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문학의전당 시인선 32
김정희 지음 / 문학의전당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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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83 ― 시로 가고, 사람으로 가다, 사랑으로 가는 길
 : 김정희 시,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 책이름 :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 시 : 김정희
- 펴낸곳 : 문학의전당 (2007.4.30.)
- 책값 : 7000원



 (1) 시로 가는 길


 시인 한 사람 알고 지내면서 틈틈이 만나게 되면, 만날 때마다 시집 한 권 읽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시인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시인한테 몇 마디 듣고 이야기를 들어도, 또 물끄러미 시인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시집 한 권 읽는다고 느낍니다.

 그냥저냥 책만 읽고 살다가, 이냥저냥 책쟁이들만 만나고 살다가, 뜻하지 않게 시인과 어우러지는 자리에 끼게 되면,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말없이 찻잔이나 술잔을 들거나 말없이 사진기만 만지작거리게 됩니다.


 오랜만에 친구 만나 거나해진 아버지
 자전거 뒤꽁무니에 나를 앉히며 말했다
 기왕에 가는 거
 저놈에 달도 태우고 가자꾸나

 아버지 등과
 내 배 사이에
 대소쿠리만 한 달이 끼어 앉았다
 셋이서
 창영동 고갯마루 길을
 달려 올랐다  (보름달 속으로 난 길)



 지난 7월 26일, 동네 헌책방 아주머니가 손수 나무질을 하여 마련해 놓은 조촐한 ‘시 다락방’에서 시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제 목소리를 제 빠르기에 맞추어 읽어 나가는 자리였는데, 이런 시읽기를 마친 뒤에 퍽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막걸리집으로 옮겨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멀거니 떨어져서 사진만 찍었고, 어느 만큼 거리를 지키면서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시인은 여느 사람하고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이었고, 시인을 둘러싼 사람도 시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은 시를 쓰고, 다른 사람은 시를 즐길 뿐이었지요.


 고양이 한 마리
 사차선 도로를 횡단 중이다
 화적 떼처럼 달겨드는 불빛파도를 헤치며
 이리저리 발을 놓는
 아찔한 곡예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은 좀체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놈은 흰 차선을 보루 삼아 가까스로 生을 지켜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이 한 線 위에서 흔들린다
 놈은
 목숨줄을 당겨 잡고 힘껏 뛴다 그러나
 어느 자동차 속도의 칼날에 가차 없이 끊어져버리는
 줄.

 순식간에 바닥이 되어버린 놈을
 上弦이 내려다본다
 끝내
 이르지 못한 길의
 광고탑에 내 걸린 교통상해보험 현수막이
 한 옥타브 높게 울어댄다
 초저녁이다  (닿지 못한 길)



 오늘 저녁,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당신 손주 돌잔치를 하는데, 저보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해 옵니다. 그러마 하고, 얼마든지 찍어 드립지요, 하는데, 같이 잔치자리에 가자면서, ‘우리 아저씨 오늘은 (택시) 운전 안 하고 술 드신다고 했는데, 술 드시지 말고 운전하라고 해야겠다’고 하시기에, ‘오늘 같은 날은 (택시기사인 분도 다른 사람이 모는) 택시 타고 가야지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일삯을 안 받고 찍어 주는 돌잔치 사진이요 혼례잔치 사진이며 시읽는잔치 사진입니다. 벌써 석 달이 훌쩍 지나간 7월 끝무렵 시인 한 사람을 만나 찍던 사진도, 그저 부탁을 받으면서 찍는, 그러나 부탁만으로는 찍지 않고 나 스스로 그 시인을 마음에 담고 또 사진으로도 담고 싶어서 찍는 사진이었기에 늘 마음이 벅찹니다. 부풀어오릅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읽는이는 시를 소리내어 읊고, 사진쟁이는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사진기 단추 소리와 시 읊는 소리가 하나로 엮이고, 시인이 또박또박 적어내려간 글줄이 사진 한 장 두 장 올올이 새겨집니다.


 반세기 동안이나 吳氏네 식구들을 품어온 집이
 포클레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기왓장들 밑에 엎드려 있던 침묵과
 거기 기대어 허공 바라기 하던 담쟁이덩굴
 담벼락의 소변금지와
 밤 청춘들의 입맞춤을 눈감아주던 능소화가
 일순 세상 바깥으로 쓸려나간다

 길은 희미하다
 먼지로 돌아가는 것들의 비명이
 마을을 흔들어댄다
 ……  (다녀가다)



 시란 무엇일까, 사진이란 무엇일까, 글이란 무엇일까, 예술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문화란 무엇일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가운데, 시읽는잔치 사진은 이백 장 가까이 찍게 되고, 저녁나절 시디 한 장에 구워서 이튿날 우편으로 시인한테 부칩니다. 시인은 사진을 찍어 주기만 해도 고마웠다며 당신이 손으로 이름을 적은 시집을 한 권 내어줍니다. 그러나 저는 벌써 제 주머니에서 돈 칠천 원을 꺼내어 당신 시집을 사서 미리 읽었는데.

 손때 타며 읽은 시집은 한쪽에 꽂고, 손때 안 탄 말끔한 시집은 옆에 나란히 놓습니다.





 (2) 사람으로 가는 길


 제 일터인 도서관에 오늘 찾아온 손님은 둘. 한 분은 “도서관 맞지요? 그런데 여기가 책을 파는 곳입니까, 보러 오는 곳입니까?” 하고 묻기에, “네, 여기는 책을 보는 곳입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니, “네, 잘 알겠습니다.” 하고는 고개숙여 인사하고는 돌아갑니다. 처음 들어서면서 “도서관 맞지요?” 하고 물었으면서, 왜 “책을 파는 곳입니까?” 하고 물었는지 궁금하지만, 그분한테는 당신 주머니를 털어서 책을 사는 일만 즐겁고, 걸상에 앉아서 가만히 책을 읽고 돌아가는 일은 즐겁지 않으신 듯합니다.

 마음에 담는 책이기에 내 물건으로 삼지 못한다고 해도, 찬찬히 책장을 넘겨 읽는 동안 가슴이 꽉 차 오른다고 느끼고 있는데, 이런 생각은 제 섣부르면서 짧은 생각이었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이윽고 다른 손님 한 분 찾아옵니다. 조용히 책을 둘러보고, 이곳저곳 쌓여 있기도 한 책을 살며시 집어서 웃음 띤 얼굴로 펼쳐봅니다. 저는 책상 앞에 앉아서 제 일을 하다가, 매실을 탄 찬물과 찐고구마 하나를 내어드립니다. 손님은 발소리를 죽인 걸음으로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한 권씩 끄집어내어 읽은 다음 제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책을 그 모습 그대로 즐겨 주는 모습이 고마워, 그동안 찍어 놓았던 골목길 사진 묶음을 슬쩍 건네며, “마음에 드시는 사진 있으시면 한 장 가지셔도 돼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도서관 빨랫줄에 줄줄이 걸어 두어도 괜찮지만, 반가운 손님한테 한 장씩 나누어 주어도 좋습니다. 따지고 보면, 도서관 책들을 바깥으로 빌려 주지는 않아도, 애타게 찾거나 바라는 분이 있으면,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그 책을 찾아내어 선물해 드리기도 합니다. 때때로.


 三伏고개 무사히 넘긴
 똥개 한 마리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실려 십정동을 떠난다
 누렁이는
   미안허다 미안허다아
 중얼대며 손 흔드는 노파의 가슴에다
 눈빛을 박은 채
 철창바닥에 엎드려 간다
 매일 핥던 밥그릇과 잔등에 머물던 주인의 손길
 누비고 다니던 골목의 냄새와
 사나운 기억들을 끌고
 아구탕 집 아리랑모텔을 지나
 중국식품점 모퉁이를 돌아
 간다
 ……  (십정동―이별)



 골목길을 찍은 사진은 골목길에서 골목사람으로 살아가는 제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발자국입니다. 내 모습, 여기에 이웃 모습, 그리고 우리 모습을 꾸밈없이 담아 보고자 합니다. 잘나지 않았으나 못나지도 않은 모습입니다. 남다르지 않으며 저마다 제 깜냥과 그릇에 따라서 채워 가는 모습입니다. 어여쁘거나 아름답다고 추켜세우지 않는 모습이나 꾀죄죄하거나 지저분한 모습도 아닙니다. 낡은 옷을 입었어도 옷이요, 오래된 신을 신었어도 신이며, 나이먹은 사람도 사람입니다. 나이가 먹었으니 빨리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니며, 오래된 책이라 해서 케케묵은 책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책은 책입니다. 사진 또한 예술 사진도 다큐 사진도 아닌 그저 사진입니다. 사람을 찍어도 사진, 자연을 찍어도 사진입니다.


 해가 서쪽 하늘에 누운 한여름날
 볼일 보고 돌아오는 골목길에
 거친 숨소리 흩어진다
 고개 돌려보니
 한 사내
 홀로
 황홀해하고 있는 중이다 한창
 부끄럼도 없이
 노을보다
 붉은 얼굴로  (십정동―바바리맨)


 처음 사진을 찍던 때부터, 제 사진은 이웃들한테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라는 사람마다 한 장씩, 또는 여러 장씩 찾아 주었습니다. 그러느라 필름값보다 더 많은 돈을 쓰면서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제 사진기에 찍히는 사람들은 자기한테 돌아오는 열매(사진)를 보면서, 하루이틀 지나는 동안 제가 사진기를 들고 앞에서 깝죽거려도 스스럼없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더군요.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렇습니다. 시인을 둘러싼 사람들이 시인하고 꼭 같은 매무새로 어우러지는 모습은, 시인이 제 삶과 살을 바쳐서 이루어 낸 열매인 시를 스스럼없이 누구한테나 나누어 주었기에, 시 하나 받아먹은 이웃사람들도 꼭 같은 시마음이 되는 한편, 당신 스스로도 시인한테 시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는 곁지기가 되지 않느냐 싶어요.


