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하기


 하루 두 끼니만 먹는 살림이지만, 두 끼니 밥을 하려면 이만저만 품이 들지 않습니다. 저녁나절 두 끼니째 먹은 다음에 설거지를 하고 치운 뒤에는 이튿날 먹을 쌀을 씻어서 불려 놓아야 합니다. 옆지기하고 둘이서 아이를 보며 저녁때가 되면 지쳐 나가떨어질 만큼 되는데, 고단한 몸에 무거운 다리로 부엌에 가서 쌀과 콩을 꺼내어 씻고 불리자면 얼마나 눈꺼풀이 감기는지. 그렇지만 막상 쌀을 씻고 불린 다음 잠자리에 들면 걱정이 사그라듭니다. 몸이 너무 고단하여 도무지 못 일어나겠다고 생각한다든지 그만 깜빡 잊고 곯아떨어질 만큼 힘들다든지 하면,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글쓰기를 하기 앞서 바지런히 씻어서 불려야 합니다. 밥 한 그릇 먹는 일만 해도 참 이렇구나 싶으나, 아이가 날마다 새로 어지르는 방도 쓸고 닦아야지요, 아직 오줌가리기를 못하니 젖은 옷은 빨고 젖은 바닥은 닦아 말리고 젖은 이불 또한 몇 차례 말리다가는 다시 이불 빨래를 해야지요, 또 자전거를 타고 읍내나 면내에 먹을거리를 장만하러 다녀와야지요, 아이를 씻기고 아이랑 놀고 아이랑 마실을 다니고 해야지요, 이러면서 우리 식구 밥벌이가 될 글과 사진을 만져야지요, 잡지 부쳐 달라는 사람 있으면 책을 싸서 부쳐야지요 …….

 꼭 열 해쯤 앞서인가, 어느 시골마을에 일손 거들러 찾아갔을 적에 끼니마다 쌀을 빻아서 까부르며 밥을 지어 먹은 적이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몸이 깨닫는데, 밥을 해 먹자면, 먼저 벼를 절구에 넣어 절구질을 해서 빻아야 합니다. 또, 벼를 얻자면 한 해 농사를 지어 거두어야 합니다. 낫으로 벼를 베어야 하고, 벤 벼는 털어서 알곡을 갈무리해야 합니다. 처음 모를 심어 놓으면 피사리 몇 번 하고 더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는 논일이라지만, 모심기를 할 때까지, 또 모심기를 하는 동안, 또 모판을 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하는지요. 게다가 이렇게 논일을 하는 사이에도 밥을 먹어야 하니, 날마다 쉴새없이 벼를 찧고 돌과 부스러기를 훑고 쌀을 씻어서 불린 다음 냄비에 넣고 안쳐야지요. 더욱이 밥만 먹을 수 있는가요. 반찬도 먹으려면 반찬으로 삼을 먹을거리도 손수 마련하든 돈을 치르고 사오든 해야 합니다. 또한, 이 반찬감을 아예 통째로 사오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나하나 지지고 볶고 무치고 해서 마련해야 합니다.

 아이돌보기 하나로도 하루해가 꼴딱꼴딱하지만, 집 치우기로도 하루가 꼴딱꼴딱하고, 밥하기 하나로도 하루해가 빠듯합니다. 집살림하는 분들, 그러니까 살림꾼들한테는 책읽기란 그야말로 꿈꾸기 어려운 일이 되는데, 책읽기뿐 아니라 사진찍기이든 그림그리기이든 더없이 바라기 어려운 일이곤 합니다. 글 좀 쓰고 싶다는 사람, 사진 좀 찍고 싶다는 사람, 만화나 그림 좀 그리고 싶다는 사람, 노래나 춤 좀 하고 싶다는 사람, 교사가 되고 싶다는 사람, 정치 좀 하고 싶다는 사람, …… 다들, 무엇보다도 애 낳고 애 키우고 밥하고 빨래하고 쓸고닦고 농사짓고 하는 일부터 치르거나 겪거나 몸소 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농사짓기까지는 몹시 힘들다 한다면, 적어도 밥 빨래 청소 애보기 네 가지만이라도 스스로 할 줄 알아야지 싶어요. 그만 이 네 가지조차 못하겠다면, 어여쁜 짝꿍하고 사랑놀이할 생각일랑 아예 말아야지 싶어요. (4343.7.2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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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0-07-25 15:45   좋아요 0 | URL
여성학과 이재경 교수님이 늘상 하던 말씀과 비슷하네요. 밥 빨래 청소를 제 손으로 할 줄 모르면서 여성학을 운운하지 말라고요. ^^

