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지난 2002년 한국땅에서 벌어진 축구대회 때에는 나 또한 길거리에서 뜀박질을 하며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무렵은 나 스스로 참 철이 없기도 했으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앞을 누비면서 뜀박질을 할 수 있다는 대목이 더없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드넓은 찻길에 차가 못 다니도록 가로막고 사람이 앉아서 몇 시간이고 퍼질러 있을 수 있는 대목이 기뻤다. 비록 ‘운동-사랑놀이-영화’ 세 가지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며 바보스레 깎아내린다 하지만, 어쩌면 정치권력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세 가지를 잘 살리면서 우리 나름대로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길이 나올 수 있지 않느냐고 꿈을 꾸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는 가운데 지난날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고 어리석으며 어설픈가를 뼛속 깊이 느낀다. 모든 사람이 착하고 참되며 고운 길로 접어들려 하지 않을 뿐더러, 아예 생각조차 않음을 느끼거나 깨달으면서 바보는 바보일 수밖에 없으니 덧없는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딱 한 번 주어진 아름답고 멋지며 사랑스러운 내 삶임을 깨닫거나 느끼며 야무지게 기쁘게 붙잡는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나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축구대회에 눈길을 두지 않는다. 눈길을 둘 까닭이 없기도 하며, 아이와 옆지기와 바쁘고 힘겨이 살아가는 살림살이에서 이런 데까지 둘 눈길이란 처음부터 있지 않다. 지난 6월 며칠이더라, 축구대회가 벌어진다고 하는 소식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만석동이었나 어느 골목을 세 식구가 나란히 마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옆지기가 어느 가게에서 받아 온 전단지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 이거 축구대회 편성표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에 비로소 올해 2010년에 축구대회가 또 있음을 알았고, 남녘나라와 북녘나라가 나란히 축구대회 본선에 올라 있음을 알았다.

 지난밤이겠지. 우리 시간으로 새벽에 북녘나라하고 브라질이 축구 한 판을 치렀다. 이런 새벽에 축구대회를 보자고 일어날 수 없기도 하지만,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애 아빠와 애 엄마 모두 텔레비전을 키울 마음이 없다. 아무튼 경기를 볼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으나, 북녘나라 선수들이 1966년 뒤로 처음으로 축구대회 본선에 올랐을 뿐 아니라, 남녘나라와 북녘나라가 함께 올라 있다는 대목은 놀랍다고 느낀다. 북녘나라가 치른 축구 경기는 뒷소식이 궁금했다. 어떻게 되었나 알아보려고 누리그물을 들여다본다. 북녘나라는 브라질한테 1대 2로 졌단다. 그런데 이런 소식보다 ‘북녘 나라노래가 흐를 때에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정대세 선수’ 이야기가 도드라지게 보인다.

 그렇구나. 눈물이구나. 그래. 눈물이지.

 엊저녁, 수원 칠보산 기슭에 자리한 칠보산자유학교라는 곳 선생님들하고 사진 이야기를 나누고 느즈막하게 막차꼬리를 붙잡으며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책 하나를 읽었다. 이날 수원 팔달문 앞 헌책방 〈오복서점〉에서 찾아낸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자유포럼,1999)라는 책을.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일본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소설쟁이가 되었다는데, 한때 이분 책이 우리 말로 곧잘 옮겨지곤 했으나, 이제는 이분 책은 모조리 판이 끊어졌다. 어느 한 가지조차 새책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헌책방에서도 만나기 힘든 이분 책인데, 다문 한 가지라도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고마운 노릇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터에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를 만났다.

 이 책은 일본사람도 조선사람도 한국사람도 재일조선인도 재일한국인도 아닌 한 사람이 쓴 소설이다.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당신한테 1/4만큼 한겨레 피가 흐르는 줄을 모른 채 살았을 뿐 아니라 아무도 이를 얘기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소설 쓰는 일을 하면서 당신 삶을 소설에 담으려고 당신 집안 뿌리를 알아보다가 아주 우연하게 할머니가 평안도사람임을 알았다지.

 소설을 쓰지 않았으면 일본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아니 그냥 일본사람이었을, 이러면서 아무런 걱정이나 푸대접을 받을 일조차 없으며, 당신 몸에 한겨레 피가 1/4이 흐르는 줄 알았다 하더라도 당신 이름이며 국적이며 그냥 ‘일본사람’인데,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소설쓰기를 붙잡다가 뒤늦게 알아 버리고야 만 당신 뿌리 때문에 스스로 짐을 짊어졌다. 이 짐을 지다가 그만 고꾸라졌다. 몹시 꽃과 같은 나이에 스스로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른여섯, 오늘을 살고 있는 나와 같은 나이에 눈을 감은 사기사와 메구무 님인데, 사람들은 서른여섯이면 꽃과 같은 나이가 아니라고 여기려나. 열둘은 어린 싹이고 스물넷은 푸른 잎이며 서른여섯이 꽃다운 아름다움이고 마흔여덟에 무르익다가는 예순에 씨앗을 남기고 일흔둘에 우람한 나무가 되다가는 여든넷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아흔여섯에 마지막 잎새를 피우는 줄을 살피는 사람은 없으려나.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정대세 선수를 누리그물을 들여다보며 만나는데, 이이 눈물에서 사기사와 메구무 님이 홀로 조용히 흘렸을 눈물이 떠올랐다. 이러면서 나 또한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모든 운동경기는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이기려고 하는 운동이란 운동이 아니다. 이기려고 바둥거리는 운동경기란 전쟁하고 똑같으며, 돈벌이에만 매달리는 엉터리 삶하고 매한가지이다.

 우리는 아름답고자 우리 한삶을 꾸린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맛보고 즐거움을 누리며 사랑을 나누고자 한삶을 꾸린다. 한삶을 꾸리는 가운데 운동경기를 치르는 선수들 또한 ‘이기는’ 데에 큰뜻을 둘 수 없는 노릇이다. 운동선수한테는 꿈과 같다는 무대에 서는 일이 그지없는 아름다움이니까, 이러한 무대에 서는 날까지 피와 눈물을 바칠 수 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이나 목사님이라면 당신이 하느님을 섬기는 자리에 서는 날마다 벅차오르는 눈물을 흘릴 테고, 교사라면 당신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서는 날마다 북받치는 눈물을 흘릴 테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신부님이라면 거짓 신부님이요, 눈물을 쏟지 않는 교사라면 거짓 교사라고 느낀다. 맨 처음 들어서는 때에만 눈물이 솟을 수 없다. 맨 처음뿐 아니라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눈물은 샘솟으며, 마지막이 되든 언제가 되든 눈물바다를 이룬다. 사랑하는 사람을 껴안고 입을 맞출 때에 맨 처음에만 기쁘겠는가.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기쁘며 언제라도 기쁘다. 노상 눈물이 흐르고, 한결같이 웃음을 머금는다.

