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22 : 무라카미 하루키 좋아하셔요? 



 저는 모르는 책이 참 많고, 못 읽은 책이 참 많으며, 못 읽을 책 또한 참 많습니다. 아직까지 무라카미 하루키 님 책은 한 가지조차 읽지 않았거나 읽지 못했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무라카미 하루키 님을 좋아하거나 그리 안 좋아하거나 이분 책을 읽은 분 가운데 다른 좋은 책이나 훌륭한 책을 골고루 샅샅이 읽은 분은 없습니다.

 누구나 한 가지 책을 읽으면 다른 한 가지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책만 읽으면서 살아간다 하여도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다 할지라도 골라서 읽을 뿐, 모두 읽을 수 없으며 모두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저마다 스스로한테 가장 알맞고 아름다운 길을 찾아 저 나름대로 살아가듯, 우리들은 누구나 저마다 스스로한테 가장 알맞고 아름다운 책을 찾아서 읽을 뿐입니다.

 잘난 책읽기이든 못난 책읽기이든 따로 없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결에 따라 살아가며 스스로 좋아하는 책을 마주하는 가운데 스스로 좋아하는 모습대로 내 몸과 마음을 가꿉니다. 내가 고른 책이 훌륭한 책이든 어설픈 책이든 우리로서는 좋은 알맹이를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고른 책이 빼어난 책이든 멋진 책이든 우리로서는 나쁜 버릇에 물들 수 있습니다.

 어제 동네 헌책방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1 : 코끼리공장의 해피엔드》(백암,1993)가 보이기에 집어들어 읽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님 소설은 어떠한지 잘 모르나 수필은 참 괜찮다고 느꼈습니다.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대충 같다(87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번역은 꽤 엉망이라고 느끼면서도 이 글월에 담긴 글쓴이 마음은 기쁘게 헤아렸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님 생각이자 삶은 “어떻게 쓰느냐는 어떻게 사느냐와 얼추 같다”일 테니까요.

 그러니까,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내 삶부터 올바르고 아름답게 잘 꾸려야 한다는 소리랍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으면 내 삶부터 좋은 삶이 되도록 잘 추스려야 한다는 소리이고요.

 더없이 마땅한 이야기일 테지요? 그지없이 옳은 말씀일 테지요?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 마땅하고 옳은 글월을 마땅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옳게 새기지 못합니다. 그냥 책 한 귀퉁이에 실린 글줄로 읽고 잊습니다. 고운 삶이란 하루키 님 책에만 있지 않고 우리 둘레에 두루두루 있는데. 맑은 삶이란 하루키 님 소설에만 있지 않고 우리 터전에 구석구석 있는데. 참된 삶이란 하루키 님 수필에만 있지 않고 우리 이웃이나 살붙이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데.

 어떤가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이 다룬 이야기나 바라본 사람들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 삶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이 꿈꾸며 가꾸는 삶을 좋아하시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님 문학을 읽는 내 삶과 내 몸뚱이와 내 손길과 내 삶터를 좋아하시나요? (4343.5.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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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골목길과 배다리를 팔아먹는 거짓말쟁이들


 인천 토박이 가운데 스스로 인천 토박이임을 내세우며 인천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천 토박이는 으레 더없이 조용하기 마련이다. 인천 토박이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을 일컫는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아이를 낳아 키우고 인천에서 일감을 찾아 인천땅 다른 토박이하고 어깨동무하며 지내는 사람을 가리킨다.

 인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인천사람이다. 이들이 모두 인천 토박이이지 않다. 그러나 인천에 살면서도 인천사람 아닌 서울사람이 있고 경기사람이 있으며 부천사람이 있다.

 누가 더 옳다는 소리가 아니다. 누가 더 아름답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저마다 제가 선 자리에서 옳고 바르며 착하고 참되는 가운데 아름다이 살아가면 된다.

 다만,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 당신들 이름값하고 돈과 지위와 일거리와 홍보 따위에 휘두르려고 인천과 배다리를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 인천 토박이만 인천을 말하란 법이란 없다. 아주 마땅한 소리이다. 그러나 인천을 말하고 싶으면 인천을 말해야지, 왜 인천을 팔아먹고 있을까? 배다리를 말하고 싶으면 배다리를 말해야지, 왜 배다리를 비틀면서 팔아먹는가?

 인천이란 인천 토박이와 인천에 깃든 사람들 삶터이다. 배다리란 인천땅에서 낮은 자리 여느 사람들이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오순도순 북적이던 골목동네요, 한국전쟁 무렵부터 헌책방거리로 자리잡은 곳이다. 인천을 인천 아닌 엉뚱한 곳인 양 떠드는 이들은 정치꾼만이 아니다. 문화와 예술을 내세우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배다리를 배다리 아닌 얄딱구리한 곳으로 덮어씌우며 팔아치는 이들은 정치꾼이나 공무원이나 개발업자만이 아니다. 문화이니 예술이니 들먹이는 이들과 모임도 매한가지이다.

