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성서공단이 전부 들어서기 전, 아직은 태반이 사과 과수원이던 시절 내가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대구 능금을 열심히 먹었고, 국민학교 1학년 때 과수원이 거의 다 헐리게 되었을 때, 서울 집에도 대구에서 가져온 나무 한 그루를 심었더랬다. 안타깝게도 '흙과 날씨가 달라' 단 한 해도 열매는 열리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대구 사과는 씨가 말랐고, 성주나 영천 사과가 대구 능금 이름을 달고 팔렸다. 대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청송이나 상주 사과가 유명해졌고, 청송과 안동으로 농활 다니면서 사과와 수박을 실컷 먹었더랬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애를 낳을 무렵 문경 사과축제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동료들이 축제 다녀온 자랑을 늘어놓을 때마다 가보고 싶었지만 갓난쟁이를 데리고 갈 엄두가 안 나고, 매해 이 핑계 저 핑계 미루기만 하다 보니 작은애가 고3이 되었다. 

지금은 충주사과를 가장 즐겨 먹는다. 사과를 제일 좋아하는 손자를 위해 충북에 사는 시부모님이 즐겨 선물주시기도 하지만, 나도 과일가게를 가면 충주사과를 고른다.  

오늘 옆자리 동료가 경남 산지의 사과를 샀는데 싱싱하기만 하고 싱겁다는 얘기를 하길래, 요새 누가 경상도 사과를 먹냐고, 충주 사과가 맛있다고 추천을 하다가 문득 어라? 싶었다.

지도를 열고 사과 산지를 찍다 보니 이것도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지 싶다. 나의 손주는 북한 사과를 먹게 될까 싶어 갑자기 통일을 염원하게 된다면 주책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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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기회 - 이명랑 단편집 반올림 36
이명랑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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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쩌다 보니 좀 진지한 책들을 연달아 읽어댔다. 가볍게 머리 전환을 하고 싶어 소설을 고르는 중이었고,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귀찮아 도서관 서가에 꼭힌 책들을 손가락으로 차례대로 훓어가며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춰 보세요 척척박사님 딩동댕동' 이 짓거리를 해가며 고르는데, 연신 두꺼운 책들만 잡혔다. 몇 차례의 실패 끝에 이만하면 얄팍한데다 단편소설 모음집이라 골랐지만... 나의 목적은 아낌없이 배반당했고, 더 어지러워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오랜만에 리뷰를 끄적인다.

<신호>를 읽을 때만 해도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 이야기가 비현실적인 배경에서 다루어지는 것 같아 그럭저럭이었다. 지역간 학력 격차와 왕따 문제를 다룬 <전설> 속 두 아이는 늘 그렇듯 자살로 위장된 타살이었다.

<너의 B>를 보고 나니 안 그래도 꼴보기 싫던 샤넬 샹스 광고가 더욱 싫어졌다. 샤넬 최초로 10대 모델을 썼던 것으로 유명세를 탔던 이 제품의 가격은 35ml짜리조차 10만원이 넘는 가격이고, 4가지 종류를 대표하는 4명의 모델에서 아시아인은 배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뷰를 보면 사회초년생도 아니고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에게도 권장되는 향수란다. 부모들의 또 다른 등골 브레이커인 것이다.

<준비물>도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학원의 이름은 '호프'라지만 그 어디에서도 희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게 한 편, 한 편,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다 못해 마지막 편을 읽을  때는 덩달아 침몰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막 내 옆으로 온 아이에게>는 세월호 이야기였고, 하필 지금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대통령이 거부하냐 마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참이다. 

세상엔 어두운 소식이 가득하고, 미래의 희망이라는 아이들을 다룬 청소년 소설도 회색빛이다. 교복 속에 갇힌 암담함을 어찌나 잘 살렸는지 이제 막 힘겨운 학창시절을 통과한 어린 작가라 생각했는데, 나랑 1살 차이. 그녀 역시 나처럼 학부모의 삶을 살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같은 측은지심과 기성세대로서의 부끄러움이 면면히 스며들어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딱지 떼고 부모들이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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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4-01-15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청소년 소설은 사실 부모가 먼저 읽거나, 혹은 같이 읽고 대화하면 좋겠죠.
저도 조금 더 부지런했던 시절에는 큰 아이와 함께 청소년 소설을 읽고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어느새 그런 것들 다 잊고 살고 있네요.

