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닢과 글쓰기


 어디에선가 글삯을 주겠다고 하면서 글을 써 달라고 하면 ‘글이야 날마다 늘 쓰니까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글삯을 주겠다고 하는 글을 쓸 때에는 글마무리가 퍽 고단합니다. 주어진 틀에 맞추어야 할 뿐 아니라, 이제까지 참 자주 흔히 펼쳤던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언제나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삶을 일구고 싶은데, 글삯을 받는 글은 지난날 내 모습으로 돌아가서 써야 하는 글이곤 합니다. 새로운 삶을 바라보며 새로운 넋을 담아내는 글을 살뜰히 일구어 내놓아 보면, 이와 같은 새로운 삶을 새로운 넋으로 담은 새로운 말을 으레 못 알아듣습니다. 뻔한 삶 뻔한 넋 뻔한 말이 아니고서는 이 땅 사람들은 도무지 귀를 닫고 눈을 감습니다. 날마다 새로 거듭나며 아름답게 꽃피어날 삶이란 그저 꿈 같은 소리일 뿐인가요.

 글삯을 받는 글을 오랜 품과 땀을 들여 겨우 마무리짓고 보낸 뒤에는 기운이 쪽 빠집니다. 다른 글을 쓸 힘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여러 날 먹고살 돈은 얻었네.’ 하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이런 글을 써 달라는 이야기를 또 듣는다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스럽습니다.

 돈닢을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쓸 때에는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차근차근 담습니다. 돈닢을 바라지 않고 글을 쓰니까 내 마음을 나 스스로 알차고 아름다이 여미면서 글 하나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 딸아이를 키우면서 우리 딸아이가 얼른 자라 돈 많이 벌기를 바라겠습니까. 우리 옆지기하고 살아가면서 우리 옆지기가 내 손품을 덜면서 집살림을 맡아 주고 밥이며 빨래며 쓸고닦기며 다 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나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한테 큰돈이나 큰집이나 자가용 들을 물려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쓴 책이 불티나게 팔리며 나한테 목돈이 들어오기를 꿈꾸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찍은 사진이 널리 사랑받으며 사진밭에 내 이름이 아로새겨지기를 빌지 않습니다. 글을 쓰다가 돈을 얼마쯤 벌 수는 있을 테지만, 글을 쓰며 돈을 벌고 싶지 않습니다. 책을 내며 어느 만큼 벌이가 될는지 모르나, 책을 내놓아 살림살이를 꾸리고 싶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어 큰뜻 하나 이룰 수 있다지만, 큰뜻에 앞서 우리 살붙이하고 알콩달콩 신나는 하루를 보내고 싶습니다.

 좋은 삶과 좋은 넋과 좋은 말이면 그야말로 좋습니다. 여기에 좋은 책과 좋은 글과 좋은 사진을 나란히 놓고 싶습니다. 이러면서 나 스스로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을 걷고 싶고, 좋은 옆지기 좋은 딸아이로 저마다 이녁 삶을 가꿀 수 있도록 길동무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내 책을 기꺼이 사 주는 분이나 내 사진을 스스럼없이 사들이는 분들은 나한테 돈을 보태어 주려는 마음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4343.8.2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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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책 《이누야샤》


 나이로 치면 열대여섯 푸름이가 나누는 사랑이야기를 다루는 만화책 《이뉴야샤》는 모두 쉰여섯 권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마지막 쉰여섯째 책을 펼치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154쪽에서 《이누야샤》 주인공인 ‘카고메’가 어두운 저승나라에서 ‘언제라도 … 이누야샤는 와 주었어. 이제 무섭지 않아.’ 하고 생각합니다. 만화책 《이누야샤》는 틀림없이 푸름이들 사랑을 말하거나 보여주는데, 이 만화책에서는 뽀뽀를 한다든지 손을 맞잡는다든지 어깨동무를 한다든지 부둥켜안는다든지 하는 대목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이런 대목은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반가웁기에 얼싸안거나 어디로 가자며 잡아끌 때에 손을 잡는 일은 있습니다만, 살과 살을 부비거나 몸과 몸이 맞닿으며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만화책 《이누야샤》는 어김없이 사랑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애틋하고 살가이 복닥이는 ‘카고메’와 ‘이누야샤’ 사이이든, ‘산고’와 ‘법사’ 사이이든, 이들이 저마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찾아 일거리와 놀이거리를 붙잡으면서 저희 삶터를 아끼고 돌보는 흐름을 넌지시 보여주는 가운데, 참사랑이란 어떻게 샘솟고 어찌어찌 꽃피우며 어떠한 모습으로 열매를 맺는가를 밝힙니다. (4343.8.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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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김수미 지음 / 샘터사 / 1991년 2월
평점 :
절판


 


 슬픈 넋, 슬픈 사람, 슬픈 꿈
 : 김수미,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 책이름 :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 글 : 김수미
- 펴낸곳 : 샘터 (1987.10.10.)
- 판 끊어짐


 (1) 꿈꾸지 못하는 슬픈 넋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 부용산 중턱에 이오덕자유학교 하나 서 있습니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아이들이 자유롭게 우리 누리를 맞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배움터입니다. 아이들은 이 배움터에서 배우고 어우러지며 뛰놀고자 저희들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음성 읍내나 면내로 와서는 시골버스로 갈아타고 마을 어귀에서 내린 다음 이삼십 분을 씩씩하게 걸어서 찾아옵니다. 한창 배우는 철에는 아이들 스스로 주마다 이와 같이 오갑니다.

 여름과 겨울에는 방학이 있으나 방학에는 계절학교를 열어 학교 아이 아닌 여느 아이를 한 주씩 맞아들이곤 합니다. 엊그제까지 여름철 두 번째 계절학교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계절학교를 마칠 무렵 아침에 한 시간씩 ‘말을 살리는 글쓰기’를 이야기감으로 삼아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말을 살리는 글쓰기’라는 이야기감은 이오덕 선생님이 살아 있을 적에 글쓰기교육연구회 선생님들한테 글쓰기 이야기를 나누고자 마련해 두었으며, 이오덕 선생님이 손글씨로 배움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 배움판으로 예닐곱 살 어린이부터 열서너 살 어린이한테까지 글쓰기 이야기를 나눕니다.

