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ㅣ 문학의전당 시인선 32
김정희 지음 / 문학의전당 / 2007년 4월
평점 :
이 책 하나 83 ― 시로 가고, 사람으로 가다, 사랑으로 가는 길
: 김정희 시,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 책이름 :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 시 : 김정희
- 펴낸곳 : 문학의전당 (2007.4.30.)
- 책값 : 7000원
(1) 시로 가는 길
시인 한 사람 알고 지내면서 틈틈이 만나게 되면, 만날 때마다 시집 한 권 읽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시인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시인한테 몇 마디 듣고 이야기를 들어도, 또 물끄러미 시인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시집 한 권 읽는다고 느낍니다.
그냥저냥 책만 읽고 살다가, 이냥저냥 책쟁이들만 만나고 살다가, 뜻하지 않게 시인과 어우러지는 자리에 끼게 되면,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말없이 찻잔이나 술잔을 들거나 말없이 사진기만 만지작거리게 됩니다.
오랜만에 친구 만나 거나해진 아버지
자전거 뒤꽁무니에 나를 앉히며 말했다
기왕에 가는 거
저놈에 달도 태우고 가자꾸나
아버지 등과
내 배 사이에
대소쿠리만 한 달이 끼어 앉았다
셋이서
창영동 고갯마루 길을
달려 올랐다 (보름달 속으로 난 길)
지난 7월 26일, 동네 헌책방 아주머니가 손수 나무질을 하여 마련해 놓은 조촐한 ‘시 다락방’에서 시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제 목소리를 제 빠르기에 맞추어 읽어 나가는 자리였는데, 이런 시읽기를 마친 뒤에 퍽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막걸리집으로 옮겨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멀거니 떨어져서 사진만 찍었고, 어느 만큼 거리를 지키면서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시인은 여느 사람하고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이었고, 시인을 둘러싼 사람도 시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은 시를 쓰고, 다른 사람은 시를 즐길 뿐이었지요.
고양이 한 마리
사차선 도로를 횡단 중이다
화적 떼처럼 달겨드는 불빛파도를 헤치며
이리저리 발을 놓는
아찔한 곡예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은 좀체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놈은 흰 차선을 보루 삼아 가까스로 生을 지켜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이 한 線 위에서 흔들린다
놈은
목숨줄을 당겨 잡고 힘껏 뛴다 그러나
어느 자동차 속도의 칼날에 가차 없이 끊어져버리는
줄.
순식간에 바닥이 되어버린 놈을
上弦이 내려다본다
끝내
이르지 못한 길의
광고탑에 내 걸린 교통상해보험 현수막이
한 옥타브 높게 울어댄다
초저녁이다 (닿지 못한 길)
오늘 저녁,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당신 손주 돌잔치를 하는데, 저보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해 옵니다. 그러마 하고, 얼마든지 찍어 드립지요, 하는데, 같이 잔치자리에 가자면서, ‘우리 아저씨 오늘은 (택시) 운전 안 하고 술 드신다고 했는데, 술 드시지 말고 운전하라고 해야겠다’고 하시기에, ‘오늘 같은 날은 (택시기사인 분도 다른 사람이 모는) 택시 타고 가야지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일삯을 안 받고 찍어 주는 돌잔치 사진이요 혼례잔치 사진이며 시읽는잔치 사진입니다. 벌써 석 달이 훌쩍 지나간 7월 끝무렵 시인 한 사람을 만나 찍던 사진도, 그저 부탁을 받으면서 찍는, 그러나 부탁만으로는 찍지 않고 나 스스로 그 시인을 마음에 담고 또 사진으로도 담고 싶어서 찍는 사진이었기에 늘 마음이 벅찹니다. 부풀어오릅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읽는이는 시를 소리내어 읊고, 사진쟁이는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사진기 단추 소리와 시 읊는 소리가 하나로 엮이고, 시인이 또박또박 적어내려간 글줄이 사진 한 장 두 장 올올이 새겨집니다.
반세기 동안이나 吳氏네 식구들을 품어온 집이
포클레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기왓장들 밑에 엎드려 있던 침묵과
거기 기대어 허공 바라기 하던 담쟁이덩굴
담벼락의 소변금지와
밤 청춘들의 입맞춤을 눈감아주던 능소화가
일순 세상 바깥으로 쓸려나간다
길은 희미하다
먼지로 돌아가는 것들의 비명이
마을을 흔들어댄다
…… (다녀가다)
시란 무엇일까, 사진이란 무엇일까, 글이란 무엇일까, 예술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문화란 무엇일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가운데, 시읽는잔치 사진은 이백 장 가까이 찍게 되고, 저녁나절 시디 한 장에 구워서 이튿날 우편으로 시인한테 부칩니다. 시인은 사진을 찍어 주기만 해도 고마웠다며 당신이 손으로 이름을 적은 시집을 한 권 내어줍니다. 그러나 저는 벌써 제 주머니에서 돈 칠천 원을 꺼내어 당신 시집을 사서 미리 읽었는데.