 한길에서
 차에 치어죽은 쥐를 보았다
 죽음이란 저리도 납작한 것이던가

 광고지가 차 바람에 날려가
 놈의 허리께를 덮었다
 놈은 그 순간
 “싼 이자로 돈 빌려드립니다”가 되었다  (변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함께 쓰고 즐기는 시입니다. 함께 찍고 나누는 사진입니다. 그림그리기도, 글쓰기도, 다른 모든 문화와 예술도 서로 어깨동무를 겯으며 합니다. 망치를 들건 호미를 들건 우리들은 서로서로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땀꽃을 맺습니다.

 이야기꽃은 서로서로 마음으로 파고들며 일하는 고단함을 잊도록 합니다. 땀꽃은 땅으로 스며들며 우리한테 고마운 밥거리를 선물해 줍니다.





 (3) 사랑으로 가는 길


 시집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나서 석 달에 걸쳐 되읽고 새로 읽습니다. 금세 읽을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시였고, 두고두고 또 읽을 만큼 가슴을 적시는 시입니다.

 시란 이렇구나, 이래서 시를 쓰네, 이러니 시집을 사서 품에 안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는 꿈을 꿀 테지, 하는 생각이 몽글몽글 이어집니다. 그러나 시집 끝자락에 붙은 어느 문학평론가 풀이말은 영 와닿지 않습니다. 시면 시지, 시를 도마에 올려놓은 물고기로 아나 싶은 생각이 그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문학을 배우거나 가르칠 때에 모두 이렇게 배우거나 가르치니까 다들 시를 재미없어 하겠다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시를 시 그대로 껴안도록 하지 못하고 울타리를 쌓으려고 하니 시를 쓰는 사람 스스로도 사람들하고 금을 긋고서 고개가 빳빳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시를 시 모습으로 받아먹으면서 자기 몸을 시하고 맞추지 못하는 글로 시를 말하니, 시를 말하는 사람 스스로 참살길을 헤아리는 슬기가 아닌 밥벌이 노릇 하는 평단과 강단에만 서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는
 365일 전경들의 경호를 받는다
 총부리 치켜들고 인천 항구를 밟은 뒤
 반세기가 넘도록
 제가 건너 온 바다만 바라보고 서있는 異國사내
 그의 발밑은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지뢰밭이다
 충돌한다 충돌한다
 빨강과 파랑이, 꽃과 돌멩이가,
 그 틈에서
 조선의 아들들 고추바람 뚫고 밥을 먹는다
 거대한 제국의 채찍을 막느라
 더글라스 맥아더 저
 구리인간의 옆구리를 지키며
 엄동설한 한데 밥을 먹는다

 어디서 보았는가
 들었는가
 이런 광경을
 참으로 기이해서
 눈물이 다 나는  (작은 전설―자유공원의)



 히유, 한숨 짧게 내뱉고 옥상마당으로 올라가 기저귀 빨래를 걷습니다. 오늘은 옆지기가 2/3쯤을 빨고 저는 1/3만 빨았습니다. 그러나 빨고 나면 새 빨래가 나오고, 다 마른 빨래를 걷어 개면 앞서 빨아 널은 빨래가 마릅니다. 하루 내 기저귀 스무 장 남짓이 돌고 돌아 아기 사타구니에 대여지고 대야에 담가지고 두 손에 빨려지고 햇볕에 말려지고 다시 두 손에 개어집니다.

 햇살을 받으며 빨래를 다 걷고 나서 잠깐 뒤로 돌아서 지붕 낮은 골목집 동네를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고작 4층 옥상집이지만, 동네를 훤하게 내려다보게 됩니다. 4층만 해도 대단히 높은 층입니다. 2층만 되어도 이웃집을 건너다볼 수 있으니까요.

 나도 시를 쓸까, 내가 시를 쓰면 어떤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내가 쓰는 시는 누구한테 즐겁게 읽힐 삶자락으로 다가갈까.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에 앞서, 내가 찍는 사진 하나가 바로 시요, 내가 좋아하면서 손에 살며시 집어드는 책 하나가 시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게 됩니다.


 ……
 편지를 읽는 사이
 마음에 켜진 등불로 한껏 밝아진 나는
 종일 어두워지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별들을 헤치고
 내 안으로 든 기린이
 나를
 詩의 門으로 데리고 들어가
 목을 축여주었다
 오랜만에 단잠 이뤘다  (나뭇잎 편지)



 옆지기는 옛동무한테 손으로 편지를 한 장 써서 우체국에 가서 부치고 옵니다. 저도 며칠 사이로 우리 아버지한테 편지를 한 장 써서 부쳐야겠습니다. 곧 아기 돌도 다가오니, 돌잔치를 할 때 놀러오시라고 편지를 띄워야겠습니다. 우리 아기 돌잔치에는 뷔페니 뭐니 하나도 안 하고, 동네 헌책방골목 ‘시 다락방’에서 우리 아기와 우리 두 가시버시가 이 땅에서 씩씩하고 꿋꿋하고 튼튼하고 싱그럽게 살아갈 힘을 내도록 이끌어 주는 시를 열 꼭지건 스무 꼭지건 골라서 나누어 읽는 자리로 마련하려 하니, 아버지도 시 하나 읽어 주어 우리를 축복해 주십사 하고 편지를 띄워야겠습니다. (4341.10.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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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로 살아가는 고등학교 적 국어 선생님
 ― 열일곱 해 동안 품어 온 물음 하나

 


 1991년 8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던 저는 갑작스런 조회가 생겼다면서 전교생을 운동장에 부를 때 투덜거리면서 나갑니다. 그무렵, 월요일 아침에 한 번, 토요일 아침에 또 한 번, 온 학교 학생이 죄 운동장에 모여서서 군대사열을 하듯 아침모임(조회)을 해야 했습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고되고 지겹고 힘들기도 한 아침모임인데(겨울에는 잠바를 입고 나와도, 와이셔츠 안에 옷 한 벌을 끼어 입어도 복장불량이라면서 불러내어 두들겨패고 그랬습니다), 그런 아침모임을 불쑥 한다니까 입이 부루퉁 튀어나오지 않을 동무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난데없는 아침모임은 장학사가 오니 청소를 하라느니 하는 아침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곧 모의고사를 보는데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대는 아침모임도 아니었습니다. 시험성적 잘 나오는 몇몇 아이들 올려세워서 자랑해 주는 아침모임 또한 아니었습니다. 늙수그레한 국어교사 한 사람이 ‘이제 교사 일은 그만두고, 소설쓰기에만 온삶을 바치겠다’고 해서 마련해 주는 ‘퇴임식’이었습니다.


.. “10년 전 이런 한을 맺고 고향 인천에 왔는데 난 장편을 쓸 것이다. 너희들은 학력고사 공부를 해라. 너희들의 시험이 끝날 무렵 나도 결과를 받을 것이다. 우리 같이 한번 모든 걸 걸어 보자!” 제자들한테 그렇게 말하고 매일 저녁 교실 뒷자리에서 장편을 쓰기 시작했다. 정말 처절하게 썼다. 함께 니나노 집에서 술도 먹고 파친코에서 월급봉투도 다 날리기도 하며 어울리던 동료 선생들이 내가 장편을 쓴다며 피골이 상접한 채로 자기 일에만 매달리니까 냉대를 했다. 나를 몹시 신뢰했던 교감 선생님도 한두 번은 봐주었는데, 나중에는 “야, 이원규! 집에 가서 써.” 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소설을 쓰기 위해선 결국 그런 걸 이겨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 자리에서 “교감 선생님, 절 내쫓으세요. 징계위원회 여세요.”했고, 동료 선생들에게도 “날 죽여라.” 하고 말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 나하고 야근에 걸리는 선생들은 아주 싫어했다. 내가 소설을 쓴답시고 순회지도를 안 하니까 혼자 힘들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렇게 말하며 계속 밀고 나갔다. 교실 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다. 그때 내 반 아이들은 지금 나이 마흔이 넘어 같이 늙어 가는데 참으로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담임이 매일 뒷좌석에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설에 매달려 있으니 담배 피우러 나가지도 못하고 농땡이도 못치고 모든 걸 체념하고 공부나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대학 가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그래서인지 57명 중 43명이 4년제 대학에 갔다 ..  (인터넷 누리집 〈소설가 이원규와 푸른 날개〉에 올려진 글 : 나의 등단 시절 http://cafe.daum.net/novelistleelove〉)


 처음엔 뭔 짓을 하느라 부산을 떠는가 싶었지만, 난데없는 아침모임 집합보다 더 난데없는 ‘퇴임식’이었기에 눈이 동그래집니다. 게다가, 몸이 아파서 그만두지도 않고, 다른 일이 있어서 그만두는 일도 아닌, ‘소설을 써야겠으니 그만두겠다’는 퇴임식이라니.

