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 살아가는 고등학교 적 국어 선생님
 ― 열일곱 해 동안 품어 온 물음 하나

 


 1991년 8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던 저는 갑작스런 조회가 생겼다면서 전교생을 운동장에 부를 때 투덜거리면서 나갑니다. 그무렵, 월요일 아침에 한 번, 토요일 아침에 또 한 번, 온 학교 학생이 죄 운동장에 모여서서 군대사열을 하듯 아침모임(조회)을 해야 했습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고되고 지겹고 힘들기도 한 아침모임인데(겨울에는 잠바를 입고 나와도, 와이셔츠 안에 옷 한 벌을 끼어 입어도 복장불량이라면서 불러내어 두들겨패고 그랬습니다), 그런 아침모임을 불쑥 한다니까 입이 부루퉁 튀어나오지 않을 동무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난데없는 아침모임은 장학사가 오니 청소를 하라느니 하는 아침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곧 모의고사를 보는데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대는 아침모임도 아니었습니다. 시험성적 잘 나오는 몇몇 아이들 올려세워서 자랑해 주는 아침모임 또한 아니었습니다. 늙수그레한 국어교사 한 사람이 ‘이제 교사 일은 그만두고, 소설쓰기에만 온삶을 바치겠다’고 해서 마련해 주는 ‘퇴임식’이었습니다.


.. “10년 전 이런 한을 맺고 고향 인천에 왔는데 난 장편을 쓸 것이다. 너희들은 학력고사 공부를 해라. 너희들의 시험이 끝날 무렵 나도 결과를 받을 것이다. 우리 같이 한번 모든 걸 걸어 보자!” 제자들한테 그렇게 말하고 매일 저녁 교실 뒷자리에서 장편을 쓰기 시작했다. 정말 처절하게 썼다. 함께 니나노 집에서 술도 먹고 파친코에서 월급봉투도 다 날리기도 하며 어울리던 동료 선생들이 내가 장편을 쓴다며 피골이 상접한 채로 자기 일에만 매달리니까 냉대를 했다. 나를 몹시 신뢰했던 교감 선생님도 한두 번은 봐주었는데, 나중에는 “야, 이원규! 집에 가서 써.” 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소설을 쓰기 위해선 결국 그런 걸 이겨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 자리에서 “교감 선생님, 절 내쫓으세요. 징계위원회 여세요.”했고, 동료 선생들에게도 “날 죽여라.” 하고 말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 나하고 야근에 걸리는 선생들은 아주 싫어했다. 내가 소설을 쓴답시고 순회지도를 안 하니까 혼자 힘들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렇게 말하며 계속 밀고 나갔다. 교실 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다. 그때 내 반 아이들은 지금 나이 마흔이 넘어 같이 늙어 가는데 참으로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담임이 매일 뒷좌석에 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설에 매달려 있으니 담배 피우러 나가지도 못하고 농땡이도 못치고 모든 걸 체념하고 공부나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대학 가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그래서인지 57명 중 43명이 4년제 대학에 갔다 ..  (인터넷 누리집 〈소설가 이원규와 푸른 날개〉에 올려진 글 : 나의 등단 시절 http://cafe.daum.net/novelistleelove〉)


 처음엔 뭔 짓을 하느라 부산을 떠는가 싶었지만, 난데없는 아침모임 집합보다 더 난데없는 ‘퇴임식’이었기에 눈이 동그래집니다. 게다가, 몸이 아파서 그만두지도 않고, 다른 일이 있어서 그만두는 일도 아닌, ‘소설을 써야겠으니 그만두겠다’는 퇴임식이라니.

 지금은 교장선생이 된 또다른 국어교사 한 사람이 사회를 보면서, 떠나가는 국어교사를 소개하고, “이러저러하니까, 잘 들어 보도록!” 하면서 말을 마치니, 곧 떠나갈 국어교사인, 이원규 님이 길지도 짧지도 않게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한테는 소설쓰기가 너희들 가르치는 일보다 더 큰 일이고, 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면서 이 일을 그만두니, 우리들도 자기가 어떤 뜻을 하나 품으면 그 일을 제때 할 수 있도록 놓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선 열여섯 고등학교 일학년 학생 머리에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궁금함은 풀어 주지 못합니다. ‘요즘(1991년) 세상에 소설만 써서 어떻게 먹고살 생각인지, 당신 마나님이 바깥에서 돈벌러 다녀야 하지는 않은지, 이 좁다란 인천바닥에서 소설을 쓴다고 해 봐야 누가 알아주고 누가 책을 사 주고 누가 거들떠보아 주기나 하는지’ 들을.