 제발 입 좀 다물면 좋겠다. 제발 다른 데에서 돈벌이를 하면 좋겠다. 인천은 인천 그대로 놓아 주고, 배다리는 배다리 그대로 살려 주면 좋겠다. 좋은 노래와 춤사위가 있으면서 책을 즐길 수도 있다만, 조용한 가운데 차분한 마음결이 되지 않고서는 책을 삭일 수 없다. 인천이 왜 인천이고, 배다리가 왜 배다리인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인천이고, 어디에서 인천이 태어나 오늘날에 이르렀으며, 배다리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이며, 배다리가 왜 배다리이고, 오늘날과 같은 이름을 얻었는지를 길디긴 흐름과 기나긴 삶자락과 여느 사람들 눈물 콧물 웃음 땀방울로 돌아보는 사람들 가슴에 쓰라린 생채기를 남기는 모든 지식인들은 당신들 스스로 뭘 하고 있는지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부질없는 꿈일는지 모르나 하도 답답하고 갑갑해서 한 마디 적는다. (2010.5.8.흙.ㅎㄲㅅㄱ) 

 

.. 


인천에서 '배다리'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모든 지식인을 두고 쓴 글이다만, 이들 배다리를 내세우는 지식인들과 문화인과 예술인과 운동가들은 이 글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느낀다. 그러나 배다리 주민으로서 더는 참고 지켜볼 수 없기에 글조각이나마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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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라면을 먹을 때 모두가 친구 12
하세가와 요시후미 지음, 장지현 옮김 / 고래이야기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빨래할 때에 이웃집도 빨래를 한다
 [그림책이 좋다 79] 하세가와 요시후미, 《내가 라면을 먹을 때》



- 책이름 : 내가 라면을 먹을 때
- 글ㆍ그림 : 하세가와 요시후미
- 옮긴이 : 장지현
- 펴낸곳 : 고래이야기 (2009.3.20.)
- 책값 : 9800원



 (1) 내가 손빨래를 할 때


 어제 하루 새벽부터 저녁나절까지 낮잠 한 번 없이 신나게 놀며 아빠를 힘들게 하던 아이는 밤 한 시 무렵 깨어났습니다.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혼자 신나게 놀다가 사탕 하나 집어물고 스르르 잠든 때가 저녁 일곱 시 조금 넘어서입니다. 그러니 배가 고파서 깼겠지요. 그나마 밥이라도 먹고 잠들었으면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여섯 시나 여섯 시 반쯤 일어났을 테지만, 배고프다고 밤 한 시부터 한 시간 반 남짓 칭얼칭얼거립니다. 밤나절에는 먹이지 않으려고 하기에 달래고 어르고 안고 업고 하지만 도무지 잠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밥을 조금 먹여야겠구나 싶습니다. 밤에 일어나 밥을 차려 놓습니다. 그렇지만 밥상을 차려 놓으니 잘 먹지 않습니다. 깊은 밤에 네 시 가까이까지 아빠와 엄마 모두 힘들게 한 끝에 잠들고, 다시 아침 일곱 시 반쯤 일어납니다.

 스스로 말은 잘 안 하려 하지만 말귀는 모두 알아듣는 아이한테 하소연하듯 이야기합니다. “아이야, 제발 조금 더 자고 일어나 주라, 응? 힘들어 못살겠구나.”

 이런 말을 한다고 아이가 다시 잠드는 일이란 없습니다. 이 누리에 아이가 태어난 뒤부터 오늘까지 그야말로 잠 없고 기운 넘치게 놀아대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틀림없이 낮잠은 거뜬히 건너뛰고 저녁나절까지 낑낑 칭얼칭얼 하다가 까무룩 하고 잠이 들겠지요. 보나 마나 오늘도 밥은 잘 안 먹으려고 하겠지만 제발 밤에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밥을 조금이나마 먹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아이가 깨어 있는데 아빠는 드러누울 수 없습니다. 아이는 저 때문에 아빠와 엄마가 잠을 설칠 뿐 아니라 졸음이 가득한 줄을 헤아리지 않으니까요. 십 분 또는 이십 분쯤 엎드린 채 끙끙거리다가는 일어납니다. 더 누워 있다가 아이가 이부자리나 방바닥이나 책상맡에 오줌이라도 누면 큰일이니까요.

