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달래며 살아간다
다이쿠바라 야타로 지음, 박영 옮김 / 북피아(여강) / 1991년 7월
평점 :
절판





 태어나는 책, 살아가는 책, 죽는 책
 [헌책방에서 만난 책 1] 다이쿠바라 야타로, 《티베트 의학의 지혜》



 새로 태어난 목숨은 둘도 없는 기쁨입니다. 어린 나날부터 늙은 나날까지 보내는 삶이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입니다. 더는 몸을 쓸 수 없는 가운데 조용히 거두는 숨결이란 다시 없는 고마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기쁨과 살아가는 즐거움과 죽는 고마움을 누립니다. 어느 한 가지만 맛볼 수 없으며, 어느 한 가지는 맛보지 않겠다며 손사래칠 수 없습니다. 기쁘게 맞이하는 목숨이요 즐겁게 누리는 삶이요 고맙게 멈추는 숨결입니다.

 흔히들 뭍고기이든 물고기이든 꺼리면서 푸성귀만 먹고살아야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어려운 말로 ‘채식주의’인데, 고기 아닌 풀을 먹는 사람일 때에는 고기 먹는 사람보다 뱃속이 가뜬하다거나 부드럽기 마련입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한테 맛있는 고기란 ‘고기를 먹는 짐승을 잡아 마련한 고기’가 아닌 ‘풀을 먹는 짐승을 잡아 마련한 고기’입니다. 풀 먹은 짐승이 맛이 있지, 고기 먹은 짐승이 맛이 있지 않습니다. 풀 먹는 사람이 튼튼하지, 고기 먹는 짐승이 튼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먹든 풀을 먹든 목숨을 먹는 삶입니다. 풀이라 하여 목숨 아닐 수 없습니다. 풀 또한 고운 목숨입니다. 풀을 뜯거나 데치거나 삶을 때에도 짐승을 잡아서 죽을 때하고 마찬가지로 목숨을 끊는 노릇입니다. 꽃이나 나뭇가지를 꺾을 때에 꽃과 나무 또한 아파하거나 죽는다고 말을 하면서, 푸성귀를 밥거리로 삼아 먹는다고 할 때에는 ‘나한테 바쳐진 목숨’을 느끼지 않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 또한 목숨이고 우리가 들이쉬는 바람 또한 목숨입니다. 우리는 목숨 아닌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른 목숨을 받아들이며 내 목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수명은 늘어났으나 순수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은 점점 유실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다 ..  (26쪽)


 농사짓는 들판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한테는 무엇보다도 풀과 곡식이 몸에 가장 잘 맞습니다. 고기를 잡는 바다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한테는 무엇보다도 물고기가 몸에 가장 잘 맞습니다.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하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풀이며 곡식이며 물고기이며 골고루 즐길 테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는 도시에서는? 도시라는 곳은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먹고 버리는 터전인 만큼,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배를 채우도록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릴 때가 내 몸에 가장 알맞을까요?

 틀림없이 제 고향마을 터전에서 나는 먹을거리만큼 내 몸에 알맞으며 좋은 먹을거리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네 도시를 떠올려 보면 너무 끔찍합니다. 스스로 농사를 짓는 일이란 없이 돈만 벌고 돈만 써서 쓰레기를 잔뜩 내보내는 데다가 쓰레기를 자연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며 쓰레기가 어찌 되는가를 헤아리지 않는 도시 삶자락이란 참으로 끔찍합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이와 같은 도시에서 태어나 자연이 내려준 선물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내 몸이 바로 자연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그지없이 끔찍합니다. 도시 아이들은 ‘불량식품’이라는 먹을거리에 군침을 흘리며 손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술과 담배에 찌들며 갖가지 스포츠와 쏟아지는 정보덩어리에 파묻힐 수밖에 없습니다.