 엊그제 이야기자리에서는 아이들한테 손바닥만 한 쪽지를 하나씩 나누어 준 다음 ‘우리 어린 동무들이 이루고픈 꿈이나 앞으로 하고 싶은 꿈을 적어 보셔요.’ 하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저도 제가 이루고픈 꿈이 무엇인가를 조그마한 쪽지에 찬찬히 적바림합니다. 난데없이 꿈 이야기를 적으라 했다고 할 수 있는데, 꿈이란 늘 생각하는 내 빛줄기요 언제나 떠올릴 수 있는 내 길잡이입니다. 그래서 난데없다 할 만하더라도 아이들이 예닐곱 살 나이부터 열서너 살 나이에 무엇을 헤아리거나 살피는가를 곰곰이 곱씹으며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 그때 기도하는 동안 나는 너무나 또렷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평소 목소리 그대로 대답하시는 것이다. ‘영옥아, 너 한 사람의 죽음이 너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네가 그렇게 죽어 버리면 네가 사랑했던 그 남자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그토록 사랑한 사람의 등에 비수를 꽂아서야 진정 네가 사랑했달 수가 있느냐.’ … 부모님이 안 계신 것도 슬픈데, 부모님 없다고 싫다는 것에 너무나 화가 났다. 그리고 남처럼 많이 배우지 못해서 늘상 걸리는데 학벌 없어 싫다는 것도 화딱지 나는 거였다. 그러나 너무 말라서 애 낳기도 어렵겠다는 얘기엔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 나훈아 씨가 불렀던가. 〈울긴 왜 울어〉 노래 제목을 읊조리며 나는 실연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내 젊음을 그냥 싸구려로 보낼 순 없지. 늙어가도록 그저 눈물 한숨으로 펌프질이나 할 순 없어!” 나는 그야말로 발바닥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더운 밥을 짓고, 김치 넣어 찌개 끓여 한 남비 밥을 다 먹었다. 실로 오랜만에 지어 먹은 밥이요, 찌개였다 ..  (33, 37, 38쪽)


 아이들이 적은 쪽지를 하나하나 돌려받으며 읽습니다. 마흔 남짓 되는 아이들은 ‘꿈’을 적으라 했으나 꿈을 적지 않고 ‘직업’을 적습니다. 더욱이 여느 직업조차 아닌 ‘돈 버는 직업’을 적습니다. 나아가 그냥저냥 돈 버는 직업마저 아닌 ‘돈 많이 벌고 이름 높이 얻는 직업’을 적습니다.

 아이들이 적은 꿈 아닌 직업으로는 운동선수가 가장 많습니다. 다음이 과학자나 발명가이고, 다음으로 의사나 선생님이 있으며, 다음으로 대통령이 있습니다. 아무 꿈이 없다고 적은 아이도 제법 있습니다. 아예 ‘평범한 직장인’이라 적은 아이까지 보입니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 낮에 부랴부랴 시골버스와 시외버스를 갈아타며 서울에 닿았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인천으로 전철을 갈아타며 들어옵니다. 이렇게 인천으로 오는 길에 나이 일흔이라는 할배 한 분을 만납니다. 할배는 우리 딸아이를 바라보며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모습을 보고 배운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할배 말씀이 아니더라도 우리 식구는 노상 느낍니다.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이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아이는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몸짓을 고스란히 따릅니다. 살가운 몸짓이든 짓궂은 몸짓이든 스스럼없이 따릅니다.

 곰곰이 곱씹자면, ‘꿈을 적으라’ 했으나 꿈이 아닌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생각하며 적은 아이들은 바로 아이들 어버이가 바라보는 삶을 고스란히 적은 셈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꿈을 꿀 줄 모를 뿐 아니라 스스로 꿈을 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결마저 가로막혀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이들을 낳아 가르치고 돌보며 어루만지는 어버이부터 스스로 사랑스러우며 믿음직스레 꿈을 꾸지 않는 나날을 이어오고 있지 않느냐 걱정스럽습니다. 아이들 어버이부터 착하고 참되며 고운 길로 돌아서지 않고서야 아이들은 꿈을 꿀 수 없는데다가 꿈을 키울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근심스럽습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학의 꿈은 멀어져도 내 생각은 써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내 일기를 쓰고 단상이 떠오르면 잊지 않으려고 기록했다. 만일 내가 행복하기만 한 삶을 살았다면 글을 쓰겠다는 동기도 결심도 없었을 것이다 … 공부를 많이 못해서 늘 찜찜한 나는 대신에 독서를 통해 못 배운 것을 보충하곤 한다. 독서만큼 사람을 풍부하게 해 주는 것이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  (66, 69쪽)


 꿈이란 “가수가 되고 싶어요.”가 아닙니다. 꿈이란 “노래를 잘하고 싶어요.”입니다. 꿈이란 “의사가 되고 싶어요.”가 아닙니다. 꿈이란 “내 동무를 사랑하고 싶어요.”입니다. 꿈이란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가 아닙니다. 꿈이란 “착한 사람으로 지내고 싶어요.”입니다.

 우리는 우리 꿈을 이루어 가는 길에 내 밥벌이를 하거나 내 살붙이 밥벌이를 하고자 ‘돈 버는 일’을 할 뿐입니다. 어떤 일자리를 찾을 때에는 내 꿈을 이루고자 하는 뜻이 아니라, 내 꿈을 곱다시 붙잡으며 키우는 가운데 내가 디디고 선 이 터전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이들하고 꿈 이야기를 좀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맙니다. 저한테 주어진 말미가 퍽 짧았고, 내 꿈이 어떻게 내 글 하나로 스며드는가 하는 글쓰기 이야기를 더 풀어놓아야 했기 때문에 그만 꿈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고 맙니다. 아이들한테 “꿈이란 내 마음이 좀더 따스하거나 넉넉해지면 좋겠어요.” 하고 바라거나 “꿈이라 할 때에는 나처럼 아프거나 나보다 훨씬 아플 많은 동생이나 언니 오빠 누나 형들이 맑고 밝은 마음을 잘 건사하면 좋겠어요.” 하고 바라야 하는 마음가짐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합니다.


.. 몽마르트에서 그림 두 점을 산다.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그림은 무조건 좋은 그림이고, 내 맘에 별로인 그림은 그냥 그런 그림이다. 그림에 대해서는 내 감정에 전적으로 의지할 뿐, 남의 의견에 따라가지 않는다 ..  (158쪽)


 돌이켜보면 제 어린 나날부터 제대로 꿈꿀 수 없던 하루하루가 아니랴 싶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신나게 뛰어놀 꼼수만 찾던 국민학교 무렵에는 노느라 바빠 꿈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일찍 철이 든 동무들이 “넌 어쩜 그렇게 생각이 짧니? 실망했어.” 하고 핀잔할 때에야 겨우 ‘어, 내가 왜 그랬지?’ 하고 부끄러워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아직 어린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 하며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줄기를 가까스로 붙잡았습니다. 동무들한테서 핀잔을 받고 또 받으며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와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집이나 동네나 학교 어디에서고 저한테 꿈을 꾸라고 일러 준 어른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제 동무들 또한 꿈을 꾸라는 이야기를 좀처럼 듣지 못하면서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었습니다. 어느덧 서른여섯이라는 나이를 맞이하고 있는 저와 동무들이지만, 서른여섯이라는 나이를 즐거이 맞아들이면서 기쁘게 얼싸안는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두 번 다시 찾아올 수 없는 서른여섯 나이임을 똑똑히 바라보지 못한다고 느끼는 내 둘레 사람이요 동무입니다. 서른다섯 나이에도 매한가지였고 서른일곱 나이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은 내 둘레 사람이요 동무입니다.