 게슴츠레 일어나서 씻는방으로 들어갑니다. 오늘은 낮 한 시부에 도서관 책손을 맞이해야 하기에 머리를 감고 씻고 빨래를 하기로 합니다. 지난밤 아이가 오줌을 눈 기저귀와 옷가지에다가 새로 잔뜩 쌓인 옆지기 옷가지를 씻는방 바닥에 펼쳐 놓고 머리를 감습니다. 아이 옷가지와 기저귀부터 빱니다. 큰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작은 대야에 비빔질 마친 빨래를 하나씩 넣고는 다섯 벌로 나뉘어 차근차근 헹굼질을 합니다. 다섯 벌로 나눈 빨래이니 첫 벌로 헹군 빨래를 두 벌로 빤 빨래를 헹구고, 이렇게 다섯 가지 빨래를 착착 헹굽니다. 마지막 헹군 구정물로는 씻는방 바닥과 벽에 부어 물때를 벗깁니다. “아이구 허리야, 날마다 해도 해도 빨래는 날마다 잔뜩 쌓이는구나.” 하는 노래를 하며 빨래를 하는 동안 아이는 아빠가 빨래하는 양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물놀이를 할까 말까 망설입니다. 아이가 양말을 챙겨 신은 채 씻는방에 들어왔기에, “벼리야, 양말 젖는다. 방으로 들어가.” 하는 말을 세 차례 해서 내보냅니다. 맨발로 들어왔으면 가만히 지켜봤을 테고, 맨발로 있던 아이를 아빠가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면 아이는 살그머니 저 두 손을 헹굼물에 담그며 놀았을 테며, 이러는 가운데 아이는 옷이 젖었을 테고, 아이가 옷이 젖으면 ‘이 녀석, 또 옷을 버리네.’ 하고 한숨을 쉬며 아이 씻을 물을 따로 받아 아이를 씻기면서 빨래를 했겠지요. 어차피 거의 날마다 아이를 씻기지만 오늘 아침은 몹시 힘들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빕니다. ‘아이야, 오늘은 저녁에 씻자, 응? 오늘 아침은 너무 힘들다.’

 비비고 헹구고 털며 빨래를 하는 내내 허리를 톡톡 두들깁니다. 오늘 아침도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빨래로 여는데, 오늘날 여느 한국땅 살림집처럼 빨래기계를 키우고 있다면 이런 고단함이란 없을는지 모릅니다. 요사이는 집일이 부쩍 늘어 빨래를 다 마치고 널면서 어제 해 놓은 빨래가 다 말랐어도 곧바로 개지 못합니다. 자리에 드러누워 허리를 편 다음 개든지 한숨 크게 돌리고 나서 저녁에 개든지 이틀치를 쌓아 놓고 개든지 합니다.

 헌 빨래기계를 거저로 준다는 사람이 있고, 이제는 빨래기계 한 대쯤이야 돈으로 얼마 치지 않아 집안에 들이기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빨래기계를 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냉장고며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빨래기계가 들어오는 일이란 하나도 반갑지 않고 달갑지 않으며 고맙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기계한테 맡기기 싫고, 괜히 빨래기계 냉장고 텔레비전을 키우며 애먼 전기를 더 쓰고 싶지 않아요. 글을 쓰는 셈틀하고 손전화에 밥 먹이는 데하고 밤에 등불 켤 때를 빼고는 전기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우리가 오늘날처럼 전기를 많이 쓰던 날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거든요. 지난날 여느 살림집은 어디나 전기를 얼마 안 쓰거나 없이 살았으며 등불 하나 켜면서 조마조마해 했습니다. 여느 살림집에는 셈틀이란 없던 우리들이요, 빨래기계를 집집마다 들인 지 수십 해가 된 우리 나라가 아닐 뿐더러, 냉장고가 여느 살림집에 들어온 햇수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어느 집이나 손으로 일을 하고 손으로 부대끼며 손으로 얼싸안으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기계를 쓴다든지 돈을 쓴다든지 하면서 내 살림살이를 남한테 맡기지 않은 우리들 발자취입니다. 아이를 키우든 아이를 가르치든 먹을거리를 마련하든 누구나 제 손으로 꾸리던 우리들 살림살이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손빨래를 하며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 이웃집 가운데 어느 집도 빨래기계 안 쓰는 집은 없을 테지만, 이 아침나절에 어느 이웃집이나 빨래를 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빨래를 마칠 무렵이면 아이한테 밥을 먹일 테고, 새벽바람으로 일 나가는 집식구가 있으면 새벽밥을 지어서 먹을 터이며, 집식구 모두 아침부터 바깥일을 나가야 한다면 지난밤에 아침을 미리 마련해 놓고 있었으리라고.

 이리하여 아침 예닐곱 시부터 낮 열두 시 무렵까지는 골목동네마다 빨래를 하는 때입니다. 이무렵에 집일을 모두 마치고 골목마실을 나서면 동네마다 막 마친 빨래를 햇볕 잘 드는 자리에 널어 놓으려고 부산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열두 시를 넘은 때에 골목마실을 하면 새로 빨래를 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햇볕과 바람으로 거의 다 마른 빨래가 팔랑팔랑 나부끼는 모습을 찾아봅니다. 때로는 바람에 날린 빨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이때에는 슬며시 빨래를 집어들고 탁탁 흙먼지를 털어 빨래줄이나 빨래대에 곱게 얹습니다. 빈 빨래집게가 있으면 집어 놓습니다. 빨래집게로 안 집어서 빨래가 날리는데, 동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 가운데에는 빨래집게가 어엿하게 있는데 깜빡 잊는다든지 집에서 전화가 울리면 그냥 널어 놓고 들어간 채 잊곤 하거든요.