.. 자연이 준 것을 빼앗고 새삼스럽게 약으로 치료한다는 것은 이상하기만 하다 … 아무리 모유의 성분을 분석ㆍ연구하여 외부에서 배합하려 해도 똑같은 효과는 얻을 수 없다. 그 아기에게 맞는 성분 배합은 아기와 직접 연결되어 있던 모체만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  (53, 61쪽)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제 삶을 돌아봅니다. 남 얘기에 앞서 나부터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곱씹습니다. 딸아이를 낳아 스물석 달째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날을 돌이킵니다. 나부터 나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운 목숨으로 살아가는가를 헤아린다면 고개를 떨굴밖에 없습니다. 나부터 나 스스로 우리 아이한테 얼마나 고마운 어버이요 좋은 목숨으로 마주하고 있느냐를 살핀다면 고개를 내저을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스스로 먹을거리 입을거리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는 돈을 마련할 뿐입니다. 그러고 나서 돈으로 먹을거리 입을거리 보금자리를 빌립니다.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오로지 돈을 생각하거나 따집니다. 사는 사람이든 파는 사람이든 삶이나 죽음을 느끼거나 깨닫지 않습니다. 사는 사람이든 파는 사람이든 무엇보다 돈을 바라봅니다. 알맞춤한 값인지를 살피고 싸거나 비싼 값인가를 돌아봅니다. 돈이 얼마나 드느냐를 따지고,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 얼마나 이바지를 하느냐를 느끼지 않고, 우리 목숨에 얼마나 어울리느냐를 헤아리지 않으며, 우리 죽음에 얼마나 따스한 손길인가를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 인도 여성들은 산후 1주일 동안은 외출은 물론 산실 안에서도 계속 누워 있었다. 닷새 정도까지는 변기에도 앉지 않았다 … 인도에서는 산후 3주는 산실을 어둡게 만들어 바깥 빛을 쏘이지 않도록 하는데, 이것은 갓 태어나는 아기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눈을 보호하려는 배려이기도 하다 ..  (71, 75쪽)


 책을 읽으면서 밥을 느끼고 옷을 느끼며 집을 느낍니다. 책이든 밥이든 옷이든 집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한동아리입니다. 나고 살고 죽습니다. 다시 나고 다시 살고 다시 죽습니다.

 제 나이 서른여섯인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나이 열여섯과 스물여섯에도 죽음을 늘 생각했습니다. 여섯 살 적에는 도깨비를 무서워 했으니 이때에도 죽음을 생각한 셈일까요. 저녁에 눈을 감고 잠들 때에는 이대로 아침에 깨어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벌써 눈을 감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했고, 잠결에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다가, 새벽에 눈을 뜨면서 이야 오늘 하루도 다시금 눈을 뜰 수 있네 하고는 고맙게 느낍니다.

 문득 돌아보니, 새벽마다 고맙게 눈을 뜨기는 하지만, 이러한 고마움을 땅님이나 하느님한테 비손을 올리지는 못해 왔군요. 그래, 고맙기는 고맙다지만 고마움을 제대로 나타내지 않으며 지내온 삶이라 하겠습니다. 마음으로는 고맙다 하지만 몸으로는 고마운 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셈이라 하겠습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고마움을 느끼면서 밥을 먹고 똥을 누고 집식구와 살가이 어우러져야 하는데, 좋은 삶을 즐기지 못하는 꼴이라 하겠습니다.

 누가 알아주건 말건 좋은 책이 태어났으면 좋은 책이 태어난 셈이고, 좋은 책을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좋은 책이 빛을 본 셈이며, 이 좋은 책이라 하지만 널리 팔리지 못해 새책방이나 도서관 책시렁에서 자취를 감추면 조용히 숨을 거둔 셈입니다. 좋다는 책이라 하여 한결같이 팔리거나 많이 팔리거나 오래도록 팔려야 하지 않습니다. 좋다는 책이라면 외려 알맞춤하게 팔리고 알맞춤하게 사랑받다가 살그머니 잠들어 사라질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스스로 꾸리는 제 삶이 좋은 삶이라 할 때에도 내 목숨을 살뜰히 받아들여 알맞게 즐기는 가운데 땅에 보탬이 되도록 숨을 거두어야 참 아름다움이요 기쁨이며 보람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 조금씩 병을 앓으면서 원상태로 북귀하는 과정에서 그 아이의 고유한 관성이 붙어 가는 것이다. 몸은 그런 과정을 거쳐 자기 나름대로의 힘과 거기에 맞는 리듬을 만들어 생명력을 키워 가게 된다 …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우리 문명사회에서 생활하는 인간보다 눈이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  (86, 117쪽)