 마흔여섯인 사람들은, 쉰여섯인 사람들은, 예순여섯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요. 모두들 저마다 당신 나이를 고맙게 맞아들이며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마흔여섯에 스물여섯을 꿈꾼다든지 쉰여섯에 서른여섯을 꿈꾸는 부질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일곱 살에는 일곱 살에 할 수 있는 일놀이를 즐기고, 열일곱 살에는 열일곱 살에 할 수 있는 일놀이를 즐길 노릇입니다. 열일곱에 열일곱 나이를 안 즐기면 스물일곱에 열일곱 나이를 즐길 수 있겠습니까. 스물일곱에 스물일곱답게 살아가지 않고서야 서른일곱에 서른일곱다운 삶을 즐길 수 없습니다.


.. 사람이란 어느 정도 나이 먹어 가면 지식이니 기술이니 직업이니 하는 게 몽창 별거 아닌 게 되는 걸까 ..  (244쪽)


 돈 많은 사람들이 불쌍합니다. 그 많은 돈을 붙잡느라 당신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돈 많은 사람들이 불쌍합니다. 이름 높은 사람들이 안쓰럽습니다. 그 높은 이름을 건사하느라 당신 삶을 따사롭게 돌보지 못하는 이름 높은 사람들이 안쓰럽습니다. 힘이 센 사람들이 딱합니다. 그 센 힘을 지키느라 당신 삶을 넉넉하게 보듬지 못하는 힘이 센 사람들이 딱합니다.

 우리가 이룰 삶은 진보나 보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룰 삶터는 자유나 민주나 평화나 통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룰 삶꿈은 개혁도 혁신도 변혁도 발전도 개발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삶을 이루고 믿음직한 삶터를 일구며 따사롭고 넉넉한 삶꿈을 가꿀 노릇입니다.


 (2) 땀흘리지 못하는 슬픈 사람


 저는 ‘추천도서 목록’이나 ‘권장도서 목록’을 만들지 못합니다. 아직 철없던 예전에는 용을 쓰며 무슨무슨 목록을 만든답시고 깝죽을 떨곤 했습니다. 참말 철없는 바보스런 책벌레들이나 추천도서 목록 따위를 만듭니다. 참으로 책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책쟁이들은 권장도서 목록뿐 아니라 ‘읽을 만한 책 소개’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니, 읽을 만한 책으로 무엇이 있다고 들 수 없습니다. 모든 책은 읽기 나름인데 무슨 책을 읽으라고 어떻게 선뜻 말하겠습니까.

 책 좀 읽은 사람이든 책 좀 안 읽은 사람이든 ‘무슨 책을 읽어야 좋다’라는 말이나 ‘좋은 책으로 무엇이 있다’는 말은 도무지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좋다라든가 좋은 사람으로 누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말 또한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대학교에 가야 한다 같은 말이나 무슨 사진기를 써야 한다 같은 이야기나 어느 나라나 도시나 시골에 보금자리를 틀어야 한다 같은 소리 또한 섣불리 꺼낼 수 없습니다.


.. “모다 안녕하신가유? 일용 엄니 여기 왔슈우우!” 그러니까 가득하게 모여 있던 거제도 분들이 환성을 지르고 손뼉을 치고 좋아라 웃어댄다. 꼭 선거 유세장 같기도 하고, 텔레비전에서 본 티나 터너 공연장 같기도 하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고 황송하고 즐거워서 나는 있는 힘껏 내 능력을 다해 그들과 얘기하고자 한다. 김수미가 대관절 뭐길래 밭농사 짓던 손 털고, 그물 손질하던 손 털고 나와 구경한단 말인가. 김수미가 뭐길래. 그냥 탤런트일 뿐이지 않은가 … 나를 보려고 온 분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다. 그분들의 손은 한결같이 거칠고 마디지고, 때때로 손톱 끝에 새까맣게 때가 끼고, 손가락 한두 개가 없기도 했다. 모두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다 … 내 고향 전라도 지방을 가면 나는 고향에 내려온 시집간 딸 취급을 받는다. 우리 아버지 같은 할아버지가 더덕을 꾸려 놓았다가 가지고 올라가 상에 올리라며 내어준다. 나는 그 값진 더덕을 그냥 받을 수가 없어서 만 원짜리 지폐를 두 장 꺼내 드린다. “워매, 와 이런당가. 파는 게 아녀. 내 딸 같아 그냥 주는 거란 말여.” ..  (45, 46쪽)


 땀흘려 일하는 사람한테는 실컷 흘리는 땀방울이 곧바로 책입니다.

 땀흘려 노는 사람한테는 신나게 흘리는 땀방울이 곧 책입니다.

 땀흘려 어깨동무하는 사람한테는 기꺼이 흘리는 땀방울이 바로 책입니다.

 땀흘려 일하지 않으니 스스로 읽을 만한 책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땀흘려 일하지 않으니 애써 좋다는 책을 장만했어도 새겨읽지 못합니다. 땀흘려 일하지 않고 있으니 어떤 책을 제아무리 많이 갖추어 놓고 있다 할지라도 멍텅구리 밥통 짓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땀흘려 놀지 않으니 스스로 삶을 가꾸는 책 하나 깨닫지 못합니다. 땀흘려 놀지 않으니 몹시 재미난 만화책을 보고 나서도 뭐가 재미난 줄거리인지 알아채지 못합니다. 땀흘려 놀지 않고 있으니 책 하나로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을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땀흘려 어깨동무하지 않으니 스스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돕는 책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땀흘려 어깨동무하지 않으니 도서관과 새책방과 헌책방을 알뜰살뜰 즐기는 책길을 걷지 못합니다. 땀흘려 어깨동무하지 않고 있으니 남이 쓴 거룩하고 훌륭한 글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 아니라, 누구나 스스로 얼마든지 거룩하고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 나는 박은수 씨와 한 가족이라기에 부부 배역인 줄 알았다. 그랬더니 박은수 씨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김수미는 내 엄마 역할야.” “뭐, 뭐라구? 박은수 씨 엄마라구?” … 이제 겨우 삼십이 될락말락 하는데 할머니라니. 빌어먹을! 배역도 배역이지만 가만 보니 나는 고정 멤버도 아니었다. 고정 멤버인 김 회장댁 이웃집에 사는 이웃 할머니였다 … 제기랄! 오랜만에 주는 배역이 깍두기라니 … 나보다 한 해 선배인 김자옥 씨, 박원숙 씨도 안방극장의 사랑받는 여자 탤런트들인데. 겨우 서른 살인 내게 시골 무지렁이 육순 노파역이라니 … 연출가 이연헌 선생님이 배역 성격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중에도 나는 혼자 씩씩대며 분을 삭이느라 바빴다 … (집으로 돌아와 늦은 밤에) 한참 울근불근 성질을 내다가 다시 한 번 대본을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방구석에 누워 있는 대본을 집어들고 커피 한 잔을 더 마시며 읽어 보았다. 처음부터 찬찬히, 냉정한 마음으로. 대본을 읽어 가면서 차츰차츰 성질이 풀렸다. 나는 어디 가도 ‘촌년’이라 대본 전편에 깔려 있는 농촌 분위기가 우선 가슴에 와닿았다. (김 회장, 밭두렁에 앉아 풀을 뽑고 있다) 그 대목에선 우리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흙을 떠나 살면 안 되는 줄만 아시고 흙고랑을 내 집처럼 여기고 사시지 않았던가. (일용이네 할머니, 아들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우스갯소리를 퍼담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아! 그래~ 바로 이거야!” 하며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엔 ‘딸 그만’이란 별명의 할머니가 있었다 … 우리 동네에서 딸 그만 할머니는 최고 가는 인기스타였다. 겉으로는 주책없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감성과 감정이 풍부한 딸 그만 할머니 … 미국 할머니가 된 나는 드라마 중간쯤 내 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내가 맡은 일용이 할머니 배역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저 깍두기 배역일 뿐이니 잘해도 그만 못해도 할 수 없는 정도였다. 내 신이 오자 나는 연습에선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비장의 연기를 쏟아냈다. “야아아! 일용아아아! 해가 중천에 떴다아아! 오살할 노옴! 또 집 나갈 궁리냐아아?” 연습에선 보여주지 않았던 노인네 소프라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  (177∼180쪽)