더 늦기 전에 아이들과 책 읽고 대화 나누는 시간을 다시 살려봐야겠어요.
조선인님 글 덕분에 잊고 있던 걸 깨우쳤네요. 고맙습니다!
 
슬픔의 방문
장일호 지음 / 낮은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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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쩌면 생존자의 기록이지만, 구구절절하지 않고, 담백하다. 실제 만난 그녀는 시종일관 큰 웃음을 터뜨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만 난 그녀를 존경하기로 했다. 그녀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툭툭 자신을 드러낼 때마다 난 크게 심호흡을 했고, 존경의 마음을 담아 주홍색을 붙였다. 


앞으로 내가 배우고 생각해야 할 지점에는 하늘색을 붙였다. '빈부 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 '우리나라에도 제로 아워 노동자가 생길 것인가 또는 플랫폼 노동자들은 이미 제로 아워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존엄한 죽음, 좋은 죽음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언제쯤 답을 찾을 수 있을지 하늘 끝 만큼이나 막연하다.


그나마 내가 찾은 당장의 실천 과제에는 초록색을 붙였다. 내가 하는 모임의 회지에 가족구성원 3법에 대해 투고를 준비하게 되었고, 아무 생각 없이 없애버렸던 카드로 등록되어 있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기부도 소액이나마 되살렸다.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아둔 <가난 사파리>와 <마이 시크릿 닥터>도 얼른 구매해 읽어야 한다.


그녀가 내게 준 3가지 질문과 4가지 과제는 나를 좀 더 용감한 사람이 되게 해 줄 지도 모른다. 난 그녀가 열어둔 방문 앞에서 열심히 서성이며, 내가 꾸역꾸역 정리해 꽁꽁 닫아둔 방문을 언젠가 열어보는 날이 있을까 고심해 본다. '방문'이 door가 아니라 visit이라는 것을 샤이니 종현에 대한 글을 읽을 때에서야 깨달았지만, 난 원래 중의적으로 지은 책 제목이라고 멋대로 믿고 있다. 다만 아직은 문고리 잡는 것도 버거워 <슬픔의 방문>으로 담해북스에서 책모임을 한 다음날은 하루종일 걸어야만 했다. 언젠가 방문을 열어보는 날이 온다면 페퍼민트 레몬차를 마시고자 한다. '슬픔이 쓸모있는 다정한 미래를 함께 발명하고 싶어요'라고 다정히 서명해 준 뒤 그녀가 내 책에 붙여준 티백의 향이 오래 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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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 제3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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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면 울리는'은 어쩌면 '사랑은 이렇게 바뀐다' 혹은 '사랑은 이래도 안 바뀐다'라는 말랑거리는 이야기라면,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는 인간의 바닥과 인류의 느린 종말을 예견한다. 토마 상카라가 암살당한 지 오래이고, 오늘자 우리나라 넷플릭스 TOP10 중 핏물이 없는 건 4위 '빈틈없는 사이'와 10위 '포가튼 러브'뿐이다.


수레바퀴가 구원이 되지 못 하는 디스토피아가 될 거라 예견하는 작가는 지나친 비관론자일 지 모르겠으나, 천재인 것만은 확실하다. 박지리 문학상을 받았다는데, 개인적인 소회는 감히 박지리를 넘는 작가라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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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야 제목이 이해가 갔다. 와우.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기밀 누설이 될까봐 쓸 수가 없네. 그저 읽어보시라고 추천할 뿐. 영화도 보고 싶은데 주인공이 김래원이라 폭망한 걸까. 엄마역은 믿고 보는 김해숙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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