 지금은 교장선생이 된 또다른 국어교사 한 사람이 사회를 보면서, 떠나가는 국어교사를 소개하고, “이러저러하니까, 잘 들어 보도록!” 하면서 말을 마치니, 곧 떠나갈 국어교사인, 이원규 님이 길지도 짧지도 않게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한테는 소설쓰기가 너희들 가르치는 일보다 더 큰 일이고, 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면서 이 일을 그만두니, 우리들도 자기가 어떤 뜻을 하나 품으면 그 일을 제때 할 수 있도록 놓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선 열여섯 고등학교 일학년 학생 머리에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궁금함은 풀어 주지 못합니다. ‘요즘(1991년) 세상에 소설만 써서 어떻게 먹고살 생각인지, 당신 마나님이 바깥에서 돈벌러 다녀야 하지는 않은지, 이 좁다란 인천바닥에서 소설을 쓴다고 해 봐야 누가 알아주고 누가 책을 사 주고 누가 거들떠보아 주기나 하는지’ 들을.





.. 당선작 〈훈장과 굴레〉는 아들 이름으로 당선공고가 났고 연재를 시작할 때는 내 이름으로 나갔다. 4백만 원짜리 파티였다던가. 서울의 최고급 호텔에서 열린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식에서 우리 부부는 무대 위에 앉았다. 당시 현대문학사 편집장이던 감태준 선생이 내 학교 교장 선생님을 대학의 은사이신 미당 서정주 선생님과 김동리ㆍ김춘수ㆍ조병화 선생님 등 문단 원로들 사이에 앉혔다. 그분이 누군가를 아시고 미당 선생님이 한  말씀 하셨다. “저녀석이 내 제자인데 참으로 큰일을 했습니다. 우리 대학의 영광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다른 원로 선생님들도 부탁을 했다. 교장선생님은 기분이 좋아서 다음날 직원조회 때 말씀하셨다. “이원규 선생을 새 학기에 도서관장으로 발령하겠습니다. 불만들 없으시지요?” 두 해 동안 주당 수업 14시간인 도서관장 자리로 가서 나는 생애에서 가장 좋은  단편 십여 편을 썼다. 20여 년이 흘렀지만 그 뒤 다시는 그 날 같은 행복한 몸 떨림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내가 재작년과 작년에 써낸 책들이다. 소설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평전을 쓰며 지내는 오늘 그 시절의 처절한 글쓰기의 열정과 고난, 그리고 그 날의 몸 떨림이 그리워진다. 내가 여섯 번 최종심에서 떨어질 때 우리 모교에는 소설가 선생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직계후배이자 제자인 학생들에게 언제나 더 잘해 주고 싶다 ..  (인터넷 누리집 〈소설가 이원규와 푸른 날개〉에 올려진 글 : 나의 등단 시절)


 국어교사 이원규 님이 그만둔 학교는 인천 인항고등학교. 처음 학교를 세울 때 ‘나중에 교장 시켜 준다’는 말을 듣고 들어왔다고 하는 이원규 님은, 1회 졸업생인 우리 형한테 국어를 가르쳤습니다. 2회 졸업생인 사촌형도 이원규 님한테 국어를 배웠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4회 졸업생인 저는 이원규 님이 아닌 다른 분한테 국어를 배웠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소설 쓰는 국어 선생이 한 사람 있지.” 새로 생긴 학교에 1회로 들어간 형이, 4회로 들어가는 동생인 저한테 해 주던 말. “그렇지만, 소설 쓴다며 나가고 난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데 뭐.”

 그 뒤, 드문드문 인천 지역 일간신문에 나오는 이원규 님 기사를 보고, 서울에서 나오는 중앙일간지에도 짤막하게 나오는 이원규 님 새책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마다 ‘용케 굶어죽지 않으시고 소설 잘 쓰고 있으시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문학책깨나 읽는다’는 대학교 동무나 선후배들한테 ‘소설을 쓰는 이원규 님 압니까?’ 하고 물으면 어느 누구도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고향이 인천인 동무나 후배들 또한 아무도 모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교지편집부 후배들한테, “야, 우리 학교에는 소설가 국어 선생님이 한 분 계셨어.” 하고 말하면, “네, 진짜요? 지금 뭐하세요? 우리도 그런 분한테 배워 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 인천과 황해를 배경으로 잡은 것은 내 고향에 대한 애정도 컸지만 이곳이 외세 침탈의 문호였고 분단이 고착되던 절망의 시기에 민중의 의지가 번번이 꺾이고만 비운의 장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곳을 현대사의 한 의미 깊은 공간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책임을 참으로 오랜 시간 가져왔던 것이다. 오늘도 칙칙한 색으로 말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황해의 파도에는 슬프고 어두운 과거가 묻혀 있고 이 소설에서 다룬 사건들은 그런 한스런 현대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 ..  (소설 《황해》(1992) 글쓴이 말)





 그리고 2005년, 소설을 쓰던 국어교사 이원규 님은 《약산 김원봉》(실천문학사)을 내놓고 이듬해에 《김산 평전》(실천문학사)을 내놓습니다. 소설이라면 소설로 다시 빚은 이야기이고, 소설이 아닌 평전이면 소설쟁이가 바라본 역사를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이 두 가지 책이 나올 때, 《약산 김원봉》과 《김산 평전》을 쓴 그 ‘이원규’가 내가 아는 이원규가 맞는가 하고 헷갈렸습니다. ‘이원규’라는 이름으로 문학을 하는 분이 여럿 있고, 같은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도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이원규 님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자리에 서 있었고, 국어교사를 그만두고 열 몇 해에 걸쳐서 한길로 파고든 역사소설이 밑거름이 되어 약산이 새로 태어났고 김산이 거듭 태어났습니다. ‘그래, 비로소 국어 선생님이 이렇게 소설쟁이라는 이름을 훨씬 굵직하게 받는구나. 그러나 평전은 소설이 아닌데, 우리 국어 선생님은 소설가라는 이름보다 평전 작가라는 소리를 더 자주 들어 버리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약산과 김산에 이어서 죽산 이야기도 써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둘레에서 곧잘 들으시는 듯합니다. 약산과 김산은 곧은 뜻을 품고 독립과 혁명을 바란 이라면, 죽산은 당신한테도 고향인 인천에서 뿌리를 내리며 독립과 혁명을 꿈꾸던 스승이요 선배이니까요.

 “작가니까 이렇게 살지요.”

 2008년 10월 18일 낮 네 시. 인천 배다리 헌책방골목 한켠에 있는 〈시 다락방〉에서 인천작가회의가 ‘우리 시대 작가와의 만남’ 자리를 열었습니다. 열한 번째를 맞이한 이 자리에는 소설 쓰는 이원규 님이 이야기꽃을 피웠고, 두 시간이 넘는 이야기꽃을 마무리하고 밥과 막걸리를 드는 자리에서 넌지시 여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교사 자리를 그만두고 소설만 쓰겠다고 뛰쳐나갈 수 있었는지’를, ‘그렇게 뛰쳐나갈 때 당신 마나님은 선선히 받아들이셨는지’를, ‘그렇게 뛰쳐나오고 먹고사는 일과 아이들 가르치고 기르는 일은 잘할 수 있었는지’를.

 “(교사) 현직에 남아 있는 것보다 잘했어요.”

 열일곱 해 만에 다시 만나는 어제까지, 제 마음속에는 이 물음 한 가지, ‘교사로 있으면서도 소설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뜻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그처럼 박차고 나올 수 있었는가’ 하는 궁금함이 있었습니다. 지난날이든 오늘날이든 고등학교라는 곳은 대학교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자리라, 국어교사라 한들, 시험 문제에 나올 지식만 가르쳐야지, 참다운 국어, 곧 참된 우리 말과 참된 우리 문학을 가르칠 만한 자리가 못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두동짐, 엇갈림, 어긋남 때문에 외려 고등학교 국어교사 자리는, 우리 말과 문학을 엉터리로 엉뚱하게 잘못 받아들여서 우리 말과 문학을 멀리하고 말지 모르는 아이들한테 참 가르침을 베풀거나 나누면서 곱새기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입시문제 때문에 말과 문학을 이렇게밖에 알려줄 수 없지만, 너희가 느끼고 가슴으로 껴안아야 할 말과 문학은 이런 교과서 지식이나 시험문제가 아니다’ 하고서.

 “지금 나이(예순둘)에는 그렇게 못하겠지만, 그때(교사 퇴직 할 때가)는 마흔다섯이었는데, 내 자신(삶)을 걸 수 있었지.”

 막걸리잔이 돌고, 둘레에 앉은 문학 하는 어르신들은 문학창작과 평전쓰기와 역사소설과 여러 가지 말씀들을 묻고 듣고 여쭙고 받고 합니다. 이러는 동안 저는 오로지 하나, 문학한다는 마음 하나로 살아가는 매무새란 무엇인지를 더 느끼고 싶고 듣고 싶고 알고 싶어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집에서 저를 기다리는 아기 칭얼거림을 한 귀로 느끼느라 한쪽 다리는 얼른 집으로 가야겠다면서 들썩이는데, 한 귀는 “종규야, 문학을 ……” 하면서 자리에 붙잡아 놓는 소설 쓰는 옛 국어교사 아저씨 이야기를 들으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가운데.





 “…… 그때(교사를 그만두고 소설만 쓰던 1990년대에) 소설만 쓰면서도 원고료나 인세는 지금보다 잘 들어왔어요. 그리고 대한생명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편당 30만 원으로 40회짜리 강의 자리를 만들어 주어서(1991∼1992년), (대한생명 보험) 아줌마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했어요. 그래서 강의 솜씨가 많이 늘었지. 힘들었는데 끝까지 마쳤어. 그리고 사보에다 글을 썼고.”