 땀방울만큼 좋은 열매가 없습니다. 땀방울만큼 좋은 책이 없습니다. 땀방울만큼 좋은 영화나 연극이나 연속극이 없습니다.

 거침없이 뛰어노느라 바쁜 두 돌 지난 우리 딸아이는 언제나 온몸이 땀범벅입니다. 그러나 땀범벅이든 뭔 범벅이든 달리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춤추기와 노래부르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제풀에 겨워 곯아떨어질 때까지 아낌없이 노는 우리 어린 딸아이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어버이들은 아이하고 함께 놀아 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놀지 못해 갑갑해 하거나 셈틀놀이에만 푹 빠져 있다면서 ‘따로 놀아 주는 어른이 마련한 놀이터(캠프라든지 수련회라든지 뭐라뭐라 하는 곳)’에 목돈을 들여 보냅니다. 때로는 더 큰 목돈을 들여 나라밖으로 나들이를 가거나 아예 나라밖에 배움터를 마련해 놓습니다. 어떤 아이이든 제 아버지와 어머니 삶을 보고 배우는데, 오늘날 어떤 어른이든 아이 앞에서 아버지다움이나 어머니다움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떤 어른이든 아이 앞에서 ‘돈을 더 많이 버느라 용쓰고 애쓰고 떼쓰는 모습’만 죽어라 보여줍니다. 우리 어른 스스로 ‘아이야, 네 엄마가(아빠가) 얼마나 땀흘리며 이렇게 아름답고자 하는지 알겠니?’ 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옳고 바르며 아름다운 길을 걷지 않는 우리 어른들입니다. 착하고 참되며 고운 길을 찾지 않는 우리 어른들입니다. 맑고 밝으며 싱그러운 길하고는 등돌리는 우리 어른들입니다.

 이리하여 슬픈 어른들입니다. 삶을 모를 뿐더러 삶을 잊는데다가 삶을 내동댕이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어른인가요. 게다가, 어른만 슬픈 삶이 아니라 이 어른이란 이들이 낳아 키운다는 아이는 얼마나 더 크게 슬픈가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어른 삶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 삶까지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있지 않나요.


.. 둘째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나도 잠깐 방송일을 잊고 살 수 있었다. 두 돌이 지날 때까지 나는 우리 딸애에게 빠져 방송이고 뭐고 생각나지 않았다 … 딸애가 쌕쌕 잠이 들면 그 옆에 앉아서 아이 얼굴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너무 뛰어놀아 다리가 아픈지 꽁꽁 아픈 소리를 내기도 한다. 꿈에 우스운 일이 있는지 쌔액 웃기도 한다 … 우리 나라는 아직 여자가 많이 밑지는 나라라, 딸애 세상 살 일도 걱정이 됐다. 잘 먹이고 잘 가르치고 잘 키워도 아이가 세상 나가 살 일까지 죄다 잘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가정 안에서 울타리를 둘러쳐 줄 뿐, 세상 바깥 찬바람을 막아 줄 울타리까지는 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세상의 찬 비바람을 견딜 울타리는 아이 스스로 겪어 가며 쳐야 하는 것이다 … 딸아. 나의 딸아. 착하고 이쁘고 아름답고 씩씩하고 강인한 여자가 되어라. 딸아. 나의 딸아. 세상 사람들이 네 길과 다른 길을 가더라도 너는 네 길을 가면서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가고 싶은 길,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씩씩하게 선택해라. 그리고 네 길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여라.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 가다가다 너의 넓은 마음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만날 것이다. 그러면 좀 이용당해 주어라. 네가 네 자신을 잃지 않는, 네 자신을 상실하지 않는 정도에서 이용당해 주어라 ..  (97∼98, 100∼101, 103쪽)


 저는 대학교를 집어치웠습니다. 그렇지만 중·고등학교 아이들이나 대학교 아이들을 바라보며 ‘너희도 얼른 대학교 집어치워.’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은 할 수 없기도 합니다. 제가 아이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너희는 너희 삶과 하루를 사랑하면서 너희 꿈을 곱게 키우면 좋겠어.’ 한 마디입니다. ‘너희 스스로 믿음직한 사람이 되고, 너희 스스로 따스한 사람으로 거듭나며, 너희 스스로 너그러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꿈을 꾸면 기쁘겠어.’ 한 마디를 덧보탤 수 있습니다.


 (3)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슬픈 꿈


 1951년에 태어난 김수미 님이 1987년에 세상에 내놓은 책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당신이 서른여섯 즈음에 쓴 글을 담고 있습니다. 이 수필책 하나를 내놓은 다음 《너를 보면 살고 싶다》는 소설책을 하나 냈고, 1993년에 《나는 가끔 도망가 버리고 싶다》는 수필책을 잇달아 내놓습니다.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가 서른을 지나 마흔으로 달리는 김수미 님 삶을 담은 책이라면, 《나는 가끔 도망가 버리고 싶다》는 마흔을 지나 쉰을 바라보는 삶을 묻은 책입니다. 2003년에 나온 《그해 봄, 나는 중이 되고 싶었다》는 쉰 살 고개를 넘긴 삶이 새록새록 깃든 책이고, 지난해에 나온 《얘들아 힘들면 연락해》는 예순을 코앞에 둔 자리에서 당신 삶을 되짚은 책입니다.

 이제는 어엿하게 할머니 소리를 듣는 김수미 님인데, ‘할머니 김수미’가 아닌 ‘서른여섯 젊은 김수미’가 쓴 수필책 하나라니, 당신 나이와 삶과 길을 하나둘 되뇌노라면 참으로 새삼스럽고 남다른 책 하나입니다. 한국땅 도서관에서 김수미 님 수필책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를 갖추고 있을는지 없을는지 궁금한데, 이 소담스러운 글모음 하나를 헌책방에서 만날 수 있고 읽을 수 있으며 새길 수 있으니 더없이 반가우며 고맙습니다.