파란놀 2010-07-26 04:50   좋아요 0 | URL
남자한테나 여자한테나 마찬가지랍니다~
 


 벼락과 글쓰기


 금요일 낮,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과 함께 벼락이 떨어졌고, 아차 하는 사이에 공유기는 뻥 하고 터지며 모뎀과 랜카드응 맛이 갔다. 시골에서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칠 때라면 인터넷줄이며 전화줄이며 전깃줄이며 모두 뽑아 놓고 있어야 하는데, 비바람이 곧 잦아들겠지 하고 잘못 생각했다. 예전에 시골에서 살 때에 여러 차례 겪었으면서 또 이렇게 한 방 얻어맞았다.

 이틀 동안 글쓰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겨우 인터넷을 고쳐 놓았어도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는 셈틀을 아예 꺼 놓는다. 저절로 글쓰기는 더 멀어진다. 그러나, 애 아빠가 글쓰기하고 조금 멀어지는 만큼 아이 얼굴을 좀더 들여다본다. 글쓰기를 덜 하는 만큼 집일을 조금 더 하고, 글쓰기를 생각하지 않는 만큼 텃밭에서 자라는 풀포기를 좀더 뽑는다. (4343.7.2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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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초등학교 아이들 그림 338점 지음, 이오덕 엮음 / 보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어설프고 잘못된 편집 때문에 안타까이 절판된 책을 기리며 별을 다섯을 붙이지 못하고  

고작 셋밖에 못 붙인다.) 

 


 어린이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그림책이 좋다 81] 이오덕,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 책이름 :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 그림 : 이오덕 선생님한테서 배운 시골 아이들
- 엮은이 : 이오덕
- 펴낸곳 : 보리 (2008.8.25.)
- 책값 : 5만 원 (판 끊어짐)



 (1)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읽으며


 아이슬랜드에서 나고 자란 비요크 님이 노래하고 춤추는 고운 삶을 보여주는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세 식구가 함께 앉아 보았습니다. 아이 엄마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보았고, 아이는 엄마 곁에서 이 영화를 잘 지켜보곤 합니다. 영화를 보고 있자니 예전에 본 적이 있지 않느냐 싶은 한편, 아이 엄마가 집에서 이 영화를 되풀이해서 다시 보고 또 보고 할 때에 군데군데 보기도 했구나 싶습니다.

 당신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눈병 때문에 당신이나 당신 아이나 눈이 몹시 나쁜 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어둠 속의 댄서〉입니다. 영화에 붙은 이름 그대로, 셀마(비요크)는 차츰 눈이 나빠지며 어둠에 갇히고 맙니다. 또한, 셀마가 꾸리는 삶을 꾸밈없이 받아들여 주지 못하는 안쓰러운 이웃 때문에 셀마는 어둠 쪽으로 자꾸 밀려나다가는 그예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맙니다. 스스로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웃집 동무는 가녀린 셀마를 깊이 헤아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며 슬픈 넋입니다. 모두가 돈 때문이라 할는지 모르나, 돈에 앞서 참다운 사랑과 믿음을 건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이와 달리, 셀마는 둘레에서 바라보기에 더없이 불쌍하고 딱하며 애틋합니다. 그러나 셀마는 당신 스스로를 불쌍하거나 딱하거나 애틋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셀마한테는 셀마한테 닥친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눈병’조차 달콤한 아름다움입니다. 이 눈병 때문에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을 뿐더러 뮤지컬을 즐길 수조차 없으나, 셀마는 어둠이 더 깊디깊이 닥칠수록 더 불타는 마음이 되어 스스로 숱한 뮤지컬을 만들어 냅니다. 비록 꿈에서 만들 뿐이지만요. 눈이 좀 밝다 싶은 때에는 한결 밝은 뮤지컬을 만들지만, 눈이 자꾸 어두워지고 있을 무렵에도 무척 신나는 뮤지컬을 만듭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만드는 뮤지컬은 당신 꿈속에만 가두지 않고 사람들 모두한테 보여줍니다. 이태껏 셀마 스스로 만든 뮤지컬은 셀마 혼자만 즐겼다면, 마지막 뮤지컬은 이 뮤지컬을 보고 가슴이 벅차오를 수 있을 사람한테는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하고, 이 뮤지컬을 보고도 어벙벙해 하는 사람한테는 가슴이 하나도 벅차오르지 않는, 사랑하는 가슴이라면 사랑을 느끼고 사랑이 없는 가슴이라면 그예 메마른 채로 있고 마는 뮤지컬을 선보입니다.