 어제 낮에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있는 책쉼터 〈낮잠〉이라는 곳에서 만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젊은이가 제 골목 사진을 보고 사진을 이렇게 잘 찍으려면 어떡해야 하느냐고 묻기에 “제 사진은 잘 찍은 사진은 아니고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이에요. 다만 날마다 여러 시간을 여러 해 돌아다니면 누구나 찍을 수 있을 뿐이랍니다.” 하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느끼고,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내 삶과 이웃 삶을 살피면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다른 사람 눈치가 아닌 내 눈썰미에 따라 좋은 이야기를 엮을 수 있습니다. 굳이 작품이 되기를 바라는 글이 아니라 한다면 언제나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어요. 애써 작품이 되기를 꿈꾸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니라 한다면 노상 신나게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요.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마음과 즐기는 매무새인데, 우리들은 좋아하는 마음과 즐기는 매무새를 하루하루 잃고 있다고 느낍니다. 손빨래를 좋아하는 마음을 잃고, 손걸레질을 즐기는 매무새를 나날이 잃고 있구나 싶습니다. 두 다리로 마실하는 재미를 잃고, 아이를 안거나 걸리며 키우는 보람을 잊구나 싶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어른인 나부터 신나게 돌아보고 우리 딸아들한테 알뜰살뜰 보여주며 함께 나눌 책 하나 우리 눈길로 살피어 장만한 다음 같이 읽기란 어려운 노릇이겠지요.


 (2)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에 담은 삶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를 넘깁니다. 책이름 그대로 일본땅 여느 살림집에서 살아가는 어린이가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을 때부터 이야기를 엽니다. ‘뭐야, 라면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라면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인지 라면이 맛나다든지 뭐 그런 그림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요즈음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모두)은 라면을 좋아하고 즐겨먹고 있어 이런 그림책마저 그리는가 싶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펼쳐 끝까지 보지 않고서야 무슨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겉그림이나 첫그림만 보고 섣불리 짚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옆에서 방울이는 하품을 한다.
옆에서 방울이가 하품을 할 때
이웃집 미미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다.
이웃집 미미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
이웃집의 이웃집 디디는 비데 단추를 누른다.



 그림책 첫머리는 라면 먹는 아이 모습이 나옵니다. 라면 먹는 아이는 일본땅에서는 ‘아주 잘사는 집’도 아니고 ‘아주 못사는 집’도 아닙니다. 그저 수수한 살림집 여느 아이입니다. 아이 곁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심심한 듯 하품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 둘레에는 고양이나 개를 기르는 집이 퍽 많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이웃집 아이는 텔레비전을 보고, 이 이웃집 옆에 사는 아이는 뒷간에서 비데 단추를 누릅니다. 오늘날 웬만한 살림집이란 모조리 아파트이거나 빌라입니다. 빌라는 차츰 줄며 아파트로 바뀌고 있으며, 잘사는 아파트이건 조금 못사는 아파트이건 시설이나 집 얼거리는 ‘현대화’나 ‘최신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비데 단추쯤이야 아무것 아닐 테지요.


그 이웃마을 여자아이가 달걀을 깰 때
이웃나라 남자아이는 자전거를 탄다.
이웃나라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탈 때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여자아이는 아기를 본다.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에는 일본땅에서 문화와 물질을 듬뿍 누리는 아이들을 하나둘 보여줍니다. 말끔한 야구옷을 차려입고 야구놀이를 하는 아이를 보여주고, 바이올린을 개인 선생한테서 배우는 아이를 보여줍니다. 부엌에서 손수 밥하기를 하며 노는 아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림이 달라집니다. 이제 ‘아이들 이웃집’이 ‘아이들 이웃나라’로 옮깁니다. 먼저, 일본하고 맞붙은 이웃나라인 한국으로 와서 한국땅 ‘자전거 타는 어린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한국땅에서 이웃이라 할 나라인 아시아로 접어들어, 아시아에서 ‘아기 보는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처음에 라면 먹는 어린이라든지 비데 단추 누르는 어린이라든지 값나가는 바이올린을 여러 대 벽에 걸어 놓고 이쁘장하게 배우는 어린이라든지 나올 때에는 그예 흔하디흔한 싸구려 그림책이 아닌가 하고 여겼습니다. 아기(어린 동생)를 보는 어린이를 보여주는 그림을 보고서야 비로소 무릎을 치며 깨닫습니다. 아하, 이렇게 차근차근 내 눈길을 우리 옆으로 옆으로 돌리면서 우리 이웃과 동무와 둘레 삶자락을 느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어설피 가르침을 베풀려는 그림책이 되어서는 안 되고, 아주 부드럽고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손길로 내 삶터와 이웃 삶터를 골고루 느끼도록 도와주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제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는 가슴이 시린 대목을 톡톡 건드립니다. 소를 부리며 농사일을 하는 어린이를 보여주고, 엄마 아빠 몫을 떠안아 길에서 장사를 하며 살림을 꾸리는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 모두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은 다음 어린이까지 싸움터에서 누군가 쏜 총에 맞아 길바닥에 널브러진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그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남자아이가 소를 몰 때
그 맞은편 나라 여자아이는 빵을 판다.
그 맞은편 나라 여자아이가 빵을 팔 때
그 맞은편 나라의 산 너머 나라 남자아이는 쓰러져 있다.