.. 어머니의 꾸중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시누이와 시누이 남편이 그를 병원 복도로 끌고 나가 한 시간도 넘게 나무랐다. 그날 집에 돌아온 남편은 여전히 남의 집에 온 손님처럼 굴었다. 나는 9일 간 못 자고 못 먹어서 기운이 빠져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위스키 한잔 안 할래요?” 위스키 잔을 내밀고 잔소리를 시작했다. “해도 해도 너무했어요. 자기 어머니 혈압 높은 거 잘 알죠. 나 며칠 안 남았어요. 해산할 날. 어쩜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어요.” 한참 잔소리하는데, 갑자기 미끈미끈한 물이 밑으로 주르르 흐른다. 양수가 터진 것이다. 그길로 잔소리고 뭐고 집어치우고 병원으로 갔다. 그날 입원해서 일곱 시간을 진통한 끝에 다음날 새벽 나는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남편이 바라고 바라던 딸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삼일째 되어 퇴원하는 전날까지 얼씬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정말 나쁜 사람, 형편없는 남자였다 … 아이 백일이 닥쳐 왔다. “백일잔치 해야죠. 돈 좀 주어요.” “나 요즘 돈 없는데. 어머니에게 달래서 잔치하지.” 그리고 덧붙여 “조용히 간소하게 차려.” 한다. 나는 조용히 간소하게 차리란 말에 화딱지가 났다 … 백일잔치에 필요한 음식들도 메모했다. 그러는데 친구 한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미니? 나야, 나.” “어머, 오랜만야. 왠일이니?” “너 놀래지 마. 좀 전에 한강맨션 부근에 외제옷 파는 집에 갔었거든. 거기 명호 아빠가 와 있더라. 키는 작은데 눈이 크고 이쁜 여자를 데리고 말야.” … 나는 다리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나쁜 놈. 지 딸애 백일이 내일 모레인데, 떡 한 말 값 안 주고 나가더니. 그러더니 여자한테 이탤리제 부츠를 사 줘? 뭐 코트도 사 주고 잠옷까지 사 줘? 외제옷이 얼마나 비싼데 … 살아 보려고 악착같이 군 내 꼴이 우스워 보인다 ..  (217∼222쪽)


 김수미 님 수필책에는 김수미 님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습니다. 김수미 님 수필책에는 김수미 님 눈물와 웃음이 남김없이 담겨 있습니다. 김수미 님 수필책에는 김수미 님 땀내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지없이 마땅한 이야기인데, 김수미 님이 쓴 책이니 김수미 님 냄새가 납니다. 김수미 님 스스로 당신 삶을 들려주고 있으니 김수미 님 빛깔이 납니다. 김수미 님 스스로 걸어왔고 앞으로도 굳세게 걸어갈 길을 보여주고 있으니 김수미 님 맛과 멋이 납니다.


.. 이 복잡미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양 좋아하는 사람만 있기를 바라는 것은 바보스런 짓이라고 생각한다 ..  (62쪽)


 열 해 만에 노래판 하나 새로 내놓은 디제이 디오씨 님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김창렬 이하늘 정재용 이 세 사람은 참 재미나게 살아가는구나 하고. 이 땅에서 거리낌이나 아쉬움 하나 남길 까닭이 없음을 스스로 잘 보여주며 살아가는구나 하고.

 김수미 님 수필책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를 읽으면서도 생각합니다. 김수미 님은 참 맛깔나게 살아가는구나 하고. 이 땅에서 슬픔이나 기쁨을 따로 살피기보다 당신 스스로 꾸밈없이 온몸을 부딪히며 살아가는구나 하고.


.. 딸애는 새 필통을 사내라고 생어거지다. 이미 멀쩡한 필통이 서너 개가 넘는데도 말이다 … 아이는 또 쥐어짤 태세다. 할 수 없이 나는 또 필통을 사 주고 말았다. 작은 눈을 이쁘고 쬐꼬마하게 찡그리는 모양이 이 엄마의 결심을 다시 허물어뜨린 것이다 … 나는 우리 딸아이가 (집에 또) 있는 물건을 사 달라고 할 때는 내가 자랄 무렵의 얘기를 하곤 한다. 한데 아이는 말끝마다 따지고 들며 계속 반문이다. “왜 이런 것두 못 샀어?” “늬 할아버지가 안 사 주셨어.” “왜?” “음, 그땐 이런 것이 귀했어. 그리구 돈두 많지 않았구.” “왜 돈이 없었어? 왜 귀했어?” “흉년이 심했거든.” “왜 흉년야?” “하느님이 비를 안 주셔서.” “왜 비를 안 주신 거야?” “…….” … (어릴 적 도시에서 전학 온 동무) 유란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내가 꼭 갖고 싶은 게 딱 하나 있었다. 분홍 빛깔의 장미 꽃송이가 약간 도드라지게 무늬 놓인 플라스틱 필통이었다. 내가 가진 것은 아버지가 대패로 나무토막을 밀어서 깎아 준 것이었다. 윗뚜껑은 미닫이 문처럼 밀고 닫고 하는, 작은 목침만 한 필통이었다 … “엄니, 나 필통 사 줘 잉!” 그래도 대꾸가 없으면 칙간 앞에서 마구 뒹굴었다. 엄니는 칙간 문틈으로 뒹굴고 있는 내 꼬라지를 내다보곤 한심스럽다는 듯 빽 소리치셨다. “보릿고개에 먹네 굶네 하는 통에 필통은 뭔 필통! 후딱 저리 가지 못해?” ..  (21∼22, 25, 26쪽)


 어떤 못난 글쟁이들은 어린이문학을 우습게 압니다만, 바로 이렇게 우습다고 여기는 어린이문학만을 즐겁게 붙잡으면서 살았던 권정생 할아버지는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당신 스스로 오물덩이가 되어 이곳에서 딩굴고 저곳에서 구르며 하루하루를 이었습니다. 권정생 님 당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오래도록 쓸쓸하게 오물덩이처럼 딩굴었기에 비로소 새앙쥐 동무를 만났고 뱀 벗을 사귀었으며 바람 솔솔 새는 창호지 문을 바른 조그마한 집에서 옹크리면서 글 하나 뱉어냈습니다. 콜록콜록 아픈 재채기를 하면서 글 하나 조곤조곤 뱉어냈습니다. 권정생 님이 오물덩이처럼 딩굴지 않았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시골에서 안 살고 도회지로 나와 공장 일꾼이 되거나 큰회사 일꾼으로 한삶을 마무리했겠지요. 그러나 권정생 님 당신은 아픈 몸에다가 오물덩이처럼 딩군 나머지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라는 책을 비롯해 《강아지똥》과 《슬픈 나막신》과 《우리들의 하느님》에다가 《랑랑별 때때롱》까지 뱉고는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무엇이 있나 살피러 하늘나라 마실을 떠났습니다.