 ‘뮤지컬’이라는 예술이자 문화는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제대로 알아보거나 받아들이며 즐길 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뮤지컬’임을 모르는 가운데 누구나 이 문화이자 예술을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딱히 뮤지컬이기 때문에 너무 어렵다든지, 그저 뮤지컬이라서 한결 아름답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뮤지컬은 뮤지컬일 뿐입니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보는 동안, 이 영화를 찍은 분이나 셀마라는 삶을 보여주는 분이나 더없이 눈이 맑고 밝다고 느꼈습니다. 빛그림 이야기에 담는 틀부터 몹시 부드러우며 따사롭습니다. 못난 사람이든 잘난 사람이든 예쁜 사람이든 미운 사람이든 똑같이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과 뭇목숨한테 둘러싸여 고운 삶 하나를 꾸리고 있음을 차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어둠 속의 댄서”로 옮겨 적었으나, “어둠을 춤추는 사람”이라거나 “어둠을 노래하는 춤꾼”이라거나 “어둠과 벗삼는 춤꾼”이라거나, 제 나름대로 다시 읽으면서 영화를 헤아려 봅니다. 셀마라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날 그대로 당신 꿈속에서 뮤지컬을 만들거든요. 웃고 싶을 때에는 웃고, 울고 싶을 때에는 울며, 괴로울 때에는 괴로워하고, 기쁠 때에는 기뻐하며 뮤지컬을 만듭니다. 목매달려 더는 노래를 할 수 없을 무렵 셀마가 펼친 노래는 이제껏 살아오며 가장 기뻐하면서 해맑게 부른 노래였습니다. 셀마와 살가이 지내던 동무는 셀마가 ‘사형장 이슬’로 사라지지 않는 일이 당신 아이한테 ‘엄마로 살아가는 뜻’이라고 생각했지만, 셀마는 ‘내 아이한테 눈을 주는’ 일이야말로 당신 스스로 당신 아이한테 ‘엄마가 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셀마처럼 내 아이 땀따귀를 갈기며 왜 학교에 안 가고 못된 녀석들하고 어울리느냐고 다그치는 어머니가 되면서, 내 목숨을 바쳐 내 아이한테 눈을 주고, 내 목숨이 사그라지는 앞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내 아이가 비로소 새 삶을 얻었음을 느낀 다음에는 더없이 느긋하며 즐거울 수 있는 삶길이겠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뮤지컬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뮤지컬을 즐기면 됩니다. 영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은 영화를 즐기면 됩니다. 책을 즐기고 싶다면 책을 즐기고, 그림이나 만화를 즐기고 싶다면 그림이나 만화를 즐기며, 사진을 즐기고 싶을 때에는 사진을 즐기면 됩니다.

 문학과 영화로 함께 나온 〈로빙화〉에 나오는 고아명과 고차매 남매는 시골마을에서 둘 나름대로 그림을 즐겼습니다. 다른 사람 눈길에 따라 바라보는 그림이 아닌, 두 사람 눈썰미에 따라 서로서로 그림을 좋아하며 즐겼습니다. 〈어둠 속의 댄서〉에 나오는 셀마는 무척 외로웠지만 하나도 외롭지 않은 가운데 당신 둘레 사람들을 동무나 이웃으로 여기면서 당신 일과 삶과 춤노래를 꾸밈없이 즐겼습니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는지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는지 알쏭달쏭하지만, 아직 우리 누리에서는 어린이 그림을 제대로 읽거나 깨닫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더없이 모자라거나 드문데, 바로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어린이 그림을 담은 그림책’에 실린 그림을 그렸던 1960∼70년대 산골마을 어린이들하고 이 아이들한테 그림을 가르쳤던 이오덕 선생님은, 누가 뭐라 하건 그림 재주와 이론이 어떠하건, 당신들은 당신들 배움터인 산골마을 작은 학교에서 당신들 나름대로 아름다우며 신나고 멋진 그림누리를 즐겼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은 이론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산골마을 작은 학교 이오덕 선생님은 이론으로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이와 교사는 종이 하나와 크레파스 하나로 그림을 즐겼습니다. 종이를 펼치고 크레파스를 쥔 손은 억지로 무엇인가를 짜내려고 하는 몸뚱이나 넋이 아닙니다. 산골마을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을 고스란히 담을 뿐입니다. 아니, 고스란히 삶을 담는다는 말은 알맞지 않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 삶을 고스란히 즐기는 가운데 그림 하나 그렸다고 해야 옳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로 꾸리는 삶이 좋든 싫든 궂든 재미있든, 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즐기는 가운데 그림 하나로‘도’ 저희 삶을 나누었습니다.