 싸움은 누가 일으켰을까요. 어린이들끼리 싸움이 붙었을까요. 어린이들은 까닭 모르며 집을 잃고 어버이를 잃으며 목숨마저 잃어야 하는가요. 무슨 잇속을 챙기려고 무시무시한 무기를 앞세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 어른들은 왜 무기를 끝없이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만들고 있나요. 평화를 지키려는 무기인가요, 싸움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남보다 더 큰 잇속을 챙기려 하는 무기인가요. 나라를 지킨다는 이름을 앞세우는 어른들인데, 정작 제 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이웃나라 사람들 목숨은 아주 하찮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요.

 모르는 노릇이지만, 무기를 만들고 싸움을 일으키며 서로 죽이고 죽는 어른들은 이웃집을 들여다보거나 헤아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싸움터로 끌려나가야 하거나 스스로 싸움터로 뛰쳐나간 어른들 또한 당신 둘레 동무와 아이들을 살피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총을 든 어른들은 누군가를 죽이려는 사람이지 누군가를 살리려는 사람이지 않습니다. 적군을 죽이는 총이요 우리를 지키는 총이라지만, 우리한테 적군일 맞은편도 우리하고 똑같이 생각합니다. 우리들만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가 아닙니다. 적군인 나라도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입니다.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인 우리들 서로서로가 총을 맞대며 우락부락 다툴 까닭이란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더 있는 돈과 자원이라면 우리보다 힘겨운 이웃나라한테 보태 주며 사랑을 나누면 됩니다. 우리한테 모자란 돈과 자원이라면 우리보다 넉넉한 이웃나라한테서 얻으며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억지로 힘을 써서 빼앗아야 할 까닭이 없고,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어거지로 옆사람을 밀어내거나 넘어뜨리며 나 홀로 1등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고, 1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2등이 될 까닭 또한 없으며 3등과 4등 또한 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등수나 숫자나 돈셈이 아닌, 사랑과 웃음과 눈물과 즐거움과 보람과 땀방울로 어우러진 아름다움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은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괴롭힘과 죽임과 빼앗음입니다. 갖추어야 할 매무새는 착함과 올바름과 넉넉함과 따뜻함과 너그러움과 참됨입니다. 갖추지 않아야 할 매무새는 시샘과 따돌림과 미움과 못됨과 차가움과 메마름과 거짓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는 “바람이 불었다” 한 마디를 넣은 그림을 여러 쪽 잇달아 보여주면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라면을 먹던 어린이는 이웃집 동무들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가만히 헤아려 보다가 바람을 느꼈을 수 있고, 그냥 라면만 배불리 먹고 빈 그릇은 개수대에 던져 놓고 설거지는 엄마한테 떠넘긴 채 야구방망이와 장갑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 다른 동무들하고 신나게 공놀이를 즐겼을 수 있습니다.

 라면을 먹고 나서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고, 라면을 먹었으니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라면을 먹은 든든한 몸으로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읽을 수 있는 한편, 라면을 먹으면서 밀린 숙제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놀 때에 일하는 동무가 있고, 내가 잠잘 때에 싸우는 어버이 때문에 눈물로 지새우는 동무가 있으며, 내가 자가용을 타고 학교와 학원을 오갈 때에 썰렁한 집에서 라이타로 불장난을 하는 동무가 있습니다. 옆에 있다고 모두 동무가 아니며,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못한다고 동무 아닌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동무들과 이웃들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한편, 우리는 우리 둘레 사람이나 삶터를 하나도 모르거나 아예 등돌린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라면을 먹을 때에 바람이 붑니다. 아이 옷가지를 손빨래하고 있을 때에 이웃집에서도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4343.5.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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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찍는 마음