 평론가이든 전문가이든 교수이든 무엇이든 수필을 문학으로 치는 일은 드뭅니다. 수필문학을 알알이 아로새기며 사람들하고 곱게 나누는 길을 여는 일은 드뭅니다. 모르는 노릇이나 아무래도 마땅한 노릇이 아닐까 싶은데, 김수미 님이 내놓은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같은 책을 ‘문학’으로, 또는 ‘수필문학’으로 치면서 비평을 하든 평론을 하든 뭐를 하는 교수님이나 전문가는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평론이니 비평이니에 앞서 이 책 하나 즐거이 읽으면서 가슴으로 삭일 만한 책쟁이가 몇 사람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김수미 님 삶을 이 책 하나로 들여다보거나 어깨동무하면서 내 삶은 얼마나 아름답거나 빛나는가를 알뜰살뜰 돌아볼 만한 여느 어른이 이 나라에 몇이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 성형수술한 뒤 훨씬 더 젊어 보이는 친구들을 보면 약간은 마음이 흔들리나, 전 겉보기보다는 상당히 봉건적입니다. 순리·자연적인 걸 거부하는 억지가 싫습니다. 요즘 세태에 안 맞는 여성일진 모르나 최신의 의학보다는 눈밑이 약간 처지고 눈가에 주름살이 접히는 제 마흔의 얼굴이 자꾸만 교만해지는 마음을 자제해 줄 것 같습니다. 제 성격에 한 십 년 더 젋어 보인다면 얼마나 더 설치겠읍니까? ..  (270쪽)


 군대가 있을 뿐 아니라 군대가 꽤 크고 이 나라 가난하고 힘없는 모든 젊은이는 강아지처럼 목줄에 매여 끌려가야 하는 틀이 단단히 잡혀 있는 대한민국은 참 슬픈 나라입니다. 경제성장률을 비롯해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수뿐 아니라 토익·토플 점수와 수학능력시험 점수에 목매달아야 겨우 숨통을 트는 듯 여기는 대한민국은 아주 슬픈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삶’이 아닌 ‘최저생계비’라든지 ‘최저임금’ 같은 숫자에 매일 뿐 아니라 ‘억대 연봉’과 ‘수십억대 아파트’에 눈과 마음을 팔아치우는 대한민국은 끔찍히 슬픈 나라입니다.

 무더위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들이지 않고 부채로만 살아가는 시골집에서 팔이 빠지도록 부채질을 하면서 딸아이 더위를 식히는 애 아버지는 꿈을 꿉니다. 애 아버지는 낮이고 밤이고 아이한테 부채질을 해 줄 뿐입니다. 아이는 늘 부채질을 해 주느라 아예 선풍기처럼 몇 시간을 지치지 않고 부채질을 할 수 있게까지 된 아버지를 바라보며 저도 부채질을 해 주겠다며 빙그레 웃습니다.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생각을 가다듬고 내 꿈을 곰곰이 되짚습니다. 살림이 버겁고 살림에 매여 저부터 제 꿈을 자꾸 잊고 있었다고 깨닫습니다. 내 하루를 나부터 곱게 사랑하고, 내 한삶을 나부터 든든히 믿으며, 내 목숨을 나부터 맑게 껴안자고 꿈을 꿉니다. 나는 참말로 어른이 되고 싶으니까 어른이 되자면 서른여섯 이 나이에, 김수미 님으로서는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같은 책을 내놓은 서른여섯 이 나이에, 내 몸을 빛내고 내 마음을 살찌울 삶을 야무지게 일구자고 꿈을 꿉니다. 비록 매우매우 슬픈 나라에서 살아가는 넋이지만, 이토록 매우매우 슬픈 나라 한구석에 예쁘게 땀내 나는 손길 하나 있어 텃밭 조용히 일구고 있음을 우리 어여쁜 딸아이와 함께 즐기자고 꿈을 꿉니다. (4343.8.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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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풍기와 에어컨


 더운 여름날, 무척 덥게 지내야 하는 일산집에 온다. 옆지기 어버이와 식구들은 이곳 찜통 같은 곳에서 더위는 더위대로 고스란히 맞아들이면서 살아간다. 아직 다 옮기지 못해 남아 있는 인천 배다리 도서관 자리에서 잠을 잘 때에도 참 덥다고 느끼지만 일산집만 하지는 않다. 충주 산골마을 시골집에서 보내는 하루란 얼마나 시원한가. 생각해 보면, 우리 식구는 인천에서 지낼 때에 선풍기를 써 본 일이 없다. 나는 혼자 살던 때에도 선풍기를 쓰지 않았다. 마땅한 소리인데 충주 산골마을 살림집에도 선풍기는 없다. 정 더우면 부채질을 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일 때라 할지라도 땀을 쪽 빼고 찬물로 멱을 감으며 여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지내는 가운데 볼일 때문에 새삼스레 도시로 나오며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때면 잔뜩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을 쐰다. 가게마다 내내 틀어대는 에어컨 바람을 맞는다. 식구들이 함께 움직이다 보면, 아이와 아이 어머니가 몹시 고단하다. 아이 아버지 또한 고단하지만 아이만큼 고단할 수 없다. 아이 아버지도 코피를 쏟을랑 말랑인데 아이가 으레 코피를 쏟는다. 아이가 먼저 코피를 쏟으면 식구들이 좀더 빨리 쉬고 더욱 오래 쉬곤 한다. 아이는 틀림없이 고단하기 때문에 코피가 터지는데, 아이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시에 나오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든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니까’ 이 때문에 아이한테 좋을 일이 없다고 느낀다. 게다가 도시 바람은 시골 바람하고 견주면 얼마나 안 좋은가.

 그렇지만 도시에서는 선풍기나 에어컨을 안 쓸 수 없다. 도시가 되니까. 상큼하거나 맑은 바람이란 없으니까. 시원하거나 깨끗한 물이란 없으니까. 도시에서 흐르는 수도물은 시원하지 않고 땀을 씻어 주지 못하니까. 도시에서 부는 바람은 한동안은 땀을 식히는 듯하지만 가게와 집과 일터마다 틀어놓는 에어컨이 내뿜는 뜨거움 때문에 다시금 흐르는 땀을 어찌하지 못하니까.

