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26 : 아이와 놀며 읽는 책
애 아빠가 글 몇 줄 끄적이고 싶으면 새벽 서너 시쯤에 조용히 일어나 옆방에서 소리를 죽이며 자판을 또닥거려야 합니다. 오늘은 다섯 시에 느즈막히 일어나 살며시 글을 씁니다. 두 식구 고요히 잠든 나절에라야 비로소 마음을 가다듬어 글쪼가리 한둘 가까스로 일굽니다. 새벽에 물 한 모금 마시며 글을 쓰고 있으면 한 시간쯤 뒤 배에서 똥을 내보내야겠다는 꼬르르 하는 소리를 냅니다. 이제 책 하나 들고 뒷간으로 갑니다. 다문 몇 쪽이라도 책을 읽습니다.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청어람미디어,2007)이라는 책을 쥡니다. 글과 사진이 참으로 좋은 책이지만 책이름만큼은 영 어설픕니다. 이 어설픈 책이름 때문에 지난 세 해 동안 이 책을 안 거들떠보고 있었습니다. 글과 사진을 일군 다케타쓰 미노루 님이 일본에서 당신 책을 낼 적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따위 낯부끄러운 꾸밈말을 붙이지 않았을 텐데, 왜 이런 곱고 맑은 책을 우리 말로 옮기는 책마을 일꾼들은 낯부끄러운 꾸밈말을 낯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며 버젓이 달아 놓고 있을까요. 들짐승과 멧짐승과 날짐승을 돌보는 다케타쓰 미노루 님한테는 그저 ‘훗카이도 동물병원’이요 ‘북쪽나라 짐승쉼터’였을 텐데요.
“훗카이도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생활이 바빠지자 덩달아 차의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그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하는 동물도 늘어났고요(17쪽).”라는 대목을 읽다가, 이 사진이야기를 아이를 내 무릎에 앉히고 읽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 아빠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이 책을 읽어 주면서 이런 대목에서는 요모조모 살을 붙일 테지요. “참말 그렇지? 빠방이가 너무 많아 우리는 골목을 느긋하게 걷기 힘들잖아. 사람들 모두 빠방이를 안 타고 걸어다니면 조용하고 깨끗하며 서로서로 좋을 텐데.”
일본에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유미리 님이 쓴 《생명》(문학사상사,2000)이라는 책을 어제 막 장만해서 조금씩 읽습니다. 깊이 사랑하던 사람이 유미리 님 몸에서 새 목숨이 자라나는 줄 알면서 등을 돌리며 시리디시린 생채기를 남겼다는데, 유미리 님은 당신을 저버린 사람이 남긴 씨앗으로 자란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다. 고이 안고 있다가 모진 아픔을 겪으며 낳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슬픈 집식구한테 둘러싸여 죽음만 생각하던 유미리 님이 죽음이 아닌 삶이라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유미리 님은 조산원에서 배앓이를 하면서 “나는 늘 나를 보호해 줄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평생 지켜 주겠다는 그의 말을 나는 믿었다. 하지만 믿었기에 배신당했다. 그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보호받고 싶은 나 자신의 소원에 배신당한 것이었다(218쪽).” 하고 생각합니다. 배앓이가 그지없이 모질어 진통제와 촉진제를 놓아 달라고 빌지만, 조산원 일꾼은 ‘조산원에서는 그런 주사 안 쓴다’고 대꾸합니다. 그러고 보면 일본은 한국과 달리 애 엄마한테 주사를 함부로 안 놓습니다.
배앓이를 하는 유미리 님은 그동안 당신이 몸속 목숨을 제대로 돌보거나 헤아리지 못했음을 미안해 하며 얼른 새누리를 볼 수 있도록 하려고 힘씁니다. 사랑에다가 보금자리까지 잃었으나 유미리 님은 새 목숨을 맞이하며 새 삶을 찾습니다. 그러면, 유미리 님을 등진 남자는 짝꿍과 아이를 버리며 무슨 새 삶을 찾았을까요. 유미리 님만이 아이랑 놀며 책을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4343.6.10.나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