 내 이웃을 내 삶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사진이란 언제나 나와 네가 마주하며 이야기하는 문학이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찍는 사진이란 저마다 내 이웃을 어떤 내 마음그릇에 따라 사랑하거나 헤아리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사진기를 든 사람들 마음그릇이 깊고 너르다면 이이가 아무리 풋내기요 값싼 사진기를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따뜻하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사진을 빚습니다. 사진기를 든 사람들 마음그릇이 얕고 좁다면 이이가 아무리 이름난 사진쟁이요 값비싼 사진기를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차갑고 메마르며 엉터리인 사진을 낳습니다. 사진기를 알아보고 사진기를 갖추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기만 하는 어설프며 가녀린 사람들을 마주해야 할 때에는 더없이 슬픕니다. 사랑나눔 하나 하지 못하면서 사랑이야기 하나 담지 못하는데다가 사랑스러운 눈길 한 번 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글쟁이는 글을 쓰기 앞서 먼저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림쟁이는 그림을 그리기 앞서 먼저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하며, 사진쟁이는 사진을 찍기 앞서 먼저 고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땅한 밑바탕 다지기입니다. 처음을 여는 밑마음 다스리기입니다. 착하지 않고 참되지 않으며 곱지 않은 사람들이 쥐거나 들거나 붙잡고 있는 볼펜과 붓과 사진기는 무시무시한 군화발과 같습니다. 무서운 총칼과 매한가지입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새를 떨어뜨리는 못난 주먹힘일 뿐입니다. (4343.5.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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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 (양장) - 왜 미국의 국립공원에는 케이블카가 없을까?
이지훈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골프장이 있는 까닭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3] 이지훈,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제주 삼다수’ 먹는샘물 회사는 한 해에 31만 톤쯤 땅속물을 길어서 쓴다고 합니다. 제주섬에 있는 골프장들은 한 해에 1812만 톤쯤 땅속물을 퍼내어 쓴다고 하고요. 제주 삼다수 먹는샘물 회사에서 쓰는 물보다 제주섬 골프장 한 곳이 쓰는 땅속물이 훨씬 많다는군요. 그렇지만 이런 물씀씀이를 제대로 살필 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매우 드뭅니다.

 어제 낮에 헌책방마실을 하려고 동인천역에서 빠른전철을 타고 용산역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 식구 옆에 나란히 앉은 젊은 두 사람이 ‘지구온난화’와 ‘물 부족 국가’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더군요. 칭얼대는 아이를 보느라 바쁘면서도 용케 옆자리 젊은이들 목소리가 귀에 하나하나 들렸습니다. 젊은이들은 물이 그렇게 모자라다는데 제주 삼다수는 그렇게 물을 퍼올리면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합니다. 이런 이야기 다음으로 골프장에 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젊은 당신들이 가는 골프장에서 물을 어느 만큼 쓰는지, 또 농약이나 풀약을 얼마나 많이 쓰는지를 하나도 모를까요. 아마 하나도 모르니 이런 이야기를 조곤조곤 주고받지 않느냐 싶습니다.

 물 이야기를 좀더 살피고 싶다면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그물코,2009)이라는 훌륭한 책이 하나 있고, 《주식회사 물》(달팽이,2007) 같은 속깊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살짝살짝 나오는 겉핥기 이야기로는 우리를 둘러싼 물 이야기를 찬찬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구가 차츰 뜨거워지는 까닭이 어디에 있고, 우리 나라에 물이 모자라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를 옳게 살피고 바르게 읽으며 슬기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 요세미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국립공원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애써 설치해 놓은 공원의 자동차 도로를 뜯어내고 숲속에 그림처럼 지어 놓은 숙박시설을 공원 밖으로 이전했다 … 국립공원의 존재 의미가 ‘국민이용 편의’에서 ‘자연보전 중심’으로 분명하게 옮겨간 것이다 … 국립공원청의 책무가 “손상되지 않은 자연/문화자원의 ‘보존’”이기에 그들은 이를 훼손하는 어떠한 인공시설물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중 보존해야 할 대상에는 생태계도 있지만 ‘경관’도 있다. 그렇기에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를 설치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  (14, 19쪽)


 우리 집 아이는 고기를 안 먹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아주 잘게 씹어서 주면 때때로 받아먹기는 하지만, 아이는 김치를 가장 좋아합니다. 애 엄마와 애 아빠가 따로 고기를 즐겨먹지 않을 뿐더러 고기를 마련하여 밥을 차리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 어쩌다 바깥에서 고기를 먹어야 하는 자리에서조차 아이는 고기는 아예 쳐다보지 않습니다.

 둘레 어른들은 아이가 튼튼히 자라려면 고기도 먹어야 할 뿐 아니라 많이 먹어야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고기다운 고기가 있는지를 살피는 어른은 없습니다. 뭍고기들이 얼마나 많은 항생제를 먹으면서 좁아터지고 지저분한 시멘트 우리에서 끔찍하게 길러지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생제 중독》(시금치,2005)이나 《우리 안에 돼지》(숲속여우비,2010) 같은 책들을 찾아서 읽으면 좋으련만, 이런 책을 읽은 분들이라 할지라도 우리 입맛을 달짝지근하게 꼬드기는 먹을거리가 얼마나 몹쓸 먹을거리인지를 느끼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엠에스지’를 안 넣는다고 다들 크게 써붙이고 있으나, 이런 딱지를 써붙이기 앞서는 모두들 엠에스지를 써 왔으며 갖가지 첨가물과 화학색소를 잔뜩 집어넣고 있습니다.