 이런 도시에서만 지내고 있으면 아무래도 물질과 기계와 자동차를 안 쓸 수 없다. 이런 도시에서 돈을 벌며 살아가고 있다면 참말 돈이랑 주식이랑 투자랑 스포츠에 눈을 안 둘 수 없겠다. 스스로 기쁘게 받아들이며 고이 나눌 수 있는 길하고 자꾸자꾸 동떨어지고야 마는 도시 살림살이임을 거듭 깨닫는다. 마음을 살찌우거나 넋을 북돋우거나 얼을 일군다는 고운 책 하나 곁에 둘 수 없는 도시 터전임을 또렷하게 되뇐다. 갖가지 즐길거리 누릴거리 볼거리 먹을거리 넘치는 도시인데, 이도 저도 다 넘친다지만,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나눌 수 있는 맑고 밝은 숨결과 손길이란 어디에 있을까. (4343.8.1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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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입니다 - 2005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 대상 수상작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 수상작 11
이혜란 글 그림 / 보림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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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림책 하나 그리거나 내놓을 때 좀더 따스하고 참다운 사랑을 담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식구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 이혜란, 《우리 가족입니다》



 음성 읍내에 있는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찾아가고, 서울 홍제동에 있는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찾아가 보고 난 다음 옆지기 말을 곰곰이 되씹습니다. 옆지기는 중국집에 가면 밥맛이 없어 못 먹을 일이 거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웬만한 중국집이라면 퍽 괜찮다 할 만하며, 꼭 그렇지는 않다 하겠으나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찾아갈 때라면 즐겁게 한 끼를 맞아들일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인천에서 사는 동안 찾아간 중국집은 언제나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이었습니다. 한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은 애써 찾아가지 않았으며, 한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억지로 끌려 가서 밥을 먹은 뒤에는 영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사람이라 해서 짜장면이나 가락국수나 돼지고기볶은튀김을 잘 못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한국사람이 빚는 중국 밥맛하고 중국사람이 빚는 중국 밥맛은 같지 않습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중국사람이 중국땅에서 살아가는 중국사람하고 같을 수 없을 뿐더러, 중국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랑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랑 서로서로 손맛이 비슷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이고 저마다 다른 손길이며 저마다 다른 몸짓입니다. 언뜻선뜻 바라보기에는 한국땅에서 꾸리는 중국집이라면 다 같은 중국집이라 할 텐데, 곰곰이 살펴보면 한국땅에서 꾸리는 중국집이란 다 같은 중국집이 아닙니다. 중국사람이 꾸리는 중국집 느낌이나 기운을 베끼거나 따르는 한국사람 중국집이 더러 있으나 중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중국집을 마련하여 꾸리는 넋이나 몸짓을 헤아리거나 받아들이기까지는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사람 중국집에는 ‘신속배달’ 따위는 없거든요.

 ‘신속배달’을 우리 말로 옮기자면 “빨리 갖다 드립니다”입니다. 전화로 뭣뭣을 시키면 아주 빨리 갖다 주겠다는 소리인데, 중국밥이든 한국밥이든 갓 지은 다음 곧바로 먹으면 가장 맛이 있기는 하다지만, 갓 지은 밥이 꼭 갓 지은 다음에만 가장 맛있지 않습니다. 이는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에는 ‘배달 초밥’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밥을 그 자리에서 빚어 먹지 않고 ‘전화로 시킨 뒤 갖다 주어 먹도록 한다’는, 어찌 보면 참 터무니없는 소리라 할 만한 대목입니다만, 초밥을 빚을 때에 ‘몇 분 뒤에 먹는가를 헤아려 몇 분 뒤에 초밥 맛이 살아나도록 해 놓는다’면 얼마든지 ‘배달 초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속배달’이 더 맛나거나 좋은 중국밥이 아니라, ‘알맞춤한 때에 갖다 주어 알맞춤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해’야 비로소 좋은 중국밥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신속배달’에 매여 있습니다. 어느 중국집은 전화로 시킨 지 십 분이 채 되지 않아 바람처럼 갖다 줍니다. 번개처럼 갖다 준다고 하는 중국집까지 있습니다. 참 대단한 빠르기이지요. 그러나 ‘빨리 갖다 주기’만큼 ‘시켜서 먹는 밥맛’을 살피고 있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가게에서 받아 먹을 때하고 시켜서 먹을 때하고 맛이 같다면 이런 밥집에서는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느끼지만, 이를 곱씹는 사람을 만나기는 힘듭니다.

 우리 식구는 한국사람 중국집에 굳이 찾아가지 않습니다. 밥 한 그릇 사먹는다 할 때에 어디이든 맛집을 찾아가도 나쁠 일은 없습니다만, ‘신속배달’이라든지 ‘친절봉사’를 살피는 한국사람 중국집보다는 ‘제맛’과 ‘참맛’을 살피는 중국사람 중국집이 한결 낫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중국사람 중국집’이 그러하지는 않으나, 따로 ‘신속배달’은커녕 ‘느린배달’조차 하지 않는 중국집을 좋아합니다. 장사가 잘되어 요리사를 더 두거나 가게를 늘릴 만하지만 요리사를 더 두거나 가게를 늘릴 꿈은 키우지 않고 ‘사람이 많이 찾아 북적대’면 외려 쉬는 날을 마련해 아예 가게 문을 안 여는 날을 두는 중국사람 중국집이 반갑습니다. 참말 중국사람다운 중국집으로 꾸미고, 중국사람이 빚는 중국밥을 내놓으며, 중국밥에 어린 맛을 꾸밈없이 느끼도록 이끄는 중국사람 중국집이 즐겁습니다.

 우리 식구는 한정식집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딱히 반기지도 않습니다. 애써 찾아가지 않을 뿐입니다. 한국사람한테는 한국밥이라지만, 바깥밥으로 사먹을 ‘한국밥집’ 가운데 참다운 한국밥맛을 느끼도록 해 주는 곳이란 몹시 드물기 때문입니다.

 궁중에서 임금님이 먹던 밥이 한국밥일까요. 농사꾼이 들판에서 먹는 밥이 한국밥일까요. 양반이 먹던 밥이, 고관대작이라는 분이 먹던 밥이, 서울 궁궐 안쪽에 살던 사람이 먹던 밥이, 사또나 이방 같은 분이 먹던 밥이 한국밥일까요. 달동네를 이루며 살아가던 사람이 먹던 밥이 한국밥일까요. 이 땅에서는 어떤 밥을 두고 한국밥이라 할 만하며, 어떻게 가게를 꾸미거나 일구어야 한국밥집이라 할 만할까요.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를 펼칩니다. ‘한국사람이 꾸리는 중국집’ 식구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림책입니다. 갑작스레 찾아와 군식구로 지내는 할머니를 사이에 놓고 온갖 이야기가 벌어집니다. 그린이 이혜란 님은 책 끝에 붙인 그린이 한 마디에 “아버지는 자신을 버린 할머니를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억울해 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으셨어요. 그저 한 마디. ‘부몬데 우짤 끼고.’ 그뿐이었지요.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아버지의 상처를 이해하셨습니다. 그런 두 분과 할머니를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하고 적바림합니다.

 이 말마따나 그린이 어머니는 아버지를 헤아렸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러면 그린이 아버지 또한 할머니를 헤아렸을까 궁금합니다. “묵묵히 받아들”였다고 적바림했지만, 죽을 날을 앞두고 아들 집에 찾아온 할머니한테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주고 똥을 치워 주는 일이 ‘받아들이기’라고는 여길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부몬데 우짤 끼고.”처럼 뒤치다꺼리만 해 주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뒤치다꺼리를 해 준다고 받아들이는 삶은 아닙니다. 받아들이는 삶이란 사랑하는 삶이고, 사랑하는 삶이란 ‘부모가 아니라도 우짤 끼고.’까지 넘어서면서 ‘넌 우짤 낀데?’이며, 한 걸음 나아가 ‘니 할머니 아닌가? 니 아버지한테 어머니 아닌가?’입니다.

