 먹으면서, 보름달로 바뀌었느니 반달이 되었느니 초승달이라느니 하면서 놀아요.


  나무막대기는 긴칼이 되기도 하지만, 하늘 나는 빗자루가 되기도 합니다. 바닥에 내려놓고는 냇물 건너는 다리로 삼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거나 커다란 울타리라 여기며 껑충껑충 뛰어넘기도 해요. 맨손 맨몸으로 마당을 휘휘 달리면서 어마어마한 모험을 한다고 여겨 까르르 웃기도 합니다.


  옆에서 아이들 놀이를 지켜보기만 해도 즐겁습니다. 아이들 사이에 섞여 함께 놀아도 즐겁습니다. 장난감이 따로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꼭 놀이터까지 가야 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들길을 걸어도 놀이가 됩니다. 자전거를 달려 이웃마을 찬찬히 지나다녀도 놀이가 되어요.


.. “자, 꼬마 아가씨들, 뽀뽀를 받고 나서 엉덩이를 좀 맞아야겠어. 그런 다음, 자는 거다.” 아빠는 딱 이 말만 했고요. 하지만 둘은 뽀뽀는 받았지만 엉덩이는 맞지 않았을뿐더러, 아직 자지도 않았어요. 어린이 방 불은 꺼진 지 오래였지만. 리사벳이 물었어요. “언니 침대에 가도 돼?” “응, 와도 돼. 그 대신 내 코에 손대지 않도록 조심해.” 리사벳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마디켄의 침대에 올라갔어요. 그리고 “언니, 팔베개 해 줘.” 하고 말하며 마디켄의 팔에 머리를 괴고 누웠어요. 마디켄은 팔베개를 해 주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면 자기가 훨씬 나이 많은 언니 같아, 리사벳이 귀엽게 느껴졌죠 ..  (54∼55쪽)


  나도 어릴 적에 우리 아이들마냥 혼자서 놀이를 생각해 내면서 놀았습니다. 손가락을 꼬물거리면서 혼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신나게 즐겼어요. 종이 한 장에 이 그림 저 그림을 그리면서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까맣게 잊으면서 놀았어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얼굴은 칠판을 쳐다보지만 마음속으로는 ‘노는 꿈’을 그리면서 나도 모르게 빙긋빙긋 웃곤 했어요. 이러다가 교사한테 들켜 얻어맞는다든지 꿀밤을 맞기도 했지만, 마음속으로 그리는 ‘노는 꿈’을 멈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업 진도는 따분하고, 교과서 지식도 재미없지만, 머리로 하나하나 그리는 노는 꿈은 언제나 새롭고 즐거워요. 하늘을 날기도 하고 바닷속을 가르기도 합니다. 먼 우주를 날기도 하며 지구별 맞은편에 있는 이웃나라 아이하고 어깨동무하기도 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 바라볼 적마다 어린 날을 떠올립니다. 나는 언제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한테서 사랑을 받아먹으며 자랐습니다. 이렇게 즐거우면서 고맙게 받아먹은 사랑을 아이들도 함께 누리도록 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하든 기쁘게 맞이하고 싶어요.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즐기는 눈빛을 따사롭게 얼싸안고 싶어요. 이러는 동안 저도 새롭게 일하는 기운을 얻고, 이러는 사이 아이들은 씩씩하면서 튼튼한 마음이 되어요.


  놀면서 아름답게 자라는 아이들입니다. 놀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어른들입니다. 놀면서 웃습니다. 놀면서 노래합니다. 놀면서 아름답게 일합니다. 4346.12.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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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작품’을 보는 독자는 ‘안녕들 하십니까’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를 표절한 연속극은 인기가 치솟는다고 한다. 이와 달리, 표절로 생채기를 입은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는 인기가 치솟는지 알 길이 없다. 남한테 생채기를 입히는 쪽은 으레 돈과 이름을 얻고, 남한테서 생채기를 받는 쪽은 으레 마음이 너무 아파 새로운 창작을 하려는 뜻을 잃거나 꺾기 일쑤이다. 이 일 때문에 강경옥 님이 붓을 꺾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동안 씩씩하게 만화 한길 걸어온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빌 뿐이다.


  해마다 이천 권쯤 되는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가 읽는 책 가운데 어쩌면 ‘다른 작가가 쓴 작품을 몰래 흉내내거나 베낀 작품’이 있을는지 모른다. 처음 읽을 적에는 ‘참 아름답구나’ 느끼며 읽었는데, 이 작품이 막상 ‘표절 작품’이었으면, 내 마음은 어떠할까. 작가를 믿고 읽은 책인데, 이 작가가 우리한테 눈속임과 거짓말을 했다면, 내 마음은 어떠할까.


  ‘표절 작가’는 아니지만 ‘변절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차윤정 같은 분들. ‘4대강본부 환경부본부장’이라는 이름을 얻으려고 이녁이 한 짓이란 무엇일까. 또한, ‘표절 작가’는 아니나 ‘대필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한젬마 같은 분들. 스스로 쓴 글이 아니면서 스스로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고 돈을 벌어들인 삶이란 얼마나 안쓰러운가.


  그러면, 독자들은 무엇인가. 《신갈나무 투쟁기》를 읽은 독자와 《그림 읽어 주는 여자》를 읽은 독자는 무엇인가. 이들 ‘작가 아닌 작가’는 독자를 어떻게 생각한 사람인가.