손때 타며 읽은 시집은 한쪽에 꽂고, 손때 안 탄 말끔한 시집은 옆에 나란히 놓습니다.
(2) 사람으로 가는 길
제 일터인 도서관에 오늘 찾아온 손님은 둘. 한 분은 “도서관 맞지요? 그런데 여기가 책을 파는 곳입니까, 보러 오는 곳입니까?” 하고 묻기에, “네, 여기는 책을 보는 곳입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니, “네, 잘 알겠습니다.” 하고는 고개숙여 인사하고는 돌아갑니다. 처음 들어서면서 “도서관 맞지요?” 하고 물었으면서, 왜 “책을 파는 곳입니까?” 하고 물었는지 궁금하지만, 그분한테는 당신 주머니를 털어서 책을 사는 일만 즐겁고, 걸상에 앉아서 가만히 책을 읽고 돌아가는 일은 즐겁지 않으신 듯합니다.
마음에 담는 책이기에 내 물건으로 삼지 못한다고 해도, 찬찬히 책장을 넘겨 읽는 동안 가슴이 꽉 차 오른다고 느끼고 있는데, 이런 생각은 제 섣부르면서 짧은 생각이었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이윽고 다른 손님 한 분 찾아옵니다. 조용히 책을 둘러보고, 이곳저곳 쌓여 있기도 한 책을 살며시 집어서 웃음 띤 얼굴로 펼쳐봅니다. 저는 책상 앞에 앉아서 제 일을 하다가, 매실을 탄 찬물과 찐고구마 하나를 내어드립니다. 손님은 발소리를 죽인 걸음으로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한 권씩 끄집어내어 읽은 다음 제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책을 그 모습 그대로 즐겨 주는 모습이 고마워, 그동안 찍어 놓았던 골목길 사진 묶음을 슬쩍 건네며, “마음에 드시는 사진 있으시면 한 장 가지셔도 돼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도서관 빨랫줄에 줄줄이 걸어 두어도 괜찮지만, 반가운 손님한테 한 장씩 나누어 주어도 좋습니다. 따지고 보면, 도서관 책들을 바깥으로 빌려 주지는 않아도, 애타게 찾거나 바라는 분이 있으면,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그 책을 찾아내어 선물해 드리기도 합니다. 때때로.
三伏고개 무사히 넘긴
똥개 한 마리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실려 십정동을 떠난다
누렁이는
미안허다 미안허다아
중얼대며 손 흔드는 노파의 가슴에다
눈빛을 박은 채
철창바닥에 엎드려 간다
매일 핥던 밥그릇과 잔등에 머물던 주인의 손길
누비고 다니던 골목의 냄새와
사나운 기억들을 끌고
아구탕 집 아리랑모텔을 지나
중국식품점 모퉁이를 돌아
간다
…… (십정동―이별)
골목길을 찍은 사진은 골목길에서 골목사람으로 살아가는 제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발자국입니다. 내 모습, 여기에 이웃 모습, 그리고 우리 모습을 꾸밈없이 담아 보고자 합니다. 잘나지 않았으나 못나지도 않은 모습입니다. 남다르지 않으며 저마다 제 깜냥과 그릇에 따라서 채워 가는 모습입니다. 어여쁘거나 아름답다고 추켜세우지 않는 모습이나 꾀죄죄하거나 지저분한 모습도 아닙니다. 낡은 옷을 입었어도 옷이요, 오래된 신을 신었어도 신이며, 나이먹은 사람도 사람입니다. 나이가 먹었으니 빨리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니며, 오래된 책이라 해서 케케묵은 책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책은 책입니다. 사진 또한 예술 사진도 다큐 사진도 아닌 그저 사진입니다. 사람을 찍어도 사진, 자연을 찍어도 사진입니다.
해가 서쪽 하늘에 누운 한여름날
볼일 보고 돌아오는 골목길에
거친 숨소리 흩어진다
고개 돌려보니
한 사내
홀로
황홀해하고 있는 중이다 한창
부끄럼도 없이
노을보다
붉은 얼굴로 (십정동―바바리맨)
처음 사진을 찍던 때부터, 제 사진은 이웃들한테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라는 사람마다 한 장씩, 또는 여러 장씩 찾아 주었습니다. 그러느라 필름값보다 더 많은 돈을 쓰면서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제 사진기에 찍히는 사람들은 자기한테 돌아오는 열매(사진)를 보면서, 하루이틀 지나는 동안 제가 사진기를 들고 앞에서 깝죽거려도 스스럼없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더군요.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렇습니다. 시인을 둘러싼 사람들이 시인하고 꼭 같은 매무새로 어우러지는 모습은, 시인이 제 삶과 살을 바쳐서 이루어 낸 열매인 시를 스스럼없이 누구한테나 나누어 주었기에, 시 하나 받아먹은 이웃사람들도 꼭 같은 시마음이 되는 한편, 당신 스스로도 시인한테 시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는 곁지기가 되지 않느냐 싶어요.