 축구를 하는 정대세 선수가 흘리는 눈물에 어떤 뜻이 담겼는지 구지레하게 덧붙이거나 덧달 이야기란 한 가지도 없다. 눈물은 그저 눈물이다. 정대세 선수는 가없는 북받침을 있는 그대로 쏟아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름다우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다울밖에 없고, 눈물을 흘리는 몸뚱이로 온누리를 부대끼는 사람은 온누리에 아름다움을 펼치고 있다. (4343.6.1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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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6-16 11:03   좋아요 0 | URL
정대세 선수의 눈물을 보면서 저는 외국인으로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머무는 타국적인 분들 생각도 나구요.

파란놀 2010-06-16 11:11   좋아요 0 | URL
이런 글을 쓸 마음은 없었는데, 문득 궁금해서 '조선일보는 어떤 기사를 썼을까?' 하고 들여다보다가 더없이 슬픈 마음이 들었답니다. 왜 그렇게들 '비틀기'를 하려고 안달일까요... 불쌍한 사람들...

무해한모리군 2010-06-16 11:07   좋아요 0 | URL
참 시사인에 인터뷰 잘 보았습니다.
사는 곳을 옮기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럽고 한편으로는 아쉽고 그랬습니다.

파란놀 2010-06-16 11:46   좋아요 0 | URL
인터뷰는 아니고 전화로 몇 가지 물어 본 다음에 나온 기사예요 ^^;;;
사진도 지난해에 <책방 이음>에서 사진잔치 할 때에 찍었던 녀석을
다시 실었구요 ^^;;;;;

그래도, 제 모자란 책에 눈길을 보내 주는 분들은 누구나 고맙답니다~

시골로 살림을 옮기면서
인천골목 사진 찍기 많이 어렵지만,
식구들이 튼튼하게 지낼 수 있어 좋답니다~
 


 엉터리 사진, 엉터리 책, 엉터리 말


 엉터리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있다. 이들이 찍는 사진을 본다든지 이들이 읊는 사진말을 듣다 보면 참으로 갑갑하며 슬프다. 아니, 이들이 더없이 딱하고 안쓰럽다. 그렇지만 이들은 스스로 엉터리 길을 걸어가면서 엉터리 사진을 찍거나 엉터리 사진을 말하는 줄을 느끼지 못하며, 헤아리지 못하는데다가, 바로잡지 못한다. 이리하여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는 불쌍할 뿐 아니라 슬프다.

 나는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들을 으레 부대끼거나 마주해야 하는 가운데 나로서는 이렇게 엉터리 길을 걷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옆에서 보기에 뻔히 어설플 뿐 아니라 볼썽사납기 짝이 없는데, 왜 내가 이들 엉터리 사진쟁이와 같은 길을 걸어가겠는가. 사진을 삶으로 받아들일 줄 모르며, 사진에 깃든 빛과 그림자를 읽을 줄 모르고, 사진으로 사랑과 믿음을 나누려 하지 않는 엉터리한테는 백 마디 말을 들려주거나 백 장에 이르는 사진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가슴을 울렁이도록 하는 사진을 내 온힘을 바쳐 찍을 노릇이요, 사진을 밝히는 글을 내 온마음을 들여 적바림할 노릇이다.

 엉터리 책을 쓰거나 내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다. 게다가 많다. 이들이 쓴 책이나 내놓은 책을 살핀다든지 이들이 떠벌이는 광고 글월을 살피다 보면 속이 메스꺼울 뿐 아니라 참말 어이없으며 괴롭다. 아니, 이들이 가없이 가엾고 안타깝다. 그렇지만 이들은 스스로 엉터리 이름놀이를 하면서 엉터리 책을 퍼뜨리는 줄을 느끼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하는데다가, 거듭나지 못한다. 이러니까 이들 엉터리 책쟁이는 우악스러울 뿐 아니라 무시무시하다.

 나는 이들 엉터리 책쟁이들을 늘 만나거나 쳐다보아야 하는 가운데 나로서는 이렇게 엉터리 삶을 꾸리지 않아야겠다고 되뇐다. 곁에서 바라보면 어엿하게 어리석을 뿐 아니라 볼꼴사납기 짝이 없는데, 왜 내가 이들 엉터리 책쟁이와 같은 삶을 꾸려야 하겠는가. 책을 삶으로 녹일 줄 모르며, 책에 담긴 알맹이란 밥처럼 날마다 즐겨먹으며 내 아름다운 일을 하는 밑거름으로 삼을 줄 모르고, 책으로 따스함과 넉넉함을 펼치려 하지 않는 엉터리한테는 즈믄 마디 말을 들려주거나 즈믄 권에 이르는 책을 건네준다 하더라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가슴이 펄떡펄떡 뛰도록 하는 책을 온땀 들여 쓸 노릇이요, 책을 밝히는 글을 내 온피를 쏟아 적어내릴 노릇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죄 엉터리로 살아간다. 죄 엉터리로 학교를 다니고 죄 엉터리로 밥을 먹으며 죄 엉터리로 텔레비전에 파묻혀 있다. 죄 엉터리 가득한 신문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죄 엉터리 아파트에서 엉터리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느 하나 자가용한테서 홀가분한 사람이 없지 않은가. 두 다리를 사랑하고 자전거를 아끼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돈이 아닌 사랑을 믿고, 이름값이 아닌 믿음을 섬기며, 주먹힘이 아닌 꿈을 건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삶이 엉터리이니 넋이 엉터리이다. 넋이 엉터리인데 말이 엉터리 아닐 수 있을까.

 삶이 아름답다면 넋이 아름답고, 넋이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말이 아름답다.

 그지없이 쉬우며 마땅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쉬우며 마땅한 이야기를 쉽고 마땅히 새기거나 품는 사람이란 왜 이렇게 드물까. 지저분한 온누리이니까 예방접종을 다 맞추어야 하고, 더러운 이 땅이니까 농약과 비료 펑펑 써대야 하며, 먹고살기 팍팍한 이 나라이니까 돈벌이만 하면 될까.

 아무래도 이모저모 핑계거리가 있는 우리들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일 저 일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다. 집식구를 먹여살린다든지 학교를 다녀야 한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서 얼마나 고단한 하루하루일까. 그런데 이 모두는 집어치울 핑계거리이고, 우리가 돌아볼 대목은 오로지 하나이다. 누구한테든 저마다 주어진 삶은 딱 한 번뿐이요, 이 한 번 주어진 삶은 다른 어떤 사람 삶하고 견줄 수 없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며 가장 즐거운 나날이다. 남하고 나를 견줄 까닭이 없이 나는 나대로 내가 걷는 이 길을 가장 신나게 걸어가면 된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즐거움이 있고, 가멸찬 살림일 때에는 가멸찬 살림인 대로 즐거움이 있다. 두 다리가 튼튼하여 힘차게 걸어다니는 사람이라면 힘차게 걷는 길에서 즐거움을 맛보고, 두 다리가 아파 제대로 못 걷는 사람이라면 바퀴걸상을 탄다든지 다른 사람 힘을 빌어 다닌다든지 하며 또다른 즐거움을 맛본다. 밥을 해서 스스로 먹어도 즐겁고, 밥을 차려 먹여도 즐거우며, 밥을 차려 준 분한테서 얻어먹어도 즐겁다.