 자랑이 아닌 이야기입니다. 뽐냄이 아닌 말걸기입니다. 효행일기나 반공일기 따위는 조금도 아니지만, 생활일기 또한 아닙니다. 셀마가 꿈속에서 웃음지으며 춤노래를 즐기다가는, 꿈 밖으로 나와서 바야흐로 웃으며 노래를 불렀듯, 아이들은 노상 꿈 바깥자리에서 까만 얼굴 까만 손 까만 몸뚱이인 산골아이로 지내는 저희 하루하루를 홀가분하면서 스스럼없이 종이 한 장에 크레파스로 담을 수 있었습니다.
 



 (2) 아이들 그림을 함께 즐겨야 할 텐데


 지난 2008년 8월에 나왔던 어린이 그림책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무척 슬프게도 진작에 판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들여다보면, 이오덕 선생님 아드님인 이정우 님이 출판사에 ‘더는 책을 내지 마십시오’ 하고 잘라 말하면서 스스로 판을 끊은 까닭을 알 만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그림을 읽을 때에는 아이들 눈높이뿐 아니라 아이들 삶결 그대로 바라보며 즐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안 되며,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 멋대로 그림을 요모조모 자른다든지(트리밍), 어느 한 군데만 오려낸다든지 하면서 엉뚱한 겉멋 부리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그림 한 장을 그리며 구석구석 빈틈없이 크레파스를 다 발라 놓는 흐름을 우리 어른들은 잘 읽어야 합니다. 배경이 군더더기라고 잘못 읽는다든지, 끝자리가 좀 구지레 보인다고 하면서 가운데 쪽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며 긴네모 그림을 바른네모 그림으로 만들어 버린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처음부터 아이들 눈결과 삶이 되어 어린이 그림을 볼 노릇입니다. 처음부터 ‘오로지 어른 눈썰미로 좀더 예쁘장한 책을 만들겠다’는 섣부른 생각이 되면 안 될 노릇입니다.


.. 그림은 이렇게 그려라, 저런 색을 칠해라 하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마음대로 그릴 수 있게 놓아두어야 합니다. 다만 남의 그림을 흉내내지 않도록 할 것이고, 종이·연필·붓·물간……과 같은 용구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가려서 그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는 태도는 천천히, 온 정신을 기울여서 그리도록 하고, 자기 그림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지게 해야 합니다 …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면서 즐길 수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못하는 것은 모두 어렸을 때 비참한 흉내내기 그림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이오덕-아이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오덕 선생님이 아이들한테 그림을 그리도록 했을 때에는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즐기도록’ 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저희 삶을 글로 쓰도록 했습니다. 글짓기 아닌 글쓰기로 아이들마다 제 삶을 ‘글로 쓰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널리 쓰고 있는 낱말 ‘글쓰기’는 이오덕 선생님이 만들었습니다. 글이란 억지로 만드는 ‘글짓기’가 아닌, 꾸밈없이 살아가는 내 모습 그대로 즐기는 일이기에 ‘글쓰기’라는 낱말을 스스럼없이 느끼며 쓰셨습니다. 글이란 글쓰기라면, 그림이란 바로 ‘그림그리기’이겠지요. 사진이란 ‘사진찍기’이며, 춤이란 ‘춤추기’이고, 노래란 ‘노래부르기’입니다. 일이란 ‘일하기’이며, 놀이란 ‘놀이하기’입니다.