 살아가며 늘 느끼는데, 튼튼한 몸뚱이라고 해서 더 오래 목숨을 잇지 않습니다. 튼튼한 몸뚱이인 까닭에 주먹다짐을 하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 있고, 튼튼한 몸뚱이라서 싸움터에 붙들리는 바람에 난데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며, 튼튼한 몸이라며 마구 굴리다가 일찍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자동차에 치인다든지 어쩐다든지 하며 벼락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여린 몸뚱이라지만 반드시 일찍 죽지 않습니다. 가늘고 긴 삶이란 소리가 아닙니다. 아프고 여린 몸뚱이인 분들 모두 그러하지는 않으나, 아프고 여린 몸뚱이일 때에는 더 아프거나 더 힘든 일은 하지 않습니다. 하려 해도 못하기 일쑤이지요. 언제라도 아프거나 여린 몸에 걸맞을 일을 찾고, 내 주제에 알맞게 놀이를 즐기며, 내 밥그릇에 들어맞도록 밥을 먹습니다. 넘치거나 모자라게 살지 않습니다. 꼭 알맞춤하게 살아갑니다. 넘쳐서도 안 되고 모자라서도 안 됩니다. 아프거나 여린 사람은 아프거나 여린 몸을 노상 느끼는 터라, 아프거나 여린 몸으로 부대낄 삶을 더 깊디깊이 맞아들이곤 합니다.

 이러는 동안 아프거나 여린 마음밭은 내 마음밭뿐 아니라 이웃 마음밭을 살핍니다. 튼튼한 이웃사람 마음밭을 살피고 아픈 이웃사람 마음밭을 살핍니다. 내가 아프니 남이 아픈 줄 일찌감치 깨닫습니다. 내가 힘드니 남이 힘든 줄 미리 헤아립니다.

 아픈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싸움을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싸우는 사람이나 싸움을 불러들이는 사람은 모두 튼튼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다투지 않습니다. 다툼을 부를 까닭이 없습니다. 다투는 사람이나 다툼을 끌어들이는 사람은 모두 돈있는 사람입니다.


.. 사람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둔감하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둔감한 경우가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또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  (122쪽)


 튼튼한 몸이란 하늘이 내린 선물입니다. 여린 몸 또한 하늘이 내린 선물입니다. 넉넉한 돈이란 하늘이 보낸 선물입니다. 가난한 살림 또한 하늘이 보낸 선물입니다. 잘생긴 얼굴과 매끈한 몸매란 하늘이 준 선물입니다. 못생긴 얼굴과 투박한 몸매란 하늘이 준 선물입니다. 어느 것 하나 선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고마운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몸이든 저런 삶이든 그런 마음이든 우리한테는 둘도 없고 다시 없으며 거듭 있을 수 없는 하나 있는 목숨이거든요. 우리는 고마운 목숨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지 ‘튼튼한 목숨’이라거나 ‘돈있는 목숨’이라거나 ‘잘난 목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서울사람이라 더 잘날 까닭이 없습니다. 서울 강남에 비싼 아파트를 갖춘 사람이라 더 뛰어날 까닭이 없습니다.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건 고마운 목숨입니다. 어떠한 일을 즐기든 고마운 일꾼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대서 더 기쁜 날씨가 아니요, 네 철 따로 없이 따스하거나 시원한 날씨라서 더 반가운 날씨가 아닙니다.


