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입니다 - 2005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 대상 수상작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 수상작 11
이혜란 글 그림 / 보림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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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림책 하나 그리거나 내놓을 때 좀더 따스하고 참다운 사랑을 담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식구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 이혜란, 《우리 가족입니다》



 음성 읍내에 있는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찾아가고, 서울 홍제동에 있는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찾아가 보고 난 다음 옆지기 말을 곰곰이 되씹습니다. 옆지기는 중국집에 가면 밥맛이 없어 못 먹을 일이 거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웬만한 중국집이라면 퍽 괜찮다 할 만하며, 꼭 그렇지는 않다 하겠으나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찾아갈 때라면 즐겁게 한 끼를 맞아들일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인천에서 사는 동안 찾아간 중국집은 언제나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이었습니다. 한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은 애써 찾아가지 않았으며, 한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억지로 끌려 가서 밥을 먹은 뒤에는 영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사람이라 해서 짜장면이나 가락국수나 돼지고기볶은튀김을 잘 못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한국사람이 빚는 중국 밥맛하고 중국사람이 빚는 중국 밥맛은 같지 않습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중국사람이 중국땅에서 살아가는 중국사람하고 같을 수 없을 뿐더러, 중국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랑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랑 서로서로 손맛이 비슷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이고 저마다 다른 손길이며 저마다 다른 몸짓입니다. 언뜻선뜻 바라보기에는 한국땅에서 꾸리는 중국집이라면 다 같은 중국집이라 할 텐데, 곰곰이 살펴보면 한국땅에서 꾸리는 중국집이란 다 같은 중국집이 아닙니다. 중국사람이 꾸리는 중국집 느낌이나 기운을 베끼거나 따르는 한국사람 중국집이 더러 있으나 중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중국집을 마련하여 꾸리는 넋이나 몸짓을 헤아리거나 받아들이기까지는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사람 중국집에는 ‘신속배달’ 따위는 없거든요.

 ‘신속배달’을 우리 말로 옮기자면 “빨리 갖다 드립니다”입니다. 전화로 뭣뭣을 시키면 아주 빨리 갖다 주겠다는 소리인데, 중국밥이든 한국밥이든 갓 지은 다음 곧바로 먹으면 가장 맛이 있기는 하다지만, 갓 지은 밥이 꼭 갓 지은 다음에만 가장 맛있지 않습니다. 이는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에는 ‘배달 초밥’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밥을 그 자리에서 빚어 먹지 않고 ‘전화로 시킨 뒤 갖다 주어 먹도록 한다’는, 어찌 보면 참 터무니없는 소리라 할 만한 대목입니다만, 초밥을 빚을 때에 ‘몇 분 뒤에 먹는가를 헤아려 몇 분 뒤에 초밥 맛이 살아나도록 해 놓는다’면 얼마든지 ‘배달 초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속배달’이 더 맛나거나 좋은 중국밥이 아니라, ‘알맞춤한 때에 갖다 주어 알맞춤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해’야 비로소 좋은 중국밥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신속배달’에 매여 있습니다. 어느 중국집은 전화로 시킨 지 십 분이 채 되지 않아 바람처럼 갖다 줍니다. 번개처럼 갖다 준다고 하는 중국집까지 있습니다. 참 대단한 빠르기이지요. 그러나 ‘빨리 갖다 주기’만큼 ‘시켜서 먹는 밥맛’을 살피고 있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가게에서 받아 먹을 때하고 시켜서 먹을 때하고 맛이 같다면 이런 밥집에서는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느끼지만, 이를 곱씹는 사람을 만나기는 힘듭니다.

 우리 식구는 한국사람 중국집에 굳이 찾아가지 않습니다. 밥 한 그릇 사먹는다 할 때에 어디이든 맛집을 찾아가도 나쁠 일은 없습니다만, ‘신속배달’이라든지 ‘친절봉사’를 살피는 한국사람 중국집보다는 ‘제맛’과 ‘참맛’을 살피는 중국사람 중국집이 한결 낫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중국사람 중국집’이 그러하지는 않으나, 따로 ‘신속배달’은커녕 ‘느린배달’조차 하지 않는 중국집을 좋아합니다. 장사가 잘되어 요리사를 더 두거나 가게를 늘릴 만하지만 요리사를 더 두거나 가게를 늘릴 꿈은 키우지 않고 ‘사람이 많이 찾아 북적대’면 외려 쉬는 날을 마련해 아예 가게 문을 안 여는 날을 두는 중국사람 중국집이 반갑습니다. 참말 중국사람다운 중국집으로 꾸미고, 중국사람이 빚는 중국밥을 내놓으며, 중국밥에 어린 맛을 꾸밈없이 느끼도록 이끄는 중국사람 중국집이 즐겁습니다.