 그린이 이혜란 님은 “저희 아버지는 엄마의 사랑이라는 걸 모르고 자라셨어요.” 하는 덧말을 붙입니다. 저 또한 퍽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해 왔고, 아직 이런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처럼 어리석을 뿐 아니라 엉터리요 어줍잖은 생각이란 없습니다. 사랑이 없이 태어나는 아이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태어날 아이는 하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온누리 모든 아이는 바로 사랑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숨을 거둔 어머니라 할지라도 아이한테 사랑을 베풉니다. 아이를 낳기 무섭게 입양을 보내야 한 어머니여도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줍니다. 아이를 낳고 아주 어릴 때에 다른 이한테 넘긴 어머니일지라도 아이한테 사랑을 나누어 놓습니다. 아주 손쉬워서 그러한지 모르나 사람들이 아주 손쉽게 잊는데, 모든 사람 몸뚱이는 바로 어머니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머니가 피를 바치고 살을 바쳐 아이가 열 달 동안 어머니 몸에서 무럭무럭 컸고, 어머니 살을 찢으며 이 누리에 나왔으며, 어머니 젖을 물고(또는 다른 엄마 젖을 물고) 목숨을 잇는 가운데 아이를 거쳐 어른으로 자랍니다. 나한테 장애가 많아 갓난아기 적부터 늘 누워 지내든 잔병치레가 잦아 골골거리든 나는 나한테 고맙고 고운 목숨을 선물해 준 어머니 사랑을 어느 한때라도 잊거나 잃을 수 없어요. “엄마 사랑을 모르고 자랄” 사람이란 이 땅에 하나도 없습니다.

 엄마 사랑을 모른다면, 못 느끼거나 모르는 사람이 잘못입니다. 대학교 등록금까지 바쳐 주어야 엄마 사랑이 되겠습니까. 자가용 사 주고 아파르를 마련해 주며 시집장가를 보내야 엄마 사랑이 될까요. 초·중·고등학교를 걱정없이 다니도록 하거나 학원을 알뜰히 챙겨 주어야 엄마 사랑이 되나요. 엄마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엄마는 아이한테 무슨 사랑을 주어야 하나요.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는 ‘할머니를 돌보는 부모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아이들이 커 나가는 흐름’을 보여주는 가운데 ‘할머니란 존재가 싫어하고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고 껴안아야 할 가엾고도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도록 이끈다(출판사에서 쓴 소개글)고 합니다. 이러한 줄거리로 여길 만하겠구나 싶은 한편,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가 참말 할머니를 우리 식구로 받아들이며 사랑하거나 아끼는가를 곱씹는다면 ‘글쎄,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우리 식구입니다!” 하고 외친다 해서 우리 식구이지는 않습니다. “우리 식구”라 말하기 앞서 “우리 사랑스러운 할머니예요.” 하고 말해야 하며, “우리 고마운 어머니예요.” 하고 말해야 할 테고, “우리 예쁜 아버지예요.”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도록 내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를 넘기면, 주인공 아버지는 할머니를 ‘돌보지’ 않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이 그림책에서 주인공 아버지는 할머니를 돌보지 않아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뒤치다꺼리’만 합니다. (하루쯤 가게 문을 닫고는) 할머니를 모시어 바닷가로 마실을 다닌다든지 할머니랑 함께 짜장면을 볶는다든지, 할머니하고 뒹굴면서 ‘할머니가 눈 똥오줌 이불’ 빨래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일이 벌어지고 나서’ 뒤에서 치우기만 할 뿐이요, 뒤에서 치우면서도 웃음 한 번 없는데다가, 주인공인 어린이가 ‘할머니 싫어!’ 하고 외칠 때에 아버지가 비로소 힘겨운 몸짓으로 갈무리를 맡고 있습니다.

 바쁘디바쁜 중국집을 꾸리느라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리라 느낍니다. 이제 막 두 돌을 지낸 딸아이를 키우면서 몸아픈 옆지기하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돌아보노라면 저 스스로 《우리 가족입니다》에 나오는 주인공 아버지처럼 ‘뒤치다꺼리’에 매여 휩쓸리지, 처음부터 기쁘게 웃음짓고 나서며 ‘손잡기와 어깨동무’를 하기가 만만하지 않아요. 아이 엄마는 저보고 ‘벼리야, 아빠가 또 낯 찌푸린다!’ 하고 말하는데, 스스로 먼저 기쁘게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치다꺼리만 하고 있으니 웃음에 앞서 이맛살입니다.

 이 책 《우리 가족입니다》 뒤쪽에는 띠종이가 붙으며 세 사람 추천글이 적혀 있습니다. 변산에서 농부로 일한다는 윤구병 님은 “삶의 진실을 아이들에게 제대로 알려 주려는 작가의 진지한 열정이 돋보인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생각한다면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린이 이혜란 님이 우리한테 보여주고자 하는 “삶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고단하고 지친 나머지 뒤치다꺼리에 매여 할머니한테 참다운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가운데 그냥 “우리 식구입니다!” 하고 외치는 한 마디가 “삶의 진실”이려나요. 다른 두 분은 “탄탄하게 짜인 다층 구조의 시각 연출이 뛰어난 작품”(박혜준)이라고 말하고, “현실에 발 딛은 이야기, 그는 그림으로 진실을 말하는 법을 안다”(이성표)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한테 좋을 그림책이란, 또한 아이들한테 보여줄 그림책을 장만하여 함께 읽으며 기뻐할 우리 어른들한테 괜찮을 그림책이란 ‘삶의 진실 + 다층 구조 + 시각 연출 + 현실에 발 딛은 + 진실을 말하는’으로 짜 놓으면 될 노릇인가 궁금합니다. 어떤 삶이며 어떤 사람이고 어떤 넋인가를 다스리지 못한 가운데 섣불리 외치는 목소리로 어떻게 사람들 가슴에 참되고 착하며 고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삶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삶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일쑤이고, 모든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났으나 사랑을 헤아리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우리 스스로 나를 참다이 사랑하지 못하고 있으니 더 너르거나 깊은 사랑으로 뻗지 못하는 셈이 아닌가 싶은데, 우리는 누구보다 나를 깊고 널리 사랑해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나를 사랑해야 나를 낳거나 기른 어버이 넋에 얼마나 깊고 너른 사랑이 스며 있는가를 깨닫습니다. 나 스스로 나부터 사랑해야 내가 섬길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알라님 같은 거룩한 넋이 베푸는 뜻을 읽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착하게 사랑해야 내 이웃과 동무 삶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곱게 사랑하고 있으면 내 살붙이와 어우러지는 한삶이 얼마나 기쁘며 멋진가를 깨달아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참다우며 착하고 고운 사랑을 담아야 비로소 그림책이고, 바야흐로 문학이며, 시나브로 예술입니다. (4343.8.18.물.ㅎㄲㅅㄱ)


― 우리 가족입니다 (이혜란,보림,2005.10.15./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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