 자연 그대로인 먹을거리란 가게에 없고, 자연 그대로를 받아먹을 터전이란 도시에 없습니다. 이리하여 자연스러울 수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며 이것저것 꼬치꼬치 어떻게 따지느냐면서 항생제이든 농약이든 사료이든 첨가물이든 화학색소이든 무어든 혀끝에 따라 낼름낼름 사먹거나 사먹이는 우리들 살림살이입니다. 옳게 마련하여 내다 파는 생협 물건이 비싸다고 하지만 이제는 여느 공산품 물건하고 거의 같은 값일 뿐더러 우리 스스로 옳게 마련하여 내다 파는 생협 물건을 사랑하고 아낄 때에 비로소 여느 공산품 물건 또한 허투루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음을 살피지 않는 우리들 생각밭이요 매무새입니다.


.. (우리 나라는) 1986년 12월 ‘자연공원법’이 개정되면서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설립 근거가 마련됐으나 관리공단은 ‘건설부’ 산하에 마련됐다.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다.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주무부서가 ‘건설부’라니. 1991년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주무부서가 ‘건설부’에서 ‘내무부’로 바뀌었다가 1998년 들어서야 비로소 ‘환경부’로 이관됐다 ..  (28쪽)


 ‘왜 미국의 국립공원에는 케이블카가 없을까?’라는 작은이름을 달고 나온 책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를 읽습니다. 글쓴이 이지훈 님은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 방문연구원으로 한 해 다녀온 나날을 밑거름 삼아 미국땅 국립공원을 요모조모 살펴보았고, 그동안 한국땅 국립공원을 돌아본 나날을 견주면서 우리네 국립공원이 나아갈 올바른 길을 밝히고자 애씁니다.

 책에 붙인 큰이름과 작은이름을 읽는다면 이 책 고갱이는 한 줄로 또렷하게 나타납니다. 첫째, 한국 국립공원은 미국 국립공원을 보며 배워야 합니다. 둘째, 한국이 우러러 마지않는 미국은 국립공원에 케이블카가 하나도 없으나 우리 나라에는 많이 있고 많이 새로 놓으려고 아둥바둥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미국과 한국은 이토록 다를까요. 미국을 섬기고 받든다고 하는 한국사람들은 왜 미국이 훌륭히 잘하는 모습만큼은 터럭만큼이나 배울 생각을 안 할까요. 왜 한국사람들은 한국에 도움이 되는 미국사람 정책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한국에 도움이 안 되는 미국사람 정책만을 두 손 받들어 모시려고 할까요.

 정치하는 사람과 공무원이라는 사람들 탓인지요? 배운 사람들 탓인지요? 기자들과 광고지 같은 몇몇 신문들 탓인지요? 썩어문드러진 기득권과 수구 무리들 탓인지요?

 케이블카를 놓을지라도 아무도 안 탄다면, 한국땅 공무원이나 개발업자나 국립공원관리공단이나 건설부나 ‘있던 케이블카도 없앱’니다. 그런데, 한국땅에서 생각있는 사람이나 생각없는 사람이나 케이블카가 ‘짠!’ 하고 놓이면 ‘입으로는 나무라지만 몸으로는 케이블카를 탑’니다. 여느 사람이든 지식인이든 운동가이든 활동가이든, 입과 몸이 따로 놉니다.

 정치를 배우든 경제를 배우든 문화나 예술을 배우든 미국으로 비행기 타고 날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가운데 국립공원을 배우고자 미국으로 날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 애써 배운 좋은 이야기들을 우리 땅 우리 이웃하고 알뜰살뜰 나누고자 힘쓰는 분은 얼마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무라야 할 미국이라면 옳게 나무라고 배워야 할 미국이라면 옳게 배울 일입니다.


.. 현재 이 골프장은 공인된 ‘오듀본 협력 조수 보호구역 프로그램’에 가입되어 있으며, 미국의 몇 안 되는(1% 미만의) ‘유기농 골프 코스’ 중 한 곳이다. 여기서는 재활용 물만을 사용하며 어떤 종류의 비료와 농약, 제초제도 사용하지 않는다. 잡초는 순전히 제초기와 맨손만을 사용하여 제거한다. 업자가 18홀로 확대시키려 했으나 공원 당국은 허가해 주지 않았다. 이 정도면 어떠한 생태적 위험도 없는 골프장인 셈이다. 이러한 역사를 모른 채 국립공원에 골프장이 있는 모습만 보고 이것이 보존과 이용의 조화라는 실용주의적 보존정책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한다면 요세미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로서는 여간 황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  (48쪽)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를 쓴 이지훈 님은 2008년 3월에 교육방송에서 보여준 ‘세계의 자연 : 미국의 국립공원’이라는 ‘특집 다큐프라임’을 보았다고 합니다. 국립공원 공부를 할 뿐 아니라 미국에 찾아가서 미국 국립공원을 배우고 있던 글쓴이로서는 아주 반기면서 기쁜 마음으로 이 ‘특집 다큐프라임’을 보았다는데, 참으로 대단한 품과 돈과 사람을 들인 놀라운 작품인 이 방송이 외려 사람들한테 엉뚱한 생각을 불러일으킬까 걱정스럽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교육방송 풀그림은 ‘이용과 보존’이라는 두 가지를 들먹이면서 그릇된 정보와 어설픈 취재로 뚱딴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골프장은 요세미티가 국립공원이 되기 앞서부터 있던 골프장이요, 더욱이 우리 나라 골프장들처럼 갖가지 농약과 풀약을 잔뜩 치는 골프장이 아닌 ‘유기농 골프장’임을 헤아리지 않았거든요.