 이런 모든 우리 삶은 그예 삶입니다. 뒤에 ‘-교육’이라든지 ‘-강좌’라든지 ‘-학습’이라든지 ‘-체험’이라든지 ‘-학원’이라든지 ‘-학교’라든지 무엇이든 붙일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 둘레를 보면 이런 안쓰러운 이름들이 더없이 많습니다. 놀이마저 놀이교육 놀이강좌 놀이학습 놀이체험 놀이학원 …… 아주 많습니다. 영어는 어떻지요? 영어는 아예 영어마을 잉글리쉬존 따위마저 판을 칩니다. 영어를 즐기려면 마음껏 즐기도록 해야 하는데, 영어를 억지로 가르치고 배우고 맙니다. 영어뿐 아니라 모든 학문 또한 즐기는 삶이어야 할 뿐인데, 이 나라 이 땅 이곳 학교에서는 늘 ‘교육’이라는 이름이 달라붙습니다. 모두 제도권이 되고야 맙니다.

 이리하여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어린이 그림책은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 한 차례조차 나오지 못한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운 그림누리를 펼쳐 보이면서 나눌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망가뜨렸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그림을 즐긴 나날이 소록소록 배어든 알뜰한 그림책이 이 나라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출판사 일꾼들이 아이들 그림을 잘못 매만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화 〈로빙화〉에 나오는 ‘그림을 이론으로만 아는 교사’들이 ‘사물을 똑같이 베껴 그려야 잘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듯, 아이들 그림을 아이들 그림 그대로 읽고 즐기며 받아들이지 못한 편집자들이 여기 자르고 저기 자르면서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습니다. 아이들 마음을 읽을 줄 모르니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히고, 아이들 마음을 읽을 줄 모르기에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어도 언제 생채기를 입혔는지 모를 뿐 아니라 무엇이 생채기가 되는지조차 모릅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소 귀나 다리가 잘리도록’ 소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통으로 소 몸뚱이를 그림에 다 그려 넣습니다. 그림 한 장에 소만 우격다짐으로 꽉 들어차게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 깜냥껏 넉넉한 품을 남기고 소를 채워 넣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보리밟기를 하는 모습을 위 아래 옆이 빡빡하도록 그리지 않습니다. 하늘을 그리고 넓은 보리밭이 잘 드러나도록 그립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해가 잘리도록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에 나오는 해가 잘 나와서 온누리를 골고루 비추게끔 그립니다.

 아이들은 보리베기를 할 때에 보리 알곡이 잘리게 그리지 않습니다. 보리 알곡을 줄기와 잎사귀와 알곡 모두 잘 나오도록 그립니다.

 아이들은 사람을 그릴 때에 다리를 자른다든지 머리를 자른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람을 통으로 잘 나오도록 알뜰살뜰 그립니다.

 아이들은 집을 그리며 집 어느 한쪽을 자르지 않습니다. 집을 통째로 다 그립니다.

 그런데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어린이 그림책에서는 모두모두 자르고 말았습니다. 아이들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통으로 내보이면서 이 통 그림 하나에 아이들 넋과 삶과 꿈과 손길이 어떻게 묻어 있는가를 나누지 못하고 맙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편집하는 멋’에 따라, 어느 대목은 자르고 어느 자리는 붙일 수 있다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편집하는 멋이란 있습니다. 그런데, 편집하는 멋이란 멋을 부릴 자리에 부려야지 섣불리 아무 데나 부릴 수 없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책이라면 이러한 책에 걸맞게 편집을 해야 합니다. 산골마을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느끼며 그린 그림이라 할 때에는 바로 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과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느끼도록 하는 데에 편집하는 멋을 살릴 노릇입니다. 이와 동떨어진 데에서 어설피 멋을 부릴 노릇이 아닙니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빌어 말씀드린다면, 셀마는 당신 아들한테 새 눈을 선물해 주려고 체코에서 미국까지 건너와서 공장 일꾼이 되어 돈을 벌지, 당신 아들한테 자전거‘나’ 사 주려고 미국가지 건너오지 않았습니다. 셀마 또한 아이 어머니로서 얼마나 자전거‘를’ 사 주고 싶었을까요. 그렇지만 셀마는 자전거 ‘따위’는 아이한테 사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전거 ‘따위’는 나중에 아이가 새 눈을 얻은 다음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살 수 있으니까요. 자전거는 언제라도 돈을 다시 벌어 사면 되지만, 하루하루 나빠지는 눈을 고치려면 셀마 스스로도 눈이 더 나빠지기 앞서 더 많이 일을 해서 더 빨리 ‘아이 눈을 고칠 수술을 할 돈’을 버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아이 또한 셀마와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눈이 몹시 나빠지고 있으니, 자전거를 장만하는 데라든지 아이한테 새 옷을 사 입힌다든지 아이한테 더 맛난 밥을 해 준다든지에 돈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아니, 이런 데에는 굳이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135쪽 그림을 보면, 이 그림을 그린 ‘김경수’라는 아이가 그림 한쪽에 적은 이름 석 자마저 ‘책을 편집하는 분들께서’ 싹둑 잘라 놓았습니다. 이런 책 편집을 이 아이가 들여다본다면 이 아이 마음은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통으로 내보이지 않고 어느 곳은 잘라서 없애 버리고 말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무슨 느낌을 받을까 궁금합니다.