.. 당선작 〈훈장과 굴레〉는 아들 이름으로 당선공고가 났고 연재를 시작할 때는 내 이름으로 나갔다. 4백만 원짜리 파티였다던가. 서울의 최고급 호텔에서 열린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식에서 우리 부부는 무대 위에 앉았다. 당시 현대문학사 편집장이던 감태준 선생이 내 학교 교장 선생님을 대학의 은사이신 미당 서정주 선생님과 김동리ㆍ김춘수ㆍ조병화 선생님 등 문단 원로들 사이에 앉혔다. 그분이 누군가를 아시고 미당 선생님이 한  말씀 하셨다. “저녀석이 내 제자인데 참으로 큰일을 했습니다. 우리 대학의 영광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다른 원로 선생님들도 부탁을 했다. 교장선생님은 기분이 좋아서 다음날 직원조회 때 말씀하셨다. “이원규 선생을 새 학기에 도서관장으로 발령하겠습니다. 불만들 없으시지요?” 두 해 동안 주당 수업 14시간인 도서관장 자리로 가서 나는 생애에서 가장 좋은  단편 십여 편을 썼다. 20여 년이 흘렀지만 그 뒤 다시는 그 날 같은 행복한 몸 떨림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내가 재작년과 작년에 써낸 책들이다. 소설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평전을 쓰며 지내는 오늘 그 시절의 처절한 글쓰기의 열정과 고난, 그리고 그 날의 몸 떨림이 그리워진다. 내가 여섯 번 최종심에서 떨어질 때 우리 모교에는 소설가 선생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직계후배이자 제자인 학생들에게 언제나 더 잘해 주고 싶다 ..  (인터넷 누리집 〈소설가 이원규와 푸른 날개〉에 올려진 글 : 나의 등단 시절)


 국어교사 이원규 님이 그만둔 학교는 인천 인항고등학교. 처음 학교를 세울 때 ‘나중에 교장 시켜 준다’는 말을 듣고 들어왔다고 하는 이원규 님은, 1회 졸업생인 우리 형한테 국어를 가르쳤습니다. 2회 졸업생인 사촌형도 이원규 님한테 국어를 배웠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4회 졸업생인 저는 이원규 님이 아닌 다른 분한테 국어를 배웠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소설 쓰는 국어 선생이 한 사람 있지.” 새로 생긴 학교에 1회로 들어간 형이, 4회로 들어가는 동생인 저한테 해 주던 말. “그렇지만, 소설 쓴다며 나가고 난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데 뭐.”

 그 뒤, 드문드문 인천 지역 일간신문에 나오는 이원규 님 기사를 보고, 서울에서 나오는 중앙일간지에도 짤막하게 나오는 이원규 님 새책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마다 ‘용케 굶어죽지 않으시고 소설 잘 쓰고 있으시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문학책깨나 읽는다’는 대학교 동무나 선후배들한테 ‘소설을 쓰는 이원규 님 압니까?’ 하고 물으면 어느 누구도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고향이 인천인 동무나 후배들 또한 아무도 모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교지편집부 후배들한테, “야, 우리 학교에는 소설가 국어 선생님이 한 분 계셨어.” 하고 말하면, “네, 진짜요? 지금 뭐하세요? 우리도 그런 분한테 배워 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 인천과 황해를 배경으로 잡은 것은 내 고향에 대한 애정도 컸지만 이곳이 외세 침탈의 문호였고 분단이 고착되던 절망의 시기에 민중의 의지가 번번이 꺾이고만 비운의 장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곳을 현대사의 한 의미 깊은 공간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책임을 참으로 오랜 시간 가져왔던 것이다. 오늘도 칙칙한 색으로 말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황해의 파도에는 슬프고 어두운 과거가 묻혀 있고 이 소설에서 다룬 사건들은 그런 한스런 현대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 ..  (소설 《황해》(1992) 글쓴이 말)





 그리고 2005년, 소설을 쓰던 국어교사 이원규 님은 《약산 김원봉》(실천문학사)을 내놓고 이듬해에 《김산 평전》(실천문학사)을 내놓습니다. 소설이라면 소설로 다시 빚은 이야기이고, 소설이 아닌 평전이면 소설쟁이가 바라본 역사를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이 두 가지 책이 나올 때, 《약산 김원봉》과 《김산 평전》을 쓴 그 ‘이원규’가 내가 아는 이원규가 맞는가 하고 헷갈렸습니다. ‘이원규’라는 이름으로 문학을 하는 분이 여럿 있고, 같은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도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이원규 님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자리에 서 있었고, 국어교사를 그만두고 열 몇 해에 걸쳐서 한길로 파고든 역사소설이 밑거름이 되어 약산이 새로 태어났고 김산이 거듭 태어났습니다. ‘그래, 비로소 국어 선생님이 이렇게 소설쟁이라는 이름을 훨씬 굵직하게 받는구나. 그러나 평전은 소설이 아닌데, 우리 국어 선생님은 소설가라는 이름보다 평전 작가라는 소리를 더 자주 들어 버리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약산과 김산에 이어서 죽산 이야기도 써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둘레에서 곧잘 들으시는 듯합니다. 약산과 김산은 곧은 뜻을 품고 독립과 혁명을 바란 이라면, 죽산은 당신한테도 고향인 인천에서 뿌리를 내리며 독립과 혁명을 꿈꾸던 스승이요 선배이니까요.