 사람들이 자꾸자꾸 엉터리 사진을 찍고 엉터리 책을 쓰거나 읽으며 엉터리 말을 일삼는 까닭은 오로지 하나가 아닌가 싶다. 사람들 스스로 당신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며 즐겁고 소담스러운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자꾸자꾸 엉터리가 되어 버리지 않느냐 싶다. 내 삶을 사랑한다면 내 넋을 사랑하고 내 말을 사랑한다. 내 삶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찍는 사진에 사랑이 안 묻어날 수 있겠는가. 내 삶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쓴 책에 사랑이 안 담길 수 있겠는가.

 돈에 파묻힌 사람이 찍는 사진에는 돈내음이 폴폴 난다. 권력을 좇는 사람이 쓰는 책에는 권력내음이 구리게 난다.

 꿈을 품을 노릇이지 검은 속셈을 키울 노릇이 아니다. 꿈을 이루고자 땀을 흘릴 노릇이지 돈을 벌고자 땀을 쏟을 노릇이 아니다. 사진으로 이루는 꿈을 살피고, 책으로 이루는 꿈을 곱씹으며, 내 땀을 알뜰살뜰 곱게 들이며 이루는 꿈을 찾을 노릇이다. 성적표는 숫자가 아닌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데, 참말 사랑으로 성적표를 쓰고자 하는 스승이라면 아예 성적표란 집어치우고 아이들한테 편지를 써 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쓰는’ 성적표라고 제대로 된 아름다움이 아니란 얘기다. 제대로 된 아름다움이란 ‘사랑으로 쓰는’ ‘편지’ 한 가지이다.

 옳게 살고 착하게 살며 곱게 살면 된다. 옳은 마음을 깨닫고 착한 마음을 다스리며 고운 마음을 보듬으면 된다. 옳은 일을 하고 착한 일을 즐기며 고운 일을 나누면 된다. 옳은 사진을 찍고 착한 사진을 나누며 고운 사진을 펼치면 된다. 밑바탕을 차리고 밑틀을 세우며 밑돌을 닦으면 된다. 갈래는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다 다르게 나아가면 된다. 맨 먼저 밑자리를 슬기롭게 뿌리내리도록 애쓰면서 살아가면 된다. (4343.6.1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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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 쪽빛문고 5
다케타쓰 미노루 글.사진, 안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온누리와 사람을 살리는 힘
 다케타쓰 미노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


- 책이름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
- 글ㆍ사진 : 다케타쓰 미노루
- 펴낸곳 : 청어람미디어 (2007.2.20.)
- 책값 : 8500원


 (1) 4대강 사업에 얽힌 두 사람


 지율 스님은 ‘초록의 공명(http://www.chorok.org)’이라는 누리집 한켠에 당신이 거닐고 있는 삶터 한 자락을 글과 사진으로 띄엄띄엄 올려놓고 있습니다. 지율 스님이 띄엄띄엄 올리는 글과 사진을 ‘초록의 공간’이라는 곳으로 띄엄띄엄 찾아가 하나하나 읽고 살피노라면, 지율 스님이 바라보고 있는 낙동강 줄기란 참 수수하고 정갈하구나 싶습니다.

 돈을 바라보는 개발주의에 따라 나무를 자르고 모래를 파내며 땅을 뒤엎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일지라도 지율 스님 사진은 더없이 차분하면서 정갈합니다. 윽박지르는 사진이 아니라 포근히 감싸는 사진입니다. 꾸짖거나 나무라는 사진이 아니라 슬퍼 울고 있는 사진입니다. 아직 돈바라기 개발주의 삽날이 닿지 않은 곳을 찍은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는 그지없이 따스하면서 웃음이 묻어나는 사진이구나 싶습니다.

 숱한 글과 사진으로 4대강 사업을 아름다운 개발이라고 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다른 숱한 글과 사진은 4대강 사업이야말로 끔찍한 막개발이라고 까밝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당신들 스스로 가장 옳고 바르다 여기는 대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면서 당신들 생각을 내어놓습니다. 그런데 이들 숱한 목소리와 생각을 글과 사진으로 마주할 때마다 참으로 팍팍하고 메마르구나 싶습니다. 옳고 바른 목소리이기에 따사롭고 맑게 생각을 펼친다든지, 맞고 틀림없는 외침이니까 넉넉하고 밝게 마음을 나누려 하는 글과 사진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멍청한 짓이나 바보스러운 짓을 얄궂게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따끔하게 나무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멍청하거나 바보스러운 사람들은 참을 참으로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착한 일을 모르고 고운 삶을 모릅니다. 알면서 못한다 할 수 있지만, 모르기에 못할 뿐더러, 느끼려 하지 않으니 안 한다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어떠한 따끔한 꾸지람조차 소 귀에 읽는 불경이 되리라 봅니다. 소 귀에 읽는 경인데 꼼꼼하며 올바른 비판이라 할지라도 먹힐 리 없습니다.

 《신갈나무 투쟁기》를 쓰고 《숲의 생활사》와 《숲 생태학 강의》 같은 책을 쓰면서 숲과 자연을 살리는 길을 살펴 왔다는 차윤정 님은 지난 2010년 5월 17일에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환경부본부장’이라고 하는 1급 공무원 자리를 꿰찼습니다. 당신은 ‘생명의숲’이라는 모임에서 문화교육위원으로 일하기까지 했는데, ‘생명의숲’이라는 곳은 4대강 사업이 우리 땅에 좋지 않은 막개발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혀 왔습니다. 차윤정 님은 당신 스스로 ‘4대강 사업은 옳지 않다’고 밝히는 일을 하고 글을 써 왔으나(한국일보 칼럼), 어떤 까닭에서인지 둘레에서 환경사랑을 이루고자 힘쓰는 사람들을 힘겹게 하면서 내동댕이를 쳤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저런 움직임을 보면서 우리 집 책꽂이에 꽂힌 차윤정 님 책들을 길바닥에 내팽겨쳐야 할는지, 아니면 헌책방에 갖다 주어야 할는지 망설이다가 그냥 집에 두기로 합니다. 차윤정 님은 어느 신문사하고 만난 자리에서 당신 ‘소신이 바뀌지 않았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자연을 파헤치는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연은 사람이 살아가기 좋도록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갈나무 투쟁기》이든 《숲 생태학 강의》이든, 나무와 숲과 풀 모두 자연 그대로 아름다운 목숨이 아닌 사람한테 이바지를 할 때에 아름다울 목숨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는 소리입니다.