 글 한 꼭지를 썼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싹둑싹둑 자르면 어찌 되지요? 사진 한 장을 찍었는데, 내가 담은 모습을 동강동강 자르면 어찌 되나요? 영화를 하나 찍었는데 ‘건전하지 않다’며 몇 분치를 마구마구 자르면 어떡합니까? 노래 하나를 지었는데 ‘노랫말을 바꾸라’느니 무어니 하며 몇 초를 요리조리 자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손가락 몇 가락을 잘라도 괜찮을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머리통 반쪽이 잘려도 살아숨쉴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염통을 조금 잘라도 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발톱 몇 군데쯤 없어도 잘 걸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331쪽부터 335쪽까지 실린 그림 일곱 점은 ‘아이들이 이오덕 선생님을 보고 그린 얼굴 그림’입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이 그림들에 ‘아버지 얼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림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요, 아이들이 무엇을 그림으로 담았는가를 아이 눈높이에서 헤아리지 못한 탓입니다. 더구나, 이정우 님이 출판사에 그림 원본을 보내 줄 때에 이 그림들은 ‘아이들이 이오덕 선생님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쪽지에 적어 붙여서 보냈는데 이런 편집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 아이들의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책에 나온 그림을 보고 그대로 그리게 해도 괜찮은가요? 언제나 똑같은 그림만 그리는데 어떻게 지도하면 될까요? ..  (이오덕-아이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생각을 기울이며 우리 삶을 우리 나름대로 곱고 착하며 참되게 일구어야 합니다. 다른 이 생각을 귀담아들을 줄 알아야 하는 한편, 다른 이 생각이 내 생각으로 녹아들도록 잘 새기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떠한 좋은 생각이든 좋은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내 생각이 되도록 애쓸 노릇이요, 이리하여 내 삶을 내 손으로 내 터전에 걸맞게 내 땀을 흘리며 가꿀 노릇입니다.

 우리가 아이 하나를 낳아서 키운다고 할 때에 어떻게 키우겠습니까. ‘아동발달 전문가’한테서 말씀을 하나하나 듣고서 키우겠습니까. ‘보육지침서’에 따라 키우겠습니까. 어린이집과 보육원과 학교에만 맡기며 키우겠습니까.

 우리가 책 하나를 장만하여 읽는다고 할 때에 어떻게 읽겠습니까. 전문가 비평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신문잡지 서평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출판사 보도자료대로만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아이들 그림은 아이들 삶결을 살피고 삶무늬를 들여다보며 삶자락을 껴안으면서 읽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가를 톺아보고, 아이들이 저희 삶을 얼마나 아이들 스스로 즐겁도록 일구는 가운데 이어가고 있는가를 헤아리며, 아이들이 어떤 눈빛이고 말빛이고 얼빛인가를 어깨동무하는 가운데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만 쓴다고 해서 글쓰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꾸밈없이 그린다고 해서 그림그리기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살가이 찍는다고 사진찍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느낌대로 부른다고 해서 노래부르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춘다고 해서 춤추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삶으로 이룹니다. 두렵고 걱정스러우며 따스하며 넉넉하다가는 차갑고 슬픈 삶으로 이룹니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셀마는 웃으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울면서도 노래를 부릅니다. 〈로빙화〉에서 고아명은 웃으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울면서도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웃으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울면서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책에는 아이들이 웃으면서 그린 그림과 울면서 그린 그림이 고루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엮은 분들은 아이들 웃음과 울음을 느끼기 앞서 ‘이오덕 선생님이 일군 빼어난 열매’라는 대목에만 지나치게 매여 있고 맙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일군 빼어난 열매라 한다면, 1960∼70년대뿐 아니라 2010∼20년대 아이들 또한 즐거우며 기쁘며 보람차게 물려받거나 받아먹으면서 알뜰살뜰 오순도순 알콩달콩 누릴 수 있는 고운 그림나라 넋을 스며 놓은 책으로 엮어야 했겠지요.