 “작가니까 이렇게 살지요.”

 2008년 10월 18일 낮 네 시. 인천 배다리 헌책방골목 한켠에 있는 〈시 다락방〉에서 인천작가회의가 ‘우리 시대 작가와의 만남’ 자리를 열었습니다. 열한 번째를 맞이한 이 자리에는 소설 쓰는 이원규 님이 이야기꽃을 피웠고, 두 시간이 넘는 이야기꽃을 마무리하고 밥과 막걸리를 드는 자리에서 넌지시 여쭈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교사 자리를 그만두고 소설만 쓰겠다고 뛰쳐나갈 수 있었는지’를, ‘그렇게 뛰쳐나갈 때 당신 마나님은 선선히 받아들이셨는지’를, ‘그렇게 뛰쳐나오고 먹고사는 일과 아이들 가르치고 기르는 일은 잘할 수 있었는지’를.

 “(교사) 현직에 남아 있는 것보다 잘했어요.”

 열일곱 해 만에 다시 만나는 어제까지, 제 마음속에는 이 물음 한 가지, ‘교사로 있으면서도 소설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뜻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그처럼 박차고 나올 수 있었는가’ 하는 궁금함이 있었습니다. 지난날이든 오늘날이든 고등학교라는 곳은 대학교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자리라, 국어교사라 한들, 시험 문제에 나올 지식만 가르쳐야지, 참다운 국어, 곧 참된 우리 말과 참된 우리 문학을 가르칠 만한 자리가 못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두동짐, 엇갈림, 어긋남 때문에 외려 고등학교 국어교사 자리는, 우리 말과 문학을 엉터리로 엉뚱하게 잘못 받아들여서 우리 말과 문학을 멀리하고 말지 모르는 아이들한테 참 가르침을 베풀거나 나누면서 곱새기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입시문제 때문에 말과 문학을 이렇게밖에 알려줄 수 없지만, 너희가 느끼고 가슴으로 껴안아야 할 말과 문학은 이런 교과서 지식이나 시험문제가 아니다’ 하고서.

 “지금 나이(예순둘)에는 그렇게 못하겠지만, 그때(교사 퇴직 할 때가)는 마흔다섯이었는데, 내 자신(삶)을 걸 수 있었지.”

 막걸리잔이 돌고, 둘레에 앉은 문학 하는 어르신들은 문학창작과 평전쓰기와 역사소설과 여러 가지 말씀들을 묻고 듣고 여쭙고 받고 합니다. 이러는 동안 저는 오로지 하나, 문학한다는 마음 하나로 살아가는 매무새란 무엇인지를 더 느끼고 싶고 듣고 싶고 알고 싶어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집에서 저를 기다리는 아기 칭얼거림을 한 귀로 느끼느라 한쪽 다리는 얼른 집으로 가야겠다면서 들썩이는데, 한 귀는 “종규야, 문학을 ……” 하면서 자리에 붙잡아 놓는 소설 쓰는 옛 국어교사 아저씨 이야기를 들으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가운데.





 “…… 그때(교사를 그만두고 소설만 쓰던 1990년대에) 소설만 쓰면서도 원고료나 인세는 지금보다 잘 들어왔어요. 그리고 대한생명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편당 30만 원으로 40회짜리 강의 자리를 만들어 주어서(1991∼1992년), (대한생명 보험) 아줌마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했어요. 그래서 강의 솜씨가 많이 늘었지. 힘들었는데 끝까지 마쳤어. 그리고 사보에다 글을 썼고.”

 “마누라 야쿠르트 배달 안 시키고 소설 잘 썼어요.”

 “(무엇을 쓰든) 작가는 도전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에요.”
(4341.10.19.해.ㅎㄲㅅㄱ)


***
판이 끊어져서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만, 소설꾼 이원규 님이 엮어낸 작품으로는 : 《훈장과 굴레》, 《침묵의 섬》, 《깊고 긴 골짜기》, 《천사의 날개》, 《펠리컨의 날개》, 《황해》,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독립전쟁이 사라진다》, 《저기 용감한 조선 군인들이 있었소》,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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