 어느 신문에 실린 길디긴 만나보기 글을 읽으며 뒷통수를 쳤습니다. 차윤정 님은 흔히 말하는 변절을 한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옳고 바른 삶하고는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을 때에 줄거리만 읽을 노릇이 아니라, 글줄마다 깊디깊이 실린 속내를 헤아릴 노릇이었는데, 저를 비롯하여 숱한 사람들은 책 하나 똑바로 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차윤정 님은 사랑과 믿음으로 글을 쓰거나 숲 해설을 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개발 편의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연 개발’을 하되, 지나치게 편의주의를 내세우거나 개발을 앞세우면 사람한테 도움될 일이 없다는 생각을 당신 책에 알알이 담아 왔던 셈입니다. 착하고 참되며 고운 삶결에 따라 우리들한테 맑고 밝으며 따스한 손길을 나누려 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4대강 사업을 두 팔 벌려 반기며, 1급 공무원이라는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은 사람은 나쁜 놈이요, 4대강 사업 참모습을 밝히고자 온몸을 바치는 사람은 좋은 분이라고 금긋기를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자리에 서 있거나 어느 길을 걷든지 부디 사랑을 찾고 믿음을 섬길 수 있기를 비손할 뿐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가 아닌 ‘사랑으로 어루만지자’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할 뿐입니다. 넉넉하거나 따스한 마음이 아닌 이들을 몽둥이로 두들겨팬다고 넉넉함이나 따스함을 느끼거나 되찾겠습니까. 아름답거나 훌륭한 넋이 아닌 이들을 꽃으로도 때리지 않고 찬찬히 타이른다고 아름다움이나 훌륭함을 고맙게 맞아들이겠습니까. 사랑을 모르면서 살아왔으니 명예와 돈과 권력에 끄달립니다. 믿음을 섬기지 못하며 지내왔기에 스스로 참되거나 착하거나 곱게 살아갈 매무새가 안 됩니다.

 지율 스님 글과 사진을 꾸준히 되읽고 곰삭이면서 생각합니다. 환경운동을 하는 노동운동을 하든 문화운동을 하든 어찌 되었든 ‘운동’을 하면서, 이 낱말마따나 ‘움직이기’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목소리 내기’에 앞서 내 삶으로 ‘따순 품과 너른 눈’을 북돋아야겠다고 느낍니다. 지율 스님은 4대강 사업을 두 팔 벌려 반기거나 떠벌이는 사람들을 나무라고자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낙동강 마실을 하지 않습니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한테까지 함께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또다른 4대강 사업’을 깨달으면서, 우리 스스로 참된 길을 찾기를 바라면서 글을 씁니다. 다시금 되풀이하지만, 4대강 사업은 반대하면서 입시지옥과 학벌주의를 깨지 않으면 부질없습니다. 4대강 사업은 나쁜 짓이라 꾸짖으면서 영어만능에 세계화에 한미자유무역협정에 젖어 있으면 덧없습니다. 4대강 사업은 반대한다면서 더 빠른 자가용하고 더 큰 아파트랑 헤어지지 못한다면 쓸모없습니다. 4대강 사업을 착하게 반대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 일은 이 일대로 제대로 나무라거나 꾸짖을 줄 아는 가운데 우리 삶을 착하게 일구어야 합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고운 몸짓으로 우리 삶을 보듬으며 우리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삶이어야 합니다.


 (2) 사진으로 보여주는 들짐승 삶


 사진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어린이들한테 자연사랑과 사람사랑을 일깨우고자 엮었으며,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골고루 즐길 수 있습니다. 훗카이도라고 하는 일본땅 북쪽 끝에 자리한 동물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들짐승과 멧짐승과 날짐승을 마주하면서 고마운 사랑을 나누어 받는 나날인가를 보여줍니다. 한국땅에서는 씨가 마른 여우인데, 훗카이도 동물병원에서는 들여우를 어렵잖이 만나 보살피고 돌보며 자연에 돌아가 머물 수 있도록 돕습니다. 동물병원 집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제 어버이와 함께 ‘다친 짐승을 돕는 일꾼’이 되어 여우를 비롯해 토끼와 딱따구리와 오소리와 참새와 솔개하고 다람쥐랑 좋은 놀이동무로 사귑니다.

 마땅한 노릇일 텐데, 동물병원을 꾸리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따로 자연사랑이니 환경사랑이니 동물사랑이니 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으리라 봅니다. 따로 자연사랑을 가르칠 일이 없으리라 봅니다. 자연 품에 안겨 자연스레 살아가며 자연을 느끼고 있으니, 무슨무슨 책을 읽힌다거나 어떤어떤 가르침을 베풀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훗카이도 끝에 자리한 동물병원 식구들은 당신들 삶으로 조용히 자연사랑을 맞아들이고 환경사랑을 일구며 동물사랑을 이룹니다.

 그나저나 이토록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를 담은 책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처럼 낯간지러운 이름을 붙이니 머쓱합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다케타쓰 미노루 님은 스스로 이런 낯간지러운 이름을 내세운 적이 없을 텐데요? 다케타쓰 미노루 님이 쓴 일본책에는 으레 ‘북쪽나라’라는 말이 보이는데, 동물병원 의사로 꾸리는 삶이라 더 남다르거나 뛰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동물병원 의사일 뿐입니다. 좀더 가까이에서 아픈 짐승을 돌볼 뿐, 온누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느니 이 땅에서 가장 거룩하다느니 하는 꾸밈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수수한 벗이고 조촐한 이웃이며 살가운 일꾼입니다.

 무엇보다도 북쪽나라 동물병원 사람들은 돈벌이를 하지 못합니다. 아니, 돈벌이를 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맡는 아픈 짐승이란 ‘어떤 집짐승을 키우는 임자라는 사람’이 돈을 치르며 맡기는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토끼가 돈을 알겠습니까. 노루가 돈을 갖고 있겠습니까. 큰곰한테 은행계좌가 있겠습니까. 고니한테 지갑이 달려 있겠습니까.

 들짐승을 돌보고 건사하고 먹이를 마련하는 동물병원 식구들은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책을 써내어 살림돈을 마련하고 들짐승들이 동물병원에서 아픈 곳을 다스리는 동안 먹을 여러 가지를 장만한다고 합니다. 병원장 아저씨는 말 그대로 당신이 동물병원을 꾸리며 만나는 들짐승이랑 당신하고 함께 짐승들을 어루만지는 집식구들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이 일이 고스란히 당신들 돈벌이가 됩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동물병원장 아저씨를 비롯해서 동물병원 식구들이 더 많이 벌거나 더 이름이 나거나 하는 데에 마음을 내주었다면, 아마 당신들 삶이 담긴 책은 안 팔렸거나 책으로조차 못 나왔으리라고. 당신들은 무슨 대단한 이름으로 동물사랑이니 자연사랑을 외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훗카이도 들짐승하고 어우러지는 자연 품에 안겨 똑같은 자연붙이 하나로 살아내고 있기에, 이러한 당신들 삶을 담은 책을 사람들이 아끼고 좋아하며 반기고 있다고.