.. 다른 나라에서 혈액을 수입하면서까지 의료수준을 높인다는 것은 일본인이 생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인도나 티벳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손상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한테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 늙어빠져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맑을 때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이며 존엄성을 갖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 (죽음을 앞둔 사람) 침대는 보통 큰 나무 밑에 놓아 둔다. 죽음을 밖에서 맞는다는 것은 환자에게도 행복하다. 눈을 들면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이 보이고 새소리도 들려온다. 아침에 하늘이 밝아옴에 따라 자신의 몸도 깨어나고 새들이 날아다니며 여러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고 … 죽음을 지켜보는 경험을 쌓음으로써 자신에게도 닥쳐 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죽음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유익한 죽음도 되는 것이다 ..  (204∼209쪽)


 헌책방에서 《티베트 의학의 지혜》라는 묵은 책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우리 식구는 이 책을 2008년 6월에 만났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두 달 앞서 이 책을 알아보았고, 두 달에 걸쳐 바지런히 읽어내며 우리 삶을 다시금 돌아보고 새로 헤아리고자 했습니다.

 새 목숨을 마주하기 앞서 두 달이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나날입니다. 애 엄마한테든 애 아빠한테든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짧을 수 있고 길 수 있습니다.

 애 아빠 된 저로서는 길게 껴안지 못하고 짧게 손을 잡았습니다. 더 바투 다가서며 더 가까이 어루만질 수 있었다면 우리 식구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아이를 낳아 예방주사를 한 방도 안 맞히면서 튼튼하고 싱그러운 숨결을 우리 아이가 맞아들이도록 해 줄 수 있었습니다. 애 아빠 된 저 스스로 집식구 먹여살린다는 핑계를 내세워 돈버는 일에 더욱 마음을 쏟는 바람에 고마운 책 하나 뒤늦게 만났으면서 이 고마운 책에 깃든 고마운 앎과 삶과 빛을 제대로 삭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애 아빠 된 사람은 지난날뿐 아니라 오늘날과 앞날까지 고마운 앎과 삶과 빛을 제대로 삭이지 못할는지 모릅니다. 날마다 애 엄마 속을 썩일 뿐 아니라, “(아이 낳는 자리에서) 남성을 기피하는 이유는 남성은 고압적이고 거칠어 아기한테 자극이 너무 강하기 때문(35쪽)”이라는 말마따나 애 아빠 스스로 부드럽고 따스하며 넉넉한 사람 매무새로는 다가서지 못할는지 모릅니다. 군대에 끌려가기 앞서까지 욕 한 마디 내뱉을 줄 몰랐다지만, 군대에서 아무리 군화발에 짓밟히고 개머리판이나 삽자루로 두들겨맞았다 할지라도 내 마음을 나 스스로 착하고 참되며 곱게 가다듬는 하루하루였다면, 왼뺨을 맞으며 오른뺨을 때려도 좋다고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내 삶이 예수님이나 부처님 삶처럼 될 수는 없다지만, 내 나름대로 착하고 참되며 고운 결을 놓지 않을 수 있다면, 한결 따스하며 넉넉하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며 집식구하고 어울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그들은 부처님의 자비라고 생각하지만 순례생활이라는 것은 아주 적은 양의 야채만을 먹으며 술도 담배도 하지 않고 자고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이다. 매일 걸어서 기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체력을 소모한다.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몸이 되어 쓸데없는 일에 쓸 기력도 체력도 남지 않아 암이 증식할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구제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순례생활을 통해 감정이 제어되어 몸에 기운이 붙게 되는 것이다. 더 살려고 한다거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이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순수한 기도를 드리며 순례를 달성하려는 마음가짐이 몸에 리듬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려는 힘에서 저항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암의 세력을 잠재우게 되는 것이다 ..  (197쪽)


 헌책방이란 참 고마운 곳입니다. 더 잘 나거나 더 못난 책이 아닌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책을 있는 그대로 갖추어 주니 고마운 곳입니다.