 “마누라 야쿠르트 배달 안 시키고 소설 잘 썼어요.”

 “(무엇을 쓰든) 작가는 도전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에요.”
(4341.10.19.해.ㅎㄲㅅㄱ)


***
판이 끊어져서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만, 소설꾼 이원규 님이 엮어낸 작품으로는 : 《훈장과 굴레》, 《침묵의 섬》, 《깊고 긴 골짜기》, 《천사의 날개》, 《펠리컨의 날개》, 《황해》,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독립전쟁이 사라진다》, 《저기 용감한 조선 군인들이 있었소》,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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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
박영희 지음, 강제욱 외 사진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7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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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62 ― 사라지는 사람은 수공업자가 아닌, ‘착한’ 사람들
 :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



- 책이름 :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
- 글 : 박영희
- 사진 : 조성기, 강제욱, 안성용, 안중훈, 정윤제, 장석주
- 펴낸곳 : 삶이보이는창 (2007.11.17.)
- 책값 : 11000원



 (1) 누구 맘대로 ‘사라지는 직업’이라 말하는가


 엊저녁 ㅁ방송국에서 헌책방 이야기를 방송으로 찍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느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네들은 헌책방을 다녀 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하면서, 추억으로 남겨지며 사라지는 헌책방인데 이 헌책방을 아끼고 사랑하며 찾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찍겠다고 합니다.

 스스로 아직 찾아가 보지 않은 곳을 애써 찍으면서, 사람들한테 널리 알리겠다는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부딪혀 보면 깜냥껏 길찾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저 같은 사람한테 이렇게 불쑥 연락을 해서 오늘내일 사이에 짬을 내어 도와 달라고 하지 마시고, 시중에 나와 있는 ‘헌책방을 말하는 책’도 있으니까, 그 책부터 먼저 사서 읽으신 다음, 가까이에 있는 헌책방을 몸소 찾아가 보시라고 말씀드린 다음 전화를 끊습니다.

 아직 하나도 모른다고 하는 헌책방을 찍는다는데, 저든 다른 누구든 옆에서 도와주면서 이곳저곳 찾아가서 찍는다고 할 때에는, 길잡이가 일러 주는 대로만 찍게 되지, 찍는 분들 스스로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헌책방을 담으려고 하는가를 엮어내기는 어렵기 마련입니다. 좀 어설프게 되더라도, 손수 헌책방 나들이를 해서 책 구경을 하고 다문 몇 권이나마 책을 사고, 또 산 책을 찬찬히 읽으면서 헌책방에는 어떤 맛과 냄새가 스며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더 널리 세상을 보고 더 깊이 사람을 만나면서 몸으로 부대껴야지요. 지금은 헌책방 한 가지이지만, 앞으로 찍을 수많은 사람 삶과 발자취이니, 찍는 시간이 짧더라도 그 짧은 동안에도 확 뛰어들려는 매무새를 길러야지 싶습니다.


.. “누군가 제과점에 1억 원을 투자해 하루 50만 원어치의 빵을 팔았는데도 불구하고 한 달 500만 원을 적금으로 붓기가 어렵다면, 저는 1000만 원을 투자해서 하루 5만 원어치의 빵을 팔고, 한 달 50만 원을 적금으로 붓는 쪽에 주사위를 던지겠습니다. 이 가게를 연 건 우리 빵을 내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지 떼돈을 벌어 보려고 한 건 아니었거든요.” ..  (66쪽)


 이달에 나온 사진잡지 ㅍ을 보니, 여러 가지 사진잔치 소식이 실려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진잔치 가운데 “사라져가는 직업들”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옵니다. 낯익은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우리 동네 헌책방골목에 있는 〈집현전〉 헌책방 할머니가 당신 일터 앞에서 활짝 웃는 얼굴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을 내건 사진잔치 이름은 “사라져가는 직업들”. 사진잔치를 짤막히 알려주는 글을 보니, “1990년대부터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든 개인 사업자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업종 중 진보하지 못한 업종들을 촬영한 사진을 통해 삶과 사회적 변화 혹은 소외받은 이들을 다시 한 번 조명하는 전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진잔치 대표작으로 앞세우는 ‘동네 헌책방 할머니’는, 사진작가께서 이야기하려는 두 가지 이야기감 가운데 어느 쪽일지 궁금합니다. ‘우리 둘레에서 찾아보기 힘든 개인 사업자’인지, ‘흔하게 볼 수 있으나, 스스로 발돋움하지 못해 사라지는 사업자’인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이 찍은 헌책방 할머님한테도 “사라져가는 직업들”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진잔치에 초대장을 보내주었을까 궁금합니다. 헌책방 할머님이 초대장을 받았다고 한다면, “사라져가는 직업들”이라는 이름으로 당신 얼굴이 맨앞에 실린 사진을 보면서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지 더없이 궁금합니다.


.. “고부(5부)를 올라서야 기술자 소리를 듣는데 이때가 가장 지겨운 기라. 같은 기술자라도 장가든 놈부터 고부로 올려줬다 아이가. 지금 와 생각해 보니까네 어른들의 마음이 이해는 된다. 처자식이 있는 놈부터 먼저 승진시켜야 세상 도리가 아니겄나?” ..  (84쪽)


 가만히 보면, 헌책방이라는 곳은 헌책방을 즐겨찾는 이들 스스로 깎아내리거나 갉아먹습니다. 배운 분들은 배운 분들대로 ‘헌책방 임자가 제값을 못 알아보고 싸구려로 넘겨주기를 바라는 소중하고 드문 책’을 눈밝히고 찾아내려고 애쓰기만 합니다. 적게 배운 분들은 적게 배운 분들대로 ‘헌책방하고 고물업이 뭐가 다르느냐’ 큰소리를 내며 ‘이깟 헌책 나부랭이 천 원 한 장이면 되지’ 하는 막말을 일삼습니다.

 그래도 헌책방이 이제까지 고이 버티면서 전국 곳곳에 점점이 뿌리내리면서 우리한테 고마운 책을 베풀어 올 수 있던 데에는, 얄궂은 책손은 꼭 있기 마련이지만, 얄궂지 않은 책손이 좀더 많았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눅은 값으로 팔아 주는 책 하나를 가벼운 주머니로도 넉넉히 장만하도록 해 주기에 고맙습니다. 다 읽은 책을 기꺼이 내놓아서 내가 헌책방에서 도움을 얻었듯 다른 이도 헌책방에서 도움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 손길을 느끼기에 고맙습니다. 저는 저대로 낯 모르는 분한테 도움을 받고, 낯 모르는 분은 또 그분대로 제가 헌책방에 내놓는 책으로 도움을 받습니다.

 지식을 담는 책입니다. 우리들은 책 하나 장만하여 읽으면서 한결 똑똑해지고 좀더 슬기로워질 수 있습니다. 지식을 다루는 슬기를 서려 놓은 책입니다. 우리들은 책 하나 장만하여 읽으면서 우리가 여태껏 얻거나 받은 지식을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나누면 좋은가를 깨닫고 느끼면서 새로워지곤 합니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헌책은 새책 앞에서 기꺼이 고개를 숙입니다. 도서관 책 앞에서도 고개를 숙입니다. 고개가 빳빳한 새책방과 도서관은 언제나처럼 코도 높고 키도 큽니다. 그렇지만 새책방에 오래오래 머물 수 있는 새책들이 아니라, 사랑을 못 받거나 덜 팔리면 어느새 사라집니다. 출판사가 문을 닫으며 사라집니다. 도서관 책이라 하여 오래오래 책시렁에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조금 낡아지면, 대출실적이 없거나 적으면, 맞춤법이 옛것인 묵은 책이면 제자리를 비우고 다른 책이 들어서야 합니다.

 모든 상수도 물은 하수도 물이 있기에 흐를 수 있고, 모든 지하수는 땅으로 스미어 걸러지도록 하는 흙과 돌이 있어서 시원하면서 깨끗합니다. 비가 내리려면 말라서 하늘로 몽글몽글 올라가는 김이 있어야 합니다. 골짜기 물이 거침없이 흐르자면, 골짜기까지 천천히 솟아나는 밑바닥 물이 있어야 합니다. 헌책방은 늘 아랫자리에서, 밑자리에서 소리도 없고 소문도 없이 이어왔습니다. 이리하여 헌책방이라는 데를 ‘책을 읽으러’ 다녀 보지 못한 사람들 눈에는 예나 이제나 ‘사라져가는 곳’이나 ‘추억이 서린 곳’이나 ‘참고서 값싸게 사던 곳’이나 ‘포르노잡지를 몰래 훔쳐보던 곳’을 넘어설 만큼 바라보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헌책방이 우리한테 내어준 품을 안아 보지 못했고, 헌책방이 우리한테 베풀어 준 사랑을 느껴 보지 못했어요.