  요즈막에 강경옥 님 만화책을 표절한 연속극 말썽이 불거진 뒤, 《민트》와 《아란》과 《스팅》과 《주라기 공원으로 간 옴므파탈》 같은 소설을 쓴 ‘아게하’라는 분 작품도 방송작가가 표절을 해서 연속극으로 만든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조용히 털어놓는다. 아게하 님은 표절 연속극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을 텐데, 이녁한테 힘든 집안일이 있어 말없이 지나갔다고 한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얼마나 속울음을 울었을까. 이런 이야기도 모르는 채 ‘인기 연속극’을 하하호호 웃으며 본 사람들은 무엇을 보면서 하하호호 웃은 셈일까.


  무라카미 하루키 님 작품을 왜 선인세 몇 억씩 주면서 사들이는가? 그냥 무라카미 하루키 님 문학도 표절을 해서 ‘창작’이라는 껍데기 씌워 떡하니 내면 되지 않나?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흔한 소재’라고, ‘주인공이나 줄거리나 흐름이 조금 비슷한 모습이란 으레 있기 마련’이라고 둘러대면 되지 않는가? ‘지구별에 완전한 창작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발뺌하면 되지 않는가? ‘아주 독창스러운 소재란 없고, 모든 예술은 모방으로 창조한다’고 핑계를 붙이면 되지 않는가? ‘아름다운 노래도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를 흉내내거나 베꼈다’고 큰소리 뻥뻥 치면 되지 않는가?


  한국 책마을은 1999년 12월 31일까지 저작권법을 안 지킨 채 외국책을 펴내곤 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큰 인문출판사들은 모두 인세를 안 치른 채 외국책을 펴내며 돈을 벌거나 이름을 얻었다. 한국 책마을에서 외국책에 제대로 인세를 치르며 책을 낸 역사는 고작 열네 해밖에 안 된다. 이런 흐름이니, 방송작가들이 만화가나 소설가 작품을 몰래 베끼거나 훔치면서 방송대본을 써서 연속극 만드는 일이 버젓이 자꾸 일어나는구나 싶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든, 사회에서든, 다른 사람 작품을 훔치거나 베끼는 일이 얼마나 이녁 스스로 갉아먹거나 좀먹는 짓인가를 안 가르치는구나 싶다. 창작이 아닌 표절을 하는 글쓰기란 스스로 죽음길로 가는 짓이다. 창작하려고 마음을 쓰지 않고 베끼거나 훔치려고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한두 차례 이름을 날리거나 돈을 벌는지 모르나, 앞으로 얼마나 즐겁게 창작을 할 수 있을까. 죽는 날까지 이녁 마음속에 자리잡을 ‘괴로운 짐’을 어떻게 짊어질 생각인가.


  요즈음 나오는 시를 보면, 다른 사람 작품을 빌려쓰는 작품이 꽤 많다. ‘각주를 붙이는 시’가 퍽 많다. ‘각주 붙인 시’는 부끄러운가? 아니다. 하나도 부끄러울 일 없다. ‘각주 붙인 논문’은 부끄러운가? 아니다. ‘원래 작품 출처’를 밝히는 방송대본은 하나도 안 부끄럽다. ‘원래 작품 출처’를 밝히고, 저작권 사용료 치르는 일은 부끄러울 일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돈을 버리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표절 작품을 보면서도 표절 작품을 감싸는 사람들이 꽤 많다. 어느 연속극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일은 좋다. 그러나, 잘잘못은 옳게 가려야지. 내가 아끼거나 사랑하는 작가가 ‘표절 작가’라면 얼마나 부끄러운 노릇인가. 내가 아끼거나 사랑하는 작가는 ‘표절 작가’ 아닌 ‘아름다운 작가’여야 하지 않을까. ‘표절 작가’를 감싸면서 ‘원래 작품 쓴 작가’를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리거나 거친 말을 일삼는 독자는 참말 독자라 할 수 있을까.


  잘못을 뉘우치는 일은 부끄럽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다. 잘못을 뉘우친대서 우리가 ‘표절 작가’를 몽둥이로 때려죽일 일도 없다. 잘못을 뉘우치면 누구라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하고 달래 주지 않겠는가. 4346.12.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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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밥 먹자 49. 2013.12.25.

 


  아이들과 아침저녁으로 먹는 밥을 늘 거의 비슷하게 차리지 않는가 하고 느낀다. 그래서 밥그릇이랑 접시를 바꾸어서 써 보기도 하고, 나물을 조금 다르게 섞기도 하지만, 막상 밥을 차리고 보면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오이를 길게 썰기도 하고, 동그랗게 썰기도 하다가, 반달로 썰기도 한다. 오이 곁에 무채를 두기도 하고 고구마를 썰어 두기도 한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이 풀을 잘 먹도록 밥을 차리자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나 또한 풀을 꽤 많이 먹는 사람으로 달라진다. 한겨울에도 어디 풀 뜯을 데 있는가 두리번거린다. 봄부터 가을까지 집 둘레에서 온갖 풀을 뜯어다 먹었다. 이 겨울 지나고 새봄 찾아오면 또 새로운 풀을 찾으러 이곳저곳 두리번거릴 테지.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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