 우리 지식사회를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텐데, 올바르고 알맞게 좋은 길을 함께하자고 나서는 자리에서조차 좀더 속깊이 파고들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다큐멘터리이든 다큐프라임이든 그럴싸한 그림으로 그럴싸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 눈길을 둘 노릇이 아니라, 올바른 그림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 눈길을 둘 노릇입니다. 시청자가 10만이 되어야 보람이 있는 방송이 아닙니다. 시청자가 9만이어도 되고 5만이나 1만이어도 됩니다. 아니 1천이나 1백이어도 괜찮습니다. 시청자가 100만일지라도 100만 가운데 내 삶을 바꾸며 거듭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부질없습니다. 시청자가 1천 사람일지라도 이 가운데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이 스스로 내 삶을 바꾸며 거듭나려 했다면 더없이 보람있습니다.

 많이 팔리거나 잘 팔리는 책이 뜻있는 책이 아니라 제대로 읽히거나 잘 읽히는 책이 뜻있습니다. 이름난 사람이 좋은 삶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이 좋은 삶입니다. 크고 많은 돈이 즐거운 삶이 아니라 살갑고 넉넉하며 따뜻하여 사랑스러울 때에 즐거운 삶입니다.

 국립공원이란 ‘여기만 지키자’는 다짐이 아닙니다. 국립공원이란 ‘여기부터 건사하자’는 다짐입니다. 국립공원부터 올바로 건사하여 우리 둘레 모든 삶터를 슬기롭고 아름다이 건사하자는 첫머리 다짐입니다.


.. 특정 지역이나 공간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은 그곳이 마치 ‘자신의 소유지’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주인 의식을 갖고 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책임의식의 발로에서 비롯됐으리라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도 ‘지나칠 경우’ 문제가 된다. 국립공원만 하더라도 국민들의 공적 자산인데, 그곳을 관리하는 기관의 직원들이 스스로가 마치 회사 주인이자 주주인 양 행세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러다 보니 국립공원의 ‘주인’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나 사무소(직원)가 되고, 탐방객은 ‘객’으로 취급되어 버린다. 이 ‘주인’은 객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지, 소중한 자연환경을 훼손하지는 않는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데 주력한다 ..  (149∼150쪽)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를 한 번 읽고 나서 차근차근 한 번 더 되새겨 봅니다. 처음 읽을 때에 밑줄을 그은 대목을 살피니 몇 군데 없습니다. 밑줄을 그은 대목을 찬찬히 거듭 되읽으니 책 한 권을 통틀어 똑같은 이야기를 두어 차례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글 첫머리부터 맺음말이 다 나와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구나 싶습니다. 좀더 많은 자료와 정보를 보여주고자 애쓴 땀이 엿보이지만, 국립공원 이야기는 더 많은 자료와 정보가 없이도 얼마든지 알차고 훌륭히 선보일 수 있을 텐데, 글쓴이는 이 대목을 놓치고 있습니다.

 글쓴이 이지훈 님이 미국땅 모든 국립공원을 좀더 오래 두루 돌아다녔다고 해서 책이 더 알찰 수 있지는 않습니다. 딱 한 군데 국립공원만 찾아보았다 할지라도 이 한 곳에서 당신 가슴을 싸하게 적신 모습을 적바림할 수 있으면, 당신 마음밭을 넉넉히 북돋운 모습을 조곤조곤 들려줄 수 있으면, 국립공원이 있기에 당신 넋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었음을 지식조각이 아닌 삶으로 보여줄 수 있으면 됩니다.

 꼭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을 때에만 지켜야 할 아름다운 터전이 아닙니다. 반드시 국립공원만 알뜰히 지켜야 할 자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터전 어디나 아름다이 건사해야 합니다. 우리 삶터 어디나 알차게 가꾸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아름다운 목숨빛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누구나, 푸나무 모두, 자연 터전 어디나, 제 결을 고이 보듬을 때에 살기 좋은 이 나라로 다시 태어납니다. (4343.5.6.나무.ㅎㄲㅅㄱ)


 ┌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한울,2010)
 ├ 글 : 이지훈
 └ 책값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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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05-06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덕분에 책 2권이 보관함에 추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