 우리 식구는 한정식집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딱히 반기지도 않습니다. 애써 찾아가지 않을 뿐입니다. 한국사람한테는 한국밥이라지만, 바깥밥으로 사먹을 ‘한국밥집’ 가운데 참다운 한국밥맛을 느끼도록 해 주는 곳이란 몹시 드물기 때문입니다.

 궁중에서 임금님이 먹던 밥이 한국밥일까요. 농사꾼이 들판에서 먹는 밥이 한국밥일까요. 양반이 먹던 밥이, 고관대작이라는 분이 먹던 밥이, 서울 궁궐 안쪽에 살던 사람이 먹던 밥이, 사또나 이방 같은 분이 먹던 밥이 한국밥일까요. 달동네를 이루며 살아가던 사람이 먹던 밥이 한국밥일까요. 이 땅에서는 어떤 밥을 두고 한국밥이라 할 만하며, 어떻게 가게를 꾸미거나 일구어야 한국밥집이라 할 만할까요.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를 펼칩니다. ‘한국사람이 꾸리는 중국집’ 식구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림책입니다. 갑작스레 찾아와 군식구로 지내는 할머니를 사이에 놓고 온갖 이야기가 벌어집니다. 그린이 이혜란 님은 책 끝에 붙인 그린이 한 마디에 “아버지는 자신을 버린 할머니를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억울해 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으셨어요. 그저 한 마디. ‘부몬데 우짤 끼고.’ 그뿐이었지요.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아버지의 상처를 이해하셨습니다. 그런 두 분과 할머니를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하고 적바림합니다.

 이 말마따나 그린이 어머니는 아버지를 헤아렸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러면 그린이 아버지 또한 할머니를 헤아렸을까 궁금합니다. “묵묵히 받아들”였다고 적바림했지만, 죽을 날을 앞두고 아들 집에 찾아온 할머니한테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주고 똥을 치워 주는 일이 ‘받아들이기’라고는 여길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부몬데 우짤 끼고.”처럼 뒤치다꺼리만 해 주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뒤치다꺼리를 해 준다고 받아들이는 삶은 아닙니다. 받아들이는 삶이란 사랑하는 삶이고, 사랑하는 삶이란 ‘부모가 아니라도 우짤 끼고.’까지 넘어서면서 ‘넌 우짤 낀데?’이며, 한 걸음 나아가 ‘니 할머니 아닌가? 니 아버지한테 어머니 아닌가?’입니다.

 그린이 이혜란 님은 “저희 아버지는 엄마의 사랑이라는 걸 모르고 자라셨어요.” 하는 덧말을 붙입니다. 저 또한 퍽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해 왔고, 아직 이런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처럼 어리석을 뿐 아니라 엉터리요 어줍잖은 생각이란 없습니다. 사랑이 없이 태어나는 아이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태어날 아이는 하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온누리 모든 아이는 바로 사랑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숨을 거둔 어머니라 할지라도 아이한테 사랑을 베풉니다. 아이를 낳기 무섭게 입양을 보내야 한 어머니여도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줍니다. 아이를 낳고 아주 어릴 때에 다른 이한테 넘긴 어머니일지라도 아이한테 사랑을 나누어 놓습니다. 아주 손쉬워서 그러한지 모르나 사람들이 아주 손쉽게 잊는데, 모든 사람 몸뚱이는 바로 어머니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머니가 피를 바치고 살을 바쳐 아이가 열 달 동안 어머니 몸에서 무럭무럭 컸고, 어머니 살을 찢으며 이 누리에 나왔으며, 어머니 젖을 물고(또는 다른 엄마 젖을 물고) 목숨을 잇는 가운데 아이를 거쳐 어른으로 자랍니다. 나한테 장애가 많아 갓난아기 적부터 늘 누워 지내든 잔병치레가 잦아 골골거리든 나는 나한테 고맙고 고운 목숨을 선물해 준 어머니 사랑을 어느 한때라도 잊거나 잃을 수 없어요. “엄마 사랑을 모르고 자랄” 사람이란 이 땅에 하나도 없습니다.