.. “미용실이 생겨날 때만 해도 다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는 남자 손님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남성전용 클럽은 느낌부터가 달랐어. 돈으로 밀어붙인다고 할까. 이 바닥은 이 바닥대로 쉬어 온 숨소리가 있는데 그 숨소리마저 돈으로 쓸어버릴 것 같았지.” ..  (114쪽)


 지난주에도 집에서 더는 안 보는 책이랑, 우리한테는 쓸모가 없으나 다른 이한테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책을 여러 꾸러미 헌책방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선물입니다” 하고 말씀드리고는 그대로 뒤돌아서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로서는 이 책들은 마음에 담아낸 줄거리로 넉넉하고, 읽는 동안 가슴이 뿌듯해졌기 때문에, 그 일로도 얼마든지 값을 다했습니다. 이 책들을 헌책방에 내놓으면서 몇 푼이나마 값을 받아도 나쁘지 않지만, 우리 스스로 값을 안 받으면서 이 책들이 좀더 눅은 값으로 또다른 책손을 만나서 기쁘게 읽혀 주었으면 하고 꿈을 꿉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는 책쉼터가 되는 헌책방이, 앞으로도 꾸준히 살림을 알뜰살뜰 꾸리면서 우리 아이한테도, 또 우리 아이가 먼 뒷날 낳아 기를 아이한테도 언제나 가까이 찾아갈 수 있는 놀이터이자 책터이자 만남터이자 사람 부대끼는 삶터로 단단히 뿌리내려 주면 좋겠다고 비손을 올립니다.


.. 가만! 빠뜨린 게 하나 있다. 아침 7시 반, 출근을 너무 빨리하는 것 아니냐며 묻자 그는 출근하는 사람들을 걸고 넘어졌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그 시간에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람이 바람을 넣으러 가게에 들렀다가 문이 닫혀 있으면 얼마나 허탈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 세 방 중 한 방 정도는 공짜로 ‘빵꾸’를 때워 주던 ‘섬산 자전거포’ 그 아저씨를 닮은 듯했다 ..  (174쪽)


 (2) 사라지는 사람은 ‘착한’ 사람들


 사진이 퍽 많이 실려서 현장 느낌을 살려 주는 듯한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또 책을 덮은 뒤로 한참, 이 책에서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이야기가 마음에 걸립니다. 지금 우리들이 보기에는 ‘사라져가는’ 무엇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라진다’는 말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알맞지 않습니다. 이분들, “사라져가는 수공업자”며 “사라져가는 직업들”이라 묶여지는 분들은, ‘푸대접받는’ 분들입니다. ‘따돌림받는’ 분들입니다. 늘 푸대접받고 언제나 따돌림받지만, 그러면서도 꿋꿋하고 씩씩하게 당신 한길을 걸어온 분들입니다. 사람들이 무어라 하건 말건 당신 스스로 보람을 느끼면서 울고 웃으면서 이어온 일입니다. 벌이가 많건 적건 스스로 기쁨을 맛보면서 집안살림을 꾸리고 아이들을 기르고 가르쳐 온 일입니다.


.. 제대와 함께 복직을 했을 때다. 제과제빵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파리바게뜨’의 출몰은 소규모 제과점들을 한 방에 날려버렸고, 그 여파는 제과점을 상대로 경영을 해 온 밀탑까지 쓰러뜨려 버렸다 ..  (54쪽)


 사라지게 된다면 사라지게 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다면 사랑받는 까닭이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에 실린 사람들, 세공사와 제과제빵사와 선박 수리공과 이발사와 철구조물 제작사와 자전거 수리공 들은 왜 사라지게 되는 사람들, 사라지게 되는 수공업자일까요.

 이분들은 왜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밀려나거나 쫓겨나거나 내동댕이쳐지는 사람들, 수공업자가 될까요. 이분들 일은 어이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따뜻이 들여다보거나 따스히 감싸안는 일이 되지 못할까요.


.. “가위를 잡은 지는 오십 년째고, 이 가게에서 일한 지는 올해로 삼십칠 년째가 되는데, 손님 같지 않아.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 같아. 한 번 생각해 봐. 서른 중반부터 봐 온 얼굴들을 지금까지 봐 오고 있으니 이게 어디 주인과 손님의 관계라고 할 수 있겠어. 계모임 하듯 한 달에 한 번은 보잖아.” ..  (118쪽)


 저로서는 어떤 학문이나 설문이나 통계나 자료조사로 이분들 삶을 바라보고 싶지 않습니다. 사회과학 풀이에 따라서 파헤치고 논문을 쓰고픈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이분들하고 똑같은 동네에서 이웃으로 살아가고, 늘 부대끼며, 크고작은 일마다 어깨동무를 하면서 자잘한 하루하루를 나누고 싶기만 합니다.

 쉰 해째 머리깎이 하면서 살아가는 할아버지처럼, 저는 스무 해 가까이 헌책방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봅니다. 떠꺼머리 때부터 뵈어 온 아저씨가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할아버지가 되었고, 열일곱 푸름이로 학교옷을 입을 때부터 뵈어 온 아주머니가 어느새 손주를 보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여드름이 겨우 가실 무렵부터 보았던 헌책방 할아버지는 어느덧 애 아빠가 된 저를 술동무로 여겨 책 구경은 그만하고 술잔이나 같이 부딪히자며 팔뚝을 잡아끕니다. 스무 해 가까운 세월, 적잖은 헌책방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여러 헌책방 할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기나긴 햇수에 걸쳐서 읽고 보고 사고 되팔고 되내놓고 한 책도 많지만, 눈빛 마주치면서 말없이 이야기를 나누어 온 횟수 또한 많습니다.

 머리깎이 할아버지와 손님처럼, 헌책방 일꾼과 책손은 꾸준히 ‘계모임’을 합니다. 계모임을 할 때마다 당신들 삶이 달라지고 당신들이 낳아 기르는 아이들 삶도 함께 달라집니다. 계모임으로 어우러진 뒤 헤어지기까지는 고작 한 시간, 두 시간쯤일 텐데, 해가 갈수록 이 한두 시간이 기다려지고 바라게 되고 손꼽는 날이 됩니다.


.. 딱히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의 손만 타면 검푸른 쇳덩이는 눈부시도록 광채를 발산하는 것이다. 내심 걱정이 되는 건 그의 눈이었다. 집중을 요하는 작업일수록 시력이 빨리 망가진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시력검사를 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작업대에만 세 개의 형광등을 켜고 일하는 그는 요즘 들어 눈이 침침하다고만 했다 ..  (38쪽)


 사라지는 사람은 착한 사람들입니다. 잊혀지는 사람도 착한 사람들입니다. 밀려나는 사람 또한 착한 사람들입니다. 자취를 감추어 역사책이고 인문사회과학책 인용자료건 신문기사건 이름 석 자 적히지 못하는 사람 또한 착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오늘도 착한 사람을 만나서 착함을 배우고자 자전거를 몰고 길을 나섭니다. 칭얼거리는 아기는 옆지기가 돌봐 주기로 하고. (4341.10.1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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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다고 느끼는 책
 ― 열 해 뒤 우리 아이한테 물려주어야지



 아침에 ㅎ출판사로 전화를 건다. 얼마 앞서 읽은 책 하나가 퍽 좋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하나 집어낸 잘못과 군데군데 잡아챈 오탈자를 알려주고 싶었다. 인터넷편지로 글을 갈무리해서 띄울 수 있지만, 이 책을 펴낸 사람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한 군데 두 군데 잘잘못을 짚는 가운데 ‘잘못 쓰셨나요, 제가 잘못 보았나요?’ 하고 여쭙는 일이 좀더 반갑다. 나는, 그분이 몇 군데 잘못 찍힌 채 책이 나오도록 했다고 해서 꾸짖을 마음이 아니다. 이 좋은 책을 애써 엮어 내면서 몇 군데에서 아쉬운 대목이 드러나고 말았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얼굴을 마주보고 말할 때와, 전화기로 목소리만 주고받으면서 말할 때, 그리고 써 놓은 글을 읽을 때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나로서는 아무런 ‘싫은 마음’이나 ‘미운 마음’이 없이 수수하게 적어내려간 글을, 엉뚱하게도 ‘내가 아주 싫어하고 못마땅해서 그런 글을 쓰는 줄’ 생각하며 읽기도 한다. 너무 뜻밖이기도 하고 어이가 없는데, 거꾸로 생각하면 내가 글을 제대로 못 써서, 읽는 사람도 제대로 못 읽은 셈이 아니겠느냐면서 속을 다스린다. 앞으로는 엉뚱하게 읽어 주는 일이 없도록. 그러나 애쓰고 또 애를 써도, 어느 한 사람을 외곬로 바라보거나 비뚤어진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내가 아무리 좋고 반가운 느낌으로 글을 쓴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화를 건다. 내 돈 들여서 읽은 책을 내 돈 들여서 전화를 걸어 내 시간을 보내면서 알려준다. 그러면서 나한테 돌아오는 값은 하나도 없다. 나중에 2쇄를 찍으면, 고친 대목을 바로잡아서 알려주겠다는 소리도 없다. 이런 뒷손질을 알려주십사 하고 전화를 하지는 않으나, 내 사는 곳을 물으며 도서목록이라도 보내주겠다고 하는 분은 거의 없다(딱 한 번 있었으나 손사래를 쳤다).