 동물병원 식구들이 꾸리는 삶이란 바로 사랑과 믿음입니다. 이들 동물병원 식구들이 먹고살 뿐 아니라 아픈 짐승들을 돌보는 데에 보탬이 되어 주는 사람들이 보내 주는 손길 또한 사랑과 믿음입니다. 자연을 돌보거나 지키겠다고 한다면 입바른 ‘자연사랑 구호 외치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우리 터전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짐승들을 돌보거나 지키겠다고 한다면 겉치레 ‘동물사랑 선전 활동’을 할 노릇이 아니라, 온몸 그대로 나와 내 이웃과 내 둘레 모든 목숨붙이와 보금자리를 사랑하며 아끼는 숨결을 간직하면 됩니다.

 사진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은 책이름하고는 다르게 ‘온누리에서 가장 어리석은 동물병원’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가장 어리석은 동물병원은 가장 어리석기 때문에 이들 동물병원 식구들한테 늘 웃음꽃이 피고 눈물꽃이 돋는 즐거우며 빛접은 삶을 베풀어 줍니다. 꾸미는 삶이 아니라 즐기는 삶이요, 겉바르는 삶이 아니라 부대끼는 삶입니다. 내세우는 삶이 아니라 내놓는 삶이요, 뽐내는 삶이 아니라 손잡는 삶입니다.

 온누리를 살리는 힘이란 다름아닌 사랑에 있음을 알뜰살뜰 보여줍니다. 온누리를 빛내는 슬기란 다름아닌 믿음에 있음을 차근차근 들려줍니다.


 (3) 살뜰히 되읽는 생각줄기


 글은 적고 사진이 많이 실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입니다. 얼마 안 실린 글이지만 한 줄 두 줄 되읽는 재미가 남다릅니다. 사진 또한 한 번 보고 두 번 보는 기쁨이 꽤 큽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한 장씩 넘기며 글을 읽어 주다가는, 사진에 함께 실린 숱한 짐승들 이름을 부르며 알려주는 즐거움 또한 새삼스럽습니다.

 우리 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거나 자취를 감추기까지 한 짐승들 모습을 참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책 하나인데, 그예 지식덩어리 책이 아닌 사랑하고 눈물과 울음이 고루 섞인 살가운 이야기 하나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3.6.13.해.ㅎㄲㅅㄱ)


[11쪽] 숲속 동물병원은 병원이라기보다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재활 훈련소라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야생동물에게는 주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진료비나 입원비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료진은 모두 급여를 받지 않는 저의 가족이 맡았습니다. 저와 아내와 네 명의 아이들이 이 병원의 의료진들이지요. 보통 병언이라면 환자가 많을수록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게 되는데 이곳은 정반대랍니다.

[16쪽] 어느 날 아침, 우리 집 아이가 콩새를 안고 들어왔어요. 그 콩새는 울고 있었어요. 눈에 하나 가득 눈물을 머금고 말이에요. 인간이 아닌 동물은 울거나 웃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눈앞의 콩새는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열심히 환자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게 되었어요. ‘틀림없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거지요.

[16∼17쪽] 일본 훗카이도는 풍부한 자연에 에워싸여 있고, 사람들도 그 속에서 생활을 합니다. 그 때문에 인간 생활의 변화가 곧바로 자연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싼 것이 좋다고 말하면, 농부는 어쩔 수 없이 화학비료를 자주 사용해 작물을 많이 생산하려고 합니다. 농약도 많이 사용하게 되고요. 그렇게 되면 동물 중에 농약 중독 환자가 늘게 됩니다. 훗카이도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생활이 바빠지자 덩달아 차의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그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하는 동물도 늘어났고요.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비 생활이 일상화되어, 여기저기 쓰레기더미가 산을 이루고, 또 버려진 물건에 상처를 입는 동물 환자가 늘고 있습니다.

[82쪽] 새끼 사슴은 우유를 하루에 4리터나 마셔요. 덕분에 병원은 더욱 가난해졌지요.

[85쪽] 여우와 너구리, 참새와 까마귀처럼 사람 곁에서 생활하는 동물에게는, 사람 또한 위협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장난을 칠 때면 가끔 상대에게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몸짓을 보여주고는 해요. 또한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 등 기계의 위험성도 가르칠 필요가 있어요. 이런 것들을 습득하면 드디어 자연 속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102쪽] 퇴원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환자는 자유로워지고, 의료진은 일이 줄어 한숨 돌릴 수 있지요. 그렇다고 퇴원이 가까워지면 모두 기쁜 얼굴을 하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기뻐하는 것은 원장인 나뿐, 모두 서운한 표정들이지요. 자기 자식이나 친구와 헤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일 거예요. 환자 중에서도 그런 기분을 느끼는 동물이 있는 것 같아요. 동물들에게는 자연의 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착각에 불과한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125쪽] 생물들의 환경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 숲속 동물병원도 하나 둘씩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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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26 : 아이와 놀며 읽는 책

 애 아빠가 글 몇 줄 끄적이고 싶으면 새벽 서너 시쯤에 조용히 일어나 옆방에서 소리를 죽이며 자판을 또닥거려야 합니다. 오늘은 다섯 시에 느즈막히 일어나 살며시 글을 씁니다. 두 식구 고요히 잠든 나절에라야 비로소 마음을 가다듬어 글쪼가리 한둘 가까스로 일굽니다. 새벽에 물 한 모금 마시며 글을 쓰고 있으면 한 시간쯤 뒤 배에서 똥을 내보내야겠다는 꼬르르 하는 소리를 냅니다. 이제 책 하나 들고 뒷간으로 갑니다. 다문 몇 쪽이라도 책을 읽습니다.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청어람미디어,2007)이라는 책을 쥡니다. 글과 사진이 참으로 좋은 책이지만 책이름만큼은 영 어설픕니다. 이 어설픈 책이름 때문에 지난 세 해 동안 이 책을 안 거들떠보고 있었습니다. 글과 사진을 일군 다케타쓰 미노루 님이 일본에서 당신 책을 낼 적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따위 낯부끄러운 꾸밈말을 붙이지 않았을 텐데, 왜 이런 곱고 맑은 책을 우리 말로 옮기는 책마을 일꾼들은 낯부끄러운 꾸밈말을 낯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며 버젓이 달아 놓고 있을까요. 들짐승과 멧짐승과 날짐승을 돌보는 다케타쓰 미노루 님한테는 그저 ‘훗카이도 동물병원’이요 ‘북쪽나라 짐승쉼터’였을 텐데요.

 “훗카이도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생활이 바빠지자 덩달아 차의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그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하는 동물도 늘어났고요(17쪽).”라는 대목을 읽다가, 이 사진이야기를 아이를 내 무릎에 앉히고 읽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 아빠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이 책을 읽어 주면서 이런 대목에서는 요모조모 살을 붙일 테지요. “참말 그렇지? 빠방이가 너무 많아 우리는 골목을 느긋하게 걷기 힘들잖아. 사람들 모두 빠방이를 안 타고 걸어다니면 조용하고 깨끗하며 서로서로 좋을 텐데.”