 유물로 만드는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닙니다. 지난날 이오덕 선생님이라고 하는 놀라운 어르신 한 사람이 이룩한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그림인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오늘날 아이들 누구나 아이들 스스로 제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부둥켜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그릴 수 있는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좋은 그림을 읽고 즐기며 좋아할 수 있으려면, 나부터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하며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좋은 아이들 좋은 그림을 읽기 앞서 좋은 일놀이를 즐기는 좋은 어른으로서 좋은 나라를 가꾸고 있는 좋은 삶을 사랑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저희 삶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4343.7.2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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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와 지렁이


 음성 읍내로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가서 돌아오는 길에 나비 한 마리를 칠 뻔했다. 2·7 날에 음성 읍내에서 장날이 열리기에 이날에 맞추어 나들이를 하면서 수박과 무우와 애호박 들을 장만하고 퍽 무거운 가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찻길 구석자리에 앉아 하늘하늘 날갯짓하며 쉬는 나비를 보았는데, 자전거로 달리며 거의 1미터 앞에서 알아챘기 때문에 찻길 구석자리에서 그냥 달렸으면 나비 몸통을 고스란히 짓밟았겠지. 뒷거울로 뒤따르는 차가 있는지 없는지 살필 겨를조차 없이 손잡이를 틀어 아슬아슬 나비 옆 3센티미터를 비꼈다.

 그러구러 한숨을 돌리며 저수지 옆길을 달리는데, 어제 이 길을 달리며 지렁이 한 마리 차에 치여 죽은 모습이 떠올랐다. 벌써 죽은 지렁이라 하지만 나까지 주검을 밟고 지나가기는 싫어 살금살금 살피며 달리는데,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지렁이 주검은 아무런 자국이 남아 있지 않다. 지난밤에 비가 잔뜩 퍼붓기도 했지만, 비 때문에 지렁이 주검이 쓸려가지 않았다. 비 때문에 지렁이가 차에 밟히고 거듭 밟혀 묵사발이 된 모습이 많이 씻겼을 뿐이다. 왜냐하면 어제만 해도 지렁이가 처음 밟혀서 죽은 모습이 통통하게 살아 있었는데, 오늘은 아예 짓이겨진 자국이 보였기 때문.

 가파른 언덕을 낑낑대며 오르는 동안 길가에서 날갯짓하며 쉬는 나비를 한 마리 더 본다. 아까 나비는 자전거가 달리는 찻길 구석자리 흰줄에 앉아 있었고, 이번 나비는 찻길 한복판에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다. 이번 나비는 내가 칠 일이 없으나, 자동차들이 달리며 ‘스스로 친 줄조차 모르는’ 채 치여 죽을까 걱정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그나마 코앞에서 알아채는데,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길가에 사마귀가 있는지 귀뚜라미가 있는지 지렁이가 있는지 나비나 나방 애벌레가 볼볼볼 기고 있는지, 무당벌레나 딱정벌레가 뜀밤질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챌 수 없는 자동차이다. 자전거 아닌 두 다리로 걷는다면 이 모든 작은 목숨을 낱낱이 알아채며 하나하나한테 인사할 수 있겠지. 줄줄줄 기어가는 개미한테도 인사할 수 있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개미까지 알아채지는 못한다. (4343.7.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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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유월에 나온 책이 드디어 배본이 되었구나. 

ㅜ.ㅠ 

왜 이렇게 오래오래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래도 겨우 나오고, 가까스로 배본이 되니 한숨을 돌리며 

고맙다고 인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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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0-07-2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파란놀 2010-07-22 17:59   좋아요 0 | URL
(__)

고맙습니다.
이 책이 제대로 사랑받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