 출판사로 전화를 거는 까닭은, 내가 책을 읽으면서 못 헤아린 대목이나 알아채기 어려운 대목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맙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머니를 기꺼이 털도록 해 준 책이며, 내 시간을 넉넉히 쓰면서 가까이하도록 해 준 책이다. 그러면서 내 생각이나 넋이 좋은 쪽으로 많이 거듭나기도 하고 새로워지기도 한다. 세상을 좀더 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도 되고, 우리 둘레를 좀더 깊이깊이 돌아볼 수 있도록 이끌기도 했다. 그래서, 이만큼 얻은 보람과 기쁨이 있어서, 전화삯 얼마쯤 들인다고 해도, 다른 일을 잠깐 미뤄 두고 이곳저곳 잘잘못을 알려준다고 해도, 나로서는 또다른 기쁨과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오늘 아침, ㅎ출판사 편집부로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잘잘못을 알려주고 나서, 문득 내 입에서 이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다 읽고서 참 좋았는데, 이 책이 2쇄를 찍을 수 있을까 없을까 걱정이 되어서, 2쇄를 못 찍게 되더라도 출판사에는 알려주고 싶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웬만큼 껍데기를 씌워서 내놓으면 어느 만큼 잘 팔린다고 하는 어린이책이요, 이름난 출판사 딱지를 받고 세상에 나오면 기본 부수가 나간다고 하는 어린이책이다. 그러나 이런 어린이책 가운데에서 눈길 한 번 제대로 못 받으면서 조용히 사라지는 책이 제법 많다. 우리 세상을 속깊이 들여다보는 책, 우리 삶터를 찬찬히 헤아리는 책, 우리 땅에 전쟁이 아닌 평화가 오기를 바라는 책, 우리 사회가 푸대접이나 따돌림이나 괴롭힘이 아니라 고르게 아름다울 수 있도록 꿈꾸는, 그러니까 평등과 인권을 바라는 책이 좀처럼 안 팔린다. 어렵게 배앓이를 하고 나온 책임에도 언론 눈길조차 못 받기도 하고, 언론 눈길은 제법 받아도 독자 사랑을 못 받기 일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평화와 평등과 사랑과 믿음을 알알이 담고 있는 책 가운데, 우리와 일본 사이 문제를 다루면 어느 만큼 팔린다. 이 평화와 평등과 사랑과 믿음이 제3세계, 중남미, 아프리카 쪽으로 가면 그냥 안 팔린다. 유럽 작가가 쓴 책은 곧잘 팔리는데, 제3세계나 중남미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쓴 책은 잘 안 팔린다. 모든 책이 이러하지는 않으나, 우리 흐름이 얼추 이러하다. 몽골과 티벳과 인도로 성지순례와 명상순례나 관광여행으로는 나다니지만, 몽골이 어떤 문화와 역사가 있는지, 티벳이 어떤 아픔과 고달픔으로 시달리면서 식민지보다도 못하게 무너지고 있는지, 인도 계급과 사회가 이 나라를 어떻게 휘어잡고 있는지를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이러한 흐름과 얼거리를 보려는 사람이었으면, 나라밖 나들이를 나서기 앞서 이 나라 삶과 삶터 이야기를 다룬 책을 알뜰히 챙겨서 읽었을 테며, 이런 이야기 다룬 책이 쉬 판이 끊어지거나 책방 책꽂이에서 사라지는 일이란 없었으리라 본다. 전국 곳곳에 있는 도서관 책시렁에도 차곡차곡 꽂혀 있으면서 두루 읽힐 수 있었으리라 본다.

 지난 8월 2일에 처음 손에 쥐었으나, 그달 16일에 아이를 낳으면서 손에서 멀어졌고, 아기 돌보기와 옆지기 챙기기가 조금 수월해지는 가운데 다시 손에 쥐면서 부지런히 읽던 책, 《잃어버린 소년들》을 지난 10월 9일 밤에 다 넘기고 덮었다. 엿새쯤 속으로 삭이면서 느낌글 하나를 엮어냈고, 이제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책을 어루만지고 가슴에 안고 살며시 쓰다듬은 다음, 내 책꽂이 한켠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 두려고 한다.

 나 혼자만 좋게 느끼고, 나 혼자만 즐겁게 읽고, 나 혼자만 눈물콧물 질질 흘리면서 읽던 책이었어도, 이 책은 나 하나 살가운 읽는이를 만나서 기뻐해 줄 수 있을까. 아무렴. 내가 좀 모자라거나 어수룩하거나 어줍잖은 읽은이였다고 해도, 살포시 집어들고 즐거이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을 얻었으니, 나와 책 하나는 반갑게 만난 셈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 하나를 사랑해 주었기에, 먼 뒷날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열 살쯤 되는 나이에, “얘야, 네가 엄마 배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던 때 아빠가 너를 품에 안고 이 책을 하나하나 읽어 주면서 눈물을 흘렸단다.” 하고 손때 짙게 묻은 책을 건네어 줄 수 있다. (4341.10.1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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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소년들 - 수단 내전의 참상을 온몸으로 전하는 세 소년의 충격 실화
벤슨 뎅 외 지음, 주디 A. 번스타인 엮음, 조유진 옮김 / 현암사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72 ― 총칼 든 전쟁과 돈다발 든 전쟁
 : 수단 난민 세 소년이 쓴 《잃어버린 소년들》



- 책이름 : 잃어버린 소년들
- 글 : 벤슨 뎅, 알폰시온 뎅, 벤자민 아작
- 엮은이 : 주디 A. 번스타인
- 옮긴이 : 조유진
- 펴낸곳 : 현암사 (2008.6.20.)
- 책값 : 13500원


 (1) 평화란 어떤 삶일까


 우리 집 아기를 보러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느즈막하게 찾아온 손님은 저녁을 미처 못 먹었다고 합니다. 집에서 고구마와 감자를 찐 다음, 먹기 좋게 송송 썰어서 도시락에 담아서 내어 드립니다. 한손에는 도시락통을 들고 한손으로는 냠냠 집어먹으면서 율목동 골목길을 걷습니다. 이따 집에 와서 마실 술 몇 병과 안주거리를 가게에서 산 다음, 가까운 닭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닭집 안이 무척 시끄러워서 우리는 밖에서 먹기로 합니다. 조금 선선하지만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골목길이라서 우리 둘은 호젓하게 앉아서 튀김닭을 밥 삼아 맥주를 마십니다.

 집에서 가까운 골목길 닭집이기에, 두 시간쯤 옆지기가 저한테 말미를 내어주어서, 고맙게도 아기 돌보는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느긋하게 쉽니다. 아기를 혼자서 돌보기에는 옆지기 혼자서 힘들 텐데, 제 몸을 생각해서 이럴 때 손님하고 쉬기도 하고 술도 한잔 걸치라고 해 줍니다.

 이리하여 손님과 저는 닭집 둘레 오래된 골목가게 간판을 구경하면서 간판 이야기도 하고, 서울 골목길과 전국 골목길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울산은 아마 시내버스로 다니기가 전국에서 가장 나쁜 곳이라며, 모두들 자가용을 끌게 되니 자연히 시내버스가 줄게 되어, 낯선 이들이 울산을 찾아가면 택시 아니고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는 아직 울산을 못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으니 궁금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울산만한 도시라면, 자가용보다는 자전거를 몰면 훨씬 즐거울 테고, 찻삯도 아낄 테며, 몸도 한결 나아질 텐데. 가까우면 걷고, 조금 멀면 자전거를 타고, 좀더 멀면 버스를 타고 움직이면 될 텐데. 우리들은 지구자원이 메마르는 일에는 거의 걱정을 않으면서 살고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술잔을 걸치며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지난날 서울에 보금자리를 얻어 살아가던 때 동무나 선후배를 만나 술집에 가던 때를 떠올립니다. 술집을 찾아가는 길은 늘 시끄러웠고 불빛이 번쩍거렸으며 사람으로 가득했습니다. 웬만한 술집은 노래소리로 시끄럽거나 텔레비전 소리로 귀가 따가웠습니다.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이런 시끄러운 소리보다 높은 소리를 내며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우리도 목소리를 안 높일 수 없었습니다. 술집에서 두어 시간 술을 걸치고 나오면, 술기운보다는 귀가 홀가분해지고 머리도 가벼웠습니다. 젊을 때는 시끌벅적한 데를 곧잘 즐겨찾았는데, 나이가 한 살 두 살 들면서 호젓하고 조용한 술집이 아니면 있기 어려워집니다. 같은 술이고 같은 사람이지만, 시끄러운 데에서는 마주한 사람한테 오롯이 마음을 기울이기 힘들어 애써 마신 술도 그리 맛나지 않게 됩니다. 조용하고 호젓한 데에서는 마주한 사람 얼굴을 더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고, 이야기도 훨씬 너르고 그윽하게 나눌 수 있어 술맛도 한결 맛나곤 합니다.