 일본에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유미리 님이 쓴 《생명》(문학사상사,2000)이라는 책을 어제 막 장만해서 조금씩 읽습니다. 깊이 사랑하던 사람이 유미리 님 몸에서 새 목숨이 자라나는 줄 알면서 등을 돌리며 시리디시린 생채기를 남겼다는데, 유미리 님은 당신을 저버린 사람이 남긴 씨앗으로 자란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다. 고이 안고 있다가 모진 아픔을 겪으며 낳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슬픈 집식구한테 둘러싸여 죽음만 생각하던 유미리 님이 죽음이 아닌 삶이라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유미리 님은 조산원에서 배앓이를 하면서 “나는 늘 나를 보호해 줄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평생 지켜 주겠다는 그의 말을 나는 믿었다. 하지만 믿었기에 배신당했다. 그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보호받고 싶은 나 자신의 소원에 배신당한 것이었다(218쪽).” 하고 생각합니다. 배앓이가 그지없이 모질어 진통제와 촉진제를 놓아 달라고 빌지만, 조산원 일꾼은 ‘조산원에서는 그런 주사 안 쓴다’고 대꾸합니다. 그러고 보면 일본은 한국과 달리 애 엄마한테 주사를 함부로 안 놓습니다.

 배앓이를 하는 유미리 님은 그동안 당신이 몸속 목숨을 제대로 돌보거나 헤아리지 못했음을 미안해 하며 얼른 새누리를 볼 수 있도록 하려고 힘씁니다. 사랑에다가 보금자리까지 잃었으나 유미리 님은 새 목숨을 맞이하며 새 삶을 찾습니다. 그러면, 유미리 님을 등진 남자는 짝꿍과 아이를 버리며 무슨 새 삶을 찾았을까요. 유미리 님만이 아이랑 놀며 책을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4343.6.1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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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달래며 살아간다
다이쿠바라 야타로 지음, 박영 옮김 / 북피아(여강) / 1991년 7월
평점 :
절판





 태어나는 책, 살아가는 책, 죽는 책
 [헌책방에서 만난 책 1] 다이쿠바라 야타로, 《티베트 의학의 지혜》



 새로 태어난 목숨은 둘도 없는 기쁨입니다. 어린 나날부터 늙은 나날까지 보내는 삶이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입니다. 더는 몸을 쓸 수 없는 가운데 조용히 거두는 숨결이란 다시 없는 고마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기쁨과 살아가는 즐거움과 죽는 고마움을 누립니다. 어느 한 가지만 맛볼 수 없으며, 어느 한 가지는 맛보지 않겠다며 손사래칠 수 없습니다. 기쁘게 맞이하는 목숨이요 즐겁게 누리는 삶이요 고맙게 멈추는 숨결입니다.

 흔히들 뭍고기이든 물고기이든 꺼리면서 푸성귀만 먹고살아야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어려운 말로 ‘채식주의’인데, 고기 아닌 풀을 먹는 사람일 때에는 고기 먹는 사람보다 뱃속이 가뜬하다거나 부드럽기 마련입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한테 맛있는 고기란 ‘고기를 먹는 짐승을 잡아 마련한 고기’가 아닌 ‘풀을 먹는 짐승을 잡아 마련한 고기’입니다. 풀 먹은 짐승이 맛이 있지, 고기 먹은 짐승이 맛이 있지 않습니다. 풀 먹는 사람이 튼튼하지, 고기 먹는 짐승이 튼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먹든 풀을 먹든 목숨을 먹는 삶입니다. 풀이라 하여 목숨 아닐 수 없습니다. 풀 또한 고운 목숨입니다. 풀을 뜯거나 데치거나 삶을 때에도 짐승을 잡아서 죽을 때하고 마찬가지로 목숨을 끊는 노릇입니다. 꽃이나 나뭇가지를 꺾을 때에 꽃과 나무 또한 아파하거나 죽는다고 말을 하면서, 푸성귀를 밥거리로 삼아 먹는다고 할 때에는 ‘나한테 바쳐진 목숨’을 느끼지 않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 또한 목숨이고 우리가 들이쉬는 바람 또한 목숨입니다. 우리는 목숨 아닌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른 목숨을 받아들이며 내 목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수명은 늘어났으나 순수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은 점점 유실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다 ..  (26쪽)


 농사짓는 들판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한테는 무엇보다도 풀과 곡식이 몸에 가장 잘 맞습니다. 고기를 잡는 바다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한테는 무엇보다도 물고기가 몸에 가장 잘 맞습니다.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하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풀이며 곡식이며 물고기이며 골고루 즐길 테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는 도시에서는? 도시라는 곳은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먹고 버리는 터전인 만큼,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배를 채우도록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릴 때가 내 몸에 가장 알맞을까요?

 틀림없이 제 고향마을 터전에서 나는 먹을거리만큼 내 몸에 알맞으며 좋은 먹을거리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네 도시를 떠올려 보면 너무 끔찍합니다. 스스로 농사를 짓는 일이란 없이 돈만 벌고 돈만 써서 쓰레기를 잔뜩 내보내는 데다가 쓰레기를 자연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며 쓰레기가 어찌 되는가를 헤아리지 않는 도시 삶자락이란 참으로 끔찍합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이와 같은 도시에서 태어나 자연이 내려준 선물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내 몸이 바로 자연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그지없이 끔찍합니다. 도시 아이들은 ‘불량식품’이라는 먹을거리에 군침을 흘리며 손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술과 담배에 찌들며 갖가지 스포츠와 쏟아지는 정보덩어리에 파묻힐 수밖에 없습니다.


.. 자연이 준 것을 빼앗고 새삼스럽게 약으로 치료한다는 것은 이상하기만 하다 … 아무리 모유의 성분을 분석ㆍ연구하여 외부에서 배합하려 해도 똑같은 효과는 얻을 수 없다. 그 아기에게 맞는 성분 배합은 아기와 직접 연결되어 있던 모체만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  (53, 61쪽)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제 삶을 돌아봅니다. 남 얘기에 앞서 나부터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곱씹습니다. 딸아이를 낳아 스물석 달째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날을 돌이킵니다. 나부터 나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운 목숨으로 살아가는가를 헤아린다면 고개를 떨굴밖에 없습니다. 나부터 나 스스로 우리 아이한테 얼마나 고마운 어버이요 좋은 목숨으로 마주하고 있느냐를 살핀다면 고개를 내저을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스스로 먹을거리 입을거리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는 돈을 마련할 뿐입니다. 그러고 나서 돈으로 먹을거리 입을거리 보금자리를 빌립니다.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오로지 돈을 생각하거나 따집니다. 사는 사람이든 파는 사람이든 삶이나 죽음을 느끼거나 깨닫지 않습니다. 사는 사람이든 파는 사람이든 무엇보다 돈을 바라봅니다. 알맞춤한 값인지를 살피고 싸거나 비싼 값인가를 돌아봅니다. 돈이 얼마나 드느냐를 따지고,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 얼마나 이바지를 하느냐를 느끼지 않고, 우리 목숨에 얼마나 어울리느냐를 헤아리지 않으며, 우리 죽음에 얼마나 따스한 손길인가를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 인도 여성들은 산후 1주일 동안은 외출은 물론 산실 안에서도 계속 누워 있었다. 닷새 정도까지는 변기에도 앉지 않았다 … 인도에서는 산후 3주는 산실을 어둡게 만들어 바깥 빛을 쏘이지 않도록 하는데, 이것은 갓 태어나는 아기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눈을 보호하려는 배려이기도 하다 ..  (71, 75쪽)


 책을 읽으면서 밥을 느끼고 옷을 느끼며 집을 느낍니다. 책이든 밥이든 옷이든 집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한동아리입니다. 나고 살고 죽습니다. 다시 나고 다시 살고 다시 죽습니다.