 엄마 사랑을 모른다면, 못 느끼거나 모르는 사람이 잘못입니다. 대학교 등록금까지 바쳐 주어야 엄마 사랑이 되겠습니까. 자가용 사 주고 아파르를 마련해 주며 시집장가를 보내야 엄마 사랑이 될까요. 초·중·고등학교를 걱정없이 다니도록 하거나 학원을 알뜰히 챙겨 주어야 엄마 사랑이 되나요. 엄마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엄마는 아이한테 무슨 사랑을 주어야 하나요.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는 ‘할머니를 돌보는 부모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아이들이 커 나가는 흐름’을 보여주는 가운데 ‘할머니란 존재가 싫어하고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고 껴안아야 할 가엾고도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도록 이끈다(출판사에서 쓴 소개글)고 합니다. 이러한 줄거리로 여길 만하겠구나 싶은 한편,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가 참말 할머니를 우리 식구로 받아들이며 사랑하거나 아끼는가를 곱씹는다면 ‘글쎄,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우리 식구입니다!” 하고 외친다 해서 우리 식구이지는 않습니다. “우리 식구”라 말하기 앞서 “우리 사랑스러운 할머니예요.” 하고 말해야 하며, “우리 고마운 어머니예요.” 하고 말해야 할 테고, “우리 예쁜 아버지예요.”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도록 내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를 넘기면, 주인공 아버지는 할머니를 ‘돌보지’ 않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이 그림책에서 주인공 아버지는 할머니를 돌보지 않아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뒤치다꺼리’만 합니다. (하루쯤 가게 문을 닫고는) 할머니를 모시어 바닷가로 마실을 다닌다든지 할머니랑 함께 짜장면을 볶는다든지, 할머니하고 뒹굴면서 ‘할머니가 눈 똥오줌 이불’ 빨래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일이 벌어지고 나서’ 뒤에서 치우기만 할 뿐이요, 뒤에서 치우면서도 웃음 한 번 없는데다가, 주인공인 어린이가 ‘할머니 싫어!’ 하고 외칠 때에 아버지가 비로소 힘겨운 몸짓으로 갈무리를 맡고 있습니다.

 바쁘디바쁜 중국집을 꾸리느라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리라 느낍니다. 이제 막 두 돌을 지낸 딸아이를 키우면서 몸아픈 옆지기하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돌아보노라면 저 스스로 《우리 가족입니다》에 나오는 주인공 아버지처럼 ‘뒤치다꺼리’에 매여 휩쓸리지, 처음부터 기쁘게 웃음짓고 나서며 ‘손잡기와 어깨동무’를 하기가 만만하지 않아요. 아이 엄마는 저보고 ‘벼리야, 아빠가 또 낯 찌푸린다!’ 하고 말하는데, 스스로 먼저 기쁘게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치다꺼리만 하고 있으니 웃음에 앞서 이맛살입니다.

 이 책 《우리 가족입니다》 뒤쪽에는 띠종이가 붙으며 세 사람 추천글이 적혀 있습니다. 변산에서 농부로 일한다는 윤구병 님은 “삶의 진실을 아이들에게 제대로 알려 주려는 작가의 진지한 열정이 돋보인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생각한다면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린이 이혜란 님이 우리한테 보여주고자 하는 “삶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고단하고 지친 나머지 뒤치다꺼리에 매여 할머니한테 참다운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가운데 그냥 “우리 식구입니다!” 하고 외치는 한 마디가 “삶의 진실”이려나요. 다른 두 분은 “탄탄하게 짜인 다층 구조의 시각 연출이 뛰어난 작품”(박혜준)이라고 말하고, “현실에 발 딛은 이야기, 그는 그림으로 진실을 말하는 법을 안다”(이성표)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한테 좋을 그림책이란, 또한 아이들한테 보여줄 그림책을 장만하여 함께 읽으며 기뻐할 우리 어른들한테 괜찮을 그림책이란 ‘삶의 진실 + 다층 구조 + 시각 연출 + 현실에 발 딛은 + 진실을 말하는’으로 짜 놓으면 될 노릇인가 궁금합니다. 어떤 삶이며 어떤 사람이고 어떤 넋인가를 다스리지 못한 가운데 섣불리 외치는 목소리로 어떻게 사람들 가슴에 참되고 착하며 고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삶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삶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일쑤이고, 모든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났으나 사랑을 헤아리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우리 스스로 나를 참다이 사랑하지 못하고 있으니 더 너르거나 깊은 사랑으로 뻗지 못하는 셈이 아닌가 싶은데, 우리는 누구보다 나를 깊고 널리 사랑해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나를 사랑해야 나를 낳거나 기른 어버이 넋에 얼마나 깊고 너른 사랑이 스며 있는가를 깨닫습니다. 나 스스로 나부터 사랑해야 내가 섬길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알라님 같은 거룩한 넋이 베푸는 뜻을 읽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착하게 사랑해야 내 이웃과 동무 삶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곱게 사랑하고 있으면 내 살붙이와 어우러지는 한삶이 얼마나 기쁘며 멋진가를 깨달아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참다우며 착하고 고운 사랑을 담아야 비로소 그림책이고, 바야흐로 문학이며, 시나브로 예술입니다. (4343.8.18.물.ㅎㄲㅅㄱ)


― 우리 가족입니다 (이혜란,보림,2005.10.15./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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