..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평화를 위한 기도를 드려도 평화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차 희망을 잃어 갔다. 난민촌에서는 미래를 계획할 수 없었다 … 난민촌의 삶을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그곳 생활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난민으로 산다는 것은 야수에게 먹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급날이 되어 새벽에 나가서 하루 종일 줄을 서는 일이었다. 3일을 굶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에서는 그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루 종일 끓어오르는 뙤약볕 아래에서 경찰에게서 곤봉으로 얻어맞으며 줄을 섰다 ..  (알레포, 403, 407∼408쪽)


 옆지기가 왜 안 들어오느냐며 전화를 합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나 싶어 시계를 보고는 부랴부랴 자리를 털고 율목동 골목 닭집에서 일어납니다.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경동 골목길 안쪽을 살짝 돌아봅니다. 오래된 문패, 오래된 대문, 오래된 방범창살, 오래된 골목집 마당에서 자라는 감나무 들을 어둠 밝히는 거리등불에 기대어 살짝살짝 느끼면서 걷습니다.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는 골목길이라 밤에는 더 한갓지며 고즈넉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고요함, 이 한갓짐, 이 고즈넉함, 이 아늑함, 모르긴 몰라도 이러한 느낌이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주는 평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 한켠에 조그맣게 마을을 이루어서 쉰 해고 백 해고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평화를 맞이할 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스무 해조차 한 집에서 버틸 수 없이 서너 해에 한 번씩, 아니 전월세 계약이 끝나는 한 해나 두 해마다 새로운 살림집을 알아보고 또 짐을 꾸리며 옮겨서 다시 짐을 풀고 해야 하는 삶이란 싸움터와 마찬가지로 고달프고 힘겹고 마음아픈 삶이 아니랴 싶습니다. 재개발에 따르는 이익이 아니라 재개발에 따라 자꾸만 집터에서 내쫓기며 더 구석과 더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는 삶이란 전쟁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 피터는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나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형 모습이 조금도 못 자란 어린아이 같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눈을 감았다. 피터를 뒤로 하고 요셉 형과 내가 팔라타카를 떠난 뒤부터 지금까지 지내 온 고통스런 순간들에 대해 어떻게 이제 와서 설명할 수 있을까? 조금 정신이 들기 시작하자, 팔라타카에서 피터를 버리고 떠날 때와 같은 고통과 자책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나팅가에 남은 요셉 형, 벤슨 형, 벤자민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요셉 형은 수없이 많이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비록 걷지도 못할 정도로 허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안전한 곳에 도달했는데, 요셉 형은 이미 전선에 배치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리를 심하게 다친 채 더러운 감옥에 갇힌 벤자민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모두 벤슨 형 덕분이었다. 다른 소년들과 함께 탈출할 수도 있었지만 아픈 나를 두고 차마 떠나지 못한 벤슨 형은 이제 나 때문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난 아팠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였다 ..  (알레포, 349∼350쪽)


 집으로 돌아와 옆지기까지 마주앉아서 술잔을 부딪힙니다. 옆지기도 모처럼 가볍게 술 한잔을 하면서 마음을 쉽니다. 아기는 우리 두 사람과 손님을 너그러이 헤아려 주는지, 잠에서 깨지 않고 시간마다 오줌만 눌 뿐, 조용히 잠들어 있습니다.

 새벽 네 시까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가 슬그머니 잠이 들고,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 엊저녁에 불려 놓은 콩과 쌀을 냄비에 담고 밥을 끓입니다. 손님은 열 시가 되어서야 일어났고, 말끔히 씻은 다음 둘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골목 마실을 합니다. 서울에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하지만, 약속은 뒤로 미룬 채 자전거를 타다가 그냥 끌다가 하면서, 골목집 텃밭을 구경하면서 사진으로 담고, 텃밭에 우뚝 서 있는 허수아비를 보며 인사를 하다가 사진으로 남기고, 바람에 나부끼며 햇볕에 보송보송 마르는 빨래를 흐뭇하게 올려다보다가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찍습니다.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올라가야 하는 언덕받이 골목길 끝까지 올라가면서 곳곳에 알뜰히 가꾸어 놓은 꽃그릇에 웃음꽃을 돌려줍니다. 가다가 서고 또 가다가 서고 하면서 길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사진찍기에 빠집니다. 아름다이 여미어 놓은 골목길은, 이곳에 깃들어 사는 사진쟁이한테도, 또 이곳을 처음 밟는 낯선 손님한테도 즐거운 사진 놀이터가 됩니다.

 숭의3동 109번지와 송림동이 갈리는 세 갈래 골목길에서 나이든 할아버지가 우리를 불러세우면서 몇 가지 다짐 말씀을 해 줍니다. 당신도 젊을 적에는 자전거 참 많이 탔다고, 타다가 넘어져서 다치고 이가 나가고 여기가 나가고 깨어나니 병원이고 했는데, 이런 비탈길 같은 데에서는 조심조심 타라고, 사람보다 차가 더 빠르니까, 차보다 더 빨리 가려는 욕심을 부리지 말고 몸이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면서 몇 번씩 힘주어 말씀하시다가는, 즐겁게 자전거를 타라며 한손을 내밀며 뜨겁게 붙잡아 줍니다. 이발소집에서 사는 할아버지를 앞으로 또 뵐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합니다.


..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전쟁 앞에 우리는 바람에 흩어지는 나방과 같이 하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 혼자 떠돌아다니는 나 같은 아이는 발길로 걷어차고 나뭇가지로 때려도 되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  (벤슨, 235, 275쪽)


 (2) 전쟁은 어떤 삶일까


 옆지기 옛동무가 집으로 찾아와서 아기를 사이에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집 가까이 있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은 다음, 저는 집에서 아기를 돌보기로 하고, 세 사람은 바깥마실을 나갑니다. 아기는 잠들 듯 말 듯하다가는 잠들지 않고 칭얼댑니다. 안으면 칭얼거림을 멎고 자리에 눕히면 칭얼거립니다. 히유, 아빠도 좀 다리 뻗고 누워 보자, 응, 하고 아기한테 말을 걸지만, 아기는 아빠 말을 알아듣지 못할 테지요. 외려 아기는, 여봐 아빠, 아기는 아빠 품에 안기고 싶어한단 말이에요, 잘 좀 안아 보시라구요, 하고 말을 걸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허리는 아프고 눈은 감기는데, 아기를 품에 안고 둘리 노래를 부르고 이런저런 노래를 잇달아 부르면서 아기를 달래고 놀아 주고 어릅니다. 한참을 이렇게 있어도 도무지 잠들 낌새가 없어서, 아기가 꿉꿉해서 이러나 싶어, 물을 끓여 씻기기로 합니다. 뜨거운 물이 튈까 아기를 자리에 내려놓습니다. 아기는 싫다며 앙앙 웁니다. 주전자를 한 번 붓고 나서 아무래도 한 팔로 안으면서 해야겠다 싶어, 한 팔로 안고 주전자에 물을 받고 끓이고 하니 아기는 조용합니다. 원, 녀석두, 이렇게 아빠를 힘들게 하고 싶니, 하고 말을 하지만 눈만 말똥말똥.

 발부터 살며시 넣으면서 천천히 씻깁니다. 머리를 감길 때까지 보채던 아이가 몸에 조금씩 물을 끼얹어 주니 조금씩 조용해집니다. 그래 그래 착하지 우리 아기, 하면서 구석구석 꼼꼼하게 물을 끼얹고 문질러 줍니다. 아기를 거의 다 씻을 무렵 옆지기가 돌아옵니다.


.. 그 무렵, 나팅가에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소년들은 모두 모여 지휘관의 연설을 들었다. 그건 우리가 새로운 종류의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너희는 이제 군사 교육을 받을 거다. 학교에 갈 때나 일을 할 때나 언제나 총을 가지고 다니게 될 거다.” 소년들 대부분은 기뻐서 노래를 부르며 좋아했지만, 내가 듣기에 그것은 슬픈 소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내 생각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우리 소년들을 나팅가에 데리고 와서 잡아 둔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는 처음부터 반군 병사로 만들기 위해 잡혀 온 것이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전선으로 보내져 죽든 말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게 되겠지? 나팅가의 병사들은 말했다. “하루에 천 명이 죽으면 백 명이 태어나는데, 누가 너희 또래 아이들이 죽든 말든 싱경이나 쓴다던?” ..  (벤슨, 336쪽)


 아기를 안으며 지낸 지 어느덧 두 달. 말이 두 달이지, 이 두 달이라는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거의 종잡지 못하겠습니다. 하루 같은 두 달인지 이태 같은 두 달인지 모르겠습니다. 아기를 안고 어르는데 무슨 광고 전화가 오면 몹시 짜증스럽지만, 건너편에서 광고 전화 해대는 사람은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아주 큰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기차가 있어 아기가 깜짝 놀랄까 걱정이지만, 기차를 모는 분들은 당신들이 오가는 이 기차길 옆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 삶은 거의 헤아리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기차 승무원들은 기차길 옆 동네 사람들 삶터를 두 다리로 거닐면서 기차소리가 사람들 삶터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몸으로 좀 느껴 보아야지 싶어요.

 이런 마음씀은 때때로 아기를 안고 어디를 다녀와야 할 때에도 느낍니다. 아기 포대기를 안고 살금살금 걷고 있는 저나 옆지기를 툭툭 치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아기 포대기인 줄 모르기 때문에 저러느냐 싶기도 하고, 아기 포대기이거나 말거나 자기 갈 길이 더 중요하니까 저르느냐 싶기도 합니다. 아기가 찬바람이라도 맞을까 걱정되어 살살 포대기를 안으나 그 옆에서 대놓고 뻑뻑 담배 태우며 걷는 아저씨들이 꼭 있습니다. 당신한테 아이가 없어서 못 느끼는지, 당신도 이 아이와 똑같은 어린 날이 있었는데 그때를 떠올리지 못해서 그러시는지.

 아기와 옆지기만 두고 서울에 볼일을 보러 갈 때면 전철을 타는데, 전철간에서 아기를 업고 타는 아주머니나 아기를 안고 타는 아주머니를 으레 봅니다만, 이이들한테 선뜻 자리를 내어주는 분들을 만나기 퍽 어렵습니다. 없지는 않지만, 날이 갈수록 애 어머니한테 마음을 기울여 주는 눈길이 줄어든다고 느낍니다.