한길에서
차에 치어죽은 쥐를 보았다
죽음이란 저리도 납작한 것이던가
광고지가 차 바람에 날려가
놈의 허리께를 덮었다
놈은 그 순간
“싼 이자로 돈 빌려드립니다”가 되었다 (변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함께 쓰고 즐기는 시입니다. 함께 찍고 나누는 사진입니다. 그림그리기도, 글쓰기도, 다른 모든 문화와 예술도 서로 어깨동무를 겯으며 합니다. 망치를 들건 호미를 들건 우리들은 서로서로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땀꽃을 맺습니다.
이야기꽃은 서로서로 마음으로 파고들며 일하는 고단함을 잊도록 합니다. 땀꽃은 땅으로 스며들며 우리한테 고마운 밥거리를 선물해 줍니다.
(3) 사랑으로 가는 길
시집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를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나서 석 달에 걸쳐 되읽고 새로 읽습니다. 금세 읽을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시였고, 두고두고 또 읽을 만큼 가슴을 적시는 시입니다.
시란 이렇구나, 이래서 시를 쓰네, 이러니 시집을 사서 품에 안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는 꿈을 꿀 테지, 하는 생각이 몽글몽글 이어집니다. 그러나 시집 끝자락에 붙은 어느 문학평론가 풀이말은 영 와닿지 않습니다. 시면 시지, 시를 도마에 올려놓은 물고기로 아나 싶은 생각이 그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문학을 배우거나 가르칠 때에 모두 이렇게 배우거나 가르치니까 다들 시를 재미없어 하겠다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시를 시 그대로 껴안도록 하지 못하고 울타리를 쌓으려고 하니 시를 쓰는 사람 스스로도 사람들하고 금을 긋고서 고개가 빳빳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시를 시 모습으로 받아먹으면서 자기 몸을 시하고 맞추지 못하는 글로 시를 말하니, 시를 말하는 사람 스스로 참살길을 헤아리는 슬기가 아닌 밥벌이 노릇 하는 평단과 강단에만 서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는
365일 전경들의 경호를 받는다
총부리 치켜들고 인천 항구를 밟은 뒤
반세기가 넘도록
제가 건너 온 바다만 바라보고 서있는 異國사내
그의 발밑은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지뢰밭이다
충돌한다 충돌한다
빨강과 파랑이, 꽃과 돌멩이가,
그 틈에서
조선의 아들들 고추바람 뚫고 밥을 먹는다
거대한 제국의 채찍을 막느라
더글라스 맥아더 저
구리인간의 옆구리를 지키며
엄동설한 한데 밥을 먹는다
어디서 보았는가
들었는가
이런 광경을
참으로 기이해서
눈물이 다 나는 (작은 전설―자유공원의)
히유, 한숨 짧게 내뱉고 옥상마당으로 올라가 기저귀 빨래를 걷습니다. 오늘은 옆지기가 2/3쯤을 빨고 저는 1/3만 빨았습니다. 그러나 빨고 나면 새 빨래가 나오고, 다 마른 빨래를 걷어 개면 앞서 빨아 널은 빨래가 마릅니다. 하루 내 기저귀 스무 장 남짓이 돌고 돌아 아기 사타구니에 대여지고 대야에 담가지고 두 손에 빨려지고 햇볕에 말려지고 다시 두 손에 개어집니다.
햇살을 받으며 빨래를 다 걷고 나서 잠깐 뒤로 돌아서 지붕 낮은 골목집 동네를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고작 4층 옥상집이지만, 동네를 훤하게 내려다보게 됩니다. 4층만 해도 대단히 높은 층입니다. 2층만 되어도 이웃집을 건너다볼 수 있으니까요.
나도 시를 쓸까, 내가 시를 쓰면 어떤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내가 쓰는 시는 누구한테 즐겁게 읽힐 삶자락으로 다가갈까.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에 앞서, 내가 찍는 사진 하나가 바로 시요, 내가 좋아하면서 손에 살며시 집어드는 책 하나가 시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게 됩니다.
……
편지를 읽는 사이
마음에 켜진 등불로 한껏 밝아진 나는
종일 어두워지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별들을 헤치고
내 안으로 든 기린이
나를
詩의 門으로 데리고 들어가
목을 축여주었다
오랜만에 단잠 이뤘다 (나뭇잎 편지)
옆지기는 옛동무한테 손으로 편지를 한 장 써서 우체국에 가서 부치고 옵니다. 저도 며칠 사이로 우리 아버지한테 편지를 한 장 써서 부쳐야겠습니다. 곧 아기 돌도 다가오니, 돌잔치를 할 때 놀러오시라고 편지를 띄워야겠습니다. 우리 아기 돌잔치에는 뷔페니 뭐니 하나도 안 하고, 동네 헌책방골목 ‘시 다락방’에서 우리 아기와 우리 두 가시버시가 이 땅에서 씩씩하고 꿋꿋하고 튼튼하고 싱그럽게 살아갈 힘을 내도록 이끌어 주는 시를 열 꼭지건 스무 꼭지건 골라서 나누어 읽는 자리로 마련하려 하니, 아버지도 시 하나 읽어 주어 우리를 축복해 주십사 하고 편지를 띄워야겠습니다. (4341.10.17.쇠.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