 제 나이 서른여섯인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나이 열여섯과 스물여섯에도 죽음을 늘 생각했습니다. 여섯 살 적에는 도깨비를 무서워 했으니 이때에도 죽음을 생각한 셈일까요. 저녁에 눈을 감고 잠들 때에는 이대로 아침에 깨어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벌써 눈을 감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했고, 잠결에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다가, 새벽에 눈을 뜨면서 이야 오늘 하루도 다시금 눈을 뜰 수 있네 하고는 고맙게 느낍니다.

 문득 돌아보니, 새벽마다 고맙게 눈을 뜨기는 하지만, 이러한 고마움을 땅님이나 하느님한테 비손을 올리지는 못해 왔군요. 그래, 고맙기는 고맙다지만 고마움을 제대로 나타내지 않으며 지내온 삶이라 하겠습니다. 마음으로는 고맙다 하지만 몸으로는 고마운 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셈이라 하겠습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고마움을 느끼면서 밥을 먹고 똥을 누고 집식구와 살가이 어우러져야 하는데, 좋은 삶을 즐기지 못하는 꼴이라 하겠습니다.

 누가 알아주건 말건 좋은 책이 태어났으면 좋은 책이 태어난 셈이고, 좋은 책을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좋은 책이 빛을 본 셈이며, 이 좋은 책이라 하지만 널리 팔리지 못해 새책방이나 도서관 책시렁에서 자취를 감추면 조용히 숨을 거둔 셈입니다. 좋다는 책이라 하여 한결같이 팔리거나 많이 팔리거나 오래도록 팔려야 하지 않습니다. 좋다는 책이라면 외려 알맞춤하게 팔리고 알맞춤하게 사랑받다가 살그머니 잠들어 사라질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스스로 꾸리는 제 삶이 좋은 삶이라 할 때에도 내 목숨을 살뜰히 받아들여 알맞게 즐기는 가운데 땅에 보탬이 되도록 숨을 거두어야 참 아름다움이요 기쁨이며 보람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 조금씩 병을 앓으면서 원상태로 북귀하는 과정에서 그 아이의 고유한 관성이 붙어 가는 것이다. 몸은 그런 과정을 거쳐 자기 나름대로의 힘과 거기에 맞는 리듬을 만들어 생명력을 키워 가게 된다 …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우리 문명사회에서 생활하는 인간보다 눈이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  (86, 117쪽)


 살아가며 늘 느끼는데, 튼튼한 몸뚱이라고 해서 더 오래 목숨을 잇지 않습니다. 튼튼한 몸뚱이인 까닭에 주먹다짐을 하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 있고, 튼튼한 몸뚱이라서 싸움터에 붙들리는 바람에 난데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튼튼한 몸이라며 마구 굴리다가 일찍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자동차에 치인다든지 어쩐다든지 하며 벼락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여린 몸뚱이라지만 반드시 일찍 죽지 않습니다. 가늘고 긴 삶이란 소리가 아닙니다. 아프고 여린 몸뚱이인 분들 모두 그러하지는 않으나, 아프고 여린 몸뚱이일 때에는 더 아프거나 더 힘든 일은 하지 않습니다. 하려 해도 못하기 일쑤이지요. 언제라도 아프거나 여린 몸에 걸맞을 일을 찾고, 내 주제에 알맞게 놀이를 즐기며, 내 밥그릇에 들어맞도록 밥을 먹습니다. 넘치거나 모자라게 살지 않습니다. 꼭 알맞춤하게 살아갑니다. 넘쳐서도 안 되고 모자라서도 안 됩니다. 아프거나 여린 사람은 아프거나 여린 몸을 노상 느끼는 터라, 아프거나 여린 몸으로 부대낄 삶을 더 깊디깊이 맞아들이곤 합니다.

 이러는 동안 아프거나 여린 마음밭은 내 마음밭뿐 아니라 이웃 마음밭을 살핍니다. 튼튼한 이웃사람 마음밭을 살피고 아픈 이웃사람 마음밭을 살핍니다. 내가 아프니 남이 아픈 줄 일찌감치 깨닫습니다. 내가 힘드니 남이 힘든 줄 미리 헤아립니다.

 아픈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싸움을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싸우는 사람이나 싸움을 불러들이는 사람은 모두 튼튼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다투지 않습니다. 다툼을 부를 까닭이 없습니다. 다투는 사람이나 다툼을 끌어들이는 사람은 모두 돈있는 사람입니다.


.. 사람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둔감하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둔감한 경우가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또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  (122쪽)


 튼튼한 몸이란 하늘이 내린 선물입니다. 여린 몸 또한 하늘이 내린 선물입니다. 넉넉한 돈이란 하늘이 보낸 선물입니다. 가난한 살림 또한 하늘이 보낸 선물입니다. 잘생긴 얼굴과 매끈한 몸매란 하늘이 준 선물입니다. 못생긴 얼굴과 투박한 몸매란 하늘이 준 선물입니다. 어느 것 하나 선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고마운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몸이든 저런 삶이든 그런 마음이든 우리한테는 둘도 없고 다시 없으며 거듭 있을 수 없는 하나 있는 목숨이거든요. 우리는 고마운 목숨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지 ‘튼튼한 목숨’이라거나 ‘돈있는 목숨’이라거나 ‘잘난 목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서울사람이라 더 잘날 까닭이 없습니다. 서울 강남에 비싼 아파트를 갖춘 사람이라 더 뛰어날 까닭이 없습니다.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건 고마운 목숨입니다. 어떠한 일을 즐기든 고마운 일꾼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대서 더 기쁜 날씨가 아니요, 네 철 따로 없이 따스하거나 시원한 날씨라서 더 반가운 날씨가 아닙니다.


.. 다른 나라에서 혈액을 수입하면서까지 의료수준을 높인다는 것은 일본인이 생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인도나 티벳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손상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한테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 늙어빠져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맑을 때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이며 존엄성을 갖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 (죽음을 앞둔 사람) 침대는 보통 큰 나무 밑에 놓아 둔다. 죽음을 밖에서 맞는다는 것은 환자에게도 행복하다. 눈을 들면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이 보이고 새소리도 들려온다. 아침에 하늘이 밝아옴에 따라 자신의 몸도 깨어나고 새들이 날아다니며 여러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고 … 죽음을 지켜보는 경험을 쌓음으로써 자신에게도 닥쳐 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죽음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유익한 죽음도 되는 것이다 ..  (204∼209쪽)


 헌책방에서 《티베트 의학의 지혜》라는 묵은 책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우리 식구는 이 책을 2008년 6월에 만났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두 달 앞서 이 책을 알아보았고, 두 달에 걸쳐 바지런히 읽어내며 우리 삶을 다시금 돌아보고 새로 헤아리고자 했습니다.

