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지난 2002년 한국땅에서 벌어진 축구대회 때에는 나 또한 길거리에서 뜀박질을 하며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무렵은 나 스스로 참 철이 없기도 했으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앞을 누비면서 뜀박질을 할 수 있다는 대목이 더없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드넓은 찻길에 차가 못 다니도록 가로막고 사람이 앉아서 몇 시간이고 퍼질러 있을 수 있는 대목이 기뻤다. 비록 ‘운동-사랑놀이-영화’ 세 가지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며 바보스레 깎아내린다 하지만, 어쩌면 정치권력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세 가지를 잘 살리면서 우리 나름대로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길이 나올 수 있지 않느냐고 꿈을 꾸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는 가운데 지난날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고 어리석으며 어설픈가를 뼛속 깊이 느낀다. 모든 사람이 착하고 참되며 고운 길로 접어들려 하지 않을 뿐더러, 아예 생각조차 않음을 느끼거나 깨달으면서 바보는 바보일 수밖에 없으니 덧없는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딱 한 번 주어진 아름답고 멋지며 사랑스러운 내 삶임을 깨닫거나 느끼며 야무지게 기쁘게 붙잡는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나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축구대회에 눈길을 두지 않는다. 눈길을 둘 까닭이 없기도 하며, 아이와 옆지기와 바쁘고 힘겨이 살아가는 살림살이에서 이런 데까지 둘 눈길이란 처음부터 있지 않다. 지난 6월 며칠이더라, 축구대회가 벌어진다고 하는 소식조차 모르고 살았는데, 만석동이었나 어느 골목을 세 식구가 나란히 마실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옆지기가 어느 가게에서 받아 온 전단지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 이거 축구대회 편성표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에 비로소 올해 2010년에 축구대회가 또 있음을 알았고, 남녘나라와 북녘나라가 나란히 축구대회 본선에 올라 있음을 알았다.
지난밤이겠지. 우리 시간으로 새벽에 북녘나라하고 브라질이 축구 한 판을 치렀다. 이런 새벽에 축구대회를 보자고 일어날 수 없기도 하지만,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애 아빠와 애 엄마 모두 텔레비전을 키울 마음이 없다. 아무튼 경기를 볼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으나, 북녘나라 선수들이 1966년 뒤로 처음으로 축구대회 본선에 올랐을 뿐 아니라, 남녘나라와 북녘나라가 함께 올라 있다는 대목은 놀랍다고 느낀다. 북녘나라가 치른 축구 경기는 뒷소식이 궁금했다. 어떻게 되었나 알아보려고 누리그물을 들여다본다. 북녘나라는 브라질한테 1대 2로 졌단다. 그런데 이런 소식보다 ‘북녘 나라노래가 흐를 때에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정대세 선수’ 이야기가 도드라지게 보인다.
그렇구나. 눈물이구나. 그래. 눈물이지.
엊저녁, 수원 칠보산 기슭에 자리한 칠보산자유학교라는 곳 선생님들하고 사진 이야기를 나누고 느즈막하게 막차꼬리를 붙잡으며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책 하나를 읽었다. 이날 수원 팔달문 앞 헌책방 〈오복서점〉에서 찾아낸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자유포럼,1999)라는 책을.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일본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소설쟁이가 되었다는데, 한때 이분 책이 우리 말로 곧잘 옮겨지곤 했으나, 이제는 이분 책은 모조리 판이 끊어졌다. 어느 한 가지조차 새책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헌책방에서도 만나기 힘든 이분 책인데, 다문 한 가지라도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고마운 노릇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터에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를 만났다.
이 책은 일본사람도 조선사람도 한국사람도 재일조선인도 재일한국인도 아닌 한 사람이 쓴 소설이다.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당신한테 1/4만큼 한겨레 피가 흐르는 줄을 모른 채 살았을 뿐 아니라 아무도 이를 얘기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소설 쓰는 일을 하면서 당신 삶을 소설에 담으려고 당신 집안 뿌리를 알아보다가 아주 우연하게 할머니가 평안도사람임을 알았다지.
소설을 쓰지 않았으면 일본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아니 그냥 일본사람이었을, 이러면서 아무런 걱정이나 푸대접을 받을 일조차 없으며, 당신 몸에 한겨레 피가 1/4이 흐르는 줄 알았다 하더라도 당신 이름이며 국적이며 그냥 ‘일본사람’인데,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소설쓰기를 붙잡다가 뒤늦게 알아 버리고야 만 당신 뿌리 때문에 스스로 짐을 짊어졌다. 이 짐을 지다가 그만 고꾸라졌다. 몹시 꽃과 같은 나이에 스스로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른여섯, 오늘을 살고 있는 나와 같은 나이에 눈을 감은 사기사와 메구무 님인데, 사람들은 서른여섯이면 꽃과 같은 나이가 아니라고 여기려나. 열둘은 어린 싹이고 스물넷은 푸른 잎이며 서른여섯이 꽃다운 아름다움이고 마흔여덟에 무르익다가는 예순에 씨앗을 남기고 일흔둘에 우람한 나무가 되다가는 여든넷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아흔여섯에 마지막 잎새를 피우는 줄을 살피는 사람은 없으려나.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정대세 선수를 누리그물을 들여다보며 만나는데, 이이 눈물에서 사기사와 메구무 님이 홀로 조용히 흘렸을 눈물이 떠올랐다. 이러면서 나 또한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모든 운동경기는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이기려고 하는 운동이란 운동이 아니다. 이기려고 바둥거리는 운동경기란 전쟁하고 똑같으며, 돈벌이에만 매달리는 엉터리 삶하고 매한가지이다.
우리는 아름답고자 우리 한삶을 꾸린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맛보고 즐거움을 누리며 사랑을 나누고자 한삶을 꾸린다. 한삶을 꾸리는 가운데 운동경기를 치르는 선수들 또한 ‘이기는’ 데에 큰뜻을 둘 수 없는 노릇이다. 운동선수한테는 꿈과 같다는 무대에 서는 일이 그지없는 아름다움이니까, 이러한 무대에 서는 날까지 피와 눈물을 바칠 수 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이나 목사님이라면 당신이 하느님을 섬기는 자리에 서는 날마다 벅차오르는 눈물을 흘릴 테고, 교사라면 당신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서는 날마다 북받치는 눈물을 흘릴 테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신부님이라면 거짓 신부님이요, 눈물을 쏟지 않는 교사라면 거짓 교사라고 느낀다. 맨 처음 들어서는 때에만 눈물이 솟을 수 없다. 맨 처음뿐 아니라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눈물은 샘솟으며, 마지막이 되든 언제가 되든 눈물바다를 이룬다. 사랑하는 사람을 껴안고 입을 맞출 때에 맨 처음에만 기쁘겠는가.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기쁘며 언제라도 기쁘다. 노상 눈물이 흐르고, 한결같이 웃음을 머금는다.
축구를 하는 정대세 선수가 흘리는 눈물에 어떤 뜻이 담겼는지 구지레하게 덧붙이거나 덧달 이야기란 한 가지도 없다. 눈물은 그저 눈물이다. 정대세 선수는 가없는 북받침을 있는 그대로 쏟아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름다우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다울밖에 없고, 눈물을 흘리는 몸뚱이로 온누리를 부대끼는 사람은 온누리에 아름다움을 펼치고 있다. (4343.6.16.물.ㅎㄲㅅ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