 헌책방에서 무슨무슨 문화공연을 하거나 이런저런 문화예술을 펼쳐야 남다르거나 기쁘거나 고맙지 않습니다. 헌책방에서는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제 마음을 살찌우며 제 눈을 가다듬는 가운데 제 손을 어루만질 수 있는 착하고 참되며 고운 책 하나 만날 수 있으면 고맙습니다.

 헌책방은 더 밝거나 크게 넓어야 하지 않습니다. 헌책방은 더욱 많은 책을 좀더 골고루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헌책방은 여러 일꾼이 더더욱 많은 손품을 들여 책 목록을 셈틀에 집어넣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책을 바로 오늘 만나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바라는 책 하나 찾느라 여러 해를 들여도 좋은 헌책방이고, 바라는 책 하나 끝내 못 찾고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좋은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은 책 하나가 있어 좋습니다. 헌책방은 책 하나 만날 겨를이 있어 좋습니다. 헌책방이라는 곳이 1950년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든, 1970년대 자국이 그예 살아 있든, 1990년대 접어들며 여러모로 달라졌다 하든, 2010년대다운 또다른 모습으로 거듭난다 하든, 헌책방은 그저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은 다원문화공간이 아니고 다원문화공간은 헌책방이 아닙니다. 헌책방은 새책방이 아니고 새책방은 헌책방이 아닙니다. 헌책방에서 새책을 다룰 수 있고, 새책방에서 헌책을 다룰 수 있겠지요. 그러나 헌책방은 헌책방 구실을 하고, 새책방은 새책방 노릇을 해야 합니다. 헌책방은 헌책방으로서 살아내고, 다원문화공간은 다원문화공간대로 살아내면 됩니다.

 헌책방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꼭 한 사람 가슴에 빛이 될 책’이 무엇인지 콕 집어서 알아채거나 잡아챌 수 없는 가운데, 언제 어느 곳에서든 알아보거나 느낄 사람이 있으리라 믿는 책 하나를 갖출 수 있으면 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헌책방 구실을 하며 새책을 다루든 문화공연을 하든 하면 됩니다.

 새책방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그때그때 새로 나오는 수많은 책을 마진율이 아닌 무르익은 알맹이에 따라 골고루 갖추어 옛책을 바탕으로 새책이 태어난다’는 반가움을 알뜰살뜰 나누어 줄 수 있으면 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새책방 노릇을 하며 헌책을 팔든 말든 하면 됩니다.


.. 나는 병원에서 분만하는 데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탄생을 거든다’는 사명감보다는 ‘피 보는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출산을 대하기 때문이다 … 지금부터 앞으로 커 갈 아이들한테도 보통의 일상생활 속에서 어머니가 고통하고 여러 사람이 조용하도록 애써 주는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귀중한 인생의 첫 경험이기도 할 것이다 ..  (42, 45쪽)


 1991년에 우리 나라에 한 번 옮겨진 《티베트 의학의 지혜》라는 책이 다시 새 목숨을 받아서 태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8년 6월 뒤로 이 책을 또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싶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지만 이 책을 아직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이 책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머잖아 아이를 낳을 분들이나 머잖아 시집장가를 갈 분들이나 아이를 키우는 분들한테 선물해 주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 책 하나만을 찾아내어 선물해야 하지 않습니다. 다른 책으로도 얼마든지 서로한테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책이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 착하고 참되며 곱게 살아간다면 제 삶이 서로한테 빛이 되겠지요. 책 하나로 삶에 빛을 나누어 주어도 좋고, 삶 하나로 책에 빛을 되돌려 보아도 좋습니다. 책을 선물하며 살아가도 좋고, 오순도순 도란도란 어깨동무하며 신나게 살아가도 좋습니다. (4343.6.9.물.ㅎㄲㅅㄱ)


― 티베트 의학의 지혜 (다이쿠바라 야타로 씀,박영 옮김/여강,199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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