 새 목숨을 마주하기 앞서 두 달이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나날입니다. 애 엄마한테든 애 아빠한테든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짧을 수 있고 길 수 있습니다.

 애 아빠 된 저로서는 길게 껴안지 못하고 짧게 손을 잡았습니다. 더 바투 다가서며 더 가까이 어루만질 수 있었다면 우리 식구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아이를 낳아 예방주사를 한 방도 안 맞히면서 튼튼하고 싱그러운 숨결을 우리 아이가 맞아들이도록 해 줄 수 있었습니다. 애 아빠 된 저 스스로 집식구 먹여살린다는 핑계를 내세워 돈버는 일에 더욱 마음을 쏟는 바람에 고마운 책 하나 뒤늦게 만났으면서 이 고마운 책에 깃든 고마운 앎과 삶과 빛을 제대로 삭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애 아빠 된 사람은 지난날뿐 아니라 오늘날과 앞날까지 고마운 앎과 삶과 빛을 제대로 삭이지 못할는지 모릅니다. 날마다 애 엄마 속을 썩일 뿐 아니라, “(아이 낳는 자리에서) 남성을 기피하는 이유는 남성은 고압적이고 거칠어 아기한테 자극이 너무 강하기 때문(35쪽)”이라는 말마따나 애 아빠 스스로 부드럽고 따스하며 넉넉한 사람 매무새로는 다가서지 못할는지 모릅니다. 군대에 끌려가기 앞서까지 욕 한 마디 내뱉을 줄 몰랐다지만, 군대에서 아무리 군화발에 짓밟히고 개머리판이나 삽자루로 두들겨맞았다 할지라도 내 마음을 나 스스로 착하고 참되며 곱게 가다듬는 하루하루였다면, 왼뺨을 맞으며 오른뺨을 때려도 좋다고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내 삶이 예수님이나 부처님 삶처럼 될 수는 없다지만, 내 나름대로 착하고 참되며 고운 결을 놓지 않을 수 있다면, 한결 따스하며 넉넉하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며 집식구하고 어울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그들은 부처님의 자비라고 생각하지만 순례생활이라는 것은 아주 적은 양의 야채만을 먹으며 술도 담배도 하지 않고 자고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이다. 매일 걸어서 기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체력을 소모한다.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몸이 되어 쓸데없는 일에 쓸 기력도 체력도 남지 않아 암이 증식할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구제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순례생활을 통해 감정이 제어되어 몸에 기운이 붙게 되는 것이다. 더 살려고 한다거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이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순수한 기도를 드리며 순례를 달성하려는 마음가짐이 몸에 리듬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려는 힘에서 저항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암의 세력을 잠재우게 되는 것이다 ..  (197쪽)


 헌책방이란 참 고마운 곳입니다. 더 잘 나거나 더 못난 책이 아닌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책을 있는 그대로 갖추어 주니 고마운 곳입니다.

 헌책방에서 무슨무슨 문화공연을 하거나 이런저런 문화예술을 펼쳐야 남다르거나 기쁘거나 고맙지 않습니다. 헌책방에서는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제 마음을 살찌우며 제 눈을 가다듬는 가운데 제 손을 어루만질 수 있는 착하고 참되며 고운 책 하나 만날 수 있으면 고맙습니다.

 헌책방은 더 밝거나 크게 넓어야 하지 않습니다. 헌책방은 더욱 많은 책을 좀더 골고루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헌책방은 여러 일꾼이 더더욱 많은 손품을 들여 책 목록을 셈틀에 집어넣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책을 바로 오늘 만나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바라는 책 하나 찾느라 여러 해를 들여도 좋은 헌책방이고, 바라는 책 하나 끝내 못 찾고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좋은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은 책 하나가 있어 좋습니다. 헌책방은 책 하나 만날 겨를이 있어 좋습니다. 헌책방이라는 곳이 1950년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든, 1970년대 자국이 그예 살아 있든, 1990년대 접어들며 여러모로 달라졌다 하든, 2010년대다운 또다른 모습으로 거듭난다 하든, 헌책방은 그저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은 다원문화공간이 아니고 다원문화공간은 헌책방이 아닙니다. 헌책방은 새책방이 아니고 새책방은 헌책방이 아닙니다. 헌책방에서 새책을 다룰 수 있고, 새책방에서 헌책을 다룰 수 있겠지요. 그러나 헌책방은 헌책방 구실을 하고, 새책방은 새책방 노릇을 해야 합니다. 헌책방은 헌책방으로서 살아내고, 다원문화공간은 다원문화공간대로 살아내면 됩니다.

 헌책방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꼭 한 사람 가슴에 빛이 될 책’이 무엇인지 콕 집어서 알아채거나 잡아챌 수 없는 가운데, 언제 어느 곳에서든 알아보거나 느낄 사람이 있으리라 믿는 책 하나를 갖출 수 있으면 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헌책방 구실을 하며 새책을 다루든 문화공연을 하든 하면 됩니다.

 새책방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그때그때 새로 나오는 수많은 책을 마진율이 아닌 무르익은 알맹이에 따라 골고루 갖추어 옛책을 바탕으로 새책이 태어난다’는 반가움을 알뜰살뜰 나누어 줄 수 있으면 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새책방 노릇을 하며 헌책을 팔든 말든 하면 됩니다.


.. 나는 병원에서 분만하는 데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탄생을 거든다’는 사명감보다는 ‘피 보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출산을 대하기 때문이다 … 지금부터 앞으로 커 갈 아이들한테도 보통의 일상생활 속에서 어머니가 고통하고 여러 사람이 조용하도록 애써 주는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귀중한 인생의 첫 경험이기도 할 것이다 ..  (42, 45쪽)


 1991년에 우리 나라에 한 번 옮겨진 《티베트 의학의 지혜》라는 책이 다시 새 목숨을 받아서 태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8년 6월 뒤로 이 책을 또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싶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지만 이 책을 아직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이 책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머잖아 아이를 낳을 분들이나 머잖아 시집장가를 갈 분들이나 아이를 키우는 분들한테 선물해 주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 책 하나만을 찾아내어 선물해야 하지 않습니다. 다른 책으로도 얼마든지 서로한테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책이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 착하고 참되며 곱게 살아간다면 제 삶이 서로한테 빛이 되겠지요. 책 하나로 삶에 빛을 나누어 주어도 좋고, 삶 하나로 책에 빛을 되돌려 보아도 좋습니다. 책을 선물하며 살아가도 좋고, 오순도순 도란도란 어깨동무하며 신나게 살아가도 좋습니다. (4343.6.9.물.ㅎㄲㅅㄱ)


― 티베트 의학의 지혜 (다이쿠바라 야타로 씀,박영 옮김/여강,199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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