.. 나는 리니 형과 티크 형이 하는 얘기를 귀기울여 들었지만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일 나는 다시 가족을 다시 만나겠지만, 전쟁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이상 파제리에서의 평화로운 시간도 다 되어 가는 듯했다. 같은 나라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내 나라 수단은 어떤 곳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하늘에서는 정부군이 폭탄을 떨어뜨리고, 땅에서는 반군이 무기를 굴리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소리를 지르는 곳. 반군 병사가 피투성이가 되고, 총알구멍이 뚫린 군복을 입고 정부군 병사의 시체를 치우는 곳. 아, 과연 내 나라 수단은 어떤 곳이기에! ..  (벤슨, 290∼291쪽)


 왜 이렇게 우리들 삶이 팍팍할까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바쁘기에, 얼마나 고되기에, 얼마나 전쟁통 같은 삶이기에, 얼마나 내 이웃을 적처럼 여기며 밟고 올라서서 우뚝 서는 ‘나홀로 1등’과 ‘나홀로 부자되기’를 이루어야 하기에 이렇게 착한 마음을 잃는지 모르겠습니다.

 착한 마음을 잃고 돈버는 마음만 키워도 되나요. 우리 아이들한테, 우리 뒷사람들한테, 착한 마음이 아닌 돈버는 마음만 물려주어도 되나요.

 어려운 이웃한테 베푼다는 ‘불우이웃돕기’는 성금모금함 부피나 크기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나누는 일입니다. 우리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돈이 적으면 적은 대로 나누고, 돈이 없으면 돈이 아닌 품으로 나누면 됩니다. 품을 들여서 일손을 거들고, 마음을 쏟아서 따뜻하게 감싸 줍니다. 돈 몇 닢을 나눈다고 해도 사랑과 믿음을 담는 돈닢이어야지, 주기 싫으나 눈치 보여서 억지로 내어놓는 돈닢은, 이 돈닢을 받는 사람한테도 고마움을 느끼게 하기 어렵습니다.


.. 나는 멀리서, 정부군이 사로잡은 마을 주민들의 손과 발을 묶고 목에 긴 밧줄을 걸어 엮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정부군은 줄줄이 엮인 사람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도록 눈을 가리고는 끌고 갔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강물에다가 버려. 총알도 사실 낭비야.” 그날 밤, 나는 야자나무가 무성한 우리의 사랑스러운 마을 주올이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  (알레포, 177쪽)


 이루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서울과 부산을 더 빠르게 잇는 고속철도를 놓는 데에 돈을 쓰기보다, 우리 이웃이 서로서로 고르게 권리를 누리고 집없이 살아가는 설움과 고달픔을 맛보지 않도록 하는 데에 쓰면 얼마나 좋으랴 싶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물길을 뚫는다며 공사를 벌이기보다, 또 이런 공사를 하느니 마느니 알아보느라 적잖은 돈을 쓰기보다, 이 돈으로 남녘과 북녘 모두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밥나눔을 하는 데에 쓰면 얼마나 좋으랴 싶습니다.

 새 고속도로를 뚫어서 어느 한 곳과 다른 한 곳을 빠르게 잇는 길을 닦는 데에 수십 조라는 돈을 쓰기보다, 이 돈으로 이 나라 모든 어린이들이 초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교까지 거저로 배우고 넉넉히 자기 배움을 사회로 되돌릴 수 있는 틀거리를 마련해 보면 얼마나 좋으랴 싶습니다.

 스무 해만 되면 재건축을 해야 한다며, 비싼 돈 들여 지은 아파트 때려부수지 말고, 적어도 이백 해는 너끈히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지어서, ‘재건축에 들어가는 돈’을 어려운 살림살이 꾸리는 가난한 이웃나라 돕는 데에 쓴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습니다.


.. “벤슨, 넌 아직 옳고 그른 걸 판단할 줄 모르는 나이야. 그래서 엄마는 너를 두고 걱정이 많구나. 네가 엄마에게 얼마나 큰 힘과 의지가 되는지 너는 아마 모를 거다. 그러니 아들아, 엄마가 살아 있는 한, 엄마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너도 꼭 살아남아야 해. 앞으로는 조심에 조심을 더해서, 전보다 총소리가 가깝거나 크게 들리면 집에서 도망쳐야 해. 죽어라 뛰어서 덤불 속에 숨어. 절대 잡히거나 노예로 붙들려 가면 안 돼. 다쳐서도 안 된다.” 내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는 동물의 울부짖음 같았다. “총을 든 병사 흉내도 내지 마라. 딩카 족의 아이답게 너는 소나 다른 동물들의 인형을 만들면서 놀아야 해. 딩카 족은 총을 가지지 않아. 총은 엄마가 세상에 태어나서 본 가장 사악한 물건이다. 그러니까 반군 병사 흉내를 내며 총놀이를 하는 건 불운을 가지고 올 뿐이다.” ..  (벤슨, 90쪽)


 이룰 수 있다면 그지없이 반갑고 고맙습니다만, 이루지 못하게 되더라도 꿈이나마 꾸고 싶습니다. 꿈을 꾸면서 앞으로 언젠가는 이와 같은 일이 우리 눈앞에서 즐겁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3) 수난 내전과 끔찍한 죽음, 《잃어버린 소년들》


 종교를 놓고 다툼이 생겨서 서로를 끔찍하게 죽이고, 끔찍하게 죽은 뒤 앙갚음을 하려고 똑같은 죽임을 되풀이하게 되는 수단 내전 이야기가 담긴 책 《잃어버린 소년들》을 읽습니다. 《잃어버린 소년들》에 나오는 ‘잃어버린 소년들’은 처음부터 어떤 종교를 믿고 살던 아이들이 하나도 아니며, 이 아이들 아버지와 어머니도 처음부터 어떤 종교에 몸이나 마음을 맡기지 않으면서 살았습니다. 수단사람 어느 누구도 종교뿐 아니라 전쟁무기 만드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나라를 쳐들어간다든지, 이웃에 뿌리내린 겨레를 짓밟는다든지 하는 일 또한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같은 나라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갈린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기만 하지 않고 죽여서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부모도 잃고 고향도 잃고 삶터조차 잃으며 일자리조차 꿈을 꾸지 못하는 데다가 아무런 교육 혜택을 받기 어렵습니다. 아이들한테 연필이 주어지는 일은 드물고, 나이가 차면 자연스레 소총 한 자루 쥐어주어 죽음터, 또는 죽임터로 내몹니다. 열서너 살에 죽음터 또는 죽임터로 내몰린 아이들은 소총 한 자루를 믿고 손쉽게 남 목숨을 고꾸라뜨릴 뿐더러, 가볍게 강간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약탈과 도둑질을 일삼습니다.


.. 벤자민이 밑에 깔려 죽어 갈 때 다른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그 병사만은 선한 마음으로 우리를 도와주었다. 이제 더는 세상은 우리 같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곳이 아니었다. 엉덩이에 총을 들이민 어린 병사처럼, 나도 총을 가지고 낄낄거리는 얼굴에 들이대고 싶었다 ..  (벤슨, 310쪽)


 책을 덮고 한숨을 내쉽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하나라도 더 무너뜨리며 밟고 올라설 적’으로 삼아서, 자기 밥그릇 채우기에 바쁩니다. 비록 총칼을 들지 않았으나, 어쩌면 총칼보다 훨씬 무서운 돈다발을 들고서 누가 이기나, 누가 지나, 누가 죽나, 누가 죽이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러느라 너무도 바쁜 나머지, 총칼을 들고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 되풀이되는 수단 같은 나라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무엇 하나라도 도울 수 있는 마음을 펼치지 못합니다. 돕지는 못할망정 우리 삶을 차분히 돌아보면서 우리 자신을 다독이거나 다스리면서 평화로움을 찾도록 애쓰지 못합니다.


.. 하지만 열 살 정도 된 소년들 가운데 많은 아이가, 어른들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고 싶어 한다. 수많은 사람이 살해되는 것을 보고, 그 아이들 마음속에는 복수심만 자라난 것이었다. 그런 아이들은 자비나 용서를 몰랐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돌처럼 굳어 버린 것 같았다 ..  (알레포, 203∼204쪽)


 우리는 우리 스스로한테 무엇이 아름답다고 마음에 아로새기면서 살고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한테 무엇이 좋다고 가슴에 돋을새김하면서 일하고 있는지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한테 내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서 발자국을 남기면 좋다고 몸뚱이에 남기고 있는지 곱씹어 봅니다.

 수단은 총칼을 든 전쟁 때문에 ‘잃어버린 아이들’이 쏟아지는데, 우리는 돈다발을 든 전쟁 때문에 이 나라 아이들을 ‘잃어버린 아이들’로 내동댕이치고 있는 모습을 날마다 수없이 보고 또 보고야 맙니다. (4341.10.14.불.ㅎㄲㅅㄱ)

 

***

엉성한 번역이 퍽 많고, 잘못된 번역도 틀림없이 있는 듯하지만, 그런 잘잘못은 건너뛰기로 한다. 다만, 104쪽과 133쪽과 136쪽에는 "빨간 팬티"로 나오지만, 151쪽과 338쪽에는 "빨간 반바지"로 나온다. 책 겉그림에도 빨간 반바지를 입은 소년이 나온다. 그 겉그림을 보아도 알겠지만, "빨간 팬티"가 아닌 "빨간 반바지"이다. 이 잘못된 대목은 2쇄에서는 고쳐지기 바란다.

이밖에 너무 눈에 도드라지는 잘못된 곳은 '묵다'를 '묶다'로 자꾸 잘못 적은 대목. 아무래도 번역자나 편집자가 놓쳤다기보다는, 생각을 못했다고 보여진다. 한 번만 틀렸으면 모르되, 서너 차례 되풀이된다. 또, '처지다-뒤처지다'처럼 적어야 올바르지만, 한 번은 '처지다'로 잘 썼으나, 그 뒤로 여러 차례 '뒤쳐지다'로 잘못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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